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항’ 뱃사람들 애환 오롯이 내 마음속 등대가 되어…

‘묵호항’ 뱃사람들 애환 오롯이 내 마음속 등대가 되어…

입력 2011-11-17 00:00
업데이트 2011-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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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을 모두 떨군 나무가 시나브로 야위어 갈 쯤, 바다는 짙푸른 감청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푸르다 못해 검게 일렁이는 바다와 마주한 포구는 추운 계절에 찾아야 제격입니다. 찬바람 부는 선창가와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어민들의 뒷모습이 어딘가 포구의 쓸쓸한 이미지와 닮았기 때문이지요. 강원 동해시 묵호항을 다녀왔습니다. 한때 동해안 제일의 어업전진기지였다가 이제는 이름으로만 남은 포구지요. 세상에서 묵호는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묵호 빌딩 언덕’이라 불렸던 판자촌엔 아직도 옛 향기 오롯합니다. 어여쁜 어달리와 묵호등대 등 둘러볼 곳도 제법 많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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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언덕 해질녘 풍경. 묵호등대 너머 동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묵호언덕 해질녘 풍경. 묵호등대 너머 동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조붓한 고샅길 수놓은 담장 벽화

묵호항 뒤편 가파른 언덕. 작가 심상대가 소설 ‘묵호를 아는가’에서 “불이 켜지면 빌딩숲 같다.”고 표현했던 묵호동 언덕이다. 예전 외항선원들이 묵호항에 입항할 때면 두 번 놀랐단다. 항구 맞은편 묵호 언덕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놀랐고, 이튿날 아침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빌딩 숲 자리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들어찬 판잣집들의 몰골을 보며 또 놀랐다. 이 모두 묵호가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묵호동은 인근 어달리와 대진리를 합친 행정 구역명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묵호진동’이라 부른다. 영화를 누렸던 옛 묵호진(津)의 기억이 아련한 때문일 터다. 이제 옛 묵호는 없다. 1980년, 옛 명주군 묵호읍은 삼척군 북평읍과 합쳐져 동해시가 됐다. 그 이후 동해안 제1의 무역항이자 어업전진기지였던, 그리고 한때 금강산 관광선의 출항지였던 묵호는 이제 동해시의 한 동(洞)으로만 남아 있다.

갯바람에 밀려 묵호 언덕에 정착한 사람들이 그 위로 조붓한 길을 냈다. 논골마을이다. 밤이면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하다고 했던 묵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달동네다. 여느 바닷가 마을이 그렇듯, 붉고 푸른 지붕들이 낮은 담장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비좁은 골목길은 집을 에둘러 아슬아슬하게 언덕을 타고 오른다. 그 사이로 묵호등대가 들어섰다. 요즘에야 많은 사람들이 재미삼아 그 길을 오르지만, 고샅길에 박힌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묵호 사람들뿐이지 싶다.

후줄근했던 논골마을은 몇 해 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논골담길’ 프로젝트에 따라 고샅길 담벼락마다 다양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졌다. 스케치는 미대생 출신들로 구성된 ‘공공미술 공동체 마주보기’ 회원들이, 채색은 60~70대의 마을 노인들이 맡았다. 담벼락 벽화가 그려진 시골마을을 찾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싶지만, 논골마을 벽화는 확실히 남다르다. 단순히 낡은 집을 그림으로 가린 게 아니라, 한평생 바다와 함께한 마을 사람들의 신산한 삶의 이야기를 연작시처럼 그림 속에 듬뿍 녹여 냈다.

논골마을 둘러보기는 묵호항 어판장 맞은편 논골3길에서 시작된다. 묵호등대까지 차로 오른 뒤, 되짚어 걸어 내려오는 편한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샅길 초입부터 차곡차곡 밟아 올라야 제격이다. 골목길은 뭉툭하다. 닳고 닳았다. 오랫동안 수많은 주민들이 한숨 쉬며 짚고 오른 흔적이다. 맨 먼저 이방인을 맞는 건 ‘논골갤러리’다. 빈집에 크고 작은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밤바다에 촘촘히 불을 밝히고 있는 오징어잡이 배와 불덩이처럼 솟아오르는 태양,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묵호벅스’까지. 하지만 어쩌랴. 그림의 뒤편에서 풍겨오는 날카로운 쇠락의 흔적마저 가리진 못하는 것을.

