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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중심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종’소리 울리는 ‘길’[서울 로드]

    조선의 중심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종’소리 울리는 ‘길’[서울 로드]

    조선 통금·해제 알리던 보신각종서울신문 균열 보도에 모금 운동1980년대 국민 힘 모아 다시 제작전차·가로등·주상복합·주택단지국내 최초의 기록이 즐비한 거리소설가 구보처럼 천천히 걸어볼까조선부터 구름처럼 사람 몰리던 곳고관대작 피하기 위해 ‘피맛길’ 생겨해방 후 예술가·민주화운동의 길로 종로는 서울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이름에 ‘길(路)’을 담고 있다. 종이 울리는 길이란 뜻이다. 조선 초기 도성을 여닫고 인정(人定·통행금지)과 파루(罷漏·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종을 매단 종루(보신각)가 있던 데서 유래했다. 요즘에는 한 해를 보내고 새해의 평안과 희망을 기원하며 찾는 보신각이, 조선 시대에는 일상을 통제하는 국가 시설이었다. 같은 공간이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와 기능을 품은 셈이다. 보신각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의 종은 국민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1984년 서울신문이 보신각종에 생긴 균열을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됐다.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모금 운동이 이어졌고, 국민 손으로 다시 세웠다. 조선 시대에도 ‘종로’는 한양의 중심이었다. 광화문 남쪽으로 뻗은 세종대로는 관청이 늘어선 육조거리였고, 그와 직각으로 놓인 종로는 팔도의 물자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운종가(雲從街)’로 불렸다. 동대문(흥인지문)과 서대문(돈의문)을 잇는 이 거리에는 독점적 영업권이 있는 육의전(명주·종이·어물·모시·비단·무명)이 있었다. 이곳에선 때때로 탐관오리를 공개처형함으로써 국법의 엄중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광화문우체국 맞은편에 표지석으로 남아 있는 혜정교가 그 무대였다. 육조거리와 종로거리가 마주치는 곳인 동시에 죄인을 다스리는 우포도청 앞이어서 공개형을 치르기에는 최적이었다. 팽형(烹刑) 또는 부형(釜刑)으로 불렸는데,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담그는 공개형이란 의미다. 다만, 삶는 흉내만 내 경각심을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권력의 서슬을 피하기 위한 작은 길도 있었다. 말[馬]을 피[避]하기 위해 만든 곳이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고관대작을 피해 서민들이 이용하던 좁은 뒷길, ‘피맛골’이다. 해방 이후에는 문인과 언론인, 예술가의 집합소였고, 독재정권 때는 경찰을 피해 시위대가 숨어드는 해방구였다. 1974년 지하철 1호선 공사 때 일부가 사라진 뒤 종로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3가까지 사잇길이 남았다. 길 양쪽에 해장국과 생선구이, 빈대떡을 파는 식당과 술집이 즐비했다. 2009년 청진동 재개발로 피맛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비판이 제기됐다. 이미 개발이 진행된 곳을 제외하고 종로2가에서 종로6가에 걸쳐 있는 피맛골을 수복재개발구역으로 지정해 예전 모습을 재현하기로 하고, 2012년 종로3가~종묘 구간에 대한 정비사업을 완료했다. ‘청진옥’ ‘서린낙지’ ‘한일관’ 같은 노포가 인근으로 옮겨져 명맥을 잇고 있다. 종로는 근대 문물이 가장 빨리 유입된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돈의문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최초의 노면전차가 개통됐다. 1900년 전차가 야간 운행을 시작하면서 정거장과 매표소를 밝힐 불이 필요했다. 최초의 전기 가로등 3개가 들어섰다. 덕분에 종로의 밤은 대낮처럼 밝고 활기찼다. 일제강점기 종로는 민족의 자존심을 건 격전지였다. 일본인이 명동과 충무로 등 남촌 일대 상권을 개발했다면, 청계천 북쪽 종로 상권엔 조선인이 많았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과 드라마 ‘야인시대’로도 유명한 김두한의 주무대가 이 일대인 까닭이다. 김두한의 흔적이 남은 곳들도 근래까지 꽤 있었다. 김두한이 한때 기거했고, 한국기원 근처여서 지방에서 올라온 바둑기사들이 많이 묵었던 종로 YMCA 옆골목 ‘종로 용일여관’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1980~90년대에 안동식 장터국밥과 석쇠불고기를 파는 ‘시골집’으로도 유명했지만, 2020년 재개발로 사라졌다. 1930년대 종로2가에 있던 화신백화점(현 공평동 종로타워 자리)은 최첨단 문물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1935년 화재 이후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건물로 재건됐다.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일루미네이션이 설치된 핫플레이스였다. 창업자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밀착해 조선 최고 갑부가 된 인물로, 훗날 해방정국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제1호 검거자로 구속됐다. 1934년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구보는 전차에서 내려 이 길을 배회한다. “구보는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구보와 모던보이가 거닐던 경성의 랜드마크 화신백화점은 1970년대까지 명맥을 이었지만, 1980년 부도에 이어 1987년 철거 수순을 밟았다. 화신백화점 자리에서 멀지 않은 북촌의 한옥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데몬헌터스’를 통해 세계적인 유명세를 탔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 디벨로퍼’가 고민 끝에 남긴 흔적이다. 1920년대 ‘건축왕’ 정세권(1888~1965)은 북촌과 익선동 일대에 한옥 단지를 조성했다. 100평 규모의 사대부 한옥이 아니라, 서민도 살 수 있도록 10~40평대로 공급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수도나 전기가 들어오도록 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북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통왕’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과 함께 1930년대 ‘경성 3대 왕’으로 불릴 만큼 부를 일궜지만, 삶의 궤적은 전혀 달랐다. 친일파로 이름을 남긴 다른 둘과 달리 정세권은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조선어학회에 사옥을 기증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문을 당했고, 뚝섬에 있던 3만평 땅과 재산, 건설면허를 빼앗겼다. 그럼에도 지원을 이어갔고 1957년 ‘큰 사전’의 간행을 이끌어냈다. 훗날 고향의 단칸 농가에서 숨진 그가 남긴 것은 ‘큰 사전’과 쌀되, 밥공기, 수저 한 벌뿐이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종로3·4가로 들어서면 개발독재 시대의 잔재가 눈에 띈다. 애초 이 일대는 2차세계대전 말기 미군 공습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소개(疏開) 공지대였다. 목조건물 밀집지대에 소이탄이 떨어질 경우 불이 옮겨붙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중간에 빈터를 마련한 것이다. 1960년대 종묘 앞 일대 ‘종삼(鍾三)’은 길이 1㎞, 넓이 5만㎡의 땅에 2200여 동의 무허가 판잣집과 대규모 사창가가 뒤섞인 슬럼가였다. 역대 서울시장 중 가장 굵은 족적을 남긴 ‘불도저’ 김현옥 시장은 1966년 판자촌을 쓸어버리고 1968년 ‘나비 작전’이란 이름으로 남은 사창가를 없앴다. 그 자리에 세워진 ‘세운상가’ 지구는 한국 최초이자 최대의 주상복합 건물군이다. 당대의 건축가이자 3공화국 핵심들과 교분이 남달랐던 김수근이 설계했다. 1㎞ 길이의 거리가 보행로가 될 수 있도록 입체화시켜 데크로 잇고, 1~4층에는 상가를, 5층 이상은 아파트를 두는 주상겸용 복합건물군을 배치하는 ‘큰 도시 속에 작은 도시들’ 콘셉트였다. 현대상가를 시작으로 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 등 8개 대형건물이 이어진 형태다. 1960년대 후반 세운 지구는 서울의 핵심 상권인 동시에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입주하던 최고급 아파트였다. 하지만 영광은 짧았다. 1970년대 신세계, 미도파에 이어 롯데백화점까지 을지로 일대에 문을 열자 상권의 중심이 움직였다. 강남 한강변에 현대·한양 등 대형 고급아파트가 건립되자 재력가들의 주거도 움직였다. 끝으로 1970년대 김중업이 설계한 삼일빌딩을 비롯한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건물이 속속 들어서자 세운상가를 두고 ‘위압감을 주고 볼썽사납다’는 평가와 함께 서울의 녹지축을 단절시켰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때 미래 서울의 상징으로 주목받던 세운 지구는 도심의 흉물로 쇠락했다. 지난한 논란을 겪고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4구역 개발을 둘러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처럼 종로는 수백년 동안 레이어(겹쳐입기)를 하듯 새 옷을 입고 매무새를 고쳤지만, 어딘가에는 과거를 품고 있다. 왕조의 수도에서 격동의 근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종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길인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 ♥이묵원 외도 폭로한 강부자 “남편, 클럽 단골女 있었다”

    ♥이묵원 외도 폭로한 강부자 “남편, 클럽 단골女 있었다”

    배우 강부자가 남편인 배우 이묵원에 대해 또다시 폭로해 눈길을 끈다. 지난 9일 방송된 MBN 예능 프로그램 ‘가보자GO 시즌4’에서는 안정환, 홍현희가 강부자의 집을 찾았다. 이날 방송에서 안정환은 한복을 입고 서로 마주 본 강부자·이묵원 부부의 팔순 기념사진을 보고 “이 사진 너무 멋있다”고 감탄했다. 홍현희 역시 강부자 가족사진 속 이묵원의 모습을 보고 “배우셔서 그런지 너무 잘생기셨다. 배우이시지 않았나. 인물이 (남다르다)”라고 말했다. 이에 강부자는 “말하자면 이 이가 원조 ‘살인미소’다. 눈웃음을 살살 치고”라고 자랑했다. 홍현희가 “거기에 반하셨구나”라고 추측하자, 강부자는 “난 원조 살인미소라서 반한 게 아니다”라며 “(남편이) 7남매 맏아들인데 너무 가난해서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기둥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을 감히 했다”고 설명했다. 강부자는 KBS 공채 탤런트 2기 동기인 이묵원과 비밀 사내 연애를 했다며, 과거 러브스토리를 밝히기도 했다. 이묵원이 ‘첫사랑’이라는 그는 남편에 대해 “모범생”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연예인이니까 여자들이 얼마나 좋아했겠나. 여자 팬들에게 편지, 전화도 많이 왔다. 그래도 나는 꼭 남편을 바꿔줬다. 내 남편도 인기인인데 뭘 차단하냐”라고 했다. 또 “화신백화점 옆 골목 궁전 나이트클럽이라고 있었다. (남편이) 거기로 춤추러, 술 마시러 다녔다. 남편 단골이 17번 여자였는데 남편이 한참 안 가니까 그 여자가 방송국으로 찾아왔더라”라고 이묵원의 과거를 폭로해 충격을 안겼다. 이어 “둘이 앉아 얘기하고 있길래 할 말만 하고 나왔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저분하고 연애하시는 거예요?’라고 했다더라. (연애 중인걸) 눈치챈 거다. 그다음부터는 연락도 없었다. 그걸로 끝났다”고 전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강부자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줘야 한다. 거기서 내가 ‘야! 너 왜 왔어? 너 뭔데?’라고 하면 안 된다. 오면 어떠냐. 아무나 와서 차 마실 수 있는 곳이지 않나”라고 화날 만한 상황에도 침착하게 대응한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강부자는 1967년 이묵원과 결혼했다. 앞서 강부자는 2020년 KBS2 예능 프로그램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출연해 남편 이묵원의 불같은 성격과 외도를 폭로한 바 있다. 당시 강부자는 “이묵원이 겉으로 선해 보이지만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신혼 때부터 화가 나면 장롱에 재떨이 던지고 그랬다”고 폭로했다. 이어 “(이묵원이) 바람도 많이 피웠다. 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첫째 돌 돼서 아장아장 걸을 때 사흘씩 안 들어와도 아무 말도 안 했다”며 “그 여자(내연녀)가 나한테 와서 인사까지 해도 난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 나가서 무슨 짓을 해도 다른 자식만 안 낳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절대 이혼 안 하고, 담배 안 피우고, 입술 빨갛게 안 바르겠다고 어려서부터 다짐했었다. 그걸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자식들이 있으니까 인내했다”고 덧붙였다.
  • 문체부, 상하이서 ‘거대한 뿌리’ 특별전…임시정부 105주년 기념

