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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 후손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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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지로 밝혀진 ‘동다송’ 탄생 비화…‘차의 성인’ 초의선사 서신 번역 출간

    편지로 밝혀진 ‘동다송’ 탄생 비화…‘차의 성인’ 초의선사 서신 번역 출간

    조선 후기 대표 선승인 초의선사(1786~1866)는 우리나라 차 문화를 정립한 인물로 꼽힌다. 차를 만들고 감별·음용하는 법과 다선일미 사상을 글로 남겨 ‘다성(茶聖)’으로도 불린다. 그가 쓴 ‘동다송’은 한국 차 문화를 대표하는 다서로 평가받는다. “동다행을 서울에 보낼 때 사람을 시켜 급히 베꼈는데, 지금 읽어보니 오류가 많아서 표를 달아 질의를 썼는데, 이 외에도 착오가 있을 듯합니다. 지금 부쳐 드리니, 하나하나 고쳐 회신 편에 도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1837년 정월 무렵 진도 감목관 변지화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내용이다. 이 편지는 오늘날 ‘동다송’으로 알려진 글의 원래 제목이 ‘동다행’이었으며, 변지화의 요청에 따라 초의선사가 원고를 검토하고 수정·보완하는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다행’은 이 과정 뒤 ‘동다송’으로 제목이 바뀐 것으로 확인된다. 국립광주박물관은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에게 기증받은 초의선사 관련 유물 가운데 간찰 86건 155점을 번역·정리한 학술총서 ‘박동춘 기증 초의선사 유묵 번역집 간찰편’을 발간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번 간찰편은 상·하권으로 구성됐다. 간찰은 개인 사이에 주고받은 사적인 편지로, 문집이나 관찬 기록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일상과 감정, 인간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다. 수록된 편지들은 초의선사가 교유한 유학자와 승려, 지방 관리, 아전 등이 보낸 것이다. 박물관은 이를 통해 초의선사의 교유 관계와 활동, 조선 후기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살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변지화의 편지는 새해가 됐다는 표현 등을 근거로 1837년 정월 무렵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지화는 당시 진도 감목관을 지냈으며, 해남현감 신태희의 서울행으로 초의선사를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됐다는 사정도 편지에 적었다. 초의선사가 정약용과 맺은 인연이 후손에게 이어졌다는 사실도 간찰에서 드러난다.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와 손자 정대무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등이 번역·정리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은 2021년 박동춘 소장으로부터 초의선사 관련 유물 169건 364점을 기증받았다. 이후 2022년부터 유묵 번역 사업을 추진해 2023년 시회 기록을 담은 ‘가련유사’, 2024년 시와 산문을 수록한 ‘시문편’을 발간했다. 이번 간찰편은 유묵 번역 사업의 세 번째 성과다. 박물관은 앞으로 이번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기증 유물을 전시로 공개할 계획이다. 간찰편은 국립광주박물관 홈페이지의 학술·보고서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정약용 후손’ 정해인은 무슨 죄? 하영 ‘증조부 친일 파묘’에 결국

    ‘정약용 후손’ 정해인은 무슨 죄? 하영 ‘증조부 친일 파묘’에 결국

    배우 하영과 함께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이런 엿같은 사랑’에 출연 중인 배우 정해인이 하영의 ‘증조부 친일’ 의혹에 불똥이 튀었다. 12일 연예계에 따르면 정해인은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 서울 모처에서 열 예정이었던 ‘이런 엿같은 사랑’ 홍보 인터뷰를 취소했다. 앞서 증조부의 친일 의혹이 제기된 하영 측이 전날 인터뷰 취소를 밝힌 데 이어 정해인도 취소한 것이다. 하영은 지난 7일 방송된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정해인과 함께 ‘이런 엿같은 사랑’을 홍보하기 위해 출연해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까지 4대째 의사 집안”이라며 “증조할아버지께서 당시 한양에서 최초로 양의원을 개원하셨다고 한다. 고종황제를 진료하시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하영의 증조부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의료인인 안상호(1872~1927)로, 당시 친일 인사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대정친목회’에서 활동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의혹이 일었다. 이에 소속사는 전날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하영도 12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사과문을 통해 “무지한 상태로 여러 자리에서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가족의 자랑처럼 꺼내왔다”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족사를 가볍게 언급했던 것을 반성한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상대 배우의 ‘증조부 친일’ 의혹으로 인한 불똥이 ‘정약용 후손’에게 튀는 상황에 네티즌들은 주목하고 있다. 정해인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직계 6대손으로, 다산의 차남 정학유(1786~1855)의 직계 5대손이다. 하영의 ‘증조부 친일’ 논란이 불거진 후 ‘옥문아’에서 하영이 “의사 집안”을 자랑하자 옆에 앉아 있던 정해인이 묵묵히 듣고 있던 모습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뒤늦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문화유산은 한민족의 종자… 한류 번성하고 국가 품격 높였죠” [서동철의 노변정담]

    “문화유산은 한민족의 종자… 한류 번성하고 국가 품격 높였죠” [서동철의 노변정담]

    출판인 출발 뒤 문화유산운동가로20·30대 때 부산서 고서 수집 첫발국보·보물 등 출판 유산 다수 소장삼성출판박물관 보유 40만점 달해내 인생 길을 내준 고마운 두 분형 김봉규, 목포에 대양서점 설립당시 책 속 뒹굴면서 꿈 크게 가져이어령 설득에 출판박물관 세웠죠‘문화유산국민신탁’ 설립 주도숱한 문화 행사 참석 ‘축사의 달인’유산신탁 회원 1만 7000명 이끌어보성여관·시인 이상의 집 등 매입‘베푼 것 생각 말고 받은 것 잊지 마라’이젠 ‘입 닫고 지갑 열어라’ 실천중박물관 보람 컸지만 운영 쉽지 않아나 이후엔 사회 환원되지 않을까요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은 문화예술 및 문화유산 분야에서 폭넓은 자취를 남긴 문화운동가이자 문화유산운동가다. 그에게 붙여진 ‘문화계 마당발’이라는 별명도 광범위한 활동의 결과일 것이다. 그는 우선 친형이 1964년 창업한 삼성출판사 운영에 일찍부터 참여해 우리나라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고서(古書)에 대한 깊은 관심은 삼성출판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졌다. 과거의 출판문화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물론 유산을 후손에 물려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더불어 한국박물관협회를 주도하며 우리 사회에 다양한 박물관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근까지 이사장으로 재임한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선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사회 구성원 스스로 보전하겠다는 의지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를 세검정에서 불광동으로 넘어가는 진흥로에서 북한산 등산로 방향으로 들어가는 초입 서울 구기동에 자리잡은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만났다. 김 명예회장에게 출판인에서 문화유산운동가로 탈바꿈한 계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부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님이 삼성출판사를 시작하면서 출판일을 배우라며 부산지사장으로 보내 10년 남짓 일했어요. 그곳에서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교유(交遊)하며 옛날 책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부산의 대표적인 고서점가인 보수동 책방골목에 어지간히 드나들었어요. 당시는 수집가들이 도자기와 그림에 눈독을 들이던 때라 고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행운이었지요. 아마도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란한 수장가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고가 깊어지며 중요한 자료들을 헌책 골목에 내놓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는 “그때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다”면서 “집안에선 젊은 놈이 벌써부터 골동품가게를 어슬렁거린다며 걱정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고 했다. ‘새책 팔아 헌책 사는’ 자료 수집은 서울 본사에 올라온 이후로도 이어졌다. 그가 지금도 관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삼성출판박물관은 국보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과 보물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월인석보’, ‘제왕운기’, ‘금강반야바라밀경’, ‘경국대전’ 등 중요 출판 유산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옛 활자와 문방사우 등 보유하고 있는 출판 문화유산은 모두 40만점에 이른다고 한다. 김 명예회장은 ‘인생에 길을 내준 고마운 두 분으로 형인 김봉규 삼성출판사 창업회장과 문학평론가 이어령 선생을 꼽았다. 형님은 전남대 상대에 다니던 1951년 전남 목포에 대양서점을 세웠다. 당시 전남대 상대는 목포에 있었다고 한다. 형님은 1962년에 서울에 올라와 수도서적을 열었고 1964년에는 삼성출판사를 설립했다. “대양서점은 목포 한복판 죽교동에 있었어요. 일제강점기에 지은 2층 목조 상가 1층에 세들어 있었지요. 살림집도 안에 함께 딸려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이며 선생님, 목포 지역의 지식인들이 모두 이 책방에 들락날락했어요. 책 속에서 뒹굴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맹모삼천지교를 떠올리게 하는 환경이었다고나 할까요. 형님은 그때부터 출판이 우리 사회와 문화를 주도하는 산업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덩달아 나도 꿈을 크게 가질 수 있었지요.” 이어령 선생은 김 명예회장에게 출판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한 당사자였다. 이 선생은 초대 문화부 장관에 취임하고 삼성출판박물관이 개관하자 ‘출판박물관은 책의 탑이고, 출판박물관은 책의 씨앗이며, 출판박물관은 악기’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처럼 출판박물관은 과거가 아니라 1000년 뒤 미래를 바라보는 존재이고, 곰팡내 나는 책이 있기에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책들도 예비할 수 있다는 덕담이었다. 무엇보다 ‘출판박물관은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가까이 입술을 대고 허파 깊숙이 호흡을 하면 아름다운 음향이 들려오는 옥퉁소’라며 출범을 축원했다. 김 명예회장은 목포 문태중학교 시절 목포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형님의 권유로 목포상고에 가게 된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에도 시인 서정주 선생이 계셨던 동국대 국문과를 염두에 두었으나 다시 형님의 설득으로 같은 학교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그 시절 경제 구조의 선진화가 진행될수록 산업 분야의 격차를 줄이고 균형 있는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경제학자 조동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결국 부(富)든 문화유산이든 나누는 게 바람직하다는 가르침인 만큼 지금도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2022년 충남 논산 돈암서원에 ‘가례집람’ 등의 책판 54점을 기증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가례집람’은 돈암서원에 배향된 사계 김장생(1548~1631) 선생이 주자의 ‘가례’를 해석한 책이다. 더불어 ‘사계선생연보’와 ‘사계선생유고’, ‘사계전서’, ‘경서변의’의 책판도 포함됐다. 돈암서원은 한때 4168개 책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많은 분량이 흩어지고 1841개만 남았다. 기증한 책판은 50년 전 ‘서울 변두리 집 두 채 값’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기증으로 돈암서원 책판이 완질(完帙)을 이루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박물관 100년’을 맞았던 2009년에는 삼국시대 금동제 말갖춤과 화살통 장식 등 10건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2023년에는 인촌상을 수상하며 상금 1억원 가운데 5000만원을 자신이 몸담고 있던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부했다. 남은 5000만원은 “문화유산과 박물관 사람들에게 흔쾌히 쏘겠다”고 공언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뚜껑을 열고 보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양방언을 비롯한 음악가들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불러모아 ‘음류’(音流)라는 제목의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음악회를 열어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김 명예회장은 숱한 문화 행사에 참석해 인사말을 도맡는 ‘축사의 달인’이다. 요즘도 하루 2~3곳은 기본이고 박물관협회 회장 시절에는 7~8곳을 다닌 적도 있다고 한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 축사만 끝내고 자리를 떠야 할 때도 없지 않다. 그에게 “그렇게 숨차게 뛰어다니시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나에게 ‘약방의 감초’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공것이 없다”고 했다. 다양한 행사에 가서 인사말을 하는 것도 결국 주어야 받을 수 있는 품앗이라는 것이다. “문화행사뿐 아니라 경조사에도 많이 갑니다. 옛 어른들은 아무리 원수같이 지낸 사람이라도 부모 상을 당했을 때 찾아가 예를 표하면 다 풀리게 마련이라고, 이런 게 인생의 지혜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경사보단 흉사에 더 많이 가 줘야 합니다. 후손이 어려울 땐 더더욱 가야 하고요. 요즘도 흉사에 가면 자식·손자들에게 돌아가신 분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후손들이 그런 줄 몰랐다며 뿌듯해하면 나도 보람이 있고요” 김 명예회장은 “돌이켜 보면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직을 맡았을 때 1000명 남짓이던 회원이 그만둘 때 1만 7000명이 넘도록 불릴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바쁘게 다니며 인연을 쌓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는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의 요청으로 설립위원장을 맡아 2007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출범할 수 있도록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2009년에는 다시 이건무 문화재청장 요청으로 제2대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보수로 만 15년 넘게 재임한 지난해 연말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우리나라의 전통인 동계(洞契)와 같은 공동체 정신을 이어받아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문화유산을 민간이 보존하는 시민사회운동이다. 산업화로 파괴되는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회원의 회비로 운영된다. 김 명예회장이 추구하는 ‘나눔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으로 등장한 전남 벌교의 보성여관은 복원작업을 거쳐 2012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개관했다. 서울 자하문로에 있는 시인 이상의 집은 2009년 국민신탁이 처음으로 매입한 보전자산이다.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리는 경주의 윤경렬 옛집, 군포 동래 정씨 동래군파 종택, 고흥 죽산재도 국민신탁이 사들여 문화공간화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농부는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었다”고 했어요.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다음 농사에 쓸 종자는 남겨 둔다는 뜻입니다. 우리 문화유산은 바로 한민족 문화의 종자이고 씨앗입니다. 종자가 되는 문화유산이 있기에 한류도 번성하고 국가 품격도 높아진 것이지요. 더많은 사람이 국민신탁에 참여해 문화유산을 지켜가야 하는 이유일 겁니다.” 김 명예회장에게 “꿈을 이루셨느냐”고 물으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욕심을 부려 90세까지 산다고 할 때 처음 30년엔 군대도 갔다오고 자리를 잡는 시기였다면 다음 30년은 그야말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시기였어요. 이후에는 재산이든 재능이든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스스로 좌표를 잘 만들어 80~90%는 실천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희망하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라”고 했더니 “지금 이대로도 너무 바빠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웃었다. “그동안에는 좌우명이 ‘베푼 것은 생각하지 말고, 받은 것은 잊지 마라. 다른 사람 단점을 말하지 말고 자기 자랑은 하지 마라’였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고 나선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를 실천하려 하고 있습니다.” 김 명예회장은 삼성출판박물관 개관 당시부터 “박물관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고 했었다. “출판박물관은 내 생전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꾸려 가려고 합니다. 박물관은 보람이 컸지만 운영은 쉽지 않았어요. 자식들에게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3남매가 자기들 밥벌이는 하고 있으니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사회에 환원이 되지 않을까요.” ■김종규 명예회장은 1939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목포상고와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삼성출판사 사장과 회장으로 일했다. 삼성출판박물관을 설립해 현재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은관문화훈장, 인촌상을 수상했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이 고즈넉함에… 가을도 잠시 쉬고 갑니다

