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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박갑천 칼럼)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박갑천 칼럼)

박갑천 기자
입력 1995-11-25 00:00
업데이트 1995-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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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것들」은 이렇게 시작된다.김진섭의 명역으로해서 많이 읽히면서 진실로 슬프게 하는것이 무엇인가 생각케 했던 향기짙은 수필이다.

오늘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아이들 울음이 아니라 삐약삐약 울면서도 눈물은 안보이는 병아리울음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자기 죽을날 모르는 점쟁이의 야살이,맥주를 마셔대면서 화장실 안가는 것을 자랑하는 곧은 창자의 넉살이,저먼저 구원받아야할 사람이 오히려 대중을 향해 구원을 외치는 소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여름날의 매미소리 그리면서 허우룩함에 떨고 서있는 나목의 마지막 잎새가,목숨 얼마 안남은 단풍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찬미하는 탄성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제겨레 젖혀두고 멀리 해와 달에게 자식혼처 구하는 두더지 어버이가,추워서 소름돋은 짧은치마밑의 가녀린 안짱다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뒷동산 동백나무들은 어디 갔나,어령칙이 가물거리는 얼굴들하며 변해버린 고향산천이,그리고 어린날 짝사랑했던 암암한 여인의 요절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책장에 꽂힌 헌 책갈피에서 보게 되는 젊은날의 까맣고도 튼실한 머리칼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어미 숨거둔줄 알리 없는 갓난아기의 칭얼댐이,백혈병 진단 내린걸 모르는 어린이의 해맑은 웃음에 울가망해있는 어버이의 얼굴그늘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말글 바로 못쓰면서 남의 말글 잘하는 걸 내세우는 지식인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제 부모형제와는 척져있는 주제에 나라와 겨레위해 몸바치겠노라고 소리소리 높이는 「우국·애국지사」의 얼렁수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담비털 만지면서 개털로 여기고 개털 만지면서 담비털로 여기는 눈뜬 소경의 시답잖은 판단력자랑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친애할 자격도 없는 사람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하는 물탄 꾀입술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희극배우보다 더 희극적인 엉너리 연기를 하면서 관중들의 숨넘어가는듯한 비웃음소리를 못듣는 뻔뻔스런 얼굴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이전투구 행짜 못버리면서도 청강에 좋이 씻은 백로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갈가위트레바리꾼이 우리를 슬프게한다.죽지 떨어진 주인한테 냉갈령 부리는 지난날의 측근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것이 어디 한두가지랴.하지만 가장 슬프게 하는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줄 모르고 계속 슬프게 해주고만 있는 사람들 아닌가 싶다.
1995-11-2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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