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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중심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종’소리 울리는 ‘길’[서울 로드]

    조선의 중심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종’소리 울리는 ‘길’[서울 로드]

    조선 통금·해제 알리던 보신각종서울신문 균열 보도에 모금 운동1980년대 국민 힘 모아 다시 제작전차·가로등·주상복합·주택단지국내 최초의 기록이 즐비한 거리소설가 구보처럼 천천히 걸어볼까조선부터 구름처럼 사람 몰리던 곳고관대작 피하기 위해 ‘피맛길’ 생겨해방 후 예술가·민주화운동의 길로 종로는 서울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이름에 ‘길(路)’을 담고 있다. 종이 울리는 길이란 뜻이다. 조선 초기 도성을 여닫고 인정(人定·통행금지)과 파루(罷漏·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종을 매단 종루(보신각)가 있던 데서 유래했다. 요즘에는 한 해를 보내고 새해의 평안과 희망을 기원하며 찾는 보신각이, 조선 시대에는 일상을 통제하는 국가 시설이었다. 같은 공간이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와 기능을 품은 셈이다. 보신각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의 종은 국민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1984년 서울신문이 보신각종에 생긴 균열을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됐다.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모금 운동이 이어졌고, 국민 손으로 다시 세웠다. 조선 시대에도 ‘종로’는 한양의 중심이었다. 광화문 남쪽으로 뻗은 세종대로는 관청이 늘어선 육조거리였고, 그와 직각으로 놓인 종로는 팔도의 물자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운종가(雲從街)’로 불렸다. 동대문(흥인지문)과 서대문(돈의문)을 잇는 이 거리에는 독점적 영업권이 있는 육의전(명주·종이·어물·모시·비단·무명)이 있었다. 이곳에선 때때로 탐관오리를 공개처형함으로써 국법의 엄중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광화문우체국 맞은편에 표지석으로 남아 있는 혜정교가 그 무대였다. 육조거리와 종로거리가 마주치는 곳인 동시에 죄인을 다스리는 우포도청 앞이어서 공개형을 치르기에는 최적이었다. 팽형(烹刑) 또는 부형(釜刑)으로 불렸는데,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담그는 공개형이란 의미다. 다만, 삶는 흉내만 내 경각심을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권력의 서슬을 피하기 위한 작은 길도 있었다. 말[馬]을 피[避]하기 위해 만든 곳이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고관대작을 피해 서민들이 이용하던 좁은 뒷길, ‘피맛골’이다. 해방 이후에는 문인과 언론인, 예술가의 집합소였고, 독재정권 때는 경찰을 피해 시위대가 숨어드는 해방구였다. 1974년 지하철 1호선 공사 때 일부가 사라진 뒤 종로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3가까지 사잇길이 남았다. 길 양쪽에 해장국과 생선구이, 빈대떡을 파는 식당과 술집이 즐비했다. 2009년 청진동 재개발로 피맛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비판이 제기됐다. 이미 개발이 진행된 곳을 제외하고 종로2가에서 종로6가에 걸쳐 있는 피맛골을 수복재개발구역으로 지정해 예전 모습을 재현하기로 하고, 2012년 종로3가~종묘 구간에 대한 정비사업을 완료했다. ‘청진옥’ ‘서린낙지’ ‘한일관’ 같은 노포가 인근으로 옮겨져 명맥을 잇고 있다. 종로는 근대 문물이 가장 빨리 유입된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돈의문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최초의 노면전차가 개통됐다. 1900년 전차가 야간 운행을 시작하면서 정거장과 매표소를 밝힐 불이 필요했다. 최초의 전기 가로등 3개가 들어섰다. 덕분에 종로의 밤은 대낮처럼 밝고 활기찼다. 일제강점기 종로는 민족의 자존심을 건 격전지였다. 일본인이 명동과 충무로 등 남촌 일대 상권을 개발했다면, 청계천 북쪽 종로 상권엔 조선인이 많았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과 드라마 ‘야인시대’로도 유명한 김두한의 주무대가 이 일대인 까닭이다. 김두한의 흔적이 남은 곳들도 근래까지 꽤 있었다. 김두한이 한때 기거했고, 한국기원 근처여서 지방에서 올라온 바둑기사들이 많이 묵었던 종로 YMCA 옆골목 ‘종로 용일여관’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1980~90년대에 안동식 장터국밥과 석쇠불고기를 파는 ‘시골집’으로도 유명했지만, 2020년 재개발로 사라졌다. 1930년대 종로2가에 있던 화신백화점(현 공평동 종로타워 자리)은 최첨단 문물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1935년 화재 이후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건물로 재건됐다.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일루미네이션이 설치된 핫플레이스였다. 창업자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밀착해 조선 최고 갑부가 된 인물로, 훗날 해방정국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제1호 검거자로 구속됐다. 1934년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구보는 전차에서 내려 이 길을 배회한다. “구보는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구보와 모던보이가 거닐던 경성의 랜드마크 화신백화점은 1970년대까지 명맥을 이었지만, 1980년 부도에 이어 1987년 철거 수순을 밟았다. 화신백화점 자리에서 멀지 않은 북촌의 한옥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데몬헌터스’를 통해 세계적인 유명세를 탔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 디벨로퍼’가 고민 끝에 남긴 흔적이다. 1920년대 ‘건축왕’ 정세권(1888~1965)은 북촌과 익선동 일대에 한옥 단지를 조성했다. 100평 규모의 사대부 한옥이 아니라, 서민도 살 수 있도록 10~40평대로 공급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수도나 전기가 들어오도록 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북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통왕’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과 함께 1930년대 ‘경성 3대 왕’으로 불릴 만큼 부를 일궜지만, 삶의 궤적은 전혀 달랐다. 친일파로 이름을 남긴 다른 둘과 달리 정세권은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조선어학회에 사옥을 기증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문을 당했고, 뚝섬에 있던 3만평 땅과 재산, 건설면허를 빼앗겼다. 그럼에도 지원을 이어갔고 1957년 ‘큰 사전’의 간행을 이끌어냈다. 훗날 고향의 단칸 농가에서 숨진 그가 남긴 것은 ‘큰 사전’과 쌀되, 밥공기, 수저 한 벌뿐이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종로3·4가로 들어서면 개발독재 시대의 잔재가 눈에 띈다. 애초 이 일대는 2차세계대전 말기 미군 공습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소개(疏開) 공지대였다. 목조건물 밀집지대에 소이탄이 떨어질 경우 불이 옮겨붙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중간에 빈터를 마련한 것이다. 1960년대 종묘 앞 일대 ‘종삼(鍾三)’은 길이 1㎞, 넓이 5만㎡의 땅에 2200여 동의 무허가 판잣집과 대규모 사창가가 뒤섞인 슬럼가였다. 역대 서울시장 중 가장 굵은 족적을 남긴 ‘불도저’ 김현옥 시장은 1966년 판자촌을 쓸어버리고 1968년 ‘나비 작전’이란 이름으로 남은 사창가를 없앴다. 그 자리에 세워진 ‘세운상가’ 지구는 한국 최초이자 최대의 주상복합 건물군이다. 당대의 건축가이자 3공화국 핵심들과 교분이 남달랐던 김수근이 설계했다. 1㎞ 길이의 거리가 보행로가 될 수 있도록 입체화시켜 데크로 잇고, 1~4층에는 상가를, 5층 이상은 아파트를 두는 주상겸용 복합건물군을 배치하는 ‘큰 도시 속에 작은 도시들’ 콘셉트였다. 현대상가를 시작으로 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 등 8개 대형건물이 이어진 형태다. 1960년대 후반 세운 지구는 서울의 핵심 상권인 동시에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입주하던 최고급 아파트였다. 하지만 영광은 짧았다. 1970년대 신세계, 미도파에 이어 롯데백화점까지 을지로 일대에 문을 열자 상권의 중심이 움직였다. 강남 한강변에 현대·한양 등 대형 고급아파트가 건립되자 재력가들의 주거도 움직였다. 끝으로 1970년대 김중업이 설계한 삼일빌딩을 비롯한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건물이 속속 들어서자 세운상가를 두고 ‘위압감을 주고 볼썽사납다’는 평가와 함께 서울의 녹지축을 단절시켰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때 미래 서울의 상징으로 주목받던 세운 지구는 도심의 흉물로 쇠락했다. 지난한 논란을 겪고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4구역 개발을 둘러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처럼 종로는 수백년 동안 레이어(겹쳐입기)를 하듯 새 옷을 입고 매무새를 고쳤지만, 어딘가에는 과거를 품고 있다. 왕조의 수도에서 격동의 근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종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길인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 구석 구석 돌고 돌아 찾은 곳… 설렘도 아픔도 마음에 오롯이

