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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남성] ‘상아탑 성폭력 퇴치’ 갈길 멀다

[여성&남성] ‘상아탑 성폭력 퇴치’ 갈길 멀다

입력 2004-09-15 00:00
업데이트 2004-09-1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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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도 사회에 못지않은 문제점이 존재하지만,대학이라는 이유만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성폭력도 그 가운데 하나다.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도 학교의 명예가 걸려 있고 관련자들이 학생이라는 이유로 쉬쉬하며 넘어가기 일쑤이고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를 입곤 한다.지난 10일과 11일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 성 상담소’가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 가진 ‘대학내 반(反)성폭력 문화 확산을 위한 워크숍’에 비친 대학의 모습을 살펴본다.

성폭력은 아는 사람이 저질러

F대학을 다닌 A씨는 4학년 마지막 학기에 J교수를 만났다.J교수가 집으로 전화를 걸고 A씨에게 근처에 왔으니 나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방송국일을 하던 A씨는 전화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듣지 않았다.나아가 종강 모임에서도 거부하는 A씨를 불러 억지로 자신의 옆에 앉히고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될 것”이라며 어깨를 쓰다듬었다.몇 개월 뒤 상담을 의뢰한 A씨에게 성폭력상담소는 “명백한 성폭력”이라면서 “총여학생회에 신고하라.”고 권유했다.

총여학생회 주재로 A씨와 만난 J교수는 “내 행동이 부담이 됐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을 성폭력으로 보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강변했다.그는 오히려 “한 사람의 말만으로 학내와 다른 학교,사회 일간지에까지 이를 공론화시켜 본인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결국 지루한 공방 끝에 성폭력 인정과 공개사과 등이 이뤄지지 않은 채 J교수가 A씨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워크숍에서 ‘대학내 성폭력 사건 지원과정 매뉴얼’을 발표한 박노상숙 ‘가족과 성 상담소’ 간사는 “대학내 성폭력 사건은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 사건이 대학내 성폭력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지적했다.먼저 대학내 성폭력은 서로 아는 사이에서 이뤄지곤 한다.특히 교수나 강사가 관련된 성폭력 사건은 문제제기도 어렵고 사건화돼도 대학의 명예와 직결되면서 저항이 더욱 크다.박 간사는 “학생 간 성폭력도 주위의 시선 등 사건을 드러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공동체 문화가 바뀌어야 대학내 성폭력도 사라져

대학내 성폭력은 신입생 환영회나 동아리 모임,세미나 뒤풀이 등 공동체 문화와 관련된 것이 많다.Q대학의 과총회 뒤풀이에서 한 학생이 ‘마징가 제트’를 남성의 성기로 가사를 바꾸어 노래하고 “창녀가 없으면 강간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한 것도 한 예다.이 자리에 있던 후배가 실명으로 문제를 제기한 뒤 온라인에서 논쟁이 붙자 교수진의 개입으로 과내토론이 벌어진 뒤 가해자는 사과문을 썼다.박노상숙 간사는 “대학내 성폭력 사건의 당사자는 물론 공동체의 책임 있는 반성과 대책이 마련돼야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한 성폭력 문제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가 공개되면 ‘뭔가 문제가 있으니 이런 일을 당하지.’라는 식의 ‘2차 피해’로 연결되기도 한다.

반(反)성폭력 학칙은 부족한 점 많아

서울대 성희롱·성폭력 상담소의 연구결과 국내 4년제 대학의 90.9%인 160개 대학이 현재 반(反)성폭력 관련 규정을 두고 있다.1998년 부산대를 비롯한 일부 학교에서 시작된 데 이어 2001년 교육인적자원부가 ‘남녀차별 금지법령의 시행에 따른 업무처리 요령’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성희롱 등의 내용을 포함시킬 것을 촉구한 이후 많은 대학이 규정을 만들었다.연구에 참여한 신상숙 서울산업대 강사는 “2002년 6월 교육부 집계에 따르면 전체 대학의 94.6%가 성폭력 관련 규정을 별도로 제정하거나 학칙의 개정에 반영했다.”면서 “규정은 제정됐지만 실질적으로 얼마나 효력이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신 강사는 대학내 사건 처리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것은 가해자 징계와 처벌보다는 피해자 보호조치라고 강조했다.그는 “성폭력 사건의 조사·처리기간 동안 사건 당사자들의 수업 조정,공간 분리 등 피해자 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규정이 마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 강사는 또한 피해자 지원도 현실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성폭력 규정을 마련한 160개 대학 가운데 피해자에 대한 법적 지원과 의료 지원을 명시한 학교는 각각 58%와 4.4%에 불과하다.그나마 지난 1월 30여개 대학의 성폭력 상담실무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실제로 법적 지원과 의료 지원을 한 사례는 각각 1건에 불구했다.

신 강사는 “피해자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기준과 지침을 마련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지원과 서비스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상담기구의 형식보다는 인력과 예산,총장 등 의사 결정자들의 정책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2004-09-1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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