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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니발은 알프스 횡단 어떻게 했나…과학이 푼 2200년 미스터리 [달콤한 사이언스]

    한니발은 알프스 횡단 어떻게 했나…과학이 푼 2200년 미스터리 [달콤한 사이언스]

    1970~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완전정복’이라는 이름의 중학 자습서 표지에 그려진 나폴레옹의 그림을 기억할 것이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기 훨씬 전인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한니발 군대는 로마군을 공격하기 위해 험준한 알프스를 넘었다. 그런데 한니발이 어느 알프스 고개를 넘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2200년 동안 문헌학자와 고고학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생태학자와 생물학자들이 새로운 방법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놔 놀라움을 주고 있다. 독일 통합 생물다양성 연구센터, 프리드리히 실러 예나대 생명과학부, 영국 옥스퍼드대 생물학과, 케냐 나이로비 코끼리 보호센터 공동 연구팀은 생태학과 생리학적 방법을 통해 한니발은 병사와 코끼리의 에너지 소모가 가장 적은 ‘트라베르세트 고개’를 넘었을 것이라고 10일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국 국립과학원에서 발행하는 국제 학술지 ‘PNAS’ 7월 6일 자에 실렸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군사 4만 명, 말 7000마리, 전투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해 로마의 허를 찌르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은 군사사(史)에서도 놀라운 위업으로 각국 사관학교에서는 전술학 수업에서도 중요하게 다룬다. 문제는 ‘한니발이 정확히 어느 고갯길로 알프스를 넘었는가’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 이후 수많은 학자가 역사적, 물류적, 지형적 근거를 바탕으로 논쟁을 벌여왔다. 대략 두 개의 경로를 유력하게 보고 있는데 대다수 학자는 그 중 그르노블과 에통을 지나 콜 뒤 클라피에 고개를 넘어 수사를 통해 포 계곡에 이르는 길을 지지했다. 그런데 최근 문헌학과 지형변화학적 분석은 콜 드 그리몬과 갑을 지나 콜 드 라 트라베르세트 고개를 넘어 피안 델 레에서 포 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을 지목했다. 이에 연구팀은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관점인 생물에너지학적 접근법을 적용했다. 알프스 횡단에 드는 에너지 요구량, 특히 전투 코끼리에 필요한 에너지에 초점을 맞춰 경로를 추정했다.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왜 코끼리를 투입했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로마군과 첫 전투에서 전술적 효과를 기대했을 수도 있으며 북이탈리아 지역에 사는 켈트족에게 위압감을 줘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연구팀은 지금까지 논쟁 대부분은 문헌과 지질학적 고려에 치우쳐 정작 알프스를 넘은 사람과 동물의 생물학은 소홀히 다뤘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니발 군대에 배속된 코끼리들의 몸무게는 최소 3t에 달해 기초대사 유지를 위해서만도 엄청난 식량을 먹어치웠다. 야생의 아프리카 코끼리는 평지를 걷기만 해도 하루 약 14시간을 먹이 활동에 쏟아야 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스를 넘기 위해서는 코끼리 사료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데 이런 에너지 비용의 증가는 식량 보급 문제, 피로 누적, 아사 위험이 겹쳐 병사와 동물 사망률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비아 전투에서 전투 코끼리들이 투입돼 활약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한니발 군대와 코끼리가 알프스를 넘으며 겪었을 조건을 병사, 말, 코끼리 각각의 에너지 비용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재현했다. 연구팀이 직접 개발한 ‘R패키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형 고도 데이터와 동물 몸무게만 있으면 특정 지형에서 이동에 드는 에너지 비용을 지도 형태로 바꿔준다. 이렇게 만든 것이 ‘에너지 지형도’이다. 분석 결과, 이전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클라피에 고개보다는 트라베르세트 고개가 한니발 군대의 이동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트라베르세트 고개는 한니발 군대의 총 에너지 비용이 5.42TJ(테라 줄)로 가장 짧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 다음은 6.02TJ을 기록한 몽즈네브르 고개 경로, 그 다음은 6.28TJ로 나타난 클라피에 고개 경로, 가장 효율이 떨어지는 곳은 몽스니 고개를 넘는 경로로 6.456.28TJ로 확인됐다. 트라베르세트 경로와 비교할 때 몽즈네브르 고개, 클라피에 고개, 몽스니 고개를 경유하는 경로는 군대 전체를 기준으로 각각 11%, 16%, 19%의 에너지를 더 필요로 했다는 계산이 나왔다. 또 트라베르세트 경로에서 병사들은 횡단 중 체지방 보유량의 19%를 잃었겠지만 전투 코끼리들은 체지방의 4%만을 잃었을 것으로 계산됐다. 이는 병사들의 사망률은 높았지만 많은 코끼리가 알프스를 쉽게 건너 공격에 가담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구를 이끈 프리츠 볼라트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케냐에 서식하는 아프리카 코끼리의 에너지학에서 얻은 통찰력을 적용한 것으로 이동 생태학이 어떻게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이 새로운 분석이 역사 해석의 모든 모호함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코끼리를 데리고 험난한 알프스를 이동해야 하는 한니발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제시한다”고 말했다.
  • “넷플릭스가 역사 도둑질”…한니발 ‘흑인 배우’ 캐스팅에 튀니지 반발

    “넷플릭스가 역사 도둑질”…한니발 ‘흑인 배우’ 캐스팅에 튀니지 반발

    할리우드 흑인 배우 덴젤 워싱턴이 넷플릭스 영화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역할로 캐스팅되자 한니발의 고향인 튀니지에서 거센 반발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튀니지의 프랑스어 매체 라프레스는 덴젤 워싱턴의 캐스팅을 두고 “역사적 오류”라고 비판했다. 온라인에서는 이 영화가 ‘사이비 다큐멘터리’라며 넷플릭스에 제작 취소를 요구하고 튀니지 문화부에 “우리 역사를 도둑질하려는 시도에 대응하라”고 촉구하는 온라인 청원도 등장했다. 이 청원에는 현재 1300명이 동참했다. 한니발은 고대 페니키아인이 북아프리카 튀니스만 연안에 건설한 도시국가인 카르타고에서 태어났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지역에서 해상무역과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를 넓혔지만, 로마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멸망했다. 한니발은 결국 패하기는 했으나 2차 포에니전쟁에서 활약하며 로마를 맹렬하게 위협한 명장이었다. 기원전 218년 군사와 전투 코끼리를 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은 이탈리아 원정이 특히 유명하다.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를 포함하는 페니키아 혈통이라는 데 역사가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지만, 그의 피부색은 알려진 바가 없다. 논란은 튀니지 정치권으로 옮겨붙었다. 야신 마미 하원 의원은 “튀니지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시민사회의 반응을 듣기 위한 것”이라며 문화부 장관에게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논란이 커지자 하예트 케타트 구에르마지 문화부 장관은 의회에 출석해 “이 영화는 픽션이고 그들의 권리”라며 “한니발은 역사적 인물이고 그가 튀니지인이라는 걸 우리 모두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다만 넷플릭스와 촬영 협상에 주력하고 있다며 “한 시퀀스라도 튀니지에서 촬영하고 튀니지를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넷플릭스는 이전에도 흑인 배우 캐스팅으로 역사 왜곡 비판을 받았다. 앞서 지난 5월 공개한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에서는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을 흑인으로 묘사하며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를 캐스팅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는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기 전 마지막으로 이집트를 직접 통치한 여왕이다. 이집트를 통치한 ‘그리스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후손이다. 기원전 51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고,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이집트 정부는 해당 작품이 역사를 왜곡했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당시 이집트 관광유물부는 성명을 통해 “클레오파트라의 피부색이 밝고 그리스계라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라고 말했고, 이집트 최고유물위원회의 무스타파 와지리 사무총장은 “(클레오파트라를 흑인으로 묘사한 넷플릭스 다큐는) 이집트 역사에 대한 조작이며 명백한 역사적 오해”라고 비판했다.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시칠리아의 역사를 품은 주먹밥, 아란치니/셰프 겸 칼럼니스트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시칠리아의 역사를 품은 주먹밥, 아란치니/셰프 겸 칼럼니스트