    구석 구석 돌고 돌아 찾은 곳… 설렘도 아픔도 마음에 오롯이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릴 것이 참 많은 한 해였습니다. 올해도 ‘서울신문 렛츠고’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쉼 없이 돌았습니다. 여정은 혼자였으되 독자들의 시선은 등에 늘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지요. 올해 찾았던 곳 가운데 되새길 만한 곳을 추려 봅니다. 지난 시간의 단순 복기가 아닌, 발견의 기쁨을 새삼 각인하고 공유해 보려는 것이어서 느낌이 각별합니다. 흔히 발견의 시대는 저물었다고들 하지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새로이 보는 눈을 갖는 것이니까요. 1 [지리산 종주:전남 구례~경남 산청] 버킷리스트 하나를 채우다 올해 시작은 어수선했습니다. 비상계엄 여파로 주변에 ‘밤새, 안녕’을 물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혼돈의 와중에 평소 꿈꿨던 지리산 종주를 떠올렸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한 해를 견딜 힘을 얻기에 제격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지리산 종주 코스는 대체로 들머리의 앞 글자와 날머리의 앞 글자를 딴 이름으로 정합니다. 저는 ‘성중종주’를 추천합니다. 전남 구례군 성삼재에서 출발해 노고단과 최고봉인 천왕봉(1915.4m)을 찍고 경남 산청군 중산리로 내려섭니다. 거리는 34㎞, 보통 새벽에 성삼재를 출발하는 1박2일 여정을 택하지만 몸에 근육이라곤 없는 도시인의 수준을 고려해 2박 3일로 늘려잡았습니다. 대신 좀 더 여유있게 첫째 날 노고단, 둘째 날 천왕봉 해돋이를 감상했습니다. 겨우 한 번 종주하고 지리산의 참모습을 알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고통의 기억만 선연할 뿐 가슴과 머리에 맺힌 게 있기나 한 지는 지금도 묘연하니까요. 이런 여정들이 반복되면 왜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고 하는지 깨닫는 때도 오겠지요. 2 [경북 문경] 일제와 해방 공간의 영웅들 올해 가장 의미 있는 수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활약한 영웅들을 무수히 만난 것입니다. 고구마 줄기를 캐듯, 한 명의 영웅이 또 다른 영웅을 끌어내는 형국이었습니다. 실마리는 일제에 맞선 박열 의사와 아내 가네코 후미코였습니다. 경북 문경시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을 찾은 날,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충격적인 시를 쓴 박열, 이 시에 빠져 그와 연인이 된 가네코를 만났습니다. 둘은 훗날 일본 국왕 폭살 미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지요. 둘 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만, 가네코는 이감된 감옥에서 23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습니다. 가네코는 우여곡절 끝에 생전 소원이었던 박열의 고향 문경에 묻힙니다. 다만 박열이 북한 땅에서 영면 중인 탓에 함께 묻히고 싶다는 바람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네요. 홀로 ‘영혼의 피앙세’의 고향을 지키는 모습이 애처로웠습니다. 문경 외에도 일본 도쿄와 세종시 등에 둘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둘이 옥중 결혼을 하고, 일본 조야를 발칵 뒤집은 ‘괴사진’을 찍은 곳이 일본 도쿄 신주쿠 요초마치의 ‘이치가야 형무소 터’입니다. 비록 작은 기념비가 고작이지만, 신주쿠에 간다면 들르시길 권합니다. ‘도시락 폭탄’ 이봉창 의사도 이 곳에서 순국했습니다. 3 [충북 청주 예술기행] 예술·문화로 다시 본 ‘노잼 도시’ 가네코의 이야기는 충북 청주시로 이어집니다. 청주는 예부터 ‘노잼 도시’로 알려진 곳이지요. 최근의 변화는 무척 놀랍습니다. ‘청주의 테이트 모던’이라 할 문화제조창, 냉전 시대 산물이었던 ‘당산 벙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등 문화예술 분야 볼거리가 넓고 깊어졌습니다. 특히 일본의 목판화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가 ‘청주행’을 이끈 강력한 요인이었습니다. 진품 소장처인 일본 야마나시현에서도 지난 20년 동안 딱 3주만 공개할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작품이 충북도와의 ‘결연’ 덕에 한국으로 처음 건너 온 겁니다.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진행된 이 전시를 통해 조선을 사랑한 야마나시 출신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를 알게 된 것도 수확이었습니다. 미술교사였던 형 노리타카는 전국을 돌며 조선 도자기 연구에 매진했고, 동생 다쿠미는 조선통독부 임업연구소에서 일하며 한반도 녹화사업에 헌신했습니다. 다쿠미는 1941년 40세로 요절하면서 남긴 “조선의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현재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묻혀 있습니다. 한국 민화의 중시조라 할 대갈 조자용(1926~2000) 선생을 만난 것도 이 여정에서였습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세계인에 각인된 호랑이와 도깨비 등 우리 전통의 가치를 수십 년 전에 꿰뚫어 본 분입니다. 청주 바로 옆 보은 속리산에 그의 유산을 전시한 ‘조자용 민문화관’이 있습니다. 4 [베일에 쌓인 제주 돌하르방] 문화유산 돌하르방과의 조우 제주 돌하르방을 모두 ‘알현’한 순간도 기억에 남습니다. 돌하르방은 사실 지금도 모르는 것 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저마다 손 모양이 다른지, 뭘 상징하는지 등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지요. 시도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성문 앞(혹은 성문 밖)에 세웠던 현무암 석인상’을 말합니다. 제작 연대는 1754년(영조 30년)이 유력합니다. 총 48기였는데 현재 제주도에 45기,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 2기가 남아있습니다. 1기는 행방불명입니다. 돌하르방이 있는 곳이 대부분 제주의 대표 관광지인 만큼 한 번쯤 모두 찾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5 [서울 종로 한옥마을 ‘북촌’] ‘레트로의 힘’ 근대 셀럽들과의 만남 서울 종로구 북촌 일대를 오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짓던 근현대의 셀럽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단초는 지난해 세상을 뜬 ‘뒷것’ 김민기였습니다. 전북 익산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가회동에 정착한 그의 뒤안길을 밟다가 수많은 인걸과 만났습니다. 그와 한국의 모던 포크를 함께 일군 양희은, 한국의 1세대 건축가 김수근, 1990년대 문화 대통령 서태지, 명동 백작 박인환, ‘모란이 필 때까지’의 시인 김영랑과 엇갈린 사랑을 나눈 무용가 최승희 등 수많은 인물들이 갈래를 치며 뻗어나갔습니다. ‘레트로의 힘’이 얼마나 세던지요. 압권은 ‘북촌의 설계자’ 정세권이었습니다. 경남 고성군의 시골 능참봉에서 일약 ‘경성 건축왕’에 오른 인물입니다. ‘일제강점기 부동산 개발업자’에서 민족자본가의 위상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6 [마산, 딱 100년간 존속했던 도시] 문인·사상가의 숨결을 마주하다 옛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서 마주한 인물의 스펙트럼도 현란했습니다. 마산은 1910년부터 2010년 6월 30일까지 딱 100년 동안 존속했던 도시입니다. 물 좋고 공기 맑아 일제 때부터 ‘결핵 치료의 메카’였습니다. 나도향, 김지하, 서정주, 김춘수, 함석헌 등 셀 수 없이 많은 문인과 사상가가 마산결핵요양소(현 국립마산병원)를 거쳐 갔습니다. 그 중 한 명이 ‘하얀 나비’의 가수 김정호였습니다. 광주에서 태어나 1970~80년대를 풍미하다 결핵 탓에 서른세 살에 마산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할리우드 최고의 미남 배우)’라 불리던 임화와 마산 유지의 딸 지하련의 애사,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마산에 왔던 시인 백석 등도 있지요. ‘마산의 명동’ 불종거리에 가면 이들이 알알이 새겨 놓은 이야기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7 [화마가 할퀸 경북 의성] 새순 돋듯 치유의 봄날 기다리며 경북 의성군 고운사 들머리엔 해마다 분홍빛 법계도림이 펼쳐집니다. 법계도림은 화엄사상을 210개 글자의 시로 축약한 뒤 이를 54개 굽이(角)의 사각형으로 만든 미로입니다. 봄이 되면 법계도림에 꽃잔디를 심고 예쁘게 장식하곤 했지요. 하지만 지난 3월 발생한 경북 북부 산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습니다. 천년고찰 고운사의 범종이 깨지고, 아름다운 누각들이 재만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지만 새순이 돋는 기색은 역력했습니다. 새해엔 화마의 아가리에서 앙버틴 지역들을 한 번쯤 방문하길 권합니다. 8 [숨겨진 유산 품은 전남 고흥] 예술·비경이 안겨 준 뜻밖의 감동 전남 고흥군에선 화가 천경자의 생애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가 열린 데 이어 올해도 전시회 등이 고흥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고흥군이 천경자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지속해 벌인다고 하니, 새해 진행될 이벤트를 기대해도 좋을 듯 합니다. 숨겨진 자연 유산을 만나는 기쁨도 쏠쏠했습니다. 금강죽봉의 자태가 압도적이었지요.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흰빛의 응회암 주상절리입니다. 아쉽게도 현재 도보로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9 [로컬 문학의 재발견 전남 장흥] 10대째 詩 쓰는 오헌고택 사람들 전남 장흥군에 10대째 시를 쓰는 집이 있다면 믿겠습니까? 장흥 위씨 종갓집인 오헌고택 사람들입니다. 오헌 위계룡부터 시작해 10대가 시인입니다. 굶어 죽기 딱 좋은 게 글 짓는 예술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가문입니다. 장흥은 문학으로 돌아보기 좋은 고장입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남도의 깡촌’ 장흥이 가진 문학의 힘을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다시 보고 있지요. 10 [전통 소주 되살리는 경북 안동] 한국의 ‘SOOL’ … 세계인과 ‘짠 이제껏 우리 전통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죄다 사라졌다는 게 통설이었습니다. 한데 1000년 넘게, 최소 수백 년은 이어 온 지혜가 기껏 수십 년의 통제에 소멸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겁니다. 경북 안동시처럼 지역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지요. 우리에겐 반드시 되돌려야 할 술의 역사가 있습니다. ‘소주’가 특히 그렇습니다. 희석식 소주에 밀려 있는 전통 증류식 소주를 제자리로 바로잡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SOOL’도 ‘KIMCHI’처럼 세계인의 보통명사가 되는 날도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 기왓장마다, 담벼락마다… 경성 건축왕의 애국, 모던 보이들의 예술혼 깃들다

    기왓장마다, 담벼락마다… 경성 건축왕의 애국, 모던 보이들의 예술혼 깃들다

    서울시민 상당수가 피서를 떠났을 무렵 서울 종로구 북촌을 찾았다. 오버투어리즘 논란이 일 정도로 관광객이 몰리는 곳. 하지만 절정의 휴가철이던 그날은 서울시내 교통부터 인파까지 기이할 정도로 한산했다. 그 덕에 모던 걸과 보이들이 질주하던 북촌을 외국인 관광객이라도 된 양 느긋하게 어슬렁댈 수 있었다. 역시 서울 구경은 피서철이 제격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동네를 일컫는 표현이다. 북으로 북악산이 둘러싸고 있고 남으로는 광화문과 돈화문을 잇는 도로가 경계다. 가회동, 계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팔판동, 화동, 안국동 등이 모두 북촌에 속했다. 북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지난해 세상을 뜬 ‘뒷것’ 김민기의 뒤안길을 밟으면서다. 전북 익산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김민기는 5학년 무렵 서울로 전학을 온다. 10남매를 둔 어머니의 교육열이 남달라 막내인 김민기까지 모두 서울로 올려 보내 공부를 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김민기가 이사한 곳이 가회동이다. 북악산 앞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정세권, 개량 한옥 단지 지어 분양일본인 땅따먹기 막는 방파제로가회동 일대를 돌며 발견한 이야기는 김민기의 시대에만 머물지 않았다. ‘북촌의 방파제’ 정세권, ‘한국의 1세대 건축가’ 김수근, 한국의 모던 포크를 함께 일군 양희은, ‘하얀 나비’ 김정호, ‘1990년대 문화 대통령’ 서태지 등 위아래로 무수히 많은 갈래를 치며 뻗어 나갔다. 숱한 인물이 시차를 두고 북촌 일대를 오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거다. 그 시간의 층위를 모두 전할 수는 없다. 북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구간만 살펴도 책 수십권은 족히 쓰고도 남는다. 이번 여정에선 근현대의 인물만 소환하기로 한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으로 관심이 깊었던 인물들이다. 우선 ‘북촌의 설계자’ 정세권(1888~1965,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엔 1966년 사망으로 기록)부터. 경남 고성의 능참봉에서 일약 ‘경성의 건축왕’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과거 일제강점기의 부동산 개발업자 정도로 여겨지다 지금은 민족자본가의 위상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북촌’이란 다분히 상대적인 개념의 지명이 생긴 것도 정세권의 한옥 단지 개발에서 비롯됐을 개연성이 높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한옥마을 누리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의 한옥 분양 광고에서 볼 수 있듯, 북촌의 한옥은 당시의 새로운 도시주택 유형으로 정착되어….” 쉽게 말해 북촌의 개량 한옥이 ‘당대의 아파트’였다는 얘기다. ‘조선집’이라 불리던 이 개량 한옥을 만든 이가 정세권이다. 시계추를 잠깐 당시로 돌리자. 종로를 기준으로 남쪽에는 일본인들이, 북쪽엔 조선인들이 주로 살았다고 한다. 어슴푸레하던 경계는 경성에 일본인 거주자가 늘면서 위협받기 시작한다. 개항장이던 전남 목포 등의 도시에서 보듯, 경성의 노른자위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던 일본인들이 급기야 나라님이 머물던 공간 언저리까지 집어삼킬 기세였다. 이때 정세권이 나서 북촌 일대의 주거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가회동, 계동 등의 대형 한옥을 인수해 대지를 잘게 쪼갠 뒤 작은 한옥을 지어 분양한 것이다. 정세권의 한옥 단지는 일본인의 확장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했다. 주택자금이 부족한 조선인을 위해 대출을 해 준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니까 요즘처럼 돈을 먼저 받고 집을 짓는 게 아니라 먼저 집을 지어 분양한 뒤 이주 비용을 천천히 갚도록 한 것이다. 당시 매일신보(서울신문의 전신) 1936년 5월 20일 자 ‘나는 엇디게 성공하얏나’(나는 어떻게 성공했나)라는 인터뷰 기사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언급된다. 요즘의 건설사라면 그리할 수 있었을까. 북촌, 익선동뿐만 아니다. 왕십리, 신당동 등 서울의 한옥 지대는 거개가 정세권이 개발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다만 고택을 잘게 쪼개 작은 한옥을 짓다 보니 담장이 사라지고 벽이 그대로 골목에 노출되는 경우가 생겼다. 인적이 드물던 예전에야 별문제 아니었겠으나 나라 안팎의 관광객으로 차고 넘치는 요즘엔 소음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재동초등학교에서 북촌 답사에 나선다. 김민기와 양희은이 1년 터울로 이 학교에 다녔다. 둘은 이 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생 때 다시 만난다. 그때까지는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듯하다. 이후 이들이 한국 포크의 역사를 새로 쓰는 영웅으로 성장한 건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다. 가수 김민기·양희은 꿈 키운 재동초건너편엔 상류층 저택 백인제 가옥왜색 오해에도 민족지사 손때 가득재동초등학교 건너 백인제 가옥은 윤보선 가옥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북촌의 양반 가옥이다. 윤보선 가옥이 현재 비공개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북촌에서 옛 상류층의 가옥 형태를 온전히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건축물이다. 1913년에 처음 이 집을 지은 이는 ‘금융계의 이완용’이라 불리는 한상룡이다. 그가 이 집에서 지낸 시기는 15년 정도다. 금전 문제로 이 집을 넘기고 북촌의 다른 고대광실로 이사(이 과정에 야료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한다. 친일파의 손을 탄 탓에 백인제 가옥을 다소 떨떠름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영화 ‘암살’(2015)에서 친일파의 저택으로 등장하며 이런 인식이 짙어지기도 했다. 행랑채에 깔린 장마루만 보고도 왜색이라 표현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본채의 마루는 우리 전통의 우물마루다. 일본 양식이 일부 가미됐다고 해서 전체를 왜색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 싶다. 게다가 한상룡 이후 백인제 선생 등 민족지도자들이 몇 배 더 오래 이 집에 거주했다. 백인제 가옥과 이웃한 건물은 등록문화유산인 정독도서관이다. 정독도서관의 전신은 경기중·고등학교다. 우리나라 관립 중등교육기관의 효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도 관학의 최고봉이었다. 김민기의 어머니가 가회동을 선택한 것도 아마 이런 교육, 주거 환경이 주된 요인이었지 싶다. 정독도서관, 당대 건축 기술 총동원겸재인왕제색도 탄생한 자리기도인근엔 서민들 돈 모아 학교 설립도 당대의 건축 기술이 총동원된 건물이 무척 인상적이다. 도서관 뜨락엔 ‘겸재인왕제색도비’가 세워져 있다. 겸재 정선이 이 자리에서 본 인왕산을 토대로 걸작 ‘인왕제색도’를 남겼다고 한다. 당시 북촌은 중등교육의 중심지였다. 이른바 ‘5대 공립’(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고) 가운데 경기고, ‘5대 사립’(중앙·휘문·배재·양정·보성고) 가운데 중앙고와 휘문고가 북촌에 있었다. 이 중 중앙고는 여전히 남아 한 세기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전설적인 한류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쓰이면서 한국을 넘어 일본과 동남아의 팬까지 찾아올 정도로 명소가 됐다. 학생들의 수업 환경을 위해 평소에는 출입이 금지되고 주말에만 들여다볼 수 있다. 요절한 ‘하얀 나비’의 가수 김정호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곳도 이 일대다. 김민기가 미술에 미쳐 있었다면 김정호는 밴드부에 미쳐 고교 시절을 보냈다. 김정호는 김민기보다 한 살 어리지만, 상경은 2년 먼저 했다. 광주 금남로 인근에 살다 올라온 김정호가 자리잡은 곳은 익선동이다. 이곳 역시 정세권이 북촌과 비슷한 방식으로 개발했다. 익선동에서 교동초등학교를 나온 김정호는 북촌 계동에 있는 대동중, 대동상고(현 대동세무고등학교)에서 혈기 방장한 시기를 보낸다. 이 학교도 설립 과정이 독특하다. 일제강점기 인력거꾼 3000여명이 경성차부(車夫)협회를 조직한 뒤 세운 학교다. 서민들이 자식을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최준식 교수의 책 ‘동(東) 북촌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교사 신축에도 적극 나섰다. 건축자재를 이고 지고 좁은 골목길과 급한 언덕길을 쉴 새 없이 오갔다. 건물 앞에 있는 산을 파 운동장을 만들고 그 흙으로는 담장을 세웠다. 언덕길투성이인 계동에서 대동세무고가 좀처럼 보기 힘든 너른 운동장을 가진 이유다. 훗날 이 학교를 나온 김정호가 국악과 결합한 가요로 당대를 풍미했고, 대동중 20년 후배인 서태지 역시 록과 국악을 결합한 ‘하여가’(1993)란 곡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굵직한 획을 긋는다. 창덕궁 앞 빨래터에 흐르는 비화들김지하·박인환·최승희 발자취 따라김수근의 ‘공간 사옥’서 차 한잔을 북촌 끝자락, 창덕궁과 경계를 이룬 곳에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가옥이 있다. 그가 직접 지었다는 집은 종로구립미술관이 됐다. 현재 전시작 교체로 출입 통제 중이고, 오는 9월 4일 이후 다시 찾을 수 있다. 온라인에 정보가 넘쳐나는 고희동 가옥보다 더 관심이 쏠리는 건 골목 끝자락의 ‘원서동 빨래터’다. 이른바 북촌 8경 가운데 3경인데 느낌이 아주 독특한 공간이다. 빨래터 위는 궁궐이고 아래는 범부들이 사는 동네다. 창덕궁에서 흘러온 물이 선원전 담벼락 밑으로 흐르며 궁궐과 민가가 연결됐다. 여기서 궁인들과 평민들이 함께 빨래하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글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내용이었을까. 아니면 중전과 후궁들이 싸운 얘기였을까. 빨래터에서 돈화문 방면으로 쪼르륵 내려오면 ‘마고 싸롱’과 만난다. 김지하 시인이 이름을 지어 줬다는 카페다. 마고 싸롱 뒤에 시인 박인환의 집터가 있다. 그가 8년가량 머물며 ‘목마와 숙녀’ 등의 시를 빚어낸 장소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원 인제 출신의 박인환은 대단한 모던 보이였던 듯하다. 곱상한 외모에 술과 담배를 즐기며 명동을 주름잡았다고 한다. 그는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시인 이상을 유난히 좋아했다. ‘죽은 아폴론’이라 부르며 추앙하던 이상의 기일만 되면 폭음을 했다. 그가 허무하게 떠나던 1956년의 그날도 그랬다. 이상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흘 밤낮을 폭음하다 자신도 술독을 못 이겨 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생일을 맞지 못했으니 요즘 식으로는 스물아홉)이었다.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 두 명을 거푸 끌어내린 헌법재판소 맞은편엔 우리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꼽히는 최승희의 옛집이 있다. ‘동양의 이사도라 덩컨’이라 불리며 일제강점기 당시 세계 무용계에 돌풍을 일으킨 무용가다. 지금은 한식당이 된 이 집엔 흑요석처럼 깊고 검은 눈을 가졌다는 최승희와 ‘모란이 필 때까지’의 시인 영랑 김윤식의 사랑 이야기가 한 자락 깔려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비껴간 뒤 최승희는 사회주의에 심취한 남편과 함께 월북한다. 김일성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얼마 뒤 김일성의 말 한마디에 숙청되고 만다.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인 ‘공간 사옥’(현 아라리오갤러리)은 북촌 여정을 마무리하기 맞춤한 곳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꼽히는 김수근이 짓고 사무실로 쓴 장소다. 나라 안팎의 건축 학도들이 즐겨 찾을 만큼 중요한 건축물이다. 건물 지하의 소극장은 역사적인 장소다. 여기서 최승희의 몸종이었던 공옥진이 곱사춤을 초연했고,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첫 공연을 열었다. 금싸라기 같은 건물에 돈 안 되는 소극장을 만들고 가난한 예인들에게 내준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난한 시절에 ‘공간’이란 문화잡지도 펴냈다. 부자나라가 된 지금 우리에게 없는 ‘잡지’를 그는 돈에 연연하지 않고 만들었다. ‘공간 사옥’은 현재 갤러리, 카페 등으로 쓰이는데 옛 건물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스승(김수근)과 제자(장세양)의 이야기가 묻힌 곳에서 차 한잔 홀짝대며 다리쉼하기 좋다.
  • 재주는 K팝이 부리고 수익은 외국이 다 챙겨… 진짜 문화 강국 핵심은 도심 ‘K팝 전용 아레나’ [월요인터뷰]