    이 고즈넉함에… 가을도 잠시 쉬고 갑니다

    가을이 오면 유난히 고택의 품이 그리워진다. 근현대사의 흔적을 따라 사색을 즐겨도 좋고, 조선의 대학자 집에서 하룻밤 머물러도 좋다. 옛 자취가 새겨진 너그럽고 포근한 풍경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이 계절에 가볼 만한 고택들을 모았다.다산만큼이나 소박한경기 남양주 ‘여유당’ 다산 정약용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나고 자랐다. 여유당은 그의 숨결이 서린 공간이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다산은 고향으로 내려와 사랑채에 여유당 현판을 걸었다. 여유는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라’는 뜻이다. 다산은 조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으나 이듬해부터 18년 동안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유당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정리했다. 여유당은 1925년 대홍수로 떠내려가 198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며, 다산의 성품처럼 소박하다. 여유당과 정약용선생묘가 자리한 정약용유적지를 여행할 때는 배우 정해인이 녹음에 참여한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하자. 유적지 운영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입장료는 없다. 정약용유적지 건너편에 실학을 주제로 꾸민 실학박물관이 있다. 다산생태공원은 팔당호를 시원하게 조망하는 곳으로, 반려동물과 산책도 가능하다.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능내역도 놓치지 말자.근현대사 이야기 맛집 항구 옆 ‘인천시민愛집’ 인천시민애(愛)집은 인천항 인근, 자유공원 남쪽에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사업가가 저택을 지어 살던 곳을 인천시가 매입, 한옥 형태 건축물을 올리고 시장 관사로 활용했다. 이후 인천시청이 이전해 인천역사자료관으로 쓰다 2021년 7월 재정비를 마치고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 인천시민애집은 세 공간으로 나뉜다. ‘1883모던하우스’는 과거 시장 관사를 개조한 근대식 한옥이다. 일본식 저택이 있었을 때 모습을 간직한 ‘제물포정원’이 주변을 감싼다. 경비동은 인천항과 개항로 주변을 조망하는 ‘역사전망대’로, 내부는 전시관으로 활용된다. 인천시민애집 주변으로 개항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구 제물포구락부(인천유형문화재)는 개항기 서양인이 사교 모임을 하던 곳이고 대불호텔전시관엔 한국 최초 서양식 호텔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근대문학 작품을 한눈에 살펴보고 싶다면 한국근대문학관을 추천한다.숨은 한옥의 미학 찾기충남 논산 ‘명재고택’ 논산 명재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대 교육에 전념한 조선시대 명재 윤증의 집이다. 고택은 안채와 광채(곳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실용성과 과학적 원리가 돋보이는 한옥으로 꼽힌다. 미닫이와 여닫이 기능을 합친 안고지기를 활용한 사랑채, 일조량과 바람의 이동을 고려한 안채와 광채 배치 등 선조의 지혜가 돋보인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뒤에 내외 벽을 설치하고 벽 아래 틈을 둬 안채 대청에서 방문객의 신발을 보고 안주인이 대비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에 띈다. 인공 연못, 장독대, 고목 등이 운치를 더한다.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지정된 장소 외 출입을 금한다. 관람료는 없다. 인근 돈암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중 하나다. 인근 연산역에서 기차문화체험관과 연산역 급수탑(등록문화재)을 구경하고 옛 곡물 창고가 복합 문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연산문화창고도 들러 보자.탁한 마음 씻어내리라경남 함양 ‘일두고택’ 성리학의 대가 일두 정여창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동방오현’에 오른 유학자로 평가받는다. 함양 일두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정여창이 세상을 뜨고 약 100년이 지나 건축했다. 입구 솟을대문에 정여창 가문이 나라에서 받은 정려 5개가 있다. 사랑채에는 정여창의 후손이 사는 집이란 사실을 말해 주는 문헌세가 편액이 걸렸고, 누마루에서는 마당에 조성한 석가산(石假山) 풍경이 보인다. 이곳 천장 모서리에도 탁청재(濯淸齋) 편액이 걸렸다. 탁청재는 ‘탁한 마음을 깨끗이 씻는 집’이란 뜻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을 지나면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연결되고 곳간과 정여창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차례로 나온다. 일두고택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함양 남계서원(사적)은 정여창이 세상을 떠나고 그를 기리는 지역 선비들이 세웠다. 남계서원 바로 옆에 문민공 김일손을 추모하는 청계서원이 자리한다.나눔의 온기 가득 찬전남 구례 ‘운조루’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을 담은 운조루(국가민속문화재)는 너그럽고 포근한 고택이다. 1776년(영조 52년) 류이주가 낙안군수를 지낼 때 지은 집이다. 250년 가까이 잘 보존된 외관은 물론 고택에 스민 정신이 면면히 전해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류씨 집안은 ‘타인능해’라고 새긴 뒤주에 쌀을 채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사당, 연지로 구성된 고택은 규모가 제법 크지만,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하다. 부드러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는 사랑채 누마루는 운조루의 백미로, 문인들이 풍류를 즐긴 곳이다. 수분실이라는 현판을 걸어 절제 있는 삶을 지향하고, 굴뚝은 낮게 만들어 이웃을 배려했다. 매월 끝자리 3·8일에 열리는 구례 오일장은 갖가지 주전부리를 파는 청년점포가 생기를 더한다. ‘천은사상생의길’도 인근에 있다.
  • 예산 감시·부정부패 척결 ‘공직사회 저승사자’… 존재감 더 커졌다[윤석열 정부 공직열전]

    예산 감시·부정부패 척결 ‘공직사회 저승사자’… 존재감 더 커졌다[윤석열 정부 공직열전]

