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학벌 중심… 12일의 한국 남성상 계보찾기

돈·학벌 중심… 12일의 한국 남성상 계보찾기

입력 2009-09-12 00:00
업데이트 2009-09-12 00:00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씩씩한 남자 만들기】 박노자 지음 푸른역사 펴냄

책 제목이 ‘씩씩한 남자 만들기’이다. 언뜻 제목만 보면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 기르기를 알려주는 아동교육서나 이상적인 남성상을 찾도록 도와주는 자기계발서가 떠오르기도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의 ‘씩씩한 남자 만들기’(푸른역사 펴냄)는 학문적으로 접근한 한국의 남자 이야기이다.

이미지 확대
1890~1900년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한국의 남성상은 유교적 전통사회의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에서 ‘담력 있는 거칠고 용감한 남성’으로 변화한다. 1894년 동학농민군 백산농민대회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결합한 남성적 담력의 한 예이다.(왼쪽) 양반들이 혐오하던 평민의 ‘폭력적 남성성’은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면서 필요한 조건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힘겨루기가 아이들의 놀이가 되기도 했다.(가운데) 오늘의 한국사회에는 경제력을 중요시하면서도 과거 ‘훈련주의’가 녹아들며 ‘경제 전사’가 되기를 요구한다. 기업에서 신입사원의 효과적인 훈련방법으로 해병대 캠프를 택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오른쪽) 푸른역사 제공
1890~1900년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한국의 남성상은 유교적 전통사회의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에서 ‘담력 있는 거칠고 용감한 남성’으로 변화한다. 1894년 동학농민군 백산농민대회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결합한 남성적 담력의 한 예이다.(왼쪽) 양반들이 혐오하던 평민의 ‘폭력적 남성성’은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면서 필요한 조건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힘겨루기가 아이들의 놀이가 되기도 했다.(가운데) 오늘의 한국사회에는 경제력을 중요시하면서도 과거 ‘훈련주의’가 녹아들며 ‘경제 전사’가 되기를 요구한다. 기업에서 신입사원의 효과적인 훈련방법으로 해병대 캠프를 택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오른쪽)
푸른역사 제공
●구한말 급격한 변화 겪으며 ‘몸의 훈련’ 중시

책은 ‘한국에서 남자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오늘날 각광받는 ‘한국의 남성상’으로, 자본주의의 보편적 원리인 ‘경제력’과 함께 ‘학교’ 간판을 가진 학력 자본의 소유자를 꼽는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정기적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남성일수록 자본주의적 생산 능력이 좋다는 것이 근대 세계의 통념이다. 구미 남성이 마치 중산계층의 표시처럼 조깅을 하고 몸을 만드는 것도 이런 까닭일 수 있다. 동유럽이나 중남미에서도 ‘근육이 없는 남성’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명문대 졸업생’과 ‘엘리트 대기업 사원’이라면 그 정도의 (체력적으로 떨어지는)결함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심지어 근육질형 남성보다는 밤을 새면서 잔업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남성이 ‘철인’ 소리를 듣는다.

저자는 ‘경제력’이 최우선인 한국 남성상 속에 서로 무관해보이는 ‘훈련주의’가 묘하게 녹아 있다는 데에 흥미를 느끼며 한국 남성상의 계보를 캐낸다. 학창시절에서 군복무, 직장생활에 이르는 기간동안 거듭되는 훈련으로 한국 남성들에게 ‘훈련주의’는 일상이다.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것을 ‘악몽’이라고 하면서도, 남자라면 군대에 갔다와야 한다거나 군대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해병대 캠프에서 극기훈련을 받기도 한다. 이런 ‘이중적 모습’이 어떻게 익숙해진 것일까.

저자는 이 원인을 1890∼1900년대에 진행된 급격한 변화에서 찾는다. 퇴계, 율곡 등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전통사회의 남성상은 보통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이었지만, 19세기 말 나라가 위태로워지면서 ‘몸의 훈련’이 사회 전반에 중요한 기본으로 인식됐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사대부를 비롯한 선비들은 비상한 학습 능력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하고, 고상한 몸가짐을 갖춘 이들을 대장부라 불렀다. 세상의 부조리에 화를 내는 비분강개의 정신을 갖췄지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폭력 행사라는 것은 ‘상것’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존립이 위협받으면서 선비들도 행동을 요구받게 됐다.

●미래 남성상은 ‘배려’와 ‘돌봄’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일본의 한반도 점령이 가시화되자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일간지들이 새로운 남성상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켰다. ‘제국신문’은 부국강병, 식산흥업(殖産興業) 등의 담론을 전개했고, 학회지 ‘서우’는 강장(强壯) 활발한 남성을 국가 융성의 기본으로 보며 고정란의 상당부분을 ‘체육 장려’에 할애했다. 급진적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편집자 박은식은 잡지 기고에서 “문사를 익히고 무예를 배우는…방법이 실로 활동적이요…감히 동작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몸을 기를 수 있단 말인가.”라며 새로운 남성적 국민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국민적 체력을 독립과 근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은, 소위 ‘신체적 민족주의’는 운동장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운동회, 체조, 군사 훈련 등을 애국적이고 심신건전한 국민이 되는 핵심 과정이라 여기면서, 운동장에서 몸을 지속적으로 훈련하고 정해진 규율을 정확히 수행하는 이상적 남성상이 길러졌다. 이 분위기는 유럽 열강에서 들어온 스포츠 문화와 만나 더욱 확산된다.

1890~1900년대 남성상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던 저자는 ‘한국의 남성상의 지향점은 어디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박정희 시대의 ‘체력 단련을 위해 노력하는 국민’, 재벌 시대의 ‘수출 전사’, 2000년대 ‘웰빙족’까지 당대의 남성상을 언급한 저자는 이를 대신할 미래의 남성상으로 ‘배려’와 ‘돌봄’을 할 줄 아는 남성을 제안한다. 가족 안에서는 가사와 육아를 분담하고, 사회에서는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감히 자신을 던지면서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폭넓은 의미의 ‘배려’와 ‘돌봄’이다. 1만 29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2009-09-12 19면
많이 본 뉴스
종부세 완화, 당신의 생각은?
정치권을 중심으로 종합부동산세 완화와 관련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1가구 1주택·실거주자에 대한 종부세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종부세 완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완화해야 한다
완화할 필요가 없다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