    재주는 K팝이 부리고 수익은 외국이 다 챙겨… 진짜 문화 강국 핵심은 도심 ‘K팝 전용 아레나’ [월요인터뷰]

    왜 K팝 전용 아레나인가공연은 산업, 숙박·쇼핑까지 ‘원스톱’‘케데헌’ 굿즈 사러 박물관도 오는데세계 팝스타 보러 오면 저절로 ‘호황’기존 대형경기장 왜 안 되나규모는 작고 공연용 음향시설 미흡서울 한복판 역세권에 지어야 효과용산 정비창 부지·DDP 자리 ‘최적’부동산 ‘족집게’로도 유명한데금리·규제 등 합리적 추론한 것뿐강남 집값 정부 개입한다고 안 잡혀중산층·서민 주거 개선 정책 힘써야 세계가 K팝에 푹 빠졌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속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가 부르는 ‘골든’이 K팝으로 분류되는 노래로는 처음 영미 싱글차트를 석권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겠지만 “서울엔 제대로 된 아레나(대형 공연장)조차 없어 재주는 K팝이 부리고 수익은 외국에서 챙겨 간다”는 게 김경민(52)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콘텐츠를 만들고도 정작 팬들이 몰입할 인프라는 갖추지 못한 아이러니다. 김 교수는 “서울의 용산 정비창 부지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제대로 된 K팝 전용 아레나를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글로벌 K팝 수도에서 ‘스위프트 노믹스(미국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공연하면 해당 지역경제까지 살아나게 한다는 의미)’도 가능할 것이란 의미다. 다음은 일문일답. -K팝 전용 아레나, 왜 필요한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새통이다. 케데헌에 등장한 까치·호랑이 캐릭터와 닮은 배지를 사려는 인파다. 굿즈에도 이렇게 몰려드는데 BTS나 블랙핑크의 대규모 공연이 열리면 어떻게 될까. 서울에는 제대로 된 공연장이 없다. 고척돔(1만 6000~2만 5000석)은 음향이 좋지 않다. KSPO돔(옛 체조경기장·1만 5000~1만 6000석)은 리모델링을 했지만 규모가 작다. 이처럼 공연 인프라가 척박하다 보니 K팝 가수들은 월드투어에 주력한다. K팝은 우리 콘텐츠인데 파급된 경제 효과는 외국이 누린다.” -아레나를 지으면 어떤 효과가 있나. “외국인 관객은 3~4일은 숙박하기 때문에 호텔업이 살아난다. 공연장 주변 테마파크와 쇼핑몰까지 연계되면 관광·쇼핑부터 외식까지 원스톱으로 이뤄질 수 있다. 아레나는 관광 산업의 핵심이다. 100% 성공한다.” -어디에 지어야 하는가. “서울 도심 한복판이어야 한다. 지역균형 개발 운운하면 하세월이다.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1만 5000석)는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도 매번 매진이다. ‘제대로 된 공연’을 보고 싶어 한다는 방증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바로 공연장이 있어야 한다. 접근성 좋은 서울부터 짓고 나중에 넓혀 가면 된다. 서울에선 용산 정비창 부지가 제격이다. 동대문도 위치가 좋다. 그러려면 DDP부터 부숴야 한다. 5000억원을 들여 지었으면 적어도 1조원의 경제 유발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사실상 0원이다. 관광객들이 사진만 찍고 가는 5000억원짜리 장난감에 불과하다.” -정부가 ‘문화 5대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며 수도권에 5만석 규모의 아레나를 짓겠다고 했는데. “5만석이면 스타디움(스포츠 경기장)이다. 프로스포츠 연고팀이 반드시 있어야 운영이 가능하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의 홈인 도쿄돔이 공연장으로 이용될 때 5만 5000석이다. 그런데 모든 K팝 아티스트가 5만석을 채우진 못한다. 2만석이면 충분하다. 그 옆에 8000석, 3000석 규모를 붙여 ‘아레나 콤플렉스(단지)’로 짓는 게 더 효과적이다. 모두 더해서 5만석이면 괜찮겠다.” -재원과 투자 방식은. “정부와 지자체가 부지를 임대하고, 민간 기업이 참여해 시공하고 운영하면 된다. 시공비와 운영 수익을 어떻게 나눌지 구조를 잘 짜면 어려움이 없다. 결국 부동산 개발이라고 보면 된다.” -부동산 시장 ‘족집게’로도 유명하다. 비결은. “사람들은 2022년에도 집값이 다 오른다고 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으로 금리가 오를 수밖에 없으니 당연히 집값이 내려갈 거라 예측했다. 당시 만들었던 모델링(모형화) 결과, 집값이 20% 폭락하는 것으로 나왔고 2022년에 실제 집값이 크게 떨어졌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합리적 추론이 맞았을 뿐이다. 다만 정부가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순 있다.” -6·27 대출 규제는 어떻게 평가하나. “수도권과 규제 지역의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원으로 묶는 것은 굉장히 수위가 센 조치다. 하지만 앞으로 기준금리가 인하될 가능성이 크고, 주택 공급이 많지 않을 거란 건 모두 알고 있다. 부동산 거래에 이르는 접근성을 막아 놓은 것 외에 본질적 흐름이 바뀐 건 아니란 의미다. 금융 접근성을 제외하면 부동산 시장 환경은 오히려 좋아졌고, 한미 관세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불확실성도 걷혔다. 단기적으로 대출 규제 정책은 효과가 있고 찬성한다. 다만 실질적으로 유효한지는 다른 시각에서 평가해야 한다.” -부동산 시장에 또 한 번의 ‘슈퍼 사이클’이 온다고 전망했는데. “부동산 시장 사이클은 굉장히 길다. 한 번 바닥을 찍고 나서 상승하면 3~5년이 걸리는데, 지난해부터 장기적인 상승이 시작됐다. 일시적인 변동이 있을 순 있지만 금리 인하, 공급 부족, 전셋값 상승, 투자 수요 확대와 같은 복합적 요인으로 부동산 시장이 장기적 상승 국면에 진입했고 앞으로도 강한 상승세가 예상된다.” -관세 협상이 부동산 시장에 미칠 영향은. “미국발 관세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수도권 공급 대책이 빨리 나와야 한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릴 것 같다. 그러면 인플레이션 흐름 속에 유동성이 늘어나게 된다. 정부는 주식 시장으로 가길 바라겠지만 부동산 시장을 과열시킬 가능성도 있다.” -대통령이 세금으로 집값을 잡지 않겠다고 했는데. “동의한다. 역대 정부가 세금으로 부동산을 잡으려던 건 잘못됐다. 그러나 한국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0.1% 정도로 지나치게 낮다. 미국은 가장 낮은 주(州)가 0.3%, 평균 0.8%다. 일본은 1% 안팎이다. 종합부동산세를 우선 폐지하고 재산세 등 보유세 실효세율을 0.3%까지 올려야 한다. 보유세를 올리는 대신 양도소득세는 완화해야 한다.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공정시장가액비율을 곱해 과세하는데 이건 세금 갖고 장난치는 거다. 보유세 체계를 모든 사람이 계산할 수 있도록 ‘시가 기준 0.3%’ 이런 식으로 단순화해야 한다.” -왜 양도세를 완화해야 하는가. “주택 이동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보유세는 높이고, 양도세를 낮추면 주택의 이동성이 향상된다. 다주택자에겐 징벌적 과세를 해도 되지만 1주택자에게는 10년 정도 거주한 뒤 다른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도록 양도세를 유예해야 한다. 보유세가 형편없이 낮은 상황에서 양도세를 과도하게 부과하는 세제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부동산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나. “서울 강남 아파트값은 솟구쳐도 내버려 둬도 된다. 집값을 낮추려고 시장에 개입했다가 성공한 적이 없다. 반포 원베일리가 60억원에 거래되는 건 보통 국민의 삶과 무관하다. 세금만 잘 매기면 된다. 그보다는 중산층과 서민의 거주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정책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들이 적정한 비용에 살 수 있는 양질의 주택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결국 해법은 공급이다. 국공유지를 기반으로 20~30% 디스카운트된 아파트 분양 시장을 열어야 한다. 민간의 재건축·재개발은 10~15년 이후에 나오지만 국공유지 부지는 지금 바로 분양시장을 열 수 있다. 10억원 하는 것을 7억~8억원으로 내리면 가격이 안정화될 것이다. -부동산은 투자 대상일까. 거주 수단일까. “‘리빙’(Living)과 ‘바잉’(Buying)의 두 축으로 바라봐야 한다. 정부가 부동산을 ‘리빙’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바잉’을 투기로 인식하는 건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다. 미국에서 저소득층이 중산층으로 계층이 상승해 집을 마련하는 것을 아메리칸드림이라 얘기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중산층과 서민이 모두 정부 정책에 따라 임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코리안드림일까. 적어도 내 집 마련에 성공하는 것이 코리안드림이 아닐까.” -앞으로 계획은. “북촌 한옥마을을 개발한 ‘건축왕’ 정세권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 재단을 만들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로 가회동·삼청동·익선동에 한옥마을을 조성해 주거 문화를 개선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 김경민 교수는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버클리에서 정보시스템 석사, 하버드에서 도시계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보스턴의 부동산 리서치회사 PPR에서 유럽·아시아 상업용 부동산 모델링 담당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2013년부터 국민연금기금 대체투자위원회에 민간전문가로 참여하고 있다. 2021년부터 ‘부동산 트렌드’를 발행하고 있는데 거시 지표와 빅데이터로 구축한 예측 모델로 다음해 시장을 족집게처럼 예측해 명성을 얻었다. 지난해 말에는 빚을 내 집을 사는 대신 보다 적은 돈으로 리츠(REITs·부동산투자신탁) 지분을 사고 매달 일정 금액을 월세처럼 내면서 리츠 소유 주택에 장기 거주하는 ‘한국형 뉴 리츠’를 한국은행과 함께 제안했다.
  • [씨줄날줄] 헌법재판소 ‘터’