    문체부, 상하이서 ‘거대한 뿌리’ 특별전…임시정부 105주년 기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5주년을 맞아 중국 상하이에서 특별전 ‘대한민국임시정부 : 거대한 뿌리’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과 함께 오는 26일~5월 4일 주상하이한국문화원에서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22일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1일 수립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살필 수 있는 유물 67점이 전시된다. 임시정부 수립 과정과 활동,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과정,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대회 등 관련 유물들이다. 1945년 12월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제작했던 개선문과 꽃 전차 구조물, 대한민국 관보 제1호와 국가등록문화재인 ‘한·중·영문 중국판 한국애국가 악보’, 광복군 서명 태극기 등을 만날 수 있다.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공연과 뮤지컬 등 다양한 한국문화행사도 진행한다. 오는 26~28일에는 팝페라 공연 ‘음악으로 그리는 105년의 역사’, 4월 11~13일에는 독립운동가 부부의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담은 창작뮤지컬 ‘제시의 일기’가 현지 관객을 만난다. 용호성 문체부 국제문화홍보정책실장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 국민 간에 임시정부를 연결고리로 하는 새로운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며 “문체부는 우리 민족 독립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 가치를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종로타워’ 설계한 우루과이 건축가 비뇰리 별세

    ‘종로타워’ 설계한 우루과이 건축가 비뇰리 별세

    종로타워를 설계한 우루과이 출신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가 지난 2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78세. 1944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한 비뇰리는 1989년 도쿄 컨벤션 센터의 ‘도쿄 국제 포럼’ 설계 공모에 당선돼 유명해졌다. 세계 주요 도시에 600개 이상 건축물을 남긴 그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관심과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화신백화점이 있던 종로 공평동에 들어선 종로타워는 “종로의 랜드마크가 될 건물을 만들라”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지시로 1995년 공모를 진행하고 비뇰리의 설계안이 채택되면서 1999년 준공됐다. 2013년 월간 ‘SPACE’ 등에서 유명 건축가 100명이 선정한 한국 현대건축 태작(솜씨가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작품) 3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러나 지상 24층과 레스토랑이 있는 33층 사이 약 30m 공간을 비운 파격적인 설계로 도심 건물 중 단연 돋보인다는 호평도 받는다. 완공 후 국세청이 사용하던 종로타워는 삼성증권 등이 이용해 오다 지난해 SK그룹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 상상력 무한 자극… 구석기로의 시간 탐험[권다현의 童行]

    상상력 무한 자극… 구석기로의 시간 탐험[권다현의 童行]

    TV 만화 ‘짱구는 못 말려’의 열렬한 시청자인 아이가 어느 날인가 짱구네 가족이 시간을 뛰어넘어 구석기시대를 탐험하는 에피소드를 보고는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그동안 함께 갔던 박물관에도 돌도끼나 토기 따위가 전시돼 있었는데 아이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이참에 제대로 선사시대를 경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글로 기록되기 이전의 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이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다는 의미일 테니까. 경기 연천에 자리한 전곡리유적은 아이와 함께 상상력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보기 좋은 목적지다.지구 역사 45억년을 1년에 비유했을 때 12월 31일 밤 12시가 되기 5분 전에야 현생 인류가 등장했고, 최초의 국가가 성립한 것은 밤 12시까지 30초쯤 남겼을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지구 역사에 견주면 인류 역사는 극히 짧을 뿐 아니라 그 대부분은 선사시대에 속한다. 그럼에도 관련 유적지나 박물관에 가면 용도를 알 수 없는 돌무더기와 가죽옷을 입은 인형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엄마인 나조차 선사유적지는 볼 게 없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전곡리유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접하고 “여기 한번 가 볼까?” 호기심이 생긴 터였다. 전곡리유적은 단순히 선사시대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978년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주한미군 그레그 보엔은 한탄강 주변을 거닐다가 심상치 않은 모양의 돌을 발견했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그는 이 돌들을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였던 프랑수아 보르드 교수에게 보냈고, 그로부터 “의심할 것 없는 아슐리안 문화의 석기”라는 답을 얻었다. 프랑스의 성 아슐에서 다량의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이름 붙은 아슐리안 문화는 전기 구석기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석기 문화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돌의 앞뒤 양면을 모두 다듬어 만든 형태라 석기 기술의 발달을 가늠하는 주요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이 주먹도끼가 발견된 지역이 대부분 유럽이나 아프리카였기 때문에 당시 고고학자들은 동아시아의 구석기 문화가 서구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판단했다. 대표적인 이가 미국의 고고학자 할람 모비우스였다. 그런데 일개 고고학도가 저 멀리 대한민국이란 낯선 땅에서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힐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발견한 것이다.이듬해 서울대박물관 주관으로 해방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구석기 유적 발굴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6000여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됐다. 그중에는 서구 못지않게 발달된 석기 기술의 증거가 될 만한 유물도 다수 포함됐다. 결국 고고학자들은 전곡리유적 발굴을 계기로 기존의 학설을 수정하고 서구와 동아시아의 구석기 문화를 동일하게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과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그뿐 아니라 세계 모든 고고학 교과서에 전곡리의 지명이 빠지지 않고 실릴 만큼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전곡리유적으로 향하는 길에 이 같은 이야기를 아이 눈높이에 맞춰 들려줬더니 대뜸 주먹도끼부터 보자고 조른다. 자연스레 첫 번째 목적지는 전곡선사박물관으로 정해졌다. 2011년 개관한 박물관은 전곡리유적 발굴 당시 조사단장을 지냈던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 고 김원룡 선생의 오랜 염원이기도 했다. 투병 중에도 ‘제1회 전곡구석기문화제’에 참석할 만큼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그는 같은 해 숨을 거두며 자신의 유해를 전곡리유적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학자 이상의 열정을 쏟았던 그의 뜨거운 바람 덕일까, 전곡선사박물관은 지금껏 만났던 선사박물관 중 가장 흥미로운 공간으로 꾸며졌다. 상설전시장 입구에서는 전곡리유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위용을 뽐내고 있다. 1978년과 1979년 이곳에서 발견된 최초의 주먹도끼들로 그 고고학적 가치를 알고 보니 수십만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감동이 밀려든다. 콧대 높았던 서구 고고학자들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상상하니 짜릿한 기분마저 든다. 아이도 “와, 정말 멋지게 생겼다! 미술관에서 본 작품 같아요”라며 큰 소리로 감탄했다. 시간의 선을 따라 전시장에 들어서면 약 700만년 전 투마이부터 약 1만년 전 만달인까지 14개체의 화석인류를 과학적으로 복원한 ‘인류 진화의 위대한 행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인간이 동물원에서 봤던 원숭이나 침팬지 같은 영장류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아이에게 그 과정을 한눈에 보며 설명할 수 있어 굉장히 유용했던 전시다.체험 요소도 다양해졌다. 대형 스크린에 새로운 영상물이 추가됐는데 주먹도끼를 이용해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살코기를 자르는 구석기인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재연했다. 연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생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자칫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개념적으로만 이해했던 주먹도끼의 실제 사용법을 익힐 수 있어 오히려 도움이 됐다. 미디어 기기를 통해 알프스 빙하에서 발견된 냉동 원시인 ‘외치’와 직접 대화를 나누거나 구석기인의 모습으로 스티커 사진을 촬영한 뒤 여권을 만드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덕분에 아이는 선사시대라는 너무도 먼 시공간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채워 갔다. 이제 역사의 현장인 전곡리유적으로 향했다. 박물관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유적지는 방문자센터와 토층전시관, 선사체험마을, 캠핑장인 연천구석기체험숲으로 나뉜다. 방문자센터에는 해설사가 상주해 전곡리유적의 고고학적 가치와 함께 연천의 독특한 화산 지형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토층전시관에는 전곡리유적 발굴 당시 사용했던 도구와 사진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 선사체험마을에서는 움집 짓기와 주먹도끼 만들기, 조개목걸이 만들기처럼 선사시대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예약제로 운영 중이다. 특히 규암을 서로 두드리고 깨뜨려 주먹도끼를 만드는 과정은 아이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경험이다. 드넓은 잔디밭 곳곳에는 선사시대 풍경을 재현한 모형들이 자리해 천천히 둘러보며 산책이나 피크닉을 즐기기에도 좋다. 전곡리유적을 배경으로 열리는 구석기축제는 언제든 꼭 한번 아이들과 참여해 보길 추천한다. 부스스한 머리와 거무튀튀한 피부, 동물 가죽을 대충 걸친 일명 ‘전곡리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 손에 주먹도끼를 들고 “어버버” 뜻을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하면서도 아이들과 유쾌하게 장난을 주고받고 사진도 찍어 준다. 나무 꼬치에 생돼지고기를 끼워 직화로 구워 먹는 구석기 바비큐도 인상적이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10월에 열렸지만 원래는 매년 어린이날을 전후로 구석기축제가 마련된다.전곡리유적 토층은 한탄강세계지질공원에 속한다. 고고학적 가치 외에도 고기후를 연구하는 데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질 명소로 함께 선정된 재인폭포나 좌상바위는 약 54만~12만년 전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강줄기를 따라 빚어낸 주상절리 폭포와 현무암 절벽이다. 전곡리유적 근처에 자리한 한탄강유원지에서도 이 같은 화산 지형을 관찰할 수 있다. 노지캠핑 명소로 꼽히는 이곳은 잔잔한 강물 위로 붉게 물든 주상절리가 얼비추고 바람이 순한 날에는 오리배도 탈 수 있다. 햇살이 따스하다면 바로 옆 한탄강어린이캐릭터공원에서 신나게 뛰어놀자. 안전하게 즐기는 나무놀이터와 20분 단위로 제한된 인원만 이용 가능한 무료 바운싱돔 덕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더 추워지기 전에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걸어 보는 것도 좋겠다. 연천에는 다양한 걷기 코스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평화누리길 12코스에 해당하는 통일이음길에서는 거대한 그리팅맨을 만날 수 있어 아이들도 좋아한다. 평화누리길은 경기도 내 비무장지대(DMZ) 접경지역인 김포와 고양, 파주, 연천을 잇는 우리나라 최북단의 걷는 길로, 모두 12개 코스로 이뤄졌다. 이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통일이음길은 군남홍수조절지에서 출발하면 역고드름까지 총거리 28㎞로, 7시간 30분이 소요된다.아이들과 함께 걷는다면 옥녀봉을 거쳐 로하스파크까지 4.8㎞ 구간이 적당하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흙길인 데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 위를 느긋하게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멀리 임진강 물길이 너그럽게 흐르고 호젓한 오솔길과 드넓은 율무밭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며 걷는 재미를 더한다. 옥녀봉에 설치된 유영호 작가의 작품 그리팅맨도 이색적이다. 15도 각도로 고개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나아가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선 연천 군내를 시원스레 조망할 수 있어 아이들도 절로 감탄사를 터트린다. 도착지인 로하스파크 곁에는 유명 한옥카페 세라비가 자리한다. 연천 특산물인 율무로 만든 시그니처 음료와 디저트를 내는 이곳에선 고즈넉한 풍경과 함께 쉬어 갈 수 있다. 발의 피로를 풀어 줄 족욕장도 마련돼 있다.혹여 날씨가 여의치 않다면 실내에서 다양한 체험이 가능한 고랑포구역사공원에 들러 보자.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던 고랑포구는 1930년대 화신백화점 분점이 들어설 만큼 번성했던 나루터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급격히 쇠락했고 인적이 드물어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로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역사의 주요한 순간들과 맞닿은 고랑포구에 2019년 역사공원이 조성됐다. 번창한 고랑포의 옛 모습을 재현한 거리에선 가상현실(VR)을 이용해 재미난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또 게임으로 재현된 고랑포전투와 증강현실(AR)을 활용해 DMZ의 하늘을 날아 보는 패러글라이딩 체험은 아이들의 흥미를 돋우기 충분하다. 호로고루성과 주상절리, 임진강 물길을 형상화한 실내놀이터는 날씨와 상관없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다.온 가족이 함께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피자를 만들어 보는 체험도 있다. 3대가 함께 운영한다는 애심목장에서다. 연천읍에 자리한 이 목장은 치즈체험과 낙농체험, 피자 만들기 등을 주말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상설로 운영한다. 온라인 예약도 손쉽게 할 수 있다.치즈체험에서는 우유 속 단백질을 응고시킨 커드를 죽죽 잡아 늘여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스트링치즈로 만든다. 피자는 미리 준비된 도우 위에 각종 야채와 치즈를 올린 후 그 자리에서 구워 낸다. 보리와 귀리, 콩 등을 넣어 반죽했다는 도우에 목장에서 직접 생산한 치즈를 듬뿍 넣었으니 그 맛이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꼬마 요리사로 활약한 둘째는 제가 만든 피자라 그런지 더욱 맛있게 먹는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에는 아이스크림 만들기가 이어졌다. 우유와 얼음, 소금만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신나는 음악과 함께 셰이커를 흔드느라 아이들은 더없이 흥겹다. 체험장 곳곳을 무대처럼 누비던 아이는 기어코 목장 여주인에게 깜짝 선물까지 받아 냈다. 땀을 흘린 만큼 아이스크림은 한결 진하고 시원했다. 여행작가
  • [포토] 북한 평양제1백화점에 전시된 화장품

