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약소국의 외교란 ‘유리 공을 가지고 노는 일’/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

입력 : ㅣ 수정 : 2018-07-22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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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비잔틴 멸망 이후 베네치아는 강력한 적 오스만튀르크의 위협에 정면으로 노출됐다. 인구 10만명 남짓한 도시국가인 베테치아와 달리 오스만튀르크는 1000만명이 넘는 인구와 전원 노예병으로 이뤄진 예니체리 군단 등 강대한 군사력을 지녔기에 베네치아는 육상 전투에서는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다.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

▲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

물론 해전에서는 판세가 달랐다. 1416년의 갈리폴리 전투, 그리고 1571년의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해군을 연이어 쳐부수며, 약간 유리한 위치에서 평화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해전 승리에도 베네치아가 ‘약간 유리한’ 정도의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업국가였기 때문이다. 즉 전쟁을 오래 할수록 국가의 재정은 말라 버리며 상거래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반면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그리스, 헝가리, 이집트와 소아시아로 이어지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기에 베네치아와의 전쟁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에 보내는 대사에게는 항상 신중한 대처가 당부됐다.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부의 도시 베네치아’에서는 튀르크와의 외교 협상을 ‘유리 공을 갖고 노는 것’에 비유한다.

“상대방이 유리 공을 세게 던지면 같이 세게 던져 주거나 땅에 떨어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유리 공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한국인의 가슴을 울리는 뒷맛이 있다. 2016년 말 한국에 사드(THAAD) 배치가 이뤄진 이후 한국으로 오던 중국 관광객은 820만명에서 400만명 아래로 줄어들어 한국 내수 경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2017년 현대경제연구원이 발간한 ‘사드 갈등 장기화에 따른 국내 관광산업 손실 규모 추정’에 따르면 총 40만명의 취업 손실이 발생했고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만 한 해에 156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2017년의 환율로 환산해 보면 대략 17조 7000억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2017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1730조원이라는 것을 가만하면 대략 GDP의 1%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한 셈이다. 특히 이런 직접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중국 관광객이 한국에 돈을 쓰면서 발생하는 이른바 ‘후방효과’까지 감안하면 GDP의 2% 가까운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2017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내수경기의 침체, 그리고 고용부진 현상이 어디서 촉발됐는지를 정확하게 구분할 방법은 없다. 어떤 이들은 건설 경기가 위축된 것에서 원인을 찾으며, 또 다른 쪽에서는 조선 경기가 심각한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동남해안 산업 단지가 얼어붙은 것이 더 큰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필자 역시 이상의 요인과 ‘중국 관광객’ 문제 중 어떤 게 더 큰 영향을 미쳤는지 구분할 능력은 없다. 다만 중국 관광객이 1000만명을 돌파한 다음에도 이렇게 내수경기가 얼어붙고 고용이 부진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다시 베네치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수천 명의 인력을 소모한 후 오스만튀르크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 로마 교황청의 강경파들은 베네치아를 파문하겠다고 을러댔다. 이에 교황청에 파견된 베네치아 대사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로마에서 제기된 비난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희는 항상 의무를 다했습니다. 1416년 가리폴리의 승전을 기억하십시오. 당시 튀르크 함대는 거의 전멸했습니다. (중략) 1444년에서 1445년 사이에 배를 무장시키고 겨울 내내 작전 상태에 돌입했습니다만, 교황님은 약속했던 것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비방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튀르크가 압박을 가하고 있음을 숙고하셔야 합니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양대 강대국에 끼인 한국의 신세와 너무나 비슷하다. 2016년 사드 배치 이후 한국이 얻은 것은 어떤 게 있을까? 미국의 신뢰? 그런데 왜 지금 무역전쟁의 파고 속에서 한국산 제품들이 자꾸 ‘보복 관세’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걸까?

약소국의, 그것도 무역에 의존해 살아가는 나라의 외교에 대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사가 남긴 이야기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2018-07-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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