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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금 회복 조급해진 40대 가장, ‘이성조 교수’에 재기 자금 마련 애원 [파멸의 기획자들 #42]

    원금 회복 조급해진 40대 가장, ‘이성조 교수’에 재기 자금 마련 애원 [파멸의 기획자들 #42]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지금 내가 그 꼰대 비위 맞추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나와 가족의 인생이 걸려 있단 말이야!’ 민준은 입술을 깨물며 수화기 너머 김승대 대표의 선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김 대표가 입을 열었다. “휴… 알겠습니다. 민준 님 사정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일단은 지금 있는 자금으로 진행해 봅시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시드가 작으면 수익도 작고, 회복 속도 역시 느릴 수밖에 없어요.”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민준이 실외기 위에 주저앉았다. 셔츠 등판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작업복 점퍼를 벗고 안정을 되찾은 뒤에야 회사의 대형 거래가 자신 때문에 ‘파투’ 직전 상황에 몰려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저녁, 지옥 같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민준이 이성조 교수의 온라인 강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김 대표의 텔레그램 알림이 울렸다. “[긴급] 지금 차트 흐름 아주 좋습니다. TOXIC 선물, 롱 포지션 100X로 진입하세요. 비중은 20%.” 민준은 씻지도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IEKAF 거래소 앱을 켰다. 현물 계좌의 3만 6000 USDT(5000만원)을 선물 계좌로 옮기고, 김 대표가 시키는 대로 레버리지를 설정해 매수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붉은 양봉이 로켓처럼 치솟기 시작했다. 또다시 청산당할까 봐 숨도 못 쉬고 지켜본 지 10여 분. “지금입니다. 바로 익절하세요.” 김 대표의 문자를 보자마자 매도 버튼을 터치했다. 결과는 40% 수익. 10여분 만에 4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민준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 이거야! 이렇게만 하면 원금 회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기쁨도 잠시, 김 대표의 메시지가 찬물을 끼얹었다. “수익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참 아쉽네요.” “네? 수익이 났는데 뭐가 아쉬우신지…” “오늘처럼 좋은 장에서 시드머니가 10만 달러만 됐어도… 방금 거래 한 번으로 1000만원 넘게 벌었을 겁니다. 민준 님이 방금 가져가신 수익의 거의 3배죠. 시드의 차이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눈앞에서 600만원을 놓친 셈이니까요.” 민준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400만원을 벌었다는 기쁨보다 600만원을 ‘손해 봤다’는 박탈감이 더 크게 밀려왔다. ‘돈이 돈을 번다는 게 이런 거구나.’ 당장 10만 달러를 채우지 않으면, 앞으로 다가올 기회도 다 놓칠 것 같았다. 조바심이 극에 달했다. 결국 민준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이성조 교수에게 매달려 보기로 했다. 다음 날 부산 출장길, KTX 안에서 민준은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김 대표를 만난 이야기부터 코인 선물 리딩 거래 강제청산의 아픔, 그리고 자금이 부족해서 원금 회복 기회를 놓치고 있는 현 상황까지 구구절절히 적었다. “교수님, 김승대 대표의 능력만큼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자금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제가 추가로 융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교수님의 혜안이 절실합니다.” 점심이 가까워올 무렵 이 교수의 답장이 도착했다. “김민준 학우님, 절박한 사연 잘 보았습니다. 자금 문제라… 학우님의 재기 의지가 워낙 강하시니 제가 가만 있을 수가 없군요. 나서서 돕겠습니다. 김가영 비서에게 일러둘 테니 안내를 받아보시지요.” 역시 이 교수였다. 권위적인 태도 없이 제자의 아픔을 감싸 안아주는 참된 스승. 민준은 울컥하는 마음을 추스르며 김가영 비서의 연락을 기다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그녀의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학우님, 교수님께 말씀 들었어요. 그동안 마음고생 심하셨죠? ㅠㅠ 저희가 특별한 회원님들께만 연결해 드리는 대출 업체가 있거든요. ‘빠른캐피탈’이라고… 이름이 좀 촌스럽죠? ㅎㅎ 여기 대표님이 워낙 직관적인 걸 좋아하셔서요.” 김 비서가 친근한 말투로, 그러나 핵심을 찌르는 제안을 했다. “여긴 정식 허가 업체여서 이자가 좀 세요. 하지만 이성조 교수님 소개라고 하면 ‘특별 우대’를 해주기로 얘기가 됐어요. 한도도 잘 나오고 금리도 저렴합니다. 명함을 보내드릴 테니 지금 전화해 보세요.” 민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교수의 이름값으로 ‘특별 우대’를 받을 수 있다니! 그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빠른캐피탈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촌스러움도, 대부업체의 높은 이자율도 문제 되지 않았다. 오직 원금 회복이라는 목표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43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 불맛 입은 한 조각… 고소한 육즙 톡톡 [김새봄의 잇(eat)템]

    불맛 입은 한 조각… 고소한 육즙 톡톡 [김새봄의 잇(eat)템]

    소, 돼지에 비해 비교적 늦게 인기를 얻게 된 닭. 한 뼘 남짓한 그 작은 크기 몸덩이의 닭을 부위 부위 나눠 구이의 방식이나 굽는 재료, 곁들이는 찬이나 소스의 종류 등을 바꿔 가며 바야흐로 개성을 입히는 시점이다. 덕분에 선택지가 넓어진 우리들은 그저 즐겁게 즐겨 줄 수밖에. 김새봄의 이번 주 잇템(eat-tem)은 닭 숯불구이다.크림치즈 같은 촉촉한 닭내장 ① 춘천 원조 숯불 닭불고기집 이름은 평범하디평범한 ‘원조 숯불 닭불고기집’. 대명사 중의 대명사들의 모음이라 얼핏 들어선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숯불구이집의 위용은 춘천 닭갈비 골목에 가 보면 출중하다. 이른 점심부터 닭 숯불구이를 먹기 위해 늘어선 줄은 오후를 넘어 본격적인 저녁 시간이 되면 골목을 한 바퀴 빙 두를 정도로 길어진다. 연기로 자욱한 실내를 비집고 들어가 황톳빛 장판바닥에 철푸덕 앉는다. 식탁 중앙에 위치한 화로에는 무수히 많은 숯이 타고 나간 흔적이 보인다. 오랜 기간 달궈진 화로의 주름이 수많은 세월과 사람들의 자취를 비춘다. 닭갈비는 누구보다 매력적인 빨간빛을 자랑하지만, 간은 의외로 강하지 않고 은은하게 전체적으로 잘 배어 있다. 숯불과 만나 겉은 금세 그을며 바삭해지고, 안은 촉촉하다. 적당한 간에 가득한 숯불향이 나는 닭갈비는 생양파, 생마늘과 영혼의 한 쌍, 최상의 조합을 자랑한다. 이 집은 특이하게 ‘닭똥집과 닭내장’을 시키면 ‘닭알’을 내준다. 닭똥집이야 익숙하지만 닭 내장과 닭알은 대부분의 외지인들이 마주함과 동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닭알은 노른자와 아주 닮았는데 맛도 비슷하다. 특유의 고소함이 느껴지면서 퍽퍽하기보단 조금 더 수분감과 결이 느껴진다. 숯불에 살짝 구워 깨소금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함이 배가된다. 닭내장은 흔히 먹는 소곱창의 미니 버전이다. 이 작은 내장에 먹을 데가 어디 있다고, 구우며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구운 내장을 한입 먹어 보면 말이 달라진다. 어째 작고 비실한 것 같지만 안은 꽉 차 있다. 크림치즈 같은 고소함이 입안에 확 퍼진다. 흡사 복어 정소를 구운 느낌이다. 안은 촉촉하고 고소하고, 겉은 쫄깃하고, 작지만 알찬 내장구이에서 노포만의 노하우와 힘이 느껴진다.분위기까지 챙긴 일본식 닭구이  ② 신사동 효계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일본식 닭구이전문점 ‘효계’. 나무로 만든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일본에 여행 온 듯, 이국적인 감흥이 물씬 밀려온다. 신사동 가로수길 메인거리 바로 뒤편, 내로라하는 트렌디한 카페와 식당들이 들어선 이 골목에서 세련됨으로서는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다. 효계는 기존에 있던 야키토리 전문점의 DNA를 잇는 곳으로 트렌디하지만 수준급의 맛과 전문성을 자랑한다. 효계는 아주 심플하다. 닭은 불에 굽고, 구운 닭은 파절임에 싸 먹고, 식사는 노른자를 비벼먹는 비빔밥, 혹은 국수 둘뿐이다. 왠지 허름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접시에 내어진 닭 모듬구이의 행과 열에서 이 집의 전문성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하얗고 긴 지방과 뼈가 둘러싼 날개 부위부터 핑크빛 투명한 안심, 자줏빛에 가까운 붉은 근육이 야무지게 뭉쳐 있는 근위까지 색깔은 체계적인 그러데이션, 척척 맞춰진 줄은 여러 쌍의 무지개 같다. 부위마다 조금씩 다른 방법과 시간으로 구워 내고, 불맛은 정말 환상적이다. 촉촉하고 구수하다. 특수부위가 가진 각각의 매력이 제대로 색을 입고 나온다. 보글보글 기포 가득한 하이볼을 한잔 여유롭게 기울이고 화로에서 구워지는 작은 고기 한 점 집어먹으며 도란도란 삶의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내기에 충분하다.24시간 숙성된 양념구이 일품 ③ 문래동 계옥정 최근까지도 인적이 드물었던 서울 문래동 공구상가. 여전히 오래된 철물점과 함께 감각적인 식당, 카페들이 혼재된 골목을 거닐다 보면 유독 긴 줄을 선 ‘계옥정’과 만난다. 기존 건물을 그대로 두고 새 간판을 붙이고 내부를 재구성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닭구이 전문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흥겨운 노랫소리와 핑크, 초록, 보랏빛 다채로운 조명,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어깨가 들썩인다. 흡사 라운지바에 들어선 느낌. 계옥정에서는 닭의 각 부위를 소금과 양념 두 버전으로 즐길 수 있다. 양념의 밸런스에 특히 신경 써 입에 감기는 맛이 남다르다. 24시간 숙성해 제대로 빨간빛이 선명한 양념구이를 특수제작한 불판에 살짝 태운 듯 검은 무늬를 입혀 구워 내면, 저도 모르게 빠르게 사라진다. 닭의 목살을 따로 정형해 한입 크기로 쏙 들어오는 목살구이,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이 좋은 가슴연골, 쫄깃한 식감이 매력적인 생염통구이 차이를 느끼는 재미가 좋다. 김가루와 양파 플레이크를 이용해 둥지 모양을 만들어 맛도 모양도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되는 둥지볶음밥, 화끈한 얼얼함이 좋은 마라순두부쫄면 등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식사메뉴도 계옥정을 제대로 즐길 포인트다. 푸드칼럼니스트
  • ​[이광식의 천문학+] 인류를 변화시킨 천체사진 TOP3

    ​[이광식의 천문학+] 인류를 변화시킨 천체사진 TOP3

