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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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5/“만경대서 야학개설” 새 전기에 삽입/한문독음 미숙… “동료학업 지도” 어불성설/“일재수업 거부”­“모범생” 상반된 기술/“외조부담당 성경·한문과목 질색” 동급생 증언

김일성이 팔도구소학교에서 전학한 창덕학교는 조선에서 제일 먼저 포교를 시작한 개신교인 북미 장로파에 속하는 대동군용산면하리교회가 1909년에 설립한 5년제 사립학교이다.학생수가 1백명이 넘는 당시로서는 큰 학교였는데 하리교회를 세우는데 공로가 있었던 그의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었다.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강양욱도 당시 교원을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가 담임을 한 학급에 편입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강양욱학급 편입

현재 보존되어 있는 학교를 보면 ㄱ자형인 기와집으로 교실이 세개 있고 그 모통이는 직원실로 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창덕학교시절에 대한 우상화를 극단적으로 하고 있다.「무지개 비낀 만경대」의 속편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인데 이 책의 창덕학교시절은 크게 두 체계로 나뉘어 그의 「언행」을소설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째 체계는 그가 부친의 말을 「명심」하여 둘도 없는 수재며 모범생이 되었고 지덕체가 겸비되고 있었다는 선전이다.그 중 전자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⑴공부:그는 교실에서는 학습규율을 잘 지키고 집에서는 깊은 밤까지 남포등을 켜서 공부하였다.

⑵학습조:「학습조」를 조직하여 자주 결석하는 학생의 집에 가서 학교에 나오라 하였다.또 그들을 데리고 뒤산에 올라 그들이 배우지 못한 내용을 가르쳐 주었다.<주1>

밤에 잠 자지 않는 것은 항일무장투쟁시기 이후의 김일성의 습성이다.어용학자들은 그의 이러한 후천적특성을 소년시절에까지 거슬려 올리고 있다.

「학습조」이야기는 83년에 나온 「조선을 알아야 한다」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인데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새로 「야학」까지 등장시켰다.

○처음 한글 배운듯

「나는 가난 때문에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방학때 만경대에 가서 야학을 열었다.처음에는 1학년용 조선어독본을 가지고 우리 글부터 시작하였다.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되는 소박한 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우상화를 식민지시대의 현실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당시는 일제가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어느 정도 가르치게 하고 있었다.만주의 팔도구소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지 못한 김일성은 전기들에서 과대 선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마도 이때 처음으로 창덕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사인의 김일성」에는 창덕학교시절의 그의 동급생이 한 증언을 싣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성주는 별로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특히 그의 외조부가 가르치고 있던 성경공부는 싫어하는 것같았다.그분이 가르쳤던 한문도 그에게는 질색이었다」<주2>

만경대에서 우리 말로 한문을 읽어 5세때 불학이문장이었다고 선전되고 있는 김일성은 중국학교인 팔도구소학교에서 정과목인 국문(한문)을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창덕학교시절의 그의 동급생들이 보면 대체로 이런 정도의 한문실력밖에 없었다.그 원인의 하나는 한문을 중국어로는 읽어도 우리 말로는 읽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따라서 한글을 다른 아이에게 가르칠만한 실력은 그에게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또 다른 예가 있기 때문이다.북한에서는 창덕학교가 당시 사용하고 있었던 국어독본의 「국」자를 김일성이 「일」자로 고쳐서 일어독본으로 하였다고 선전하고 있었는데 이번 회고록에서는 「나는 일본말을 익히느라고 애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조선사람은 응당 조선말을 해야 한다고 깨우쳐 주었다」고 강조했다는 말이 나온다.<주3>

이 일화는 애국심의 관점에서 보면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는 학교 수업은 일본어로 하고 있었다.그는 교수용어가 일본어인 식민지 학교에서 일본어교과서를 거부하고,배우는데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학생들이 일본말을 할때마다 일일이 조선말을 하라고 막았다.

그렇다면 결국 일본말로 진행되는 수업도 소홀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자연 그의 학업은 떨어지게 되고 학과성적도 불문가지로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학업면에서 뒤진 그가 「학습조」나 「야학」을 연다는 것도 어불성설로 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일행적에 치중

창덕학교시절에 대한 우상화작업을 위하여 어용학자들이 설정한 체계중 둘째 체계는 김일성이 일제와 지주,자본가를 증오했다는 이야기들이다.

빈민들이 사는 평양의 보통강가 토성랑을 보았다든가 창덕학교가 있는 칠곡에 전깃줄을 치러 오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길 복판에 큰 돌을 놓았다든가,요컨대 「왜놈과 지주 자본가는 한 배속이다」는 증오심 일변도의 계급교양이다.다 아는 투이기 때문에 그 설명은 생략하겠다.

<주해> ①「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의 영광스러운 어린시절2」 부제 「조선을 알아야 한다」 1983년 간 35∼57면 ②「4인의 김일성」 2백37면 ③「세기와 더불어」 85면
1992-12-2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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