“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3

입력 : ㅣ 수정 : 2018-11-04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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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발굴 조선 첩보소설 ‘황제 납치 프로젝트’
서울신문은 대한제국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찾았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작가가 조선과 일본에 머물며 직접 취재해 쓴 이들 소설에는 고종의 해외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이 담겨 있어 관심을 모읍니다. 대한제국이 배경인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먼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

<3회>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고종의 초상화. 네델란드 출신 미국 화가 휘베르트 보스가 그렸다. 이 소설에서 고종은 늘 우유부단하고 미신에 지나치게 집착해 중요한 결정을 그르치는 인물로 묘사됐는데, 이는 당시 서양인들의 기록에 나타나는 고종의 모습과 일치한다. 서울신문 DB

▲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고종의 초상화. 네델란드 출신 미국 화가 휘베르트 보스가 그렸다. 이 소설에서 고종은 늘 우유부단하고 미신에 지나치게 집착해 중요한 결정을 그르치는 인물로 묘사됐는데, 이는 당시 서양인들의 기록에 나타나는 고종의 모습과 일치한다. 서울신문 DB



“저는 조선 황제를 납치해 상하이로 데려 가려고 서울에 왔습니다.”

소녀가 웃음기없는 얼굴로 똑똑히 말했다. 나는 이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의 반응을 살피던 베델(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눈도 반짝거렸다. 그는 고개를 힘있게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나는 짖궃게 악의없는 농담을 섞어 물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충격적인 제안이었으니까.

“이게 다는 아니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내 반응이 너무 경솔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듯 작은 꾸짖음이 담겨 있었다.

“제가 좀 더 설명할게요. 베델씨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방금 이름을 알려드린 그분(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됨)은 앞으로 3주쯤 뒤 일본이 조선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매우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서 황제에게 무력시위를 할 것이라는 것도.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의 보호령 문서에 서명을 받아내기 위해서죠. 일본은 이미 영국과 미국에 이 사실을 알렸고, 두 나라는 조선 황제가 자발적으로 보호령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본과 말을 맞춰놓은 상태입니다.”

소녀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는 영국과 미국이 아닌 다른 열강들이 마지막 걸림돌이예요. 독일과 러시아가 대표적이죠. 이들 역시 조선과 같은 약소국을 자신들의 통제권에 두고 싶어하니까요. 이 때문에 이들은 조선이 스스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길 원한다고 명확히 밝히지 않는 이상 지금 상황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에요.”

모든 문이 잠겨있는 이 방 안에서 가장 빛나는 눈을 가진 여성이 러시아를 대신해 우리에게 비밀 임무를 전달하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러시아는 최근 일본과의 전쟁(러일전쟁)에서 패배해 사실상 한반도 지배권을 빼앗겼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어떻게든 일본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다면 러시아로서는 적국인 일본의 대륙 침략 시도를 막아낼 수 있어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자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 서울신문 DB

▲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자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 서울신문 DB

소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조선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가지러 조선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이미 허버트(‘고종의 밀사’로 불리던 호머 허버트 1863~1949)를 미국 루즈벨트(시어도어 루즈벨트 1958~1919) 대통령에게 보내 이를 막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성과가 없었어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예요. 이토가 황제를 겁박해 서명을 얻어내려 해도 그 문서에 옥새가 찍혀있지 않으면 일본은 대한제국을 접수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죠. 조선이 진심으로 일본의 보호를 원해서 조약을 체결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의혹이 퍼지면 독일과 러시아가 반드시 이 부분을 걸고 넘어질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물었다.

“하지만 왕이 옥새를 찍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요? 그랬다가는 이토가 자신을 죽이고 새 왕을 세울 수도 있다고 생각할텐데...”

소녀의 눈빛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그래서요...그러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소녀가 내 표정을 읽은 듯 힘있게 대답했다.

“그래서 러시아가 조선 황제를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모험을 제안하는 겁니다. 황제가 조선을 빠져 나오면 일본은 조약 문서에 옥새를 찍을 수 없어요. 그가 외국에 나가 있으니 죽일 수도 없겠죠. 이쯤되면 독일과 러시아는 “도대체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따질 것이고, 일본은 전 세계 언론의 비난을 사겠죠. 두 분 다 아시겠지만 아직 일본은 다른 열강보다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요. 국제여론을 악화시켜가면서 불 속에 뛰어드는 짓(을사늑약 체결)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요.”

소녀는 멋진 머리를 뒤로 젖히며 조용하지만 진심을 담아 웃음지었다. 커다란 보라색 눈이 더욱 도드라졌다.
이 소설의 배경인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고종 황제가 1906년 5월 독일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 당시 독일과 러시아는 조선이 일본의 지배력 하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위 사진은 정상수 명지대 교수가 제공한 밀서의 사본을 이어 붙인 것이다. 서울신문 DB

▲ 이 소설의 배경인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고종 황제가 1906년 5월 독일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 당시 독일과 러시아는 조선이 일본의 지배력 하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위 사진은 정상수 명지대 교수가 제공한 밀서의 사본을 이어 붙인 것이다. 서울신문 DB

“제 말이 꼭 숨은 역사를 설명하는 교수의 강의처럼 들리시나 보네요. 아무튼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조만간 보게 될 거예요. 상하이에 계신 그 분은 제가 두 분같은 ‘젠틀맨’(의로운 일에 자신의 목숨까지 거는 신사도 정신의 소유자)과 힘을 합쳐 이 일을 해낼 것으로 확신해 큰 게임을 시작했어요. 제가 상하이를 떠나기 전날 밤 그분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것이었어요. ‘가서 베델을 만나라. 그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요.”

‘황제 납치 프로젝트’는 4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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