    인류가 최초로 우주로 진출한 것은 1957년 구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로,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그로부터 미-소 간에 격심한 우주 경쟁이 막을 올렸고, 1969년 미국은 마침내 달에 최초로 인간을 착륙시킴으로써 우주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이후 1990년에는 허블 우주망원경이 지구 궤도에 올려져 우주를 보는 인류의 의식에 혁명을 가져다주었고, 심우주에서 일어나는 온갖 천문현상과 천체들을 촬영하고 데이터를 전송해 천문학 발전에 단일 장비로는 최고의 기여도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껏 지상과 우주의 망원경, 그리고 우주인들이 직접 찍은 천체사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도 인류를 변화시킨 가장 유명한 천체사진 TOP3를 뽑아 소개한다. ​ ​1. '블루마블(The Blue Mable)', 저렇게 연약한 지구라니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사실을 인류가 맨처음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1972년 12월 7일이었다. 달로 향하던 아폴로 17호의 승조원들이 지구 지름의 약 3배인 4만 5000km 떨어진 우주공간에서 되돌아본 지구의 모습은 '푸른 구슬' 하나가 캄캄한 우주에 둥실 떠 있는 광경이었다. 선장 유진 서넌은 이 광경을 렌즈에 담았고, ‘푸른 구슬’이라는 뜻의 '블루마블'(The Blue Mable)이라는 이름으로 천체사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등극했다. ​  이처럼 지구나 달 같은 천체들이 공처럼 둥근 것은 중력의 세기가 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중력으로 뭉쳐지게 되는데, 중력은 물체의 중심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중력의 방향은 항상 물체의 중심으로 향한다. 중심에서 주위의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지지 않는 균형된 중력의 세기를 유지하는 도형, 그것이 바로 구인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다보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비현실적으로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다. 흙과 돌로 이루어진 둥근 덩어리가 우주공간에 둥실 떠 있는 광경은 참으로 낯설게 보일 것이다. 지구 행성을 휘감고 있는 푸른 바다, 흰 얼음에 덮인 남극대륙과 불그레한 아프리카, 인도양의 사이클론까지 어우러진 광경은 숨막히는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놀라운 사진은 고유명사를 뜻하는 ‘The’를 붙여 '더 블루마블'(The Blue Marble)이라고 불린다. 그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느낌 뒤에 바로 따라붙는 것은 '저렇게 연약하다니' 하는 감정이다. 끝 모를 망망대해 같은 흑암의 우주공간에 홀로 떠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사진 속 작은 지구는 우주의 입김 한 번이면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것같이 보인다. 지금이라도 소중히 지켜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 사진은 ‘지구의 날’(4월 22일) 행사의 상징이 됐고, 환경운동이 널리 확산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인류 최초로 한 시간 반이라는 짧은 우주여행을 마치고 한순간에 ‘소련의 영웅’으로 탄생한 러시아의 유리 가가린은 인터뷰에서 “멀리서 지구를 바라보니 우리가 서로 다투기에는 지구가 너무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먼 우주에서 지구와 인류를 돌아보고 느끼는 감정과 충격으로 인해 세계관이나 인생관 등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오버뷰 이펙트(Overview Effect), 조망효과라 한다. 아폴로 17호의 사진이 그토록 유명해진 것은 1970년대 활발했던 환경주의 운동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인데, 드넓은 우주 속에서 홀로 남은 지구의 소중함을 여과없이 드러내기엔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NASA의 기록전문가인 마이크 겐트리는 '푸른 구슬'이 인류 역사상 가장 널리 접해진 사진이라 강조한 바 있다.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배포된 사진인 블루마블. 이름 그대로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지구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구슬을 연상케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고 장엄한 구슬이라면 최선을 다해 지킬 가치가 있지 않을까.  ​2. '지구돋이(Earthrise)', 달에서 지구는 어떻게 보일까?최초의 지구돋이 사진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유인 달 탐사 우주선 아폴로 우주비행사 윌리엄 앤더스가 196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찍은 것이다. 아폴로 8호는 당시 달을 10바퀴 돌면서 촬영한 달의 사진을 지구로 전송하고 TV로 생중계한 뒤 귀환해 태평양 바다 위에 무사히 내려앉았다. 인류가 우주에서 본 지구 모습을 최초로 담은 이 사진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저명한 자연 사진작가 갤런 로웰은 '이제까지의 사진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다'라고 평가했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체 사진으로 꼽혀 지구 환경 지키기 운동을 촉발하기도 했다.  아폴로 8호는 달 표면에 착륙하지는 않았다. 위의 사진은 앤더스가 달 궤도에서 찍은 것으로, 마치 지구가 달이나 해처럼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여 '지구돋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달은 지구의 중력에 꽉 잡힌 상태이기 때문에 자전과 공전 주기가 27.3일로 같다. 이를 동주기 자전을 한다. 따라서 지구에서는 달의 한쪽 면만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달에서 볼 때 지구는 하늘의 한 곳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달에서는 지구가 뜨거나 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구돋이’ 사진은 달 궤도를 도는 우주선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마치 지구가 달의 지평선 너머로 뜨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가 나타났다.  위의 사진은 지구가 햇빛을 받는 부분만 나타나 마치 상현달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을 때 승조원들이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앤더스 : 오 마이 갓! 저기 있는 광경 좀 봐! 지구가 떠오르고 있어. 와우, 예쁘다.!  ​보먼(선장) : 찍지 말라구. 작업목록에 없는 거야. (농담) 앤더스 : (웃음) 컬러 필름 있어, 짐? 컬러 롤 빨리 좀 줘봐. 러벨 : 오, 그게 좋겠군!  아폴로 승조원들은 이 사진을 찍기 전 달 궤도를 돌면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10절까지를 나누어 읽었는데, 이는 TV로 생중계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을뿐더러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3.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 한 점 티끌 지구...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2013년, 인간이 만든 피조물로는 최초로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공간으로 진입한 보이저 1호를 따라 2018년 12월에는 보이저 2호가 두번째로 태양계를 떠나 성간우주로 진출했다. 이들 인류의 두 우주 척후병은 한국어를 비롯한 55개 언어로 된 지구 행성인의 인사말과 사진 110여 장 등이 담긴 골든 레코드를 지니고 있다.  보이저 1호가 출발한 지 13년 만인 1990년 2월 14일, 지구로부터 60억km 떨어진 해왕성 궤도 부근을 지날 때 뜻하지 않은 명령을 전달받았다.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 가족사진을 찍으라는 명령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천문학 동네의 아이디어 맨이자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이었다. 그러나 반대가 만만찮았다. 그것이 인류의 의식을 약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학적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게다가 망원경을 지구 쪽으로 돌리면 자칫 태양빛이 카메라 망원렌즈로 바로 들어가 고장을 일으킬 위험이 크다. 이는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는 거나 다름없는 위험한 행위라고 나사 과학자들은 생각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칼 세이건도 아쉽지만 한 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새로 부임한 우주인 출신 리처드 트룰리 신임 국장 "좋아, 그 멀리서 지구를 한번 찍어보자!"며 결단을 내렸다. ​트룰리는 우주의 조망이 인간의 의식에 얼마나 강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몸소 체험한 우주인 출신이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태양계 바깥으로 향하던 보이저 1호가 지구-태양 간 거리의 40배(40AU)나 되는 60억km 떨어진 곳에서 카메라를 돌려서 찍은 지구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막한 허공중에 떠 있는 한 점 티끌이었다. 그 한 티끌 위에서 70억 인류가 오늘도 아웅다웅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때 보이저 1호가 찍은 것은 지구뿐이 아니었다. 해왕성과 천왕성, 토성, 목성, 금성 들도 같이 찍었다. 이 모든 태양계 행성들도 우주 속에서는 역시 먼지 한 톨이었다. 지구 주변의 붉은 빛띠는 행성들이 지나는 길인 황도대에 뿌려진 먼지들이 태양빛을 받아 만들어내는 빛깔이다.  칼 세이건은 이 '한 점 티끌'을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으로 명명하고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라고 시작되는 감동적인 소감을 남겼는데, 그중에 "천문학은 사람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인격형성을 돕는 과학"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제껏 찍은 모든 천체 사진 중 가장 철학적인 천체사진으로 꼽히는 이 '창백한 푸른 점'을 보면 인류가 우주 속에서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느끼게 되며, 지구가, 인간이 우주 속에서 얼마나 작디작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詩 떠메고 봄 햇살 둘러메고 천생 시인, 천상에 들다

    詩 떠메고 봄 햇살 둘러메고 천생 시인, 천상에 들다

    지난 15일 시인 김형영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다. 선생은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6년 문학춘추로 등단한 이래 55년 동안의 시력(詩歷)을 쌓아 온 우리 시단의 대표 중진이다. 오랜 세월 ‘시’와 ‘신앙’이라는 두 바퀴로 조용조용 달려온 그의 정결한 생애를 두고 빈소에 모인 지인들은 깊은 추념과 안타까움을 나누었다.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문학과지성사)는 선생이 지상을 떠나던 그날 지상에 내려앉았다. 투병하던 당시 시인 스스로 그동안의 시집 10권에서 213편을 선정해 최종적으로 정본 작업을 완료한 시적 에센스가 영정 앞에 놓인 것이다. 비록 고인은 만져 보지 못했지만 그 책은 그 순간 선생의 몸이 되어 그가 천생 시인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저항의 세계에서 통회의 심연으로 선집 체재는 네 개의 시기별 분류를 택했다. 시인 스스로 ‘저항’→‘신앙’→‘자유’→‘교감’을 키워드로 해 자신의 삶의 궤적을 조감하도록 배려한 결과로 읽힌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초기시는 폭력이 미만한 세계에 대한 항의와 저항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시는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조용하게 솟구쳐 오르는 나지막한 것이었다. 그 은유적 상관물로 시인은 ‘모기’를 택했는데 가령 시인이 간절하게 속으로 외친 소리는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모기’)처럼 작고 소소한 이들의 마음으로 현상했다. 2015년 박두진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저는 지금도 왜 시를 쓰느냐고 자신에게 가끔 묻는다. 