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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 행각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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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영, 증조부 ‘친일 논란’에 “사실 무근”…과거 강동원·이지아 대응 어땠나 [스타이슈ON]

    하영, 증조부 ‘친일 논란’에 “사실 무근”…과거 강동원·이지아 대응 어땠나 [스타이슈ON]

    배우 하영이 증조부의 ‘친일 행각’ 의혹으로 논란에 휩싸인 가운데 연예계 스타들의 과거 논란과 각기 다른 대처 방식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하영은 최근 여러 방송을 통해 의사 집안 내력을 자랑으로 내세운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과거 일본 유학을 거쳐 한양에 최초로 서양식 병원을 개원했으며, 고종 황제를 직접 진료했다고 밝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하영의 증조부가 안상호라는 구체적인 인물로 지목되며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행적 의혹이 있다는 주장이 확산됐다. 기록에 따르면 안상호는 1898년 일본 도쿄자혜의원의학교에 입학해 1902년 의술 개업 시험에 합격한 뒤 귀국했으며, 1919년 고종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당시 일본인 의사와 함께 진료에 참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191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조선 옷은 한 번도 입지 아니하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는다”, “자녀들이 집에서 일본어만 사용한다.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완전한 일본인 가정으로 키우고 있다” 등의 발언이 친일적 행보를 보인 근거로 제시됐다. 이와 같은 논란이 확산되자 하영 측은 증조부의 친일 논란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선을 그었다. 연예계에서 스타들의 조상 및 가족의 친일 행각 의혹이 터져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강동원은 과거 영화 홍보를 앞두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외증조부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홍역을 치렀다. 과거 강동원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외증조부 이종만을 대동기업 회장이자 금광을 운영했던 예술가로 언급한 것이 화근이 됐다. 이종만은 일제강점기 당시 금광과 광산, 교육 등의 분야에서 사업을 벌이며 부를 축적한 친일파로 지목된 인물이었다. 당시 논란이 장기화되자 강동원은 공식 입장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저는 외증조부의 미담을 들으며 자라왔다. 외할머니가 독립유공자의 자손이셨기 때문에 외증조부에 대한 미담을 자연스레 받아들여왔고, 2007년 인터뷰를 한 시점에는 그 분의 잘못된 행동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일이 혼란스러웠고 충격도 컸다. 더욱이 가족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문제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고, 또 관련된 자료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미숙한 대응과 관련해 관련자 분들께 사과드린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지아 역시 조부의 친일 행각이 세상에 알려지며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이지아의 조부는 김순홍으로, 그는 일제강점기 대지주로서 일제에 국방금품을 헌납했다는 의혹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선생이 작성한 친일파 숙청 목록 1순위에 오른 인물이다. 이와 더불어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등재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 김순홍의 아들 측이 형제들과 토지 환매 과정을 둘러싸고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해지며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이지아는 직접 작성한 장문의 입장문을 통해 “내가 두 살이 되던 해 조부께서 돌아가셔서 조부에 대한 기억이 없으며, 친일 행위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자랐다”라고 해명했다. 이어 “2011년 기사를 통해 처음 해당 사실을 접한 후 정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를 여러 차례 방문하는 등 관련 자료를 확인하고 공부했다”며 “그 과정에서 조부의 헌납 기록을 확인하게 됐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이번 논란의 중심인 안양 소재의 땅이 일제강점기 동안 취득된 재산이라면 반드시 국가에 환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히며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다.
  • 이재명, ‘이대생 성상납’ 주장 영상 올렸다 삭제…무슨 일

    이재명, ‘이대생 성상납’ 주장 영상 올렸다 삭제…무슨 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과거 미군에 여학생들을 ‘성상납’했다는 취지의 주장이 담긴 영상을 담은 게시물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가 삭제했다. 이 대표는 8일 오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김준혁 논란의 대반전. 나의 이모는 김활란의 제물로 미군에 바쳐졌다는 증언 터졌다’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 링크를 올리고 “역사적 진실에 눈감지 말아야”라고 적었다. 이 게시물은 1시간 만에 삭제됐다. 이 영상은 이날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열린 ‘김활란의 친일·반여성 행각을 직시하며 역사 앞에 당당한 이화를 바라는 이화인 공동 성명 발표’ 기자 회견이다. 영상에서 한 60대 여성은 “이모가 잔디밭에 미군과 함께 앉아있는 사진을 봤다. 이모뿐 아니라 여대생들이 미군들과 커플이 돼 집단 미팅하는 것 같은 사진”이라며 “김활란에게 걸렸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김활란의 희생자”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이 같은 게시물을 올리자 “이화여대 김활란 초대 총장이 미군에게 학생들을 성상납시켰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은 김준혁 경기 수원정 후보를 옹호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 대표 측은 해당 글과 영상이 게시되고 삭제된 과정에 대해 “실무자의 실수”라고 밝혔다. 이 대표가 직접 올린 것이 아니라는 취지다. 한편 이에 대해 국민의힘은 “김 후보에 대한 이 대표의 침묵은 결국 동조였다”고 비난했다. 박정하 중앙선대위 공보단장은 이날 논평에서 “김 후보의 망언을 규탄하는 이화여대생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으면서 김 후보의 발언을 옹호하는 측의 목소리는 ‘역사적 진실’이라며 공유한 것”이라며 “이 대표가 김 후보의 각종 여성 비하 발언에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고 이화여대생을 향한 왜곡 비하에도 묵묵부답했던 것은 결국 김 후보의 발언에 동조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승만…‘尹 정부, 과오 무시 업적만 강조’ 논란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승만…‘尹 정부, 과오 무시 업적만 강조’ 논란도

    국가보훈부가 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선정했다. 보훈부는 25일 ‘세계 속 독립운동’을 주제로 선정한 2024년 1~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총 38명을 공개했다. 이 가운데 ‘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 전 대통령이 선정됐다. 보훈부는 “이승만은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했고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한인 자유대회 개최와 한미협회 설립 등 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 전 대통령을 ‘국가 영웅’으로 기리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3·1절 기념식 배경으로 안중근·김구·안창호·유관순·윤봉길 등 독립운동가 11명의 얼굴이 현수막에 담기자 여권에서 “이 전 대통령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박민식 당시 보훈처장(현 보훈부 장관)은 “3·1절 행사는 행정안전부 소관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빠진 건 솔직히 아쉽다”며 “훈격으로 보나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위상으로 보나 이 대통령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하와이·미국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계 내 이견이 없다.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에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는 것은 또 다른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퇴행은 다르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공과 과가 뚜렷한 인물을 두고 현 정부가 그의 업적만 띄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 많다.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으로 집권한 그는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를 했고 4·19 혁명으로 하야한 오점이 있다. 윤석열 정부가 그를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 시점을 (상하이임시정부가 수립된)1919년이 아닌 (미군정 하에서 남한 단독정부가 세워진) 1948년으로 못 박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렇게 되면 1919년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한 임시정부 활동의 의미가 축소되는 동시에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의 행각도 희석된다. 쉽게 말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나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 모두 1948년 대한민국 건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러니 이들을 지나치게 추앙하거나 증오할 필요가 없다’는 속내다. 전형적인 뉴라이트의 논리다. 박 장관은 반 년간 수행한 장관직을 오는 26일부로 내려놓고 제22대 총선을 준비한다. 일각에서는 박 장관이 이 전 대통령을 띄우고자 임기 중 ‘마지막 지시’를 내린 것 아니냐고 추측한다. 이에 대해 박 장관은 지난 20일 이임 인사차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소관 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이지, 장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며 “(위원의) 대부분은 교수님들이고 광복회도 참여한다”고 말했다.
  • 민주당 집회 참석한 日 의원? …정진석·윤상현 “일본정부에 공식 항의해야”