    어떤 음식이 한 지역을 대표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누군가 강요하거나 법으로 정하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지역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전승돼 온 음식이 있다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특한 일인지.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아란치니도 그런 음식 중 하나다. 사프란으로 노랗게 물들인 쌀밥에 속 재료를 채워 넣고 바삭하게 튀겨 만드는 일종의 주먹밥이다. 피자나 파스타처럼 밀가루로 만든 음식도 아닌데 어째서 국가대표급 위상을 갖게 됐을까.우리나라의 평양냉면이 슬픈 분단의 역사를 품고 있듯, 아란치니는 애환의 시칠리아 역사 일부를 품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다사다난했던 지역을 꼽으라면 단연 시칠리아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놓이며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거기다 농사짓기에 좋은 비옥한 땅이 넓었던 탓에 고대부터 숱한 침략을 받아 왔다. 이미 청동기 시대에 선주민이 있었지만 그리스인들이 들어와 포도와 올리브, 밀을 심어 척박한 그리스에 물자를 수출하는 식민지로 활용했다. 이후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게르만족, 아랍, 노르만족,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된 역사를 갖고 있다. 많은 지배자들 중 오늘날 시칠리아의 문화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건 약 200년간 시칠리아를 통치했던 아랍인들이었다. 예술과 종교, 건축 등 문화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식문화도 그중 하나였다. 밀이 주식인 유럽인들과 달리 아랍인들은 쌀이 주식이었기에 벼농사가 일부 도입됐고 자연히 쌀을 이용한 요리도 전파됐다. 특별한 맛은 없지만 음식을 먹음직스러운 황금빛으로 물들여 주는 사프란과 달콤한 사탕수수, 오렌지 같은 감귤류 등이 이때 시칠리아로 들어왔다.아란치니에 대한 기록이 아랍 지배 당시부터 있는 건 아니지만 아랍인들의 식문화를 토대로 추정하건대 시칠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아란치니는 지금 모습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사프란으로 쌀을 물들여 익힌 후 허브와 각종 향신료를 버무려 구운 고기를 함께 뭉쳐 만든 단순한 주먹밥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요리라기보다는 쌀에 설탕을 넣어 달콤하게 만든 일종의 디저트였다고도 본다. 지금처럼 빵가루를 묻혀 바삭하게 튀겨 먹는 방식은 아랍의 지배로부터 100년이 지난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이 시칠리아를 지배했을 당시 등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음식의 겉에 빵가루를 묻힌 후 기름에 튀기는 건 맛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당시엔 음식의 부패를 늦추는, 일종의 보존처리법으로 더 유용했다. 아란치니는 ‘작은 오렌지’라는 뜻인데 빵가루를 입히기 전 사프란으로 물들인 쌀 때문인지, 빵가루를 묻혀 튀겨 놓은 모습과 색이 오렌지를 닮아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란치니는 일본이나 한국의 주먹밥처럼 시칠리아의 농민들이 밭일하러 갈 때 챙겨 가는 새참 역할을 했는데 팔레르모와 같은 큰 도시에서는 도시민들이 빠르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패스트푸드로도 인기가 높았다.전통적인 아란치니엔 속 재료로 라구나 리코타 치즈를 사용한다. 치즈를 한번 만들고 남은 유청을 다시 끓여 만든 리코타 치즈는 저렴하면서 포만감을 주는 서민들의 식재료였고, 고기를 잘게 다져 오랫동안 익혀 만든 라구 소스는 적은 고기로 많은 양을 만들 수 있는 서민 친화적인 소스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창의적인 요리사들이 아란치니를 변주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시칠리아의 거리에 가면 라구나 치즈뿐만 아니라 해산물, 베샤멜소스, 가지, 견과류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아란치니를 만나 볼 수 있다. 아란치니는 시칠리아를 대표하지만 비슷한 음식이 다른 지역에도 있다. 로마 지역의 식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플리’는 모양만 다를 뿐 영락없는 아란치니다. 아란치니보다 작고 둥글게 네모난 크로켓과 같은 형태로 빚는데 쌀과 토마토 소스, 모차렐라 치즈로 만든다. 나폴리의 ‘팔레 디 리조’는 아예 작은 아란치니 그 자체다. 아란치니 맛의 핵심은 라구 같은 속 재료 소스가 아니라 쌀에 있다. 유럽에서 쌀은 아시아권에서 생각하는 쌀 조리 방식과는 다르다. 아시아에서는 쌀은 큰 조미 없이 익힌 후 맛이 강한 다른 반찬과 곁들이는 역할이지만 유럽에서는 적극적으로 맛을 더해 요리한다. 현대적인 아란치니라면 크리미한 질감의 완벽한 리조토를 만들어 식힌 다음 속 재료를 넣고 튀긴다. 이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아란치니라고 부를 수 있다. 의외로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단순히 튀긴 주먹밥과는 다른 풍미를 선사해 주니 기꺼이 수고를 무릅쓸 만하다.
  • ‘러시아의 치욕’ 모스크바함 침몰…우연이 아니었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러시아의 치욕’ 모스크바함 침몰…우연이 아니었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작년 4월 러 순양함 ‘모스크바함’ 침몰1982년 포클랜드전 후 첫 순양함 격침호위함 없이 군사력 과시하다 ‘망신’무인기와 미사일…물꼬 튼 ‘비대칭 전략’ 기원전 264년 로마는 해상강국 카르타고와 일전을 벌입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입니다.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로마는 강력한 육군을 앞세워 승리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해상에선 카르타고에 완벽한 열세였습니다. 오랜 해상 무역으로 앞선 조선술을 갖춘 카르타고 해군을 압도할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때 로마군은 묘안을 떠올립니다. 근접전에 강한 병사들을 적선에 태울 방법을 고안한 겁니다. 바로 ‘까마귀’라는 이름의 다리입니다. 갈고리로 배를 붙이고 까마귀를 내려 병사들이 건너가도록 한 뒤 백병전을 벌이는 전략입니다. 로마는 이 신무기를 도입한 덕분에 카르타고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무인기+미사일…‘비대칭’ 대세가 되다 이런 ‘비대칭 전략’이 먹힌 사례가 최근에도 등장했습니다. 지난해 4월 러시아 해군의 자랑 ‘모스크바함’ 격침 사건입니다. 무기조차 변변치 않았던 우크라이나군의 승전에 세계 주요 언론들은 ‘현대판 다윗의 돌팔매질’이라고 언급하며 집중 조명했습니다. 당시 승전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은 열악한 방어 자산을 영리하게 조합해 순양함인 모스크바함의 방어선을 뚫었습니다. 2일 학술지 학국군사학논총의 ‘러시아의 해군력 운용과 함의’ 논문에 따르면 러시아 흑해함대는 전쟁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군은 흑해에 무려 370여개의 기뢰를 부설했는데, 러시아 해군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 오데사와 크림반도 사이의 흑해 수심은 91m 미만의 얕은 바다로, 기뢰 효용성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결국 러시아 해군은 속력을 줄이며 조심스럽게 운항할 수 밖에 없어 방어에 취약하게 됩니다.그렇다고 해도 흑해함대의 기함 역할을 하는 1만 1500t급 대형 순양함 모스크바함을 공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스크바함은 심지어 미국 패트리엇 미사일과 성능이 미슷한 ‘S-300’ 대공미사일 64발, 30㎜ 근접방어무기(CIWS) 6문을 장착해 흑해 북부의 대공 방어 핵심 자산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당시 튀르키예로부터 무인기 ‘바이락타르 TB2’ 12~16기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또 자체적으로 사거리 208㎞인 ‘넵튠’ 대함 순항미사일을 개발했습니다. 넵튠 미사일은 아조우해 전역, 흑해의 3분의1을 공격할 수 있는 위력을 지녔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은 이 두 가지 무기를 이용해 기가 막힌 조합을 생각해냅니다.지난해 4월 14일 모스크바함은 아무런 호위도 받지 않고 오데사항에 접근합니다. 당시 인근 해역은 먹구름이 낀 상태였고 시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은 은밀히 바이락타르를 모스크바함 쪽으로 이동시킵니다. 몇 기가 동원됐는지, 전투 중 얼마나 손실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인기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무인기로 교란한 뒤 미사일로 격침” 국제정치학 박사로 이번 논문을 작성한 최영찬 합동군사대 군사전략 교관은 “모스크바함 승무원들은 넵튠 미사일이 아닌 드론과 교전하기 위해 사격통제레이더를 조종하도록 유인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습니다. 교란된 방어선을 뚫고 곧바로 넵튠 미사일 4발이 날아들었습니다. 2발은 근접방어무기에 손실됐지만, 남은 2발의 넵튠 미사일은 정확히 함선의 중심을 타격합니다. 곧이어 탄약고가 유폭돼 사실상 생명이 끊어진 함선은 세바스토폴 항구로 예인되던 도중 침몰했습니다. 유럽 최강이라고 자부했던 러시아 흑해함대의 기함이 순항미사일 2발을 맞고 침몰한 치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자존심을 다친 러시아는 “태풍으로 폭발 사고가 나 침몰했다”고 얼버무렸지만, 우크라이나군의 사기는 급상승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우정본부는 침몰한 모스크바함을 조롱하는 기념우표까지 발행했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은 같은 해 3월 바이락타르 무인기와 122㎜ 다중발사로켓시스템을 연계시켜 해안선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마침 러시아가 2018년 도입한 1700t급 신형 초계함 ‘바실리 비코프함’이 이동하다 이 덫에 걸려 크게 손상됐다고 합니다. 또 같은 달 러시아의 3000t급 ‘오르스크 상륙함’도 바이락타르 무인기와 ‘토치카 탄도미사일’에 의해 침몰됐습니다. 그 와중에 모스크바함까지 침몰하면서 러시아군의 대공방어력은 크게 취약해집니다. 결국 러시아 흑해함대는 초계함과 호위함 같은 소형 함선 위주로 운용하는 소극적 전략을 취하게 됩니다.●무인기 방어선 접근 전 격추 등 연구 필요 무인기를 이용한 우크라이나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5월 6일엔 공세도 취합니다. 바이락타르 무인기와 SU-27 전투기를 연계한 작전으로 2척의 고속정을 파괴하고 빼앗긴 흑해의 요충지 ‘뱀섬’을 수복했습니다. 러시아의 ‘토르 지대공미사일’(SA-15)을 무인기로 교란해 미사일을 소모하게 하는 치밀한 전략이 사용됐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은 순양함인 모스크바함을 포함해 호위함, 초계함, 상륙함 등 최근까지 13척의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뒀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선전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도 있습니다. 우선 무인기 군집전술을 방어하기 위한 함정 방어체계 개발이 시급합니다. 2016년 미 해군 이지스함을 동원한 시뮬레이션에서 수백번의 전투실험을 벌인 결과 8기의 무인기를 투입할 때 평균 2.8기의 무인기가 방어선을 뚫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벌떼 공격’엔 당해낼 방법이 없는 만큼 무인기가 방어선에 도달하기 전 방어체계를 가동해 섬멸하는 게 최선입니다. 또 기뢰전 전력 확충, 노후된 함선의 기능 점검, 전시 상황을 적용한 승조원 훈련 강화도 필요하다고 최 교관은 강조했습니다.
  • ‘최강욱 중징계’ 이준석 징계 나비효과 부르나