    감사원 직원의 명함 뒷면에는 마패가 그려져 있다. 국가의 세입·세출 결산, 국가 및 법률이 정한 단체의 회계 감시,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직무감찰을 통해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현대판 ‘어사’를 상징한 것이다. 국민 삶과 거리가 있던 조직의 존재감은 1963년 감사원이 생긴 이래 가장 높아진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를 정조준한 감사로 논란도 끊이지 않지만 출생신고가 안 된 영아를 모두 찾아내 대책을 마련하도록 한 것도 감사원의 보건복지부 정기감사에서 비롯됐다.감사원은 최재해 감사원장을 포함한 7명의 감사위원으로 구성된 감사위원회의와 사무처, 감사교육원, 감사연구원으로 이뤄져 있다. 전체 인원은 1013명이고 이 중 감사직은 839명이다. 최근 감사원이 ‘핫’해진 것은 사무처 조직을 총괄하는 유병호 사무총장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다. 이회창 감사원장 이후 사건이 아닌 인물로 주목을 받는 것은 감사원에서 처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유 총장은 감사원이 자잘한 지적보다는 크고 굵직한 현안을 바로잡아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조직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저돌적인 성격과 맞물려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감사원이 지난해 8월 단행한 인사는 파격의 상징이다. 능력과 실적이 뛰어나다면 서열이나 연차, 출신과 관계없이 핵심 부서를 맡아야 한다며 연공서열을 파괴했다. 개인 역량은 물론 국가 및 조직 기여도 등 로열티도 강조됐다. 주요 간부들의 인사 보도자료에 경력뿐 아니라 개인의 특징과 세평까지 자세히 담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 잘한 사람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유 총장의 뜻이 반영됐다는 게 감사원의 설명이다. 최달영 제1사무차장은 특별조사, 금융 등에 특화된 실무 감사 경력은 물론 기획·감찰·인사·홍보·비서 등의 지원 업무도 두루 경험했다. 진중한 성격에 탄탄한 조사 기본기로 국가적 현안 감사를 도맡아 왔다. 특히 ‘적극행정 면책제도’, ‘사전 컨설팅 제도’ 등을 설계·도입해 공직자들이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현완교 제2사무차장은 건강보험재정, 공공데이터 감사 등 국가 정책의 맥을 짚는 주요 감사부터 민생과 밀접한 사안들까지 빠른 판단력과 통찰력으로 진두지휘했다. 핵심을 찌르는 일 처리와 격의 없는 소통으로 직원 설문조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무자들에게는 버팀목으로, 위에서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관리자로 평가받는다. 김영신 공직감찰본부장은 국가재정, 지방행정, 국방 등 다방면의 감사에 능통해 ‘육각형’ 간부로 불린다.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어조로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업무의 맥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판단력을 보여 줘 내부에서는 닮고 싶은 선배지만 피감 기관에는 ‘저승사자’로 통한다.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 감사, 비영리 민간단체 지원 실태 감사 등 굵직한 감사를 총괄했다. 이상욱 국민감사본부장은 비서실장, 대변인, 행정안전감사국장, 재정경제감사국장 등의 요직을 거친 뒤 지난해 8월 초대 국민감사본부장을 맡았다.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평가되지만 본인과 다른 의견도 수용하는 자세를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사원 등산 동호회장으로, 시간 날 때마다 감사원 뒷산 말바위에 오른다고 한다. 황해식 기획조정실장은 고위직 직무감찰(특별조사)에 탁월하면서도 풍부한 실무 경험을 갖춘 ‘정통 감사인’으로 꼽힌다. 소통을 중시하면서도 강력한 추진력과 신속하게 상황 판단을 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강점이다. 공공기관 재무건전성 및 경영관리실태 감사를 주도해 방만 경영과 도덕적 해이 사례를 다수 적발했다. 황 실장과 함께 정의종 기획조정실 기획담당관은 중요 국정과제 점검 및 국가정보원, 대통령비서실 등 특수 분야 감사 경험과 친화력이 강점으로 현안 대응과 국회, 예산 등 대외 기관 협력 실무를 총괄하는 살림꾼 역할을 하고 있다. 최정운 대변인은 업무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면서도 직원들의 고충에 귀 기울이는 소통 능력을 보여 주는 ‘스마트 덕장’으로 통한다. 평소 감정 기복이 없기로 유명한데 최근 감사원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도 특유의 차분함과 합리적인 업무 스타일을 보여 안팎으로 신망이 매우 두텁다. 감사원 양대 기능인 회계(재정)와 직무감찰(특별조사) 분야를 총괄한 경험이 있어 감사원의 차세대 리더로 꼽힌다. 김영관 재정경제감사국장은 특히 금융 분야에서 굵직한 성과를 거뒀다. 산업은행 등의 비금융자회사 관리 실태를 점검한 금융공공기관 출자회사 관리실태 감사, 관행적인 ‘그림자’ 행태를 집중 분석한 금융규제 운영 및 개선실태 감사 등을 통해 실질적인 개선 방안들을 마련했다. ‘대체불가 에이스’로 꼽히는 최재혁 산업금융감사국장은 통상 최선임 국장이 맡던 자리를 40대 과장이 꿰찬 파격 인사의 대표 사례다. 4대강 감사, 신재생에너지 감사, 규제개혁 감사 등 굵직한 현안들은 물론 아파트 층간소음 감사 등 민생 감사도 이끌었다. 인품과 의사소통 능력을 겸비해 그의 방은 조언을 구하려는 직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박준홍 국토환경감사국장은 최고의 기술감사 전문가로 꼽힌다. 목표가 정해지면 뚝심 있게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부하 직원 개개인의 특성과 강점을 파악해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지휘 스타일을 가졌다. 포항 지진의 요인으로 작용한 포항 지역 기술개발사업의 부실 관리를 밝혀낸 바 있다. 홍성모 공공기관감사국장은 온화하고 소탈한 이미지와 다르게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강단을 지닌 실력자다. 역대 최대 규모의 방산비리로 방산비리 합동수사단과 특별감사단 출범의 물꼬가 된 통영함 음파탐지기 및 방탄복 납품 비리 사건을 실무 지휘했다. 신치환 사회복지감사국장은 신중하면서 과감한 업무추진력을 동시에 갖춘 ‘올라운더형 지휘관’으로 통한다. 공공기관감사국 1과장, 대변인 등의 경험으로 돌발 상황에도 탁월하게 대처한다. 감사 사항의 본질을 빠르게 꿰뚫어 합리적 판단을 내리고 직원들과 고민을 함께 나눠 인기가 많다고 한다. 올 하반기에는 새만금 잼버리 파행 감사를 주도한다. 이용출 행정안전감사국장은 기획·홍보·인사 등 핵심 지원 부서를 비롯한 주요 보직들을 거쳤고 국회사무처, 외교부 감사관 파견으로 시야도 넓다. 대통령실·법원·검찰·경찰 등을 담당하는 행정안전감사국은 감사도 까다롭고 성과를 내기도 어렵지만 이 국장은 직원들에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소신껏 일하라”고 말하는 원칙주의자다. 현재 선관위 채용비리 감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김종운 외교국방감사국장은 ‘감사통’이나 ‘기획통’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 어렵다. 감사 실무 경험을 쌓은 뒤 특별조사국 기동감찰과, 기획조정실 기획담당관 등을 거쳐 기획에도 능하다. 화려한 경력과 다소 딱딱해 보이는 첫인상으로 처음에는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상사지만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과 짧은 회의·보고 시간, 섬세하고 정 많은 성격으로 후배들이 함께 일하기 편해한다. 월성 원전, 서해공무원 피살사건, 통계조작 사건 등 파급력 큰 감사들을 잇따라 진두지휘한 김숙동 특별조사국장은 현장에서 밀착 지휘하는 ‘야전사령관’ 스타일이다. 김 국장이 4급 시절 작성한 직무교육 교재는 신규 직원의 직무감찰 및 문답조사 기본 교재로 활용되고 있고, 실무자 때 쓴 부산항만공사 감사 수기는 감사 현장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는 지침서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이주형 지방행정감사1국장은 신중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일희일비하지 않는 묵직한 리더십이 장점으로 꼽힌다. 감찰담당관, 경찰청 감사관, 특별조사국장 등 주요 공직감찰 관련 보직에 두루 중용됐고 지방자치단체의 토착비리, 개발사업비리의 ‘해결사’로 낙점돼 지난 7월 보임됐다.김성진 지방행정감사2국장은 ‘기획통’이자 손꼽히는 브레인이다. ‘국민을 북극성에 두고 성역 없이 조사한다’는 소신으로 금융감독원 채용비리,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왜곡 등을 파헤쳤다. 감사 지휘 시 직원들이 단순한 법령 위반을 지적하는 것을 싫어하고 큰 틀에서 국민들에게 필요한 처분과 사회적 파급효과까지 고려해 결정하는 등 정무 감각도 뛰어나다. 정광명 지방행정감사3국장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후손답게 투철한 공직관과 함께 실무와 연구·기획력을 겸비한 관리자로 인정받는다. 2016년 보육 대란을 잠재운 누리과정 예산편성실태와 2020년 권력기관 감사의 정례화로 호평을 받은 청와대 정기감사를 지휘했다. 최초의 여성 국장인 장난주 국민제안감사1국장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피감 기관을 휘어잡는다. 실무자 시절부터 성과감사매뉴얼을 집필했고 미래전략감사국장으로 기후위기·인구구조 변화 등 미래 위기 대비 감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 감사원의 성과감사 영역에서 독보적 위치에 있다. 이수연 심의실장은 행정고시 출신이면서 간호사라는 전문성을 살려 공공의료감사 태스크포스(TF)를 이끌고 응급의료체계 등 보건의료 분야 감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빈틈없고 강단 있는 외유내강의 전형으로 후배들에게 따뜻한 선배로 손꼽힌다. 수준급의 플루트 실력도 지닌 다재다능한 인사다. 김영석 공공감사지원국장은 뛰어난 업무 이해도를 바탕으로 핵심적인 큰 방향을 제시하되 세부 내용은 직원들을 신뢰하고 맡기는 등 MZ세대가 선호하는 업무 스타일로 인기가 많다. 주어진 업무에는 며칠씩 밤을 새워 가며 맹렬하게 달려든다. 김순식 감사교육원장은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단련된 몸처럼 뚝심 있고 책임감 강한 감사 스타일을 보여 왔다. 사회복지감사국장으로 재직할 때 출생 미신고 아동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를 통해 입법을 유도하는 등 저돌적인 업무 처리로 성과를 거뒀다. 남가영 디지털감사지원관은 뛰어난 기획력과 판단력으로 업무 처리가 깔끔하고 대내외 업무의 균형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직원들의 대소사를 꼼꼼히 살펴 매년 ‘베스트 간부’에 단골 선정될 만큼 신뢰가 높다. 원내 헬스 소모임 회장으로, 데드리프트 100㎏를 하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로 정평이 나 있다. 신영일 심사관리관은 4대강 사업, 세월호 사건 등 주요 감사에 참여하고 지원 부서도 두루 거쳤다. 탁월한 기획력의 소유자로 직원들에게 명확한 목표와 구체적인 스케줄을 제시해 업무 완성도를 높여 호응이 높다. 김태우 원장 비서실장은 최초의 국정원 기관정기감사를 엄정하게 수행해 권력기관 감사의 모델을 만들었다. 소탈한 성품과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폭넓은 대인관계를 갖고 있다.
  • 몰라보게 달라진 장미란 출연분 재송출, ‘단순과 긍정의 힘’

    몰라보게 달라진 장미란 출연분 재송출, ‘단순과 긍정의 힘’

    지난달 22일 갑작스러운 역대급 방송사고로 제작진이 고개를 숙였던 tvN ‘유퀴즈 온 더 블록’이 1일 장미란(40) 교수 출연분을 다시 내보냈다. 당연히 제작진이 사과의 말이나 방송 사고가 빚어진 경위 등을 다시 설명하지 않을까 생각됐으나 곧바로 제183화 ‘천재와 싸워 이기는 법’에 출연했던 장미란 용인대 교수 편을 그대로 내보냈다. 10분여를 그대로 재방송한 셈이 됐다. 그리고 장 교수는 지난주 방영 도중 갑자기 이전 회에 출연한 건축가 승효상 등 방영분을 내보냈는데 이날은 당시 중단됐던 장 교수의 베이징 올림픽 때 무솽솽과의 사연,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연습한 대로 한 것이 금메달로 돌아왔던 것 같다는 소감을 들려줬다. 장 교수는 지난주 방영됐던 “무아지경에 빠지면 바벨이 무겁지 않았다”며 중학교 시절 역도를 시작해 바벨을 잡은 지 열흘 만에 도 대회에서 우승한 일화부터 역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풀 스토리를 공유하는 것, 2012 런던올림픽 4위에 그쳤다가 상대 선수의 약물 양성반응으로 동메달을 뒤늦게 목에 건 사연, 은퇴 이후 교수 및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운영하는 제2의 인생 이야기도 들려줬다. 장 교수는 사회자 유재석, 조세호에게 역도 바벨을 들어올리는 요령을 가르치는 등 스승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장 교수의 뒤를 이어 제183화 ‘위대한 유산’으로 제목을 바꿔 인생 12년 차에 반만년 한국사를 통달한 역사 천재 소년 정하랑 군도 눈길을 끌었다. 다산 정약용의 후손으로서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만 8세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만점에 가까운 95점으로 1급을 딴 배경, 한국사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놀라움을 안겼다. 이 소년은 꼭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와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이야기하는 의젓함도 돋보였다. 마지막으로 신스틸러에서 독보적인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배우 조진웅이 장식했다. 아버지의 존함을 예명으로 쓰는 독특한 이력, 20년 동안 모두 70여 작품에 출연한 연기인생을 함께 돌아밨다. 극단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캐스팅된 일화부터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섬세한 디테일 연기로 호평을 받고,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올린 뒤 드라마 ‘시그널’, 영화 ‘끝까지 간다’ ‘명량’ ‘암살’ ‘독전’ 등에서 굵직한 연기력을 선보이며 흥행 보증수표로 손꼽히기까지를 돌아봤다. 유난히 다수의 항일 영화와 인연을 맺었던 일, 매년 3월 1일 김구 선생님 묘소를 찾는 이유 등을 들려줬다.
  • [신간] 정약용코드

