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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불과서 대선후보 되기까지·이인제씨 정치역정

경선불과서 대선후보 되기까지·이인제씨 정치역정

황성기 기자
입력 1997-11-05 00:00
업데이트 1997-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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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4일­신한국내 첫 경선출마 선언/5월∼7월­TV토론회뒤 지지도 급상승/9월13일­경선결과 불복 독자출마 선언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는 지난 3월24일 신한국당에서 처음으로 경선출마를 선언했다.당시 이인제 후보는 일간지 여론조사 대상에서 제외될 정도로 푸대접을 받았다.하지만 출마선언 직후 지지도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탔다.출마선언전 2∼3%에서 4월초 8.9%로 올랐다.언론사들의 앞다툰 TV토론회는 지지도를 급상승시켰다.5월 중순 MBC토론회 직후 13%,KBS토론회 직후인 6월 20일 조사에는 22%대로 껑충 뛰어 올랐다.7월초에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제외시킨 조사에서 당내 경선후보 6명 가운데 최고인 36%를 기록했다.

7월21일 실시된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2차투표에 올랐으나 6천920표 대 4천622표로 고배를 마셨다.경선직후 이후보는 “경기도정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그러나 두 아들의 병역면제시비에 휘말린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가 급락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최측근을 중심으로 독자출마가 준비됐다.신한국당 비주류 일각에서 제기된 후보교체론도 독자출마를 부추켰다.9월 8일 도지사직 사퇴의사를 밝힌 이후보는 출마와 출마포기 사이를 오갔다.김영삼 대통령 등 여권 수뇌부의 집요한 만류와 경선불복의 비난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고심끝에 9월 13일 독자출마를 선언한다.그러나 여론의 반응은 냉담했고 지지도도 떨어졌다.세력화도 미흡해 신한국당 원외위원장 13명만이 그를 따랐다.10월 13일 장을병의원이 가세,원내의석이 확보되면서 창당준비를 가속화시켰다.10월 14일 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를 거쳐 31개 지구당 창당을 마치고 대선의 대장정에 올랐다.<황성기 기자>

□이인제씨 정치역정

▲48년=충남 논산 출생

▲68년=경복고 졸업

▲72년=서울 법대 졸업

▲81∼83년=대전지법 판사(사시 21회)

▲88년=13대 국회의원 당선(통일민주당 안양갑)

▲92년=14대 국회의원 당선(민자당)

▲93년=노동부 장관

▲95∼97년=경기도지사

▲97년 3월24일=신한국당 경선출마 선언

▲7월21일=경선 결선투표서 이회창 후보에 6천920표 대 4천622표로 낙선.

▲8월27일=김영삼 대통령 청와대 오찬회동서 독자출마 만류

▲9월8일=경기도지사직 사퇴의사 표명

▲9월13일=대선 독자출마선언 및 신한국당 탈당

▲9월18일=경기도지사직 사퇴

▲10월7일=신당 창당발기인대회(부산)

▲10월13일=무소속 장을병 의원 입당

▲10월14일=가칭 국민신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대구)

▲10월28일=신한국당 이만섭 고문 탈당

▲10월30일=신한국당 김운환 한이헌 의원 입당

▲11월3일=신한국당 박범진 이용삼 김학원 원유철 의원 입당

▲11월4일=중앙당 창당 및 전당대회서 대선후보로 선출
1997-11-0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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