쓰면 쓸수록 어렵기만 하고, 때로는 숨이 막히게도 하는 시”라고 말씀한 그 ‘시’를 평생 떠메고 모기 소리처럼 작은 저항의 세계를 온축했던 선생은, 원치 않은 병고로 말미암아 스스로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금도 나는 김형영의 ‘통회(痛悔)시편’ 연작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도 신앙의 문전에서 어정거리고 있을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저를 죽이지 마소서./화가 나시더라도/ 흐느끼는 이 소리 들으소서.// 뼈 마디마디 경련이 일고/ 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이 목숨 살리소서.”(‘통회시편 1’) 1980년대에 쓴 이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어 그로 하여금 ‘영성의 시인’으로 우리 곁에 머무르게끔 해 주었다. 무릇 모든 존재자는 현상계에서 물질적 존재 방식을 한시적으로 취하다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라져 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소멸이란 온통 비극적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선생은 그것을 평생 통회의 심정으로 탐구하고 형상화하면서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해 갔다. 선생의 말처럼, 모든 것이 은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김형영은 이때부터 평범한 일상에서 근원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전율의 세계를 길어올린다.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희원하는 시인의 품과 격을 보여 준 것이다. 깊은 영성을 시로 담아 냄으로써 남루한 존재자들이 신성한 존재와 연루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증언하고 탐구하는 지향을 일관되게 개척해 간 것이다. 그만큼 시인에게 가톨릭에 기반을 둔 사유와 감각은 신성한 존재를 희구하고 물어가는 실존적 사건이었으며 그러한 시선이 마침내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회귀성을 가지게 해 주었다. 세례명이 ‘스테파노’인 그는 수많은 이들의 대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동균 시인은 “가톨릭 영성을 심층적으로 서정성과 결합해 탐색해 낸 정말 보기 드문 시인”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신성의 자유로운 현장으로서의 자연 후기로 갈수록 김형영 시의 주된 요소는 자연과 시인이 상응하는 장면에서 일어나게 된다. 말하자면 자연 사물의 구체성과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지표가 서정적 순간성 속에서 견고하게 결속한 것이다. 그 빛나는 순간을 통해 우리는 김형영 브랜드인 형이상학적 빛을 한껏 쬐게 되고 이때 우리도 스스럼없이 환한 서정과 영성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후기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을 읽어 보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저 꽃들 좀 봐요.// 노란 꽃/ 붉은 꽃/ 희고 파란 꽃,/ 향기 머금은 작은 입들/ 옹알거리는 소리,/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시네.// 눈도 귀도 입도 닫고/ 온전히/ 그 꽃들 만나고 싶거든/ 마음도 닫아걸어야겠지.// 봄비 오시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꽃들아/ 어디 너 한번 안아보자.”(‘땅을 여는 꽃들’) 물론 자연은 신성의 거소(居所)이자 고유의 향기와 소리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신성 자체이기도 하다. 작은 입으로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봄날의 꽃을 온전하게 만나기 위해 시인은 눈도 귀도 입도 마음까지 닫은 채 크나큰 품으로 온전하게 봄날의 꽃들을 안아 들인다. 그러한 신성과의 소통 과정을 일러 시인은 ‘교감’이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영혼이 오가는 순간을/ 어찌 귀와 입으로 붙잡겠는가./ 눈도 아니다./ 생각도 아니다./ 나 없는 내가 되어/ 가슴으로 듣는 말,/ 사랑의 숨결이다.”(‘교감’) 이처럼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과 영혼의 소리에 우리도 가장 행복한 마음의 상태를 경험한다. 김병익 선생도 시선집 해설에서 “육신의 회복과 정신의 부활을 치르면서 김형영의 시는 이 세계와의 교감과 공감을 싱싱하게 드러낸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그에게 ‘시’는 생명의 리듬이 만져지고 보이는 음악이요, 숨결의 형식이 선연하게 들려오는 보이지 않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시선집 ‘시인의 말’에서도 선생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과의 교감 그리고 가끔 거기서 얻은 감동을 시로 꽃피우는 즐거움, 그 은총이야 말해 무엇하리”라고 적었다. 이러한 김형영 시의 지향은 결국 실존적 형이상학의 세계로 귀납될 것이고, 그때 그의 언어는 우리의 마음을 깊이 울리는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샘터, 아버지, 그리고 봄 햇살을 따라 선생은 ‘샘터’에서 30여년간 편집자로 일했다. 이 오랜 전통의 월간지가 정점을 구가할 때였을 것이다. 법정, 이해인, 최인호, 정채봉 등 이 책을 그득하게 채웠던 언어들은 지금도 한국문학의 보석이 되어 빛을 뿌린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소설가 한강이 대학을 졸업하고 샘터에 들어갔는데, 입사 직후의 그를 만나러 대학로의 붉은 벽돌 건물 앞에서 얼떨결에 선생을 뵈온 일이 있었다. 나중에 선생의 시집 해설도 쓰고 같은 잡지의 자문편집위원도 하면서 선생의 말년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마지막 투병 중 전화로 들었던 선생의 떨리는 목소리의 힘으로 선생의 시에 대한 기록을 더 깊이 수행해 갈 다짐을 해본다. 빈소에서 인사를 나눈 둘째아들 김상조씨와 장례를 마치고 전화 통화를 했다. “저나 형한테는 늘 친구 같은 아버지셨어요. 같이 식사하고 탁구나 배드민턴도 같이 치고, 힘들 때 서로 전화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던 분이셨습니다.” 상을 치르면서는 지인과 후배들이 휴대폰에 남긴 내용이나 빈소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새삼 ‘큰 분’이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지난해 12월 20일에 온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을 발견했어요. 자신이 한없이 방황할 때 신앙으로 인도해 주신 마음에 고마움을 표하는 감사 카드였습니다.” 선생의 묘역은 따로 없다. 가톨릭대학에 시신을 기증했기 때문이다. 상조씨는 아버지가 ‘유언시’라고 하시면서 1월 중에 보내 주신 작품 한 편을 문자메시지로 보내주었다. 처음 공개되는 선생의 마지막 작품 전문이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내가 죽거든/ 무덤일랑 만들지 마라/ 납골당에도 가두지 마라// 나를 먼지로 만들어/ 관악산 중턱 후미진 곳에서 뿌려다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구름이 흘러가면 구름 따라/ 새들 지저귀면 새소리로/ 꽃들 향기 뿜으면 그 향기에 취해/ 천지사방 허공을 떠돌며/보이지 않는 자연이 되어 날아다니고 싶다”(‘화살시편115-내가 죽거든’) 지금쯤 선생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훨훨 흘러가고 계실 것이다. 이제 선생은 스스로 언어의 화살이 되어 하늘나라로 들어갔다. 나는 새삼 그의 세례명을 생각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햇살보다 더 밝은 얼굴로 신에게 영혼을 의탁하는 모습이 기록된 분이다. ‘김형영 스테파노’의 얼굴에도 그 햇살이 환하게 비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돌아간 그날 출간된 시선집 제목처럼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따뜻한 봄 햇살로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스스로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 작품 한 편을 선집에서 꺼내어 봄 햇살에 비추며 읽어 본다. “별이 하나 떨어졌다./ 눈에 없던 별이다.// 캄캄한 하늘에 비질을 하듯/ 한 여운이 잠시/ 하늘에 머물다 사라진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보다 작게/ 보다 낮게/ 한 점 남김없이 살다 간 사람.// 그를 기억하소서./ 그의 여운이 아직 사라지기 전에/ 한때 우리들의 이웃이었던 그를.”(‘무명씨’)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포켓몬 고? 해돋이 GO! 울진 망양정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포켓몬 고? 해돋이 GO! 울진 망양정

    ‘天텬根근을 못내 보와 望망洋양亭뎡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므서신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개 고등학교 때 위 구절을 지겹도록 보고 듣고 문제를 푼 적이 있을 것이다. 위 글귀를 해석할 수 있으면 그래도 학창 시절 나름 공부 좀 했다고 인정!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정철(鄭澈·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1580)’에 나오는 유명한 시구이다. 이렇듯 망양정(望洋亭) 해돋이는 조선시대부터 이미 유명하였다. 여행을 가 볼만한 곳과 가야하는 곳으로 구분한다면, 경북 울진의 망양정(望洋亭)은 당연히 ‘가야하는 곳’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오죽하면 조선 최고 풍류객(風流客)인 정철의 마음마저 뒤흔들어 놓은 풍광이 있는 곳이니, 이를 후손들이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세상의 모든 아침을 열다! - 망양정의 해돋이 단연 으뜸이다. 해돋이 장관은 거칠것 없이 모든 밤이 다 바닷속으로 가라 앉는 듯하다. 전날 밤만해도 달빛 한 조각 부여잡은 채 바라보던 파도의 풍광은 가히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여독이 덜 풀린 새벽 단잠을 겨우 한 쪽으로 밀어두고, 그리도 유명한 '망양정 해돋이'를 보러 가는 길은 사실 유쾌하지만은 않다. 발걸음 하나하나 헤집고 들어오는 바닷바람은 여름이라도 매섭다. 어쨌든 졸린 눈 비비며 바다를 향해 그냥저냥 서 본다. 그리고 조만간 평생의 기억 속에 남을 '빛사태'가 바닷속에서 일어난다. 작고 붉은 점 하나가 세상의 모든 아침을 연다. 황홀하다. 조금도 아쉬움 없이 흡족하다. 백일(白日)의 붉은 심장을 망양의 바다는 꺼집어 낸다. 아침의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하루가 살았다. 집으로 가는 도중 내내 생각한다. 해돋이 풍광 하나만으로 이번 여행은 그냥 벅차다. 감사하다. 말 그대로 죽을 때도 생각날 정도의 강렬한 붉은 색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1번지에 있는 망양정은 예로부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꼽힌다. 관동(關東)이라는 뜻은 말 그대로 대관령(大關嶺)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은 수려한 산세로 인해 절경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해돋이 경치로서는 단연 망양정을 꼽는 문헌이 많다. 망양정에서의 해돋이는 누구든 인생에서의 손꼽히는 여행 경험으로서 자리잡을 것이다. 원래의 망양정은 해안가에 인접해 있었으나, 몇 번의 이전을 거친 뒤 1858년(철종 9)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여 2005년 기존 정자를 완전 해체하고 새로 건립하였다. 망양정은 망양정해수욕장 남쪽의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동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또한 이 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관동팔경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하여 숙종(肅宗)이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조는 어제시(御製詩)를 지었으며, 정선(鄭敾)은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으로 화폭에 담는 등 조선 시대의 많은 문인·화가들의 예술 소재가 되기도 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명승지였다. 