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소녀, 日헌병에게 끌려가는 동안 엄마는…

입력 : ㅣ 수정 : 2012-08-2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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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증거 있다] 누구에게도 위안받지 못한 그녀들의 악몽

“만 열다섯 살인 1939년,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엄마와 함께 목화를 따는데, 작은 군용차를 타고 빨간 완장을 찬 일본 헌병 4명이 나타났다. ‘겐삐’(헌병)들은 내가 모르는 일본말로 몰아세웠고, 난 무서워서 반항도 못하고 ‘엄마!’만 외쳐댔다. 엄마가 겐삐의 다리를 붙들고,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날 죽여놓고 가라.’고 하자, 겐삐는 발로 엄마를 사정 없이 내리찍었다. 엄마는 밭을 구르면서 휘뜩 자빠지셨고,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진경팽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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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도처에서 찾아왔다. 목화 따던 가을에도, 동짓달에도, 헌병들은 집과 학교를 가리지 않고 덮쳤다. 1937년 난징점령 과정에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과 강간을 자행한 일제가 국제 사회의 맹비난을 받던 시점이었다. 1932년 만주에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한 일제는 전쟁이 장기전에 돌입하자 강간과 성병 등 군내 성 문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며 위안소를 확대했다. 누구에게도 위안받지 못한 위안부들의 기구한 삶은 그렇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강제동원 방법은 다양했다. 폭력과 협박은 예사였고,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취업사기를 치는 일도 빈번했다. 김분선 할머니는 “일본 사람이 ‘옷도 고운 것 입고 공장에 취직시켜 줄 테니 나물 뜯으며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데려갔다.”고 증언했다. 1992년 우리 정부의 위안부 실태조사에 참여한 한 피해자는 “1938년 일본의 놋그릇 상납요구와 창씨개명에 반대한 아버지가 연행됐다. 애국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풀려날 수 있다고 해서 지원했더니 곧바로 위안부에 끌려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위안부의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방에는 이불 하나와 요 하나, 베개 둘이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중국 동북부 도안성은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면서 “하루에 20명 내지 30명은 상대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옥분 할머니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종전은 위안부 생활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거나 유기했다. 살아 남은 이들 중에는 수치심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대신 현지에 남는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 가까스로 고국에 돌아온다 해도 되돌아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멸시였다.

1992년 6월 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가네다 기미코’(金田君子)라고 자신을 소개한 할머니 역시 그런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 보상 청구 소송에서 증인으로 나선 이 할머니는 유일한 생계수단인 파출부일을 할 수 없게 될까봐 가발에 선글라스를 쓴 채 가명으로 증언대에 서 이렇게 말했다. “자식도 낳을 수 없고 결혼도 못하고, 평생 오갈 데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몸도 마음도 아편으로 썩었다. 일본땅을 다 줘도 내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 청춘을 돌려달라.” 당시 위안부는 네덜란드인 100여명과 타이완인 등 최소 5만명에서 30만명에 이르렀다. 현재 생존해 있는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는 61명이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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