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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기「세기와더불어」허동찬씨의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5·끝)

새전기「세기와더불어」허동찬씨의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5·끝)

허동찬 기자
입력 1993-05-07 00:00
업데이트 1993-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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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시절:14/공청창립멤버 날조/일제기록 원용하며 명단은 변조

김일성은 지금 「ㅌ·ㄷ」을 「반제청년동맹」으로 개칭한 그 이튿날인 1927년8월28일에 이 반제청년동맹의 정수분자들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가 이날 길림 북산공원 약왕묘의 지하실에 최창걸·김원우·계영춘·김혁·차광수·허율·박소심·박근원·한영애등 「반제청년동맹」핵심들과 청년공산주의자들을 불러 거기에서 동맹을 결성하는 모임을 가지고 그가 「보고」까지 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주①>

그런데 김일성은 일찍이 타도제국주의동맹 「ㅌ·ㄷ」을 날조할 때 최형우가 기술한 「ㅌ·ㄷ과 김일성」을 유용하면서도 그 속에 있는 지명,인명은 몽땅 변경하고 전혀 다른 지명,인명을 가져 오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날조할 때에도 일본기록 「조선공산청년회의 건」을 이용하였다.

○날조작업 난항

조선공산청년회가 바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은 68년 전기가 나온 후 4년이 지난 1972년이다.그만큼 이 날조작업은 난항을 겪어야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 해에 발간된 「인민의 염원을 지니시고」가 주를 달아 「조선공산청년회(주·조선공산청년동맹을 말함)」라는 형식으로 이 일본기록을 소개하였다.<주②>그후 이 일본기록의 변조 서진판에서는 일관하게 김일성(당시 이름은 김성주)이외의 모든 인명이 삭제되었다.따라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공산청년회의 건」의 원문을 보아야 한다.여기에는 29년5월 초순에 길림성성 대동문외 모선인방에 허소·한석훈·이금천·성숙자·김동화·신영근·김성주(김일성)·차석외 수명이 모여서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1)이 원문은 조선공산청년회의 결성 시기가 29년 5월 상순으로 되어있는데 72년 전기는 그 변조문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27년에 생긴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모순된 주장은 78년의 「불멸의 자욱을 따라」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이 전기는 27년 8월 28일로 「동맹」결성일을 확정하면서 그 해설 본문에 「5월 상순…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란 일본기록 변조판을 기재하고 있는 것이다

2)원문은 청년회 결성 장소를 「길림시 대동문 밖의 어떤 조선사람의 집」이라 하였다.그런데 원문에 나오는 이금천의 집은 다른 일본기록을 보면 길림시 대동문 밖으로 되어 있다.청년회는 이 곳에서 결성된 것이다.<주③>

한편 북한에서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결성 장소에 대하여서는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그것이 북산공원 약왕묘 지하실이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은 아마도 회고록이 처음일 것이다.그들은 「공청」날조 후 24년을 경과해서야 겨우 그 결성장소를 「확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3)북한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은 것은 날조된 「공청」의 인명을 밝히는 문제였다.김일성은 92년에 와서 처음으로 회고록에서 이제까지 그 어떤 전기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인명을 대량으로 등장시켰다.최창걸·김원우·계영춘·김혁·차광수·허율·박소심·박근원·한영애 등이란 것이다.이 인명중 허율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정의부·국민부 계통인 청소년들이다.

○새 인물 대거 삽입

물론 이 인명도 일본기록과는 전혀 다르다.조선공산청년회 회원들인 허소·한석훈·이금천·성숙자·김동화·신영근·차식 등과는 맞지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허율·허소라는 두 인명이다.일본기록 원문에서는 남한공산청년회 회원이었던 허소가 29년 5월에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여 그 책임비서가 된 사실이 밝혀져 있다.

한편 회고록에서는 29년 여름에 김일성이 차광수를 처음 만났고 그후 그와 3년유여의 세월을 동지로 보내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차광수는 어느날 김일성을 불러서 허율이라는 주목할만한 사람이 있다고 소개했다.허율은 용정에 있는 동흥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혁명을 했는데 법정대학에 가려고 얼마전에 길림으로 왔다가 학업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차광수와 김일성은 허율을 길림에 파견한 사람이 화요파의 김찬이라는 말을 듣고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대동문 밖의 이금천의 집」으로 갔다.얼마후 그들은 강동마을에서 허율과 만났고 마침내 그를 「ㅌ·ㄷ」의 핵심으로,반제청년동맹과 공청의 지도성원으로 키웠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주④>

○허율·허소는 동인

이러한 기술을 보면 허율이란 바로 허소를 말한다.또 일본측은 이금천 집의 주객이 김찬이 아니라 허소였고 김일성도 거기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상의 사실을 두고 문제에 깊이 파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필자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 뿐이다.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허율과 1929년 여름에 처음 만난 일을 감동적인 필치로 소상하게 설명했다.그런데 김일성은 자기가 27년에 처음 만난 허율을 29년의 공청 창립멤버에도 집어넣고 있다.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이란 날조물은 지금도 문제투성일 뿐인 것이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1」205면 ②「인민의 염원을 지니시고 1」82면 ③평전 215면 ④「세기와 더불어 1」327면 이하
1993-05-07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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