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끝처럼 매운 봉우리 달빛인 듯 사뿐 오르리

창끝처럼 매운 봉우리 달빛인 듯 사뿐 오르리

입력 2014-06-05 00:00
업데이트 2014-06-05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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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줄기마다 우거진 녹음…월출산의 절정을 만나다

오래전 일이다. 전남 영암 땅을 스쳐 지나던 길이었다. 꾸벅대며 조느라 반쯤 감겼던 여행자의 눈이 감전된 듯 번쩍 떠졌다. 빗줄기 흐르는 차창 너머로 펼쳐진 월출산의 자태 때문이었다. 영암의 들녘 한가운데를 찢고 융기한 월출산은 웅장하고 당당했다. 그날 이후 월출산은 가슴 한편에 똬리를 틀었다. 이른바 버킷리스트에 올랐던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등반 시기를 저울질하는 것일 터. 그게 언제여야 하는가. 봉우리마다 산철쭉이 곱게 피고 공룡 등줄기 같은 능선을 녹음이 점령하는 바로 이맘때다.
광암터에서 본 월출산 북사면 능선. 암봉과 암봉 사이에 구름다리가 실핏줄처럼 놓여 있다. 구름다리의 지상고는 120m로 국내 현수교 가운데 가장 높다.  구름다리 건너 암봉들을 넘고 또 넘어야 천황봉에 닿는다. 잊지 마시라.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광암터 또한 월출산의 대표적인 ‘수석 전시장’이란 것을.
광암터에서 본 월출산 북사면 능선. 암봉과 암봉 사이에 구름다리가 실핏줄처럼 놓여 있다. 구름다리의 지상고는 120m로 국내 현수교 가운데 가장 높다.
구름다리 건너 암봉들을 넘고 또 넘어야 천황봉에 닿는다. 잊지 마시라.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광암터 또한 월출산의 대표적인 ‘수석 전시장’이란 것을.


전남 나주에서 영암으로 드는 길. 멀리 들녘 위로 공룡의 등뼈를 닮은 산이 삐죽 솟았다. 월출산이다. 그 위세가 자못 당당하고 고압적이다. 외지인들에게 이 일대 풍경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는 걸 은근히 주장하는 듯하다. 하긴 사방 백리 안에 월출산과 크기를 견줄 만한 산이 없으니 그럴 법도 하다.

먼저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 김승희 소장의 이야기를 듣자. 월출산은 영암과 강진에 걸쳐 있다. 1988년 국내 20번째로 국립공원이 됐다. 최고봉은 천황봉으로 809m다. 암릉이 많은 데다 급경사를 이룬 계곡은 수량마저 적어 생태계가 풍부하게 유지되기 어려운 구조다. 그런데도 그 안에 세계에서 가장 작은 꼬마잠자리 등 약 800종의 동물과 약 700종의 식물이 살아간다. 생태계의 보고다.

월출산이 가진 기록 몇 가지. 우리나라 최남단의 국립공원이다. 그리고 국립공원 가운데 크기가 가장 작다. 그렇다고 오르기 쉬울 거란 생각은 말길. 작지만 맵다. 사자봉과 매봉을 잇는 구름다리도 명물이다. 국내 현수교 가운데 지상고가 120m로 가장 높다.

오르는 길에 눈여겨볼 건 남근석과 베틀굴이다. 대개의 산에 남근석은 하나씩 있게 마련이지만 월출산 남근석은 독특하다. 흙 한 톨 없는 바위 끄트머리에서 산철쭉이 자라기 때문이다. 해마다 연분홍꽃을 피웠던 산철쭉은 그러나 몇해 전 고사하고 말았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장 등산객들 사이에서 ‘풀 죽은’ 남근에 대해 안타까운 목소리가 오갔다. 월출산국립공원 측은 고심 끝에 인근 산철쭉을 채취해 복원하기로 했다. 이른바 ‘새집공법’으로 이식된 산철쭉은 올해 처음으로 꽃을 피워 냈다.

베틀굴도 상황은 비슷하다. 월출산의 여근석 노릇을 하는 동굴이다. 동굴 초입엔 뜻밖에 억새가 자라고 있었다. 한데 이 역시 고사했다. 등산객의 답압 탓이다. 쉽게 말해 발 아래 깔려 죽었다는 뜻이다. 이걸 복원했다. 아직 크기는 작지만 가을쯤이면 실하게 영근 억새꽃을 선보일 것이다.

달 뜨는 산이란 뜻의 이름은 어떻게 갖게 됐을까.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는 매월당 김시습의 표현처럼 주로 선인들의 월출산 예찬에서 연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한데 김 소장의 해석도 이채롭다. 구림마을 등 영암 북서쪽에서 보면 초저녁에 월출산 위로 뜬 달이 밤늦도록 월출산의 봉우리를 타고 흐르다 새벽녘에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그래서 월출산이라 부르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달이 흐르는 산’ 충북 영동의 월류봉과 비슷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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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막힘없이 트인 구정봉 정상. 월출산에서 세 번째 높이지만 조망만큼은 천황봉에 뒤지지 않는다. 앞의 물웅덩이에 무당개구리 두 쌍이 서식하고 있다.
사방이 막힘없이 트인 구정봉 정상. 월출산에서 세 번째 높이지만 조망만큼은 천황봉에 뒤지지 않는다. 앞의 물웅덩이에 무당개구리 두 쌍이 서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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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들녘에서 본 월출산 전경. 인근에 크기를 견줄 만한 산이 없어 무게감이 한결 더하다.
영암 들녘에서 본 월출산 전경. 인근에 크기를 견줄 만한 산이 없어 무게감이 한결 더하다.
월출산의 가장 큰 매력은 기암절벽이다. 수없이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암벽들은 조각가가 정교한 솜씨로 다듬어 놓은 듯하다. 한데 이는 월출산이 오르기 쉽지 않은 산이라는 뜻도 된다. 줄곧 경사 심한 산자락을 오르내려야 한다. 체구는 경량급인데 펀치력은 헤비급인 셈이다. 사자봉, 매봉 등 창끝같이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을 지날 때는 특히 더하다.