    [씨줄날줄] 헌법재판소 ‘터’

    오늘날의 서울 가회동 북촌은 1930년대 ‘건축왕’으로 불린 건양사 정세권이 세도가 대형 집터와 임야를 사들인 뒤 규격화해 지은 1000채 남짓한 한옥이 바탕이 됐다. 그 남쪽 안국역사거리 일대는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의 존재에서 보듯 왕실 인척의 집단거주지였다. 헌법재판소는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의 집 자리에 세워졌다. 옹주는 1765년 능성위 구민화와 혼인했는데 이때 영조가 지금의 헌재 터에 내린 사저가 능성위궁이다. 능성위가 여러 차례 구설에 올라 귀양길에 오른 내용은 실록에 자세히 담겨 있다. 옹주도 혼인 7년 만에 세상 떠났으니 복을 누리지는 못했다. 한말 주변엔 당대 주요 인사들이 모여 살았다. 온건개화파였다가 민씨 외척 정권의 중심으로 떠오른 민영익과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사상의 선구자였던 박규수, 박규수의 제자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피살된 개화당의 일원 홍영식이 그들이다. 민영익은 정변 당시 큰 상처를 입었는데 이때 치료한 앨런은 고종의 어의(御醫)가 된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은 몰수한 홍영식 집에서 시작됐다. 광혜원은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민영익의 집엔 외교통상 정부조직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들어섰다. 1910년에는 경기여고의 전신인 관립한성고등여학교, 1949년에는 다시 창덕여자중학교가 자리잡았다. 창덕여중은 1951년 창덕여자중·고등학교로 개편됐다. 헌재는 1993년 이 자리에 지금의 청사를 지었다. 2016년 도서관 기능이 포함된 별관을 짓고자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역사를 압축한 듯한 건물 6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능성위궁의 기단과 구들의 원형을 복원해 역사문화공간을 조성한 것은 탁월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의 선고를 앞두고 청사는 철조망에 갇히고 역사공원은 철제 펜스에 차단되는 신세가 됐다. 헌재 터의 역사에 불행이 더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 [근대광고 엿보기] “학교 인접, 남향, 교통 최고” 1930년대 분양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학교 인접, 남향, 교통 최고” 1930년대 분양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건양사’라는 주택 시공업체를 세워 서울의 북촌 일대에 한옥을 지어 분양한 ‘건축왕’ 정세권을 다룬 적이 있다(서울신문 2021년 4월 19일자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강점기에 정세권 외에도 김동수, 마종유, 오영섭, 박흥식, 정희찬 등 한국인 개발업자들이 주택 분양에 나섰다. 관급 공사는 일본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했기에 한국인들은 부득이 민간주택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위 광고에 나오는 ‘삼화원 주택지 양도도(분양도)’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일대를 개발해 분양한다는 광고로 개발업자 정희찬의 이름을 광고 문구의 앞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1920년대 이후 서울은 인구 급증으로 주택난을 겪게 되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요즘처럼 집값이 폭등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에 한국인 개발업자들이 삼청동 등지의 국공유지와 대갓집, 미개간지를 분할해 주택을 지어 분양하는 사업을 벌였다. 위 분양 광고에 나오는 9170평(약 3만㎡)은 삼청공원(그림의 왼쪽, 북쪽)과 정독도서관(그림의 오른쪽, 남쪽) 사이에 있는 삼청동 35번지 일대의 땅이다. 경복궁을 돌아 삼청동 카페 거리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보이는 언덕배기 지역으로 지금도 당시에 지은 한옥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삼화원’(三花園)이라는 말은 지도 왼쪽에 신설하는 것으로 그려진 ‘삼화유치원’(지금의 삼청동 우체국 근처)에서 따온 말로 보인다. 광고에서는 분양 지역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 삼청공원의 인접지대. 지대가 높아 공기가 신선하고 남향이며 32곳의 고적명승이 있다. 2. 교통이 매우 편리. 자동차 도로가 남북을 관통하고 북악 케이블 기차의 기점이다. 안국동 전차 종점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다. 삼청동 하천 매립 공사가 곧 끝나 버스가 곧 개통된다. 3. 학교 지대의 중심. 초중등전문학교 통학에 편할 뿐 아니라 유치원을 신설하여 부근 교육기관을 완비한다. 4. 막대한 이익. 북촌에 한 곳뿐인 본 택지가격이 올해 봄 안에 평당 10원 이상 상승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학군, 교통, 환경, 투자 가치를 내세우는 요즘의 아파트 홍보 광고와도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주택단지는 1936년 음력 3월에 택지를 조성하고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입주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개발업자 정희철은 신문광고 말고도 홍보전단을 배포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로 40㎝, 세로 27㎝로 A4 용지보다 약간 큰 홍보물이 2010년 발견됐다. 홍보 내용은 신문 광고에 들어 있는 것과 동일하다. 경성역(서울역)이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경부·경의·경원선 등 기차 시간표를 게재한 것은 특이하다.
  • [근대광고 엿보기] 최초의 분양광고와 정세권

    [근대광고 엿보기] 최초의 분양광고와 정세권

    “재동 54 신축 와가(瓦家) 10간(間) 내외 10동” 1929년 2월 7일자 조선일보에 ‘방매가’(放賣家)라는 제목 아래 실린 광고의 일부분이다. 서울 재동은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는 곳과 그 주변 동네로 지금도 행정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재동 54번지의 위치는 번지수가 바뀌지 않았다면 북촌문화센터 바로 서쪽이다. 그곳에 기와집 10채를 지어 매각(방매)한다는 뜻이다. 광고에는 관철동, 낙원동, 관훈동, 소격동, 봉익동에 지은 기와집들도 판다고 돼 있다. 이 광고를 최초의 주택 분양광고라 봐도 좋을 듯하다. 광고 말미에 분양 업체는 ‘건양사’로 표기돼 있는데 요즘의 부동산 개발 업체다. 1902년 4월 25일자와 그 이후 날짜의 황성신문에서도 ‘방매가’ 광고를 찾을 수 있지만 기존 주택을 판다는 광고다. 부동산 매매 광고인 셈이다. 건양사를 세운 정세권(1888~1965)은 광고에 나오는 북촌 일대와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단지를 건설한 일제강점기의 ‘건축왕’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개발한 동네는 경성의 뉴타운이라고 할 만하다. 오늘날 북촌 한옥마을이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된 것은 정세권의 덕이다. 건양사는 토지 매입과 기획, 설계, 시공, 금융까지 부동산 개발의 모든 과정을 진행했다. 정세권이 지은 집은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고 작은 마당이 있는 아담한 한옥으로 부엌 바닥에 타일을 깔고 석탄 아궁이를 설치한 개량식이었다. 그는 “조선 집이어야 조선 사람이 살기 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춘원 이광수의 세검정 집과 배재학당 대강당도 그가 지었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3살에 고성군 하이면 면장에 임명됐다. 그는 면장을 하면서 방풍림 조성 사업, ‘대동계’라는 저축계 발족, 잠업조합연습소 설립 등의 치적을 남겼고 특히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는 주택 개량에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후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기 싫어 면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건양사를 설립했다. 그의 항일 의지는 그 후의 행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동산 개발로 돈을 번 정세권은 민족자본가로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신간회에 참여했다. 특히 이극로와의 인연으로 서울 화동의 2층 건물과 대지를 조선어학회에 회관으로 쓰라고 기증하고 운영 자금을 대주는 등 조선어학회 활동도 지원했다. 정세권은 이런 이유로 한글학자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돼 보름 동안 고문을 당했다. 일제는 그것도 모자라 건축 면허를 박탈하고 뚝섬에 있는 그의 땅 3만 5000평을 빼앗았다. 정부는 1990년 정세권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고관대작 집이었다는데… 옹기종기 한옥은 ‘조선 건축왕’ 항일의 상징

    고관대작 집이었다는데… 옹기종기 한옥은 ‘조선 건축왕’ 항일의 상징

    호기심이 없으면 질문이 없고, 질문이 없으면 새로운 발견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기 위한 시도는 새로운 앎과 그걸 통한 성찰의 필수 조건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0회 ‘삼청동’ 편이 지난 1일 삼청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번 투어는 잘 알려진 곳을 대상으로 했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그래서 더 놀라운 발견이 가능한 곳, 굳이 서울 사람이 아니어도 모르는 이 없는 서울 북촌이 이번 대상지였다. 맹사성 대감의 집터를 포함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한옥 등 조선 시대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전통문화를 이어 왔다고 알려진 서울 북촌. 과연 북촌은 그렇기만 한 곳일까.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한 이번 투어는 이동은 최소화하되 공간의 맥락은 조금 더 깊게 살펴볼 수 있도록 코스를 잡았다. 시작점은 북촌의 터줏대감 격인 정독도서관. 유심히 살펴보면 현관에 한자로 ‘正讀圖書館’(정독도서관)이라고 걸려 있는 글씨체가 어딘가 낯익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놀랍게도 서울도시계획의 대전환과 관련 있는 흔적이다. 1968년은 그야말로 남북 갈등의 최정점을 찍던 해였다. 그해 1월 21일 김신조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초입까지 잠입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로 이틀 뒤엔 원산 앞바다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와 북한군 간에 교전이 벌어진 끝에 1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83명의 승조원 모두가 납치돼 끌려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이 그해 말에는 울진과 삼척에 100명이 훌쩍 넘는 무장 공비가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 버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남북 충돌이 전방만이 아니라 청와대 앞에서, 그리고 경북 지역에서까지, 심지어 미군과의 사이에서도 벌어진 것이었다.●美 남북 충돌에 무관심… 자력갱생 계기로 문제는 미국의 반응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을 위해 연인원 30만명이 넘는 장병을 베트남에 파병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던 이 극한 대결의 순간에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었는데 주요 쟁점이 베트남전에서 가능하면 빨리 발을 빼는 것이었다. 베트남전 조기 종식을 내걸고 당선된 리처드 닉슨 입장에서는 유권자들의 의지를 거슬러 섣불리 확전을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을 비롯해 한국민들은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1968년이면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15년 정도밖에 안 됐을 때다. 서울 시민의 뇌리에 각인돼 있던 전쟁의 기억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도강할 수단이 만만치 않다 보니 피난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던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1968년에 연이어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시민사회에 분노와 함께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시작한 것은 행여 있을지 모를 전쟁과 피난에 대비해 서울 인구의 상당수를 미리 한강 이남으로 분산시키는 것. 당시 영동지구라 불렀던 지금의 강남 개발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다만 문제는 누구도 강남 이주를 원치 않았던 데 있었다. 개발 도상에 있던 나라의 특성상 중산층을 중심으로 자녀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를 염원하고 있었기에 명문고가 있는 강북을 떠나 강남으로 이주하기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나선 게 박 전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와 서울시였다. 당시 최고의 명문고로 이름 높았던 경기고 관계자들을 설득해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 가는 데 동의를 얻어 냈고, 이후 휘문고와 서울고를 비롯한 명문고들이 강남 일대로 이전해 가게 된다. 그 뒤 벌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 한국 사회가 걸어온 남북 대결의 역사를 소리 없이 웅변하는 증거물인 정독도서관이 바로 옛 경기고의 본관 건물이고, 그런 공간이기에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남은 것이다. 서울의 경우 평균적으로 지가가 높은 강남과 목동 등이 기본적으로는 학군의 문제와 직결돼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에서도 자유롭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1968년 김신조 트라우마로 생긴 연막탄 지주 정독도서관에서 발걸음을 조금 옮기면 또 다른 흔적도 만날 수 있다. 삼청로를 건너 팔판길 16과 30, 31을 연이어 지나다 보면 전봇대처럼 보이지만 전봇대는 아닌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북촌과 청운동 등 청와대 주변 골목 사이에 있는 연막탄 지주들이다. 대통령 경호와 청와대 경비를 위해 낮에는 연막탄 발사대 지주로, 밤에는 조명탄 발사대 지주로 이용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물들이다. 총 68개의 연막탄 지주가 확인됐는데 그중 북촌 일대에 산재한 12개의 지주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됐다. 물론 1968년의 트라우마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혈맹이라고 늘 혈맹일 수 없음을 인식한 한국은 스스로 힘으로 일어서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제2, 제3사관학교를 개교했고, 후방에서의 군사적인 대응을 위해 제대한 군인들에게 지역 방위를 맡기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반상회를 조직했으며, 교련이란 이름의 교과목을 만들어 학생들도 전쟁에 대비하게 했다. 평상시에는 차량 소통의 목적으로 쓰지만, 유사시엔 각각 십수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공호 성격의 남산 1, 2호 터널을 팠고, 북쪽 주요 교통로와 하천에 대전차장애물을 설치했으며,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직접 신무기 개발에 나섰다. 남북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언제 벌어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준비한 응전의 증거물들이 북촌 한옥마을 사이사이에 박혀 있을 줄이야.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려 할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발견들이다. 그러고 보면 북촌의 한옥도 자세히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몇 안 되는 한옥을 제외한 한옥들이 너무나 비좁아 보이지는 않는가. 북촌로5나길 84 정도의 위치에 서서 한옥 지붕들을 조망하거나 한옥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 보면 그야말로 다닥다닥 옹기종기 밀집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관대작의 주거지로 이름 높았던 북촌이라고 들었는데 그들이 살았던 한옥이 이렇게 작다? 사실 북촌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한옥 대부분은 근대의 유산들이다. 북촌로11가길 41 일대를 비롯해 계동길 100-8 일대의 한옥 밀집 지역이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돼 있는데, 이들 역시 일제강점기였던 1930~40년대의 한옥들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한옥이라고 해서 중요성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의 멋스러움과 근대적인 재료와 기능이 결합해 탄생한 새로운 양식으로서 의미가 있다. 나아가 한옥이 이렇게 작아진 연유를 알게 되면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애초 대형 한옥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북촌에 이렇게 작은 한옥들이 많아진 것은 정세권(1888~1965)이라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내린 고민의 결과다. 그는 단순히 사업 수완만 좋았던 게 아니라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고 조선어학회에 건물을 지어 기부하는 등 민족정신도 지닌 인물이었다. 그에게 걱정은 대대로 조선인들의 공간이었던 북촌에까지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확장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거대 한옥 부지를 사들여 필지를 쪼갠 뒤 상대적으로 빈약한 조선인의 경제력으로도 살 수 있는 소형 한옥을 지어 파는 것이었다. 그 노력의 흔적이 북촌 일대를 포함해 익선동과 성북동, 창신동, 행당동, 왕십리 등 서울 전역에 펼쳐져 있는 근대식 한옥들이다.●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헌법재판소 탄생 이번 투어의 종착점은 대통령 탄핵 사건을 거친 뒤 한국인이라면 그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을 헌법재판소였다. 과연 지극히 현대적인 건물이자 기관인 헌재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은 광복 이래 삼권 분립을 한다고는 했으나 늘 대통령에 의한 독재가 횡행했던 게 사실이다.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늘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힘이 쏠렸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독재 정권에 힘없이 협조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인권 신장과 개인의 자유 증진을 위한 민주화운동이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의 결과 결국 1987년 6·10민주항쟁을 통해 쟁취해 낸 게 지금의 헌법이다. 또 그 헌법을 토대로 법치주의를 실현해 나가며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을 최종적으로 견제하고 심판하기 위한 기구로서 출범시킨 게 헌재였다. 광복 후 남북 분단이라는 뜻하지 않은 상황이 잉태한 부조리들 속에서 각종 모순을 극복하고자 쉼 없이 달려온 지난 70여년…. 보통 역사 답사를 위해 헌재를 찾을 때면 재동 백송에 시선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오늘과 내일의 민주주의와 관련해 헌재가 갖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북촌 투어의 마지막 방문지로 삼을 만하지 않을까. 일상에 매몰되면 내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보이지 않는다. 또 낯익은 것을 낯익게만 대하면 그 어떤 새로운 지식과 성찰도 불가능하다. 휴가철이라고 해서 꼭 멀리 떠날 게 아니라 내게 익숙했던 공간을 낯선 시각으로 보려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동안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고민과 숙고의 순간을 맞이한다면 그만큼 훌륭한 여행도 없을 듯싶다. 글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1회 서울의 영화(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출발 일시: 8월 8일 오전 10시 마로니에공원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구보씨의 경성 한바퀴… 소외된 인생들의 도회 항구속으로