    민주당 집회 참석한 日 의원? …정진석·윤상현 “일본정부에 공식 항의해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6일 김건희 여사 특검을 요구하는 더불어민주당 집회에 일본 국회의원이 참석했다고 주장하며 “우리 외교부가 일본 정부에 공식 항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 위원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한일 연대 농성’이라며 두 사람이 활짝 웃는 사진을 SNS에 게재한 뒤, 비공개로 돌린 사진이라고 변명했지만 구차하다”며 이렇게 썼다. 김 의원은 지난 23일 민주당 의원들이 있는 단체대화방에 ‘한일연대 농성’이라는 글과 함께 일본 입헌민주당 소속 후토리 의원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사진에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파면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과 관한 김 여사 특검을 요구하며 민주당 의원들이 농성을 진행 중인 국회 로텐더홀에서 주먹 들어 올린 두 의원의 모습이 담겼다.정 위원장은 “일본 국회의원들이 일본 의회 의사당에서 일본 총리 부인의 수사를 촉구하는 농성장에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참석했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라고 반문하고 “일본 외무부(외무성), 일본 언론이 나서서 한국 국회의원이 ‘주권을 침해했다’고 공격했을 게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같은 당 윤상현 의원도 “외교적 사안도 아닌 국내 정치에 일본 현역 국회의원이 개입하는 것은 내정간섭이자 외교적 결례로서 한일관계에도 찬물을 끼얹는 일”이라면서 “외교부가 즉각 일본 정부와 국회에 항의해야 한다”고 보조를 맞췄다. 그는 이날 페이스북에 “만약 김정숙 여사의 옷값 특수활동비 의혹에 국민의힘 의원과 일본 중의원이 ‘한일연대 농성’을 했다면 민주당 의원과 지지자들은 뭐라고 했을까”라면서 “일본에 대한 강력한 항의는 기본이고 친일본색을 운운하며 죽창가를 불렀을 것이 뻔하다”고 비난했다. 한편 김 의원은 비공개 의원 방에만 올린 개인적 사진인데 국민의힘이 이를 왜곡해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김 의원은 “여전히 굴욕적 친일행각에 몰두한 분들이 할 소리가 아니다”면서 “기미가요를 서울 한복판에서 틀고 우리 군인들에게 욱일기에 경례하게 만들었고 대법원판결도 무시해가며 강제징용에 대해 아직도 굴종 외교를 하는 정부와 여당이야말로 사과해야 한다”고 받아쳤다. 또 그러면서 “일본 의원은 집회에 참석한 적 없다. 제게 인사하고 피켓 다 치우고 사진 찍은 게 전부”라고 해명했다.
  • 북한 매체 “윤석열의 친일 사대 굴종” 비난…日 강제징용 해법 언급

    북한 매체 “윤석열의 친일 사대 굴종” 비난…日 강제징용 해법 언급

    정부가 지난 12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제3자 변제’로 방향을 정한 가운데, 북한 매체가 이를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 게재했다.  북한이 주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정부의 통제하에 사진과 기사, 동영상 등을 게재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는 16일 “일본의 특대형 전범죄악을 비호하고, 그 사죄와 배상을 무마하려는 윤석열 역도의 친일 사대 굴종, 민족 반역 행위가 극도에 이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한 역적의 친일 굴종 행위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민족끼리’ 사이트는 대외 선전용 웹사이트로, 북한 주민들이 공식적으로는 볼 수 없는 외부 정보를 통해 한국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거나,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글들이 주로 올라온다.  해당 사이트는 국내에서 접속이 불가하지만, 일부 SNS 공식 페이지는 접속이 가능하다.   "기시다 총리, '윤석열 대통령과는 대화가 된다'고 말했다" 앞서 한국 외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과 관련, 일본 전범기업의 직접적인 배상 참여 없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수혜를 받은 포스코 등의 기부금으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한 제3자 변제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본 가해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 등이 배상에 참여하지 않는 데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사과도 없어 반발이 커지고 있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가해 기업이 아닌 자국의 일반 기업이 재단에 기부금을 내는 방식으로 배상에 참여하는 방안이 부상 중이지만, 이 같은 방식이 한국 내 여론을 설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일본의 사죄 여부와 관련해서는 가해 기업이 직접 사과하는 것이 아닌 “통절한 반성의 뜻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마음”이라는 내용이 담긴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 과거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대신할 것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 내 여론을 고려한 듯 신중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강제동원 배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보이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기시다 총리는 북한과 가까웠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라면 한미일 협력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며 “총리는 주변에 ‘윤석열 대통령과는 대화가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기시다 총리도 13일 미국 워싱턴DC 강연 당시 강제동용과 관련한 질문에 “한일 양국의 외교당국이 노력하고 있고, 이 노력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며 “한국 정부와 긴밀히 의사소통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연일 일본 ‘때리는’ 북한…“군비증강 위해 청탁 여행” 한편, 북한은 최근 주요 7개국(G7) 회원국 5개국을 순방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 대해 거센 비난을 쏟아냈다. 북한 국제정치연구학회 연구사 김동명은 13일 조선중앙통신에 게재한 글에서 “기시다의 이번 행각의 목적이 선제공격과 군비증강을 골자로 하는 저들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에 대한 성원국들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 명백히 입증됐다”고 주장했다.이어 “(일본의 새 국가안보전략은) 기존의 전수방위(상대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에 비로소 방위력을 행사하는 수동적인 방위 전략) 정책을 선제공격 정책, 전쟁 정책으로 전환하는 각본”이라면서 “주변 나라들의 우려심과 거부감이 날로 증대되자 일본은 '공통된 가치관'을 공유하는 나라들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청탁 여행에 나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기시다가 발을 들여놓을 나라들이 모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성원국들이라는 점에 보다 큰 위험성이 있다”며 “중국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자는 것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마수를 뻗치고 있는 나토의 흉심”이라고 지적했다. 기시다 총리는 9일 프랑스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 등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졌다. 13일 워싱턴D.C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나 일본의 국방력 증액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동시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했다.
  • ‘친일 논란 못 참아’…731부대 연상 삽화 中교과서 수거 재배포