    [신간] 정약용코드

    [신간] 정약용 코드  우리는 다산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정약용 코드』를 읽으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약용 코드』는 18년 동안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까닭이 우리가 알고 있던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사옥’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과감한 언행 때문’이라는 정약용의 고백을 소개한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등에서 30대의 젊은 나이에 공직생활을 하면서 주변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언행을 했기 때문에 운명적인 유배생활을 했다고 털어놓는다. 정약용은 남의 잘못과 허물을 감싸는 아량보다는 남을 과감하게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면서 ‘인생 잘 못 살았노라’고 뼈저린 후회를했다.  다산이 전하는 공직사회의 성공비결은 지금도 유효하고, 공직뿐 아니라 민간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하다. 다산은 총애를 과감하게 거부하고 윗사람의 존경을 받으라고 당부한다. 윗사람의 존경을 받는 비결은 당당하고 떳떳하게 할 말을 하는데 있다고 다산은 강조한다. 윗사람 앞이라고 주눅들지 말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이 말한 청렴은 목적이 아니라 통치의 수단이다. 다산은 청렴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권위가 서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청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청렴은 요즘의 지방자치단체장인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부하직원인 아전들을 다루는 ‘통치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다산은 큰 욕심쟁이일수록 청렴한 법이고, 비리를 저지르는 이는 작은 욕심쟁이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다산은 조직관리의 비결로 침묵을 꼽는다. 아랫사람의 작은 잘못을 보고도 말 못하는사람인 것처럼 침묵을 지키고 갑자기 화를 내지말라는 당부는 말의 무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지금도 공직에 들어가 헤매고 있는 ‘어공(어쩌다공무원)’에게 목민심서 또는 세르반테스의소설『돈키호테 데 라만차』일독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목민심서에서 정약용이 말하는 공직자 행동지침은 『돈키호테 데 라만차』에서 돈키호테가 바라타리아 섬의 총독으로 가는 산초 판사에게 말한 통치자 매뉴얼과 판박이다. 공직자는 발걸음도 천천히 하고, 양파도 먹지 말아야 하고, 점심보다는 저녁을 더 적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돈벌이를 하찮게 여긴 다른 선비들과는 달리 뛰어난 경제관을 갖고 있었다. 이미 관직생활을 할 때 양잠 등으로 생활비를 벌어들였기에 틈만 나면 양잠과 특용작물 재배를 해서 돈을 벌라고 강조한다. 다산이 요즘 시대에 살았다면 양잠으로 바이오 대박을 터트렸을지 모른다. 다산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다리와 도로, 수레로 살아 움직이는 ‘시끌벅적한 나라’를 만드는 경제개혁, 양반도 직업을 갖는 사회개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양반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무노동무음식 원칙을 강조했다.    저자는 남존여비의 조선시대에 정약용은 여성들이 과로하지 않도록 옷감 짜는 길쌈을 중단시키자고 했던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감옥에 있는 재소자들이 후손을 잇도록 부부관계를 허용하는 ‘가족만남의 집’이 도입된 게 불과 23년 전의 일이지만, 이미200여년 전에 이런 제안을 했던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성리학의 선비들이 중국을 떠받들던 시대에 다산은 중국보다는 일본에 주목했다. 그는 일본의 학문 수준이 조선 후기쯤부터 조선을 능가했다고 진단하면서, 일본에 대비책을 세워서 항상 경계심을 갖고 관찰하라고 당부했다. 개혁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나라가 망하고 말것이라던 다산의 예언 아닌 예언이 실현되는데는 100년이 걸리지 않았다.  저자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다산의 저술과 그의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자는 되도록 풀어썼으며 시대상황을 현대에 맞게 상세히 설명했다. 이를 두고 저자는 200여 년 전 조선시대 ‘흑백의 인물’ 다산에게 컬러를 입히고자 했다고 말했다.  저자는 다산이 갓을 쓴 200여 년 전의 고리타분한 선비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에 딱 맞는 인물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문과와 이과를 드나드는 양손잡이 능력을 보여줬고, 과학과 예술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르네상스형 천재라고 설명한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하이브리드 지식인이 바로 정약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다산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서’를 펴낸 학자이자 사상가이면서, 200여 년 전에 엑셀을 돌려 어려운 계산을 척척 해냈고 화성축성에 삼각함수를 활용한 수학자였다.  수학자이면서도 음악가이자 메모광이라는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완전 닮은 꼴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메모는 503권이라는 사상 유례 없는 저술을 남기게 한 비결의 하나로 꼽힌다. ### 저자 소개   저자는 26년동안 「서울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사회부장, 경제부장, 논설위원, 경영기획실장등을 지냈다. 또한 국무총리 공보실장과 한국수자원공사 감사 등의 공직을 거쳤다. 서울신문 파리특파원의 경험을 살려 『프랑스인들은 배꼽도 잘났다』를 펴냈다.  
  • 세상의 욕망이 세운 열녀문… 조선의 청춘, 죽음으로 내몰렸나[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세상의 욕망이 세운 열녀문… 조선의 청춘, 죽음으로 내몰렸나[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산 자의 욕망이 죽은 자와 만날 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고 살아 있는 돼지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고 했다. 개인에게 죽음은 세계의 소멸이니 아무리 천하고 고생스럽더라도 살아 있는 것,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게다. 어수선한 시내 한복판에 난데없이 서 있는 표석을 지켜보노라니 마음이 복잡하다. 거룩한 뜻이 무엇이든 결국은 자멸이다. 팔홍문의 주인들은 자결하거나 살해되거나 자해에 가까운 자포자기로 세상을 떠났다. 500여년 전 조상들은 그 비절참절한 죽음을 고무하고 찬양했다. 500여년 뒤 후손들은 세계 1위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로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있다. 철학자 조지아 로이스는 ‘본래 나는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기질이 합류한 만남의 장소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삶이 아닌 죽음으로 경도되는 집단 무의식이라도 있는 걸까? 표류하다 구조되어 조선에서 13년 동안 머물렀던 네덜란드인 하멜은, 청나라 군대가 침략했을 때 숲속에서 목매달아 죽은 조선인의 숫자가 적군에게 살해당한 수보다 많았다고 썼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자살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이유를 포함해 자살을 스스로에게 저지른 살인죄로 여기며 자살자의 시신을 교수대에 매달기까지 했던 서양과 사뭇 다르다. 지금도 죄에 대해 벌을 받기보다는 자살로 ‘공소권 없음’을 택하는 유명인들이 왕왕 나타나는 것을 보면, 미국 속담마따나 ‘일시적인 문제에 대한 영구적인 해결책’으로써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은 분명한 듯하다. 팔홍문은 조선 말까지 김포와 자인암을 번갈아 옮겨 다니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서울역이 개발되면서 종로 운니동을 거쳐 파주 적성리로 이전된다. 그조차 한국전쟁이 발발해 1차 소실되었고, 1968년 남양주 진건면 이돈오의 묘역에 재건했으나 붕괴됐고, 1984년에 김포시 감정동에 연안이씨 13정려각으로 확장·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안이씨 종친회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해 보니 13정려각은 천지개벽한 김포 신도시 귀퉁이에서 철망을 둘러치고 문이 잠긴 채로 시간을 견디고 있다.김포 대신 신월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권 2호선 신정네거리역 2번 출구에서 교차로 건널목을 건너면 인도를 끼고 자그마한 도심공원이 펼쳐진다. 장수마을에 걸쳐진 장수공원이라는 이름답게 벤치에 앉아 한담을 나누거나 장기를 두는 노인들이 가득하다. 길쭉한 장수공원의 끝이 보일 무렵 길가에 붉은 비각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서울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열녀문이다. 1729년 영조 때 세운 것을 신월동 606 후손의 집에서 보존해 오다가 2004년 양천구청이 기증받아 숭정각을 짓고 이전했다고 한다. ‘열녀 학생 원종익 처 유인(孺人) 전의 이씨 지문’. 비각 안 정문의 글귀를 또렷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과 보존 상태가 좋지만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서 있어 조경의 일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성 교화하려 만든 ‘삼강행실도’ 이씨의 남편 원씨는 갑작스런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사별한 남편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에 식음을 전폐하였고 결국엔 대상(大祥·사람이 죽은 지 두 돌 만에 치르는 제사)을 지낸 직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단식사함으로써 남편의 뒤를 따랐다.’ 382일 동안 단식한 초고도비만 사나이가 기네스북에 올라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물 없이 3일, 음식 없이 3주가 인간 생명의 한계점이다. 식음을 전폐한다는 것은 음식과 물을 모두 끊은 상태이니 기초대사량이 높아서 열량 소모가 빠른 20대의 이씨는 사나흘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을 것이다. 이씨는 굶어 죽었다. 슬픔도 아니고 그리움으로! 수상하다. 그토록 치명적인 ‘그리움’의 정체가. 우리나라 최초의 그림책인 ‘삼강행실도’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 범죄가 발생하자 삼강오륜의 덕목을 널리 알려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군위신강에 부위자강에 부위부강, 부자유친과 군신유의와 부부유별과 장유유서와 붕우유신, 참 좋은 말씀들이다. 향 싼 종이에서 향이 나듯 진정한 덕행은 숨겨도 천리향이라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 충효열은 도덕적 의미를 지닌 윤리적 행동이다. 헌데 ‘경국대전’ 반포 후 각 지방에서 효자·충신·열녀 등을 뽑아서 포상 대상자를 해마다 보고하게 하면서 뭔가 야릇해지기 시작한다. 강상죄를 대역죄로 취급해 채찍을 때리는 한편 효행 포상이라는 당근을 주어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도가 엉뚱한 방향으로 먹혀들어 갔다.집 앞에 정문을 세우고 자랑 삼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고(복호·復戶),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자에게도 벼슬자리를 주고(상직·賞職), 곡식과 옷감 등의 상물(賞物)을 내렸다. 요즘 식으로 하면 자손들에게 명문대 특례입학과 5급 공무원 채용 자격을 주고 역세권 30평형대 신축 아파트를 준다고 할까. 대번에 없던 문벌이 생기고 현실적인 이득도 쏠쏠하다. 그러다 보니 18세기 후반 고문서로 소지(所志)와 상서(上書)등이 쏟아진다. 개인이나 집안 혹은 현감과 군수 등이 효열을 ‘청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이나 몇십 년 동안, 심지어 40년이 넘도록 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매달린 집념의 후손도 있다. 염불보다 잿밥이다. 효자와 열녀가 되는 것보다 효자와 열녀가 되어 얻는 보상에 대한 열망이 컸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압박이 커졌고 괴이하고 엽기적인 사례도 많아졌다. 몸을 베어 병든 부모에게 피를 먹이다가 과다출혈로 죽는가 하면 어린 자식들을 버려 둔 채로 남편을 따라 죽기도 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 딱한 정황을 꼬집어 비판했다. “효자가 허벅지살을 베어서 생명을 상하게 하고, 열부가 남편을 잃고 절박한 사정도 없는데 갑자기 순절한 경우에는 정려를 내리지 않아야 한다.”●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보다는 삶의 본능이 강하다.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을 수밖에 없다. 목적과 의미가 없을지라도 삶은 생명의 지상명령이다. 지금은 빛바랜 채 눈여겨보는 사람도 별로 없이 길가에서 우두망찰하지만 한때 그 붉은 문은 강력한 압박과 유혹의 빛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 빛에 홀려 에밀 뒤르켐 식의 ‘이타적 자살’을 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남아 있는 정문들은 역설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한, 살 수 없었던 수많은 존재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서울 무반 집안의 둘째 딸 풍양 조씨가 1792년에 남긴 ‘자기록’은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다. 조씨는 15세의 나이로 안동 김씨 집안에 시집가 5년을 살고 20세에 동갑내기 남편과 사별했다. 병에 걸린 남편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아는 대로 배운 대로 죽을 생각부터 한다. 그러나 아주 비밀하게 숨긴 건 아니었는지 품었던 칼을 언니에게 들키고, 죽어야 할 이유보다 훨씬 많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훌륭한 집안에서 잘 배워 ‘여자에게 남편은 오륜의 첫째요, 삼강의 으뜸’임을 알고 있지만 이대로 자결을 하면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 불효하고 언니와의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다. ‘자기록’은 구구절절한 변명의 기록이다. 하지만 애당초 스무 살의 그녀가 자살하지 않았다고 죄책감과 회한에 몸부림칠 이유가 없다. 온전히 그녀의 것이 아닌 욕망, 구역질 나는 세상의 욕망에 떠밀려. “나의 남은 해를 생각하니 푸른 머리와 붉은 얼굴이 시들 날이 멀어 남은 세월이 일천 터럭을 묶은 것 같으니 어찌 견디어 살리오. 그러나 사세는 이미 끝났으니 하여금 하릴없으나 잠깐 머물다 가는 세상에 사람의 수명은 백세가 되지 않으니 나의 세상이 또 얼마리오.” 조씨는 그로부터 23년을 더 살았다. ‘가족’의 이름으로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그들 모두가 떠난 자리에 바람이 분다. 소설가
  • 정약용 생가 내달 밤 8시까지 개방…남양주시 ‘여유당 야행’ 운영

    정약용 생가 내달 밤 8시까지 개방…남양주시 ‘여유당 야행’ 운영

    경기 남양주시는 5월과 9월 매일 오후 8시까지 정약용 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에서 ‘여유당 야행’을 운영한다고 29일 밝혔다. 여유당은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다. 이 기간 정약용 선생의 후손인 배우 정해인의 오디오 해설을 들으며 산책 길을 따라 수국 LED 조명과 달 조형물 등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 시절 꽃을 노래한 시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에 수국을 포함하기도 했다. 한편 올해 정약용 문화제는 오는 9월 23∼24일 열릴 예정이다.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번역청을 설립하자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번역청을 설립하자