    [포토] 북한 평양제1백화점에 전시된 화장품

    한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은 제13차 평양제1백화점 상품전시회가 성황리에 진행됐다고 12일 보도했다.  북한 상업성 관계자는 평양모란봉편집사 취재진에 “이번 전시회에는 350여개 단위에서 출품한 2천500여종에 133만160여점의 상품이 출품됐다”고 전했다.  평양제1백화점은 북한 최대 백화점으로 평양직할시 중심인 중구역 승리거리와 서문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화신백화점을 리모델링해 1982년 4월 9일 준공했다. 지하1층, 지하9층 총 10층 건물로 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평양을 찾는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지 중 하나다. 사진은 손님들이 화장품을 들고 살펴보고 있다.  
  • 백화점 있던 핫플의 부활… ‘접경지’ 고랑포, 다시 지역경제 핵으로[자치분권 2.0-함께 가요! 지역소멸 막기]

    백화점 있던 핫플의 부활… ‘접경지’ 고랑포, 다시 지역경제 핵으로[자치분권 2.0-함께 가요! 지역소멸 막기]

    경성(서울)과 개성 사이에 있는 도시 중 가장 큰 번화가였던 고랑포(高浪津)는 임진강 서북쪽 평야에 있다. 장단군 출신 실향민들에게는 아련한 ‘마음의 고향’이다. 1970년대와 80년대까지만 해도 6·25전쟁 때 남으로 피란한 장단 사람들은 만나면 늘 고랑포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나 전쟁은 화신백화점 분점을 비롯해 고랑포에 사람이 살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야 말았다. 하얀 고무신에 밝은색 한복을 즐겨 입던 장단군민들도 세월이 흘러 고령의 노인이 되면서 고랑포는 기억에서조차 가물해져 가고 있다. 이에 경기 연천군은 고랑포를 옛 모습대로 복원해 관광명소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김덕현 연천군수는 25일 서울신문에 “고랑포의 옛 모습을 복원해 관광자원화해 지역경제를 살리고 인구소멸지역에서 벗어나기 위한 핵심전략지로 육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고랑포의 형성 및 변천  고랑포는 장단도호부 장서면 관송리였다가 1914년 고랑포리로 바꿔 부르면서 장남면에 편입됐다. 해방 전까지는 장단군 장남면에 속했으나 광복과 더불어 북위 38도 선을 중심으로 남북이 나뉘자 38도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파주군에 속하게 됐다. 그 뒤 1954년 10월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해 연천군에 편입됐다. 삼국시대 때 평양에서 신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 개성~장단~고랑포였다. 고랑포가 접해 있는 곳은 임진강 중에서도 강폭이 좁고 수위가 낮아 임진나루와 함께 대표적인 도강지역으로 꼽힌다. 사람들은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다녔는데, 파주 적성에서 개성 장터를 오갈 때 이곳을 거쳤다. 연천군의 안보 5경 중 한 곳인 1·21무장공비침투로가 고랑포에서 서남쪽으로 3.5㎞ 지점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1968년 1월 17일 밤 북한군 제124군 소속 김신조 등 무장공비 32명이 남방 한계선을 넘어 침투한 곳이다. 2019년 5월 고랑포구 앞에 개관한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잘 재현돼 있다.●옛 문헌 속 고랑포  옛 문헌을 보면 고랑포가 얼마나 중요한 항구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편’에는 “대동법 실시 이후 고랑포는 강원도 이천, 안협 등에서 거둔 대동세를 한강의 용산진, 서강으로 운송하는 출발지”라고 쓰여 있다. 마수 허목의 문집 ‘기언’(記言)에는 “고랑은 괘암 아래에 있는데, 팔월 장마철에는 배를 집으로 여기는 바닷사람들이 여기로 몰려와서 생선과 소금을 팔면서 서로 장사한다”고 적고 있다. 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온 나라 안에서 한강이 가장 크고, 근원이 멀어 조수를 많이 받는다.… 정북 쪽으로 연천의 징파도에는 배편이 서로 통하며, 아울러 장삿배가 외상거래를 하는 곳이 나온다”라는 내용이 있다. 고랑포가 있는 임진강 중하류 지역의 강가 곳곳에는 절벽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고려 태조가 놀던 곳이라 전해지며 민간에는 아직도 그 가곡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고려 말기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인 이색은 “장단(長湍)의 석벽은 푸른 병풍이 비꼈는데, 철쭉꽃이 피니 비단이 밝구나. 상선을 잠깐 빌려 흐름을 따라 내려오니, 일시의 정경이 참으로 이름할 수 없구나”라고 시를 읊어 아름다운 경치를 찬양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신인 권근은 “뾰죽뾰죽 절벽이 강을 따라 돌았는데, 양쪽 언덕 봄바람에 꽃이 한창 피었구나. 들 밖에 단산(湍山)은 지형을 따라 다 되었고, 모래 가운데 작은 길은 촌(村)을 통해 나왔네”라고 고랑포 지역의 경치를 묘사했다.●임진강을 통한 물자교류의 중심  임진강 수운의 종점이었던 고랑포는 경기북부지역 포구의 중심이었다. 임진강 뱃길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쯤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랑포의 상업적 위상은 개항기를 거치면서 보다 높아졌다. 1887년(고종 24년)부터 시작된 쌀, 콩 등의 곡물 수출이 1890년에 급격히 증가해 포구가 활기를 띠고 산지와 개항장을 연결하는 중간 집결지 역할을 하면서 발전을 거듭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고랑포는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임진강을 통한 물자교류의 중심 역할을 하던 나루터다. 돛단배들은 임진강을 통해 내륙과 서해안 바닷길을 다녔다. 조선시대 말에는 바다와 내륙의 물산이 집결하는 중요한 항구로 역할을 했다. 고랑포는 물길의 깊이가 얕아 서해안에서 올라오는 수운의 종점이었으며 전쟁 전까지만 해도 마포나루에서 출발한 큰 배의 마지막 종착지였다. 상류로 올라가려면 더 작은 나룻배로 갈아타야 했다. 포구 앞은 화신백화점 분점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고랑포에는 경기북부에서 제법 큰 규모의 소시장과 한전, 여관, 우체국, 유치원, 시계방, 각종 상점 등이 즐비했다. 서울과 개성을 오가는 물산의 길목이면서 시장 역할을 했지만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군사접경지역이 되면서 나루터와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5일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폐허가 됐다.연천군은 12년 전에도 고랑포 일대를 복원하려 했으나 한강유역환경청 등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김 군수는 “이번에는 보다 세심하게 고랑포 복원을 추진해 연천군 발전을 위한 기회로 삼겠다”고 말했다.
  • 파주 식수원 코앞에 두고… 불법 커피숍 난립