    ‘친일 논란 못 참아’…731부대 연상 삽화 中교과서 수거 재배포

    중국 출판사가 자사 중학교 일본어 교과서에 실린 삽화 속 숫자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부대를 연상시킨다고 비판받은 것과 관련해 일부 숫자를 바꿔 다시 배포했다. 지난 9월 인민교육사가 펴낸 해당 교과서 삽화 중 하나에 각기 7, 3, 1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농구복을 입은 학생 3명이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이 실렸다. 이와 관련 누리꾼들 사이에서 생체실험 부대 731부대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이 나왔다. 일본 관동군 소속 731부대는 만주 하얼빈 일대에 주둔하면서 중국인과 한국인, 러시아인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해부실험과 냉동실험 등을 자행한 세균전 부대다. 당시 삽화가 온라인에 공개되자 누리꾼들은 “왜 하필 일본어 교과서에 731이냐?”, “많은 다른 숫자 조합을 놔두고 731인 것은 출판사의 잘못이 분명하다. 우연의 일치라는 주장 말고 즉각적인 사죄문을 내놓아라” 등의 반응과 비판이 쏟아졌었다. 또 다른 누리꾼들은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문화 침략의 일환이다. 일본군 만행을 미화할 수 있는 의도가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해당 출판사는 즉각 사과문을 내고 당시 논란이 됐던 7, 3, 1 숫자 중 3자를 8로 수정해 재출간, 배포했다고 5일 밝혔다. 기존에 전국에 배포했던 교과서는 전수 조사를 걸쳐 수거, 삽화를 수정한 개정 교과서를 재배포한 것. 이처럼 중국에서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국내외에 알리고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하게 제기돼 왔다.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에서 일제의 잔학성을 상징하는 731부대를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쏠렸을 정도다.  지난 2014년 양회에서는 정협 위원자격으로 참석했던 중국의 유명 연예인 궁한린이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남아 있는 일제 731부대 유적을 세계문화유산 명단에 올려 국내외에 그들의 만행을 생생히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는 양회 조별 토론에 참석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규정을 보면 인류 역사에 위해를 준 중요 사건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할 수 있다”면서 “731부대는 중국의 3개 지방에서 세균전을 벌여 20만 명을 살해한 반인류적 범행을 저질렀다. 이런 뼈아픈 역사의 교훈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한다”고 강조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뿐만 아니라 중국 양회에서는 731부대의 만행을 중국 역사 교과서에 상세하게 서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었다. 헤이룽장성 출신의 장밍 정협위원은 “현재 일본 우익세력이 창궐해 역사 교과서를 함부로 고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가 하면 난징대학살과 군(軍) 위안부, 강제노역을 부인해 중국인과 아시아인의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주고 있다. 731부대의 행각을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반드시 기술해 청소년들이 국치를 잊지 말고 유비무환의 자세를 갖추도록 교육하자”고 촉구했다.
  • 남쪽 에메랄드 해안에 띄운 편지… 소리 없는 노스탤지어의 아우성 [작가의 땅]

