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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사회면] 기생충과의 전쟁/손성진 논설주간

[그때의 사회면] 기생충과의 전쟁/손성진 논설주간

입력 2017-11-12 17:32
업데이트 2017-11-1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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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학교 급식에서 고래 회충이 발견돼 충격을 주었다. 1970년대 초까지 국민 열 중 여덟아홉은 기생충에 감염돼 있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감염 실태를 조사해 처음 발표한 때는 1967년 8월이었다. 당시의 국민 감염률은 80%로 발표됐지만 98%라는 통계도 있다. 회충과 편충(감염률 80%), 요충(40%)이 3대 기생충이었다. 정부는 이후 약 5년 단위로 기생충 감염률을 발표하고 있는데 1971년 84.3%, 1976년 63.2%, 1981년 41.1%, 1986년 12.9%, 2012년 2.6%로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 지금은 회충이나 편충 감염자보다 간흡충이나 개회충 감염자가 더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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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회충이나 편충 감염자가 많았던 절대적 원인은 인분 비료다. 회충이나 편충은 토양 매개성 기생충으로 기생충 알이 인분 비료에 섞여 있다가 채소를 통해 다시 인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1964년 어느 날 전북 전주의 한 병원에 9세 소녀가 장폐색으로 입원했는데 놀랍게도 뱃속에서 회충 1063마리가 나왔다. 소녀의 몸무게는 20㎏이었는데 회충 무게가 5㎏이나 됐다. 소녀는 사망하고 말았는데 이처럼 기생충에 감염돼 사망하는 사람이 한 해에 2000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한국이 기생충 왕국으로 불릴 만했다. 당시 서독으로 광부들을 보냈는데 서독 정부가 한국 광부들이 기생충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 전염병 환자처럼 격리 수용하는 일이 벌어져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문제가 된 기생충은 십이지장충이었는데 이후 정부는 광부를 선발할 때 기생충 감염 여부를 검사했다. 1967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나갈 국가 대표 선수 65명 중 23명이 각종 기생충에 감염된 것으로 밝혀져 선수 체력 관리가 문제화되기도 했다.

가뜩이나 영양이 부족했던 시절 기생충에게 영양분이나 피를 빨리고 기생충에 의한 빈혈과 복막염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정부는 기생충 박멸에 나섰다. 1964년 기생충박멸협회를 설립했고 보건사회부 조직에 기생충계를 만들어 박멸 운동을 총괄했다. 1966년 4월에는 기생충질환예방법을 제정했다. 각급 학교장은 연 2회 학생의 기생충 감염 여부를 검사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채변 봉투를 제출해야 했다. 감염 사실이 확인된 학생들은 구충제를 한 움큼씩 받아 몇 마리가 죽었는지 학교에 알려야 했다. 채소 재배에 인분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각의에 상정하기도 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대신 전국 55개 지역을 인분 사용 금지구역으로 지정하는 등 인분 사용을 점차 줄여 나갔다. 기생충학회에서는 ‘김치 통조림’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는데 기생충이 없는 김치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가히 기생충과의 전쟁이었다. 사진은 정부가 설치한 기생충 상담소(1970년 4월).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2017-11-13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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