    기네스북은 세계 최고의 기록들을 모은 책이다. 아일랜드의 기네스 양조회사 창립자 아서 기네스(1725~1803) 백작의 4대손 휴 비버경은 1955년 기네스북을 출간했다. 세계 최초, 최고, 최대 등 대중의 흥미를 끌 만한 기록들을 수록한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관점은 기네스북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최초, 최고, 최대’보다는 ‘사회와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우리는 세종이 창제한 한글을 ‘최고’ 문자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제껏 한글을 어떻게 취급했던가. 조선조 내내 아녀자들이나 사용하는 문자로 취급했다. 백성을 사랑한 다산 정약용마저도 ‘목민심서’를 한글로 쓰지 않았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통계에 따르면 한글 문맹자가 무려 77%였다. 1960년대 초까지 군대에서 문맹 병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했다. 한글이 한국에서 지식혁명과 정보혁명의 도구로 본격 등장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이제 겨우 반세기다. 출발이 늦다 보니 콘텐츠가 부실한데 위기의식마저 없다. 문제는 번역이다. 일본 교토산업대의 마스카와 도시히데(1940~) 교수는 70평생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여권도 없었다. 일본어밖에 할 줄 몰랐던 그가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일본어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했음을 뜻한다. ‘번역 왕국’ 일본이기에 가능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한국어만 읽어서는 석사 논문 한 편도 못 쓴다. 학문이 불가능한 ‘반쪽짜리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한글을 두고 세계 ‘최고’ 등의 수사를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된다. 그 좋은 문자를 가지고도 후손들이 못나서 반쪽짜리로 전락시킨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1934년 YMCA 교육국이 영어책을 조선어로 번역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하디(1865~1949)는 “십 년 후면 조선어는 부엌에서나 쓰일 터인데 조선어로 번역해서 무엇하겠는가”라며 반대했다. 한국은 아직도 미국 선교사의 인식 수준을 극복하지 못한 것 아닐까. 꼭 번역청이 아니라도 좋다. 한국어 콘텐츠를 확 끌어올리기 위한 번역 지원 대책을 세우자. 한국어만 읽고도 노벨상 타는 시대를 만들어 보자. 이거야말로 세종이 간절히 원한 것 아닐까. 우리도 역사를 바꿔 보자. 미래 세대의 도약을 위한 백년대계를 수립하자. 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안동 권씨를 명문가로 발전시킨 권벌의 닭실마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4대 길지라는 마을들을 꼽았는데, 경주 양동, 안동 하회와 내앞, 그리고 봉화의 닭실이다. 특히 닭실(유곡)마을은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마을을 감싸는 앞뒤 산이 닭 모양을 하고, 닭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명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의 가치를 평가하는 최우선 조건은 그 집이 서 있는 위치, 즉 입지이다. 똑같은 크기와 구조의 아파트가 입지에 따라 수십 배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학군, 상권, 교통 등 인위적인 조건을 최우선으로 꼽지만, 과거에는 산과 강, 들판과 숲으로 이루어지는 자연 조건이 중요했다. 명당은 경제적 풍요를 가져오고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다고 믿었다. 달걀을 품어 금병아리를 부화한다는 믿음대로, 닭실은 이곳에 사는 안동 권씨 가문을 최고의 명문가로 발전시켰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권벌(1478~1548)에서 시작한다. 그가 지은 종가가 실질적인 권씨 가문의 시작이었으며, 대를 이어 후손들의 주거지가 이 마을을 이루었다. 터만 좋다고 명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상을 받들어 효를 실천하고(봉제사), 손님들을 환대해(접빈객) 사회적 관계망을 이뤄야 한다. 무엇보다 구성원 개개인이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닦아 뛰어난 인물이 돼야 한다.권벌은 종가 옆에 충재라는 서재를 지어 수양공간으로 삼았고, 청암정을 지어 벗들과 교류하는 정원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인 권동보는 마을 어귀에 큰 규모의 석천정사를 지어 학문 연마와 교육의 장소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인근에 부친을 모신 삼계서원을 건립해 가문의 학문과 효를 향촌 공동체의 정규 시설로 승화시켰다. 또한 마을의 뒷산, 재궁골에 충재와 그 선대조상을 모신 선산을 마련하고, 묘 아래에재라는 재실을 지었다. 종가와 별당, 선산과 재실, 정사와 서원까지, 명문가와 명문마을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구비한 것이다. 닭실은 권벌이 터를 세우고 권동보가 완성한, 부자가 대를 이어 발전시킨 마을이다. 닭실마을의 원래 입구는 석천정사가 있는 석천계곡이다. 절경을 이루는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를 가진 환상적인 장소다. 계곡 입구 너럭바위에 한자 초서로 ‘청하동천’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다. 권벌의 5대손 권두응의 글씨다. ‘청하’란 해지기 직전 반짝 나타나는 맑고 찬란한 푸른 노을을 뜻한다. ‘동천’이란 신선들이 영생을 사는 도교의 이상향이다. “순간의 찬란함을 영원히 지속하는 곳.” 청하동천의 깊은 뜻이기도 하고, 닭실마을의 꿈같은 바람이기도 하다.●사대부의 인격 드러내는 양용삼칸 ‘충재’·팔작지붕 ‘청암정’ 사대부의 ‘사’는 선비이고 ‘대부’는 벼슬아치다. 사로서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대부로서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쳐 나라를 이롭게 한다. 성리학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인간이 진정한 사대부다. 충재 권벌은 영의정에 추증될 정도의 최고위 관료였고, 진정한 선비로서도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연산군의 폭정기간에 무오, 갑자사화로 이미 많은 선비들이 처참하게 피해를 입었다. 사화란 ‘사림지화’, 즉 선비 무리에 대한 박해를 의미한다. 권벌이 30세로 관직에 오른 때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이듬해였다. 조광조 등 급진사림파와 반정의 주인공인 훈구파의 대립이 극심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온건사림인 권벌은 두 세력의 중재를 꾀했으나, 42세 때 기묘사화로 결국 파직을 당한다. 낙향해 터를 잡은 곳이 바로 닭실마을이다. 충재와 청암정을 지은 것도 이때, 14년의 은거생활 중이었다. 1533년 56세에 복직했다가 68세에는 을사사화 때 직언으로 다시 파직당한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년 후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삭주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71세 나이로 운명했다. 이 사건은 을사사화의 승자인 집권 소윤세력이 나머지 잠재적 정적들까지 말살하려 조작한 역모사건이었다. 권벌뿐 아니라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의 큰 선비들이 화를 입었고, 이들은 후대에 국가적 추앙을 받게 된다. 서재로 지은 충재는 권벌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물이다. 2칸 온돌과 1칸 마루의 총 3칸, 지붕도 가장 간단한 맞배지붕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거처가 이른바 ‘양용삼칸’, 즉 부엌-방-마루의 3칸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과욕이요, 낭비다. ‘비어 있는 집’이라는 이름답게 장식도 일절 없고, 오로지 극히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권벌의 호는 충재요, 자는 중허다. 모두 ‘비어 있다’는 뜻이다. 세속적인 욕망을 비워 내야 성리학의 도를 깨우칠 수 있고, 국가적 공익을 담을 수 있다. 권벌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비어 있는 충재를 지었다. 아무 기교도 없는 것 같지만 문짝 하나의 모양, 부재 하나의 위치도 의미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최소의 물질로 만든, 그러나 선비정신으로 가득한 집이다. 반면 바로 뒤의 청암정은 크기나 형태가 대조적이다. 큰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10칸의 丁자형 건물을 얹은 모습이다. 추녀선을 활짝 펼친 팔작지붕에 단청까지 칠한 화려한 정자다. 거북바위 주위로 둥그렇게 인공 수로를 만들었다. 마치 연못 안의 섬에 정자를 세운 모습이 된다. 물 가운데 있는 정자는 ‘사’()라 하여 매우 귀한 정원 건축으로 친다. 보통의 정자는 멋진 바위를 즐기도록 건너편에 짓는데, 이처럼 바위 위에 올라탄 건물은 극히 드물다. 충재는 그토록 소박하게 만들었는데, 청암정은 왜 이런 호사를 부렸을까? 아마도 충재가 선비(사)의 청빈정신을 드러내는 집이라면, 청암정은 관료(대부)의 호연지기를 발하는 집일 것이다. 사와 대부가 사대부의 양면이듯이, 충재와 청암정은 권벌이 가진 두 방향의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집이다.●선비의 피서법… “고요하니 시원하고 비워 두니 서늘하다” 공자는 군자의 조건과 즐거움을 논어 첫머리에서 밝혔다.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알고, 먼 곳의 친구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며, 그리고 남이 나를 무시해도 화내지 않는 이가 군자라고 했다. 맹자는 더 나아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더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교우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정원를 가꾸며, 후학을 기르기 위해 정사와 서원을 세우는 수고는 모두 군자가 되기 위한 투자다. 선비의 궁극적인 롤 모델은 바로 군자이며, 산과 계곡을 거닐며 심신을 수련해 군자가 되려고 평생 노력한다. 이는 곧 선비들의 이상적인 은거생활이었다. 닭실의 충재와 청암정, 석천정사와 삼계서원은 은거생활을 위한 필요충분 시설이었다. 또한 선비는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서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타의 모범이 되도록 조신하게 행동해야 했다. 한여름에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머리에는 갓을 써야 했다. 아무리 정신적인 존재라지만 푹푹 찌는 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 정약용은 ‘소서팔사’에서 8가지 대표적인 선비들의 피서법을 소개했다.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소나무 아래서 활쏘기/빈 누각에서 투호놀이/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비 오는 날 한시 짓기/달 밝은 밤에 탁족하기.’ 다산이 제시한 피서법은 무언가에 몰입해 더위를 잊는 방법이다. 몰입을 위해서는 우선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대자리와 누각 같은 인공 환경, 숲과 계곡 같은 자연환경이 조건이다. 연못의 정원, 누각과 정자와 같은 건물은 더위를 피하기 위한 필수 시설이었다. 