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사회면] 교통지옥/손성진 논설고문

입력 : ㅣ 수정 : 2018-08-27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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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 버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승객들(경향신문 1969년 9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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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원 버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승객들(경향신문 1969년 9월 2일자).

인구 증가 속도에 비해 도로망과 교통수단 확충은 더디기만 해 1960~70년대의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 교통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요즈음 서울 시내 러시아워의 교통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이루고 있다. 특히 전차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바구니 없이 승객이 짐짝처럼 쌓이고….”(동아일보 1961년 10월 17일자)

기사에서 보듯 ‘교통지옥’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당시 300만 서울 시민에게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 800여대와 전차 200대가 전부였다. 도로 사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버스는 툭하면 고장 나 운행 중에도 멈춰 서곤 했다. 정류장마다 버스를 타려는 승객이 수십 명씩 장사진을 치고 있고, 버스가 도착하면 서로 먼저 타려고 밀치며 아우성을 쳤다. 출근 시간에 쫓긴 승객들은 버스를 먼저 타려고 필사적인 경쟁을 벌였고, 때로는 떼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버스는 정류장에 아예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기도 했고, 승객들은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외무부 공무원 13명이 한날 아침에 지각해 장관이 사표를 종용한 해프닝도 있었다(동아일보 1966년 3월 9일자). 퇴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난장판 속에서 여성들이나 어린 학생들은 몸싸움에서 밀려나 버스를 대여섯 대씩 보내기 일쑤였다(경향신문 1962년 4월 7일자).

정원을 초과한 탑승은 늘 있었다. 초만원 버스는 유리창이 깨지고 브레이크 파열로 고갯길에서 전복 사고를 내기도 했다. 전차도 정원은 120명이었는데 보통 300명이 넘게 탔고, 그러다 보니 전차문이 터져 열리는 바람에 승객이 중상을 입는 사고도 잇따랐다. 사고를 우려한 당국은 정원 초과를 단속했는데 이는 수송난을 더 부채질했다. 남자 차장을 그때 여자로 바꾼 것은 그런 교통지옥에서 손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때론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 차장도 시간이 지나며 남자처럼 우악스러워졌다. 교통부 장관이나 서울시장은 러시아워에 직접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타고 교통지옥을 체험하면서 해소 방안을 고민했지만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공무원과 학생의 출근과 등교 시간에 시차를 둬 교통 인구를 분산시켜 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울 인구는 10여년 만에 두 배로 늘어 1970년대 초에 600만명을 넘어섰다. 1966년 부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은 버스를 대폭 증차하고 도로교통망을 크게 확충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를 따라잡기 어려웠다. 교통난 해소에 다소나마 숨통을 트기까지는 1974년 개통된 지하철 시대를 기다려야 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2018-08-2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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