    남쪽 에메랄드 해안에 띄운 편지… 소리 없는 노스탤지어의 아우성 [작가의 땅]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 유치환 시, ‘깃발’ 전문그리운 대상이 있다는 것은 삶에 우물 하나를 두는 일이다. 시원(始原) 혹은 해원(海原)의 장소이자 대상은 어쩌면 오롯이 누군가가 그것을 그리워할 적에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청마 유치환의 시다. 대부분의 사람이 국어영역(옛 언어영역)의 시험 지문이나 교과서에서 봤던 그 ‘노스탤지어 시’. 시간이 지나 다시 그의 시를 읽으니 예전에는 미처 볼 수 없던 마음의 우물 하나가 눈을 뜬다. 그네가 공중에 짚어 준 그 이정표대로 따라가다 보니 나의 시원과 고향이 한꺼번에 뒤섞인 우물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런 까닭일까. 그 우물은 땅에 없다. 공중에 떠 있다. 그 무엇도 아닌 ‘노스탤지어’인 까닭이다.유치환은 1908년 7월 경남 거제군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 통영공립보통학교(통영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로 유학을 갔다. 1926년 귀국을 한 뒤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정지용의 시에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1년 ‘문예 월간’에 첫 시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을 했고 스물아홉이 되던 1937년에 통영으로 돌아왔다. 통영협성상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계속해서 시를 썼고 동인지 ‘생리’(生理)를 창간했다. 1939년에는 첫 시집인 ‘청마시초’를 출간했다. 1940년에는 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에 귀국했다. 충무와 부산, 경주 등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으며 안의중학교의 교장이 됐다. 이후 경주고등학교, 경주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장을 지냈다.1946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이 됐으며, 1957년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6·25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시를 썼고 시집을 출간했다. ‘깃발’과 ‘생명의 서’, ‘행복’ 등이 이때 쓰였다. 대한민국 예술원의 회원이 됐다. 제1회 시인상과 서울시문화상, 예술원공로상과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도 불렸다. 1967년 2월 13일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버스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부산대학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에 사망했으며, 2월 17일 부산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에 묻혔지만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 묘지로 이장됐다. 현재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산록에 잠들어 있다. 거제에서 태어나 통영과 일본에서 공부를 하며 시를 썼고 끊임없이 후학 양성에 힘을 쏟다가 사후에 다시 거제로 돌아온 셈이다. 그는 그토록 그리던 노스탤지어에 도착한 것일까.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행복’ 전문청마에게는 서른 후반부터 시작된 사랑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 혼인을 해 일가를 꾸린 상태였다. 일제강점기 때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제의 검속 대상에 올랐던 까닭에 만주에 사는 형의 집으로 피신했다. 해방이 돼 부인과 함께 통영으로 돌아와 부인은 유치원을 운영했고, 청마는 통영여중의 국어 교사로 부임하게 됐다. 그곳에서 가사과 교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시인 이영도다. 그때 이영도는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키우며 살아가던 처지였다.시조 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인 이영도 역시 시조로 등단해 주목을 받던 시인이었다. 1947년부터 그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영도에게 연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시와 산문을 써서 우편으로 부치기 시작한 지 이십여 년. 그동안 주변에서는 이미 그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딱히 서로의 공간이나 사람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도 수천 통이 넘는 편지를 썼던 청마.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의 마음을 편지로 썼던 이십여 년의 시간에도 그들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어떤 마음이면 한 사람을 향해 강산이 두 번이 더 바뀌도록 편지만을 써 대는가. 훗날 이영도는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는 책으로 청마의 편지 200편을 남겨 뒀다.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인세는 사회에 기부했다고 한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 유치환, ‘그리움’ 전문청마를 회고하는 데 있어 빠짐없이 끼어드는 논쟁이 있다. 바로 친일 논쟁이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청마의 시 ‘수’(首)와 ‘전야’(前夜)의 내용들 때문이다. 또 1942년 2월 ‘만선일보’에 발표한 “대동아 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의 글 역시도 친일의 행각으로 보고 있다. 한때 통영에서 유치환이 수천 통의 편지를 써서 부친 통영 중앙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개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그에 따른 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중앙우체국 앞에 ‘행복’의 시비가 세워졌으나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개명이 유보되기도 했다. 문학적인 업적과 시인의 삶의 거리를 어디에서 어느 만큼까지 떼어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일화다. 그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앞으로도 분분할 테지만 우리가 익히 알아 온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그의 시와 삶을 읽는 후대의 몫이 될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그네를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이 한쪽만이 아니듯이, 그리하여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늘어나듯이 말이다. 그 해석과 영탄, 지탄의 몫마저도 시인의 이름이다.청마문학관은 2000년 2월 통영 망일봉 기슭에 세워졌다. 문학관은 청마의 생애, 청마의 작품 세계, 청마의 발자취 편으로 구성돼 있다. 유품 100여점과 각종 문헌자료 350여점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서 바로 올려다볼 수 있는 지척에 생가도 복원돼 있다. 생가는 원래 통영시 태평동에 있었으나 생가 부지의 복원이 어려워진 까닭에 문학관 위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전, 복원됐다. 생가와 아래채로 구성돼 있다. 본채는 4칸으로 이뤄져 있으며 맨 오른쪽이 안방이고, 왼쪽이 부엌, 가운데 방 두 개는 약방으로 돼 있다. 태평동에서 청마의 아버지가 약방을 운영했던 까닭이다. 방문 위에 ‘유약국’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청마의 생애와 후대의 해석은 어쩌면 극명하게, 또 다르게는 이렇게나 여여하게 흐른다. 남쪽의 봄에는 에메랄드빛 해안을 거니는 노스탤지어와 사랑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사람의 자리가 거기에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소설가 이은선
  • [글로벌 In&Out] 귀화자는 유감일세! 애국가 논란/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글로벌 In&Out] 귀화자는 유감일세! 애국가 논란/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요즘 ‘다문화 선배’라는 별칭으로 유튜브에서 여러 활동을 한다. 최근 애국가를 다양한 외국어로 부르는 오디션 대회를 추진 중이다. 대회를 설명하는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 올렸더니 신기한 토론이 벌어졌다. 일부 구독자는 애국가에 친일 논란이 있어서 다른 노래로 대회를 개최한다면 좋겠다는 식으로 조언도 했다. 모든 의견과 조언에 감사하지만, 댓글로 찬반 여론이 생겨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계기로 ‘국가’(國歌)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더 신경 쓰게 됐다. 나는 귀화 면접을 한꺼번에 통과한 사람이 아니고, 중간에 한 번 탈락했다가 2차 시도로 간신히 통과했다. ‘간신히’라는 부사를 쓴 건 음치라서 애국가를 부르는 절차를 힘들게 통과했다는 의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1차 시도 때 후렴과 1절, 2절 순서를 헷갈려 떨어졌다. 국가는 현대의 결과물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국가 ‘마르세유의 노래’를 나폴레옹 정부는 너무 혁명적이라며 금지했다. 이후 1870년에 다시 프랑스 국가로 공식 인정됐다. 프랑스가 제일 오래돼 보이지만, 탄생 시기로 따지면 영국과 네덜란드가 가장 오래됐다. ‘빌럼의 노래’라는 네덜란드 국가는 1932년에 공식적으로 지정됐지만, 탄생 시기는 네덜란드가 신성로마 제국에서 독립한 80년전쟁 때인 16세기이다. 영국의 국가는 찬송가이다. 제목도 달라진다. 군주는 현재처럼 여성이면 “하느님, 여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God Save the Queen)이고 남성이면 “하느님, 국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God Save the King)이다. 작사ㆍ작곡 시기는 불투명한데 18세기 중순부터 사용됐다고 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포인트는 이 찬송가도 영국의 공식 국가는 아니란 점이다. 그냥 전통이다. 이런 자연스런 국가의 탄생은 극히 일부이다.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부르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냐면, 헌법재판소에 들어간 아랍계 판사 살림 조부란은 공식 행사 때 국가를 부르지 않아 화제가 됐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스라엘 국가는 오직 한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다. 이라크는 나라가 생길 때부터 무려 6번이나 국가를 새로 지정했다. 무려 6번. 유럽도 다르지 않다. 한 예로 독일 여성가정부 성평등 담당 고위 간부 크리스틴 로제 모흐링은 국가의 가사를 바꿔야겠다고 주장했다. 독일 국가는 1841년에 작사됐고 1844년 독일 혁명으로 유명해졌으며 1922년부터 공식 국가로 지정됐다. 나치 정권 이후에 가사의 민족주의 부분이 좀 삭제됐다가 새로운 모습으로 1952년 다시 태어났다. 현재 독일 여성단체들은 국가가 너무 남성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는 개편되지 않는다. 애국가는 최근에 생긴 것으로 역사적으로 보면 자연스럽게 생긴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아직도 작사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3ㆍ1운동을 계기로 대중화됐고, 그 이유로 임시정부가 국가로 지정했다. 물론 그 이후에 논란들이 생겼지만 임시정부는 많은 논의 끝에 애국가를 끝까지 국가로 쓰기로 했다. 친일 행각들 때문에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배신감을 느낄 사람들이 임시정부 사람들인데, 그들이 인정한 마당에 더이상 이 주제를 건드리는 것이 유익한 행동인지 감이 안 잡힌다. 역사적 사실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애국가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에 눈을 감자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무대에서 큰 성공을 했을 때마다 국민을 묶어준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한 인식은 좀더 개선돼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 애국가가 교체되면 제일 억울한 사람은 나다. 애국가 때문에 귀화면접을 헌 번 떨어졌다가 고생 끝에 재수해 합격했으니 말이다.
  • 유용 서울시의원, 광복회 주관 ‘역사정의실천 정치인 ’ 수상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국립묘지법 상훈법 개정 촉구 건의안 국회 제출의 공로를 인정받은 서울특별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유용 의원(더불어민주당·동작4)이 대한민국 광복회로부터 ‘역사정의실천 정치인’으로 선정되어 지난 7일 김원웅 광복회장으로부터 선정패를 전달받았다. 광복회에서 선정하는 ‘역사정의실천 정치인’은 친일잔재청산에 관심을 갖고 의정활동을 펼친 정치인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유 의원은 시의회 독도수호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일항쟁기 일본 전범기업 제품 등에 대해 서울시와 서울특별시교육청의 공공구매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서울특별시 일본 전범기업 제품 공공구매 제한에 관한 조례」,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올바른 역사인식 확립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은「서울특별시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공동 발의하는 등 친일잔재와 반민족행위 청산을 위한 입법 활동을 다양하게 펼쳐왔다. 또한 지난 2016년 9대 시의회 전반기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시내 중·고등학교에 친일인명사전을 배포하는 예산편성과 친일인명사전 필사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유 씨 성을 가진 27명의 조상들의 친일반민족 행위의 내용을 필사하여 선조들의 친일행각으로 인해 그 당시 고통받았을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것이 도리라는 마음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유 씨 성의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행적을 필사하는 등 친일잔재청산에 앞장서 왔다. 유 의원은 수상 소감에서 “당연히 청산되어야 마땅한 일제의 잔재가 아직도 많다는 현실이 비통할 뿐이다. 이 나라 역사가 바로서는 그날까지 더욱 더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제의 옥새7] 넝마옷 입고 베델 찾아 온 조선의 우국지사