    파주 식수원 코앞에 두고… 불법 커피숍 난립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 임진강변에 단독주택을 지은 후 커피숍 등 휴게음식점으로 불법 용도변경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이 지역으로부터 임진강 하류 지점에는 파주시민들의 상수원인 금파취수장이 있다. 25일 연천군에 따르면 토지 용도지역상 생산관리지역에는 제조음식점 및 휴게음식점 등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나 임진강이 내려다보여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고랑포구 인근 강변에 2015년쯤부터 단독주택으로 건축 허가를 받은 뒤 커피숍 등으로 불법 용도변경해 영업 중인 곳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강변 농지에 불법주거시설을 설치해 놓고 주택처럼 거주시설로 사용하거나 무허가 음식점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이 지역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인 데다 홍수관리구역이어서 붕괴 등 자연재해도 우려되지만 연천군은 단속에 손을 놓고 있다. 이곳은 고랑포역사공원 인접 지역으로, 향후 고랑포 도심 복원사업이 진행될 경우 보상가 상승 등으로 사업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 특히 커피숍 등이 들어선 지역에서 강 하류 5~6㎞ 지점인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 427-32에는 파주 북부 주민들의 식수원인 금파취수장이 있다. 이 때문에 파주시는 금파취수장에서 고랑포를 지나 호로고루성(고구려 최남단 성터) 앞까지의 7㎞ 구간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어 음식점·공장 등의 신축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즉 커피숍 등이 있는 강북지역은 행정구역상 연천군 장남면에 속하고, 강남에 해당하는 파주 적성면 장좌리는 상수원보호구역이다. 박은주 파주시의회 도시산업위원회 위원장은 “상수원 수질은 임진강 양쪽 강변에서 똑같이 영향을 받는데 남쪽(파주)만 상수원보호구역이고 북쪽(연천)은 아니라는 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면서 “파주 식수원 보호를 위한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고랑포는 6·25 전쟁 전까지만 해도 화신백화점 분점과 한국전력사무소가 들어설 정도로 서울~개성 사이 도시 가운데 가장 번성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서울 마포로 연결되는 임진강 뱃길의 상류지역 종점으로, 문산과 함께 농산물을 운반하는 주요 내륙항 역할을 했다.
  • [근대광고 엿보기] “1원어치 사면 황소 한 마리” 경품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1원어치 사면 황소 한 마리” 경품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전조선화신연쇄점연합 춘기 대매출’이라는 제목 아래 경품 행사를 한다는 광고다. 미국에서 시작된 연쇄점은 점포를 여러 곳에 두고 운영하는 경영 형태를 말한다. 지금 유통 재벌들이 전국 각지에 점포를 내고 경영하는 대형마트나 편의점, 슈퍼마켓도 연쇄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쇄점 사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화신백화점 창업주 박흥식이다. 1934년 박흥식은 백화점과는 별도로 전국에 연쇄점 1000개를 내겠다는 야심한 계획을 세웠다. 박흥식은 부동산을 담보로 내면 상품을 공급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신청자들이 3000여명이나 쇄도했고, 담보를 제공하고 은행에서 3000만원, 현재 가치로 3700억원에 이르는 돈을 융통했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 전국에 350여개의 연쇄점을 여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뒀다. 연쇄점에서 취급한 품목은 석유, 종이, 식료품, 양품, 철물, 수예품, 문방구, 화장품, 완구 등으로 오늘날의 대형마트나 대형슈퍼마켓과 비슷하다. 박흥식은 유통 구조를 단순화하고 일본에서 물건을 들여와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팔아 일본 유통업체들을 물리치고 상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전국에 있던 화신연쇄점 건물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전남 목포에 하나 남아 있다. 2층 콘크리트 건물에 건평이 411㎡(약 124평)인 옛 목포화신연쇄점은 등록문화재 제718호로 지정돼 있다. “일 원어치 사시면 황소 한 마리!” 광고 첫머리는 이렇게 돼 있다. 당시 1원은 쌀 한 말 정도 값이니 지금 값으로는 대략 5만원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황소 한 마리는 특등상이고, 1등상은 양복장ㆍ자전거ㆍ반상(盤床), 2등은 화장품, 3등은 양말 등이다. 등수 안에 들지 않더라도 작은 상품을 응모자 전원에게 주었다. 당첨자는 신문지상과 연쇄점에 게시한다고 돼 있다. 광고를 통해 연쇄점에서 어떤 물건을 팔았는지 알 수 있다. 와이셔츠, 넥타이, 내의, 핸드백, 파라솔, 각종 모자, 운동화, 유아용품, 부인용품, 만년필, 연필, 화장품, 과자, 양말, 기성복, 학생복 등으로 의류와 학용품, 잡화가 주류를 이룬다. 이를 보면 당시 화신연쇄점은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유통업체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목포 사람들은 화신연쇄점을 백화점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재벌들이 대형마트를 전국에 개점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이니 그보다 60년 앞선 시기에 대형 유통업체를 세운 박흥식은 대단한 사업가였다고 할 수 있다. 박흥식은 사업을 하면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친일반민족 행위자로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 [근대광고 엿보기] 화신백화점 신축 광고와 박흥식/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화신백화점 신축 광고와 박흥식/손성진 논설고문

    전회에서 신흥만몽박람회 축하 전면광고를 실은 ‘선일지물’을 말하면서 빠뜨린 것이 있다. 선일지물 창업주 박흥식이다. 그 광고의 하단을 보면 ‘사장 박흥식’이라고 적혀 있다. 박흥식은 1903년 평남 용강에서 출생했는데 아버지는 도참사(道參事) 등을 역임한 유지였고, 형 박창식은 항일 투쟁을 하다 투옥당해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박흥식은 일찍부터 사업에 소질을 보였다. 평남 진남포공립상공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16세 때부터 남포에서 쌀 장사를 시작했다. 또 인쇄소와 명함 가게를 운영했지만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경성으로 올라온 박흥식은 1926년 을지로 2가에 선일지물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스웨덴과 캐나다에서 일본 제품보다 싸게 종이를 들여와 박리다매로 전국 인쇄소 수백 곳과 거래하고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큰 신문사에도 용지를 댔다. 종이 판매로 큰돈을 번 박흥식은 1930년 12월 경성상공협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나이 겨우 27세 때였다. 박흥식은 1931년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어 화신백화점을 창업했다. 화신백화점의 전신인 ‘화신상회’는 신태화가 옛 화신백화점이 있던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서 운영하던 귀금속상이었다. 신태화는 은 투자를 하다 은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박흥식에게 세공사가 60명이나 되는 사업체를 넘겨주었다(2021년 1월 4일자 ‘근대광고 엿보기’). 이듬해 박흥식은 화신상회 옆에 들어선 동아백화점의 매출이 부진하자 경영권을 사들인 뒤 연결 육교를 놓고 통합 운영했다. 그러나 1935년 1월 27일 목조 4층 건물이던 화신백화점에 큰불이 나 서관(옛 화신상회)과 동관(옛 동아백화점)이 전소됐다. 총독이 진화를 지휘하고 매일신보가 호외를 발행할 만큼 큰 불이었다. 1971년의 대연각 화재에 견줄 만한 불을 구경하느라 구경꾼 수천 명이 몰렸고 이를 정리하느라 기마경찰까지 출동할 정도였다. 보험에 들어 있어 화재로 큰 손해를 보지 않은 박흥식은 곧바로 재건축에 착수해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의 새 화신백화점을 1937년 11월 완공, 문을 열었다. 경성 최고층 건물이었던 새 화신은 국내 최초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등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광고에는 부지 면적이 3248평으로 나와 있다. 지하에는 식료품점 등이, 1층에는 상품권매장·양품잡화점·화장품점 등이, 2층에는 포목점·귀금속점 등이, 3층에는 부인아동품점·완구점·예식장 등이, 4층에는 양복점·문방구·책방·이발소 등이, 5층에는 악기점기점·식당 등이, 6층에는 가구점·전기기구점 등이, 옥상에는 온실과 갤러리 등이 있다고 돼 있다. 요즘 백화점과 큰 차이가 없다. sonsj@seoul.co.kr
  • 최초 건축가 이훈우의 발견… 한국 근대 건축사 다시 써야 할 이유

    최초 건축가 이훈우의 발견… 한국 근대 건축사 다시 써야 할 이유

    한국 최초의 근대 건축가는 누구일까? 얼마 전까지는 경성고공 출신으로 1937년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룡을 손꼽았다. 하지만 이제 이훈우라는 또 다른 존재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생겼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 가 나고야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에 개업, 1924년 대표작인 천도교의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을 설계했다. 1932년에 개업한 박길룡보다 여러모로 앞선 선배였다. 그러나 그는 최근까지 ‘무명’으로 존재했다. 왜 그랬을까. 이제야 듣게 되는 그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이훈우, 그는 누구인가 이훈우는 188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종구는 유학자로, 외국의 신학문을 기피하던 대다수 영호남 선비들과는 달리 1900년대에 아들 세 명을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셋째였던 이훈우는 1908년 나고야고등공업학교(지금의 나고야공업대학)에 외국인 특별생으로 진학해 근대건축교육을 받게 된다. 그는 영어, 수학, 물리학 같은 기초 학문과 건축사, 설계 및 장식법, 제도 같은 인문적이고 창의적인 과목, 그리고 건축재료, 시공법, 위생건축, 측량과 같은 기술적인 과목을 배웠다. 재학 중 나라가 망하고 국적이 바뀌었지만 학업을 마친 그는 귀국해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다. 이 무렵 부산중학교와 같은 관립학교와 보성고등보통학교, 동덕여학교 등과 같은 민족사학 계열의 학교를 설계했다. 1920년 총독부 기수직을 사직한 이훈우는 같은 해 12월 10일에 지금의 종로3가 단성사 옆 건물에서 설계사무소를 개업한다. 1932년에 개업한 박길룡보다 12년이 빨랐다. 당시 34세였던 그는 성북동에 피병원(避病院)으로 불린 민립 서울병원을 설계해 기초공사까지 진행되다가 예산 부족으로 중단됐다. 관립병원 순화원이 당시 유행했던 콜레라 환자를 감당하지 못하자, 조선인이 모금운동을 추진해 건축한 전염병 병원이었다. 천도교 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훈우는 1924년 수운 최제우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을 설계한다.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종합문화센터 역할을 하며 음악회에서 미술 전시회, 심지어 운동 경기에 이르는 수많은 행사를 무료로 치러낸 건물이다. 성신여대와 한양대 등이 이 건물에서 개교했다.1928년 이훈우는 고향 하동과 가까운 진주의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계했다. 현재 진주여고의 전신이다. 이훈우는 이미 20대에 학교 건축을 여러 차례 경험했으나, 이 학교는 식민 지배자들의 집요한 방해 속에 어렵게 지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학교는 지역 명문으로 성장했고 소설가 박경리, 화가 이성자와 같은 동문을 배출했다. 이훈우의 여러 후손도 이 학교를 다녔다. 1929년에 설계한 조선일보 평양지국도 이훈우 작품이다. 부지는 평양 구도심의 수옥리로, 현재의 인민대학습당 근처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2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석재와 벽돌로 마감한 전형적인 서양식이었다. 2층에 약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최초의 한국인 사진작가의 하나인 서순삼의 전시회가 열렸다. 다만 한창 일할 나이인 40세 후반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족보에 의하면 1937년에 51세의 나이로 사망, 하동군 악양면의 선산에 묻혔다. 같은 해 박길룡의 대표작 화신백화점이 완공됐다. 한국 근대 건축계에 일어난 최초의 세대교체다. ●지금, 왜 이훈우인가 왜 우리는 이훈우에게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첫째, 그가 현재까지 알려진 한국인 최초의 근대 건축가이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을 받고, 자신의 사무실을 개업해 자신의 이름으로 건물을 설계한 것을 근대 건축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훈우는 제일 앞에 위치한 존재다. 마침 2020년 12월 10일은 이훈우가 자신의 사무실을 개업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었고, 이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파티도 열렸다. 둘째, 그가 보여 준 근대 지식인으로서의 면모 때문이다. 이훈우는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건축 설계와 기고문을 통해 명확히 그려냈다. 그의 작업이 병원, 학교, 강당, 언론사 사옥 등 공공성이 강한 유형에 집중돼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개업 당시 이미 ‘조선의 건축을 개량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천명할 정도로 스스로 부여한 소명에 대한 자각이 뚜렷했다. 셋째, 그의 건축 작업이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분리파를 비롯한 당대 건축의 조형적 경향이 엿보이며, 천도교 기념관과 같은 대규모 공간을 설계할 수 있을 정도의 실무적 능력도 갖췄다. 앞으로 좀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넷째, 식민지 시대를 이해할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 속에는 국가의 운명과 별도로 당시의 한국인 개개인이 보여 준 주체적 사고와 행동이 발견된다. 그는 단어 자체조차 생경한 ‘건축’이라는 영역에 도전해 꾸준히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행보는 식민지 근대론이나 내재적 발전론 같은 거대 담론의 틀을 넘어 개인의 능동적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한국 초기 근대 건축 서사의 한계 대한제국의 청년 이훈우가 일본 유학을 결심하던 무렵, 건축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방식 모두가 새로운 것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조선건축계에 유일한 기술가’와 같은 단편적 소개, 혹은 건물의 층수나 규모, 쓸모에 국한된 설명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어떤 생각과 의도로 설계했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건축가로서 이훈우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건축을 이해하는 수준이 그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이훈우가 받은 교육은 일본에서 최상급이 아니었다. 일본은 건축의 문명적 중요성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그래서 근대화 초창기부터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늘날 도쿄대학이 되는 제국대학이 바로 그 시스템의 정점이었다. 이후 중등 과정의 실업학교를 승격해 고등공업학교를 설립했는데 이훈우가 다닌 나고야고공도 이런 학교였다. 즉 이훈우는 융합적 창조자로서의 건축가 양성보다는 하위 개념의 교육을 받았고, 당시 한국 사회가 그를 이해한 방식도 이런 맥락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한국인 건축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훗날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는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된 것은 1916년이었다. 일제강점기 전 기간을 통해 한반도에서 근대 건축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건축을 하고 싶지만 대학에 가고 싶어 포기한다’는 증언도 있다. 주요 건축물의 설계는 일본의 최고학부를 거친 일본인 엘리트 건축가들의 몫이었고, 이것은 한국인을 도구적 존재 이상으로 보지 않았던 식민지 전략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반도에서 건축을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46년 서울대에 건축학과가 설립된 이후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 무려 70년 동안 한반도의 건축은 최상위 활동을 제도적으로 부정당한 상태였다. 이런 탓에 건축 분야에서 한국이 서양과 일본과 얼마나 큰 격차를 보이는 것인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식민 지배가 한국 건축에 드리운 가장 길고 어두운 그림자라 할 것이다. 동시에 이는 건축물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인 건축가를 바라보던 차별적 시선은 해방된 지 또 다른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다양하게 복제돼 건축계 안팎에서 작동 중이다. 이러한 초기 서사의 비극과 그 영향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한국 건축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훈우나 그 이후 건축가들의 개별적 성취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현실에서 매우 상징적인 현상으로 등장한다. 다름 아닌 ‘건축가의 유령화’다. 건축물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건축물대장에 설계자의 이름을 기입하는 칸이 생긴 것이 불과 1990년대 전후의 일이다. 사람으로 치면 부모의 이름을 적는 난이 없었다. 그 결과 한국의 근현대 건축사는 유령 건축가들의 역사가 됐다. 지금도 서울과 부산 등의 도시를 가득 채운 수많은 건물 중 공식 기록으로 건축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훈우의 경우도 의뢰자 측 기록에 그의 이름을 부른 사례는 거의 없다. 천도교 내부 기록에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의 설계자로 이훈우를 지목한 사례가 유일하다. 같은 천도교 계열의 보성고보와 동덕여학교 건립 관련 기록에도 설계자 정보가 빠져 있다. 이훈우는 이런 측면에서도 한국 건축의 ‘예견적 존재’가 아닐 수 없다.●이훈우의 현재적 의미 이훈우를 필두로 한국 근대 건축의 초기 서사를 재구성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근대라는 맥락 속에서 ‘건축이란 무엇일까?’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실천으로 옮긴 최초의 인물이다. 이 원초적 질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을 찾아간다는 점에 있어서 이훈우나 그 후학들이 다르지 않다. 박길룡을 비롯한 경성고공 출신들과의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1926년 총독부 청사의 완공을 기념해 발간된 ‘조선총독부 청사 신영지’에 이훈우와 박길룡은 각각 전·현직 기수로 나란히 등장한다. 이훈우는 박길룡보다 선배지만 유학생 출신으로 소속감이 떨어졌고, 박길룡은 속속 배출되는 경성고공 출신 한국인 건축가 네트워크의 선봉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근대 초기 한국 건축계의 세력 형성과 분화라는 측면에서 현재적 의미가 담긴 관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근대 건축의 서사를 한반도 전체로 넓혀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훈우가 등장한 뒤,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도 근대적 의미의 건축가,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활동이 시작됐다. 이훈우 자신도 평양에 신문사 지국을 설계했으나 그 실체와 자취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남북 관계가 개선된다면 이 부분의 공조가 시작돼야 한다. 통일된 서사의 도출이 불가능하면 개별 사료를 협력해 확보하되, 해석은 각자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교집합의 역사가 등나무처럼 얽혀 있는 프랑스와 독일도 이러한 방식으로 근대사를 정리해 나갔다. 근대 건축과 관련한 논쟁적 주제의 출발점에 이훈우가 있다. 그는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 주어진 상황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옆으로 위로 가지를 뻗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다. 이훈우를 통해 던질 수 있는 질문과 얻어낼 수 있는 답은 무수히 많다. 이제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다. 황두진 건축가김현경 도쿄국립박물관 어소시에이트 펠로딜런 유 미국 금융정보회사 아시안팀 디렉터 ■필자인 김현경, 딜런 유, 황두진은 논문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로 이훈우에 대한 기록을 추적하고 그의 삶을 재구성해 왔다. 이 글 역시 세 필자의 공동 작업이며 황두진이 대표 집필했다. 김현경은 1984년생으로 서울대를 거쳐 일본 교토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일본 고중세사로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재직 중이다. 딜런 유는1967년 부산생으로 서울대와 뉴욕시립대 버룩칼리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미국의 금융정보회사에 근무하며 번역서로 ‘일본에 간 베이브 루스’가 있다. 황두진은 1963년 서울생으로 서울대와 예일대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황두진건축사사무소의 대표다. 대표작으로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 원앤원 63.5, 춘원당 그리고 일련의 현대 한옥 작업이 있다.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무지개떡 건축’, ‘공원 사수 대작전’ 등의 저서가 있다.
  • [근대광고 엿보기] 화신 창업자 종로 거상 신태화/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화신 창업자 종로 거상 신태화/손성진 논설고문

