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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경기도 양주 회암사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경기도 양주 회암사

서동철 기자
서동철 기자
입력 2016-02-12 17:50
업데이트 2016-02-1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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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왕실 후손 지공이 나옹·무학에게 인도 날란다사 법통 전승

경기 양주 회암사는 1997년부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발굴 현장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면 262칸에 이르렀다는 전성기 절터의 규모에 놀라고, 석축이 만들어 놓은 절터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최근에는 회암사터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천보산 아래 회암사지박물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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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터 전경.
양주 회암사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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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뒷산에 자리잡은 지공의 부도와 부도비.
회암사 뒷산에 자리잡은 지공의 부도와 부도비.
●회암사 전성기 건물 262칸… 1997년부터 발굴

절터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회암사 새절이 나타나는데, 그 오른쪽 능선에 지공과 나옹, 무학의 부도가 있다. 풍수에 식견이 없어도 명당 자리라는 느낌이 든다. 계단을 올라서면 지공(持空·1300∼1363)의 부도와 부도탑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그는 고려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불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도의 고승이다. 지공의 부도를 중심으로 위쪽이 나옹, 아래쪽이 무학의 부도와 부도탑이 자리잡고 있다.

지공의 본명은 디야나바드라이다. 중국에서 제납박타(提納薄陀)로 음역(音譯)이 이루어졌다. 지공의 고향은 갠지스강 유역에 자리잡은 마가다국(摩竭提國)이다. 나라 이름이 귀에 익는 것은 석가모니가 왕자로 태어난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공 역시 마가다 국왕의 아들이니 석가 왕실의 후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는 부도비에 새겨진 이색(1328~1396)의 ‘서천 제납박타존자부도명 병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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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군(群) 옆에 자리잡은 회암사 새절.
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군(群) 옆에 자리잡은 회암사 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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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터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터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회암사지박물관.
●티베트·운남·중국 거쳐 1326년 고려에 들어와

지공은 8살 무렵 날란다사원으로 율현 스님에게 출가했다. 날란다사원은 5세기에 출범한 세계 최초의 불교대학으로 유명하다. 12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폐허가 됐다고 알려졌지만, 14세기 초까지는 명맥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공은 율현의 권유에 따라 스리랑카로 보명을 찾아가는데, 이 시절 동방 교화의 필요성이 각인된 듯 하다.

지공은 처음엔 바닷길로 중국으로 가고자 했다. 말레이반도 초입까지 진출했다가 돌아선다. 다시 내륙으로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티베트와 운남, 연경을 거쳐 충숙왕 13년(1326) 고려에 들어온다.

●수제자 나옹에게 “회암사 중창 땐 불법 크게 중흥”

티베트에서는 주술사가 독약을 타 놓은 차를 마셨고, 이교도들로부터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다. 양자강 상류의 대독하(大毒河)에서는 도적을 만나 알몸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당나라 현장의 ‘대당서역기’나 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동방에서 인도를 찾아가는 기록이라면, 지공의 이야기는 반대로 인도에서 동방을 여행한 기록이다.

지공이 3년 남짓 고려에 머무르는 동안 나옹과 무학 등이 다투어 제자가 된다. 지공은 회암사의 지세가 날란다사와 닮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수제자 나옹에게 “회암사를 중창하면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쇠락해 가는 날란다사의 법통(法統)을 회암사에서 이어가고 싶다는 뜻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유생이 지공·나옹·무학의 부도·비 훼손하기도

나옹은 고려 우왕(재위 1374~1388) 시대 회암사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지금 드러난 회암사 터에는 날란다사를 재현하겠다는 지공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회암사지만 지공의 부도와 부도탑은 숭유억불 시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순조 21년(1821) 경기 광주 유생 이응준이 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와 비를 무너뜨리고 자기 아버지의 산소를 쓴 것이다. 조정에서도 큰 사건으로 다루어지는데, 특히 무학의 부도비에 새겨진 글이 태종의 분부로 지어 올린 것이어서 더욱 문제가 됐다고 한다. 순조의 명에 따라 세 고승의 부도와 부도비는 1828년 다시 세워졌다. 지금도 지공의 부도비 옆에 비석의 기단 하나가 더 남아 있는 것은 이응준이 부순 옛 부도비의 흔적이다.

글 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6-02-1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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