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日 역사왜곡 등 대응 위해 공조… DJ 학술교류 지원 계기 급물살

[단독] 日 역사왜곡 등 대응 위해 공조… DJ 학술교류 지원 계기 급물살

입력 2015-02-04 00:26
업데이트 2015-02-04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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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공동역사연구 어디까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동 역사교재의 첫 주제를 일본 역사왜곡 대응으로 잡은 것은 남북한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공통분모라서다.

한국은 일본의 지속적인 독도에 대한 분쟁지역화 시도에 맞서야 하고, 북한은 일본과 관계 정상화에 앞서 식민지배에 대한 경제적 배상 협상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선언에 그쳤던 남북한 공동 역사연구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학술교류사업에 대한 지원을 밝히면서부터다. 이듬해 2월 이성무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 3명이 방북,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와 공동 학술회의 개최 및 자료교환에 대해 협의했다. 이어 3·1절을 맞아 남북한 역사학자들은 일본 당국의 역사교과서 왜곡 음모를 규탄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2001년 8월에는 남북역사학 국제학술토론회가 항일역사문제를 주제로 중국 하얼빈에서 열렸고, 항일 유적지가 집중된 중국 동북3성 지역의 유적 및 사료 공동 발굴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졌다. 2003년 2월과 3월에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학술토론회가 열렸고, 8월에는 ‘Korea’인 국호 영문표기를 ‘Corea’로 바로잡기 위한 학술토론회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열리기도 했다.

2004년 9월 금강산에서 열린 고구려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학술대회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책이 처음으로 언급됐다.

하지만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급랭하면서 남북 공동 역사연구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 사건 이후 최근까지 남북한 역사학자들이 만난 것은 2010년과 2011년으로 두 번에 그쳤다.

끊어진 남북한 공동 역사연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냉랭한 남북관계 개선이 우선이다. 공동 역사연구가 재개된다 하더라도 당장 발전적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예상이 많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과거 남북학술토론회의 개최와 주제선정, 진행방식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면서 “개최는 북한의 일방적 요구에 끌려다녔고, 주제는 일제 식민지배에 한정됐고, 진행방식도 학술회의 형식이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또 남측은 순수 학술교류를 위해서 접근했지만, 북측은 조·일 수교와 체제 정통성 홍보를 위한 정치행사로 받아들이면서 학술행사에 무리한 비용을 요구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이 같은 어려움의 원인을 북한의 역사학계가 당에 종속돼 독자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고, 실천 가능하면서 가시적 성과를 내놓을 수 있는 사업부터 단계적으로 접근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2015-02-04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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