    [황제의 옥새7] 넝마옷 입고 베델 찾아 온 조선의 우국지사

    서울신문은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 독립을 위해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그녀는 식사를 마치자 곧바로 등을 가져 달라고 하더니 비걱거리는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와 베델은 서울의 외로운 밤에 지쳐 있었다. 루이가 천장에 달아놓은 단 하나의 등불에 의지해 그림자의 정글에서 당구를 쳤다. 9시가 조금 지났다. 거실에 우리 둘만 남았다. 호텔 밖 거리에서 야경꾼들이 돌아 다녔다. 그들이 발에 차고 다니는 작은 물체가 부딪치며 고드름이 우지직 떨어지는 듯한 금속성 소리를 냈다. 게임 열기 때문인지 크지 않은 공간이 금세 더워졌다. 우리는 바에 있던 창문 3개를 모두 열었다. 그러자 이 도시의 온갖 냄새가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11시쯤 됐을까...그때까지도 우리는 당구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작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베델”을 불렀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뭔가가 들어왔다. 베델이 곧바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램프를 껐다. 침묵과 어둠만이 가득했다. 베델의 거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용 남작께서 오셨습니까?” “예, 접니다.” “용 남작, 이리로 와서 내 친구 빌리와 인사하시오, 이제 두 분은 제 손을 잡고 이동하시죠.” 나는 어둠 속에서 베델의 손이 내 손을 찾으려고 테이블 가장자리를 따라 더듬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쉿! 밖에서 일본인들이 우릴 감시하고 있는 거 다들 아시죠?” 그는 속삭이며 말했다. 그는 나와 어둠속의 유령같은 낯선 이의 손을 잡고 당구대를 떠났다. 베델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와 보조를 맞춰 계단을 걸어갔다. 침실이 있는 긴 복도를 기어가듯 지난 뒤 베델의 방으로 들어 갔다. 지독한 담배 냄새 덕분에 일부러 알려주지 않아도 그의 방임을 알 수 있었다. 성냥을 그어 불을 켠 뒤 침대 옆 램프 심지에 작고 약한 불을 붙였다. 베델이 방문을 걸어 잠갔다. 호주머니에서 자물쇠를 꺼내 문 손잡이 위에 올려놓은 뒤 정교하게 균형을 잡았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스파이 탐지 방법이었다. “누구라도 엿듣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알아 챌 수 있어요. 문 밖에서 손잡이를 조금만 움직여도 이게 밑으로 떨어지니까.” 꼭 코미디 오페라의 한 장면 같았다. 악당이 나오고 으시시한 음악이 나오는 오페라 말이다. 작고 아늑한 방 5개와 욕실, 어수룩한 웨이터와 관리인, 그리고 으스스한 분위기까지...이런 것들이 코믹 오페라의 필수 조건이니까... 나와 베델은 언제 터질 지 모를 일촉 즉발의 화염에 성냥을 들이 댄 바보들이었다. 자신의 능력은 생각지 않고 정의감에 약자부터 보호하겠다고 큰소리치는 앵글로 색슨 특유의 으스댐과 건방짐으로 대한제국 일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다고나 할까.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나는 베델을 찾아 온 미지의 손님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용 남작’(baron)으로 불리던 조선의 유명 지식인이었다. 야간 작업자들이나 입는 더러운 흰색 넝마를 입고 왔으니 그의 실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더러운 누명 옷을 반쯤 걷어 올리고 양말도 신지 않았다. 옷에는 하층민의 직업을 뜻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머리에 튼 상투가 그의 신분을 말해줬다. 그는 잘 생겼고 키도 커 눈에 확 띄었다. 정장을 입고 이리로 왔다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본명은 ‘용치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흥선대원군 시절 영의정을 지낸 거물이다. 치선은 미국 남부의 가장 큰 대학 가운데 한 곳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파리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국제 정세를 익힌 뒤 귀국했다. 그는 조선에 얼마 남지 않은 애국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한때 그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암흑 속에서도 애국단체인 ‘일진회’에 가입해 열정을 바쳤다. 원래 일진회는 이웃 섬나라에서 들어온 점령자(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려고 설립됐지만 언제부터인가 일본의 자금력에 굴복해 지금은 침략국을 옹호하는 단체로 타락했다. 그는 나와 베델을 만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일본인들이 이 영국인 편집장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던 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번역자주:소설에 등장하는 일진회는 1904년 8월 독립협회 관계자들이 주축이 돼 사회개혁을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러일전쟁 뒤로 일본에 매수돼 친일행각을 일삼는 단체로 전락했습니다. 조선 병합의 뜻을 이룬 일제는 1910년 9월 이를 해산시켰습니다. 일진회는 조선의 망국을 이끈 대표적 매국집단으로 평가됩니다.) ‘황제의 옥새’는 8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 “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부일장학회 설립자 유족, 나경원 등 고소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 씨의 유족이 30일 고인을 ‘친일 인사’라고 주장한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과 나경원 원내대표, 민경욱 의원 등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유족은 “곽 의원 등은 근거 없이 고인을 ‘골수 친일파’,‘친일 행각을 벌인 자’라고 비난해 고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한국당이 고인을 친일파로 모는 이유는 언론 장악과 개인 자산 형성을 목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선친의 재산을 빼앗은 것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라며 “유족은 장학회를 뺏긴 한을 안고 산다”고 주장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과방위, ‘KIST 빛낸 인물들’ 조형물에 조국 딸 이름 등재 논란

    과방위, ‘KIST 빛낸 인물들’ 조형물에 조국 딸 이름 등재 논란

    KIST 원장 “이런 사례 생겨 당혹…삭제 검토”與 “이름 전산 자동추출…뺄 때 기준 있어야”한국 “친일행각 드러나면 서훈도 박탈” 압박원장 “조민 3주 인턴 안하고 증명서 발급”‘조국 부인 동창’ 소장 “잘 모르고 발급…자책”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국책연구기관 국정감사에서는 11일 ‘KIST를 빛낸 인물들’ 조형물에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이름이 오른 문제를 놓고 공방이 벌어졌다. 자유한국당은 조 장관 딸의 ‘KIST 인턴 경력 허위 기재’ 의혹에 대한 집중 공세를 펼쳤다. 이병권 KIST 원장은 조형물에서 조국 딸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국당은 이날 KIST의 조형물에 조 장관의 딸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과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김성태 의원은 이병권 KIST 원장에게 L3 연구동 앞의 KIST를 거쳐 간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조형물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에 버젓이 조국 씨의 딸 이름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당 윤상직 의원은 “2일만 출입한 인턴의 이름을 (조형물에) 놔둬야 하냐. 확대 감사 때까지 이름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윤 의원은 “이는 KIST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며, 미꾸라지 한 마리가 KIST 명예를 더럽힐 수 없는 것은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박대출 의원도 “(조형물에 함께 이름이 올라간) KIST를 빛낸 2만 6000여명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정용기 의원은 “조민 이름이 들어간 조형물에 이 원장 이름도 같이 있다”면서 “종합 감사 때까지 이름을 들어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원장의 이름도 파헤쳐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이에 대해 이 원장은 “좋은 뜻으로 만들었는데, 이런 사례가 생겨서 굉장히 당혹스럽다”면서 “이름을 빼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경진 무소속 의원은 “조형물에 조민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그 조민이 맞냐, 다른 조민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원장이 “아마 그 사람이 맞는 것 같다”고 답하자 장내에는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김 의원은 “2016년 국감 당시 박근혜 대통령 재임 시절에 KIST 안에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세운 것에 대해 KIST가 부끄러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지금 역시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면 좀 부끄럽지 않나”라고 말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조민 이름을 그냥 둬야 한다고 옹호했다. 김성수 민주당 의원은 “조민 이름만 빼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면서 “KIST가 직접적 계약관계를 통해 관계를 맺은 모든 연구자, 학생, 임시직의 전산이 자동 추출돼 2만 6077명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기준에 의해 넣었으니 뺄 때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면서 “복잡할 것 같으면 그냥 두든지, 다 조사해 기준에 의해 빼든지, 조형물 자체를 없애든지 고민하라”라고 말했다.이에 한국당 윤상직 의원은 “친일 행각이 드러나면 서훈을 박탈하기도 했다”면서 “이름을 빼는 것과 관련한 기준이 없다면 기준을 세워서라도 빼야 한다”고 반박했다. 한국당은 조씨 인턴 경력과 관련한 사실관계를 따져 묻고 관련자 징계를 요구했다. 최연혜 의원은 “KIST 출입관리 시스템을 살펴보니 조민 학생의 방문증 발급 내역은 단 3일이며, 이 가운데 KIST 서약서에 인턴으로 제시된 기간에 해당하는 날짜는 단 이틀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원장에게 ‘조국씨는 누구 하나가 문을 열면 따라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불가능한가’라고 물었고, 이 원장은 “출입증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윤상직 의원은 “KIST 전산상 조 장관 딸이 인턴 기간 중 두 번 출입한 게 맞느냐”고 확인하자 이 원장은 “그렇다”라고 말했다. 김성태 의원의 ‘부산대에 조씨가 제출한 문건 양식이 KIST 양식과 동일하냐’는 질문에 이 원장은 “이메일을 통해 개인적으로 확인서를 써준 것”이라고 밝혔다.박대출 의원은 “이광렬 KIST 기술정책연구소 소장에 대한 징계 절차를 밟지 않을 것이냐”면서 “확인된 사실관계만으로도 KIST가 명예회복을 해야 할 일이 산적하지 않냐”고 추궁했다. 이광렬 소장은 조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조 장관 딸에게 인턴 증명서를 발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에 이 원장은 “빠른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또 ‘이 소장으로부터 조민이 3주 인턴을 하지 않았는데 3주 인턴을 했다는 (증명서를 작성한) 사실을 인정받았냐’는 질문에는 “그렇다. 자기는 잘 모르고 그렇게 했다고 한다. 자책을 많이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민주당은 한국당의 공세에 맞서 전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직할 연구기관 국감에 이어 부실 학회 논란, 기초 연구 활성화, 연구·개발(R&D) 지원 문제를 비롯한 정책 질의에 초점을 맞췄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대한민국 육군대장 1호 백선엽 장군 칠곡군 명예 군민 선정…찬반 논란