그러하니 현재로도 여행지로서의 기본 이상의 품격은 지니고 있다. ● 맑디 맑은 동해 바닷속으로, 망양 해수욕장 국내 여행에 나름 일가견을 둔 사람이라면, 동해안 ‘7번국도’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동해 바닷바람에 코가 시큰거릴 것이다.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동해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며 맞이하는 바닷바람은 시원도 하다. 망양해수욕장은 유명세에 비하여 전혀 유명하지 않다. 여름 한 철, 막상 피서지를 찾아 기웃기웃 인터넷을 뒤지다보면 항상 망양해수욕장은 '멀리 있다'. 그래서 늘 단념한다. 하지만, 내처 한 시간의 여유를 지닌 채 더 가다보면, 동해안 풍경 중에서 가장 진솔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망양해수욕장'이다. ‘이 곳이 고향인데, 환갑이 가까이 되도록 객지 생활을 해도 여기 만큼 물 맑고 공기 맑은 곳은 찾기 힘들더라구요. 어릴 때 그렇게 답답하던 곳이 지금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대기업 생활 25년을 마친 뒤 고향에 돌아온 안오곤씨(58. 펜션 운영)는 망양해수욕장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망양해수욕장은 1985년에 개장하여 매년 7월 10일부터 8월 31일까지 운영이 된다. 백사장 길이는 450m로, 울진읍에서 동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인근 동해안의 해수욕장과는 달리 수심이 비교적 얕고 폭이 좁다. 또한 동해안의 해수욕장 가운데서도 수온이 가장 높고 주변이 조용해서 늘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곳이다. 특히 올해 한국관광공사와 해양환경관리공단에서 지정하는 ‘2016 전국 청정 해수욕장 20선’에 유일하게도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망양정해수욕장이 선정이 될 정도로 깨끗한 곳이다. 또한 다음 달 12일부터 해양수산부가 주최하는 '제11회 전국해양스포츠 제전'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요트·핀수영·카누·트라이애슬론 등 정식 4개 종목과 번외 4종목(바다 수영·드래곤보트·고무보트·수중사진촬영대회)에서 출전 선수들이 경합을 벌일 예정이다. 그리고 오는 30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울진 워터피아 페스티벌’이 열려 모래 미끄럼틀, 모래 조각 만들기 등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과 요트, 카약, 스킨스쿠버, 윈드서핑 등 해양레포츠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망양정(望洋亭)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인가요? -서울이든, 부산이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관동팔경(關東八景)의 으뜸인 해돋이 장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후회없는 여행은 될 듯 하다. 2. 이 공간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삶의 후반기에 접어드는 50, 60대의 아버님, 어머님들. 20대와 30대가 느끼기에는 자연풍광의 폭이 너무 넓다. 망양정 해수욕장의 경우 파도가 아주 세기 때문에 어린 자녀를 동반하는 가족이라면 늘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3. 숙소 등의 시설환경은 괜찮은가요 ? -다른 지역의 해수욕장에 비하여 놀랄만큼 간소하며 정보가 많이 없다. -숙소로는 기성 망양해수욕장의 '세상의 모든 아침‘(펜션. 054-781-1050)과 ’207mile'(펜션. 054-782-2073)이 유명하며 시설면에서도 특A급 호텔에 버금간다. 이런 외진 곳에 이런 숙소가 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4. 망양정 해돋이의 실제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진다는 표현을 써야만 한다. 더구나 망양해수욕장의 경우 모래사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암절벽과 바위 등이 있어서 이 곳에서의 해돋이의 운치는 뛰어나다. 현재의 망양정이 아니라 7번 국도 옆 ‘망양정 옛터’에서의 해돋이 관람을 추천한다. 5.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은? -바닷가의 파도가 세다. 따라서, 어린 자녀를 둔 가족이라면 늘 안전사고에 신경을 써야 한다. 또한, 해돋이 장관을 보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날씨를 잘 체크해서 가는 것도 중요하다. 6. 홈페이지 주소 및 도움되는 사이트 주소는? -울진군 문화관광과(http://tour.uljin.go.kr/index.uljin) 7. 먹거리 정보와 식당 정보는? -식당으로는 울진 토박이들에게 유명한 ‘부산횟집’(054-788-4926)의 자연산 회정식과 ‘망양정회식당(054-783-5017)’의 해물칼국수가 유명하다. 8. 주변에 가 볼만한 다른 공간도 있나요? -피서기간에도 늘 조용한 공간이 많다. 가장 추천하고픈 장소로는 ‘경상북도 민물고기 생태체험관(054-783-9413)’은 어른,아이 누구나 좋아할 만하다. 작은 아쿠아리움으로 보면 된다. 또한 덕구온천, 불영계곡, 성류굴, 죽변드라마세트장 등 생각보다 놀거리, 볼거리가 많다. (참조 : 울진군청 문화관광과 홈페이지) 9. 이 곳에서 꼭 추천하고픈 공간이나 체험은? -경북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 옛터에 있는 망양정 옛터에서 바라보는 해돋이. 일출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기타정보 -조상님들의 관동팔경(關東八景) 눈썰미를 허투루 보지 말도록.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믿고 가도 된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빛이 스며든 자리/우승미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빛이 스며든 자리/우승미

    눈을 떴다. 문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암실에 있으면 의식도 시간도 모두 멎었다. 이곳에 온 후 나는 주로 암실에서 지냈다. 둥글게 몸을 말고 바닥에 누워, 불필요한 감각이 퇴화된 심해의 생물처럼 눈과 귀를 닫았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촉각이었다. 밀폐된 공간의 공기는 아래로 가라앉았다. 공기는 욕조 속의 더운 물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내 몸을 감쌌다.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 경쾌한 리듬의 허밍이었다. 멜로디가 귀에 익었다. 가게 안으로 누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힘겹게 팔을 들어 몸 마디마디를 주물렀다. 피가 돌면서 눌려있었던 몸 왼쪽이 저려왔다. 암실 문을 열자 빛이 쏟아졌다. 손그늘을 만들고 부신 눈을 떴다. 딱딱한 알루미늄 가방 위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햇빛 속에 앉아있는 여자는 스스로 빛나고 있는 빛 무더기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주변을 감싸고 있던 빛이 스러지면서 여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는 얼굴빛이 유달리 희었다. 여자가 내 쪽으로 팔을 뻗어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팔은 윤곽이 희미했다. 홀로그램의 영상처럼 반쯤은 투명해보였다. 악수를 청하는 것인지 자신을 일으켜 달라는 것인지 몰라 잠시 주춤거리다가 여자의 손을 맞잡았다. 여자는 손아귀 깊숙이 손을 넣고 힘차게 흔들었다. 자칫하면 못 찾고 그냥 돌아갈 뻔했어요. 초행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도시에서 상가가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고 한다. 다리 건너편으로 버스터미널이 이전하면서 그쪽에 신시가지가 형성된 후로는 죽은 골목이 돼버렸다. 사진관은 옛 번화가의 뒷골목에 위치했다. 원래는 주택가였는데, 주택을 허물고 상업용 건물을 급조해 형성된 상가였다. 지금은 가게를 연 곳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이곳은 구식 양옥의 1층을 개조해 가게로 쓰던 것이어서 밖에서 보면 가정집처럼 보였다. 오기 전에 부동산에 들렀어요. 한 달 전에 이미 매매되었다고 하더군요. 혹시나 싶어 물어보는 건데 저에게 세 놓을 생각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임대를 목적으로 산 집이 아니었다. 여자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중고로 구입한 17분 컬러 현상기가 한 구석에 놓여있을 뿐,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진관을 하려고 산 건물이지만 한 달째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암실에서 보냈다. 배가 고프면 끼니를 때우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여자는 얼룩져 더러워진 벽을 따라 걷다가 쪼그리고 앉아 바닥의 나뭇결을 들여다보았다. 곳곳의 정경들을 기억 속에 새겨두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세밀하게 보았다. 여긴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오래전에 아버지가 여기서 사진관을 했어요. 위층에 살림을 차리고요. 여자의 나이를 가늠해봤다. 캐주얼한 옷차림 때문에 언뜻 보면 어려보였지만 눈가에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아래쯤일 것이다. 여기서 함께 지내게 해주세요. 처음엔 그냥 둘러보고만 가려고 했어요. 막상 와보니 여기 있고 싶어지는군요. 세를 놓는 건 싫다고 하셨죠? 대신 일을 하겠어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가게를 열면 가게일도 도와드릴게요. 여자는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말끄러미 보았다. 여자의 눈빛 속에는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과 거절할 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한데 섞여 있었다. 어떤 말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있을 때 집안일과 병간을 도맡았던 아주머니와 6개월여를 함께 지내본 적은 있지만, 나는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여자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점.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와 그곳에 살고 싶어 한다면 무언가 절박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어딘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가 태어났다는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투병 중이었던 어머니와 묏자리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도로의 모퉁이에 나 있는 골목을 가리켰다. ―저기가 느이 아버지가 사진관을 하던 자리다. 나는 자동차 속도를 줄이며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린 골목은 동굴의 입구처럼 어두웠다. 가로수에 가려 골목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무성한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음산한 소리가 났다. ―예전에는 이 길이 번화가였지. 세가 워낙에 비싸서 느이 아버지가 저 골목 끝에 있는 집을 사서 아래층을 가게로 개조했다.2층에다 신접살림을 차렸고, 너도 거기서 낳았어.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저기서 오래 살았을 게야. 