권벌은 더운 여름날, 청암정에 올라 시를 짓고, 주변 연못의 연꽃을 바라보며 더위를 잊었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다가, 그 앞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혔을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 이른바 탁영과 탁족은 선비들의 비교적 적극적인 피서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너무 소극적이다. 갓과 옷을 벗고 냇물에 온몸을 담그지 않는다. 탁족은 오히려 물이라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느끼며 자연에 몰입함으로써 더위를 잊는 방법일 것이다. 몰입은 고요한 가운데 정신을 집중하는 지극히 정적인 활동이다. 중국 시인 백거이는 더위를 쫓는 또 다른 방법을 시로 지었다. “마음이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방안이 텅 비어 서늘함이 감도네.” 고요함은 시원함을 일으키고, 비움은 서늘함을 가져온다. 왜 충재는 비어 있고 청암정은 고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권벌이 잊고 싶었던 것은 더위만은 아니었다. 모략과 배신 따위의 온갖 세속적인 찌꺼기들을 비우고 잊기 위해, 자연 속에서 자기 수양에 몰입했을 것이다. 선비에게 피서법은 곧 은거법이었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안동 권씨를 명문가로 발전시킨 사대부 권벌의 닭실마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4대 길지라는 마을들을 꼽았는데, 경주 양동, 안동 하회와 내앞, 그리고 봉화의 닭실이다. 특히 닭실(유곡)마을은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마을을 감싸는 앞뒤 산이 닭 모양을 하고, 닭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명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의 가치를 평가하는 최우선 조건은 그 집이 서 있는 위치, 즉 입지이다. 똑같은 크기와 구조의 아파트가 입지에 따라 수십 배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지금이야 학군, 상권, 교통 등 인위적인 조건을 최우선으로 꼽지만, 과거에는 산과 강, 들판과 숲으로 이루어지는 자연 조건이 중요했다. 명당은 경제적 풍요를 가져오고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다고 믿었다. 달걀을 품어 금병아리를 부화한다는 믿음대로, 닭실은 이곳에 사는 안동 권씨 가문을 최고의 명문가로 발전시켰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권벌(1478~1548)에서 시작한다. 그가 지은 종가가 실질적인 권씨 가문의 시작이었으며, 대를 이어 후손들의 주거지가 이 마을을 이루었다. 터만 좋다고 명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상을 받들어 효를 실천하고(봉제사), 손님들을 환대해(접빈객) 사회적 관계망을 이뤄야 한다. 무엇보다 구성원 개개인이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닦아 뛰어난 인물이 돼야 한다. 권벌은 종가 옆에 충재라는 서재를 지어 수양공간으로 삼았고, 청암정을 지어 벗들과 교류하는 정원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인 권동보는 마을 어귀에 큰 규모의 석천정사를 지어 학문 연마와 교육의 장소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인근에 부친을 모신 삼계서원을 건립해 가문의 학문과 효를 향촌 공동체의 정규 시설로 승화시켰다. 또한 마을의 뒷산, 재궁골에 충재와 그 선대조상을 모신 선산을 마련하고, 묘 아래에 추원재라는 재실을 지었다. 종가와 별당, 선산과 재실, 정사와 서원까지, 명문가와 명문마을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구비한 것이다. 닭실은 권벌이 터를 세우고 권동보가 완성한, 부자가 대를 이어 발전시킨 마을이다. 닭실마을의 원래 입구는 석천정사가 있는 석천계곡이다. 절경을 이루는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를 가진 환상적인 장소다. 계곡 입구 너럭바위에 한자 초서로 ‘청하동천’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다. 권벌의 5대손 권두응의 글씨다. ‘청하’란 해지기 직전 반짝 나타나는 맑고 찬란한 푸른 노을을 뜻한다. ‘동천’이란 신선들이 영생을 사는 도교의 이상향이다. “순간의 찬란함을 영원히 지속하는 곳.” 청하동천의 깊은 뜻이기도 하고, 닭실마을의 꿈같은 바람이기도 하다. ●권벌의 인격을 드러내는 양용삼칸 ‘충재’·팔작지붕 ‘청암정’ 사대부의 ‘사’는 선비이고 ‘대부’는 벼슬아치다. 사로서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대부로서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쳐 나라를 이롭게 한다. 성리학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인간이 진정한 사대부다. 충재 권벌은 영의정에 추증될 정도의 최고위 관료였고, 진정한 선비로서도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연산군의 폭정기간에 무오, 갑자사화로 이미 많은 선비들이 처참하게 피해를 입었다. 사화란 ‘사림지화’, 즉 선비 무리에 대한 박해를 의미한다. 권벌이 30세로 관직에 오른 때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이듬해였다. 조광조 등 급진사림파와 반정의 주인공인 훈구파의 대립이 극심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온건사림인 권벌은 두 세력의 중재를 꾀했으나, 42세 때 기묘사화로 결국 파직을 당한다. 낙향해 터를 잡은 곳이 바로 닭실마을이다. 충재와 청암정을 지은 것도 이때, 14년의 은거생활 중이었다. 1533년 56세에 복직했다가 68세에는 을사사화 때 직언으로 다시 파직당한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년 후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삭주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71세 나이로 운명했다. 이 사건은 을사사화의 승자인 집권 소윤세력이 나머지 잠재적 정적들까지 말살하려 조작한 역모사건이었다. 권벌뿐 아니라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의 큰 선비들이 화를 입었고, 이들은 후대에 국가적 추앙을 받게 된다. 서재로 지은 충재는 권벌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물이다. 2칸 온돌과 1칸 마루의 총 3칸, 지붕도 가장 간단한 맞배지붕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거처가 이른바 ‘양용삼칸’, 즉 부엌-방-마루의 3칸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과욕이요, 낭비다. ‘비어 있는 집’이라는 이름답게 장식도 일절 없고, 오로지 극히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권벌의 호는 충재요, 자는 중허다. 모두 ‘비어 있다’는 뜻이다. 세속적인 욕망을 비워 내야 성리학의 도를 깨우칠 수 있고, 국가적 공익을 담을 수 있다. 권벌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비어 있는 충재를 지었다. 아무 기교도 없는 것 같지만 문짝 하나의 모양, 부재 하나의 위치도 의미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최소의 물질로 만든, 그러나 선비정신으로 가득한 집이다. 반면 바로 뒤의 청암정은 크기나 형태가 대조적이다. 큰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10칸의 丁자형 건물을 얹은 모습이다. 추녀선을 활짝 펼친 팔작지붕에 단청까지 칠한 화려한 정자다. 거북바위 주위로 둥그렇게 인공 수로를 만들었다. 마치 연못 안의 섬에 정자를 세운 모습이 된다. 물 가운데 있는 정자는 ‘사’()라 하여 매우 귀한 정원 건축으로 친다. 보통의 정자는 멋진 바위를 즐기도록 건너편에 짓는데, 이처럼 바위 위에 올라탄 건물은 극히 드물다. 충재는 그토록 소박하게 만들었는데, 청암정은 왜 이런 호사를 부렸을까? 아마도 충재가 선비(사)의 청빈정신을 드러내는 집이라면, 청암정은 관료(대부)의 호연지기를 발하는 집일 것이다. 사와 대부가 사대부의 양면이듯이, 충재와 청암정은 권벌이 가진 두 방향의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집이다.●선비의 피서법… “고요하니 시원하고 비워 두니 서늘하다” 공자는 군자의 조건과 즐거움을 논어 첫머리에서 밝혔다.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알고, 먼 곳의 친구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며, 그리고 남이 나를 무시해도 화내지 않는 이가 군자라고 했다. 맹자는 더 나아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더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교우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정원를 가꾸며, 후학을 기르기 위해 정사와 서원을 세우는 수고는 모두 군자가 되기 위한 투자다. 선비의 궁극적인 롤 모델은 바로 군자이며, 산과 계곡을 거닐며 심신을 수련해 군자가 되려고 평생 노력한다. 이는 곧 선비들의 이상적인 은거생활이었다. 닭실의 충재와 청암정, 석천정사와 삼계서원은 은거생활을 위한 필요충분 시설이었다. 또한 선비는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서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타의 모범이 되도록 조신하게 행동해야 했다. 한여름에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머리에는 갓을 써야 했다. 아무리 정신적인 존재라지만 푹푹 찌는 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 정약용은 ‘소서팔사’에서 8가지 대표적인 선비들의 피서법을 소개했다.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소나무 아래서 활쏘기/빈 누각에서 투호놀이/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비 오는 날 한시 짓기/달 밝은 밤에 탁족하기.’ 다산이 제시한 피서법은 무언가에 몰입해 더위를 잊는 방법이다. 몰입을 위해서는 우선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대자리와 누각 같은 인공 환경, 숲과 계곡 같은 자연환경이 조건이다. 연못의 정원, 누각과 정자와 같은 건물은 더위를 피하기 위한 필수 시설이었다. 권벌은 더운 여름날, 청암정에 올라 시를 짓고, 주변 연못의 연꽃을 바라보며 더위를 잊었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다가, 그 앞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혔을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 이른바 탁영과 탁족은 선비들의 비교적 적극적인 피서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너무 소극적이다. 갓과 옷을 벗고 냇물에 온몸을 담그지 않는다. 탁족은 오히려 물이라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느끼며 자연에 몰입함으로써 더위를 잊는 방법일 것이다. 몰입은 고요한 가운데 정신을 집중하는 지극히 정적인 활동이다. 중국 시인 백거이는 더위를 쫓는 또 다른 방법을 시로 지었다. “마음이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방안이 텅 비어 서늘함이 감도네.” 고요함은 시원함을 일으키고, 비움은 서늘함을 가져온다. 왜 충재는 비어 있고 청암정은 고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권벌이 잊고 싶었던 것은 더위만은 아니었다. 모략과 배신 따위의 온갖 세속적인 찌꺼기들을 비우고 잊기 위해, 자연 속에서 자기 수양에 몰입했을 것이다. 선비에게 피서법은 곧 은거법이었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법인의 활발발] ‘본다’에서 ‘보인다’로