    일제강점기 때 화신백화점을 창업하고 1970년대에 ‘화신 소니’라는 전자제품 회사를 만들었던 박흥식(1903~1994)은 걸출한 기업가였다. 거금을 국방비로 기부하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박흥식에게 ‘화신상회’라는 사업체를 넘겨줘 사업가로 비상하도록 발판을 만들어 준 사람이 신태화라는 기업가였다. 즉 화신상회는 화신백화점의 전신이고, 화신이라는 상호는 신태화가 만들었으며, 화신의 원래 창업자는 신태화인 것이다. 1877년 남촌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신태화는 가세가 기울어 12살 때 서울 종로의 금은방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7년 동안 머슴처럼 일하며 기술도 배운 신태화는 18살 때 40원으로 남대문로에 세공업 가게를 열었다. 때마침 화폐개혁의 혼란에 따른 전당포업의 성황은 신태화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전당포에서 흘러나온 금은붙이를 헐값에 사들여 수리해서 팔아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1908년 신태화는 김연학이라는 투자자를 영입해 신행상회라는 세공업체 겸 판매점을 세웠다. 1911년 5월 27일자 매일신보 광고에는 신행상회 주소가 동현(銅峴·을지로) 22통 2호로 나와 있다. 신태화는 동현전당포라는 이름으로도 광고를 냈는데 겸영한 것으로 보인다. 신태화는 신문광고를 활용해 판매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1918년 4월 신태화는 김석규(김연학의 아들)와 결별하고 종로 네거리에 있던 2층 건물에 화신상회 간판을 걸고 독자 경영을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 마지막 글자 화(和)와 신행상회의 신(信)을 따서 상호를 지었다고 한다. 화신상회가 있던 곳엔 나중에 화신백화점이 들어섰고 지금은 종로타워가 있다. 화신상회는 세공사 60여명을 두고 반지, 귀고리, 금비녀 등 여성 패물과 은수저, 은쟁반, 주전자, 문방구 등을 만들어 팔았다. 잘나가던 신태화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은 투기였다. 은값이 계속 오른다는 정보를 접한 신태화는 거금을 들여 은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을지로에서 선일지물포를 경영하고 있던 박흥식에게서도 6만원을 빌려 은을 매입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은값은 폭락하고 만다. 박흥식에게서 빌린 돈은 이자가 원금을 넘어섰다. 결국 1930년 무렵 신태화는 힘들게 일군 화신상회를 36만원에 박흥식에게 넘겨주었다. 박흥식은 1931년 9월 15일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 화신을 창립, 백화점 사업을 개시했다. 신태화는 그 후 1934년 남대문통 1정목 6번지에 포목 영업점인 태성상점을 열어 재기했다. 그러나 이 사업도 부진해 4년 만인 1938년 2월 문을 닫았다. sonsj@seoul.co.kr
  • 구보씨의 경성 한바퀴… 소외된 인생들의 도회 항구속으로