그때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 골목 어름을 언뜻 보고 지나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진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안으로 성큼 들어서고 싶어졌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생전의 아버지처럼 사진관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내 머릿속은 어두운 골목으로 가득 찼다. 그곳에 가면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의 유순한 흐름을 따라 유유히 나의 생을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49재를 치르고 어머니의 무덤에 왔다가 이곳에 들렀다. 이곳은 비어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는지 뽀얀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무성한 것은 지붕까지 뻗어있는 담쟁이덩굴뿐이었다. 근처의 부동산을 찾아가 가격을 흥정하지 않고 곧장 계약서를 썼다. 다니던 잡지사에 사직서를 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내 사진기자로 일하던 직장이었다. 지구 곳곳의 풍경을 주제로 하는, 사진 중심의 다큐멘터리 잡지였다. 사직서는 그날로 수리되었다. 잡지는 상업성이 강한 잡지들을 출간하는 모(母)기업의 품격을 위해 창간된 것이었다. 전문적인 사진이 실리는 잡지를 다수의 대중은 외면했다. 독자가 많지 않으니 당연 광고도 들어오지 않았다. 경기가 침체되자 모기업은 서서히 경영에 압력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직서를 내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권고사직을 당할 형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는 동료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내가 사무실 문을 나서자 동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의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통장으로 입금된 퇴직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아파트를 내놓았지만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보험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내려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남긴 상자에는 어머니의 결혼 예물과 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세 장의 보험증서가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나는 보험증서를 쥐고 오열했다. 오십 몇 년의 삶의 흔적이라기에는 세 장의 종이는 너무도 가볍고 쓸쓸한 것이었다. 2층의 방을 쓰세요. 저는 여기 암실에서 지내면 되니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해선 안 됩니다. 어려운 조건은 아니로군요. 여자는 알루미늄 가방을 메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자연스럽게 밟고 올라갔다.2층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반으로 접히는 휴대용 침대를 암실에 갖다놓고, 내 물건들은 거실에 놓았다. 여자가 식사준비를 했다. 여자는 냉장고 뒤쪽 구석에 쑤셔 넣어두었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여자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자기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처럼 양념통이나 필요한 재료가 있는 곳을 단번에 찾아냈다. 무언가 도와야 할 것 같아서 주위를 서성대던 나는 머쓱해져서 1층으로 내려왔다. 여자가 차린 상은 정갈했다. 냉장고에는 맥주와 인스턴트식품만 가득했었는데, 여자가 차린 밥상에는 찌개에 윤기가 흐르는 밑반찬까지 고루 갖춰져 있었다. 여자의 음식은 어머니가 해주던 것과 맛이 흡사했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요? 여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싱긋 웃었다. 환한 빛이 얼굴 가득 퍼졌다. 이곳에 머무는 대가로는 좀 과분하군요.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여자는 늘 조용히 움직였다. 내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나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암실에서 보냈다. 여자는 시간에 맞춰 요리를 했다. 거실로 내어 놓은 옷장 속에는 바싹 마른 옷가지들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여자가 내게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거칠게 그린 가게 구조도와 비용에 관한 세목이 적혀 있었다. 사진관을 열었으면 해요. 여자가 건넨 종이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종이 몇 장으로는 가게의 모습이 요연하게 잡히지 않았지만 내 생각보다는 훨씬 구체적이었다. 우선 가게에 있는 17분 현상기는 되팔았으면 좋겠어요. 오랫동안 사진과 관련된 일을 해왔지만 사진관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증명사진이나 간단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작은 스튜디오를 갖추고, 현상·인화 서비스를 하면 되겠다 싶어 17분 컬러 현상기를 중고로 구입한 것이었다. 여자는 내 옆으로 바투 다가와 앉아 손끝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계획을 설명했다. 암실은 공간이 꽤 넓으니까 두 개로 나누었으면 해요. 조명기기와 카메라 장비를 구입해서 작은 스튜디오를 만들고요. 표준화된 QSS방식으로는 사진을 기록물로만 여기는 사람들의 기대만 충족시킬 수 있죠.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돼서 현상만으로는 가게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요. 암실을 개방해서 수작업을 할 수 있게 하고, 차나 맥주를 마시며 자유롭게 지식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곳, 제가 꿈꾸고 있던 사진관이에요. 암실에서 나와 보니 벽에 호두나무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가게 구석에 있던 자동 현상기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무릎을 대고 엎드린 채 기름걸레로 바닥의 나무를 닦고 있었다. 여자의 손이 닿는 곳마다 켜켜이 나무의 결이 살아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암실 공사하러 인부들이 올 거예요. 가벽을 세우는 거라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조금 시끄러울 거예요. 어디 잠깐 다녀오는 건 어때요? 카메라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이곳에 내려온 후로는 첫 외출이었다. 나오기는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SLR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내내 들고 다녔던 것인데, 검은 몸체의 카메라가 낯설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카메라가 이물스러워 보였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버스에서 내려 몇 컷의 사진을 찍었다. 내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의 풍경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풀조차 자라지 않는 들판에 앉아 서서히 땅에 내리고 있는 어둠을 응시했다. 구릉처럼 낮은 산의 언저리에는 스러진 햇빛이 모여 검붉은 노을로 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도 차도 없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사물의 윤곽이 어둠에 검게 물들어 보이지 않았다. 길을 따라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피로하지 않았다. 끼니를 걸렀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몸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불현듯 여자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가게에 걸려 있는 간판에 불이 환했다. 간판에는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암실카페 - 빛이 스며든 자리’라고 씌어 있었다. 공사가 끝났는지 가게 안은 조용했다. 출입문을 열자 직사각의 탁자 세 개가 보였다. 한쪽 면을 벽에 붙인 탁자에는 어림잡아 20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암실과 스튜디오 사이의 자투리 공간에는 주방이 들어섰다. 주방은 음료와 간단한 안주를 만들 수 있는 바bar 형태였다. 주방 옆에는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여닫이 유리문이 달린 업소용 냉장고 안에는 캔음료와 몇 종류의 맥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암실 옆의 공간에는 몇 개의 조명기구가 놓여있는 작은 스튜디오가 꾸며졌다. 스튜디오를 제외한 가게의 정경은 카페에 가까웠다. 늦은 시간에 맥주를 마시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겠군요. 사진관보다는 호프집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죠. 하지만 저는 이 이름이 썩 마음에 들어요. 어두운 방에 스며든 빛의 흔적, 그게 바로 사진이니까요. 여자는 벽의 진열장을 닦고 있었다. 이곳에 카메라를 진열해 놓았으면 해요. 예전에는 사진관에 카메라 진열대가 있었지요. 집집이 가정용 카메라를 구비해놓기 이전에는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대여했으니까요. 가방 속에 묵혀두는 것보단 가게로 내오면 오래된 사진관 이미지도 풍기고, 손님들에게 쉽게 접할 수 없는 클래식 카메라도 보여주고 좋을 것 같은데요. 진열대는 애초부터 카메라를 놓으려고 만든 것 같았다. 천장에 진열대를 비추는 작은 조명이 있었다. 나무판으로 만든 선반 형식의 진열대에는 유리문이 달려 있었는데, 먼지가 새어들지 않도록 틈새에 실리콘으로 패킹 처리가 되어 있었다. 2층에서 카메라들을 가져왔다. 케이스에 넣어 상자에 보관해왔지만, 오랫동안 손을 타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사진기자 생활을 하면서 클래식 카메라를 사용할 기회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오토포커스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부착해 사용했고, 얼마 전까지는 디지털 카메라를 썼다. 내게는 꽤 많은 카메라가 있었다. 사진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보유하게 마련이었다. 클래식 카메라는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카메라는 내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되던 해 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내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내게 그리움 따위의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사진첩에 꽂혀있는 사진이나 카메라처럼 정물적인 것이었다. 어머니는 단 한 대의 카메라도 팔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카메라를 꺼내 닦았다. 그 일은 어머니에게 지난 일을 추억하게 하는 사진첩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카메라를 닦으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듣기 싫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되풀이되는 추억은, 흐려지지 않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그림자는, 사막에 묻힌 수천 년 전의 미라처럼 영원히 썩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어머, 이건 콘탁스II네요. 여자의 음성이 높아졌다.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기 전에는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어요. 