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 살기 엄마로 살아가기] 1부.정체성 고민하는 엄마

[여성으로 살기 엄마로 살아가기] 1부.정체성 고민하는 엄마

허남주 기자
입력 2003-03-18 00:00
업데이트 2003-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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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발언권이 세다고 말한다.경제권은 물론 자녀양육도 전적으로 아내 몫이라 말하는 남자가 많다.그러다 보니 위기에 이른 교육현실조차 여성,어머니에게 그 원인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실제로 여성들은 모성의 이름으로 기꺼이 가정을 이루고,아이를 낳고,키우지만 늘 “과연 잘 하고 있는가?”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부딪히고,때로 아이가 잘못되면 자책으로 괴로워한다. 딸로 태어나 여성으로 성장해서 아내로,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지만 여성의 정체성과 어머니의 역할은 때로 충돌한다.희생의 상징인 지난 시대의 어머니와 비교하면 오늘의 엄마노릇은 편해 보인다.그러나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춰 여성이 변해야 한다는 절대명제는 여성을 괴롭히고 동시에 어머니를 괴롭힌다.여성이면서 어머니인 데 대한 정체성 문제로 고민해야 하는,이 시대에도 여전히 녹록치 않은 여성들의 삶을 3부로 나눠 짚어본다.

●딸이 바로 30년전 내모습

딸들은 말한다.“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엄마처럼 희생하면서,엄마처럼 고생하면서,엄마처럼 할 말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비판은 여성적 관점에서 바라본 한 세대 전 여성의 삶의 실체다.물론 이 말을 할 때 딸은 엄마편이 아닐 때가 더 많다.엄마를 이해하기보다는 정면으로 엄마를 비난하기 위한 말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속깊은 곳에는 타인을 위한 배려만이 있을 뿐 정작 인간으로서,여성으로서 ‘자신’을 빠뜨린 채 살아온 엄마에 대한 딸의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남편이나 아들,남성들이 모성을 담보한 생활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부담없이 즐길 때 딸은 어머니의 삶이 남녀평등한 시대와 떨어져 있음에 눈뜨고,자신의 삶에 드리운 불평등의 냄새를 맡게된다.그렇게 딸은 여성으로 자란다.

“그래 그래,엄마처럼 살지 말거라!”,한숨을 섞었지만 소망을 담아 내 딸은,내 딸만은 좋은 세상을 살 것을 어머니는 기원한다.“너도 살아봐라.여자가 별 수 있나….”라고 얼핏 듣기에는 악담처럼 ‘뻔한 여자의 삶’을 지적하는 어머니도 있다.그러나 딸로부터 이런 비난을 들을 때 어머니들은 똑같이 회상에 젖어들고 만다.딸이 쏟아내듯 던진 불평은 자신이 바로 20년 전 혹은 30년 전,자신의 어머니에게 쏟아놨던 말이기 때문이다.

‘왜 여성으로서의 삶과 어머니로서의 삶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동시에 지키고,만족시킬 수는 없을까.’하는 문제의식이 딸의 불평에는 분명 들어 있다.“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테야.”

어머니처럼 안 살겠다고 그렇게 선언했지만 ‘정서적 문제의 대물림’에서는 자신만이 예외일 수 없다.‘어머니처럼 좋은 어머니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현대 여성’에게도 강박관념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의 어머니가 기준이기 때문에,‘엄청나게 여자들이 살기 편해진’ 지금의 여성은 대부분 그의 어머니만큼 부지런하지도,그만큼 살림을 잘 하지도,그만큼 품이 넉넉하지도 않아 보인다.“요즘 여자들은∼”으로 운을 떼면 쏟아질 흉은 웬만한 그릇에는 담을 수도 없을 것 같다.

결혼한 직장 여성들이 갖고있는 ‘슈퍼우먼 콤플렉스’도 전업 주부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기준삼아 자신을 비교했기 때문이라는말에 직장여성들은 한결같이 동의한다.

●능력 있는 여자,능력 없는 여자

격변하는 세상은 여성에게 다양한 역할을 요구한다.

희생하고,인내하던 옛날의 어머니상은 영원한 칭송의 대상으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덕목이다.그외에도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는 다양하고 유능한,시대에 맞는 여성상까지 함께 요청된다.그래서 전업 주부도 직장을 가진 여성도 힘들긴 마찬가지다.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또는 좋은 아내가,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더욱이 여성이 맵고짠 살림솜씨만으로 전적으로 인정받는 시대는 지났다.“나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아내가 좋다.”며 결혼 초,직장을 그만두게 했던 남편도 은근히 ‘능력 있는 마누라’를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한다고 말하는 여성들도 있다.