    ‘최강욱 중징계’ 이준석 징계 나비효과 부르나

    최강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비위로 ‘중징계’를 받은 것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징계에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린다. 국민의힘 윤리위원회는 성상납 의혹이 불거진 이후 이 대표의 증거인멸 의혹과 이와 관련한 품위유지 의무 위반에 대해 22일 오후 7시 국회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심의한다. 이 대표가 성상납 의혹을 무마하기 위해 김철근 당대표 정무실장을 통해 증거인멸을 시도했는지가 핵심이다. 최 의원이 6개월 당원 자격 정지라는 징계를 받은 것이 나비효과를 불러 중징계가 내려질 수 있다는 예상도 조심스레 나온다. 국민의힘의 한 의원은 “성상납건으로 징계위에 회부된 것은 아니지만, 같은 성비위인데 봐준다는 인식을 주면 안 되지 않나”라고 했다.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 대표는 21일 페이스북에 “결국 그에게도 포에니 전쟁보다 어려운 게 원로원 내의 정치싸움이었던 것 아니었나”며 “망치와 모루도 전장에서나 쓰이는 것이지 안에 들어오면 뒤에서 찌르고 머리채 잡는 거 아니겠나”라고 심경을 암시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BBS 라디오에서는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 성상납 의혹과 관련해 이 대표가 유성관광호텔에 들어가는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 공개를 예고한 것을 두고 “그런 것이 있으면 다 공개하라”고 했다. 대선 기간 한때 윤석열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였던 이 대표는 최근 들어서는 윤 대통령을 ‘보수의 노무현’이라고 극찬하고 김건희 여사를 호평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윤리위를 앞두고 다급한 이 대표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 대표는 윤 대통령 부부 지인의 아들 황모씨가 용산 대통령실 행정관으로 일하는 것이 ‘사적 채용’이라는 비판에 대해 “그분은 애초에 굉장히 역량이 있는 사람이다. 대통령을 선거 기간 여러 위치에서 보좌했고 주변 평가도 굉장히 좋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 여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할 요소가 없다”며 “굉장히 겸손하고 낮은 행보를 계속 이어 가겠다는 기조가 있기 때문에 민주당의 기우”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느닷없이 언론의 수준을 폄훼하는 것으로 윤 대통령을 띄워 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전날 KBS 라디오에서 윤 대통령의 출근길 기자 문답(도어스테핑)에 대해 “(기자들이) 평론에 해당하는 것을 물어보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보다는 조금 더 고난도의 질문을 준비했을 때 대통령께서 그것에 대해 긴장감을 느끼면서 더 의미 있는 국가 정책에 대한 홍보나 이런 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문명의 파고 넘나든 바다… 끝나지 않은 인류의 항해

    문명의 파고 넘나든 바다… 끝나지 않은 인류의 항해

    문명의 결정적 연결고리는 ‘바다’ 파고 넘나들듯 역동적 역사 매료 세계사의 촘촘한 항로 탐방 끝엔 해상패권·기후변화 등 현실 마주 깊고 묵직한 성찰의 시간 속으로인류의 역사는 주로 대륙을 중심으로 기술됐다. 수렵과 채집, 농업 등 땅에서 흙을 일구며 문명과 기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 그간 우리의 틀을 채운 일반적인 경로였다. 그러나 지구 표면의 71%나 차지하는 바다가 그저 육지를 무대로 한 역사의 조연에만 그쳤을까.역사 발전 과정에서 바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다양한 연구를 이어 온 주경철 서울대 교수가 이번에는 인류사를 통틀어 바다를 주인공으로 두고 역사를 재해석했다. ‘대항해 시대-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2008)을 비롯해 15~18세기에 집중했던 그간 연구를 더욱 넓혀 선사시대부터 우리가 곧 마주할 미래까지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조금만 시선을 넓히면 훨씬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역사가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 각 대륙과 대양의 수많은 섬으로 옮겨 갈 수 있었던 것은 바다를 통해서였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로 넘어가 대형 동물들과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지구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인류사의 시작부터 그 무대는 바다였다. 태평양과 인도양은 선사시대와 고대 내내 멀리 떨어진 문명권을 서로 연결해 영향을 주고받게 하고 때로는 방향을 바꿔 서로를 점령하게 하는 토대였다.“바다는 접근을 제약하는 검푸른 장벽이 아니라 인간 삶의 역동적 무대였다”는 저자의 설명처럼 책장을 넘길수록 파고를 넘나드는 생동감 넘치는 역사 속으로 빠르게 빠져들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와 이를 더욱 발전시킨 로마제국이 서구 문명의 모태가 됐다는 건 기존 대륙의 역사로도 익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중해에 초점을 맞추면 도시국가 로마가 바다를 정복했기 때문에 카르타고(페니키아의 식민시)와의 포에니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른 비단길(실크로드)을 인도양을 관통하는 해상 실크로드로 넓히면 아시아 문명이 더욱 역동적으로 읽힌다. 말레이반도에서 중국을 넘어 한반도까지 거대한 땅덩어리가 이어진 한쪽과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일본 등 열도가 주변 바다와 어우러진 다른 쪽으로 아시아를 나눠, 두 바다가 어떻게 연결됐는지도 결국 바다로 설명된다. 당 제국(618~907)이 페르시아와 대규모 교역을 하게 되고 인도양 네트워크로 본격 편입될 수 있었던 해상력은 아시아 주요 국가의 근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주 교수의 오랜 연구가 축적된 박진감 넘치는 대항해시대를 지나 제국주의와 식민지 교역, 증기선이 개발되며 전 지구적으로 해양 네트워크가 활발해진 근대, 개항 시기 등 바다를 따라 촘촘하게 세계사를 탐방하고 나면 어느덧 아찔한 현재와 미래를 마주하게 된다. 땅보다 훨씬 풍부한 자원, 물류와 정보의 이동 등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 주는 희망의 파도 안에는 해군력을 앞세운 강대국들의 전쟁 위협부터 밀수, 해적, 그리고 기후변화와 해양 환경 오염 등 공포도 함께 들어 있다. 인간이 붙들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인류를 멸망시키는 시발점도 될 수 있는 바다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다. 흥미롭게 따라간 인류의 여정에서 읽어 낸 바다의 크고 묵직한 무게가 깊은 성찰의 시간을 준다.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돌고 도는 역사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돌고 도는 역사