처음 사진을 배울 때부터 이걸 썼어요. 사진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주로 갖고 있는 카메라는 니콘FM2였다. 가격에 비해 성능이 꽤 괜찮은 제품이었다. 간혹 클래식 기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라이카를 들고 다녔다. 콘탁스를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 카메라는 아버지가 월남전에서 돌아올 때 구입한 것이라 들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이 카메라의 각별한 내력을 말했으나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가 2층으로 올라가 알루미늄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앉아있던 가방이었다. 여자가 가방을 열었다. 거기에는 콘탁스와 똑같은 디자인의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카메라 앞면에는 키릴문자로 киев라는 로고가 각인되어 있었다. 이 카메라는 1949년에 생산된 키예프 카메라예요. 생산지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지방이지만 부품은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왔지요.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소비에트는 전쟁배상금으로 콘탁스 카메라의 메이커인 자이스 이콘(Zeiss Ikon)을 요구했어요. 공장의 모든 부품과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우크라이나로 이송됐지요. 파견된 드레스덴의 노동자들이 자이스 이콘의 부품을 조립해서 만들었으니 이 카메라는 콘탁스II와 완전히 똑같은 쌍둥이인 셈이지요. 여자는 수건으로 자신의 카메라를 닦았다. 카메라를 만지는 여자의 손놀림은 병든 육친의 몸을 닦아주는 손길처럼 조심스럽고 애틋해 보였다. 이 카메라는 제게 존재증명과도 같은 거예요. 아버지가 남기신 유일한 유품이거든요.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했었지요. 월남에서 번 돈으로 이 카메라를 샀어요. 지금이야 회사원의 한 달 월급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 돈이면 읍내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해요. 어렵게 구입한 카메라지요. 아버지가 월남에서 부쳐온 돈을 큰아버지가 들고나갔었다니까요. 장사를 해보겠다고요. 그 사실을 안 어머니가 읍내의 모든 술집을 뒤졌대요. 동생이 목숨 걸고 번 돈인데 술맛이 나더냐고 꾸짖어 모셔왔대요. 정혼한 사이긴 했지만 결혼 전이고 손위 시숙인데, 어머니는 무슨 용기로 그랬을까요. 큰아버지는 하는 일 없이 술과 여자로 평생을 보냈어요. 나쁜 분은 아니에요. 어느 집안에나 그런 무능하고 호방한 큰아들이 있는 법이잖아요. 그때 만약 어머니가 큰아버지를 말리지 못했더라면 제게 유품 같은 건 남지 않았겠지요. 지금은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저 혼자니까요. 이 카메라 외에는 제 존재를 증명해줄 무엇도 남지 않았어요. 같은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일까. 나와 비슷한 삶의 내력을 갖고 있는 이 여자가 오래전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혈육처럼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이 사진관으로 온 것도 여자가 카메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나는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 막연한 불안감은, 이 세상에 나의 존재를 증명해 줄 무엇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회귀성 어류처럼 내가 태어난 이 사진관으로 흘러들었던 것인지도. 사진관에는 손님이 없었다. 몇 차례 늦은 시각에 술에 취한 사람들이 들어와 맥주를 찾았다. 여자는 암실을 이용할 수 있는 사진관이라고 가게에 대해 설명한 후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첫 손님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자애였다. 주민등록증에 쓸 증명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했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로 즉석에서 사진을 올린다고 말했다. 여자애는 알고 있다며 한 음절씩 힘주어 말했다. “꼭 필름사진이어야 해요.” 여자애는 탁자에 앉았다. 움직일 때마다 유난히 검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여자애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주었다. 커피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여자애가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홀짝거렸다. 여자애는 기름종이로 이마와 콧등의 유분을 닦고, 콤팩트 퍼프로 꼭꼭 눌렀다. “왜 꼭 필름사진이어야 해요?” “이건 증명사진이니까요. 처음 발급받는 주민등록증이거든요. 원판이 있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사진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주민등록증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숫자와 지명과 이름과 125분의 1초 동안의 모습과 소속된 나라 외에 또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증명이라는 말이 하나의 역설처럼 느껴졌다. 증명이 목적인 플라스틱 카드는 정작 중요한 것은 증명할 수 없었다. “저는 디지털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요. 디지털 사진은 원판이 없잖아요. 디지털 사진은 곧바로 확인할 수 있고, 삭제하는 것도 복사도 고치는 것도 쉽지만, 어쩐지 그것들은 떠도는 이미지들처럼 느껴져요. 상이 음각으로 새겨진 필름의 원판은 이를테면 이미지가 깃드는 집 같은 거죠.” 여자애의 오른쪽 눈 아래에 점이 있었다. 작고 까맣고 윤기가 도는 점이었다. 나는 보정을 원한다면 점을 없애주겠다고 했다. 여자애는 고개를 저었다. “눈 아래에 있는 점은 눈물점이라고 어른들이 빼라는 말을 많이 해요. 하지만 저는 이 점이 좋아요. 점도 제 몸의 일부니까요. 사람들은 이 점 때문에 저를 쉽게 기억해요. 아마 아저씨도 그럴걸요.” “사진은 내일 찾으러 와요. 여기서 직접 현상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려요.” 사진을 담아두는 봉투를 내밀었다. 여자애는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자신의 이름을 썼다. 동글동글한 귀여운 글씨였다. 여자애는 이현아라는 이름 옆에 한쪽이 지나치게 부푼 하트 문양을 그려 넣고, 내게 찡긋 윙크를 했다. 여자애가 지갑을 꺼냈다. 첫 손님이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여기 암실도 이용할 수 있나요?” “암실에서 직접 현상할 수도 있고, 현상을 맡길 수도 있어요. 스튜디오도 사용할 수 있고요.” “좋은데요.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곧 손님이 늘어날 거예요.” 암실에 누워 있다가 몹시 갈증이 나 밖으로 나갔다. 진열대의 조명등만 켜져 있었다. 여자는 탁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들고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암실은 깊은 바다 속 같아요. 햇빛이 닿지 않아 어둡고 추운 곳. 암실에서는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농밀한 어둠뿐이에요. 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무서워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거기에 있으면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곳에 있나요? 거기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요? 두려움, 고독, 침묵, 약간의 위안, 그리고 나. 암실에 누워 있으면 또 다른 내가 보여요.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예요. 수면에 비친 모습처럼 좌우가 바뀐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해요. 암실에 누워있는 나와 나를 응시하는 나 중에 진짜 나는 누구일까. 나는 존재하는 걸까. 당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주변이죠. 당신이 존재할 수 있는 건 당신을 보고 있는 내가 있기 때문이에요. 불빛을 등지고 있어서 여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여자가 조금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주 앉아있는 여자의 모습이 거울 속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거울에 비친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진 반물질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빅뱅 직후 물질과 반물질이 각각 우주와 반우주를 형성했으며, 이 둘은 서로 맹렬한 속도로 멀어져갔다고 추측했다. 반물질은 물질을 만나는 순간 백만 분의 1초보다 빠른 속도로 상쇄되기 때문에 물질계에 있는 우리들은 반물질을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맥주잔을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싶었다. 여자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었다. 내 손이 여자에게 닿는 순간, 물질을 만난 반물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사진관에 온 두 번째 손님은 가게로 들어와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잡은 손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그는 이현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눈에 그가 이현아의 오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현아의 증명사진이 든 봉투를 건넸다. “현아 오빤 거 어떻게 아셨어요? 신기하네. 남매지만 닮은 데가 별로 없거든요.” 굳이 닮았다고 한다면 이미지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이미지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아가 다녀가고 난 후 그 다음 손님이 현재였기 때문이었다. 곧 손님이 늘어날 거라던 현아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예요, 형.” 그는 가방에서 세 통의 필름을 꺼냈다.‘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아마추어 사진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론으로만 접했던 현상·인화 작업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두 개의 필름을 그에게 다시 건넸다. 외형발색 필름이었다. 외형발색 필름은 유제층 안에 발색제가 없어서 필름제조회사에서만 현상할 수 있었다. 암실 수납장 안에는 약품부터 액정에 불이 들어오는 디지털시계, 라텍스 장갑까지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현재가 알고 있는 것은 암실작업의 일반적 과정뿐이었다. “암실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말 놔요, 형.” 현재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암실 작업도 사진 찍는 것과 같아.” 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말을 놓는 편이 아니었다. 막상 말을 놓고 보니 현재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서글서글한 눈매 때문인지, 웃음기 많은 얼굴 때문인지 현재에게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느껴지는 거리감이 없었다. 세이프라이트를 켜자 현재가 암실 문을 닫았다. 작업을 하며 가능한 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현재는 손바닥만 한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열심히 이론공부를 해도 직접 찍어보기 전에는 실력이 늘지 않잖아. 