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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명함 버리기/이광형 KAIST 미래산업 석좌교수 바이오 및 뇌공학

[열린세상] 명함 버리기/이광형 KAIST 미래산업 석좌교수 바이오 및 뇌공학

입력 2010-08-06 00:00
업데이트 2010-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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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가지 원칙을 정하였다. 최근 2년간 사용한 적이 없는 물품과 자료는 없앤다. 또 하나는 보직을 위하여 필요했던 것들은 없앤다. 지난주에 4년간 수행하던 교무처장 보직을 마무리하면서 세운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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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형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미래산업 석좌교수
이광형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미래산업 석좌교수
거의 모든 대학 시스템이 그렇듯이 KAIST에서도 교무처는 무척 많은 일이 집중되는 곳이다.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 학사관리, 교수인사, 업적관리 등을 다룬다. 따라서 업무량이 많고 심리적인 중압감도 크다. 모든 교수 학생이 주시하기 때문에 어항 속에서 일하듯 해야 한다.

책상 서랍을 보니 여러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나는 처음부터 교무처장 사무실에 오래 근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적인 짐을 들여오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치우려 하니 많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버린다.”는 원칙에 따라서 정리하니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수백장이나 쌓여 있는 명함들이었다. 명함들은 부피가 크지 않다. 개인 연구실로 가져가는 것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많은 명함들이 교수 연구실에 돌아가는 나에게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씩 들여다봤다. 명함의 이름을 보며 얼굴을 떠올린다. 그 얼굴을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생각해 봤다. 교무처장이라는 보직을 수행하기 위해 만난 사람이라면 내가 더 이상 연락할 일이 없을 것이다. 쓰레기통으로 던진다. 이와 같이 하여 만들어진 것이 “보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없앤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나 개인에 연관된 명함은 잘 챙겨야 한다. ‘본질적인 나’와 ‘겉옷’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겉옷은 언제든지 벗겨지는 겉모습이다. 직책이란 겉옷을 걸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직책이 높은 사람에게 굽실거리다가도 그 직책을 그만두면 돌아서는 것도 ‘본질적인 나’와 ‘겉모습’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마음 속으로 존경을 받는다면, 그 사람의 직책과 상관없이 죽는 날까지 불변하는 본질적인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명함을 하나씩 버리면서 생각했다.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도 이와 같을 것이다. 보직을 마치면서 보직과 관련된 명함을 하나씩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한순간 한순간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었다. 나를 붙잡고 있는 끈을 하나씩 끊어내는 일이 마치 해탈을 경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삶의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기분이기도 했다. 인생을 마감하는 연습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난 4년 동안 만나는 사람 거의 모두가 학교 일에 관계된 사람이었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학교 일에 관계된 것이었다. 따라서 학교의 모든 것들이 나를 사슬처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보직을 그만두고 나니, 그 많던 사슬이 기적처럼 풀어져 버렸다. 나에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보직을 면한다는 발령장 종이 한 장이다. 종이 한 장이 나를 이렇게 바꾼 것이다. 결국 종이를 보고 변한 나의 마음이다.

즐겨 읽는 법정 스님의 글에 ‘버리고 떠나기’가 있다. 법정 스님은 잎을 모두 떨구고 서 있는 후박나무를 보면서, 왜 인간은 나무처럼 홀가분하고 시원하게 버리지 못하는가 질문을 던졌다. 법정 스님이 수행자 시절 연산 스님은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신체까지도 겉모습으로 보는 말이다.

나도 이번에 작은 것이지만 ‘버리고 떠나기’를 실습해 본 셈이다. 인간관계를 논하는 책을 보면 ‘인맥을 넓혀라.’, ‘네트워크를 잘 구축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입고 있던 겉옷과 그 부속품을 벗어버리면서 자유를 느꼈다. 나를 붙잡고 있던 그 많던 것들을 버리고 나니 홀가분해지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 어떤 모습을 보일까. 잡고 있던 모든 끈들을 놓아버리니 홀가분한 생각이 들까. 아니면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칠까. 지금 장담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마음이 하도 많이 변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소망한다. 나 자신은 명함을 버리며 느꼈던 그런 자유를 즐기며, 인생의 끈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2010-08-0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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