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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 “내 꿈은 ‘연기 잘하는 할머니 여배우’”

강수연 “내 꿈은 ‘연기 잘하는 할머니 여배우’”

입력 2015-10-07 08:52
업데이트 2015-10-0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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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맡아… “영화는 치유하고 꿈꾸고 사랑하는 것”

강수연
강수연
강수연(49)은 배우다.

우리 나이로 네 살 때 데뷔해 46년을 배우로 살았다. 스물한살 나이로 한국 여배우 최초로 3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 시절을 풍미하던 여배우가 어느샌가 은막 뒤로 사라지는 일이 흔했지만, 강수연은 달랐다. 당대의 흐름에 맞춰 멜로의 여주인공이 됐다가, 1990년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여자가 됐다가, 천하를 호령하는 조선시대 여인이 됐다.

생기 넘치던 젊은 여배우는 카리스마를 품은 중견 여배우로 자신의 자리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갔고 만들어 갔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자존심이라는 뜻으로 쓰인 속어)가 없냐”는 영화 ‘베테랑’(감독 류승완) 속 대사가 강수연의 입에서 빌려온 말이라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배우가 국내를 넘어 아시아 최고로 올라선 국제영화제의 수장이 됐다.

성년을 맞은 해 큰 위기에 부딪힌 부산국제영화제가 대내외적 쇄신과 도약을 보여줘야 했을 때 그에게 공동 집행위원장 자리를 제의했고 그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많은 영화인이 놀라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6일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사무실에서 만난 강수연 위원장은 피로에 젖은 표정에서도 눈빛만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지난 1일 개막해 10일 폐막까지 반환점을 돈 영화제를 꾸리면서 그는 하루 두 시간만 자면서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다 끝나면 이용관 (공동 집행)위원장님한테 뭐라고 해야겠어요. (웃음) 개막식 때 마음고생을 가장 많이 했어요. 새벽까지 비바람이 몰아치는 해운대 바다를 보면서 한숨지었죠. 김해공항으로 와야 할 비행기가 모조리 결항돼 게스트들이 서울로 갔다가 KTX를 타고,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어요. 제가 입고 있던 드레스도 다 젖었는데 초조한 마음에 젖었는지도 몰랐어요. 그래도 하늘이 도왔죠. 개막식 때가 되니 비가 잦아들었고 예상보다 많은 분이 제때 도착해 참석할 수 있었어요.”

눈코 뜰 새가 없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다른 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지만, 20회를 맞은 부산영화제에 대한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비바람을 뚫고 우리 20주년을 축하해 주러 전 세계에서 그렇게 많은 분이 와주셨다는 게 감사하죠. 오신 분들 모두 ‘아시아의 대표적 영화제’라고 말해요. 세계가 아시아 영화에 주목하는 시기에 부산영화제가 이렇게 있으니 모두 그 중요성을 알고 도와주고 있는 거죠. 이제 성장기를 거쳐 성년이 됐으니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해야죠.”

20회에 공동 집행위원장이 되기는 했지만, 합류하던 시점에 강 위원장을 바라보는 영화계의 시선은 영화제 ‘내부 인사’에 가까웠다. 제1회 행사 때부터 부산영화제에 집행위원으로, 심사위원으로 늘 영화제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부산영화제 출범 당시 불모지였던 한국에 국제영화제를 만든다는 데 국내 영화계, 나아가 문화계 인사들은 한마음으로 뭉쳤다.

일찌감치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제를 다닌 강 위원장의 마음은 특히 간절했을 것이다.

”초창기에 해외를 다닐 때는 정말 부러웠죠. 국제영화제에 가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 북한?’부터 물어보던 시절이니까요. 우리도 저런 영화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필요성은 당연히 느꼈죠. 부산영화제를 만든다는 소식에는 걱정과 불안이 컸어요. 좋은 영화를 모으고 영화인들을 불러모은다는 것은 보통 네트워킹을 만들어서는 되지 않는 일이거든요. 모든 영화인이 전적으로 합심했고 김동호 (초대) 집행위원장과 같은 전설적인 지휘자가 있어서 기적을 이뤘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해낸 거죠.”

강 위원장이 1987년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국민이 느끼는 이 일의 크기는 실로 엄청났다.

그러나 20년간 국제영화계에서 한국영화와 한국영화인들의 위치는 상전벽해 수준으로 달라졌다. 걸출한 영화작가들이 세계무대에서 인정받고, 세계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이들은 가을이 되면 부산으로 달려온다. 부산영화제와 한국영화는 함께 성장해 왔다.

그렇기에 강 위원장이 현재 느끼는 감정은 특별하다.

”정말, 남달라요.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면 울컥하고 감동스럽죠. 오히려 내가 상을 받을 때는 몰랐어요 그것이 그렇게 큰일인지.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이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소식을 들으면 내가 받았을 때보다 더 기뻐요. 후배 전도연이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의 감동은 특히 컸어요.”

그렇게 특별한 마음을 담고 있는 부산영화제일지라도 부산시와 갈등을 겪고 정부 지원금이 줄어든 어려운 시점에 공동 집행위원장 자리에 오른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고민을 정말 많이 했고 가족과 친한 지인들은 말렸어요. 좋을 때 시작해도 좋은 소리 듣기 힘든 일인데 이렇게 힘들 때 들어가면 자칫 배우로서 그동안 잘해온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었죠. 그런데 이런 상황일수록 보탬이 되는 것이 배우로서의 책임감이 아닌가 했어요.”

평생 배우로 살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꿈을 꾸지 않았던 그가 결국 중책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배우로서의 책임감’이었다는 것이다.

네 살 나이에 의식하지 못한 채로 들어선 배우로서의 길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강 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명 같은 거죠. 내 뜻으로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본질적인 고민을 한 건 고등학생 때였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연기밖에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중에서도 영화가 그렇게 좋았어요. 극장 가는 것도 설레고 촬영 현장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모두 에너지를 갖고 합심해 하나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 좋았죠. 그때부터 TV드라마 ‘여인천하’(2001)를 할 때까지 연극 한 편 빼고는 오로지 영화만 했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인 영화가 강수연이라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살아가면서 위로, 치유, 희망이 될 수 있는 것. 꿈꿀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음악이 될 수도, 문학이 될 수도 있죠. 누군가에게 그것이 영화라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영화로 인해 많이 공부하고 많이 치유하고 많이 꿈꿨어요. 많은 사람이 그에 공감할 거라고 믿어요.”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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