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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이 만난사람] 어버이날 맞아 사모곡 부르는 국민가수 심수봉

[김문이 만난사람] 어버이날 맞아 사모곡 부르는 국민가수 심수봉

입력 2011-05-06 12:00
업데이트 2011-05-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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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어머니께 바친 ‘조국이여’… 한 맺힌 50년 풀어내셨죠”

어머니는 ‘얼’을 남기고 아버지는 ‘길’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삶에 있어서 ‘정신적 줏대’와 살아가는 ‘올바른 길’을 의미하겠다. 군에 입대한 병사들이 어쩌다 언론에 잠깐 인터뷰를 할 때면 대부분 첫마디가 “어머니가 가장 보고 싶습니다~.”이다. 우렁차게 외치지만 눈가에는 어느새 살짝 눈물이 고인다. 반사적으로 울먹이는 그 목소리, 아마 어머니가 ‘자신의 얼’인 까닭이 아닐까. 또 그럴 것이, 누구나 그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그들과는 아무런 가족적 연관이 없더라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지니 말이다. 이런 감정은 나이를 먹었든 안 먹었든 남녀노소 다 마찬가지일 터. 이 대목에서 문득 생각나는 노랫말이 있다. ‘~정안수 떠 놓고 이 아들의 공 비는/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아아아 쓸어안고 싶었소~’ 음미할수록 ‘찡’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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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만난 심수봉씨는 “실향민인 어머니는 총살당한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과 한으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지난달 27일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만난 심수봉씨는 “실향민인 어머니는 총살당한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과 한으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국민가수 심수봉(56)씨는 어머니의 ‘얼과 한’을 동시에 품고 있다. 심씨는 데뷔 28년 때 실향민인 팔순의 어머니에게 소중한 선물을 했다. ‘조국이여’라는 노래를 만들어 직접 불러 드렸던 것. 노랫말은 이러했다. ‘눈 덮인 대지에도 뿌리 있으면 푸른 잎 다시 피는데/무슨 사연으로 갈라섰나 마지막일 줄 몰랐나/부모형제 기다린 세월을 눈물로 만들고 무정한 기차야/내 님은 어디 두고 너만 혼자 이제야 오나/조국이여 서러운 조국이여 이별 땜에 병 난 내 조국이여~’

그러자 어머니는 3박4일을 꼬박 울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심씨의 외할머니)가 생각나서였음은 물론이다. 그 누구도 비명에 간 외할머니로 인한 어머니의 상처를 끄집어내지 않았고, 오래도록 켜켜이 쌓여 있던 한을 풀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딸이 ‘조국이여’라는 노래로 어머니의 한을 풀어헤치고 쓸어안았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서럽도록 울었고 이를 본 딸도 옷깃을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

이처럼 심씨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얼과 한’이 교차된다. 어버이날을 맞는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어버이날 디너쇼를 앞두고 지난달 27일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심씨를 만났다. 인근 미용실에 막 다녀오는 중이었다. 단정한 머리에다 재킷차림이었다. 먼저 8일 저녁 삼성동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리는 디너쇼 준비에 대해 물었다.

“편안한 공연으로 찾아주시는 여러 부모님의 마음과 기분을 풀어드리고 또 품격을 높게 채워 드리고 싶습니다. 제 음악을 잊지 않고 아껴주시는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이번에는 ‘피아노 연주’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그의 대표곡 ‘그때 그사람’을 시작으로 ‘백만송이 장미’ ‘당신은 누구시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엔 난 몰라’ 등 주옥 같은 히트곡들을 특별하게 선사하겠다고 다짐한다. 예를 들어 곡마다 묻어 있는 감성 스토리와 사랑, 숨겨진 인생사 등도 중간중간에 소개하겠다며 심씨는 웃는다. 최근 10년 연속 디너쇼 매진 기록을 세우고 있어 이번에도 그 기록이 이어질지 관심거리다.

어머니 장형복(85) 여사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는 “이번 공연에도 어머니를 초대했다.”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20대 처녀 때 3남매와 함께 평양에서 진남포항을 떠나 월남했지요. 그러니까 1·4후퇴 당시였지요. 어머니는 월남 후 26세 때 충남 서산에서 환갑이 다 되셨던 아버지를 만났고 곧 저를 낳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등으로 호적에 올리지도 못한 상태였지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어머니는 저를 임신했을 때 여러 가지로 힘들어서 유산을 시키려고 했나 봐요. 제가 3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졌고 곧바로 아버지는 돌아가셨지요. 외삼촌은 저를 고아원에 맡기려고까지 했습니다.”

심씨의 어머니는 원래 가무에 능해 아버지의 제자로 들어갔다가 인연이 됐다. 심씨의 아버지 심재덕씨는 가야금 명인이자 판소리 명창으로 당대 유명했던 심정순 선생의 아들로 서산에서 민속학 명문가로 소문나 있었으며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서 가야금을 강의하곤 했다. 큰아버지 심상건씨 또한 가야금 명인으로 이름을 날려 심씨 가문은 ‘민속학의 바흐’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뿌리깊은 음악가 집안이었다. 심씨의 고모 심화영씨는 승무 무형문화재 보유자였다.

