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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철의 영화 만화경] ‘안티크라이스트’

[이원철의 영화 만화경] ‘안티크라이스트’

입력 2011-04-15 00:00
업데이트 2011-04-15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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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트리에 감독의 낯설고 위험한 구원

부부는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아기는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아기가 왜 책상 위로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창 밖에 내리던 눈을 만지고 싶었던 걸까. 창문을 열고 난간에 선 아이는 곧장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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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윌렘 데포·오른쪽)와 여자(샤를로트 갱스브르)는 깊은 슬픔에 잠긴다. 심리 치료사인 남자는 여자에게 숲 속의 외딴 오두막 ‘에덴’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남자는 여자의 고통을 치유하려고 노력하지만, 슬픔과 죄의식에서 비롯된 그녀의 불안 증세는 점점 심해진다. ‘안티크라이스트’는 구원을 갈망했던 남자와 여자에게 벌어진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는 니체의 영향 아래 있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영화는 이성에 바탕을 둔 서구 계몽주의에 저항하는 것이었고, 인물은 기존의 도덕관념에 철저히 도전했다. 폰 트리에 영화의 중심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선하다고 믿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스스로 ‘동시대의 비소(卑小)함 앞에서 위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여긴 니체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감독이다.’라고 공언한 폰 트리에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므로 ‘안티크라이스트’라는 제목에서 당장 떠오르는 건 니체의 저서 ‘안티크리스트’다. 비록 폰 트리에는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지만 말이다.

책 ‘안티크리스트’가 단순히 기독교를 공격하는 작품이 아니듯, 영화 ‘안티크라이스트’ 또한 직접적으로 종교를 화두로 삼진 않는다. 그렇다면 니체의 의도를 따라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가치 체계의 전복’을 기도하는 작품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폰 트리에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을 탐구하고자 하며, 낯설고 위험한 구원을 희망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답을 구할 마음이 없다. 예술은 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래에 어떤 질문에 도달했는지 따져 본다면 ‘안티크라이스트’는 실망스럽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질문의 근처를 서성이다 손을 놓는다. 폰 트리에의 영화 가운데 주제를 다루는 손길이 가장 안일하며, 스타일 면에서도 가장 게으른 편에 속한다.

폰 트리에는 영화의 말미에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에게 영화를 바친다.’고 써 놓았다. 영화의 몇몇 이미지는 타르콥스키 영화에서 그대로 따왔고, 외딴집과 광기, 종말 혹은 절망, 희생과 구원은 (타르콥스키의) ‘희생’과 ‘안티크라이스트’를 뚜렷이 연결한다. 타르콥스키는 후기에 이르러 인간의 나약한 운명과 요원해 보이는 구원을 놓고 투철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에 비해 폰 트리에에겐 확신이 부족하다. 영화가 불안과 광기를 다루더라도 감독은 주제를 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안티크라이스트’의 전면에 드러나는 건 감독의 불안이다. 무엇이 그를 불안으로 몰았을까.

데뷔 이후 폰 트리에의 영화는 언제나 평단을 양극으로 나누었지만, 영화제는 매번 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해 주었다. 2000년 전후에 폰 트리에는 세계 예술영화를 지배하는 감독이었다. ‘도그빌’ 이후 그 지위는 바뀌었다. 여전한 스캔들과 상관없이,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인물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우울의 산물이다. 그의 우울은 ‘정상에서 벗어난 자의 스트레스’에서 기인한다. 그는 관객이 자신의 심리 치료 과정에 동참해 슬픔을 나누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아니다.

영화평론가
2011-04-1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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