    ‘호국도시’ 경북 칠곡군이 대한민국 육군대장 1호인 백선엽 장군에게 명예 군민증을 수여하기로 해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25일 칠곡군에 따르면 다음 달 열리는 제7회 낙동강세계평화문화 대축전을 앞두고 명예군민에 백선엽 장군을 선정했다. 칠곡군의회 상임위원회는 백 장군에 대한 명예 군민증 수여를 승인했다. 칠곡군은 한국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공적을 높이 사 백 장군을 명예 군민증 대상자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보수단체는 ”백 장군은 한국전쟁의 영웅인 만큼 명예 군민증 대상자로 적절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각을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도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백선엽은 1943년부터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하며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독립군을 토벌한 그에게 명예 군민증을 수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호국도시 칠곡이 친일 인사를 명예 군민증 수여자로 선정한 것은 잘못이며 즉각 이를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칠곡군 관계자는 “내부적으로도 찬반 논란이 있지만 의회에서 최종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칠곡군의회는 26일 본회의를 열어 명예 군민증 수여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칠곡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국립한국문학관은 평가기관 아닌 수집·연구 공간”

    “국립한국문학관은 평가기관 아닌 수집·연구 공간”

    “복합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문학을 전달하는 한편 흩어져 있는 자료, 망실 직전의 자료를 최대한 모아 후손들에게 전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기본입니다.”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 초대 관장은 24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법인 설립 이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포부를 밝혔다. 서울 은평구에 마련된 부지에 2022년 12월 건립을 목표로 하는 국립한국문학관은 지난 4월 법인을 설립하고 자료를 모으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까지 수집한 자료는 단행본, 연속간행물(신문 및 잡지), 작가 유품 등 유물을 포함해 7만 3000여건이다. 이 중 지난해 8월 서지학 권위자이자 국내 대표 문학 자료 소장가로 알려진 고 하동호 교수 유족이 기증한 자료가 5만 5000점에 달한다. 여기에 최근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의 유족이 소장 자료와 재산 30억원을 문학관에 기부했다. 문학관 측은 ‘상록수’를 쓴 일제강점기 저항문인 심훈(1901~1936)의 유족이 자료 기탁 의사를 표명해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자료들은 서지학자·국문학자들로 구성된 자료 수집 전문위원회가 소장 가치 등을 심의해 국립세종도서관 수장고에 보관한다. 자료 구축 관련 예산은 25억원이다. 문학관이 초판본 희귀 도서 구입에 나선 이후 경매가가 2~3배 이상 뛰었다면서 자료 확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염 관장은 “원로 문인과 학자, 유족, 시민들의 적극적인 기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친일 작가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국립한국문학관은 한국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기관이 아니라 수집·연구하는 것이 1차적 기능”이라며 “김문집·장혁주처럼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였어도 그런 반민족적인 행태가 나타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봉오동전투 최진동, 임정 김희선… 민낯 드러난 가짜 유공자