    구보씨의 경성 한바퀴… 소외된 인생들의 도회 항구속으로

    소설가 박태원(호 구보, 1909~1986)은 1934년 8~9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26세의 주인공 구보가 하루 동안 경성 중심부 곳곳을 배회하며 보고 겪은 일들을 묘사한 중편 소설이다. 작가가 곧 작품 속 주인공이 되어 일제강점기 서울의 모습, 그리고 식민지 지식인의 감성을 그린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절친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은 ‘하융’이란 필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박태원의 1934년 여름, 경성 주인공 구보는 경성의 명문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을 갔다 귀국했으나 일정한 직업 없이 도시를 떠도는 룸펜 지식인이다. 유학 시절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귀국 후 아직 미혼으로 모친의 속을 썩이는 노총각이다. -당시 혼인 연령은 남자 평균 21세, 여자 17세였다. 구보의 집은 다옥정(현 중구 다동)에 있었으며, 어느 여름날 약속도 목적지도 없이 오전에 집을 나서 한밤중 귀가로 소설은 끝난다. 그 사이에 구보가 쏘다닌 경성부 내 주요 지점들을 당시 이름으로 열거해 본다. 화신상회 네거리, 경성운동장, 조선은행, 경성부청, 덕수궁 대한문, 경성역, 조선호텔, 황금정 등. 이 가운데 대한문은 위치가 변한 채로,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부청(서울시청 서울도서관), 경성역(옛 서울역사) 건물이 남아 소설을 기억시킨다.1930년대 서울은 거대 근대도시로 변화 중이었다. 1920년대 30만명이었던 인구가 1935년 65만명으로 늘어 일본에서도 7번째 규모가 되었다.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청사를, 덕수궁 앞에 경성부청사를 지어 식민도시의 통치 중심을 만들었다.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과 조선저축은행 본점(옛 제일은행 본점)이 1935년에 완공되니, 구보는 그 공사 중인 현장을 보았을 것이다. 구보가 즐겨 탔던 전차는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도입했으며 총 13개 노선을 운행했다. 1934년 시내에 전화 180개선을 증설하는데 1300여명이 신청했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인 인구가 28%로 일본 자본의 진출이 급속히 늘었는데 주로 소비 유흥시설에 집중되었다.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관)과 조지야백화점(현 롯데영플라자 터) 등 5대 백화점이 식민지 수도의 소비를 부추겼다. 일본인들은 청계천 남쪽에 거주지를 꾸렸는데 다방 카페 요정 등 유흥시설도 조선인은 북쪽, 일본인은 남쪽을 장악하게 되었다. 김두한의 전설과 같이, 종로파 조선 건달들이 혼마치(本町, 현 명동)의 일본 야쿠자들과 대립했던 지리적 사정이었다. 화신백화점의 유통왕 박흥식, 전국 금광을 개발한 광산왕 최창학, 그리고 도시형 한옥 붐을 일으킨 건축왕 정세권 등 조선인 자본가도 등장했다.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의 시대였다. 그러나 구보에게 경성은 소비 지향적이고 저급한 유흥에 휩싸인 속물의 도시였다. 안주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고독과 상실의 도시였다. 왜 그런지 박태원도 몰랐을 것이다. 1930년대 초 경성의 번영이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세계 경제대공황을 겪은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등 침략전쟁으로 경제부흥을 꾀했다. 일시적 호황에 중독되어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소설 발표 불과 3년 후 연재했던 신문은 강제 폐간되었고 일제는 전시 체제에 돌입한다. 구보가 어렴풋하게 감지한 이유 모를 불안의 실체였다.●구보가 예외적으로 오래 머문 경성역 3등대합실 구보는 중요 건축물들의 외관만 바라보며 스쳐 지나갔다. 그의 관심은 건축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고현학(考現學, 현재를 다루는 고고학)적 풍경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읽고 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작업이다. 예외적으로 경성역 내부에 들어가 오랜 시간 머무르게 된다. 이곳의 3등대합실은 익명의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경성역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하여야 한다.” 1899년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 철도는 노량진과 인천 구간이었다. 이듬해 서대문역까지 연장하면서 남대문 간이역을 세우는데, 바로 경성역의 전신이다. 현재의 구 서울역사는 1925년에 완공된다. 그 크기와 완성도가 동양 1,2위를 다투었다 할 정도로 수준 높은 건축물이다. 대륙 침략의 야심을 품은 일제는 극동 지역 철도망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성역은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의 기착점으로 각기 일본, 중국, 러시아로 통하는 중심 기지였다.도쿄대 교수인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자로 알려졌는데, 일본 건축계의 대부 다쓰노 긴고의 수제자였다. 긴고는 도쿄역사를 설계했고 이미 서울에 조선은행 본점(1912)을 설계한 실력자였다. 경성역의 전체 구성은 르네상스식이지만 중앙 돔은 비잔틴식, 양 옆 삼각형 박공벽은 신고전주의풍이다. 또한 붉은 벽돌(타일)과 화강암을 섞은 외벽 장식은 이미 암스테르담역과 도쿄역에서 사용했던 형식이다. 굳이 말하자면 여러 양식을 혼합한 절충식이라 할 수 있다. 인상적인 요소는 중앙 정문 위에 설치된 아치 창이다. 큰 반원 아치를 두 개의 기둥으로 나눈 디오크레티안 창이라 하는데, 고전주의 건축의 대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즐겨 써서 팔라디오 아치라고도 부른다. 경성역사의 건축적 모델은 스위스 루체른의 옛 역사(1896)라고 한다. 지난 세기에 불타 없어지고 정면의 팔라디안 아치만 남았지만, 경성역과 쌍둥이로 불릴 정도로 유사했다. 내부 공간은 제국의 계급질서에 따라 구성했다. 크고 높은 중앙홀이 있고, 좌우로 3등대합실과 1,2등대합실이 나뉘어 자리했다. 1,2등대합실 옆에는 여성 고객을 위한 부인대합실, 그리고 귀빈대기실이 있었다. 이 구역들은 출입이 통제되고 역장이 직접 접대하게 배치되었다. 반면 3등대합실은 중앙홀뿐 아니라 외부 광장에서도 자유롭게 드나들게 개방되었다. 구보 역시 광장에서 바로 들어와 대기 중인 익명의 승객들을 읽어냈다. 그러다 동창을 만나 장소를 이동해 차를 마신다. 1,2등대합실 안에 있던 티룸으로 추측되는데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이다. 2층에는 조선 최초의 대형양식당이라는 ‘더 그릴’이 있었다. 40여명의 국내외 셰프와 웨이터가 은그릇에 ‘경양식’을 담아 서빙했던 이 식당은 근대 경성, 국제 경성의 상징공간이 되었다.●식민지 도시와 타자의 건축 현존하는 조선은행 본점은 르네상스식 몸체에 바로크 돔을 얹은 견고한 건축이다. 골조는 철골과 콘크리트 구조이며 외벽에 육중한 화강석을 붙여 발권은행의 권위를 과시했다. 좌우 대칭의 완벽한 비례, 5개의 탑이 만드는 장대함, 고대 신전용 기둥 등은 식민지 경제 통치의 만신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들이다. 여기서 현재의 소공로를 지나면 곧 경성부청사를 만나게 된다. 조선총독부 건축과에서 설계 공사한 건물로 르네상스식 구성에 장식이 없는 근대적 외벽을 가진 건물이다. 부청사 앞에는 교통광장(로터리)을 만들었고, 그 옆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 있었다. 구보는 소설에서 경성부청사를 ‘정력가형 육체를 가진 위압적인 장년’으로, 덕수궁은 ‘자신을 외면하는 영락한 옛 동창’으로 은유했다.구보가 접한 경성의 근대건축들은 하나같이 서구 고전주의 양식이다. 세부적 형태가 르네상스식이던 바로크식이던 그리스식이던 크게 보면 그렇다. 대칭과 비례, 법칙과 질서를 강조했던 건축양식이다. 19세기 유럽을 풍미하고 서구 열강의 제국화를 통해 전 세계에 유포된 제국주의 양식이다. 후발 제국주의 일본은 구라파 따라잡기의 끝판으로 고전주의 건축들을 식민지 수도 곳곳에 세웠다. 사라진 조선총독부가 대표적인 건축이다. 경성의 근대화란 고전주의화, 제국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조선적 전통이란 덕수궁에 대한 묘사대로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것이었다. 현 한국관광공사 사옥 자리에 있던 박태원의 생가는 중문과 대문이 있는 전통 한옥이었다. 대문을 나서 청계천을 지나면 곧 화신백화점 등 일본풍 유럽풍 건축이 즐비한 시가지다. 조선적인 것은 과거고 일본적인 유럽풍은 현재였다. 상반된 시공간이 공존하는 경성은 구보를 유혹하는 동시에 소외시켰다. 일제 강점시대에 저항(독립투쟁)과 순응(친일매판)의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소시민적 욕망과 소외의 회색지대에서 살았다. 구보는 그런 분열된 삶 속에서 타자화된 도시와 건축을 떠돌았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지붕 밑 익선동 한옥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시간을 잊고 멈춰 있다