등산 코스는 여럿이다. 그 가운데 수도권 등의 당일치기 산행객들은 천황사 주차장을 들머리 삼아 구름다리~천황봉~바람폭포를 돌아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순환 코스를 선호한다. 거리는 6.7㎞. 4~5시간은 족히 걸린다. 종주 코스는 천황사 주차장~구름다리~천황봉~구정봉~억새밭~도갑사다. 9.4㎞로 최소 6시간 이상 걸린다. 강진 쪽 경포대에서 오르는 6.6㎞ 코스도 있지만 천황봉까지 차고 오르는 길이 험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산 코스로 잡길 권한다. 이번 산행에선 천황사 주차장을 들머리 삼아 바람폭포~육형제바위~천황봉~바람재~구정봉 순으로 오른 뒤 다시 바람재를 거쳐 경포대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 구름다리를 직접 걷지 못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수석 전시장’ 광암터 인근에서 구름다리 걸친 사자봉의 모습을 조망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바람폭포와 육형제바위까지는 줄곧 숲이다. 광암터 어름까지는 가야 비로소 하늘이 뻥 뚫린다. 기암들이 파노라마처럼 흐르는 월출산의 진경도 예서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의 조영준씨는 “화강암은 장석, 흑운모, 석영 등으로 구성되는데 월출산엔 장석이 많이 섞였다”고 했다. 그래서 암벽의 빛깔이 붉다는 것이다. 저물녘이나 비 오는 날엔 한결 더 붉은빛을 띤다고 한다.

월출산 정상인 천황봉은 널찍한 암반지대다. 바람에 땀 말리며 다리쉼하기 좋다. 사방에 치솟은 암봉들도 볼 만하다. 저마다 그럴듯한 사연 하나쯤은 품고 있는 모양새다. 이를 보며 숱한 시인 묵객들이 펜으로, 붓으로 읊고 그려 냈을 터다.

천황봉에서 남근석을 지나 바람재까지는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경사가 급한 계단도 있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바람재에서 구정봉까지는 완경사 오르막이다. 이 일대 조망도 뛰어나다. 바람재에서 보는 구정봉은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그래서 이름도 장군바위다. 구정봉 옆엔 베틀굴이 뚫려 있다. 임진왜란 때 아녀자들이 이 굴에 숨어 베를 짰다고 한다.

구정봉(711m)은 베틀굴 옆으로 올라야 한다. 완경사이긴 하나 결코 수월하지는 않다. 암벽 위를 로프에 매달려 올라야 하는데 천황봉 등정에 힘을 쏙 빼고 온 터라 여느 때보다 곱절은 더 힘이 든다. 구정봉 정상엔 십여개의 나마(gnamma)가 있다. 암석 위의 조그만 구멍이 바람과 모래 등의 풍화작용을 받아 작은 웅덩이 형태로 커진 걸 말한다. 이를 풍화혈(風化穴)이라고도 한다. 예전엔 나마가 아홉개여서 봉우리 이름도 구정봉이었다. 한데 최근엔 숫자가 12개까지 늘었다. 가장 큰 나마는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나마에는 생명체도 산다. 가장 큰 개체는 무당개구리다. 조씨는 해마다 한두쌍의 무당개구리가 이 나마까지 올라와 산란한 뒤 늦가을에 내려간다고 했다. 대체 무당개구리는 이곳에 나마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 짧은 다리로 사람도 오르기 힘든 바위를 어떻게 뛰어올랐는지도 신비롭다.

하산길은 강진 쪽의 경포대 계곡으로 잡는다. 강원 강릉의 경포대와 발음은 같지만 뜻은 다르다. 경포대 계곡엔 연중 계곡물이 흐른다. 대개의 월출산 내 계곡들이 건천인 것과 대비된다. 경포대 초입에 야영장이 조성돼 있다. 천황사 야영장이 차로 오를 수 있는 반면 경포대 야영장은 걸어 올라야 한다. 입구에서 수백m 걸어 올라야 하는 게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한적하게 캠핑을 즐길 수 있다.

글 사진 영암·강진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로 갈 경우 서해안고속도로→목포 나들목→2번 국도→영암, 또는 호남고속도로→서광주 나들목→산월IC→13번 국도(나주·영암 방향)→영암 순으로 간다.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 473-5210.

→맛집 한석봉의 어머니가 떡을 팔던 곳이라는 독천시장 내에 수십곳의 낙지식당이 몰려 있다. 갈낙탕, 낙지구이 등을 맛볼 수 있다. 청하식당(473-6993), 독천식당(472-4222) 등이 이름났다.

→잘 곳 천황사탐방지원센터 인근에 월출산바우펜션(471-9930)이 있다. 한옥형 펜션으로 최근에 문을 열어 깔끔하다. 6만원부터. 군서면의 월출산온천관광호텔(473-6311)에선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산행 뒤 몸을 풀기에 맞춤하다. 입욕료는 어른 6000원.
2014-06-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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