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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훈련병 유족 “뼛조각이라도 달라”

실미도 훈련병 유족 “뼛조각이라도 달라”

입력 2014-01-21 00:00
업데이트 2014-01-2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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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인도 소송 항소심에서도 원고 패소 판결

실미도 부대 난동사건 /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실미도 부대 난동사건 /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1971년 23일 오후 2시 15분 실미도 부대 훈련병들이 탈취한 태화운수 소속 경기영 5-1681버스가 서울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출동한 군경과 교전 끝에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 서 있다.


”원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지난 17일 서울고법의 한 법정. 재판장의 이 세 마디에 방청석에 앉은 자매의 어깨가 푹 꺼졌다. 판결 선고 후 한참이 지나도록 자매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들은 42년 전 사망한 임성빈씨의 여동생들이었다.

임씨는 1968년 4월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의 부대원으로 선발됐다. 209파견대는 북파 특수임무를 띤 ‘실미도 부대’의 다른 이름이었다. 가혹한 훈련을 받던 임씨는 1971년 8월 섬을 탈출했다.

임씨와 동료 훈련병 24명은 열악한 처우에 항의하려고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3명이 육군과의 교전에서 사망했고 17명이 자폭했다. 임씨 등 4명은 붙잡혔다.

임씨는 초병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1972년 3월 서울 오류동에 있는 한 공군부대에서 국방부 장관 명령으로 형이 집행됐다. 그는 왼쪽 가슴에 표적지를 붙인 채 총살됐다.

당시 책임자 한모 중령은 실미도 사건의 실체를 은폐하기 위해 사형 집행 사실을 임씨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더욱이 임씨의 시신을 임의로 암매장해 그 위치조차 찾을 수 없도록 했다.

유족은 임씨가 실미도 부대에서 훈련받은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실종된 임씨가 집에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유족이 진상을 파악한 것은 영화 ‘실미도’가 개봉한 2003년 이후였다.

유족은 실미도 부대 기간병이었던 김모씨를 통해 임씨가 특수임무 훈련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임씨의 동생은 지금이라도 오빠의 유해를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소송을 제기한 여동생 임충빈(56)씨 재판부에 낸 진정서에서 “죽은 사람 살려달라는 게 아니고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달라는 것인데 이것조차 외면하면 더 이상 호소할 곳이 없다”고 썼다.

하지만 법원은 이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서울고법 민사19부(윤성근 부장판사)는 임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유해인도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심처럼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고 21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가 고인의 제사 주재자라는 점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국가가 고인의 유해를 점유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판결 선고를 지켜본 임충빈씨는 “내 자식들이 외삼촌 유해를 끝까지 찾아내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한다”면서 “이 사무치는 비극을 우리 세대에서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언니 임일빈(57)씨는 “어머니가 끼니마다 아랫목에 밥 한그릇씩 묻어두고 평생 오빠를 기다리다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오빠 사진을 품에 간직한 채 현관문도 닫지 않고 사셨다”며 울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7월 임씨에 대한 사형 집행과 암매장이 국가의 불법 행위라는 점을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임씨의 유해를 넘겨받지 못했다. 법률사무소 한성 노영실 변호사는 “국가가 시신을 암매장해 그 위치를 알 수 없더라도 유해를 점유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판결문을 받아본 후 유족과 상의해 상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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