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조용수

[씨줄날줄] 조용수

박찬 기자
입력 2001-02-17 00:00
업데이트 2001-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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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세무조사,불공정 거래행위 조사에 이어 언론대책문건이 공개돼 정가에 언풍(言風)이 거세다.언론탄압이라는 야당의 공세에 1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자민련 송석찬(宋錫贊) 의원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일어난 ‘민족일보’사건 재판에 당시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역할을 거론하며 이총재의 정계 은퇴를 주장해 파문이 확대되고 있다.송의원의 이총재 공격에 한나라당 김정숙(金貞淑)의원은 ‘용공행위를 애국행위로 둔갑시켰다’며 또 다시 ‘색깔론’을들고나왔다.그러나 언론사 발행인을 사형에 처한 것은 일제때에도 유례없는 언론탄압이자 쿠데타정권이 자행한 ‘사법살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민족일보 조용수(趙鏞壽)사장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용공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것이다. 더욱이 그에게 신문사 설립자금을 줬던 것으로 알려진 이영근씨는 1990년 정부에 의해 국민훈장이 주어져 그가간첩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민족일보는 4·19혁명이 가져온 자유의 공간에서 우리민족의 비원인 통일문제와 소외된 근로계층에 대해집중적으로지면을 할애한 신문이다.당시 유력지가 5만부 정도를 발행할때 3만 5,000부를 발행하며 가판에서는 1위를 달렸다.창간 3개월 정도만 발행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경이적이다.

조용수는 6·25전쟁중 일본으로 건너가 민단에서 주요간부를 지냈다.북송교포를 실은 열차가 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철로를 베고 눕는 등 재일동포의 북송을 적극 반대했고 비슷한 시기 조봉암(曺奉岩)을 사형으로 몰아간 진보당사건이 일어나자 조봉암의 구명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자유당 정권이붕괴하자 고국으로 돌아와 경북 청송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한다. 당시혁신계였던 그는 ‘평화통일론’과 ‘비미비소(非美非蘇)’를 주장했다. 통일의 방향은 ‘민족적·자주적’입장에서“강대국의 입김에 예속되어서는 안되며 미국이나 소련 어느쪽이든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는것이었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이산가족상봉,경의선연결사업등 남북화해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보면 조용수의혁신적인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죽음과 현재 야당과 언론들이 주장하는언론탄압,어느 것이 진정으로 언론탄압인지 돌아보게 한다.

박찬 논설위원 parkchan@

2001-02-17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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