    [법인의 활발발] ‘본다’에서 ‘보인다’로

    암자의 일상이 시들하고 무료해지면 나는 이웃 마을로 나들이를 간다. 아무리 좋은 곳도 오래 살다 보면 시들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건너편 풍경으로 몸과 시선을 이동해야 한다.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과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가끔 찾는다. 김남주 시인이 살았던 집의 마루에 앉아 질박한 촉감을 느끼고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상념에 젖는다. 또 고정희 시인의 서재에서 묵은 책들의 묵향을 맡기도 한다. 세 곳은 내가 살고 있는 대흥사와 10여분 거리에 있다. 터를 바꾸니 마음도 새롭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말소리에서 벗어나 한적한 기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좋다.근자에는 강진 월출산 아래의 백운동 원림을 찾는다. 자연친화적인 정원이 있는 별서를 원림이라고 한다. 백운동 원림은 최근 명승지로 지정됐다. 벽에 새겨진 불화가 많은 무위사와 수려한 산 아래 펼쳐진 차밭이 원림과 닿아 있다. 이 원림은 조선 후기 문인 이담로(1627~1701)가 월출산 옥판봉 아래 조성한 곳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은둔의 원림은 1812년 월출산 소풍을 마치고 이곳에서 하룻밤 머문 다산 정약용 선생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산은 연하의 선승이자 한국 차의 중흥조인 일지암 초의 선사에게 주변 풍경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백운동 12경에 대한 시를 남겼다. 이 원림은 정선대라고 이름 지은 정자에서 바라본 옥판봉과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만든 유상곡수가 일품이다. 검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은 이 별서정원은 은근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기품이 있다. 답사하는 사람들도 이런 풍경과 분위기에 끌린다고 소감을 말한다. 모란이 활짝 핀 날 원림이 명승으로 지정된 기념식을 마치고 여러 사람과 차담을 나누었다. 모두들 원림의 풍경에 감탄하고 칭송하면서 이후 몇 가지 걱정과 바람을 말했다. 혹여 관광의 바람에 휩쓸려 원림을 만든 본래 의미가 퇴색하고 탈색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내비쳤다. 한 해 이곳을 방문하는 숫자에 집착하지 말고, 자칫 서비스 차원에서 주변에 여러 건물을 짓지 않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옆의 사람들도 그렇게 신신당부했다. 선비정신이 깃든 처소의 아름다움은 생략과 절제에 있다. 오래 가는 아름다움은 노골적이지 않고 숨기는 멋과 맛에 있다. 여유와 소요의 가풍이 깃든 곳일수록 최소한의 모습만을 드러내야 한다. 다행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백운동 원림을 지키고 있는 후손 이승현 선생은 생각이 깊으신 분인데, 본인 스스로 원림의 정신과 기품을 잘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마침 그분과 통화할 일이 생겨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점차 유명해지고 있는 원림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저는 여느 관광지처럼 훌쩍 점찍고 가는 곳으로 만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넉넉한 시간 속에서 원림의 정취를 충분히 느끼고 갔으면 합니다.” 넉넉한 시간 동안 머물렀으면 한다는 생각에 믿음이 듬뿍 갔다. 내가 사는 일지암도 초의 선사와 차의 향기를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는다. 일지암을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문의를 하면 나는 몇 가지 규칙을 말한다. 먼저 최소 30분 이상 머물고, 오자마자 촬영부터 하지 않으며, 스마트폰 검색을 하지 않고, 빠르게 감탄하지 마시라. 그리고 눈과 귀를 무심의 경지에서 고요히 열어 놓으시라. 그리하면 늘 보던 하늘과 나무와 물소리가 새삼스럽게 보이고 들릴 것이다. 최근에 둘레길이 유행하고 문화 답사가 흥행하는 일은 매우 좋은 조짐이다. 그러나 먼저 번잡한 세속의 습관을 내려놓고, 쫓기는 발걸음을 멈출 때 비로소 보고 들었던 것들이 새삼스러워질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시 한 구절이 문화 답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짧은 시간 허둥지둥 스치듯 사진을 찍으며, 그저 ‘보는’ 풍경은 누구나에게 똑같은 피사체일 뿐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조선 시대 어느 문인의 말뜻을 새긴다면 풍경은 마침내 ‘보일 것’이다. ‘보는’ 풍경은 그저 똑같은 사진으로 남을 것이고, ‘보이는’ 풍경은 저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다를 것이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2월,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해남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2월,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해남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물가의 외로운 솔 홀로 어이 씩씩한고 / 배 매어라 배 매어라 / 머흔 구름 한치 마라 세상을 가리운다.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중략) ”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 중 일부> 한 겨울 갓 지나왔지만, 아직은 눈을 이고 있는 고산 윤선도 종택 뒤 비자 숲의 풍광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봄 아지랑이 같은 늦겨울 골안개가 수런거리면서 올라오는 모양은 고산의 시조 그대로의 모습이다. 뜻하지 않게 등장한 녹우당(綠雨堂: 윤선도의 종택) 주변 경치는 여행의 진미를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조선시대 양반의 품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귀에 익은 시조인 ‘어부사시사’의 작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의 삶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하였다. 우리에게는 단지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의 대표 시조 시인으로만 알려진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시인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표적인 동인 가계였으며, 그 중 윤선도는 동인 내에서 다시 갈라졌던 북인과 남인 중 남인을 대표하는 문신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인으로 있던 송시열(宋時烈, 1607~ 1689)과는 예송논쟁을 비롯하여 각종 현안에 대해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는 없었다. 이런 연유로 서인이 집권한 시기에는 그는 항상 함경도 경원(慶源)이나 경상도 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효종의 스승이었지만, 서인이 득세한 세상에서는 윤선도의 정치적인 야망은 항상 좌절될 수밖에는 없었다. 이런 마음은 오우가(五友歌)나 어부사시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 단순한 강호한정(江湖閑情)을 넘어선 정치적 낙향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의 작품에는 잘 드러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고산 윤선도의 삶의 모양과 궤적을 잘 보존한 곳이 바로 전라남도 해남에 자리잡은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이다. 이곳에는 호남의 대표적인 명문 종가이자 오랜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해남 윤씨 가문의 고택, 녹우당을 비롯하여 4600여점에 달하는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소장 전시되고 있다. 이 중에서 고산의 대표적인 작품인 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 등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인 공재 윤두서의 국보급 작품들, 해남 윤씨 가문 내에서 전통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생활 물품 등도 접할 수 있다. 또한 효종이 고산에게 하사한 수원의 집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에 뱃길로 옮겨와 다시 이 곳 해남에서 복원하여 지은 녹우당(綠雨堂)의 이야기는 이 곳을 방문하는 모든 여행객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고산 윤선도의 시조를 안다면, 조선 중기 사림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면 2. 누구와 함께? - 역사적, 문학적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지인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좋다. 3. 가는 방법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0 / 530-5548(061) 4. 감탄하는 점은? - 녹우당 뒤 덕음산의 산세, 윤두서의 자화상과 해남 윤씨 가문의 유품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명성에 비해 내실이 튼튼하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여유롭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녹우당, 고산사당, 고산의 여러 작품들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떡갈비 ‘천일식당’, 김치찌개 ‘소망식당’, 토종닭 ‘원조장수통닭’, 한정식 ‘거빈’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gosan.haenam.go.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두륜산 대흥사, 다산초당, 해남우항리공룡화석지, 땅끝마을 10. 총평 및 당부사항 - 고산 윤선도는 대표적인 남인 계열의 문인으로, 호남 양반가의 적통을 잇고 있다. 조선 중기 역사적인 지식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뜻깊은 여행이 될 수 있다. 윤선도는 다산 정약용의 외5대 조부이기도 하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기자 도읍지는 漢 낙랑군 조선현… 평양은 후대 상상의 산물일 뿐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기자 도읍지는 漢 낙랑군 조선현… 평양은 후대 상상의 산물일 뿐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400여년 전의 17세기 평양으로 돌아간다면 기자(箕子)가 평양에 왔었다고 믿기 십상일 것이다. 평양에 기자의 유적·유물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기전 12세기경의 인물인 기자가 평양으로 왔다는 인식은 사후 2400여년 후인 서기 12세기부터, 기자의 평양 유적은 서기 14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 중기에는 유적이 만들어진 지 이미 400여년이 지났기 때문에 진위 구별이 쉽지 않았다. 기자가 평양으로 왔다는 ‘기자동래설’을 믿고 싶었던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굳이 진위를 밝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기자의 지팡이 조선 선조 때 윤두수(尹斗壽·1533~1601)는 평양감사 시절 ‘평양지’를 편찬했는데 서문에서 “평양은 기자의 옛 도읍이다”라고 썼다. 윤두수는 “평양성의 남쪽에 기자가 만든 정전(井田)이 있고 … 성 북쪽에 토산(?山)이 있는데 기자의 의관(衣冠)을 묻은 곳이다. … 그 외에도 기자궁(箕子宮), 기자정(箕子井), 기자의 지팡이(箕子杖)가 있다”고 말했다. 평양에 기자의 궁전이 있고, 기자의 의관을 묻은 토산이 있고, 우물인 기자정이 있고 기자의 지팡이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가 평양에서 실시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모형도 만들어 놨다. 사각형 농지를 우물 정(井) 자 형태로 나누면 아홉 구획의 농지가 생기는데, 여덟 가구가 한 구획씩 경작하고 가운데는 공동으로 경작해 세금으로 내는 이상적인 토지제도가 정전제다.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尹根壽·1537~1616)는 ‘평안도 감찰사로 나가는 박자룡(朴子龍)을 전송하는 서문’에서 “(평양에는) 기자의 지팡이가 있어서 감사가 관아에 있을 때 그 지팡이 한 쌍을 가지고 앞에서 인도했다”고 말했다. 윤근수는 자신이 등나무(?)로 만든 기자의 지팡이를 직접 보았는데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으니 개탄스럽다”고 한탄했다. ●중국에 역수출된 평양기자 기자가 평양에 왔으니 그 후손들도 있어야 했다. 조선 중·후기 문신 미수(眉?) 허목(許穆)은 ‘동사’(東史)의 ‘기자(箕子)세가’에서 “기자의 후손은 기씨(奇氏), 한씨(韓氏), 선우씨(鮮于氏)”라고 말했다. 조선의 기씨·한씨·선우씨가 기자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런데 송나라의 문인 소식(蘇軾·1037~1101)과 원나라 문인 조맹부(趙孟頫·1254~1322)가 중국의 선우(鮮于)씨들에게 써 준 글들에서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고 쓴 것이 알려졌다. 그래서 광해군 때 예조판서였던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건의에 따라 선우식(鮮于寔)이 평양 기자 사당의 제사를 주관하게 됐다.평양은 중국 사신들이 오가던 지역이었고, 기자 무덤은 이들의 단골 방문지가 됐다. 평양의 기자 유적은 중국에도 널리 퍼졌고, 중국인들이 거꾸로 조선인들에게 물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1731~1783)은 영조 42년(1766년)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 ‘연기’(燕記)에서 중국 허난(河南)성 출신의 한림(翰林) 팽관(彭冠)과 나눈 이야기를 실었다. 팽관이 “기자의 후손이 지금 조선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홍대용은 “평양에 기자의 무덤과 사당이 있는데 그의 후손들이 세습하면서 사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전(井田)의 유적지가 아직도 있으니 고증할 만합니다”라고 답했다. 14세기 이후 만들어진 평양의 기자 유적들이 거꾸로 중국인들에게 ‘기자동래설’의 증거로 역(逆)사용됐던 것이다. ●조선 후기 학자들의 의심 그런데 조선 후기 중국의 1차 사료들을 검토하는 학풍이 일면서 “기자가 정말 평양으로 왔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강역고’(疆域考)의 ‘조선고’(朝鮮考)에서 “내가 살펴보니 요즘 사람들은 기자조선에 대해서 많이 의심하면서 혹 요동에 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라고 썼다. 기자조선이 평양 일대가 아니라 고대 요동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약용이 사숙(私淑)했던 성호 이익(李瀷·1681~1763)도 그런 학자였다. 그는 기자가 평양에 왔다고는 생각했지만 기자의 강역에 대해서 쓴 ‘조선지방’(朝鮮地方)에서는 기자가 당초에 봉함을 받은 지역이 “연나라에 접근해 있었으니 지금 만리장성 밖 요심(遼瀋·만주) 지역이 모두 강역 내”라고 썼다. 기자조선이 지금의 베이징 부근에 있던 연나라와 국경을 접해 있었으니 요심과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부근의 만리장성을 넘는 지역이 모두 그 강역이었다는 뜻이다. 이익은 또한 ‘병영’(幷營)이라는 글에서는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 … 순(舜)시대의 병주(幷州)와 영주(營州)가 아니겠는가”라고도 말했다. 병주는 베이징 부근이고, 영주는 산둥성 일대를 뜻한다.●기자조선 위치가 중요한 이유 기자조선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현재 북한 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동북아 역사전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의 도읍지 평양이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됐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섰으므로 북한 강역이 중국의 역사 영토라는 것이 중국은 물론 국내 식민사학계의 논리다. 그럼 중국 사료도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 한나라의 정사인 ‘한서’(漢書)에는 한나라의 행정구역을 설명한 ‘지리지’가 있다. ‘한서’의 ‘지리지’ 주석은 낙랑군 조선현이 기자가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군 조선현을 찾으면 된다. 한 무제(武帝)는 원봉(元封) 5년(서기전 106) 전국을 13개 주(州)로 나누어 각각 자사(刺史)를 두었다. 지금의 베이징 지역에 있던 유주자사부(幽州刺史部)는 산하에 여덟 개 군을 두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낙랑군이다. 한나라는 전국에 30리 단위로 설치한 역참(驛站)에서 말을 갈아타 가면서 행정 문서를 주(州)나 군(郡)에 전달하게 했다. 한 주(州) 내의 산하 군들에는 보통 하루나 늦어도 이틀이면 행정문서가 전달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유주(베이징)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을 지나서 천산산맥, 장백산맥, 낭림산맥 등의 험준한 산맥을 넘고, 허베이성 난하와 요녕성 대릉하, 요하를 건너고 압록강과 청천강 등을 건너 하루나 이틀 안에 평양에 행정문서를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자조선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의 산물이다.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隋)나라 양제(煬帝·재위 604~618) 때 인물 배구(裵矩)는 서역에 관한 지리서인 ‘서역도기’(西域圖記)를 지어 올릴 정도로 지리에 밝은 인물이었다. ‘수서’(隋書)의 ‘배구 열전’에 따르면 그는 수 양제에게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나라 때 기자를 봉한 곳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봉함을 받았다는 고죽국에 대해서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의 ‘고죽안시’(孤竹安市)에서 “고죽국은 영평부(永平府)에 있다”고 말했다. 영평부 자리가 기자조선이 있던 자리라는 뜻인데, 명·청 때의 영평부는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龍)현이다. 청나라 때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가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영평부 북쪽 40리에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었던 조선성(朝鮮城)이 있다”고 말해서 영평부 자리가 기자조선의 도읍임을 밝혔다. 앞으로 후술하겠지만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현이 옛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 지역이라는 사료는 이외에도 많다. 평양은 고려 후기 유학자들이 기자의 도읍으로 끌어들였을 뿐 중국의 여러 사료들은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현을 기자의 도읍지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력화할 중국 사료는 많다. 중국이나 일본의 눈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관의 전환이 시급한 때다. ■기자와 선우씨 조선에서 ‘선’자 따고 우땅 ‘우’를 합쳐 선우…선우씨 정통처럼 인식 ‘상우록’(尙友錄)에는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는데, 그 아들 중 한 명인 중(仲)이 우(于)땅을 채지(采地·봉토)로 받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선에서 선(鮮) 자를 따고 우땅에서 우(于) 자를 따서 선우(鮮于)씨가 됐다는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재위 1368~1398) 때 중령별장(中領別將) 선우경(鮮于京)의 7대 후손이라는 선우식(寔)이 평안도 태천(泰川) 평양의 기자 사당인 숭인전(崇仁殿) 곁에 와서 살았다. 그래서 그를 기자의 후예로 인정해 광해군 때 숭인전 전감(殿監)에 제수했고, 그 자손이 대대로 전감직을 세습함으로써 선우씨가 기자의 정통처럼 인식됐다.
  • “서소문역사공원 관리비만 年 40억… 구민혈세 투입 안돼”

    “서소문역사공원 관리비만 年 40억… 구민혈세 투입 안돼”

