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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어느 배달원의 성탄 카드/김상연 워싱턴특파원

[특파원 칼럼] 어느 배달원의 성탄 카드/김상연 워싱턴특파원

입력 2012-12-15 00:00
업데이트 2012-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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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문 앞에 배달된 워싱턴포스트를 집어들었다. 신문을 펼치려는데 안에서 뭔가 “툭”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크리스마스 카드가 들어 있는 듯한 봉투였다. 백화점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세일용 광고물이겠거니 하고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휴지통에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얼핏 보니 겉봉에 적힌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인쇄체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볼펜 글씨인 게 좀 예사롭지 않았다. 봉투 안에서 꺼낸 작은 크리스마스 카드 안에는 서툰 영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독자님께/즐거운 성탄절과 행복한 2013년 새해를 기원합니다/당신의 워싱턴포스트 배달원 프라모드 켐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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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워싱턴특파원
김상연 워싱턴특파원
짧은 글이었지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요즘 같은 시대에 컴퓨터로 인쇄하거나 복사해서 붙이면 수월할 텐데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그 많은 독자들에게 일일이 카드를 쓴 정성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그동안 간혹 신문이 배달되지 않은 날에 얼굴도 모르는 배달원을 미워하느라 혈압을 올렸던 일이 못내 미안해졌다. 카드에 적힌 배달원의 이름을 보니 서남아시아 쪽 이민자 같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다고는 하지만 고된 일을 하다 보면 마음이 각박해지고 사회에 불만이 생길 법도 한데, 그의 작은 성탄 카드에는 ‘목사님 설교’보다 더 많은 이웃사랑이 담겨 있는 듯했다.

지난주 미국은 무려 5억 8750만 달러(약 6360억원)가 걸린 ‘파워볼 복권’ 열풍으로 온 나라가 달아올랐다. 행운의 1등 당첨자는 미주리주의 소도시에 사는 50대 서민 백인 부부로 밝혀졌다. 이들은 자녀들과 나란히 앉아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부모와 붕어빵처럼 닮은 아들 세 명과 달리 6살짜리 딸은 동양계 외모여서 눈에 확 띄었다. 알고 보니 이들 부부가 5년 전 중국에서 입양한 아이였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고 친자식이 이미 세 명이나 되는 가정도 남의 핏줄을 선뜻 입양해 키울 정도라는 사실이 천문학적 복권 당첨금보다도 더 오래 잔상으로 남았다.

미국의 유력 케이블뉴스 방송인 CNN은 매년 12월 ‘CNN 영웅(Hero)’이라는 이름의 시상식을 연다.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화려한 무대 분위기만 보면 한국 TV에서 연말에 흔히 볼 수 있는 ‘연예 대상’쯤으로 오해할 만하지만, 자기 몸을 던져 사회를 위해 영웅적 행동을 한 소시민들을 발굴해 상을 주는 행사다. 더욱 특이한 점은 미국 내 ‘영웅’뿐 아니라 전 세계 각지에서 선행을 한 외국인들을 찾아내 함께 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지난 2일 열린 올해 시상식에서도 자신이 성폭행당한 아픔을 딛고 다른 여성들의 성폭행 예방에 앞장서고 있는 한 아프리카 여성을 비롯해 많은 외국의 영웅들이 미국으로 초청돼 상을 받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됐고, 그들의 감동적인 스토리에 시청자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지난달 29일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밋 롬니 전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 뉴스가 화제였다. 선거판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운 두 사람이었지만 대선이 끝나자 훌훌 털고 화합하는 모습을 기꺼이 연출한 것이다.

혹자는 미국은 이미 쇠락하는 제국이며,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나라라고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검은 피부의 이방인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일하는 사회, 자기 핏줄에만 뭔가를 물려주려 안달하지 않고 남의 핏줄을 제 핏줄처럼 선뜻 품어주는 사회, 영웅을 끌어내리지 않고 만들어 내는 사회, 우물 안을 벗어나 생각의 크기를 세계적 차원으로 넓히는 사회, 승자는 패자를 포용하고 패자는 깨끗이 승복하는 사회가 오늘의 미국이다. 그래서 미국은 숱한 단점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우리가 더 배울 게 많은 나라라고 저무는 한 해를 돌아보며 생각하게 된다.

워싱턴포스트 배달원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답장으로 써서 문 앞에 놓아둘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12월이 다 가고 있다.

carlos@seoul.co.kr

2012-12-1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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