    서양 문명의 원조인 그리스 문명을 그리스인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순전히 독자적으로 이룩한 업적이라고 믿은 적이 있었다. ‘유럽중심주의’ 또는 ‘유럽쇼비니즘’이다.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서 그리스는 백인들의 우월한 역사가 시작된 자궁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 문명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독자적 문명으로 보는 연구자는 없다. 고대 세계에서 처음으로 문명의 불을 밝힌 건 메소포타미아·이집트였다. 두 문명이 빛을 발할 때 그리스는 후미진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오리엔트 문명을 받아들여 그리스 문명을 탄생시켰고, 알렉산드로스는 그것을 동부지중해에 확산시켰다. 헬레니즘 문명의 등장이다. 그리스 문명이 떠오르자 오리엔트는 주변부로 가라앉는다. 헬레니즘 문명이 동부지중해에서 화려한 꽃을 피울 때,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는 어두컴컴한 변방이었다. 그러나 포에니전쟁으로 서부지중해를 장악한 로마가 이어 동부지중해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다. 이렇게 천 년을 지속한 로마는 5세기에 멸망한다. 로마 멸망 후 로마가 수용한 그리스 문명의 물줄기는 이슬람 세계로 흘러간다.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의 학문과 철학을 대대적으로 아랍어로 번역하고, 여기에 독창성을 가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랍어로 완역됐다. 이슬람 문명이 세계사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다. 로마 멸망 후 5세기 동안 변방에 머물던 서유럽은 11세기 십자군원정 이후 아랍인과 교류하면서 이슬람의 선진 문명에 경악한다. 그들은 이슬람 학자들을 스승으로 받들고,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한다. 12세기를 ‘번역의 세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할 수 없어서, 그리스어→아랍어→라틴어로 중역(重譯)했다. ‘대학’이 설립된 것도 이 무렵이다. 지적 자극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차오른 시기였다. 그 결과 1300년경 서유럽은 이슬람을 추월한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한 서유럽은 14세기 흑사병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16세기에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대륙으로 뻗어나간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다. 21세기가 밝았다. 태평양 건너 동아시아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전성기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풍차·소금의 도시 트라파니와 소금 이야기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풍차·소금의 도시 트라파니와 소금 이야기

    시칠리아에 민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왕은 세 명의 공주를 한자리에 불러 말했다. “진정으로 아비를 사랑한다면 나의 생일에 가장 특별한 선물을 가져다주거라.” 왕의 생일날이 되자 첫째는 금으로 된 호화스러운 장신구를, 둘째는 진귀한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아버지에게 선물했다. 흡족한 미소를 띤 왕은 마지막으로 막내딸이 준 선물상자를 열었다. 진귀한 선물을 기대했건만 상자 속에 담긴 건 낡은 소금 자루 하나였다.크게 진노한 왕은 막내 공주를 성에서 즉시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공주는 친구인 궁정 요리사에게 ‘앞으로 왕이 먹는 음식에 소금을 넣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는 홀연히 성을 떠났다. 그날 이후 왕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간이 안 된 음식에 무슨 맛이 있으랴.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든 왕은 막내 공주를 다시 성으로 불러들여 지혜로움을 칭찬했고 그 뒤로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여느 민담과 동화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음식에 소금이 빠지면 ‘먹지 못할 정도로 맛이 없다‘는 사실이다. 요즘에야 소금의 과잉이 각종 성인 질환의 원인으로 인식돼 위험물질 취급을 받고 있지만 본디 소금은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이자 요리에 있어 맛을 내는 시작과 끝, 알파이자 오메가와 같은 존재다. 소금은 단지 음식에 짠맛만 불어넣는 것이 아니다. 조리 과정에서 재료와 상호작용을 하며 쓴맛과 같은 불쾌한 맛을 가려 주고 맛과 향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분자요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란 아드리아 셰프는 소금을 두고 “요리를 변화시키는 단 하나의 물질”이라고 했다. 유럽에서 이름난 소금 산지를 꼽으라고 하면 프랑스 게랑드와 영국의 몰든, 그리고 이탈리아의 남쪽 섬 시칠리아에 위치한 트라파니를 꼽는다. 그중에서 트라파니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염전으로 유명한 곳이다.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기후, 그리고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 이곳에 염전을 만든 건 고대 페니키아인들이었다. 트라파니는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을 지중해 중간에서 잇는 요충지인 동시에 드넓은 곡창지대와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줄 수 있는 소금까지 생산되는 천혜의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가 수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하자 트라파니의 지배권은 로마인에게 넘어갔다. 테베레강 유역에서 소금 무역으로 흥한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잡고 더 큰 대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트라파니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양의 소금이 뒷받침된 덕분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우리가 천일염 하면 신안 갯벌을 연상하듯 이탈리아 사람들은 소금 하면 트라파니의 염전과 풍차를 떠올린다. 중세 때 만들어진 풍차는 바람의 힘을 이용해 거친 입자의 소금을 곱게 빻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남아 있다. 염전에 바닷물을 모아 두고 서서히 증발시키면 소금 결정이 생기는데 큰 결정은 아래로 가라앉는 반면 수면에는 눈꽃처럼 투명하고 얇은 결정층이 생긴다. 수면 위에 뜨는 고운 결정은 꽃소금(피오르 디 살레)이라고 부르는데 그 양도 많지 않고 일일이 사람이 걷어내는 수고를 요하기 때문에 일반 소금에 비해 값이 비싼 편이다. 바닥에 깔린 굵은 소금을 한데 긁어모아 간수를 빼는 과정을 거치면 천일염이 만들어진다. 염전에서 바로 수확한 소금을 주워 먹어 보면 짠맛보다 불쾌한 쓴맛이 더 느껴지는데 이는 간수에 함유된 마그네슘 성분 때문이다. 염전에 쌓인 간수가 빠지지 않은 소금을 몰래 한 바가지 퍼 간다고 한들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주방에서는 소금을 어떻게 사용할까.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소금이 있지만 요리사들에게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소금이라든가 친환경 소금, 두 번 구운 소금 같은 건 사실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미네랄이 더 함유된 소금은 정제 소금에 비해 맛이 다르다고 하지만 사실상 조리 중간에 사용되면 재료 자체의 맛에 가려 그 차이를 느끼긴 힘들다. 국적을 불문하고 조리용 소금으로는 염도를 맞추기 편하고 저렴한 정제염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많은 요리사들이 탐내는 건 요리의 마무리에 쓰는 소금이다. 몰든 소금과 같이 속이 빈 피라미드 모양의 박편형 소금은 서양요리를 하는 셰프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소금 중 하나다. 음식이 나가기 직전에 살짝 뿌려주면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식감과 함께 짠맛의 악센트를 준다. 이외에도 트러플이나 셀러리, 발사믹 식초 등 향을 첨가한 소금들도 있는데 대부분 조리용이 아닌 마지막에 포인트를 줄 때 사용한다. 이러한 소금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맛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역할을 하기에 되도록 다양한 소금을 구비하고 싶은 것이 요리사들의 작은 소망이다.
  • [In&Out] 다문화 포용이 강대국으로 가는 길/김태석 한국건강가정진흥원 이사장

    [In&Out] 다문화 포용이 강대국으로 가는 길/김태석 한국건강가정진흥원 이사장

    몇 년 전 방영된 TV 다큐멘터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주요 나라가 강대국이 된 배경을 다룬 내용이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온 우리나라 입장에서, 그리고 이 나라 국민으로서 흥미로운 주제였다. 방송을 통해 깨달은 강대국의 주요 요건은 다문화, 다민족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었다. 로마의 경우 기원전 216년에 일어난 1차 포에니전쟁에서 아프리카 지역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에 군인 5만여명이 전사해 대패했다. 역사상 이런 패전 후에 멸망하지 않은 국가가 없는데 패배 이후 로마와 동맹을 맺은 주변국들은 로마로부터 돌아서지 않았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동맹국의 도움으로 승리했고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 결과의 주요 요인은 동맹국에 대한 로마의 관용이다. 주변국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패배자들에게 시민권을 나눠 주고 동료로 적극 받아들인 로마의 역사가 위기의 순간에 로마를 구했다. 로마는 정복한 동맹국 백성들에게 시민권뿐 아니라 원로원 회원과 심지어 황제 자리까지도 줬다.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이다. 한니발의 고향이자, 로마의 최대 적국이었던 카르타고 출신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200만명을 넘어섰고, 다문화가족은 2015년 기준 89만명으로 2020년 100만명이 예상된다. 이 중 18세 이하는 20여만명이다. 중소기업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간과할 수 없다. 수많은 이주여성들이 가정을 꾸리고, 출산과 양육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크다. 이들은 한국사회 적응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외국에 있는 가족들과 동떨어져 생활해 발생하는 외로움이 크다. 정착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녀들에 대한 양육 및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생활상의 어려움과 불편함은 일정 부분 있다 하더라고 더 힘든 부분은 외모, 국적 등을 ‘차이’로 이해받기보다 ‘차별’로 경험할 때다. 2015년 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차별을 경험한 결혼이민자 및 귀화자의 비율이 40.7%다. 3년마다 다문화수용성을 조사하는데, 2012년 51.2점에서 2015년 54.0점으로 좀더 나아지긴 했다. 청소년에 비해 성인 특히 고연령층과 전업주부의 다문화수용성지수가 낮고, 외국인·이주민 다수 취업 업종 종사자의 경우 다문화수용성이 취약했다. 우리에게도 이민족에 대한 관용과 포용의 철학이 필요하다. 우리 모습을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다문화에 대한 이해는 다문화인을 우리와 같은 인격으로 인식하는 것이 첫 시작이다. 다문화 이해를 위한 다양한 교육 지원과 이주민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마련 등을 통해 실제 보고, 듣고, 소통할 수 있는 장들을 마련해 조금씩 긍정적인 변화를 도모해 나갈 수 있다. 다문화이해교육을 늘리고 온라인다문화이해교육(다누리배움터)을 개설해 교육 접근성을 높이며, 다양한 교육 콘텐츠 개발 등을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자 모두 우리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시선과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전해진 따뜻한 눈길 하나하나가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으로 각인될 것이다. 우리나라를 스스로 찾아온 이주민들을 따뜻하게 대하며 적극 포용하고 함께 나아갈 때 우리 대한민국도 강대국의 길목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 [사이언스 톡톡] 실크로드서 찾은 화장지 전염병도 비단 따라 왔네