    지붕 밑 익선동 한옥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시간을 잊고 멈춰 있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5회 서울의 영화1(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 밑)’ 편이 지난 25일 종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지하철 종로3가역 14번 출구 서울극장 앞에 모인 참가자 40여명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울극장을 출발, 피맛길을 거쳐 한의원 가업을 7대째 잇는 춘원당 한방박물관을 방문했다. 이어진 유진식당~허리우드극장~낙원떡집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미래유산 코스다. 운현궁을 지나 떡박물관 10층 ‘지붕 위’에 올라 ‘지붕 밑’ 익선동 한옥 기와 지붕을 내려다봤다. 익선동 골목길을 돌고 돌아 호텔로 변한 ‘서울 3대 요정’ 오진암 터를 만났다. 인파로 넘치는 익선동 골목에는 1920~30년대 경성시절 모던보이, 모던걸 차림의 청춘들이 활보했다. 해설을 맡은 황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영화 속 서울거리를 열성적으로 재현해줬다. 투어가 끝난 뒤 설문에 응한 참가자들은 “서울에 살면서도 모르던 것을 알게 돼 보람 있었다”, “무심히 지나쳤던 종로거리에 이런 사연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등의 소감을 남겼다.●1000평에 건물 90채… 쪽방 780개에 740명 살기도 1960년대 서울은 영화도시였다. 영화 속 서울은 산업화시대 도시공간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영화는 조선시대 한양이나, 일제강점기 경성, 한국전쟁의 폐허가 아닌 근대 산업화 시기 서울사람들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산업화가 곧 도시화였으며, 영화는 문명세계의 첨병이었다. 주인공들은 한옥과 양옥, 한의학과 양의학이 공생하는 도시의 지붕 밑을 어슬렁거렸다. 좁은 골목을 오가는 카메라의 뷰파인더에는 새것에 대한 찬미와 낙오된 부적응자의 절망이 담겼다. 종로3가에서 을지로를 지나 충무로로 이어지는 길은 1980년대까지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 스카라, 국도극장, 명보극장, 대한극장 등이 밀집된 한국 영화산업의 메카였다. 이 시기 영화는 도시와 군중을 관찰하는 만보객(漫步客)의 역할을 해냈다. 영화를 통한 서울읽기가 가능한 까닭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옥 기와, 탑골공원, 시내 교차로, 도심의 높은 빌딩 등 서울의 상징물이 등장한다. 특히 한옥과 양옥이 마주 보는 골목 풍경은 전통 생활 방식과 서구적 과학 문명이 어우러지고 충돌하는 현장을 예고한다. “서울의 지붕 위에 아침 해가 솟으면 오늘도 새로운 시대와 낡은 시대가 어깨를 겨누고 사는 이 골목 안에 서울의 희한한 꿈과 사랑과 웃음과 눈물이 살아서 숨결 짓는다”는 내레이션은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다. 1961년에 개봉한 영화 ‘서울의 지붕 밑’은 1956년 작 ‘서울의 휴일’이 ‘로마의 휴일’(1955년 작)의 제목을 모방한 것처럼 ‘파리의 지붕 밑’(1930년 작)에서 제목을 딴 복제품처럼 보인다. 두 작품 모두 선망의 도시 로마와 파리의 낭만을 서울에다 옮겨놓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제목과 달리 조흔파 원작 ‘골목 안 사람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초호화 출연진을 자랑한다. ‘마부’의 김승호와 성격배우 허장강, 합죽이 김희갑이 동고동락하는 골목 안 ‘세 영감’으로 출연했다. 김승호의 부인은 한은진, 딸은 최은희, 딸을 사랑하는 최 박사는 김진규, 아들은 신영균, 아들과 결혼하는 점례는 도금봉, 점례의 어머니 황정순, 골목 안 전파사 주인 구봉서, 떠오르는 ‘신성’ 신성일까지 깜짝 출연했다. 이형표 감독은 해박한 영화이론과 영어 실력 그리고 다큐멘터리로 다져진 실력파였다. 1961년 신상옥 감독 연출 ‘성춘향’의 촬영감독을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 과정은 영화에 어떻게 투영됐을까. 영화는 서울이라는 지정학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간 군상들의 삶을 대폿집, 실비집, 선술집에서 보여준다. 또 주인공들이 식당에 들어갔을 때 메뉴에는 돼지갈비 50환, 빈대떡 100환, 냄비우동 100환이라고 적혀 있다. 만둣국, 순댓국, 떡국과 함께 벽에 ‘양조장 술’이라는 광고 문안도 붙어 있었다. 초동교회 옆 돈의동 쪽방촌은 1960년대 영화의 세트장처럼 시간의 흐름을 잊고 멈춰 있다. 10여년 전 자료에 1000평 부지에 골목, 교회, 가게를 포함한 90여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니 집 한 채가 10평이 안 된다. 방 1개를 나눠서 1평짜리 방을 여러 개 만들었는데 쪽방 780개에 740여명이 거주한 적도 있다고 한다. 본래 이곳은 땔감과 숯을 팔던 시탄(柴炭)시장이었다가 1930년대 폐쇄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종삼’이라고 불리는 윤락가였다.●익선동 삼국·조선의 역사 지층 간직… 문화도 다층적 1968년 서울시가 ‘나비작전’을 펼쳐 사창가를 철폐하기 전까지 종로 3, 4가를 중심으로 하는 봉익동, 훈정동 일대는 2000여명에 이르는 윤락녀와 150여명의 포주, 200여명의 삐끼(호객꾼)들의 터전이었다. 당시 종삼에는 15~20평 정도의 단층 짜리 낡은 한옥이 300여채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지금은 금·은 세공과 판매 점포 300여개에서 일하는 사람만 1500여명에 이르는 서울 최대의 금·은 세공, 판매 단지다. 이날 투어단이 찾은 익선동은 역사적 다층성, 사회적 다층성, 문화적 다층성이 혼재된 공간이다. 서울은 다양한 층위(層位)를 가진 역사도시이고, 오래된 도시는 다층적이기 마련이다. 기원전의 도시 서울에는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역사지층이 드문드문하고, 조선의 지층과 유구, 유적이 고스란히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지층과 1960년대 이후 산업화시대 때 생성된 지층 또한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사회적 다층성과 문화적 다층성, 생태적 다층성도 서울이라는 도시를 기억하는 다층성의 요소이다. 한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굽이치며 정겨운 골목을 형성하고 있는 익선동 중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익선동은 정확하게 ‘익선동 166번지’ 누동궁 터이다. 조선 제25대 철종이 태어나 14살 때 강화도로 쫓겨 가기 전까지 산 곳이다. 등극 이후에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짓고, 형 영평군이 살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지어준 집이다. 2500여평에 이르는 이 궁의 익랑(대문 좌우에 붙은 행랑)이 특이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익랑골’, ‘익랑동’, ‘익동’이라고 불렀다. 익선동이라는 지명은 동네 이름인 익동의 ‘익’에 이 지역을 관할하는 정선방의 ‘선’을 넣어서 만든 지명이다. 바로 옆 낙원동 58번지 종로세무서는 옛 대빈궁 터였다. 경종의 생모 장희빈의 사당이 칠궁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경성측후소와 요정 천향원을 거쳐 원불교 종로교당과 종로세무서로 변신했다.●익선동 한옥 정세권 작품… 서울 最古 100년 한옥마을 누동궁 터는 영평군의 4대손으로 일제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이해승이 소유하다가 한국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 정세권에게 팔렸다. 정세권은 오늘의 북촌과 서촌, 창신동, 왕십리, 충정로, 휘경동에 남아 있는 도시형 한옥을 지은 사람이다. 익선동에는 1883년부터 3개월간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지내면서 종로의 도로를 점령하고 있던 가가(假家)를 철거하는 등 서울 개조를 꾀한 개화파 박영효의 영향이 남아 있다. 박영효는 선 도로확보 후 필지 분할, 일정한 폭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계획했으며, 대지경계선에 맞춰진 주택배치와 방 2칸, 부엌 1칸, 마루 1칸을 기본으로 행랑채가 덧붙여진 개량 집짓기를 추진했다. 익선동 한옥은 북촌보다 먼저 지어졌다. 100년을 버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이다. 30평 미만의 필지들 중 53.8%가 정세권 소유의 필지였고, 여기에 지은 한옥 64채 중 정세권이 지은 한옥이 절반이 넘는다. 정세권이 없었더라면 서울은 한옥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한 볼썽사나운 도시가 됐을지도 모른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6회 서울의 소설1(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 ■일시 및 집결장소: 6월 1일(토) 오전 10시 6호선 광흥창역 1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북촌 한옥지구 만든 건축왕, 그 흔적 더듬다

    북촌 한옥지구 만든 건축왕, 그 흔적 더듬다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를 지켜낸 기농(基農) 정세권(1888~1965) 선생을 기리는 전시회 ‘북촌, 민족문화 방파제- 정세권과 조선집’이 9일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청에서 개최됐다. 정세권 선생은 일제에 맞서 조선집(근대 한옥)과 한글을 지켜낸 ‘조선의 건축왕’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다.전시는 정세권 선생의 활동 연대순으로 ‘경성을 조선집으로 지켜내자’, ‘조선 사람은 조선 물산으로’, ‘북촌은 한글이다’, ‘조선집, 영화를 통해 살아나다’ 4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경성을 조선집으로 지켜내자’에선 서울 전역에 ‘ㅅ’자 방파제 모양으로 한옥집단지구를 조성한 건축가이자 디벨로퍼로서의 정세권을 다룬다. ‘조선 사람은 조선 물산으로’에선 조선물산장려회를 통해 상공업 부흥과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애쓴 정세권을, ‘북촌은 한글이다’에선 조선어학회를 지원하고, 이 때문에 일제에 체포되고 재산까지 몰수당한 ‘민족운동가’ 정세권을 조명한다. ‘조선집, 영화를 통해 살아나다’에선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제작된 흑백영화 중 전통한옥과 조선집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미몽’(1936), ‘반도의 봄’(194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등 10편의 영화를 통해 조선집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하나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다음달 10일까지 이어진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정세권 선생은 종로의 역사문화를 잘 보존해 줬을뿐더러 도시 사람들이 살기 편리한 주택을 보급한 ‘혁신적인 디벨로퍼’였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운동가로서의 면모까지 집중 조명해 더욱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종로 5가 피맛길에서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종로 5가 피맛길에서

    올 1월 20일 종로 5가 피맛길에서 방화 사건이 났다. 이 골목에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해서 피해가 커졌다는 뉴스가 귀에 꽂혔다. 길이 얼마나 좁은지 궁금해 직접 현장으로 갔다. 어른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딪히며 지날 정도의 좁은 골목이었다. 아직 탄내가 가시지 않았다.방화된 여관 오른편에는 단층 건물 두 채가 있었다. 여관 건물 오른쪽의 식당은 “옆집 화재 탓에 영업중단 상태입니다. 빨리 복구해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안내문이, 이 식당 옆 건물의 공사 가림막에는 “OO가 재건축으로 인해 새로운 곳에서 찾아뵙겠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 골목은 이제 소방차가 다닐 정도로 도로 폭이 넓혀지고, 재개발될 것이다. 광화문과 종각 사이의 피맛길도 딱 이 정도 폭이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피맛길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빈대떡집과 해장국집이 있었다. 종각 사거리 종로타워 뒤편에는 20여년 전부터 드나들던 선술집도 있었다. 2000년대 초 광화문과 종각 사이에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고, 빈대떡집은 종각사거리로 옮겨 갔다. 종로타워 뒤편의 피맛길은 지난 1월의 종로 5가와 마찬가지로 2013년에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다. 2013년 방화자는 “불태워서 깨끗이 만들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 후 선술집은 을지로입구 쪽으로 옮겨갔고 공평동 일대는 재개발 중이다. 공평동의 배후에는 인사동이 있기 때문에 광화문과 종각 사이 구간처럼 그 모습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종로 5가의 피맛길과 같은 모습은 더이상 이곳에서 찾을 수 없다. 피맛길은 조선 시대에 형성됐지만 오늘날 조선 시대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가장 많이 남은 옛 건물은, 정세권(1888~1965)과 같은 식민지 시대 ‘조선인 집장사’ 또는 한반도 최초의 개발자(디벨로퍼)가 지은 개량 한옥이다. 조선인 디벨로퍼들은 일본인들이 청계천 북쪽의 조선인 구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 일대에 보급형 주택 단지를 건설했다. 그러므로 비록 피맛길이라는 공간 자체는 조선 시대에 형성됐지만, 피맛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층은 조선 시대가 아닌 식민지 시대이다. 피맛길 아니 서울이라는 공간과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생각할 때 식민지 시대를 빼놓는다면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서울에 약간 남아 있는 조선의 왕궁과 무덤, 100칸 한옥은 피맛골을 오갔을 내 평민 조상과는 관계가 없다. 그나마 최근에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신축’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식민지 시대에 피맛길을 가득 채웠던 서민들의 개량 한옥들은, 양반이 살던 100칸 한옥처럼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치부돼 그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하고 파괴되고 있다. 2018년 1월 종로 5가 피맛길에서 나는, 한국 역사의 소중한 부분이 무관심과 오해 속에 또다시 조용히 파괴돼 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 겨울, 종로5가 피마길에서