    “서소문역사문화공원이 완공됐을 때 연간 관리비가 구청 예상액인 19억원보다 훨씬 많은 40억원 이상 든다. 복지예산 몇 백만원도 없다는데, 연간 몇 십억원의 관리비를 어떻게 부담할 수 있나. 사후관리에 구민 혈세가 투입돼선 안 된다.”서울 중구의회 김기래 의장과 ‘서소문역사문화공원’ 관련 중구의회 행정사무조사특별조사위원회의 이경일 위원장, 양찬현 부위원장, 변창윤·양은미 위원 등의 주장이다. 이들은 지난달 30일 중구의회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년만 연간 관리비 80억원을 아끼면 복지관 한 곳을 새로 지을 수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서소문역사문화공원 사업은 연 면적 2만 4780㎡에 기존 서소문 근린공원과 지하주차장을 천주교인 순교 등 조선 후기 역사상을 담은 역사공원과 기념 공간으로 조성하는 게 핵심이다. 지하주차장에 전시관, 기념 공간, 부설주차장 등이 들어선다. 지난해 2월 착공, 현재 공정률은 28%다. 사업비 574억 9600만원이 투입됐다. 국비 50% 287억 4900만원, 시비 30% 171억 4800만원, 구비 20% 115억 9900만원이다. 이 위원장 등 4명은 지난 6월 행정사무조사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지난달까지 5개월간 서소문공원과 관련해 사업 타당성과 적정성, 예산 투명성, 사업 규모 대비 사업 주체의 사업 추진 능력, 사후 관리 등 전반을 조사, 지난달 30일 행정사무조사 결과보고서를 내놨다. 이들은 절두산순교성지 등 서울 주요 천주교 성지와 서울역사박물관을 직접 찾아 비교 분석도 했다. 이 위원장은 “구청에서 사업을 추진하면서 절차상 법률을 위반한 게 특위 조사로 이어지게 됐다”며 “10억원 이상 구유재산을 취득하거나 변경할 땐 구유재산 관리계획(변경계획)을 예산 의결 전에 구 의회 의견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어겼다”고 성토했다. 양 부위원장은 “지난 5개월간 토·일요일은 물론 휴가도 반납하고 서소문공원 관련 자료들을 일일이 찾아내고 분석하느라 진짜 힘들었다”며 “이번 보고서를 최고 결정권자인 구청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관건인데, 잘 판단해서 하실 거라 믿는다”고 했다. 위원들은 서소문공원 사후관리비 문제를 지적했다. “구청은 사후 관리비 19억원을 남산골한옥마을·서울남산국악당(남산)과 절두산순교성지·순교자박물관(절두산)을 토대로 예측했다. 서소문공원 건축 연 면적은 2만 4780㎡로 남산 연면적 2935㎡보다 8배, 절두산 2161㎡보다 11배 크다. 연간 관리비도 남산은 약 30억원, 절두산은 40억원 이상 드는데, 서소문공원은 19억원밖에 안 든다는 게 말이 되느냐.”(이 위원장) “수도세·전기세 같은 제세공과금을 연간 2억원도 안 되게 책정했다. 서소문공원은 지하에 조성돼 전기가 없으면 운영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 6대 등 제세공과금이 10억원 이상은 잡혀 있어야 된다. 중구청, 중구의회, 천도교, 천주교, 학계 전문가 등을 망라한 공동추진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이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양 위원) “사업은 이미 진행됐다. 사업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사후관리비를 구민 혈세가 아니라 국·시비로 부담하는 등 사무관리비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야 한다.”(양 부위원장) 특정 종교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고 주문했다. 변 위원은 “서소문공원은 조선후기 역사·문화와 천주교가 어우러진 콘텐츠를 담는 게 당초 사업 목표였는데, 공원 조성 관련 자료 분석 결과 99%가 천주교를 위한 사업으로 파악됐다”며 “특정 종교만을 위한 사업은 국비가 30%만 지원되는데, 특정 종교에 국한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공원을 만들겠다고 해서 575억여원이 지원됐다”고 했다. 이어 “이순신, 강세황, 유성룡, 권람, 정약용, 박지원 등 중구와 연관된 역사적 인물들뿐 아니라 천도교 등 조선후기 역사·문화를 아우를 수 있는 콘텐츠를 담아야 하며, 어느 한쪽에 편향되면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게 된다”고 덧붙였다. 김 의장은 “사업 규모와 사후 관리를 감안, 중앙정부나 서울시에서 이 사업을 해야 한다”며 “천주교 중심의 기존 설계를 변경해 특정 종교에 치우지지 않고 모든 역사적 가치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정해인 “다산 정약용 6대 후손, 부끄럽지만 영광”

    정해인 “다산 정약용 6대 후손, 부끄럽지만 영광”

    배우 정해인이 다산 정약용의 6대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14일 서울 중구 동대문 메가박스에서는 영화 ‘역모 : 반란의 시대’의 언론시사회가 진행됐다. 이날 현장에는 김홍선 감독, 배우 정해인, 김지훈이 자리했다. 이날 정해인은 정약용 6대손이라는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6대 직계 후손이다. 정해인은 이에 대해 “그 말이 나오면 부끄럽다. 저는 잘한 게 없는데 훌륭하신 조상님이 거론되면 몸둘 바를 모르겠다”면서도 “부끄럽지만 영광”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한편, 영화 ‘역모-반란의 시대’는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하룻밤, 왕을 지키려는 조선 최고의 검 김호(정해인 분)와 왕을 제거하려는 무사 집단의 극적인 대결을 그린 리얼 무협 액션이다. 오는 11월 23일 개봉. 사진=연합뉴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정치인의 애민정신과 정치후원금 <부산 연제구선거관리위원회 관리계장 최현일>

    정치인의 애민정신과 정치후원금 <부산 연제구선거관리위원회 관리계장 최현일>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선생은 신유사옥 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던 시절 피폐한 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을 갖고 정치 및 사회개혁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를 하였다. 이 유배시기에 정약용선생의 학문체계가 완성이 되었는데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는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대표적인 저서이다. 경기도 남양주시는 이러한 정약용선생의 실사구시 정신과 애민사상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매년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는데 올해가 ‘경세유표’ 저술 2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서점가에서는 다산 정약용선생에 관한 서적이 재해석되어 잇달아 출간되고 있다. 이렇듯 정약용선생이 200년이 훌쩍 넘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세에도 끊임없이 뜨겁게 회자되고 있는 이유를 지금의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은 한번쯤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공직자들이 읽어야할 필수도서로 꼽히고 있는 ‘목민심서’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애민정신이 담겨있다. 요즘 들어 국민들의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커져가고 있는 이 때 정치인들은 정약용 선생의 애민정신에 비추어 위정자로써 자신의 안위와 일부 특권층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지,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펼치고 정책을 입안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인이 정약용선생의 애민정신을 기려 국민의 편에 선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정치인 개인의 국민사랑과 양심회복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깨끗하고 올바른 정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정치인의 양심회복에만 기댈 수는 없다. 정치가 바른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적 제도도 뒷받침되어야 하고 국민도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정치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이 모든 요건이 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정치인들은 바른 정치를 하게 되고 국민은 본인이 뽑은 정치인을 신뢰하게 되고 선거에 참여한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 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깨끗한 정치문화 조성과 국민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하나로 매년 국민 개개인의 소액다수의 정치후원금을 모금하여 아름다운 선거로 행복한 대한민국이 실현되도록 적극 앞장서고 있다. 지난 2016년에도 깨끗한 정치를 희망하는 국민의 염원이 담긴 기탁금 41억9천만원을 모금하여 정당별로 배분율에 따라 지급하였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쉽고 간편하게 정치후원금을 기부할 수 있도록 기부방법을 다양화하여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지만, 2016년 기탁금 모금액(41억9천만원)은 2015년 모금액(55억9천만원)보다 14억 정도 감소한 금액이다. 이러한 정치후원금 기부 감소현상이 국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방관으로 이어질까 염려스럽다. 정치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그 디딤돌이 되는 정치자금이 투명해져야 한다. 민주주의가 발달된 나라에서도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돈(정치자금)의 투명성이다. 검은 돈은 부패를 만들기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의 소액다수의 투명한 정치자금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 일하게 하는 국민 스스로가 국가의 주인이 되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간혹, 정치인들의 부정과 부패에 실망해서 정치후원금을 기부하기 싫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치후원금은 정치인을 위해서 정치인에게 돈을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뽑은 정치인이 바른 양심으로 깨끗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민주시민의 의무이자 내가 국가의 주인임을 밝히는 실천행위인 것이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더욱 깨끗한 양심과 도덕심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나라의 국정에 참여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애민정신을 기려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정치를 하고 국민은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되어 깨끗한 정치문화를 함께 만들어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국가를 물려줄 수 있도록 하자.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유배와 위대한 유산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유배와 위대한 유산

    유산이란 죽은 사람이 남겨 놓은 재산이나 앞 세대가 물려준 문화를 말한다. 대부분 유배인들은 후손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었다. 유배로 풍비박산이 되면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판에 물려줄 재산이란 상상하기 어려웠다. 유배 중에도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던 유배인도 있었다. 명종 때 을사사화로 성주에서 유배 생활하던 이문건(李文楗)은 이전에도 서울 및 경기 등 각지에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유배 중에도 괴산 지역의 전답을 지속적으로 매입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경작지를 확대했다. 또한 주민들에게서 부세를 받아 대신 관에 납부하고 중간에서 차액을 남기는 방납에도 관여해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노비도 상당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또한 명종 때 권세를 휘둘렀던 진복창(陳復昌)은 말년에 삼수에 유배를 갔는데 유배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유배지 백성들의 논밭을 빼앗고, 토호들에게 뇌물을 요구하는가 하면 직접 형틀을 설치해 백성들을 폭행까지 하면서 재산을 만들려고 광분했었다.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쓴 ‘위대한 유산’이 있다. 이 소설의 관심은 ‘위대한 유산’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주인공에게 상속하려 했던 위대한 유산은 위대한 재산이다. 막대한 재산으로 훌륭한 신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사의 가치를 재산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배금주의에 대한 풍자였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물질적 사치로 그의 삶을 탕진하고 낭비한다. 그 낭비의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정신적 공황 상태 역시 깊어진다. 그러나 물질적 파산과 신체적 몰락의 순간에 주인공은 각성하며 변화한다. 결국 그가 받은 ‘위대한 유산’은 정신적 성장과 인간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였다. 유배인 정약용(丁若鏞)에게는 재산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 하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한 글자는 검(儉)이다.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주는 가르침’(又示二子家誡)은 조선판 ‘위대한 유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 황동규 선생은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라는 시를 통해 소설가였던 부친 황순원 선생의 유산을 공개했었다. “부동산은 없고 / 아버님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 / 마주앙 백포도주 5병 / 호주산 적포도주 1병 / 안동소주 400㏄ 1병 / 짐빔 반병 / 폼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 / 잿빛 양말 4켤레 /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유산이라곤 이것이 전부였다. 많은 재벌이 경영권과 유산 등을 둘러싸고 서로 편을 갈라 다툼을 했고 이 ‘위대한 재산’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노사분규도 재산 싸움의 다른 형태다. 이 때문에 등골이 휘는 것은 나라와 젊은이들이다. 제주 유배인 김정희는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留不盡之以還朝廷),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라(留不盡之財以還百姓)”고 했다. 있기에 추해지고, 없기에 위대해짐을 유배인들은 말한다. 문제는 위대한 재산이 아니라 위대한 유산인 것이다. 제주대 교수
  • 아버지 정약용의 자녀·가족 사랑을 마주하다

    아버지 정약용의 자녀·가족 사랑을 마주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지난 4일부터 선보인 특별전 ‘하피첩(霞?帖), 부모의 향기로운 은택’이다. ‘정약용 필적 하피첩’(보물 1683-2호·이하 하피첩)은 민속박물관이 지난해 9월 경매를 통해 구입했다. 당초 정약용의 후손들이 갖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분실된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2004년 경기도 수원의 폐지 줍는 할머니 손수레에서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하피첩’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가 돼 함께 자녀를 키우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원래 네 첩이었는데 지금은 세 첩만 전해지고 있다. 박물관은 보존처리를 위해 하피첩 두 첩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을’(乙)과 ‘정’(丁), 두 글자를 발견해 하피첩이 갑을병정(甲乙丙丁) 순서로 제작됐음을 확인했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나머지 한 첩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 해체 작업을 하지 않았지만 세 첩 중 저술 시기가 가장 빠르고 본문 전체가 비단으로 제작돼 있는 점으로 미뤄 순서상 ‘갑’(甲)일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부부,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에선 정약용과 홍혜완 부부의 결혼과 사랑을, ‘자녀에게 남기는 부모의 마음’에선 가족 곁을 지켜주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저술된 ‘하피첩’의 숨은 이야기를, ‘자손에게 전해진 하피의 먹 향기’에선 서첩에 담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했던 자손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엔 딸에게 화목을 기원하며 선물한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다산초당 풍경을 묘사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보물 1683-1호) 등 정약용 관련 유물 30여점도 감상할 수 있다. 천 관장은 “이번 전시는 하피첩에 담긴 가족의 의미를 발견하고 공유하는 자리”라며 “다산은 자녀들이 효제(孝悌)를 바로 세우고, 자아를 확립한 후 학문을 익히기를 바랐다. ‘하피첩’에 담긴 정신적 유산은 물질적 가르침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 더욱 소중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달 13일까지 이어진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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