    반갑네, 난 페르디난트 프라이헤어 폰 리히트호펜(1833~1905)일세. 독일의 지질학자이자 지리학자이지. 동양과 서양을 연결시켜준 통상로인 ‘실크로드’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나야. 내 이전까지 지리학은 책상에서 지도나 보고 해당 지역을 여행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모아 연구하는 일종의 탁상공론의 학문이었어. 그렇지만 난 지리학이란 현장에 직접 찾아가서 봐야 하는 관찰실험 학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네. 베를린대학에서 지질학을 배우고 빈 지질조사소에서 근무하던 때인데, 1860~1862년에 극동경제사절단에 소속돼 스리랑카와 대만, 필리핀, 일본 등을 방문했고, 이듬해부터 1868년까지 5년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지리학적 조사를 했지. 1868~1872년에는 중국 상하이 서방상인회의 지원으로 중국과 티베트 일대 지질, 광산, 해안선 등을 조사하고 ‘중국’이라는 제목으로 5권짜리 책을 펴냈다네. 1권 후반부에 동서교류사를 개괄하면서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하는 교역로를 통해 중국의 비단이 수출됐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 길을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 즉 ‘비단길’(실크로드)이라고 이름 지었지. 내가 처음 이름 붙인 실크로드를 통해 오간 것이 비단 같은 교역물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다네. 영국 케임브리지대 고고학·인류학과 연구진과 중국 간쑤 인류학연구소 및 문화유적박물관, 베이징 고고학연구소 공동연구진이 고고학 관련 국제학술지 ‘저널 오브 아케올리지컬 사이언스 리포츠’ 22일자에 발표된 논문을 통해서 말이지. 흠, 일단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기 전에 연구 과정에 좀 지저분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주고 싶구먼. 연구진은 실크로드에서 발견한 2000년 전 사람의 대변을 분석해서 비단을 수출입하던 길을 통해 전염병도 이동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네. 연구진은 간쑤 문화유적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위생막대를 꺼내들었지. 위생막대는 1992년 중국 둔황지역에서 발견됐던 것인데 건조한 날씨 덕분에 비교적 원형대로 보관이 잘 됐다더군. 위생막대가 뭐냐고? 지금은 부드러운 화장지나 비데 등으로 뒤를 처리하지만 먼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단 말이지. 그럼 어떻게 처리했을까. 대나무 막대 끝에 천조각을 말아 일종의 화장지 역할을 한 거야. 그게 위생막대인데, 이 대나무와 천 쪼가리들을 케임브리지 과학자들이 분석해서 실크로드의 비밀을 풀게 된 것이지. 연구자들은 위생막대 끝에서 네 종류의 기생충 알을 발견했는데 그중에는 당시 서방에서는 없었던 간흡충알이 있었다더군. 간흡충은 한국, 라오스, 베트남이나 중국 광둥성 인근 습지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물고기를 날것으로 먹는 경우 쉽게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감염병이지. 사실 변을 이용해 고대의 수수께끼를 푼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네. 지난 3월 캐나다와 영국 연구진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할 때 알프스 산맥 어느 쪽으로 넘어갔을까라는 의문을 기원전 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말똥 화석을 분석해 밝혀내기도 했지. 아무짝에 쓸모없어 보이는 배설물까지도 과학 연구에 쓰인다니 정말 놀랍지 않나.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과연 누구일까?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과연 누구일까?

    한니발, 대군 끌고 알프스 넘은 장군 한니발 전쟁은 3막으로 이루어진 포에니 전쟁 중 제2막이다. 포에니 전쟁이란 로마와 페니키아의 아프리카 식민시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2세기 중엽까지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판 세계대전이다. 1차전에서 신흥 로마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강대국 카르타고는 그야말로 23년의 와신상담 끝에 기원전 218년, 한니발을 앞세워 설욕전에 나섰다. 29살의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까지 포함, 2만 6000의 대군을 이끌고 눈보라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요격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공격로였다. 게다가 한니발은 전술의 귀재였다.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와 상상을 초월하는 전법으로 적의 의표를 찔러가며 연전연승을 거두어 로마를 공황 속에 빠뜨렸다. 특히 기원전 216년 8월 남이탈리아의 칸나에 전투에서 기발한 용병술로 우월한 병력의 로마군을 포위·섬멸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칸나에 전투는 포위-섬멸전의 전범으로 각국 사관학교 교범에 올라 있을 정도다. 뒤에 한니발을 패퇴시킨 스키피오는 이때 17살로, 칸나에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 중앙을 뚫고 몇 km 떨어진 카누시움까지 살아 돌아간 운좋은 무리에 섞여 있었다. 이 전투를 전후로 한니발은 16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으로 유린하며 연전연승, 로마를 괴롭혔으나 끝내 로마의 항서를 받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반도에 있는 로마의 동맹시들이 로마에서 이반하지 않고 굳건히 로마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6년의 전쟁 중 한니발은 자신도 모르게 적진 속에서 한 수제자를 키우고 있었다. 바로 16년 후인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전술로 한니발을 쓰러뜨린 스키피오였다. 스키피오, 한니발에게 배워 한니발을 꺾다 청년 스키피오는 여러 차례 한니발 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어버릴 뻔한 위기들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운좋게 살아남아 마침내는 한니발을 꺾어버린 명장으로 자라났던 것이다. 여러 차례 패배를 거듭하면서 한니발에게 배운 전술과 용병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원정군과 맞부딪친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참담하게 완패했고, 이로써 카르타고는 소도시로 몰락하고, 한니발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생전에 한니발은 스키피오를 만난 적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자마 전투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라고 할 만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부분을 인용해 이 장면을 재현해보기로 하자. 한니발보다 12살 아래인 스키피오가 50줄에 접어든 노장에게 공손히 물었다. “장군,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를 능가할 사람은 없소. 페르시아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곳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할밖에 없소." “그러면 두 번째로 뛰어난 명장은요?” 한니발은 이번에도 거침없이 말했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병법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숙영지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그렇다면 세 번째는?” 역시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바로 나, 한니발이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꺾은 공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까지 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미소짓는 얼굴로 물었다.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한테 이겼다면요?" “그랬다면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뛰어넘어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을 거요.”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 몫이겠지만, 한니발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 간략히 말한다면, 자마 패전 후 조국 카르타고에서도 버림받은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로 망명했다. 얼마 후엔 다시 비티니아 왕에게 의탁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간 후, 기원전 183년 자신을 체포하려는 로마 병사들이 문 밖에 도착하자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 향년 64세. 조국 로마의 배신으로 버림받은 스키피오도 그해에 세상을 등졌다. 둘은 저승길에서 만나 인생사 무상함을 같이 회고했을까?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후인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에서 로마의 잔혹한 소탕전으로 카르타고는 지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일까?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일까?