    겨울, 종로5가 피마길에서

    지난 1월 26일 저녁, 나는 종로 5가 북쪽의 이른바 피마길이라 불리는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피마길이란 조선 시대에 종로통을 지나던 평민들이 높은 사람들의 행차에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이용하던 뒷길이다. 피마길이라고 하면 흔히들 광화문에서 종각을 거쳐 탑골 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종로통 남북 양쪽으로 광화문부터 동대문 언저리까지 좁고 길게 이어진다. 내가 이곳을 찾아가기 일주일 전인 1월 20일, 종로 5가 피마길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한 뉴스를 듣던 중, 이 골목에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해서 피해가 커졌다는 말이 귀에 꽂혔다. 조선 시대에 형성된 길이다보니 현재의 소방차 폭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길이 얼마나 좁기에 소방차가 들어가지 못했는지 궁금해진 나는 직접 현장으로 갔다. 그 곳은 정말로 어른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딛히며 지날 정도의 좁은 골목이었다. 화재가 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골목에서는 아직 탄내가 가시지 않았다. 골목이 좁다보니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서, 냄새가 아직도 다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방화된 여관 오른편에는 두 개의 단층 건물이 서 있었다. 여관 건물 오른쪽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식당은 현재도 영업을 하는 모양이었지만,“옆집 화재로 인하여 영업중단 상태입니다. 빨리 복구해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안내문이 입구에 붙어 있었다. 이 식당의 오른쪽 건물에는 공사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OO가 재건축으로 인해 새로운 곳에서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라는 안내문이 가림막 앞에 붙어 있었다. 종로 5가 피마길의 건물 하나는 화재로 사라졌고, 또 하나는 재건축에 들어갔고, 두 건물 사이에 낀 식당은 화재 때문에 휴업중이었다. 이 세 채의 건물을 바라보며, 이번 화재를 계기로 이 골목의 모습은 많이 바뀌리라는 생각을 했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재건축에 들어간 건물이 있었고, 이번 화재를 계기로 소방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도로 폭이 넓혀질 터이다. 그리하여, 얼마 남아있지 않은 피마골의 또 한 구역이 서울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종로를 드나들기 시작한 20여년 전에는 광화문과 종각 사이의 피마길도 딱 이 정도 폭이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피마길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아버지가 직장에 다니던 시절부터 영업하던 빈대떡집과 해장국집이 있었다. 종각 사거리 종로타워 뒤편에는,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20여년 전부터 드나들던 선술집도 있었다. 2000년대 초, 광화문과 종각 사이에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고, 이곳에 있던 빈대떡집은 종각사거리로 옮겨갔다. 종로타워 뒤편의 피마길은, 2018년 1월의 종로 5가와 마찬가지로 2013년에 방화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2013년의 방화자는 “이곳을 불태워서 깨끗이 만들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 후, 이곳에 있던 선술집은 을지로입구 쪽으로 옮겨갔고 공평동 일대는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공평동의 배후에는 인사동이 있기 때문에, 광화문과 종각 사이 구간처럼 그 모습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적어도 종로 5가의 피마길과 같은 모습은 더이상 이곳에서 찾을 수 없다. 피마길은 조선 시대에 형성되었지만, 오늘날 이곳에 조선 시대의 건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재 피마길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옛 건물은, 정세권(1888~1965)과 같은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집장사” 또는 한반도 최초의 디벨로퍼들(개발자들)이 지은 개량한옥이다. 이들 조선인 디벨로퍼들은 청계천 남쪽에 머무르던 일본인들이 청계천 북쪽의 조선인 구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 일대에 보급형 주택 단지를 건설했다. 그러므로, 비록 피마길이라는 공간 자체는 조선 시대에 형성되었지만, 피마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층은 조선 시대가 아닌 식민지 시대인 것이다. 피마길 아니 서울이라는 공간과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생각할 때, 식민지 시대를 빼놓는다면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서울에 약간 남아있는 조선의 왕궁과 무덤과 100칸 한옥은, 피마골을 오갔을 내 평민 조상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도 그나마 최근에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신축”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식민지 시대에 피마길을 가득 채웠던 서민들의 개량 한옥들은, 한국 역사상 부끄러운 시기로 인식되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졌고, 서민이 살기 위해 저렴하게 지어진 것이므로 양반이 살던 100칸 한옥처럼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치부되어, 그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하고 파괴되고 있다. 2018년 1월 종로 5가 피마길에서 나는, 한국 역사의 소중한 부분이 무관심과 오해 속에 또다시 조용히 파괴되어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20세기 한 시기의 귀중한 역사적 유산을 왜 그렇게 무심히도 파괴했는지 의아해 할 백 년 뒤의 한국 시민들을 위해 나는 이 글을 쓴다. 글 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서울답사가
  • [최준식의 거듭나기] 북촌은 한옥 마을이 아니다-풍문여고 터 유감

    [최준식의 거듭나기] 북촌은 한옥 마을이 아니다-풍문여고 터 유감

    서울 북촌이 한옥 마을이 아니라는 위의 제목은 많이 이들에게 생경할 것이다. 북촌은 한옥이 1000채 이상 보존돼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한옥 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한옥 마을이 아니다’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한옥 1000채 이상 보존됐다’는 위의 설명은 북촌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북촌은 그냥 한옥 마을이 아니라 ‘개량’ 한옥 마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촌은 1930년대에 걸출한 건축업자였던 정세권 선생이 전통 한옥을 개량해 만든 근대식 작은 한옥들로 구성된 마을이라는 것이다. 당시 정세권은 북촌 쪽으로 북상하는 일본인들을 막고 한국인들에게 저렴하고 좋은 한옥을 제공하기 위해 이 지역에 개량 한옥을 대거 공급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현재처럼 그가 만든 작은 한옥들이 즐비하게 된다. 그런데 북촌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을 보면 이곳에는 조선의 고위 관리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면서 이 지역에 거대한 전통 한옥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러나 놀랍게도 북촌에 있는 고관대작의 집은 윤보선 고택밖에 없다. 진짜 양반의 집은 1930년대에 사라졌다. 이 때문에 나는 항상 이 북촌에 제대로 된 사대부 한옥이 들어섰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있는 한옥들에서는 사대부들의 한옥이 갖고 있는 유려하고 규모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조선 후기 양반이 살던 한옥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른다. 제대로 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의도는 이런 한옥들을 복원해 사람들에게 보여 주자는 것이다. 혹자는 남산 한옥 마을이 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곳은 좋은 한옥들을 그저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 마을을 만들 때 전통 마을의 구성 원리를 적용하지 않아 여기에 있는 한옥들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없다, 그래서 집들이 정체돼 있는 느낌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안국동에 있는 풍문여고를 지날 때마다 상상을 했다. 이 터가 비면 이곳에 조선 사대부들의 집을 복원해 제대로 된 조선 전통의 한옥 마을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전통 마을이 어떤 원리로 구성돼 있는지, 그곳에 집들이 어찌 배치돼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 마을은 구성 원리가 매우 훌륭하고 재현해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서울에는 제대로 된 한옥 마을이 없다. 조선을 진지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전통 마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전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의 마을을 복원하자고, 그것도 서울 시내에 복원하자고 주장해 왔다. 그렇게만 된다면 부대 효과는 대단할 것이다. 우선 서울에 쏟아져 오는 외국인들에게 보고 즐길 거리를 제공할 수 있고 한국의 품격 있는 전통문화를 제대로 소개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진정한 전통문화를 보여 줄 수 있어 교육적으로도 좋다. 나는 그 최적 자리로 풍문여고 터를 생각해 오고 있었다. 이곳에 전통 마을이 들어선다면 외국인 밀집 지역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 공예박물관이 들어선단다. 서울시가 조언을 받아 그렇게 정한 모양인데 누가 어떤 권한으로 이렇게 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조감도를 보니 전부 서양 건물로 돼 있다. 그런데 이곳은 원래 안동별궁이라는 규모 있는 궁이 있던 곳이 아니던가? 옛 사진을 보면 여고 교사 앞에 장대한 한옥이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옥들은 지금 다른 곳에 보존돼 있다.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왜 굳이 여기에 서양식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지 그 변명을 듣고 싶은데 어디에 문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 [흥미진진 견문기] ‘타임머신 백송’에 역사 묻고… 선각자 정세권 그리며 숙연

    [흥미진진 견문기] ‘타임머신 백송’에 역사 묻고… 선각자 정세권 그리며 숙연

    발걸음이 처음 닿은 곳은 헌법재판소였다. 현대식 석조 건물을 올려다보며 어떤 역사적 발자취를 볼 수 있을까 궁금증을 품고 건물을 끼고 돌아가니 작은 정원과 건물 사이로 백송 한 그루가 나왔다. 긴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당당히 서 있는 아름드리 백송에게 역사를 물었다. 그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의 현장을 이 노송이 지켜봤다고 생각하니 나무가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제중원 시절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몰려온 환자들을 받았다고 한다. 겉모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백송의 넉넉함이 더욱 아름다웠다.북촌 한옥마을로 들어섰다. 근대식 한옥마을이 들어서게 된 역사적 배경을 듣자니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정세권 선생 같은 선각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기게 됐다. 한옥을 지어 놓고 가족과 함께 옮겨 다니며 살아 보고 불편한 점을 실용적으로 개선해 나갔다는 얘기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백인제 가옥을 둘러보게 됐는데 의외로 많은 외국인들이 관람하고 있었다. 고즈넉하고 정갈한 한옥의 정취를 외국인이 더 좋아하나 보다. 가회동 31번지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 내려다보니 남산타워까지 보였다. 전경을 자랑할 만한 곳이다. 인왕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조선어학회 터를 지났다. 국어사전의 토대가 되는 조선어사전을 만들었던 중요한 건물이었다는데 지금은 표석으로만 남아 있다. 앞쪽 열린 길가에 자리 잡은 안동교회는 선교사의 개입 없이 우리 손으로 근대식으로 지은 건물이라 했다. 남녀 구분 없이 앉도록 한 좌석부터 외관까지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년을 훌쩍 넘긴 세월을 감싼 담쟁이넝쿨이 붉은 벽과 대조를 이뤄 눈길을 끌었다. 또 담장을 따라 붉은 장미 넝쿨이 이어졌다. 6월의 장미와 오늘의 더위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화창한 날씨에 점수를 주기로 했다. 낙원악기상가 옆에 정세권 선생이 지은 조선물산장려회관 옛터가 있었다. 선생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북촌이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김윤정 (책마루독서교육연구회 연구원)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본식 가옥 점령 막은 북촌 한옥… ‘서울의 징표’ 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본식 가옥 점령 막은 북촌 한옥… ‘서울의 징표’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특별시,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4회 서울사방 북촌 편이 6월의 첫 주말인 지난 2일 북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북촌의 기와집 처마 아래로 흐르는 초여름 바람이 시원한 하루였다.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예약자들이 몰려오면서 집결 장소인 안국역 2번 출구 앞이 갑자기 북적였다. 신문 기사를 보고 예약 없이 무작정 나오거나, 친구 따라 온 몇 명도 무사히 투어에 합류했다. 다만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이 동나 진행 요원들이 양보해야 했다. 정순희 해설사는 일행을 ‘북촌 신세계’로 이끌었다.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백악산 아랫동네다. 저잣거리인 종로 운종가의 배후도시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왕족과 공신, 고위관료들에게 나눠준 알짜배기 땅이다. 왕조의 심장부 북촌은 개화의 발상지다. 근대의 활시위를 당겼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가장 뜨거운 변혁의 물결이 휩쓴 역사의 무대였다. 개화의 사랑방 역할을 한 박규수의 집이 지금의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으로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의 집도 반경 200m 안에 모여 있었다. 북촌의 사대부들로부터 발화한 근대 개화사상은 기득권 세력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실패했다. 북촌의 붉은 기운은 1919년 3·1운동으로 되살아났다. 계동 중앙고보(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송진우·최남선·최린 등에 의해 싹텄다. 경운동 보성사(조계사 앞)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2만장이 이종일의 집(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전국에 배포됐다. 천도교 대표 손병희의 가회동 집과 불교계 대표 한용운의 계동 집도 지척이었다. 계동 보현빌딩(현대 사옥 맞은편) 자리는 해방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꾸려진 곳이다. 계동에 살면서 12번의 테러를 당한 여운형은 명륜동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결국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는 박규수와 홍영식의 집터이고, 압류당한 홍영식 집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들어섰다. 1993년 헌재가 들어서기 전까지 한성고등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기고등여학교, 경기여고, 창덕여고가 맥을 이었다. 근대 교육과 근대 의료의 모태였다.북촌 한옥은 ‘오래된 도시’ 서울의 징표이자 존재 가치다. 북촌의 영과 욕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씨줄과 날줄이 남긴 산물이다. 기농 정세권(1888~1965)이라는 선각자가 남긴 한옥은 현대 서울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유산이자 미래유산이다. 한옥을 조선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각종 문화재로 지정된 20여채를 제외한 모든 한옥은 1920~40년대 지어진 도시형 개량 한옥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양반가 한옥은 1870년에 지어진 안국동 윤보선가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도 1913년 준공됐다. 현존하는 서울의 기와집 1만 8000채 중 6000채 이상은 기농이 남긴 선물이다.북촌 한옥은 조선총독부를 위시한 일제 통치기구와 수탈기구, 일본식 가옥의 북촌 진입을 차단한 민간 차원의 방어선이었다. 가회동·삼청동·재동·계동·안국동·사간동·소격동·수송동·견지동·관철동·관훈동·익선동·봉익동·권농동·통의동·체부동·사직동·신문로·명륜동·창신동·이화동·신설동·왕십리·행당동·휘경동·충정로에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이 기농의 작품이다. 몰락한 왕족과 벌열(閥閱)들의 고대광실을 사들여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중산층용 개량 한옥을 지어 공급했다. 요즘 각광받는 익선동 166번지도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 한 채를 68채의 한옥으로 재개발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인 기농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의 한옥 개발과 북촌 선점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서울은 적산가옥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기와집이 없는 서울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경남 고성 출신인 기농은 북촌 한옥을 남긴 데 그치지 않고 신간회를 후원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해 조선어사전 편찬을 도왔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해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나는 정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만해 한용운도 “정세권씨가 백난 중에서 회관을 완성하고자 고군분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라고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에 치하하는 글을 보냈다.한옥은 남았지만 그는 잊혀졌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재산을 강탈당하고, 세 번이나 옥고를 치른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건국훈장 애족장 하나뿐이었다.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고, 서울의 미래를 남긴 선각자 정세권을 기리는 날은 없다. 정세권 문화상도 없고, 정세권 동상도 없다. 한편 이날 투어가 끝난 뒤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참가자들은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내세운 참신한 기획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진행과 코스, 해설 내용에도 대만족을 표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종로(종묘에서 사직까지) ●일시 : 6월 9일(토) 오전 10시~12시 ●집결장소 : 종로3가역 11번 출구 종묘광장공원 앞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사직터널 사이로… 서쪽 서울 사람들의 시간을 잇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사직터널 사이로… 서쪽 서울 사람들의 시간을 잇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회 서울사방 서대문 안과 밖 편이 지난 26일 진행됐다. 봄바람과 봄볕을 따라 걷는 5월 마지막 주 해설이 있는 주말 나들이였다. 정원 30명과 대기자 및 진행자까지 40명이 결원 없이 모두 참가해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 40개 전량이 동났다. 부부, 친구, 모녀, 동호인 등 다양한 관계와 연령의 조합이 환상적인 팀을 이뤘다.일행은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는 한세화 해설사를 따라 체부동 생활문화지원센터와 체부동 시장골목을 둘러본 뒤 사직터널로 향했다.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아파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수동과 신문로 골목을 이리저리 헤치고 나아가 옛 경희궁 궁역인 서울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서대문 안이다. 경교장이 있는 강북삼성병원부터 서대문 바깥이다.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조성하면서 서대문을 복원하지 않은 건 두고두고 아쉽다. 일제는 1915년 도시계획을 핑계 삼아 서대문을 철거한 뒤 목재값 205원 50전을 받고 팔아 버렸다. 100년이 지난 뒤에도 ‘서대문이 없는 서대문’은 여전하다. 참가자들은 4·19혁명기념도서관, 충정아파트, 미동아파트, 충정각, 손기정체육공원 등 우리 근현대사가 남긴 서대문 밖 풍경을 2시간 30분 동안 차근차근 돌았다. 독립문에서 광화문을 잇는 찻길인 사직터널로 말미암아 끊어진 서울의 서쪽 사람 길을 회복하는 여정이었다. 일행 중 답사 경험이 풍부한 몇몇은 우리가 서촌이라고 부르는 우대(웃대)에서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이 사직터널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문안길을 통해 두 장소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일깨웠다. 서촌이라는 지명의 유전(流轉)이 증명하듯 장소의 역사는 머물지 않고 쉼 없이 흐른다. 서촌의 유래는 한양을 구성하는 5촌(동촌·서촌·남촌·북촌·중촌)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서촌은 서소문과 덕수궁 주위를 이른다. 요즘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 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르는 건 잘못된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경복궁 동쪽에 있는 북촌을 동촌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동촌은 엄연히 낙산 아래 대학로 주변이다. 북촌은 북악산, 남촌은 남산 아랫동네이며 중촌은 사대문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 주변을 지칭한다. 조선의 5촌 또는 5부는 현대 서울의 25개 자치구 격이다. 굳이 서촌을 고집하겠다면 ‘인왕산 서촌’이라고 한정했으면 한다. 1929년 9월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에 실린 ‘옛날 경성 각급인의 분포 상황’이라는 글을 보면 ‘서소문 내외를 서촌이라고 하고…(중략)…서촌에는 양반이 살되 문반 중 서인이 살며…(중략)…우대에는 육조 이하의 각사에 소속된 이배(吏輩)·고직(庫直)이 산다’고 적었다. 18세기 문인 이가환이 당대 우대에 사는 경아전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모임 ‘송석원시사’의 시화첩에 붙인 서문 ‘옥계청유첩서’에서 ‘경복궁의 서쪽은 좁은 땅이다. 이 때문에 서리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함이 적다’고 묘사했다.우대라고 불리는 경복궁 서쪽과 서북쪽 누하동 근처는 궁에 소속된 대전별감, 내시가 각각 살았다는 사실도 적시돼 있다. 우대는 인왕산 아래 옥인동·누상동·사직동·효자동·창성동·통인동·신교동 등을 이른다. 17세기 말 한양의 풍속을 묘사한 정래교의 ‘임준원전’을 기준으로 보면 인왕산~경복궁 사이, 사직로~북악산 사이쯤이다. 이배·고직이란 서울의 중인 계급인 경아전의 통칭이라고 보면 된다. 이를 서리 또는 겸인이라고도 했는데 행정관청에서 실무를 맡은 말단 관리이자 양반가의 비서에 해당하는 청지기를 이른다. 양반촌 서촌과 중인촌 우대는 별개의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촌은 한양도성의 서남쪽 서소문 일대이며 지금도 행정구역상 서소문동을 이룬다. 양화진과 마포 및 서강나루에 도착한 어물과 세곡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지였기에 점차 양반촌에서 상인 거주지로 변했다.우대 중인과 서촌 상인들이 사실상 서울의 주인 노릇을 했다. 17세기 한성부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 사람 열에 일곱은 노비였다. 서울의 특성상 지방보다 노비가 많기도 했지만 조선 전체로 따져도 1200만명 중 30~40%는 노비 계층이었다. 한양 인구 20만명 중 왕족과 양반·관료 및 유생·선비는 10% 안팎이었고, 경아전·별감·서리·겸인·내시 및 역관·의관·화원·율관 등 중인 계층과 시전을 운영하는 부유한 상인 계층 그리고 서울에서 근무하는 하급 장교와 일반 군사 등 중인·평민 계층이 20~30% 정도였다. 임지를 전전하거나 낙향이 잦았던 양반과 달리 중인 및 상인이 서울 사람의 주류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인왕산 서촌’과 서대문은 별개의 동네이면서도 늘 연결됐다. 인경궁과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은 두 개의 궁이다. 인왕산 아래 인경궁은 누상동·누하동·누각동이라는 지명을 낳고 곧 사라졌다. 신문로(새문안) 일대의 왕기를 지우려고 세운 경희궁은 서궐의 역할을 했다. 도성 서쪽에는 서대문(敦義門)과 서전문(西箭門)이 있었다. 태종 때 세도가 이숙번이 자기 집 앞 서대문을 닫고, 문을 다른 곳에 짓도록 했기 때문이다. 새문은 ‘성문을 막은 문’(塞門)이라는 뜻과 더불어 ‘새로 지은 문’(新門)이라는 복합 의미를 가진다. 서대문을 대신한 서전문은 지금의 사직터널 앞쯤에 있었다. 사직터널을 뚫고 사직천을 복개해 사직로를 놓기 이전에는 고개로 막혀 있었다. 광화문을 돌아서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조선의 왕들도 사직단에 갈 때는 광화문 육조대로를 지나 지금의 세종대로 네거리까지 나온 뒤 세종문화회관, 정부서울청사, 서울지방경찰청 앞길을 따라 사직단을 오갔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사방 북촌(북촌개발자 정세권의 길)●일시 및 집결 장소 : 6월 2일(토) 오전 10시 안국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노주석의 서울살이] 기농 정세권 선생을 생각함