    봉오동전투 최진동, 임정 김희선… 민낯 드러난 가짜 유공자

    2017년 8월 우리 사회에 놀라운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한 70대 시민이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가짜 독립유공자였다’는 사실을 솔직히 밝혀 정부로부터 이를 인정받은 것이다. 조상의 독립운동을 부풀리는 사례는 허다했지만, 그 반대로 조상의 허위 공적을 스스로 바로잡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화제가 됐다. 주인공은 독립유공자에 이름을 올렸던 김정필(1846-1920)의 증손자 김종갑(77)씨. 그는 2015년 용기를 내 광복회 대전충남지부 김영진 감사를 찾아가 오랜 세월 숨겨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국가보훈처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김정필은 충남 대덕 출신으로 1907년 의병장 한봉수(1883~1972)의 밑에 들어가 경기 용인, 여주 등에서 격전을 치렀다.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됐다. 1968년 김씨의 당숙(아버지의 사촌형제)이 서훈을 신청했고 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도 추서했다. 하지만 종갑씨는 모든 것이 이상했다. 자신의 증조부가 그토록 엄청난 활동을 했는데도 집안 사람 누구도 이를 알지 못했다. 증조부가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나이도 75세로 격한 신체활동을 하기 힘들 때였다. 공훈록에는 그가 1920년 사망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증조부는 1925년 세상을 떠났다. 알고 보니 당숙이 보훈 연금을 타내려고 똑같은 행적의 동명이인 공훈을 가로채 서훈을 신청한 것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종갑씨는 고민 끝에 국가보훈처에 “증조부에 대한 서훈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사실이 아닌 것을 묻어두는 것이야말로 선대를 욕보이는 죄악이다. 정부가 유공자 전수조사를 실시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가짜 유공자’ 논쟁을 없애는 계기가 돼야 한다”면서 “가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하루빨리 서훈을 자진 반납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데 동참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공식적 서훈 취소 ‘가짜 유공자’는 39명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독립유공자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가짜’들을 솎아내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학계와 시민사회는 입을 모은다. 아직도 수많은 가짜 독립운동가가 버젓이 예우받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보훈처, 서훈자 1만 5180명 전수조사 17일 보훈처가 내놓은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현황’을 보면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서훈이 취소된 ‘가짜 독립유공자’는 39명이다. 2011년에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5~2009)가 내놓은 반민족행위자(1006명) 명단을 토대로 허위 공적자 19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다. 2017년에도 동일인 중복 서훈 등 가짜 유공자 15명을 추려냈다. 지난해 2월에는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1891~1955)의 서훈이 박탈됐다. 학계에서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가짜 독립유공자가 100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은 “과거 자료가 워낙 부실하다 보니 같은 공적으로 이중 포상이 이뤄진다거나 흠결이 있는 분들까지도 잘못 서훈된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다.●공적 도용 등 가짜 유공자 30~40명 추가 가짜 유공자 논란이 끊이지 않자 보훈처는 지난해 11월 “서훈자 1만 5180명에 대해 전수조사를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1976년 이전 서훈자 가운데 우선 검증 대상 587명에 대한 1차 조사 결과를 먼저 발표한다. 이들 587명은 1949~1976년에 당시 문교부와 총무처가 서훈한 독립유공자 가운데 1990년 재검증에서 빠진 이들이다. 과거에는 건국훈장이 3등급(중장, 복장, 단장)이었다가 1990년부터 5등급(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확대됐다. 이때 보훈처는 새로 생겨난 4~5등급(애국장, 애족장)에 해당하는 이들을 선정하고자 일부 유공자에 대해 재검증 작업을 벌였다. 그간 유공자 전수조사를 주장해 온 윤석경 전 광복회 대전충남지부장은 “이번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보훈처가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학계에 따르면 보훈처는 이번 조사에서 독립운동 행적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거나 남의 공적을 도용한 가짜 유공자 30~40명 정도를 추가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인물로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김희선(1875~1925)과 봉오동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진 최진동(1883~1945) 등이다. ●김희선의 상하이 임시정부 행적 지나치게 과장 김희선은 조선 말기 육군참령(소령)으로 활동하다가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항전을 주도했다. 평안도 안주군수로 있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부차장(국방부차관)을 지냈고 1920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청년단연합회·대한독립단·서로군정서를 통합한 대한광복군총영을 설치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그는 1925년 지린성 지안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백범일지에는 그가 “임정 군무부차장 때 일본군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에서 그의 행적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주장해 왔다. 최진동은 함경북도 온성 출생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해 1919년부터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제19사단 보병부대와 교전해 5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후에도 북간도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무장항일운동을 이어 갔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하지만 그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위력을 확인한 뒤 돌연 친일파로 변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 토벌대의 선두가 돼 항일무장세력 진압에 앞장섰고 자신의 독립운동 과거를 속죄하고자 일제에 거액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의혹도 있다. 막대한 재산으로 독립운동과 친일행각을 동시에 벌인 것으로 의심받는 인물이다. 이에 대해 최진동의 유족은 “(친일 의혹은) 몇몇 학자들이 감정에 기반해 작성한 그릇된 자료가 바탕이 됐다”면서 “특히 일제의 비행기 제조를 돕고자 헌금을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가짜 유공자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친일 행적 인물들의 현충원 안장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도 국립묘지에 묻히는 이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보훈처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현재 서울현충원에만 친일 인사 37명이 안장돼 있다. 이 가운데는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인물도 7명이나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친일 행위가 확인됐음에도 여전히 현충원에서 진짜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있다. 7명 가운데 한 사람인 이종찬(1916~1983)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 영예인 금치훈장을 받을 정도로 일제에 협력했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현충원에 묻혔다. 2015년 9월 안장된 김홍준(1915~1946)은 만주국이 세운 간도특설대에서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는 데 가담했다. 하지만 그 역시 대한민국 국방경비대총사령부 근무 경력을 인정받아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얻었다.●‘김구 암살 배후 의혹’ 김창룡도 국립묘지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 28명을 더하면 그 수는 65명으로 늘어난다. 대전현충원에 있는 친일 인사 가운데 일본군 헌병 오장(분대장) 출신 김창룡(1920~1956)은 김구(1876~1949)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관계자는 “현충원에 반민족·민주행위자들이 버젓이 묻혀 있는 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하루빨리 개정해 이미 안장돼 있는 자도 이장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몽’ 이요원-남규리, ‘독살-학대’ 비밀 공유 “동지이자 적”

    ‘이몽’ 이요원-남규리, ‘독살-학대’ 비밀 공유 “동지이자 적”

    MBC ‘이몽’ 속 독립 걸크러시 3인방 이요원-남규리-박하나가 화제를 모으는 가운데 동지이자 적인 이들의 오묘한 관계가 보는 이들의 흥미를 고조시킨다. MBC 특별기획 ‘이몽’(연출 윤상호, 극본 조규원)은 일제 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일본인 손에 자란 조선인 의사 이영진과 무장한 비밀결사 의열단장 김원봉이 펼치는 첩보 액션 드라마. 독립운동가들의 스토리를 재조명해 매회 시청자들에게 짙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에 더해 이요원(이영진 역)의 동지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남규리(미키 역)와 박하나(차정임 역)의 속내에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먼저 이요원과 남규리는 극 초반, 임주환(후쿠다 역)을 사이에 두고 연적 관계를 형성해 이목을 끌었다. 남규리가 이요원을 마음에 품고 있는 임주환을 짝사랑하고 있던 것. 이후 남규리와 친분을 쌓은 이요원은 남규리의 양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한위(송병수 역) 독살 작전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남규리는 이요원과 유지태(김원봉 역)가 이한위를 독살한 정황을 눈치채 긴장감을 높였다. 더욱이 남규리는 이요원에게 이한위의 학대 사실을 고백하며 “약속해요. 내 비밀 지켜주기로. 언니 비밀은 내가 지켜 줄게요”라는 말을 남겨 그 속내에 궁금증이 증폭됐다. 이에 서로의 비밀을 품고 있는 이요원과 남규리의 향후 관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요원과 박하나의 관계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앞서 박하나는 어린 시절 유지태와의 인연으로, 그에 대한 호감을 품은 채 의열단에 합류했다. 이에 유지태는 박하나에게 “문제 생기면 냉정하게 정리할 사람이 너 뿐이야”라며 의열단의 안방마님 박하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유지태의 마음은 이요원을 향해 있는 상태. 이에 박하나가 이요원을 연적으로 적대시 할지, 독립운동 동지로 손을 맞잡을지 궁금증이 높아진다. 한편 ‘이몽’ 지난 방송에서는 이영진과 김원봉이 함께 친일행각을 일삼은 송병수를 처단해 통쾌함을 선사했다. 하지만 김원봉은 조선총독부 폭파 작전을 시행하던 중 치명상을 입고 중태에 빠진 상황. 이에 이영진, 김원봉과 의열단의 향후 행보에 궁금증이 수직 상승한다. MBC 특별기획 ‘이몽’은 이요원-유지태-임주환-남규리-허성태-조복래 등 탄탄한 출연진, ‘사임당 빛의 일기’, ‘태왕사신기’ 등을 연출한 윤상호 감독, ‘아이리스’ 시리즈를 집필한 조규원 작가 등 믿고 보는 제작진이 의기투합한 작품. 오늘(8일) 밤 9시 5분 19-22화가 연속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현충원 내 친일파 11명… 이장과 친일 표기 사이