    한니발, 대군 끌고 알프스 넘은 장군 한니발 전쟁은 3막으로 이루어진 포에니 전쟁 중 제2막이다. 포에니 전쟁이란 로마와 페니키아의 아프리카 식민시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2세기 중엽까지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판 세계대전이다. 1차전에서 신흥 로마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강대국 카르타고는 그야말로 23년의 와신상담 끝에 기원전 218년, 한니발을 앞세워 설욕전에 나섰다. 29살의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까지 포함, 2만 6000의 대군을 이끌고 눈보라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요격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공격로였다. ​게다가 한니발은 전술의 귀재였다.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와 상상을 초월하는 전법으로 적의 의표를 찔러가며 연전연승을 거두어 로마를 공황 속에 빠뜨렸다. 특히 기원전 216년 8월 남이탈리아의 칸나에 전투에서 기발한 용병술로 우월한 병력의 로마군을 포위·섬멸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칸나에 전투는 포위-섬멸전의 전범으로 각국 사관학교 교범에 올라 있을 정도다. ​뒤에 한니발을 패퇴시킨 스키피오는 이때 17살로, 칸나에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 중앙을 뚫고 몇 km 떨어진 카누시움까지 살아 돌아간 운좋은 무리에 섞여 있었다. 이 전투를 전후로 한니발은 16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으로 유린하며 연전연승, 로마를 괴롭혔으나 끝내 로마의 항서를 받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반도에 있는 로마의 동맹시들이 로마에서 이반하지 않고 굳건히 로마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6년의 전쟁 중 한니발은 자신도 모르게 적진 속에서 한 수제자를 키우고 있었다. 바로 16년 후인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전술로 한니발을 쓰러뜨린 스키피오였다. 스키피오, 한니발에게 배워 한니발을 꺾다​ 청년 스키피오는 여러 차례 한니발 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어버릴 뻔한 위기들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운좋게 살아남아 마침내는 한니발을 꺾어버린 명장으로 자라났던 것이다. 여러 차례 패배를 거듭하면서 한니발에게 배운 전술과 용병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원정군과 맞부딪친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참담하게 완패했고, 이로써 카르타고는 소도시로 몰락하고, 한니발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 생전에 한니발은 스키피오를 만난 적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자마 전투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라고 할 만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부분을 인용해 이 장면을 재현해보기로 하자. 한니발보다 12살 아래인 스키피오가 50줄에 접어든 노장에게 공손히 물었다. “장군,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를 능가할 사람은 없소. 페르시아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곳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할밖에 없소." “그러면 두 번째로 뛰어난 명장은요?” 한니발은 이번에도 거침없이 말했다. ​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병법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숙영지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그렇다면 세 번째는?” 역시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바로 나, 한니발이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꺾은 공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까지 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미소짓는 얼굴로 물었다. ​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한테 이겼다면요?" “그랬다면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뛰어넘어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을 거요.” ​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 몫이겠지만, 한니발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 간략히 말한다면, 자마 패전 후 조국 카르타고에서도 버림받은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로 망명했다. 얼마 후엔 다시 비티니아 왕에게 의탁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간 후, 기원전 183년 자신을 체포하려는 로마 병사들이 문 밖에 도착하자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 향년 64세. 조국 로마의 배신으로 버림받은 스키피오도 그해에 세상을 등졌다. 둘은 저승길에서 만나 인생사 무상함을 같이 회고했을까?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후인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에서 로마의 잔혹한 소탕전으로 카르타고는 지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세종로의 아침] 정책과 정치의 딴짓/김경운 정책뉴스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정책과 정치의 딴짓/김경운 정책뉴스부 전문기자

    기원전 3세기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막 세력을 확장하려던 로마에 지중해 맹주인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침공했다. 117년에 걸쳐 펼쳐진 포에니 전쟁의 서막이다. 승승장구하던 카르타고의 군주 한니발은 로마를 향해 진군하다가 본국 원로원에 병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싸늘하게 거절당했다. 의원들의 불만은 기득권만 지키면 우리끼리 잘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위험 부담이 큰 침략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것이다. 카르타고의 맹공으로 로마는 방어에 나섰던 장군들이 맥없이 패전하고 전사하자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자 원로원 의원들도 군장을 갖추고 전쟁터로 향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선 군인이나 시민, 의원 모두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각오다. 결국 이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지중해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나선 한니발은 의회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카르타고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로마는 이후 1000년을 번성하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출범 이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사회 곳곳에 오래 묵은 때를 없애는 데 집중한 듯하다. 세월호 침몰 사고 후 불안정한 공무원연금을 개선했다. 엄두를 못 내던 일이다. 그러나 공무원들의 사기를 꺾고 퇴직 후 취업까지 막으면서 온통 벌집을 건드린 것에 비해 결과는 솔직히 미미했다고 본다. 규제 개혁에 대한 노력은 돋보인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이 영업하는 데 불필요한 행정 제한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없앴던 규제는 곧 다시 생길 것이다. 규제 법안의 상당수가 정치적 이해관계가 상존하는 국회에서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노동 개혁은 ‘너 죽고 나만 살자’라는 개념이 이해집단마다 뒤엉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부동산·경제 활성화 정책 역시 가계부채만 왕창 늘려 놨다. 그래서 “현 정부는 그동안 뭘 했는지”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닐까. 정책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게 정부 책임만은 아니다. 지금 정치권은 내년 4·13총선을 앞두고 ‘공천권 다툼’에 휩싸였다. 무능한 기성 정치인을 ‘물갈이’하겠다는 요구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내세운 여당의 ‘험지 출마론’, 야당의 ‘저격수 차출론’ 등에 대해선 뒷말이 많다. 출마 후보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권자를 대변하고 그 지역의 발전을 위해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험지 출마론이란 후보자의 뜻이나 유권자의 바람과 관계없이 국회 의석수로 상대 정당을 제압하려는 독선이 아닐까. 또 저격수 차출론도 민심을 무시한 채 오로지 목적만 달성하려는 아집이 아닐까. 정치의 최고 덕목이라는 대화와 타협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결국 정책과 정치가 따로 돌면서 정부는 민생법안 통과에 징징 우는 소리를 하고, 정치권은 의회 정치를 무시하는 정부에 뿔이 나 있다. 이 모두에 국민은 안중에 없다. 이렇게 불신이 생긴 원인을 생각하다 보면 요즘 한 여가수의 노래처럼 ‘~전해라’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청와대와 정부는 국회와 국민에게 ‘이렇게 한다고 전해라’라 했고, 정치권 지도부는 ‘챙기기에 바쁘다고 전해라’라고 한 듯하다. 취업의 길이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만 안쓰럽다. kkwoon@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英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여왕부터 전원 군복무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英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여왕부터 전원 군복무

