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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에세이] 알파고, 그리고 지방행정/정재근 전 행정자치부 차관·행정평론가·시인

[수요 에세이] 알파고, 그리고 지방행정/정재근 전 행정자치부 차관·행정평론가·시인

입력 2016-04-05 23:10
업데이트 2016-04-0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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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근 전 행정자치부 차관·행정평론가·시인
정재근 전 행정자치부 차관·행정평론가·시인
1996년 어느 날 정부서울청사 19층 대회의실. 대통령 주재 학원폭력 근절 대책회의가 몇 분 남지 않았다. 그런데 현장 사례 발표와 정책 제언을 하기로 돼 있는 학원폭력 관련 재단 이사장이 보이지 않는다. 이사장의 행사 참석을 책임진 담당 사무관도 보이지 않는다.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아, 고향에서 군수 한번 해 보려고 내무부에 왔는데 이제 다 물 건너갔구나. 순간 담당 사무관이 누군가를 모시고 와서 이사장 자리로 안내한다.

행사가 잘 끝난 후 담당 사무관에게 물었다. “선배님, 도대체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어떻게 된 겁니까. 저는 오늘 공무원 그만두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돌아온 대답이 하나의 선물이었다. “이사장 입장이 되어 보니 갑자기 제 아이 생각이 났어요. 그분은 대기업 해외법인장으로 일하다가 학교폭력에 아들을 여의고 재단을 세워 아이들을 위해 나선 터였답니다. ‘제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이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었습니다’는 얘기를 여러 사람 앞에서 해야 한다고 가정하니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그래도 ‘이 문제를 정부가, 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 준다니 고마워서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답변을 듣기는 했지만 막상 아침에 일어나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오고 있을 그분이 떠오르더군요. 내 마음도 이런데 그분은 얼마나 아플까. 그분의 모습이 눈앞에 스쳤습니다. 다급한 참에 곧장 후문으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기다렸다가 모시고 안내한 뒤 다시 택시로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1996년은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이듬해로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가 주민과 밀접한 민생 관련 이슈로 전환되기 시작한 때였다. 나의 공무원 생활은 그날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나도 저 선배처럼 주민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어루만지는 행정을 펼치겠다는 마음을 품은 그 이후로 나는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따뜻한 행정, 감성 행정, 감정 이입 행정,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인문학적 행정’ 등으로 표현되는 나름의 행정 철학을 갖게 됐다.

2016년 3월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인간 이세돌 간의 바둑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알파고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알파고 측의 아자황과 이세돌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무표정한 아자황은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알파고가 지시하는 착점에 그대로 바둑돌을 놓는다. 반면 이세돌의 표정은 찡그림, 한숨, 여유, 자신만만 등 시시각각 변한다. 우리도 이세돌의 표정에 따라 마음이 가벼워졌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곤 한다.

나는 대국을 보는 내내 행정을 생각했다. 정해진 바둑 규칙대로 알파고와 이세돌은 바둑을 두었고 이것은 주어진 법령을 집행하는 것, 즉 행정을 수행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행정을 하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알파고는 주민에게 보이지 않고 아자황만 보인다. 또 아자황의 행정은 인간적인 매력이 없다. 알파고가 시키는 대로 무표정하게 일을 한다. 만일 20년 전의 그 선배가 알파고나 아자황처럼 당초 정해진 행사 계획대로 19층 행사장에서 기다렸다가 이사장을 안내했어도 행사는 무리 없이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한 주민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한 후배 공무원의 인생을 바꿀 만큼 큰 감동을 주는 행정은 알파고처럼 타산적으로 계산하고 아자황처럼 주어진 규칙대로 집행하는 행정이 아니다. 이세돌처럼 고뇌하고 고민하면서 그의 모든 것을 주민에게 보여주는 행정이다. 인간이어서 인간의 나약함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가슴 따뜻한 행정이어야 가능하다.

알파고의 등장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미래의 직업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나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행정의 존재 이유가 주민 행복 창조에 있다면 주민과 직접 몸과 마음을 맞대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현장 행정, 지방행정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지방행정의 존재 이유는 AI로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감성으로 다가가는 따뜻한 행정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6-04-0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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