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9)] 괴한에 허벅지 찔린 남진, 5mm 차이로 구사일생

입력 : ㅣ 수정 : 2011-06-1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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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해도 살의는 감출수 있어 조폭들이 선호”
1989년 11월 4일 오후 9시 50분 서울 중구 장충로 2가 타워호텔. 호텔 카바레에서 공연을 마친 가수 남진(당시 43세)은 일본 연예계 인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를 건장한 20대 남자 3명이 몰래 뒤따랐다. 남진이 벤츠 승용차 오른쪽 뒷좌석에 오르려는 순간, 그들 중 1명이 예리한 흉기를 품 속에서 꺼내 남진의 왼쪽 허벅지를 깊숙히 찔렀다. 남진은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가수 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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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남진

남진의 피습기사는 다음날 신문 사회면에 그리 크게 나지 않았다. 당시는 이미 전성기를 넘긴 때이긴 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로서 다소 섭섭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괴한이 공격한 신체 부위가 배나 가슴이 아니라 허벅지였다는 점에서 언론사들이 덜 위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허벅지를 찔렀다는 것은 생명을 노렸다기보다는 그저 겁을 주기 위한 목적 정도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 사건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조폭들은 왜 허벅지를 공격할까

1989년 11월 04일 서울 중구 장충로 2가 타워호텔에서 한밤중에 조직폭력배들에게 회칼로 허벅지를 찔린후 병원에 입원한 남진.<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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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11월 04일 서울 중구 장충로 2가 타워호텔에서 한밤중에 조직폭력배들에게 회칼로 허벅지를 찔린후 병원에 입원한 남진.<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하지만 이상한 점은 조직폭력배들의 칼부림이 있을 때면 유독 허벅지를 노려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허벅지는 피를 보면서도 최악의 결론에는 치닫지 않아 상대를 겁주기 알맞다는 판단에서일까. 법의학자들은 그 반대라고 말한다. 허벅지 테러는 칼을 꽤 다룰 줄 아는 전문가들의 지능적인 살인 수법이라는 것이다. 아래 사례를 보면 무슨 뜻인지 짐작할수 있다.

사건1

2003년 7월 17일 오전 6시40분쯤 서울 논현동 대로변 포장마차. A(33)씨 등 3명이 B씨를 흉기로 허벅지를 찔렀다. 채권·채무 문제로 서로 심하게 다투다 A씨 일행이 미리 준비한 흉기로 B씨의 허벅지를 여러차례 찔렀고 B씨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사건2

1992년 4월 12일 오후 11시 전주 완산구의 한 당구장. 폭력조직 W파 행동대원 김모(24)씨가 경쟁조직 N파 소속 2명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범인들은 2층 당구장으로 올라가는 김씨의 뒤를 노렸다. 목격자는 경찰에서 20대 청년 2명이 당구장 계단에서 흉기로 양쪽 허벅지를 10여 차례 찌른 뒤 앞길에 대기시켜둔 승용차를 타고 달아났다고 진술했다.

두 사건 모두 피해자가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범인들이 노린 것은 허벅지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는 “조직폭력배가 낀 테러 사건일수록 피해자의 자상은 허벅지 부위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면서 “조폭들이 허벅지 부위를 공격하는 이유는 대퇴부의 동맥이나 정맥을 끊어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가할 수 있는 반면 나중에 자신은 재판정에서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변명할 여지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살해를 하더라도 살의는 감출 수 있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검찰은 최근들어 조직폭력배 등이 연관된 허벅지 관련 흉기 범행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의학적으로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전체 혈액 중 20~33% 정도 피를 쏟으면 사망에 이른다. 하지만 그 과정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실제 많은 피가 빠져나가 사망하는 ‘실혈사’(失血死)와 출혈을 하는 동안 급하게 혈압 등이 떨어져 사망하는 ‘실혈성 쇼크사’다. 피를 흘린 채 오랜 시간 방치될 경우에는 실혈사로, 대동맥 등이 절단돼 한꺼번에 급격히 피가 빠져가갈 때는 실혈성 쇼크사로 사망한다.

전문가의 칼 솜씨는 다르다?

허벅지는 살이 많다는 이유로 갖은 수난을 겪어 왔다. 역사 속의 태형(笞刑)도, 학교의 체벌도 주로 허벅지나 엉덩이에 집중됐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많이 맞으면 신체 어느 부위를 막론하고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곤장을 맞고 장독(杖毒)으로 죽는 게 이런 경우다. 맞은 부위에 피가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정작 심장에는 혈액이 부족해져 사망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 우리 몸의 피 6~7ℓ 중 3분의 1 이상이 허벅지 한 군데의 상처로 몰리기도 한다.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부검을 마친 의사가 형사에게 흔히 던지는 말이다. 과연 전문가의 칼솜씨는 존재할까. 부검의들은 이른바 ‘전문 칼잡이’가 낸 자상은 한해 수백구의 시신을 부검하는 의사들도 실제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국과원 관계자는 “영화에서처럼 사람 죽이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 현실에서는 흔치 않은 만큼 일반적으로 살인자도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주저흔이 남기 마련”이라고 했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남진은 “이젠 가해자와 형님, 아우하면서 지낸다.”면서 모두 용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찔했던 당시 상황은 똑똑히 기억했다.


“흉기가 허벅지를 관통했는데 대동맥이 끊겼으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대동맥을 5㎜ 정도 벗어났는데, 저에게도 또 가해자에게도 천만다행이었지요. 하늘이 도운 순간이었던 거죠.”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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