    ▲ 여왕도 군용트럭 몬 수송장교 영국 왕실의 왕위 계승 서열 5위인 해리 왕자(Henry Charles Albert David Windsor)가 19일(현지시간) 10여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고 영국 왕실이 밝혔다. 해리 왕자가 군 복무를 마치면서 영국 왕실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가문이라는 칭송이 쏟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왕은 물론 왕실 남성 모두가 군 복무를 했으며, 대부분 최전선에 자원해 전투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여왕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송보급장교로 근무하며 직접 군용트럭을 운전했고, 아들인 찰스 왕세자(Prince of Wales) 역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6년간 해군장교로 복무했다. 찰스 왕세자의 동생인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Andrew Albert Christian Edward) 역시 1979년 소위로 임관해 2001년 해군중령으로 전역하였고, 복무기간 중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해 최전선에서 헬기 조종사로 활약했으며, 해리 왕자의 형인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William Windsor) 역시 영국 공군에서 근무하고 전역했기 때문이었다. 왕실 인사 대부분이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군 복무를 했다면, 이번에 전역한 해리 왕자는 진심으로 군대가 좋아서 군복을 입었던 특이한 케이스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군복을 입고 장난감 총을 들고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유난히 군대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 “진짜 장군 계급장을 달겠다”...아프간 파병 자원 영국 최고의 사립 명문 이튼 칼리지(Eton College)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했다. 그는 사관학교 입학 전에는 누드파티 파문과 대마초 흡연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샌드허스트 입학 이후에도 파키스탄에서 유학 온 교환생도에게 ‘파키'(Paki)라는 비하 표현을 사용해 징계를 받기도 하는 등 잦은 구설에 시달렸다. 그러나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소위로 임관하면서부터는 철이 든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자대 배치를 영국 육군 내에서도 최정예 부대로 손꼽히는 근위대, 그 중에서도 400년 전통의 블루스 앤 로열스(Blues and Royals) 근위기병연대에 배치 받았는데, 부대에 짐을 풀자마자 지휘관을 찾아가 이라크 파병 부대에 차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왕실이 극구 반대하면서 해리 왕자의 이라크 파병은 좌절되었지만, 그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자원했고 할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해 아프가니스탄 남부 헬만드(Helmand) 지역으로 파병되었다. 탈레반 거점이었던 이 지역에서 해리 왕자는 적진 한복판에 침투해 전투기나 공격헬기의 공중 공격을 유도하는 합동최종공격통제관(JTAC : Joint Terminal Attack Controller)로 활약하며 실전을 겪었다. 해리 왕자가 이 부대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비밀이었으나, 미국의 한 폭로 전문지가 해리 왕자의 임무수행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하면서 탈레반은 눈에 불을 켜고 해리 왕자를 찾아 나섰고, 결국 당시 왕위계승 서열 3위의 왕세손의 안전을 우려한 국방부는 해리 왕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본토에 있는 부대로 전출 명령을 내렸다. 그는 본토 복귀 이후 지휘관과 국방부에 “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장에 파병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와중에 헬기 조종사가 되면 파병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항공장교에 지원해 합격했다. 대위로 진급한 그는 2011년 공격용 헬기인 아파치 AH Mk.I(AH-64D)의 조종사(Pilot) 및 사수(Co-pilot gunner) 자격을 취득했는데, 그는 교육 수료식에서 최우수 특등 사수(Best co-pilot gunner) 상을 수상하고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지원했다. 그는 2012년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되어 실전에 투입됐는데, 실제 전투에 나가 적지 않은 탈레반 병사들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임무를 마치고 영국에 복귀했을 때 “사람을 사살한 일이 있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빼앗았다”면서 아프가니스탄군과 NATO 치안유지군 부상자 구출 작전에 투입되어 상당한 수의 탈레반을 사살한 사실을 시인했다. 해리 왕자는 2013년 영국 본토로 돌아온 뒤 제3항공연대에서 지휘관 및 참모로 근무했으며, 2015년 1월 영관장교 자격시험에 통과, 소령 진급 대상자가 되었다. 그는 자격시험 통과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징적인 계급이 아닌, 진짜 군 복무를 통해 장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결국 5개월 만에 군복을 벗었다. 그가 전역을 결심한 배경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와 더불어 위험한 전장을 선호하는 해리 왕자를 걱정한 찰스 왕세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해리 왕자는 전역 후 3개월 일정으로 아프리카를 찾아 환경보전 활동에 나설 예정이며, 추후 상이군경들을 대상으로 한 복지 사업에 뛰어들 것으로 알려졌다. ▲ 노블리스 오블리제 : 권리와 책무 영국 왕실 인사들은 모두 명예계급을 가지고 있다. 여왕의 남편이자 윌리엄·해리 왕자의 할아버지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The Duke of Edinburgh, Philip Mountbatten)은 영국 육·해·공군 명예원수 계급을, 대위로 전역한 윌리엄 왕세자 역시 육·해·공군 명예원수 계급을 가지고 있으며, 중령으로 전역한 앤드루 왕자 역시 명예 해군소장 계급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의전을 위한 상징적인 명예계급이지만, 이들은 모두 실제 군에서 복무했고, 실전에 참가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다. 영국 왕실이 병역에 엄격한 것은 지도층으로서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다. 해리 왕자의 가문인 윈저(Windsor) 왕가는 해리 왕자의 고조할아버지인 조지 5세(George V)부터 병역 명문가(?)였다. 조지 5세는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당시 영국 해군 최강의 전함이었던 1급 전열함(1st rate ship of the line) HMS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견습 생도로 해군 생활을 했으며, 그 아들인 조지 6세(George VI) 역시 해군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포술장교로 활약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런던 대공습 작전을 벌여 런던 곳곳에 초토화되었을 때 조지 6세는 아내인 메리 왕비와 함께 폐허가 된 런던 시내를 누비며 장병과 시민들을 격려하고 구조 및 복구 작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딸인 엘리자베스 2세를 군에 입대시키며 솔선수범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에서 영국인들이 적지 않은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60~70% 이상의 지지율로 군주제 유지를 지지하는 것은 그동안 영국 왕실이 보여주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 다이애나비 사건부터 앤드루 왕자 불륜 사건,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의 마약 및 퇴폐 파티 사건 등 온갖 추문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던 왕실이지만, 왕실 구성원들은 스스로 군복을 입고 자청해서 전장에 나가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전장을 누볐고,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영국 국민들은 왕실 인사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부와 권력, 명예를 가진 자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공동체 구성원들의 화합과 단결, 이를 통한 공동체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군복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자에게만 시민의 자격을 부여했고, 공화정 당시 로마에서는 의회를 구성하는 귀족들은 물론 귀족들 가운데 선거를 통해 선출된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Consul)들 사이에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공공시설이나 도로를 신축하거나 보수하는 일은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졌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은 앞다투어 로마군의 선봉에 서서 싸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16년간의 전쟁에서 사망한 집정관의 수는 무려 13명에 달했다. 사회 지도층이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과 재산, 명예를 기꺼이 내놓는 전통이 있는 나라는 혼란이 있더라도 빠르게 사회통합을 이루어 위기를 극복했고, 대개의 경우 강대국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부정부패와 사회분열을 거듭하다가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망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가 보여주는 불문율이다. 이러한 불문율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사회 저명인사나 부유층은 병역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 기부나 봉사활동에 대단히 인색하다.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정치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고, 자녀의 병역비리에 관여하거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갑질’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자녀에게는 수억대의 최고급 외제차를 선물하고 매달 여가생활에만 일반 봉급자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쓰면서도 길거리의 자선냄비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넣는 데에는 대단히 인색하다. 부와 권력, 명예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해리 왕자도 그랬고, 미국의 주요 대권주자나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군복을 입고 전장을 누볐거나 심지어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인사도 적지 않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아는 자가 사회지도층이 되어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니 여기에 국민들도 호응하여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OECD 가입,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 진입을 논하기에 앞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지도층의 인식부터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고대 영국에 ‘글래디에이터’가? 참수 해골 39개 발견

    고대 영국에 ‘글래디에이터’가? 참수 해골 39개 발견

    지난 1988년 영국 런던 성벽 부근에서 발굴된 39개 해골 머리의 정체가 참수된 로마 검투사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제기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는 고대 영국에 검투사가 존재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것으로 여겨져 고고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영국 인디펜던트, 데일리 메일 등 주요 외신들은 런던 박물관 인류 고고학센터 연구진이 이와 같은 견해를 밝혔다고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런던 박물관 인류 고고학센터 연구원 레베카 레드펀은 39개 해골의 두부 부분에서 심한 외상 흔적을 발견했고 턱뼈 대부분이 으스러졌다는 것을 토대로 이들이 평생을 폭력 속에서 살아간 검투사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39개 해골의 목 부분은 날카로운 칼날에 베어진 것으로 드러났는데 모두 예외 없이 참수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해골 발견 지역이 고대 로마 점령시기 시절 콜로세움과 비슷한 원형경기장 터였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 중인데 이는 해골의 주인이 검투사일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레드펀은 “해골의 상처는 모두 심한 격투로 인해 생긴 것이다”라며 “런던 지역에서 검투사의 물리적 증거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그녀는 “검투사들이 살해된 시기는 로마의 영국 지배가 고착화됐던 기원 후 120~160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 된다”고 덧붙였다. 검투사(라틴어: Gladiator, 글라디아토르)는 고대 로마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를 의미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에스파냐를 점령했을 때 ‘글라디우스’라는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을 채택했던 것에서 명칭이 유래했다. 로마 제국 점령 하의 많은 도시에는 원형투기장이 존재했고, 그곳에서 검투사들은 그들끼리 혹은 맹수와 싸워야 했다. 인공 연못 등을 만들어 모의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2000년 개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자세히 묘사됐다. 한편 해당 연구결과는 국제 학술지인 ‘고고학 저널(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에 이번 주 게재될 예정이다. 사진=런던박물관 제공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길섶에서] 돈은 피보다 진하다/이도운 논설위원

    지난달 28일 저녁 6시 30분. 지중해식 음식을 파는 튀니스 외곽의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야외 좌석에는 대형 LCD TV 5대가 설치됐다. 독일과 이탈리아 간의 유로 2012 준결승이 열리는 날이었다. 손님은 물론이고 웨이터들까지 온통 TV에 눈이 쏠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경기가 시작되고 이탈리아가 한 골을 넣자 모든 사람이 환호했다. 독일을 응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곁에 있던 튀니지인에게 물었다. 왜 이탈리아를 응원하느냐고. 그는 말했다. 튀니지 사람들이 지중해 바로 건너편인 이탈리아로 건너가 돈을 벌고 있다고. 포에니 전쟁 시절,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 장병 8만명 가운데 5만명을 도륙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함락시킨 뒤 모든 남자를 살육하고 여자와 아이를 노예로 삼는 것도 모자라 현재의 튀니스 시 전역에 불을 지르고 흙으로 덮어버렸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은 실용의 시대. 돈은 피보다 진하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한니발의 고향/이도운 논설위원

    “바로 여기가 한니발이 태어난 곳입니다.” 푸른빛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튀니스 해안가의 비르사 언덕. 현지 문화재청 관계자는 카르타고 유적지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집터가 제법 모습을 갖춘 채 남아 있었다. 얼른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제3국의 전문가는 “그런 주장도 있지만 에스파냐나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고 설명했다. 카르타고의 땅이었던 튀니지에서는 영웅 한니발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이름을 딴 상업 시설들이다. 지중해를 오가는 관광선이나 해변의 레스토랑에서 한니발이라는 이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튀니지인들의 한니발 사랑은 얼마나 깊을까. 고위인사가 포에니 전쟁 당시의 지도를 꺼냈다. 그러면서 한니발이 로마에서 알프스를 넘어 에스파냐로 갔다고 말했다. 내가 그 반대라고 말하자 머쓱해했다. 한니발은 살아생전에 조국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용만 당했다. 죽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데스크 시각] 앞선 것을 뒤따르며 극복하는 지혜/김경운 산업부 전문기자