    구보씨의 경성 한바퀴… 소외된 인생들의 도회 항구속으로

    소설가 박태원(호 구보, 1909~1986)은 1934년 8~9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26세의 주인공 구보가 하루 동안 경성 중심부 곳곳을 배회하며 보고 겪은 일들을 묘사한 중편 소설이다. 작가가 곧 작품 속 주인공이 되어 일제강점기 서울의 모습, 그리고 식민지 지식인의 감성을 그린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절친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은 ‘하융’이란 필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박태원의 1934년 여름, 경성 주인공 구보는 경성의 명문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을 갔다 귀국했으나 일정한 직업 없이 도시를 떠도는 룸펜 지식인이다. 유학 시절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귀국 후 아직 미혼으로 모친의 속을 썩이는 노총각이다. -당시 혼인 연령은 남자 평균 21세, 여자 17세였다. 구보의 집은 다옥정(현 중구 다동)에 있었으며, 어느 여름날 약속도 목적지도 없이 오전에 집을 나서 한밤중 귀가로 소설은 끝난다. 그 사이에 구보가 쏘다닌 경성부 내 주요 지점들을 당시 이름으로 열거해 본다. 화신상회 네거리, 경성운동장, 조선은행, 경성부청, 덕수궁 대한문, 경성역, 조선호텔, 황금정 등. 이 가운데 대한문은 위치가 변한 채로,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부청(서울시청 서울도서관), 경성역(옛 서울역사) 건물이 남아 소설을 기억시킨다.1930년대 서울은 거대 근대도시로 변화 중이었다. 1920년대 30만명이었던 인구가 1935년 65만명으로 늘어 일본에서도 7번째 규모가 되었다.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청사를, 덕수궁 앞에 경성부청사를 지어 식민도시의 통치 중심을 만들었다.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과 조선저축은행 본점(옛 제일은행 본점)이 1935년에 완공되니, 구보는 그 공사 중인 현장을 보았을 것이다. 구보가 즐겨 탔던 전차는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도입했으며 총 13개 노선을 운행했다. 1934년 시내에 전화 180개선을 증설하는데 1300여명이 신청했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인 인구가 28%로 일본 자본의 진출이 급속히 늘었는데 주로 소비 유흥시설에 집중되었다.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관)과 조지야백화점(현 롯데영플라자 터) 등 5대 백화점이 식민지 수도의 소비를 부추겼다. 일본인들은 청계천 남쪽에 거주지를 꾸렸는데 다방 카페 요정 등 유흥시설도 조선인은 북쪽, 일본인은 남쪽을 장악하게 되었다. 김두한의 전설과 같이, 종로파 조선 건달들이 혼마치(本町, 현 명동)의 일본 야쿠자들과 대립했던 지리적 사정이었다. 화신백화점의 유통왕 박흥식, 전국 금광을 개발한 광산왕 최창학, 그리고 도시형 한옥 붐을 일으킨 건축왕 정세권 등 조선인 자본가도 등장했다.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의 시대였다. 그러나 구보에게 경성은 소비 지향적이고 저급한 유흥에 휩싸인 속물의 도시였다. 안주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고독과 상실의 도시였다. 왜 그런지 박태원도 몰랐을 것이다. 1930년대 초 경성의 번영이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세계 경제대공황을 겪은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등 침략전쟁으로 경제부흥을 꾀했다. 일시적 호황에 중독되어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소설 발표 불과 3년 후 연재했던 신문은 강제 폐간되었고 일제는 전시 체제에 돌입한다. 구보가 어렴풋하게 감지한 이유 모를 불안의 실체였다.●구보가 예외적으로 오래 머문 경성역 3등대합실 구보는 중요 건축물들의 외관만 바라보며 스쳐 지나갔다. 그의 관심은 건축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고현학(考現學, 현재를 다루는 고고학)적 풍경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읽고 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작업이다. 예외적으로 경성역 내부에 들어가 오랜 시간 머무르게 된다. 이곳의 3등대합실은 익명의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경성역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하여야 한다.” 1899년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 철도는 노량진과 인천 구간이었다. 이듬해 서대문역까지 연장하면서 남대문 간이역을 세우는데, 바로 경성역의 전신이다. 현재의 구 서울역사는 1925년에 완공된다. 그 크기와 완성도가 동양 1,2위를 다투었다 할 정도로 수준 높은 건축물이다. 대륙 침략의 야심을 품은 일제는 극동 지역 철도망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성역은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의 기착점으로 각기 일본, 중국, 러시아로 통하는 중심 기지였다.도쿄대 교수인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자로 알려졌는데, 일본 건축계의 대부 다쓰노 긴고의 수제자였다. 긴고는 도쿄역사를 설계했고 이미 서울에 조선은행 본점(1912)을 설계한 실력자였다. 경성역의 전체 구성은 르네상스식이지만 중앙 돔은 비잔틴식, 양 옆 삼각형 박공벽은 신고전주의풍이다. 또한 붉은 벽돌(타일)과 화강암을 섞은 외벽 장식은 이미 암스테르담역과 도쿄역에서 사용했던 형식이다. 굳이 말하자면 여러 양식을 혼합한 절충식이라 할 수 있다. 인상적인 요소는 중앙 정문 위에 설치된 아치 창이다. 큰 반원 아치를 두 개의 기둥으로 나눈 디오크레티안 창이라 하는데, 고전주의 건축의 대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즐겨 써서 팔라디오 아치라고도 부른다. 경성역사의 건축적 모델은 스위스 루체른의 옛 역사(1896)라고 한다. 지난 세기에 불타 없어지고 정면의 팔라디안 아치만 남았지만, 경성역과 쌍둥이로 불릴 정도로 유사했다. 내부 공간은 제국의 계급질서에 따라 구성했다. 크고 높은 중앙홀이 있고, 좌우로 3등대합실과 1,2등대합실이 나뉘어 자리했다. 1,2등대합실 옆에는 여성 고객을 위한 부인대합실, 그리고 귀빈대기실이 있었다. 이 구역들은 출입이 통제되고 역장이 직접 접대하게 배치되었다. 반면 3등대합실은 중앙홀뿐 아니라 외부 광장에서도 자유롭게 드나들게 개방되었다. 구보 역시 광장에서 바로 들어와 대기 중인 익명의 승객들을 읽어냈다. 그러다 동창을 만나 장소를 이동해 차를 마신다. 1,2등대합실 안에 있던 티룸으로 추측되는데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이다. 2층에는 조선 최초의 대형양식당이라는 ‘더 그릴’이 있었다. 40여명의 국내외 셰프와 웨이터가 은그릇에 ‘경양식’을 담아 서빙했던 이 식당은 근대 경성, 국제 경성의 상징공간이 되었다.●식민지 도시와 타자의 건축 현존하는 조선은행 본점은 르네상스식 몸체에 바로크 돔을 얹은 견고한 건축이다. 골조는 철골과 콘크리트 구조이며 외벽에 육중한 화강석을 붙여 발권은행의 권위를 과시했다. 좌우 대칭의 완벽한 비례, 5개의 탑이 만드는 장대함, 고대 신전용 기둥 등은 식민지 경제 통치의 만신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들이다. 여기서 현재의 소공로를 지나면 곧 경성부청사를 만나게 된다. 조선총독부 건축과에서 설계 공사한 건물로 르네상스식 구성에 장식이 없는 근대적 외벽을 가진 건물이다. 부청사 앞에는 교통광장(로터리)을 만들었고, 그 옆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 있었다. 구보는 소설에서 경성부청사를 ‘정력가형 육체를 가진 위압적인 장년’으로, 덕수궁은 ‘자신을 외면하는 영락한 옛 동창’으로 은유했다.구보가 접한 경성의 근대건축들은 하나같이 서구 고전주의 양식이다. 세부적 형태가 르네상스식이던 바로크식이던 그리스식이던 크게 보면 그렇다. 대칭과 비례, 법칙과 질서를 강조했던 건축양식이다. 19세기 유럽을 풍미하고 서구 열강의 제국화를 통해 전 세계에 유포된 제국주의 양식이다. 후발 제국주의 일본은 구라파 따라잡기의 끝판으로 고전주의 건축들을 식민지 수도 곳곳에 세웠다. 사라진 조선총독부가 대표적인 건축이다. 경성의 근대화란 고전주의화, 제국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조선적 전통이란 덕수궁에 대한 묘사대로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것이었다. 현 한국관광공사 사옥 자리에 있던 박태원의 생가는 중문과 대문이 있는 전통 한옥이었다. 대문을 나서 청계천을 지나면 곧 화신백화점 등 일본풍 유럽풍 건축이 즐비한 시가지다. 조선적인 것은 과거고 일본적인 유럽풍은 현재였다. 상반된 시공간이 공존하는 경성은 구보를 유혹하는 동시에 소외시켰다. 일제 강점시대에 저항(독립투쟁)과 순응(친일매판)의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소시민적 욕망과 소외의 회색지대에서 살았다. 구보는 그런 분열된 삶 속에서 타자화된 도시와 건축을 떠돌았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근대광고 엿보기] 국내 백화점의 시발점-삼월오복점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국내 백화점의 시발점-삼월오복점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생소하게 느껴지는 오복점(吳服店)은 일반적으로 포목점이라는 뜻인데 일본식 용어다. 오복은 일본 의상을 말하고 오복점은 일본에서 기모노 원단이나 여러 가지 의류, 잡화를 취급하는 점포라고 한다. “우리 아아(아이)가 있던 오복점 주인 말이제. 그 쇠가 빠지(빠져) 죽을 왜놈이 전방을 치우믄서 이자는 일자리도 없어졌어이…”는 소설 ‘토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오복점은 일본에서 백화점으로 발전했다. 알다시피 서울 신세계백화점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경성 지점이었다. 미쓰코시의 역사는 에도(도쿄)에 오복점을 연 16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미쓰코시오복점은 1903년 백화점으로 확대 개편했다. 미쓰코시오복점이 1906년 경성출장소를 현재의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열었는데 국내에서 문을 연 최초의 백화점인 셈이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은 1852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점한 ‘봉 마르셰’로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연말인 1911년 12월 1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삼월오복점 광고는 이미지가 없이 ‘세모(歲暮) 대매출’이라는 글귀를 앞세운 활자 광고로 눈길을 붙잡으려 하고 있다. ‘그 옆에는 내(來) 15일부터 야간영업 개시’라고 써 놓았고 아래에 “1. 신제 완구품 진열 1. 유행 우자판(羽子板·제기 비슷한 일본 놀이기구) 진열 1. 연말연시 증답품(贈答品·선물로 주고받는 물품) 진열”이라고 덧붙여 두었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에도 연말이 되면 바겐세일 행사를 했고, 연말 대목에는 야간에도 영업을 했으며, 백화점을 통해 어린이 장난감도 판매됐고, 일본식 놀이도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다. 미쓰코시오복점 경성출장소는 1916년 그 자리에 3층짜리 새 건물을 지었는데 1층과 2층은 상품 판매장이었고, 3층은 서예나 그림 전시회장, 부인들의 모임 장소로 개방했다고 한다. 또 비품도 화려한 것으로 일본에서 들여오고 일본에서 상품 전문가가 와서 진열을 하는 등 일본화한 것으로 보인다(매일신보 1916년 10월 6일자). 현재 남아 있는 미쓰코시 경성출장소 사진은 1915년의 것으로 새 건물을 짓기 전이다. 도쿄 본점은 1923년 9월 큰불이 나 전소됐는데도 국내 출장소는 광고를 계속 내며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후 미쓰코시오복점은 1930년 10월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라는 백화점 건물을 지어 입주했다. 강점기 초기의 백화점은 일본 자본이 독식했으며, 민족 자본으로 설립한 화신백화점이 생기기까지는 더 기다려야 했다. 광복 후 미쓰코시백화점은 동화백화점으로 바뀌었고, 삼성그룹이 1963년 이 백화점을 인수해 신세계로 상호를 변경했다.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1등에 최고급 담요”- 최초의 경품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1등에 최고급 담요”- 최초의 경품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흔히 1936년 화신백화점에서 소 한 마리를 내 건 것을 최초의 경품 행사라고 하는데 잘못이다. 그보다 30여년 전에 경품 광고가 있었다. “小店(소점)에서 世上(세상) 여러 貴客(귀객)에게 歲饌(세찬) 드릴 뜻으로 韓貨 七元 以上(한화 칠원 이상) 사신 이한테 景品(경품)으로 贈呈(증정)하니 陸續(육속·끊이지 않고 계속) 사러 오시기를 伏望(복망)함.” 이 광고는 전회에서 언급된 서울 광화문의 잡화점 구옥상전이 황성신문 1903년 12월 21일자에 낸 것으로 경품 광고의 효시로 볼 수 있다. 1등은 상등 ?褥(담욕·담요), 2등은 보석 반지, 3등은 대석경(큰 거울), 4등은 林檎一櫃(임금일궤·능금 한 궤짝), 5등은 白毛褥(백모욕·하얀 털 담요)이며 담뱃갑이나 사진 액자 등을 보태 10등까지 준다고 했다. 광고주가 표시한 1등 상품 가격은 60원이라고 돼 있다. 어떤 담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한말 쌀 한 가마 값이 4원 안팎이었으니 쌀 15가마 정도의 가치로 어림잡을 수 있겠다. 위 광고는 대한매일신보 1906년 12월 5일자에 게재된 경품 광고다. 경성 본정3정목(本町三丁目), 즉 현재의 서울 충무로 3가에 있었다는 ‘구미잡화 직수입상 십옥(?屋)’에서 낸 광고다. 경품은 가죽 의롱, 궐련초 입갑, 큰 거울, 적삼, 술, 흰색 담요, 가방, 거울, 남녀 목도리 등이다. 2원어치 이상의 물건을 사면 경품권 1장을 준다고 돼 있다. 가죽 의롱은 가죽으로 만든 옷 넣은 농을 말하며 궐련초 입갑은 궐련(卷煉) 즉, 얇은 종이로 말아 놓은 요즘과 같은 담배를 넣는 케이스다. 경품 광고에서 당시 사람들의 기호와 취향을 엿볼 수 있다. 구옥상전은 이보다 앞서 황성신문 1905년 10월 18일자부터 23일자까지 건물 신축과 개점 10주년을 기념하는 경품 증정 행사 광고를 지면에 냈다. 1등 경품은 은다기(銀茶器), 2등은 담요, 3등은 거울이었다. 1907년에 경성박람회가 열렸는데 거기서도 경품 행사가 있었다. 경성 구리개(銅峴·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서 열린 이 박람회는 일제 한국통감부가 집행한 것으로 한국 경제를 잠식하려는 의도였다. 한국민들의 참석을 유도하려고 주최 측은 기생들의 연희(演戱)를 마련하고 여성들의 참관을 끌어내기 위해 ‘부인 데이’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사흘 동안 무려 3만 5000개의 경품을 살포했다. 1907년 11월 10일자에 광고가 아니라 기사로 실렸다. 이 박람회에는 20만 8000여명이 입장했고 이 가운데 한국민은 73%에 이르렀다. 그 이후 경품 행사는 관람객이나 소비자를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일반화됐고 광고에도 자주 실렸다. 화신백화점 경품 광고는 훨씬 뒤의 일이다.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먹고살려고 여장한 남자들/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먹고살려고 여장한 남자들/손성진 논설고문