작고 예쁜 어달리해변. 가족 낚시터로 제격인 곳이다.
작고 예쁜 어달리해변. 가족 낚시터로 제격인 곳이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

논골갤러리를 지나면 담벼락에 널린 오징어 그림이 눈길을 끈다. 1980년대만 해도 묵호의 열 가구 중 세 가구는 오징어를 말리는 일을 주업으로 삼았다. 남자들은 오징어잡이 배를 탔고, 아낙들은 밤새 오징어 배를 갈랐다. 아이들은 오징어를 입에 문 채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마을엔 늘 오징어 냄새가 가득했고, 항구는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그림은 바로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장화가 잔뜩 그려진 벽화도 그 기억의 연장이다. 제목이 재밌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라나. 묵호가 잘나가던 시절엔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고샅길 바닥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단다. 그래서 장화는 묵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필품이었던 것. 수많은 사람들이 신고 다녔던 장화가 담벼락 가득 그려졌다.

이처럼 벽화 하나하나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문득문득 가슴 뭉클해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묵호동은 사실 그리 높은 언덕이 아니다. 해발 67m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슴이 느끼는 마을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골목 구석구석 숨어 있는 벽화들을 감상하며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마을 꼭대기다. ‘묵호동 종점’이란 띠 두른 전봇대가 박혀 있고, 그 위로 묵호등대가 우뚝 솟아 있다. 바다의 수호천사를 상징하는 ‘천사날개 포토존’과 불꽃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시구가 새겨진 소공원 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등대 안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다. 눈앞에 검푸른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묵호(墨湖)에 담긴 뜻이 예서 보면 확연해진다. 너른 바다는 가슴 속 앙금을 말끔히 씻어낸다. 상처받은 이에겐 한 잔 소주 같은, 바닷가가 고향인 이들에겐 어머니 젖가슴 같은, 그런 바다다.

●작고 예쁜 어달리 해변… 조각 작품같은 기암괴석 볼만

언덕을 에두른 고샅길은 버스 종점 앞 매점에서 다시 게구석길, 덕장길 등으로 구불구불 흩어진다. 어달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방법은 두 가지. 등대 오른쪽은 묵호 수변공원에서 시작된 ‘등대오름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길이다. 바다 쪽으로 트인 이 길에도 아름다운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등대 왼쪽은 출렁다리 방향이다. 예전 TV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이승기와 한효주가 입맞추는 장면을 찍었다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큰길로 내려 서서 왼편으로 돌면 왜구를 물리쳤다는 호국 문어상과 만난다. 그 옆의 거무튀튀한 바위는 까막바위다. 서울 숭례문에서 정확히 동쪽 방향에 있다는 바위다. 현지 어민들은 이 바위에 경외감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까막바위 굴에 문어의 영혼이 산다고 해서 해녀들도 다가가지 않는다고.

까막바위에서 모퉁이를 돌면 느닷없이 예쁜 마을이 튀어나온다. 어달리다. 모래해변의 길이가 300m, 폭이 20~30m에 불과한 조그만 바닷가 마을이다. 여느 동해안 해수욕장과 달리 경사가 완만한 데다, 모래가 곱고, 수심 1m를 넘지 않는 해변이 바닷가 쪽으로 이어져 있어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낚시 포인트로 명성이 자자해 평일에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넘친다.

기왕 예까지 온 터에 동해 제1경 추암해변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재상 한명회가 추암해변의 절경에 탄복해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촛대바위와 능파대 주위로 파도와 비바람에 깎인 기암괴석이 조각 작품처럼 늘어서 있어 ‘작은 해금강’이라 불린다. 묵호등대에서 삼척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20여분 달리면 나온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강릉분기점→동해고속도로→망상 나들목→묵호 방향→묵호항 순으로 간다. 논골담길은 선어판매센터에서 북쪽으로 300여m 가면 나온다. 묵호등대로 곧장 가려면 일출로에서 논골3길 방면으로 좌회전한 뒤 묵호동주민센터를 끼고 우회전해 곧장 가면 된다.

▲맛집 묵호항은 오징어와 가자미 등의 물회가 유명하다. 가자미 물회의 경우 묵호항 선어판매센터 앞 횟집들에서 1만 5000원이면 맛볼 수 있다. 까막바위 인근 ‘오부자횟집’(533-2676)은 냄비 물회 전문점. 횟집으로는 부흥횟집(531-5209)이 유명하다.

▲잘 곳 묵호항 인근 동해관광호텔(533-6035)과 꿈의궁전모텔(532-9996)은 바닷가에 붙어 있다. 침대에 누워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묵호등대 바로 아래에도 펜션이 있다.

글 사진 동해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2011-11-17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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