암실작업도 그래. 온도와 시간을 지킨다고 발색현상이 잘 되는 건 아냐. 날씨나 환경에 따라 그날그날의 기온과 습도가 다르니까. 적절한 온도와 시간은 암기가 아니라 감이야. 감을 잡으려면 결국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어.” 현재는 인화된 사진을 보며 뿌듯해 했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인물사진이었다. 수준급인 사진도 더러 있었지만 사진의 노출이 대부분 오버돼 있었다. 현재는 다음 동호회 모임은 이곳에서 갖기로 했다며, 이제부터는 손님이 꽤 늘어날 거라고 했다. 동호회 사람들은 현재와 비슷했다. 제일 먼저 현재가 현아와 함께 왔고,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암실에서 작업을 하거나 각자의 사진을 돌려보았고, 더러는 일찌감치 술판을 벌이는 치들도 있었다. 열 명 남짓 되는 인원이었다. 그들은 나이도 직업도 각색인 듯 보였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거나 현재처럼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격 없이 대했다. 그들은 원래는 풍경사진을 주로 찍는,‘미라지Mirage’라는 비교적 큰 규모의 동호회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자연 속에 있다고 믿었던 그들은 시야를 좁혔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내게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 물었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밤늦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한 잔 더 해야겠다며 여관방을 잡아 나갔다. 현재가 가게 정리하는 것을 돕겠다고 했지만, 돌려보냈다. 가게 문을 닫고 어질러진 탁자를 그대로 놓아둔 채 암실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신데다가 몸이 몹시 피곤했다. 구석에 접어놓은 침대를 펼치자마자 나는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문소리에 잠이 깼다. 열린 문 사이로 새어든 달빛이 바닥을 은백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는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내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자는 내 뺨을 감싸 쥐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 사이로 여자의 혀가 들어왔다. 여자는 혀로 내 잇바디를 훑었다. 여자의 혀는 복족류의 속살처럼 차고 부드럽고 미끈거렸다. 가슴이 더워졌다. 나는 팔로 여자의 등허리를 감고 입을 열어 여자의 혀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잠이 든 체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뜨거워진 가슴을 달랬다. 여자는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걸어 나가 문을 닫았다. 늦게야 일어나 암실에서 나왔다. 여자의 둥근 등이 보였다. 여자는 암실을 등지고 탁자에 앉아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가게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여자는 내가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몸속의 색소가 다 바랜 것처럼 여자의 얼굴빛이 창백했다. 당신의 사진에는 색이 없군요. 하나같이 흑백사진뿐이에요. 게다가 당신의 사진은 너무 어두워요. 노출이 부족해요. 노출이 모두 -2스톱이군요. 글쎄요. 저는 적정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슬라이드 필름을 쓸 때에는 노출이 오버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배웠거든요. 카메라는 어두운 방이죠. 무언가를 찍기 위해서는 빛이 들어와야 해요. 조리개를 조금만 더 열고 셔터 속도를 늦춰요. 햇빛 때문일까. 뒷면에 양면테이프를 붙인 사진을 스크랩하는 여자의 손끝이 투명하게 보였다. 물에 떠 있는 한천질의 자포생물처럼 손가락 아래로 사진이 흐릿하게 비쳤다. 여자의 얼굴은 창백한 것이 아니었다. 눈과 코와 입술의 윤곽이 희미해져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여자를 봤다.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을 감았다 뜬 사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탁자를 보자 여자는 여전히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여자를 보자 여자는 싱긋 웃었다. 여자는 자주 사라졌다. 몇 시간 또는 며칠씩 사라지기도 했다. 돌아온 여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집안일을 하고 가게를 돌봤다. 손님이 점차 늘어서 가게일이 바빴다. 손님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자가 어딘가로 떠난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가게 안에 있던 여자가 어느새 연기처럼 희미해져 실루엣으로만 넘늘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여자가 완전히 사라지던 날, 현재가 현아와 함께 찾아와 라이트 페인팅 작업을 했다. 사진 관련 잡지에서 루미노그램(Luminogram,光跡사진)에 대한 글을 보고 실제로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끝에 불이 들어오는 펜 모양의 라이트를 들고 온 현아는 이민 간 친구에게 라이트 페인팅으로 편지를 써서 보낼 거라며 몹시 들떠 있었다. 라이트 페인팅은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비교적 단순한 작업이었다. 암실에서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시키고 릴리즈를 연결한 후 세이프라이트를 껐다. 셔터 속도를 Blub에 놓았다. 현아는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읽으며 글씨를 썼다. 제2노출에서 셔터를 Blub에 맞추고 1 스톱 부족의 노출에서 스트로보를 조사하면 글씨를 쓰고 있는 연출자의 모습이 사진에 나온다. 현아의 작업이 끝난 후 여자가 펜라이트를 들었다. 여자는 허공에 대고 천천히 글씨를 썼다. 제2노출에서 스트로보를 켜자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떠있던 라이트펜이 따닥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님들은 여전히 가게로 찾아와 암실을 사용하고 차를 마시고 더러 늦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누구도 여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여자가 사라진 후로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암실로 들어갔다. 암실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나는 무기력하게 어둠 속에 누워있었다. 나는 스스로 어둠 속에 갇혔다. 시간은 여전히 흘렀고, 어두울수록 더욱 명징해지는 의식은 여자에 대한 기억을 쫓고 있었다. 문밖에서 경쾌한 멜로디의 허밍이 들려왔다. 처음 내게로 왔던 날처럼 빛에 둘러싸인 채 여자가 앉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어두웠고 텅 비어 있었다. 여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외로움이 불러낸 환영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자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우주의 반대편에서 달려온 또 다른 나는 아니었을까. 내가 마음을 열려는 순간 물질을 만난 반물질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현상한 라이트 페인팅 사진을 꺼내보았다. 필름의 마지막 장에는 서정주의 시구가 씌어 있었다. 물 위에 뜬 유성물감처럼 글씨의 획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었다.‘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여자가 서 있었을 사진의 오른쪽 모서리 공간은 검은 어둠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낮은 소리로 시의 남은 구절을 읊조렸다.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바람처럼 사라진 여자는 이 사진 한 장으로 내게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여자가 택한 이별이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것이라면, 나는 조금 더 담담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언젠가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다시 입 맞춘다면, 거리낌 없이 이를 열어 여자가 내민 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여자의 둥근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꼭 지금이 아니어도 좋았다. 내 몸이 완전히 스러지고 난 후 먼먼 내생의 어느 날이어도 좋았다. 진열대에는 여자가 남기고 간 키예프 카메라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 옆의 콘탁스를 꺼냈다. 노출을 오버스톱으로 다시 맞추고 뷰파인더에 키예프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여자가 자신의 유일한 존재증명이라고 말했던 키예프 카메라는 내게는 여자에 대한 기억의 증거가 되었다. 이 사진은 어두운 방에 잠시 스며들었던 빛, 그 빛의 흔적을 기록한 한 장의 루미노그램으로 남을 것이다.(끝) ■ 당선소감 제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셨다는 사진관을 스쳐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상가 2층 건물이었지요. 그 후부터였습니다. 어찌할 수 없이 사는 일이 힘들어지면 아버지의 사진관이 떠올랐습니다. 그곳에서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사진관을 열고 싶었습니다. 유리로 된 진열장에 오래된 사진기가 들어있는 곳. 증명사진을 찍으러온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웃으세요, 한 마디에 어색한 미소를 짓는 곳. 소읍의 탄생과 죽음과 기쁨과 슬픔을 기록하는 곳. 돈을 벌어도 좋고 벌지 못해도 좋은, 그런 사진관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에 사진관을 넣어두고 저는 수시로 꺼내보곤 했습니다. 그러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도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언젠가부터 사진관 안에는 허약한 식물이 자랐습니다. 제 소설은 결여의 토양에서 결핍의 양분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지닌 게 없어도 너무 지독하게는 살지 말자고 제 마음을 다독일 즈음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약한 소설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구효서 선생님!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릴 수 있어 기뻐요. 한결같이 제게 여여한 미소를 보여주셔서 마음이 든든했어요. 가족과 문우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응오씨, 당신은 제 삶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입니다. 저를 존재하게 하는 건 당신이에요.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승미 ●약력 1974년 강원도 양구 출생 200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 ■ 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9편의 작품은 각기 그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젊은 문학도들에게 패기와 정열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삶의 이름으로건 예술의 이름으로건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소설 같은 소설’ 한 편을 적당히 꾸려내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 아닐까. 