    [노주석의 서울살이] 기농 정세권 선생을 생각함

    서울 한복판에 송해길이 생겼다. 종로구 육의전 빌딩에서 낙원상가 앞까지 240m이다. 아흔 살 ‘국민 오빠’ 송해를 기리는 길이라고 한다. 송해의 사무실이 있고, 즐겨 다니는 2000원짜리 해장국집이 있다. 지하철 종로3가역 5번 출입구 앞에 그의 흉상도 놓였다. 거부감은 없다. 웃자는 게 코미디고, 웃기자는 게 코미디언 아닌가. 웃으면 그만이다. 좀 찜찜하긴 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길에 붙이고, 동상을 세운 뒤 벌어진 좋지 않은 추억 때문이다. 시비 붙는 사람 없으니 다행이다. 한 사람이 생각났다. 기농 정세권(1888~1965)이다. 서울에 한옥을 남긴 분이다. 가회동·삼청동·재동·계동·안국동·사간동·소격동·수송동·견지동·관철동·관훈동·익선동·봉익동·권농동·통의동·체부동·사직동·신문로·명륜동·창신동·이화동·신설동·왕십리·행당동·휘경동·충정로에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이 그분의 작품이다. 1920~30년대 개량 한옥을 짓고, 한옥지구를 조성한 건축가이자 부동산 개발가이다. ‘궁궐의 도시’ 서울의 사대문 안은 왕과 일족이 사는 40여개의 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농은 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과 벌열(閥閱)들의 고대광실을 사들여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중산층용 개량 한옥을 지어 공급했다. 요즘 각광받는 익선동 166번지는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 한 채를 68채의 한옥으로 재개발한 것이다. 선생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의 한옥 개량과 지역 선점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서울 북촌과 서촌은 일본식 문화주택으로 덮였을 것이다. 건축가 정기용은 “북촌 한옥은 서울의 존재이며, 장소이고,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도시형 한옥은 서울의 징표가 됐다. 조선은 망하고, 국왕은 폐위됐지만, 분야별 왕이 있었다. ‘백화점왕’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 ‘부동산왕’ 민영휘, ‘문화재왕’ 전형필이 그들이다. 정세권은 ‘건축왕’이었다. 전형필과 정세권 두 분의 선각자가 문화재와 한옥을 지켰다. 기농은 부동산 개발로 번 돈을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썼다. 우리말큰사전 편찬을 도우려고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했고 자금을 댔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재산을 강탈당하고, 세 번이나 옥고를 겪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지사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31세에 상경, 70대에 낙향, 78세 타계할 때까지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었다. 춘원 이광수는 “그를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했다. 만해 한용운도 ‘정세권씨에게 감사하라’는 이례적인 글을 기고했다. 그런 정세권이 잊혔다. 서울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서울의 기와집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전통가옥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양반가 한옥은 1870년에 지어진 안국동 윤보선가이다. 서울의 기와 한옥 1만 8000채 중 6000채 이상은 기농이 남긴 선물이다. 1644년 대화재로 사라진 영국 런던을 재건한 크리스토퍼 렌, 1850년대에 프랑스 파리를 오늘의 파리로 만든 E 오스만,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도쿄를 부활시킨 고토 신페이처럼 서울의 미래를 만든 사람은 기농 선생이 아닐까. 그런데 왜 정세권의 업적은 기록되지 않고, 정세권 길은 만들지 않으며, 정세권 동상은 세우지 않나.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사람, 정세권 정신을 가진 서울사람을 기리는 정세권의 날과 정세권상은 왜 제정하지 않는가.
  • 99칸 한옥을 퓨전한옥으로… 서울 표정 바꾼 ‘경성의 건축왕’

    99칸 한옥을 퓨전한옥으로… 서울 표정 바꾼 ‘경성의 건축왕’

    오늘날 우리가 보고 즐기는 북촌은 기농 정세권(鄭世權·1888~1965)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가 설계하고 건설한 거대한 퓨전 한옥지구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정세권은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등 서울 전역에 한옥단지를 건설해 서울의 표정을 바꾼 사람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일본 적산가옥이 점령한 도쿄의 아류도시로 전락했을 것이다. 서울을 찾은 외국관광객은 무엇을 찾는가. 서울의 경관을 지배하는 빌딩숲이나 공룡 같은 아파트단지를 보러 오지는 않는다. 1930년대에 한 선각자가 지은 북촌 한옥밀집지역이 있었기에 서울은 서울다워졌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서울의 몇 안 되는 볼거리로 남았다. 북촌 한옥밀집지구는 국보도, 보물도, 사적도, 지정문화재도, 등록문화재도 아니지만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이다. 바로 서울미래유산이다. 기농은 북촌에 자리잡은 왕족이나 권문세가의 99칸 한옥을 매입해 작은 한옥으로 쪼개 팔았다. 불편한 전통한옥에 근대적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개량 한옥의 개념을 심었다. 주거문화의 혁신을 가져왔다. 일제강점기 청계천을 경계로 조선사람은 북촌, 일본인은 남촌에 살게 된 것도 그가 지은 한옥의 역할이 크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인 선생 덕택이다. 부동산 개발로 번 돈은 아낌없이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썼으며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했고 우리말큰사전 편찬 자금을 댔다. 납북되기 전 춘원 이광수는 “그를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력이 큰가를 느꼈다”면서 정세권의 자서전을 집필하려 할 정도였다. 만해 한용운도 이례적으로 ‘정세권씨에게 감사하라’는 제목의 글을 잡지에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하찮은 집장수로 취급받아 역사책이나,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인물로 잊혀졌었다. 우리는 북촌에 열광하면서도 누가 이런 동네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정세권은 사후 반세기 만에 북촌 한옥과 더불어 ‘경성의 건축왕’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서울미래유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 [책꽂이]

    [책꽂이]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김경민 지음, 이마 펴냄) 1920년대 가회동, 삼청동 등에 북촌 한옥마을을 만드는 등 경성의 부동산 지도를 재편한 조선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의 시대를 비춘다. 220쪽. 1만 5000원. 수치심의 힘(제니퍼 자케 지음, 박아람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인류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감정 가운데 하나인 수치심의 기원과 진화, 사회적 속성을 따라가며 수치심을 이용한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탐구한다. 288쪽. 1만 4000원.윤이상 평전-거장의 귀환(박선욱 지음, 삼인 펴냄) 올해는 남북한, 동서양 두 세계에 걸친 음악 거장 윤이상 탄생 100주년이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파란만장한 부침을 겪은 그의 삶과 음악을 따라가 본다. 608쪽. 3만원. 염소가 된 인간(토머스 트웨이츠 지음, 황성원 옮김, 책세상 펴냄) 근심, 걱정, 후회, 스트레스 등 인간의 존재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염소가 되어 염소의 삶으로 뛰어든 영국 디자이너 토머스 트웨이츠의 분투기. 312쪽. 1만 4800원. 미처 하지 못한 말(류은숙 지음, 낮은산 펴냄) 용산 참사, 쌍용차 정리해고, 밀양 송전탑 등 대한민국의 아픈 사건들을 뉘우치고 애도하는 인권의 문장들이 펼쳐진다. 288쪽. 1만 5000원. 세상을 읽다-시사 이슈11(김승훈 외 10명, 동아엠앤비 펴냄)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최순실 게이트, 국제 문제로 번지는 사드 배치 등 지난 한 해를 달군 시사 이슈 11가지를 언론사 기자들이 쉽게 풀어냈다. 216쪽.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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