    고 구봉서 주연의 ‘남자는 안 팔려’(1963년 작)는 서울에 올라온 두 청년이 일을 구하지 못하자 여장을 하고 다니다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영화다. 실제로도 남자 일자리는 적고 여자 일자리는 많아 여자 행세를 하던 남자들이 드물지 않았다. 1950년 서울 충정로에서 접대부로 일하다 발각된 10대 후반의 조모군은 신문 배달 등으로는 병든 부모와 동생 다섯 명을 돌볼 수 없어 여장을 한 사례였다. 신문은 조군의 딱한 사정을 두 번에 걸쳐 화제 기사로 실었다(경향신문 1950년 2월 7, 8일자). 부산에서 식모로 일하다 상경해 댄스를 배워 화신백화점 댄스홀에서 댄서로 일하던 여장 남자나 5년간이나 다방 레지로 일하다 경찰에 자수해 취직을 시켜 달라고 한 10대 소년의 사연도 1950년대 말 전후 혼란기에 있었던 일이었다. 1966년 5월 이모(29)씨가 서울 마포 술집에서 여장을 하고 접대부 노릇을 하다 발각돼 경찰에 붙들려 갔지만 훈방됐다. 1971년 3월 어느 날 서울 청량리경찰서에 파마머리에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사람이 통금 위반에 걸려 들어왔다. 알고 보니 남자로는 취직이 안 돼 식모살이를 하려고 상경하던 여장 남자였다(경향신문 1971년 3월 3일자). 장발 단속을 피하려고 하이힐을 신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활보하던 여장 남자들이 즉심에 회부되기도 했지만, 여장 남자를 처벌할 마땅한 법규가 없어 장발족으로 처벌하는 게 고작이었다. 1979년 6월 서울 종로경찰서가 ‘말자’와 ‘춘희’라는 이름으로 다방 레지로 일하던 20대 초반의 여장 남자 두 명을 적발했다. 이들도 단지 장발족으로 즉심에 넘겨졌다. 이듬해 6월 서울 시내에서 여장을 하고 술 취한 남자를 유혹, 고고클럽에서 춤을 추고 팁을 받아 용돈으로 써오다 적발된 20대 청년 두 명은 “여자 행세를 하니까 세상 살기가 참 쉽더라”고 말했다. 대개는 성적 정체성 혼란 때문에 여성 행세를 했다. 전북 김제에서는 4년 동안 여장을 하고 접대부로 술집을 전전하던 남성이 붙잡혀 사회면에 다뤄졌는데 그런 경우였다(동아일보 1956년 11월 10일자). 서울 장위동에서 1년 동안 식모살이를 하다 불심 검문에 걸려 탄로 난 여장 남자 김모(24)씨를 고용한 음식점 주인은 “틀림없는 여자인 줄 알았다”고 했고, 이웃 노파는 김씨를 수양딸로 삼았다고 한다. 7년 동안 극단의 쇼걸로 미군 무대에서 스트립쇼도 했고, 이후 7년은 접대부로 일한 남자 아닌 남자 이모(28)씨는 P악극단 출신으로 서라벌예대에 과외생으로 다니며 김백봉 여사에게 칼춤을 1년 동안 배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66년 5월 28일자).
  • [책꽂이]

    [책꽂이]

    공정하지 않다(박원익·조윤호 지음, 지와인 펴냄) 조국 사태는 우리 사회에 ‘공정’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대학생들이 조국 장관 사퇴를 외치며 촛불을 치켜든 이유다. 이기주의, 혐오주의, 경쟁주의만으로 이들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1987년생 저자 박원익이 90년대생이 원하는 6가지 공정함을 설명한다. 328쪽. 1만 5800원.밀레니얼 선언(맬컴 해리스 지음, 노정태 옮김, 생각정원 펴냄) 1980년대에서 2000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교육을 받고 뛰어난 기술 혜택을 받았지만 눈앞엔 막대한 학자금 대출과 유연한 고용, 무한 경쟁이 펼쳐진다. 1988년생 저자 맬컴 해리스가 미국 초·중·고교 사례로 이들의 역사를 설명한다. ‘인적 자본 관리 프레임’ 분석을 특히 눈여겨보길. 456쪽. 1만 8000원.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그레타 툰베리 지음, 고영아 옮김, 책담 펴냄) 금요일마다 등교를 거부하고 기후 온난화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16세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8년 157일뿐”이라는 그레타의 주장에 전 세계가 동참하고 있으며, 그레타는 올해 노벨상 후보로도 올랐다. 그에게 세계가 왜 주목하는지 알 수 있다. 320쪽. 1만 5000원.늙은 소녀들의 기도(이경희 지음, 폭스코너 펴냄) 아버지의 폭력으로 감정을 상실한 엄마와 그 트라우마에 짓눌려 살아온 여기자 하림. 미군에게 폭행당한 기지촌 여성 정순을 취재하다 또다시 좌절한다. 여기에 1970년 외화벌이에 나섰다가 일본서 갖은 고초를 당한 민자 할머니, ‘위안부’로 살았던 순이 할머니의 이야기가 얽힌다. 소수자로서 부당한 폭력을 당한 여성 서사를 담은 장편소설. 308쪽. 1만 3500원.생각의 싸움(김재인 지음, 동아시아 펴냄) 위대한 철학자들은 구체적인 문제를 풀고자 골몰했다. 확실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바람직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 철학했다. 철학자 김재인이 이전 시대사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답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15가지 철학을 설명한다. 408쪽. 1만 8000원.식민지 조선의 시네마 군상(시모카와 마사하루 지음, 송태욱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압록강 국경을 배경으로 한 조선 활극 ‘망루의 결사대’, 종로 부랑아들과 화려한 화신백화점 전광판을 대비한 ‘집 없는 천사’ 등 일본강점기 조선 영화. 그리고 이를 만든 영화감독과 배우들. 이들을 통해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의 일상을 생생하게 그린다. 340쪽. 1만 8000원.
  • 나경원 “반민특위가 국론 분열”…역사왜곡 넘어선 ‘극우결집’

    나경원 “반민특위가 국론 분열”…역사왜곡 넘어선 ‘극우결집’

    4월 재보선 염두 극우세력 결집 위한 ‘막말화법’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5일 국회에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잘 됐어야 했지만 (반민특위가) 결국 국론분열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면서 정치권에 ‘친일 청산’ 프레임 전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앞서 나 원내대표는 14일에도 ”해방 뒤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밝힌 ‘친일 잔재 청산’ 발언에 대한 한국당 측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 대표의 발언은 국민의 인식과 동떨어진 역사왜곡이자 망언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반민특위, 친일청산 기치 내걸고 221명 검찰 송치 반민특위는 일제 식민지 시대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고자 1948년 설치한 특별위원회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와 친일 경찰의 조직적인 방해로 이렇다할 활동 없이 1년여 만에 와해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꾸려진 제헌국회는 같은 해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8·15 광복 뒤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친일파 척결을 이뤄 내 민족 정기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이 법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일제에 협력했거나 항일 독립운동가를 살해·위협한 조선인을 처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10월 23일 국회의원들이 추천한 10명의 위원(임기 2년)을 선출했다. 위원장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지낸 김상덕(1891~1956)이, 부위원장에는 훗날 최초의 민선 서울시장이 되는 김상돈(1901~1986)이 뽑혔다. 반민특위는 국회 안에 특별조사위원회(친일파 조사)와 특별검찰(기소·송치), 특별재판소(재판)를 설치했다. 곧바로 특별경찰대를 꾸려 반민족행위자 7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에 나서 이듬해 1월부터 검거에 들어갔다. 모두 559건(221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지역별로는 서울 282건, 경기 32건, 황해 26건, 충남 25건, 충북 26건, 전남 27건, 전북 35건, 경남 50건, 경북 34건, 강원 19건이다.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로는 일제시대 악질기업가이자 화신백화점 소유주였던 박흥식(1901~1994)과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최남선(1890~1957)·이광수(1892~1950), 여제자들에게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김활란(1899~1970) 등이다. ●미 군정·이승만·친일경찰 반발로 1년 만에 유명무실화 그러나 친일청산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 미 군정이 남한 지역을 통치하면서 한국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반민족행위자를 척결할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쳤다. 미 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세워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세력의 확장을 막아내려고 했다. 이들은 친일파의 역할에 주목했다. 민족의식 없이 강자에게 의지해 자신의 삶을 영위해 온 이들이라면 미 군정에도 마찬가지로 충성할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일이 돼 버렸다. 또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구(1876~1949)로 대표되는 임정 세력은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양측 간 갈등이 컸다. 이 과정에서 미 군정은 일제시대 통치 구조를 부활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1875~1965) 역시 미 군정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임정 세력은 더욱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정치적 라이벌인 김구 등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고자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반민특위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우선 친일경찰의 상징인 노덕술(1899~1968) 등이 독립운동가 겸 살인청부업자 백민태(생몰연대 미상)를 고용해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백민태가 자수해 미수에 그쳤다. 1949년 6월 국회 부의장 김약수(1890~1964)와 노일환(1914~1982), 이문원(1906~1969) 등 진보성향 의원들이 외국군대(미국·소련) 철수와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요구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했다. 당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공작원과 접촉해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며 김약수 등을 체포했다. 이것이 ‘국회 프락치사건’이다.이 사건 직후 시민단체 ‘국민계몽회’ 회원 수백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와 “반민특위에서 암약하는 공산당을 숙청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특위에서 서울 중부경찰서에 도움을 청했지만 경찰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특위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하고 시위 배후로 지목된 서울시 사찰과장 최운하(생몰연대 미상) 등을 반민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그러자 경찰이 반격에 나섰다.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경대원 35명을 체포하고 사무실 서류와 집기도 압수했다. 때맞춰 서울시경 9000여명이 반민특위 간부 교체와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이승만은 “경찰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명분삼아 반민특위 압박을 강화했다. ●반민특위 실패로 친일파가 대한민국 지배세력으로 군림 이 때부터 반민특위 활동은 빠르게 위축됐다. 1949년 7월 법무부 장관에서 돌아온 이인(1896~1979) 의원이 반민법 공소시효 단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개정안(반민법 2차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의원은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민족분열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며 반민특위에 내내 부정적이었다. 결국 김상적 위원장 등 특조위원 전원이 개정안에 반대하며 사임했다.그나마 특조위에서 구심적 역할을 하던 위원들의 사퇴하자 친일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가 구성됐다. 이로써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기소된 친일 인사 가운데 재판을 마무리한 이는 불과 38명으로, 그나마도 전원이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나 실제 처벌받은 반민족행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염원에도 당시 이승만 정부의 조직적 방해 때문에 반민특위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2019년까지도 친일세력이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4·3 재보궐 선거 노려 극우세력 결집 의도 반민특위 실패는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나 대표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다분히 정략적인 계산이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4·3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태극기부대’로 불리는 극우 보수세력의 결집을 노려 ‘트럼프식 막말화법’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선거 승리를 위해 제1야당 원내 대표가 왜곡된 역사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표를 모으려는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행동이라는 반응이 많다. 민주당은 “나베 경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이름에 나경원 원내대표의 이름을 합친 비난) 등으로 나 원내대표를 비난했다. 윤호중 사무총장은 이날 대전에서 열린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이런 망언이 계속되고 있기에 한국당을 극우 반민족당이라고 이야기하고, 나 원내대표 이름이 ‘나베 경원이라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 아니냐”며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했다. 문정선 민주평화당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나 원내대표가) 괜히 자위대 행사에 참석한 게 아니었다”며 “한국당 국회의원 나경원은 토착왜구란 국민들의 냉소에 스스로 커밍아웃했다”고 했다. 이어 “국민을 분열시킨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친일파들이었다”며 “실패한 반민특위가 나경원과 같은 국적불명의 괴물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는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훼방과 탄압으로 인해 친일부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임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라며 “(나 원내대표의 발언은) 한국당이 친일파의 후예임을 고백한 것과 진배 없다”고 말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택시 횡포와 ‘나라시 택시’/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택시 횡포와 ‘나라시 택시’/손성진 논설고문