전업주부 이정화(43·서울 성북구 돈암동)씨는 요즘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있다.주변에 살림만 하던 전업주부들이 하나 둘 파트타임 직업을 찾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아예 ‘집에서 노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막상 직장을 갖는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남편이 실직을 한 것도 아닌데 좀 어렵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은 내 남편 기죽이는 일 같아 더 어렵다.”고 말했다.“남들처럼 고액과외는 못 시켜도 학원 갔다오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 차려줘야 한다.”고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요즘 전업주부라는 말이 ‘무능’과 동의어로 느껴진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단다.

더욱이 엄마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마냥 좋아하던 아이들도 초등학교 상급학년만 되면 직업 가진 친구엄마의 명성이나 세련됨,풍족함을 부러워하기도 한다고 공허함을 표현하는 여성들도 많다.

20년 경력의 고교 교사 서경은(47)씨는 “아침마다 ‘엄마,학교 안갔으면 좋겠다.’고 말리던 딸에게 ‘네가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직장 갖겠다.’고 약속했었다.그런데 정작 5학년이 되자 딸은 ‘직장을 갖고 있는 엄마가 더 근사하다.’고 말했다.”고 경험을 털어놓았다.아이에게 작은 문제만 터져도 일하는 엄마탓으로 여겨져 “자아 실현한답시고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조금만견뎌라.아이들도 직장가진 엄마를 더 좋아한다.”고 말해주며 서로 격려해준다고 말했다.

●달라진 세상… 사회 보수성은 여전

여성의 위치가 유사이래 가장 높아졌다는 이 시대,오히려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비명이다.대부분 직장남성들은 월급은 명세서에서나 확인할 뿐,아내의 손에 고스란히 들어간다며 ‘여자들 세상’이라 확신한다.

그렇다면 남녀차별은 시효가 지난 사어(死語)인가.아내들은,여성들은 지난 시대의 삶과 확연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가.

대부분 여성들은 “여자들 사는 것은 시대가 지나도 비슷하다.”고 말한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하나 참으면 된다.”는 말로 어려운 삶의 고비를 넘긴다는 것이다.지난 시대,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랬듯이.

주부 남현숙(38·서울 서초구 반포동)씨는 때때로 찾아드는 무력감의 원인을 “나만 참으면 남편이나 애들이나 다 편안하다.”는 생각으로 넘겨버린 일들이 때때로 덫처럼 나를 죄는 것 같다.”고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렇게 인내의 한계에 이를 때쯤 아내는 남편을 향해 쏟아놓는다.“나도 귀하게 자랐다.”“나도 귀한 딸로 자랐다.”

이 말 한마디는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다.이쯤이면 ‘아내는 한 손에 꽈∼악 쥐고 산다.’는 남편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한다.가정의 평온을 유지하려면 말이다.

어떤 남편은 불뚝 성을 냈다가도 아내의 이 말 한마디에는 그만 풀이 죽는다고 말했다.“아내는 무엇이든 받아줘야 하는 사람으로,어머니 같은 존재로 그냥 믿겠거니 하고 지냈다는 생각,그동안 ‘남의 딸’을 너무 고생시켰다는 생각으로 번쩍 정신이 든다.더욱이 나도 딸이 있는데….”라면서.

내 딸은 좀 나은 세상살기를 바랐던 부모들 덕에 현재의 중년 여성들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았다.집안내 사소한 남녀차별은 있었지만 그래도 ‘달라진 세상’이라 믿었다.그러나 결혼과 함께 부딪힌 이 사회의 보수성은 여성들에겐 참으로 드높은 벽이었다.

그 벽에 부딪혀 상처입기도 하지만 여성이나 인간으로서의 자신보다는 ‘엄마처럼 사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궁상맞아 보이고,답답해 보이던 어머니의 삶을 자신도 답습하고 있음에 소스라차게 놀라게 되지만 ‘가정의 평화’‘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모성 앞에서 평등이나 여성성은 단숨에 허물어지고 만다.

최근 회사원 김영형(44·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씨는 동갑내기 아내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일요일이면 하루종일 텔레비전 리모컨을 돌리며 베개만 껴안고 지내도 불평하지 않았던 ‘무던한’ 아내가 옹골차게 내뱉은 말,“잠들어 있는 나의 여성의식을 깨우지 말라.”는 말 때문이다.“솔직히 놀랐어요.대학시절 활동적이었던 아내가 결혼 후 꼭 내 어머니처럼 억척같이 아끼고 살림만 했어요.그런 아내의 입에서 ‘여성의식’이란 말이 새삼스럽게 나왔으니까요.아내도 장인어른의 귀여운 막내딸이었는데 말입니다.”

허남주기자 hhj@
2003-03-1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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