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페이지

터줏대감 나무 이야기 | 상수리나무

터줏대감 나무 이야기 | 상수리나무

입력 2011-10-23 00:00
업데이트 2011-10-23 15:30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을 넘어선

상수리나무는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가족 중에서도 가장 굵은 열매를 맺는 나무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상수리나무라고 하면 좀 낯설다. ‘꿀밤나무’라고 불러야 정답이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뒷산 가는 길목에 있는 꿀밤나무 아래 흩어져 있는 열매를 신나게 주웠던 기억이 난다. 막 떨어진 굵다란 꿀밤은 새로 산 구슬처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요즘 도시의 아이들은 만들어진 장난감을 사서 놀지만 그때의 시골 아이들은 자연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스스로 장난감을 만들어서 놀았다. 상수리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꿀밤을 주머니가 터지도록 주워서 구슬치기를 하고 공기놀이도, 팽이 돌리기도 하고 밑동을 잘라내어 칼로 새겨 어설픈 도장을 만드는 것도 재미났다.

아이들이 제일 잘하는 상상의 재주가 보태져 그것들은 얼마나 멋지게 변신했던가. 놀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꿀밤을 구워 먹었다. 상상의 눈으로 보는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쓸모 없는 것은 없다. 쓸모 있는 것을 분별하면서 사람들은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미지 확대
《장자》 ‘인간세’편에는 상수리나무가 등장하여 이런 어리석은 인간에게 훈계를 한다.

목수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위에서 산을 내려다볼 만하였다. 구경꾼들이 저자거리처럼 모여들었지만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그의 제자가 장석에게 달려가 까닭을 물었다. 장석이 말했다.

“그것은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썩고, 그릇을 만들면 깨져버리고, 기둥을 세우면 좀이 먹는다. 그것은 재목이 못 되고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대체 무엇에 비교해 나를 쓸모 없다고 하느냐? 그것은 인간에게 소용이 되는 나무에 비교한 것이리라. 그러나 보라. 저 배, 귤, 유자나무 같은 것은 단 열매가 있어 큰 가지는 부러지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고통 받는 것이다.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사람이나 무엇이나 다 쓸모 있는 것이 되고자 애를 쓰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 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꿈속에서 상수리나무는 우리가 아이였을 때, 쓸모 없는 것들 속에서 즐거울 수 있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지혜를 알려준다. 쓸모 없는 것의 큰 쓸모. 지금, 새로운 상품 외에 모든 것들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폐허 속에서 상수리나무의 말을 곱씹어본다.

나무 목木 변에 즐거울 락樂자를 붙인 상수리나무 ‘역’자의 글자 생김을 보아도 상수리나무는 쓸모 없음을 스스로 즐겁게 생각하는 나무인 것 같다. 고려시대 뛰어난 문장가였던 익재 이제현은 그 호를 ‘역옹’이라 짓고 문집 《역옹패설》을 남겨 이 상수리나무의 ‘쓸모 없음의 큰 쓸모’를 알아보았다.

목수 장석은 크게 자란 상수리나무를 두고 쓸모 없는 나무라 했지만, 실제 상수리나무의 쓰임은 많다. 술통, 수레바퀴 만드는 데, 선박재, 건축재, 가구재로도 많이 쓰이며 숯으로도 활용되는데 연기가 나지 않는 참나무숯은 인기가 좋다.

이 나무의 가장 큰 쓸모는 구황양식으로서의 용도일 것이다. 상수리 열매로 쑨 도토리묵이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막았던 때도 있었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한두 그루만 있어도 마을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상수리나무 뿌리, 줄기, 가지에 의지하여 사는 생명체가 수십여 종이 넘으니, 배고픈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산짐승, 벌레들도 먹여 살린다. 진짜 나무, 참나무라는 이름이 더 미덥게 느껴진다.

참나무는 산 위에서 들을 내내 바라보고 섰다가 들판에 풍년이 들면 열매를 조금 맺고 흉년이 들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실제 그해 내리는 비의 양이 벼와 참나무에게 다른 영향을 끼쳐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한다.

이미지 확대
상수리란 이름도 도토리묵에서 생겨났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간 선조의 수라상에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도토리묵을 자주 올렸다. 선조는 환궁을 해서도 도토리묵을 좋아해 늘 수라상에 올랐다 하여 ‘상수라’라 했고 나중에 상수리가 된 것이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 후원림 속에 큰 상수리나무들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가락국의 시조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묻힌 원형 토분이 있는 이곳은 김해 유적지의 상징적인 곳이다. 이천년의 역사를 가진 수로왕릉은 고려 때까지는 능의 상태가 좋았는데 조선 초에 황폐화되어 선조 시절에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이 지금 모습으로 정비하였다고 한다.

후원의 숲은 여러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도심에서 가까워 짬을 내어 머리를 식히며 산책하기 좋다. 갓 지은 쌀밥처럼 햇빛이 윤나는 가을날, 나무들 사이를 걸으면 마음이 단순해지고 환해진다. 나무의 덕(德)이다. 후원림에 들어가니 고목이 되어 허리가 휘어진 왕버들이 먼저 보인다. 꼬부랑 할머니 왕버들은 구부러진 몸 그 자체로 길고 긴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속에 곧게 뻗은 줄기와 가지들로 늠름한, 힘이 넘쳐나는 상수리나무가 보인다. 가락국의 용맹한 장군이 서 있는 듯한 기상이다.

수로왕릉 후원림의 상수리나무에도 몇 가마니쯤 거뜬히 나올 것 같은 굵은 상수리 열매가 가득 달렸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열매가 떨어져 땅 위를 구른다. “후둑, 툭.” 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참 좋다. 후원 숲을 걷던 사람들이 소리 나는 쪽을 본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상수리를 줍느라고 땅바닥을 살피며 나무 옆을 돈다. 엄마에게 칭얼대던 아이도 열매를 따라 뛴다. 도토리묵을 해 드시려는지 어느새 불룩하게 쳐진 비닐봉지를 들고, 할머니는 꿀밤 줍는 재미에 빠져 땅바닥만 살피신다.

글·사진_ 이선형 시인

많이 본 뉴스

국민연금 개혁 당신의 선택은?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는 현재의 보험료율(9%), 소득대체율(40%)을 개선하는 2가지 안을 냈는데요. 당신의 생각은?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로 각각 인상(소득보장안)
보험료율 12%로 인상, 소득대체율 40%로 유지(재정안정안)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