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번영」 함께 노래할 그날이/남북통일축구 서울경기를 보고…

「겨레의 번영」 함께 노래할 그날이/남북통일축구 서울경기를 보고…

김문수 기자
입력 1990-10-24 00:00
업데이트 1990-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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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 놓은 날이 쾌청할 때 우리는 그것을 길조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남북통일축구 서울경기를 하기 위해 받아 놓은 날이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는 것은 통일과 연관되어 어떠 상서로움이 뻗칠 징조인 것만 같다. 그래서 들뜬 마음으로 경기장에 갔다. 그런데 그때,내가 어렸을 적의 일이 떠올랐다. 한국전쟁으로 더없이 불안해 있던 집안 어른들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설마 저 애들이 클 때까진 화평한 시대가 오겠지』

그때 어른들은 한숨과 함께 곧잘 이런 말씀들을 내뱉곤 하셨다. 그러나 그 「설마」는 이루어지지 않고 40년이 흘렀다. 나는 그때 그 어른들을 흉내 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우리 애들이 장성하게 되면 판문점으로 해서 금강산도 구경하고 백두산도 오르겠지』

어찌 이러한 바람이 나뿐이겠는가. 그것은 잠실경기장을 메운 모두의 마음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경기장에 이렇듯 많은 인파가 몰릴 까닭이 없는 것이다.

3시 정각. 스피커에서 선수입장을 알리자 요란한 박수소리가 경기장을 뒤흔들어 댔다.

고적대를 앞세우고남북의 선수단이 똑같이 입장했다. 양쪽의 선수들이 두 줄로 서서 어깨를 붙이고 입장한 것이다. 어느 쪽이 앞이고 어느 쪽이 뒤가 아니었다. 남쪽 선수는 빨간 유니폼,북쪽 선수는 하얀 유니폼으로 나란히 입장한 것이다.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그 예기치 못한 선수입장 장면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어 손뼉을 쳤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힘껏 손뼉을 쳤다.

이윽고 경기가 진행됐고 경기 초반에 북쪽의 오영남 선수에게 길기철 주심이 황색 카드를 내보이는 일이 벌어졌다. 룰에 어긋난 태클을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공정한 판정임을 모를 리 없는 많은 관중들이 「우우」하고 야유를 보냈다. 카드까지 꺼낼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본다면 그것은 야유가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함성이었다. 아마 길기철 주심도 그렇게 들었으리라. 잠깐잠깐 경기가 중단될 때마다 남북의 선수들이 사이좋게 물을 나눠 마시는 장면도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북쪽의 슛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관중들의모습 또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전ㆍ후반의 경기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고 결국은 전반전 17분 만에 남쪽의 황선홍 선수가 터뜨린 한골로 승부가 가려졌다. 그러나 1 대 0의 스코어 그 자체로 기뻐하는 관중들은 없는 듯했다. 이기면 뭣하고 지면 또 어떠냐는 생각들이 머리 속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종목의 경기들도 남과 북을 오가며 벌일 일이요 또 운동경기 말고도 무슨 명목이든 내세워 그렇게 남쪽사람과 북쪽사람들이 오고 가는 일이 잦아지게 됐으면 하는 마음들인 것이다. 때문에 이번의 축구경기는 관중들을 열광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관중들의 마음 탓이겠는가. 양쪽의 선수들,양쪽의 임원들,양쪽의 취재진 그 모두의 가슴 깊게 새겨진 통일의 염원 탓이 아니겠는가.

주심의 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를 마친 양쪽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섰다. 그리고 옷을 바꿔 입기 시작했다. 빨간 유니폼과 하얀 유니폼으로 나뉘어졌던 두 팀이 한 팀이 되고 말았다. 적백색 유니폼을 입은 한 팀이 된것이었다. 각 선수가 한 몸에 빨간 유니폼과 흰 유니폼을 입은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흰 아랫도리에 빨간 윗도리를 입은 선수가 북쪽에서 온 선수이고 빨간 팬티에 흰 웃도리를 입은 선수가 남쪽의 선수였지만 서로 옷을 바꿔 입은 선수들은 그렇게 나눌 필요야 없지 않느냐며 나는 나를 나무랐다. 나도 모르게 내 눈이 빨간 팬티와 흰 팬티를 가리어 보려했기 때문이다.

누가 남쪽이든 또 누가 북쪽이든 우리는 원래 단군의 한 자손으로 동포가 아닌가. 그 동포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은 동포요 또 서로 힘찬 포옹을 나눈 동포가 아닌가.

그 동포들은 한 무리를 지어 경기장을 한바퀴 돌기 시작했다. 동포인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면서. 이러한 선수들과 관중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치는 노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 노래의 노랫말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독립을 염원하던 어두웠던 때 지어진 노랫말인 것이다. 그러나 독립과 함께 분단의 뼈아픔을 겪으며 45년의 세월을 허송세월 해 와야만 했던 우리는 그 노랫말의 「독립」을 「통일」로 바꿔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의 소원 「통일」이 하루속히 이루어져 그 노랫말은 「우리의 소원은 번영…」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북남통일축구 평양경기」가 열렸던 모란봉 5ㆍ1경기장을 끼고 흐르는 대동강과 「남북통일축구 서울경기」가 열린 잠실종합운동장을 끼고 흐르는 두 강물이 서해에서 서로 만나 한 바닷물이 되듯 우리도 그렇게 만나 바닷물처럼 큰 힘을 지닌 겨레여야만 된다.

경기장을 나와 걷다가 나는 잠실고수부지가 보이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의 축구경기가 계획되기 이전에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서 그곳을 통일기원 유등제의 장소로 정해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유등제를 올리려고 받아 놓은 날이 공교롭게도 바로 오늘,남북축구경기가 벌어진 그날이요 또 장소가 바로 그곳 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실고수부지를 내려다 보며 합장을 했다.

『우리의 소원은 번영이라고 노랫말이 바뀌어져 불리는 날이 어서 오게 해 주십사』고.<김문수 작가>
1990-10-24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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