    [데스크 시각] 앞선 것을 뒤따르며 극복하는 지혜/김경운 산업부 전문기자

    기원전 3세기 신흥국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해상강국 카르타고와 기어코 맞붙고 만다. 지중해 무역로의 패권을 둘러싼 포에니 전쟁의 서막이다. 로마군은 막강한 함대를 지닌 카르타고군의 최신형 5단 갤리선을 본떠 ‘짝퉁’ 갤리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카르타고군처럼 빠르게 돌진해 뱃머리 하단의 쇠뭉치로 적함의 옆구리를 들이박는 전법을 구사하려면 함선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수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까마귀 부리처럼 생긴 쇠갈고리가 달린 길이 12m의 나무다리를 만들어 짝퉁 갤리선에 탑재했다. 적함에 다가서면 재빨리 다리를 내려 쇠갈고리를 박은 뒤 병사들이 상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상전에서는 맥을 못 추지만, 육상 근접전에선 강한 자신들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새 전법이었다.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을 맞은 이순신 장군도 승산 없는 해상전에 나섰다. 일본군은 배 밑바닥이 ‘V자형’인 신형 함선으로 빠르게 접근, 조선군의 느린 ‘U자형’ 판옥선 갑판에 뛰어들어 능숙하게 칼을 휘두르는 버거운 상대였다. 이순신 장군은 고민 끝에 구형 판옥선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전략을 짜냈다. 둔하지만 튼튼한 판옥선에 대포를 탑재하고, 물 위의 판옥선이 거의 제자리에서 90도 회전할 수 있도록 노잡이 수병들을 훈련시켰다. 이는 일본군이 낡은 배라고 비웃던 평저선이었기에 도리어 가능했다. 판옥선은 적함을 유인해 ‘ㅡ형’으로 꽁무니를 빼다가 일제히 ‘∩형’으로 뱃머리를 돌린 뒤 적함을 향해 함포를 퍼부었다. 해상 함포전이라는 새 역사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삼성전자가 2년 연속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영업 실적을 거두었다. 두 해 전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진짜 위기론’을 거론했을 때 일부 언론 등에서는 괜한 ‘꿍꿍이셈’이라며 꼬집었던 기억이 난다. 이에 대해 당시 본 칼럼에서는 ‘엉뚱한 의심 말고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지적했으며, 삼성에는 ‘뼈를 깎는 노력’을 주문했다. 삼성은 애플의 아이폰이 엄청난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찬사를 한몸에 받을 때, 짝퉁이나 만든다는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그때 국내 기업들의 수준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삼성은 스스로 소프트웨어 시대를 열지 못하자, 장점인 하드웨어에 더욱 매진했기에 오늘의 성과를 냈다. 선두를 바싹 뒤따르는 ‘패스트팔로어’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 요즘 경영인들이 좋아하는 성장 DNA, 즉 ‘삼성의 DNA’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렇게 따라가며 틈틈이 여력을 모아 새 디지털 시대를 준비할 것으로 믿는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려면 앞선 남의 것에다 나만의 것을 하나 보태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볼품 없는 내 것에서 결국 남의 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탄생하지 않을까. 이 회장은 지난해 1월 9일 70세 생일 때 “앞선 회사도 퇴보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한국이 정신 안 차리면 또 한 걸음 뒤처질 수 있다.”고 특유의 위기론을 거듭 언급했었다. 애플의 독주를 일단 꺾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동점골로 간신히 연장전에 들어갔고, 이제 골든골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어릴 적 농촌에서 ‘올게쌀’을 먹어본 사람들은 커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곤 한다. ‘가을 들녘의 싱그러운 향기가 입안 가득히 구수하게 감도는’ 맛이다. 올게쌀은 볕이 덜 드는 땅에서 자란 설익은 벼를 찧은 뒤 쪄서 정성스럽게 말린 ‘찐쌀’의 남도 사투리이다. 어느 해 추석이 빨리 와 조상의 차례 상에 햇밥이 오르지 못할 처지가 되자, 위기에서 탄생한 지혜의 쌀이다. 햅쌀이 없으면 묵은 쌀을 올리거나 더 훌륭한 것으로 대체하면 될 테지만, 우리 조상들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 기본에 충실함으로써 더 나은 명품을 낳은 것이다. kkwoon@seoul.co.kr
  • ‘워싱턴맘’ 교육열 한국 뺨치네

    이달 초가 되면 미국 워싱턴의 부모들은 레스턴 어린이센터 앞에서 밤새 긴 줄을 선다. 7~8월에 시작되는 여름캠프 참가자 명단에 아이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다. 캠프는 11주 동안 진행되지만 한 주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은 80명에 불과하다. ‘진입장벽’이 그만큼 높고, 때문에 이를 뚫기 위한 학부모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섀넌 엘리엇 여름캠프 운영자는 “학부모들이 얼마나 일찍 와서 기다리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오전 6시에 와 있기도 하고 지난해에는 새벽 3시부터 길게 늘어서 있었다.”고 전했다. 워싱턴 맞벌이 부모들이 여름캠프에 자녀를 등록시키려고 1월부터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26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유명 사립 또는 국공립유치원 등록을 위해 며칠 전부터 텐트를 치고 기다리는 한국 부모들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운영하는 여름캠프는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하루 종일 박물관에서 로켓을 만들며 우주 역학을 배우고 로마시대 포에니 전쟁의 병사 모형을 만들면서 역사를 배우는 알찬 프로그램 때문이다. 비용은 일주일에 428달러(약 48만원)에 이른다. 여름캠프 등록을 받기 시작한 지난 11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전화망은 학부모들의 문의전화로 마비되다시피 했다. 바로 한 시간 전에는 인터넷 등록을 위해 몰려든 방문자 때문에 컴퓨터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미처 등록을 못한 부모들은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브리짓 블란체 여름캠프 운영자는 “‘우리 애가 지금 해외에서 오고 있는 중이다’, ‘백악관에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 등록시켜 달라’는 협박(?)을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데스크 시각] 정치인과 상인의 눈높이/김경운 산업부 부장급

    [데스크 시각] 정치인과 상인의 눈높이/김경운 산업부 부장급

    청와대와 정부가 ‘대기업 책임론’에 대해 많은 말을 쏟아냈다. 대기업들이 최대 호황을 누리면서도 하청 중소기업들과 상생(相生)하지 않고 있다는 일침이었다. 이에 대기업들은 투자와 고용 확대 등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할 만큼 했는데 채근만 하니 억울하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정부가 낡은 규제를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옥죄려고만 한다는 항변도 나왔다. 다행히 둘 다 서로에게 오해가 있었다며 악수를 나눈 뒤 어제 오늘 말을 아끼고 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를 지켜보던 국민 상당수는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대기업이 돈을 많이 벌어서 가슴이 아프다.’는 식의 망발이나 ‘정부가 중심을 못 잡고 떠밀리더니 엉뚱한 화풀이를 한다.’는 식의 독설까지 들렸으니 말이다. 정확한 토씨를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이 그런 말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나랏일에서 ‘잘 해보자.’는 정치와 ‘잘 살아보자.’는 경제에 어디 우선 순위가 있겠는가. 중소기업을 살리고 납품을 둘러싼 대기업의 나쁜 관행을 없애자는 본래 취지는 뒤로 숨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유치한 말싸움이고 힘겨루기일 뿐이었다. 덧붙여서 이런 유치한 일도 더 끌고가면 결국 나라를 망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기원전 3세기 로마와 카르타고의 2차 포에니 전쟁 당시에도 우리의 이런 상황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때 로마는 한낱 도시국가에서 벗어나 제국으로 뻗어가려는 야심을 드러냈고, 카르타고는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지중해 무역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기서 카르타고의 실력자 한니발 장군은 로마에 대해 원로원과 다른 의견을 보이며 사사건건 대립했다. 로마의 무서운 성장세를 꿰뚫은 한니발은 “지금 싹을 잘라야 카르타고의 번영이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는 “원로원이 이기적인 장삿속으로 뜻있는 대업을 망친다.”며 푸념했다. 반면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원로원은 “농업국가인 로마가 욕심을 내는 것은 영토이지 해상로가 아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한니발이 정치적 야심 때문에 해상무역을 본령으로 삼고 있는 카르타고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며 흥분했다. 한니발은 기어코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 산을 넘어 로마군에 연거푸 대승을 거두며 로마시 코앞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그의 운명이었다. 로마군의 반격에 밀려 결국 한니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몰살당하고 파괴됐다. 카르타고시에는 소금이 뿌려졌다. 앞으로 아무 것도 자라지 말라고. 역사는 한니발을 영웅으로 묘사하며 그를 돕지 않은 원로원을 무책임한 집단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당시의 현실을 직시한 해석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역사를 가정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한니발이 원로원의 말에 따랐다면 카르타고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꼴은 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로마는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등 역대 지중해 패권국가들과 달리 영토정복 전쟁에 몰두했다. 제국으로서 지중해도 장악했지만, 로마의 허락 아래 해상을 오가며 이득을 챙긴 것은 아랍이었다. 아랍인들은 나중에 로마제국이 붕괴되자 해상권을 완전 독점했고, 이는 이슬람제국이 세워지고 이슬람교가 세상에 퍼지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이런 엄청난 일을 아랍이 아닌 카르타고가 먼저 할 수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밖에는 GE, 월마트, MS, 포드자동차 등 유수한 외국의 대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애플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앞세워 반전에 성공했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는 이대로 죽지 않고 되살아날 것이다. 로마가 무서운 기세로 확장하고 있던 그 시대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kkw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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