심씨는 아버지에 대해 “기억이 없다.”면서 “(내) 인생을 돌아보면 시작부터 슬펐고 건강하지 않은 영혼과 거부당한 삶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생활력이 강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의 음악적 재능을 알고 피아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열을 쏟기도 했다. 그때가 심씨의 나이 4살. 딸에게 음악적으로 뭔가 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까봐 그랬다고 한다. 심씨의 어머니는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비명에 간 어머니 때문에 늘 가슴 아파했다.

“외할머니는 공산당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했다고 어머니한테 들었습니다. 그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어머니는 월남했고 참혹한 생각을 잊지 못해 항상 분노하면서 살았지요. 어느 날 갑자기 부모 자식 간에 생이별을 했으니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지요. 경의선 열차가 남북으로 연결되던 날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다가 문득 외할머니 생각으로 눈물짓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곡을 만든 것이 ‘조국이여’입니다. 실향 50년이 돼서야 비로소 맺혀진 한을 토해내게 해드린 셈이지요. 어머니 앞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얼마나 우시는지…. 다 울고 나서는 ‘이제 속이 시원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심씨에게는 어머니가 낳은 남동생 둘이 있으며 사이좋게 지낸다고 귀띔했다. 자연스럽게 심씨의 자녀들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어머니로서) 시행착오도 많이 했다. 아이들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잘 커줬다. 아이들에게만큼은 삶의 실패를 안 겪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 둘은 모두 군 복무를 마쳤으며 첫째는 컴퓨터회사에 다니고 둘째는 대학 재학 중이다. 막내딸은 뮤지컬과 연기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어릴 적 살았던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화제를 돌렸다. 심씨는 본명이 심민경으로 1955년 7월 서산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게 음악뿐이었던 것 같아요. 동네에 악극단 풍물패가 지나가면 자다가도 뛰쳐 나갈 정도로 소리를 무척 좋아했지요.”

어린 나이였지만 트럼펫 소리로 듣던 ‘타향살이’의 감동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또한 이미자의 ‘정동대감’을 구성지게 불러 어릴 때부터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런 딸을 본 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서산읍에 단 한 대뿐이라는 피아노가 있다는 집으로 데려가곤 했다. 이렇게 해서 2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다. 초등학교 때는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과 국어에도 재능을 발휘했다. 문학반에서 특별활동까지 할 정도였다.

중학교 입학 당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신경 인프레’라는 병 때문에 인천 무의도에서 요양을 했다. 이후 인천 인화여고에 입학했고 음악 공부에 심취해 드럼 등을 배웠다.

그는 “열정적으로 호감이 가지 않는 과목은 잘 듣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피아노, 기타, 드럼 등 여러 악기를 폭넓게 다루는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생산된 그의 노래는 대부분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을 했다. 트로트 음악계에서는 전문 작사가, 작곡가가 만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심씨는 자작을 고집한다. 하여 ‘트로트 아티스트’라는 얘기를 듣는다. 아울러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미워요’ ‘비나리’ ‘백만송이 장미’ 등 히트곡 대부분의 노랫말에 자신의 삶을 담았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또 다른 한’을 얘기했다. “광주에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광주에는 상처의 소리가 있다. 그것을 사랑으로 보듬고 풀어줄 노래가 필요하다.”고 말해 ‘광주의 한’을 노래로 만들 생각임을 내비쳤다(그의 남편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상처가 있다). 이는 음악적 소명이자 숙제라고 덧붙였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심수봉은…

1955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심민경. 1973년 인천 인화여고를 졸업한 뒤 명지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 자작곡 ‘그때 그사람’으로 입상하면서 데뷔했다. 1979년 ‘그때 그사람’으로 첫 독집앨범을 냈으며 그해 KBS 올해의 신인상, MBC 10대 가수상 등을 받았다.

제5공화국 출범 직후인 1981년 방송 출연이 금지됐고 1984년 방송 출연이 해제되자 곧바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다. 이후 ‘사랑밖에 난 몰라’(1986), ‘미워요’(1988), ‘우리는 타인’(1991) 등의 음반을 발표했다.

1993년부터 2년 동안 MBC 라디오 프로그램 ‘심수봉의 트로트가요 앨범’ 진행을 맡기도 했다. 1994년 ‘비나리’ 음반을 발표하고 난 뒤 1979년 10·26 사건 당시의 상황 등을 담은 자서전 ‘사랑밖에 난 몰라’를 발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백만송이 장미’(1997), ‘아, 나그네’(1999), ‘사랑했던 사람아’(2001), ‘개여울’(2005), ‘이별 없는 사랑’(2005) 등을 잇따라 발표했다. 2009년에는 ‘엠넷(Mnet) 아시안 음악 어워즈’ 명예의전당에 올랐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2011-05-06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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