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村)스러운 이야기] 멧돼지와 나

내가 살아가는 이곳은 가을로 가득 찼습니다. 산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가을은 아래로아래로 내려오다가 드디어 섬진강에 풍덩 빠져 버렸고, 익어가는 곡식들로 황금벌판이던 논밭들은 서서히 빈 들판으로 바뀝니다. 남은 것은 지난여름 씨앗을 뿌린 무 배추들로 곧 다가올 김장철을 기다리며 제 몸을 살찌우고 있습니다.









내 밭 또한 차마 뽑아먹기 아까울 만큼 예쁜 무와 배추가 보석처럼 빛을 내며 품위 있게 자라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집 밭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올해는 주변의 이것저것들로 퇴비를 만들어서 다른 해보다 더 많이 넣어준 덕분에 별로 많은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내가 해준 것이 고작 그것뿐인데도 너무나 잘 자라주는 작물이 고맙고, 자랑스러워서 지나치며 자주 눈길도 주고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며 흐뭇해 합니다.

그러던 며칠 전 아침, 산에 가려고 대문을 나서는데 순간적으로 확 밀려오는 생흙냄새에 의아해하며 밭을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내 금쪽같은 밭에 도둑이 든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고… 한참을 멍하니 있고서야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도둑은 다름 아닌 멧돼지. 밭의 상태로 봐선 여러 마리가 내려오지 않고 한 놈이 한 짓 같습니다. 그나마 여기저기 마구 파헤치지 않고 몇 곳을 집중적으로 파헤쳐서 내가 먹을 만큼의 양은 남겨 두었다는 것에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멧돼지가 무를 먹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사람이 먹는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럴 수도 있겠다, 수긍합니다.

이놈이 귀신인 것이 바로 옆 밭, 거의 경계도 없는 이웃집 밭은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집은 벌레 때문에 약간의 농약을 치는데 이 영특한 놈이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놈이 뽑아가고(먹은 자국은 없었습니다) 나머지 뽑혀진 무와 배추를 거둬 와서는 때아니게 친구들과 나눴습니다.

졸지에 맛난 무와 배추를 얻게 된 친구들은 멧돼지에게 고맙다고 하며 내 약을 올리며 깍두기를 담겠다, 나박김치를 담겠다, 무생채를 만들겠다, 시래깃국을 끓이겠다, 삼겹살을 구워서 쌈 싸먹겠다며 싱글벙글 좋아합니다. 멧돼지 덕분에 이른 인심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그 다음날에도 또 내려올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놈이 간밤에 또 내려와서 내 먹을 것 남겨두지도 않고 다 가져간다고 해도 별 수 없어서 그냥 다시 오지 말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농담으로 호랑이똥을 구한다고 하니 별별 아이디어가 다 나옵니다. 농약을 밭 주변에 두자, 휘발유를 뿌리자, 호랑이똥 사진을 비롯해서 호랑이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밭에 틀어놓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러다 급기야는 아예 호랑이를 키우자는 소리도 합니다. 이렇듯 호랑이가 사라진 현 세대에 호랑이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나오며 졸지에 호랑이를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다 불가능한 일.

요즘 산골은 물론이고 서울 도심에도 멧돼지가 심심찮게 출몰한다고 합니다. 천적이 없으니 그 계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 같습니다. 지지난해 아들 기범이와 백두대간 산행 중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산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백두대간 산길에서 멧돼지의 자취를 보았습니다. 실제로 목격하기도 여러 번. 온 산천을 뒤집어 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늘어나는 숫자에 비해 먹이가 턱없이 부족하니까 풀뿌리나 나무뿌리를 먹겠다고 땅을 파헤치고, 민가로 내려와서 농작물도 무작위로 먹어치우고, 무리에서 밀려난 놈 중에는 이판사판 자포자기 심정으로 도시로까지 돌진한 것입니다. 그것은 멧돼지에게도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데 대책이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나 인간에게나 불안한 일입니다.



실제로 며칠 전 새벽에 여느 날처럼 산에 갔다가 매일 다니는 길옆 잎 떨어진 조릿대 숲에서 제법 큰놈을 만났습니다. 나는 혼자 기척 없이 다니기 때문에 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많이 민감한 편입니다. 그날도 산에 들어서며 약간 느낌이 이상했고, 저편 능선에서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작은 움직임과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매일 다니는 길이라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먼저 나를 발견한 그놈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순간 멧돼지도 놀랐고 나도 놀랐습니다. 멧돼지는 후다닥 몇 걸음 내달리다가 도망가는 자신이 영 맘에 들지 않았는지 나를 돌아보곤 씩 씩~ 소리를 내며 위협적인 숨을 쉬었습니다. 다행히 조금 그러다 조용히 산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마 능선 어디쯤에 새끼들이 있어서 나의 동태를 파악하느라 그랬을 것입니다. 나를 발견한 순간 일단 놀라서 도망가다가 생각해 보니 저 인간이 공격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기 나름대로 파악하느라 그랬을 것이며, 아마 내게 공격성이 거의 없다는 판단이 되어져서 소리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멧돼지가 사라진 후 겁이 나서 계속 산을 오르지 못하고 얼마쯤 내려와서 누군가가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냥 내려올 수도 있지만 무서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매일 그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후 사람들이 올라왔고 저는 마음을 다독이며 그들과 함께 산을 올라갔습니다.

그 다음날은 작은 종을 하나 배낭에 달고 그 길을 지나쳤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번거로웠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다음부터는 손뼉을 가끔 치면서 지나치기도 했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큰 기침으로 내 존재를 알리기도 하며 그 모습에 내 자신이 재미있어서 큰소리로 웃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참 나약한 인간이 나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분명 나보다 그놈이 더 많이 놀랐을 텐데….

멧돼지는 그날 이후 기척도 없는데 나만 자기 편하자고 온갖 소음을 내고 있으니…. 내가 못마땅한 것은 산에서 짐승을 만나도 조금 의연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닌가 싶고, 무엇보다 그동안의 산길에서의 호젓함이 사라졌습니다.

그럴지라도 지금 그 산길은 너무나 벅찰 정도로 아름답고 좋습니다. 멧돼지와 타협하는 방법은 없는지? 각자 자기 할일 하며 살되 서로 만나지 않게 무슨 암호 같은 것으로 서로 통할 수는 정영 없는지.

글_ 남난희 《낮은 산이 낮다》 저자

201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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