    택시요금이 조만간 또 오를 모양이다. 미터기가 도입되기 전 교통이 복잡하지 않을 때 서울의 택시요금은 구간제였다. ‘옛 화신백화점(종각)에서 용산까지는 480환, 영등포까지는 960환’ 식이었다. 택시에는 구간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택시 기사들은 요금표를 아예 붙이지도 않거나 붙여도 지키지 않고 요금을 두 배 이상 요구해 툭하면 시비가 일었다(경향신문 1960년 11월 8일자). 특히 외국인과 서울 물정에 어두운 시골 사람을 타깃으로 삼아 과다한 요금을 내라고 해 말썽이 됐다. 경찰은 사기죄로 단속했지만, 요금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미터제는 1962년 4월부터 일부 시행됐다. 기본요금제도 함께 도입됐다. 미터기를 처음 본 여성은 “미터기가 찰카닥하고 5원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다”고도 했고, 어떤 신사는 “찰칵찰칵하는 미터기 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고 불평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63년 9월 10일자). 택시 횡포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이 택시 안에 운전사의 인적 사항을 적은 표찰을 처음 달도록 한 것은 1965년 무렵이다. 부산에서는 해수욕장 바가지요금을 단속하고자 해변에 택시 행패 고발판을 붙였다(매일경제 1967년 7월 31일자). 일제 ‘코로나’ 택시가 도입되면서 1966년 1월 택시요금이 기본요금 60원, 500m당 10원으로 두 배나 올랐다. 당시 지프를 개조해 만든 시발택시가 1960년대 중반에도 100대 넘게 있었다. 시발택시 기사 120여명이 택시요금 인상으로 구식 시발택시는 승객들이 외면한다며 도리어 요금을 내리라고 당국에 요구한 적도 있다(동아일보 1966년 3월 3일자). 그 무렵 자가용 차량의 불법 영업행위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시간에 쫓겨 택시요금의 3~5배를 불러도 기꺼이 지불하고 타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 무교동, 신세계백화점 앞, 명동에 자가용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 달 전세, 하루 전세, 1시간 전세로 빌려주는 자가용도 있었다. 통금에 제약을 받지 않는 호텔 택시는 택시요금의 10~15배를 불렀다. 1990년대에 들끓었고 지금도 가끔 보이는 ‘나라시 택시’의 원조들이다(경향신문 1966년 3월 30일자). 현재 택시 기사들이 ‘카카오 카풀’을 빗대어 비난하는 그 나라시 택시다. 합승택시는 1950년대에 택시가 부족할 때 허가해 준 적이 있다. 9인승으로 미군 트럭 엔진을 뜯어 개조한 차량이었다. 일반 택시 합승은 출퇴근 시간에 한해 허용하기도 했다. 택시 합승은 불법과 허용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1982년부터 완전히 금지됐다. sonsj@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재시인 이상의 삶 뒤편, 민족주의자 이상을 만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재시인 이상의 삶 뒤편, 민족주의자 이상을 만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3회 서울의 문학2(이상의 날개) 편이 제25호 태풍 ‘콩레이’가 한반도를 강타한 지난 6일 빗속에서 진행됐다. 전날 밤새 비가 내린 데다 당일 오전 내내 만만찮은 강수량이 예보된 상태여서 행사 취소 여부를 묻는 문의가 쇄도했다. 이 와중에 “고&고!”를 외친 데는 세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첫째 서울신문사 측의 과감한 투자로 도입한 고가의 오디오가이드시스템이 효자 역할을 해줄 것이고, 둘째 지난해 25회와 올해 22회까지 47회를 진행했지만 단 한 번도 날씨가 말썽을 피운 적이 없다는 ‘근거 있는’ 믿음이 작용했다. 셋째 만약의 경우에 대비, 통의동 보안여관과 지난달 문을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등 실내에서 비를 피한다는 나름대로의 대비책도 세워놨다.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40여명이 궂은 날씨에 아랑곳없이 모여들었다. ‘가을비 우산 속에’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흔적과 작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오히려 즐겼다. 이날 오전 10시 사직동 주민센터 정자 앞을 출발한 투어단은 사직동 이상의 출생지~통인동 이상의 집~통의동 보안여관~경복궁 조선총독부 터~이상이 다녔던 수송동 옛 보성고등학교 터~오감도가 실린 옛 조선중앙일보 터~동헌필방~옛 화신백화점 터~소공동 옛 낙랑파라 터~날개에 등장하는 옛 미쓰코시백화점 터를 순례했다. 강영진 해설사의 노련한 해설이 돋보였다. 형형색색의 우산과 비옷차림으로 시작한 답사는 맑게 갠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산뜻하게 마무리됐다. 시인 김지하는 “이상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상을 아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은 허상이다. 이상은 단순한 경성의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난해한 작품과 여성편력, 괴짜 행동을 통해 본색을 감췄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상(李箱)이라는 이상(異常)한 필명 뒤에 숨은 김해경이 품은 민족의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이상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은 1910년 8월 29일 서울 사직동 165번지에서 태어나 식민통치가 절정을 이룬 1937년 4월 17일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27살의 짧은 여정을 마감했다. 그의 삶 궤적은 식민지 서막에서 시작돼 한복판에서 끝났지만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자각이 강했다. 부인 변동림(화가 김환기와 재혼 후 김향안으로 개명)에 따르면 이상은 일제에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늘 의식했으며, 한복을 즐겨 입었다. 이상을 중심으로 ‘좌본웅 우태원’이라고 할만한 ‘절친’ 소설가 박태원이 남긴 ‘이상의 편모’라는 회상기에서도 이상은 한복차림으로 나온다. 변동림은 자신과 첫 만남에 이상이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나왔다고 회상했다. 혜화동에서 살던 시절 한복을 입으면 일경에 불심검문당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불편해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봉두난발이나 파이프를 입에 문 데카당스한 모습과는 다르다. 기이한 행적이나 극단적 일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1937년 2월 12일 일본 유학 중이던 이상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구인회 멤버이자 납북시인 김기림에 따르면 이상의 하숙집 책상 위에 불온 책자가 놓여 있었고, 이상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사용했고, 노트에 불온한 내용을 적어놨다는 게 좌익사상범으로 몰린 이유였다. 풀려난 지 한 달여 만에 유명을 달리했는데 폐결핵 환자에게 감방의 냉기는 결정적 사인이었다.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상 또한 민족주의자로서 최후를 맞았다. 이상은 단순한 불령선인(불량한 조선인)이 아니라 민족 저항 작가였다. 이상은 건축가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졸업,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했다. 1926년 경성고공에 입학, 1933년 총독부를 그만둘 때까지 7년 동안 촉망받는 건축가로 살았다. ‘이상한 가역반응’, ‘조감도’,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같은 시의 제목이나 내용은 건축가의 삶과 경험이 묻어 있다. 돌연변이의 이단아로 살아가기 전까지 세상이 부러워하는 멀쩡한 건축가였다. 그러나 건축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이상의 대안이었다. “난 말야,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어릴 때부터 그림에 미쳐 있었으니까.” 이상의 경성고공 입학기에는 그림에 대한 갈망이 나타나 있다. 보성고등학교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할 당시 미술교사가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었다. 서촌 자락 고희동의 집과 이상의 집은 지척에 있었다. 이상이 남긴 건축물은 없다. 실명이 거의 쓰이지 않는 이상의 대표작 ‘날개’에 등장하는 단 2개의 고유지명은 경성역(서울역)과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이다. 이 중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은 날개의 무대로 쓰였다. 연애담이나 퇴폐적인 일상이 아니라 자신을 옥죄는 일제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면의 몸부림이 담겼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날개야 다시 돋아라./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썼다. 이상은 표면적으로는 1920~30년대 경성 모더니즘의 절정을 누린 전형적인 ‘아스팔트 키드’였다. 여러 편의 문제작 중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종생기’에서 “나는 벼를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건축가 출신답게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 속 건축물을 작품소재로 삼았다. 그가 전성기를 보낸 1920~30년대 경성은 조선총독부, 경성역, 조선은행(한국은행), 경성부청(서울시청) 같은 근대건축의 아성이었다. 철골과 시멘트 화강암으로 이뤄진 현대성의 거대한 상징물이 건축물이었다. 인간 이상을 이야기할 때 화가 구본웅과 소설가 박태원을 빠뜨릴 수 없다. 세 사람의 관계항이 이상의 인생을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다. 세 사람은 동행했다. 사직동에서 태어나 통인동에서 자란 이상과 필운동에서 나고 자란 구본웅은 필생의 동반자였다. ‘꼽추 화가’와 ‘폐병쟁이 괴짜 시인’으로 유명했다. 이상이라는 필명은 구본웅이 선물한 그림도구가 든 상자에서 비롯됐다. 이상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아호에 ‘상자 상(箱)’자를 넣겠다고 약속했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이(李)씨 성을 붙이면 나름대로 묘한 여운도 있어 좋겠다”라는 두 사람의 의견일치에 따라 탄생했다. 기생 금홍이를 만난 것도, 다방 제비를 연 것도, 이상에게 창문사 직장을 알선한 것도, 파이프를 문 이상의 초상화 ‘우인의 초상’을 그려준 사람도 모두 구본웅이었다. 이상의 최후를 지킨 부인 변동림도 구본웅 계모의 동생이었다. 나이 어린 이모를 4살 아래 친구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상이 남긴 ‘차(且)8씨의 출발’은 구본웅에게 바친 헌시였다. “사실 차8씨는 자발적으로 발광하였다.”에서 차8은 구본웅의 성씨 구(具)자를 파자한 것이다. 구보 박태원과도 붙어살다시피 했다. 구보의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됐을 때, 이상은 하융이라는 필명으로 삽화를 그렸다. 다방과 술집을 전전하면서 인생과 문학예술을 논했다. 두 사람의 작품세계는 이때 완성됐다. 이상은 구보의 결혼피로연 방명록 첫 장에 ‘면회거절 절대반대’라는 호소문을 남겼다. 언론인이자 작가 조용만은 ‘구인회 만들 무렵’에서 “이상과 구보는 짝패였다”고 기록했다. 살아생전의 이상을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근대파 시인”이라 평했고, 사후에는 “우리가 가졌던 황홀한 천재”라고 극찬했던 시인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으로 한국문학이 50년 후퇴했다고 아쉬워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일정:강동(광나루길) ●일시:10월 13일(토) 오전 10~12시 ●집결장소: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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