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아들아 미안하다/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아들아 미안하다/진경호 논설위원

입력 2009-09-24 00:00
업데이트 2009-09-24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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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아이가 반기(反旗)를 들었다. 이사를 못 가겠다, 그냥 이 집에서 살겠노라며 드러누웠다. “거기도 친구 많아… 학교도 가깝고.” 어르고 달랬지만 불알친구들과 헤어져 새 학교 낯선 울타리로 들어서야 하는 두려움을 덜어주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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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호 논설위원
진경호 논설위원
타협했다. 이사는 OK, 전학은 NO! 좀 떨어진 동네에 그나마 강북에서 좀 나은 중·고등학교가 있다는 얘기에 혹해 단행한 ‘주민등록 이전사업’. 이사는 다섯해 전 그렇게 이뤄졌다. 고백하건대 주민등록법을 지켜야 한다는 투철한 준법의식은 없었다. 달랑 주소만 옮겼다간 학교의 거주 실사(實査)에 걸려 강제로 전학 조치되는 불이익-상응한 대가라 해야 옳지만-을 받을까 두려웠다. 그 뒤로 중학교 진학 때까지 큰 아이는 1년 반, 둘째는 3년 반을 하루 왕복 1시간씩 승용차와 버스로 등하교하는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안쓰러웠지만 앞집 옆집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으니 다들 그리 사는가 보다 자위하며 헤죽댔다.

한데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진행된 지난 열흘 신문지면은 어지러웠다. ‘소득탈루’니 ‘다운계약서’니 하는 갖가지 의혹들이 난무했다. 그 가운데서도 ‘위장전입’이란 단어가 유독 많았다. 총리 후보 정운찬씨, 장관 후보 이귀남·최경환·임태희씨, 그리고 대법관 후보 민일영씨가 위장전입 대열에 섰다. 교수도 위장전입, 공무원도 위장전입, 판·검사도 위장전입.

하기야 검사 시절 네 차례 위장전입한 김준규 검찰총장도 지난달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사과 몇 마디로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다른 후보자들도 뭐가 걱정이겠나. 이쯤 되면 위장전입은 그저 나이 들면 생기는 검버섯 정도가 돼 버린 것 아닌가. 선친 묘소 이장을 위해 임야를 매입하려고 잠시 주소를 옮긴 사실이 드러나 고위공무원 승진 때 탈락했던 선배의 친형을 비롯해 매년 위장전입으로 기소돼 수십, 수백만원의 벌금을 무는 수백명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만 딱할 뿐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를 위한 위장전입을 달리 보자는 논의는 헛헛하다. 까닭 모를 허기를 부른다. 범법 가운데 눈감아 줄 만한 게 뭐가 있는지 사회 전체가 머리 맞대고 찾아보자는, 집단 공모의 제의…. 차갑고 미끄러운 뱀이 혀를 낼름거리며 알몸을 휘감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진다. 범법은 범법이고, 능력은 능력인가. 능력과 자질은 기본사양이고, 준법과 도덕은 선택사양인가. 준법과 도덕은 능력이 아닌가. 이런 나라였나. 서구 의회에서 최대의 욕이 ‘You lie’(거짓말이야)인 건 준법을 도덕보다 낮춰봐서가 아니다. 교통신호 위반까지도 청문회에서 문제 삼을 정도로 준법은 기본이고, 그 바탕 위에서 도덕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 TV뉴스에 위장전입 얘기만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신문도 치웠다. 장거리 통학이, 위장전입을 꿈도 못 꾼 소심한 아빠의 요령부득 때문이었음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법을 어겨도 잘만 장관이 되는 우리 사회의 가치 빈곤을 너무 일찍 아이가 알아버릴까 봐. 라디오 토론프로에서 어느 교수가 말했다. “그래도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르는 후보들 모습이 반면교사가 되지 않겠느냐.” 유행어가 귓전을 때린다. ‘그건 네 생각이고~.’ 바로 세워야 할 사회의 가치가, 너무 멀다. 아니, 가치를 세울 날이 따로 있는 게 아닐 터이건만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려 애쓴다. 우린 비겁하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2009-09-2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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