그러나 그 가운데 좋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이 특별히 주목한 작품은 ‘소년’‘달을 보고 짖는 개’‘펑크로커 실종기’‘빛이 스며든 자리’ 등 4편이었다. ‘소년’은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난 한 소년의 미래없는 삶을 진지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호감을 샀지만,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삶에 대한 진실을 움켜 쥘때 문학적 형상화도 함께 따라올 것이다.‘달을 보고 짖는 개’는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솜씨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지만, 주제와 구성에서 독창성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잘 만든 이야기, 그러나 너무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반복되는 낡은 이야기에 새로운 진실이 담기기는 어렵다. ‘펑크로커 실종기’는 누아르 서사의 형식 속에 펑크족들의 생활양태를 담은 소설로 문장이 경쾌하고 구성이 치밀했다. 훌륭한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도 그만큼 많았다. 무엇보다도 한 세계의 겉과 속을 심도있게 성찰하려 하기보다는 이미 알려져 있는 문화적 코드들을 조합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펑크족은 펑크족이다.’라는 말 이상의 매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풍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시선에서 온다. ‘빛이 스며든 자리’는 구렁각시의 민담과 피그말리온의 전설을 현대의 사진예술론으로 재해석하는 가운데 현실과 환상을 정교하게 봉합해서 꾸며낸 예술가 소설이다. 새로운 창조의 자리가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다는 주제의 설정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의 정진을 빈다. 현길언 황현산
  • 육군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5)

    ◎“조국사랑” 참군인 정신 일깨운다/선사시대 이래 군사자료 8,600점 한눈에 金日成 작전명령서·베트콩 전단까지/부서진 총열·녹슨 수통·구멍뚫린 철모…/장렬히 숨져간 무명용사의 외침 절절이 불암산의 서기(瑞氣)가 어린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호국 간성의 요람인 이곳에 들어선 육군박물관은 일반인들의 군(軍)에 대한 거리감을 친근감으로 바꿔주는 묘한 공간이다. ‘한국의 시인 건축가’ 金重業씨(88년 작고)가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그 물꼬를 트는 상징으로 열쇠 형상을 택해 설계했다는 이 건물은 흰색 화강암 건물로 잔디와 숲으로 차분히 정돈된 육사 캠퍼스 남쪽 끝에 들어앉아 있다. 정면에 연병장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바로 앞에는 고 姜在求 소령 동상이 달려가는 듯한 자세로 서 있다. 30여년전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훈련장에서 부하를 구하고 산화한 그의 모습은 오늘날 이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참군인정신과 함께 참나라사랑의 정신을 일깨워 준다. 육군박물관은 이 땅에서 ‘저질러진’ 전쟁에 관한 많은 것을 증언한다.지상3층 지하1층 건물중 고대실·현대실 등 두 개의 전시실에는 가깝게는 6·25전쟁에서부터 임진왜란,멀리는 선사시대의 군사 관련 유품과 문화재까지 모두 8,6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의 가치는 유형의 물질에서 옛 사람들의 혼과 정신을 만나는데 있다고 했던가. 전시실을 떠받치고 있는 14개의 원추형 돌기둥이 두 열로 돌아나간 옥외 전시장에서 당시의 총통과 대포들이 전장의 신음을 오늘에 전한다. 건물 중앙으로 맞닿은 기둥 사이에 朴正熙 대통령이 서거 때까지 타던 캐딜락과,맹호부대가 월남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한 ‘안케패스 전승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군인으로 시작해 대통령이 되고,또 독재자로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한 불운한 정치인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볼 수 있다. 3층에 위치한 현대실에는 광복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각종 무기와 장비 복식 문서 등 4,500여점이 전시돼 있다. 현대사의 흐름을 요약한 다양한 색과 제각각 형태의 볼 것들이 눈을 자극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은 6·25전쟁이다. 전쟁에 쓰였던 장비와 전단 복장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붉은빛 일색인 공산군의 그것들은 지금도 섬짓한 느낌을 전한다. 어느 시인은 뜰 안에 핀 장미꽃 빛깔에도 가슴이 내려앉는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 0097호’에는 金日成이 전쟁중 직접 작전을 명령한 극비사항이 적혀있다. 1951년 8월8일로 찍혀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지령문’도 있다. 특히 6·25전적지인 설악산 소청봉에서 유골과 함께 발굴된 무명용사의 유품 앞에는 관람객들이 유난히 많다. 소총의 총신부분과 녹슬은 수통·구멍뚫린 철모.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전장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다가 외롭게 숨져갔을 그의 외침이 귓전을 때리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6·25전쟁중 물자가 고갈되자 인민군이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쓴 병뚜껑으로 만든 모표,허름한 방한화,버선,철모,수통 등이 월남전 당시의 궁색한 베트콩 군수품과 나란히 진열돼 있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고향의 달밤,임이 그리워 밤마다 웁니다.”“그리운 이여! 딸라도 선물도 싫어요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의 산 목숨뿐” 등 월남전 당시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살포됐던 전단도 눈길을 끈다. 2층의 고대실에는 선사시대부터 대한제국 이전까지의 군사관련 문화재 4,128점이 시대순으로 전시돼 있다.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주먹도끼 등 석제무기와 3∼4세기 신라의 철검·무쇠도끼·무쇠창 등 철제무기들은 인류를 말살할 수 있을 정도의 현대무기에 비하면 정겨운 느낌마저 든다. 한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조선후기 화살 연발장치인 녹로노나 부녀자도 쏠 수 있게 만든 수노(手弩)인 삼시수노기(三矢手弩機)가 복원품이긴 하지만 눈길을 끈다. 화살을 4개까지 장전해 쏘던 조선전기의 사전총통(四箭銃筒),조총,화강암 탄알인 단석(團石),발사기인 대완구(大碗口)와 비격진천뢰쯤에 이르면 본격적인 전쟁 분위기가 풍긴다. 대완구는 국내 유일한 것이며 비격진천뢰도 연세대박물관과 함께 유일한 소장자로 돼있다. ‘부산진 순절도’와 ‘동래부 순절도’는 임진왜란 당시 군민(軍民)들의 처절한 항전모습을 담은 보물들이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연병장 길을 따라 오른 쪽으로 접어들면 헬리콥터 장갑차 곡사포 전차들이 도열한 야외전시장에 접어들게 된다.50년 6월25일 남침의 선봉에 섰던 북한군 탱크 T­34와 이에 맞섰던 미제 M46탱크,전쟁초기 투입된 적 관측및 업무연락용 항공기 L­19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40여년 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첨예하게 대치했던 주인공들이 지금은 친구가 되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관장 姜性文 중령/“40년 전통 국내 유일 군사종합박물관”/군사문화 발달과정 전시/전쟁유적지 학술 조사도 육군박물관의 현 관장 姜性文 중령(53·18대)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주2회씩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수이기도 하다. 지난 96년 12월 관장직을 맡아 박물관 운영을 책임지랴 강의준비 하랴 하루하루가 바쁘기만 하다. 특히 지난해 2월부터 육사 경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관람객이 늘어나는 바람에 할 일이 부쩍 많아졌다. “용산의 전쟁기념관이 한국전쟁에 초점을 맞춘 전쟁과 무기중심의 기념관 성격을 갖추고 있다면 육군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군사관련 종합 박물관입니다. 40년이 넘은 전통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경내를 둘러보는 관광상품이 마련되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지요” 육군박물관은 56년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으로 처음 문을 연뒤 10년만인 66년 육군사관학교 군사(軍事)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83년 지금의 자리에 새 건물이 완공돼 2년뒤인 85년 개관했다. 주변의 넓은 공원 분위기와 어울려 딱딱하게 느껴지는 군사문화를 순하게 바꿔낸다. 군사유물을 통해 군의 업적과 전통·발전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시형태가 독특하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유형적인 군사관련 소장품들이 무형의 자산을 표현한다고 할까요.외침이 있을 때마다 민군(民軍)이 일치단결해 민족 수호에 나섰던 조상들의 자취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자부심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지요” 비록 군사문화를 다룬 박물관이지만 전통문화 유지역할에 큰 몫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는게 姜관장의 설명이다. 휴전선 일대 군사유적지에 대한 학술조사와 군사유물에 대한 논문지 발간도 활발하다. 지난 94년부터 파주·연천·철원·포천군 지역의 산성·봉수대·한국전 격전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벌여 보고서를 작성해 왔고 학술 논문지 ‘학예지’도 통권 5권을 펴냈다. 육군 박물관이 군사(軍史)를 다룬 박물관인 만큼 대학 역사교육의 보조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대학의 역사교육에는 군사 문화재의 발달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빠져 있지요. 이 틈새를 메울 수 있는 박물관이 바로 육군박물관입니다. 소장품들이 모두 가치있는 자료들인 만큼 영구보존을 위한 전시장 보완이 시급합니다” ◎육군박물관 가는 길/전철·노선버스 연계/육사후문으로 입장 70만평의 캠퍼스안에 다양한 레포츠 시설과 편의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는 특수목적 대학인 육군사관학교 안에 자리잡은 이색 박물관이다. 육군사관학교가 관리 운영하는 군 관련 시설인만큼 일반인들의 접근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그러나 지난해 봄부터 육사 경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됐고 관광코스도 마련돼 있어 뜻만 세우면 얼마든지 알찬 볼거리들을 만날수가 있다. 전철 1호선이 석계역,7호선이 먹골역까지 닿아 있고 노선버스는 45­2,803,45,745번이 운행한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서울여대 앞에서 내린다. 매일 상오 9시 호텔신라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도 있다. 육사 후문에서 안내를 받아 박물관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으며 정기 관광코스는 상오 10시와 하오 2시 등 매일 두차례. 화요일∼일요일 개관하며 관람시간은 상오 10시부터 하오 4시까지. 관람료는 어른 2,000원,학생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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