    현충원 내 친일파 11명… 이장과 친일 표기 사이

    간도특설대 창설 김백일 등 아직 안치 임정 계승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위배 ‘강제 이장’ 가족들 동의 안 해줘 불가능보훈처, 현충원 홈피에 친일 여부 표기 “묘 주변 조형물 세워 친일 행적 알려야”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정부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정작 친일파들이 여전히 국립묘지에 묻혀 있어 논란이 계속된다.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되기 전 국가유공자 등으로 인정받았는데 묘지를 어떻게 할지를 두고 사회적 합의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5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대통령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5명 가운데 11명이 서울현충원(7명)과 대전현충원(4명)에 묻혔다. 같은 해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중에는 63명이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현충원 장군1묘역에 묻힌 간도특설대 출신 김백일이 대표적 사례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는 일제의 전략에 따라 만든 특수부대다. 정부의 친일규명보고서에 따르면 김백일은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1943년 9월 일제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장(훈5위경운장)을 받았다. 그는 해방 뒤 1946년 현재 국군의 모태인 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했고, 1950년 6·25 전쟁에 참가했다. 195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육군 중장으로 추서됐고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으면서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갖췄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를 강제로 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가족들이 동의해 줄 가능성이 낮은데 이를 강제할 법적 근거도 없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은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를 강제 이장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를 검토한 국회 정무위원회의 한 전문위원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수렴 절차가 필요해 보인다”고 보고서를 통해 지적했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의 묘 주변에 조형물을 세워 친일 행적을 같이 표기해 알려야 한다는 대안도 있다. 민주당 박광온 의원은 이런 내용의 국립묘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박 의원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와 이를 탄압했던 친일인사의 묘지가 국립묘지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 것이 기막힌 우리의 역사”라면서 “조형물을 설치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3월부터 현충원 홈페이지의 안장자 정보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여부 등을 표기하고 있다.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친일파를 국립묘지에 두는 것은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면서 “보훈처가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현충시설에도 조형물을 세워 친일 행각을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 변절 3명 뿐… ‘3·1운동 리더’ 인정받아야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 변절 3명 뿐… ‘3·1운동 리더’ 인정받아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정춘수(1873~1953)는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일본인 검사의 취조에 이렇게 말했다.“나는 한일합병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1910년 합병 당시 기대했던 ‘내선 융화’(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정책)가 잘되지 않았던 것이 유감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두 달 뒤 열린 재판에서도 “자치권을 달라고 청원하는 것에 찬성한 것이지 (일본에 대한) 독립 선언은 내 의사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정춘수는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1921년 5월 출옥했다. 이후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며 갖가지 친일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했다. 지금도 정춘수는 우리 역사에서 ‘변절한 민족대표’로 거론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난무한다. 바로 정춘수 같은 이들 때문일 것이다.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술판을 벌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로 돌아섰다”, “33인은 3·1운동 시위에 직접 나서지 않았기에 진정한 의미의 민족대표가 아니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유명 역사강사 설민석씨가 “민족대표들이 룸살롱에서 술판을 벌였다”고 발언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과연 사실일까. ●33인은 왜 모두 종교인 뿐일까? “3·1운동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이 물음에 국민 대다수는 유관순을 꼽는다. 일부는 김구나 이승만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을 언급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당시 이들의 인지도를 감안할 때 33인을 진정한 의미의 민족대표로 보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종교인이었고, 자신의 종교 밖에서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학계는 “당시 우리 사회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치·사회적으로 일제의 강압통치가 심해지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모여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분야는 종교계가 거의 유일했다는 설명이다. 한국사학자인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는 20일 “3·1운동 준비 당시에는 고관대작을 지낸 유명인사를 민족대표로 섭외하려고 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으로 명성이 높았던 박영효(1861~1939)와 구한말 대신 출신 한규설(1856~1930), 당대 최고의 개화지식인 윤치호(1865~1945) 등이었다”며 “하지만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민족대표 자리를 수락한 이가 없었다. 결국 종교인들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직접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윤 교수는 “당시 이들은 지체가 높지도 않았고 특별한 명성도 없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평민 출신이었다”고 강조했다. 기득권 계층이 자신의 안녕을 챙기느라 민족대표 맡기를 거부하자 보통 사람들이 조선 독립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이다. 이는 ‘민(民)이 주도한 혁명’이라는 3·1운동의 성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민족대표 33인은 진짜로 친일파가 됐나? 민족대표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은 최린(1878~1958)과 박희도(1889~1952), 정춘수 등 세 사람이다. 김창준(1890~1959)은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이는 해방 뒤 월북한 탓이지 친일 행각 때문은 아니다. 33인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로 돌아섰다는 세간의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다. 설민석 강사와 민족대표33인유족회 간 소송을 담당한 재판부도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민족대표들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적어도 친일 반민족 행위로 평가받을 일은 하지 않고 지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민족대표들이 친일행각에 나섰다는 인식이 퍼진 데에는 훗날 친일파가 된 최남선(1890~1957)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는 33인에 이름을 올리진 않았지만 3·1 독립선언서를 직접 썼기에 존재감이 남달랐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최남선이 ‘나는 평생 학자로 살고 싶다’며 독립선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천도교 측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윤 전 총장은 “33인 가운데 훗날 두세 명 정도가 변절했다. 이것만으로 민족대표 전체를 싸잡아 폄하·매도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3·1정신을 흐리게 하는 자해행위”라고 지적했다. ●태화관은 정말로 ‘룸살롱’이었나? 3월 1일 독립선언식은 서울 종로의 음식점인 태화관에서 열렸다. 하필 기생이 나오는 요릿집에 모인 걸까. 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역사의 시계를 3·1운동 하루 전인 1919년 2월 28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애초 독립선언 장소는 종로의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민족대표들은 선언식 장소를 돌연 태화관으로 바꿨다. 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이 연행될 경우 이를 지켜보던 학생들이 일본 경찰을 제지하려다가 유혈 사태가 생겨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민족대표 33인의 비폭력 투쟁 노선이 거사 장소 선택에도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2월 28일 사전 제작돼 3월 1일 뿌려진 ‘조선독립신문’ 1호에는 “오후 2시 경성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대표들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갔다”고 적혀 있다. 이미 거사 전날부터 민족대표들이 폭력 시위를 피하고자 자수할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탑골공원 인근에서 30명이 넘는 인원이 비밀리에 모일 수 있는 곳을 급히 찾다 보니 자연스레 태화관으로 정해진 것”이라며 “태화관은 요즘으로 치면 호텔과 같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도 “무사히 선언식을 마치려면 실내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따른 것일 뿐 (기생집을 선언 장소로 택한 것에 대해)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무리”라고 덧붙였다. ●만세 운동 주도 못한 이들이 진짜 민족대표? 민족대표 33인의 역할을 부정하는 이들은 “3월 1일 독립선언 직후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민족대표 가운데 일부는 조선의 독립보다는 자치권 확대와 총독부의 지배방식 개선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면서 “이처럼 일제와 타협하려는 듯한 어설픈 리더십으로는 당시 조선인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33인의 재판 내용을 살펴보면 “소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독립선언과 폭동은 관계가 없기에 나에게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요즘 말로 ‘유체이탈 화법’에 해당하는 실망스러운 태도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민족대표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다. 3·1운동 대표로 나서면 곧바로 체포돼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들었고,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는 데 이들의 역할이 상당했다는 설명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일본의 엄혹한 통치가 이뤄지던 때 33인은 3·1운동의 기획자이자 기폭제로서 큰 역할을 했다”면서 “3·1운동 첫날 서른 곳 가까운 도시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이것만 봐도 민족대표들은 시위의 전국 확산을 염두에 두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민족대표는 3·1운동의 리더로서 충분히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덧붙였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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