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의 오솔길] 설야

입력 : ㅣ 수정 : 2017-02-09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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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겨울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몸을 빠져나간 잠이 천장에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자꾸만 어깃장을 놓는 잠을 달래 보지만 요지부동이다. 창밖 사륵사륵 내리는 흰 눈, 눈꽃 화음에 귀가 젖는다. 날이 새면 지붕과 담과 가지마다 가득 열린 눈꽃 음표들을 볼 수 있으리라. 한밤중 내리는 눈은 고양이 발걸음을 닮아 소리가 없다. 밤사이 진주한 침략자처럼 마을을 점령한 눈은 세상이 만든 지도를 순식간에 지워 버릴 것이다. 이른 아침 하얀 도화지로 바뀐 흰 눈 위에 참새들은 하늘 아래 가장 깨끗한 상형문자들을 찍으리라. 하지만 이와는 달리 분, 분, 분 내리는 눈이 층, 층, 층 쌓여 갈수록 산짐승들은 가혹한 굶주림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려야 하리.
이재무 시인

▲ 이재무 시인

이부자리를 빠져나와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다본다. 내리는 눈발 사이로 고향 집 뒤꼍 장광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들썩들썩 뚜껑을 열고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간장, 된장, 고추장들을 들여앉혀 어르느라 하얀 모자 쓴 항아리들은 튀어나온 배가 더욱 불룩해져 있다. 마당 한구석에는 갓 태어난 눈사람이 서 있다. 눈사람은 눈 내린 날 태어나 우두커니 서서 동심을 활짝 꽃피운다. 꽝꽝 얼어붙은 한밤의 매서운 칼바람에도 단벌옷으로 환하게, 꼿꼿이 서서 기다림의 자세를 보여 준다. 눈사람은 표리가 동일한 사람이다. 눈사람은 저를 만든 이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의 마음의 심지에 작은 불씨를 지펴 놓고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력이 짧으나 누구보다 추억을 많이 남기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눈사람밖에 없다. 퍼붓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몰래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저릿해 온다. 마음으로 바다가 가득 들어차서 출렁거린다. 퍼붓는 눈발 삼만 리. 저 눈과 더불어 밤을 도와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있는 양 몸 안에 짐승이 들어와 까닭 없이 발바닥이 뜨거워지고 팔뚝에 피가 솟는다. 몸의 가지에 붉은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눈 때문에 나는 오래전에 끊었던 흡연 욕구에 시달린다.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동치미 그릇을 꺼내 들고 훌훌 소리 내어 마신다. 까칠까칠한 얼굴을 마른 손으로 거푸 쓸어내린다. 창문을 열었다 닫고, 들숨 날숨을 길게 마셨다 내뿜는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갱지 한 장을 펼쳐 놓는다. 생을 반죽했던 물컹물컹한 말들 예컨대 전봇대, 우체국, 신작로, 오솔길, 철길, 하모니카 등속을 써 본다. 내 생에 지문을 남긴 사물어들이다. 봉해 놓은 서랍을 연다. 몽당연필, 부러진 양초, 향나무 한 토막, 소인 찍힌 편지봉투, 미완성 초고 시편, 쓰다 만 연애편지, 고장 난 손목시계, 촉 없는 만년필, 녹슨 못, 세금 고지서, 고인 된 선배와 함께 시골 간이역을 배경 삼아 찍은 흑백 사진, 마른 꽃가루 등속 요술 상자인 양 어제가 불쑥불쑥 민얼굴을 내밀어 온다.

험한 잠자는지 아내의 잠꼬대 소리가 요란하고 건넛방 코 밑 거뭇해진 아들 녀석은 덮어 준 이불을 걷어차며 잠이 달기만 한데 자정 너머의 시간을 새하얗게 덮으며 눈은 내리고, 내려서는 쌓이고 있다. 나는 도통 잠을 이룰 수 없다. 마음의 국경지대를 배회하며 오래 굶주린 적막이라는 짐승 한 마리가 북북, 광목 찢듯 하늘 찢는 울음소리 낭자하고 요란하다.

나는 포효하는 짐승을 달래려 카세트를 틀어 송창식의, 대중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노래 ‘밤눈’(소설가 고 최인호 작사)을 듣는다.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가만히 눈감고 귀 기울이면/…/흰 벌판 언덕에 눈 쌓이는 소리/당신은 못 듣는가? 저 흐느낌 소리/흰 벌판 언덕에 내 우는 소리/…/눈발을 흩이고 옛 얘길 꺼내/아직 얼지 않았거든 들고 오리다/…/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세상에는 이성이나 과학으로 사유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그렇다. 가령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에게 사랑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또 삶이란 무엇이고 운명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감성과 직결된 문제들은 결코 과학이나 이성으로 사유할 수 없는 분야들이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7-02-0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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