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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율의 공간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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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선의 섬에서 직선의 삶을 보다[박상준의 문장 여행]

    곡선의 섬에서 직선의 삶을 보다[박상준의 문장 여행]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자! 자신의 ‘좋은 것’이 명확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다. 요즘 여수의 내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은 ‘삶은 계란’이다. ‘삶은 계란’을 아침에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은 내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김정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21세기북스) 중에서 ‘뜨거운 여름 한가운데 있는 휴가는 각자의 슈필라움을 물어보기 좋은 기회다. 여수는 김정운 작가가 아니어도 그런 휴가지로 알맞다. 물론 ‘여수 밤바다’의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에 귀 기울이다 돌아와도 무방하다. 내가 함께 걷고 싶은 것이 바다인지, 거리인지, 당신인지, 나의 맘인지 조금은 선명해질지도. 그것만 알게 돼도 충분하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 김정운 작가는 ‘자뻑’이 심하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자신을 많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그의 썰렁한 농담(글)은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또 평균 수명이 50세도 안 되던 시절에는 ‘직선의 삶’이 유효했을지 몰라도, 100세 시대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가 아니라 되면 하는 거라고. ‘곡선의 섬’에서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 ‘직선의 삶’에 관한 통찰이려나.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일, 그것을 살펴보고 나아가는 용기일 테지. 그러니 여수 남쪽 섬의 미역 창고를 개조해 자기만의 공간을 만든 그를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책은 문화심리학자인 작가가 자신의 슈필라움에서 쓴 글과 그림을 실은 책이다. 슈필라움은 ‘놀이(Spiel)’와 ‘공간(Raum)’을 합친 독일말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이다. 우리말에는 없는 단어다. 우리에게 그런 삶의 공간이 드물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가 붙인 슈필라움의 이름은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는 뜻의 미역창고(美力倉考)다. 그의 여수 생활을 더듬더듬 읽어가다 보면 우리 모두에게 보잘것없어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공간은 공간이기도 하고 시간이기도 할 것이며, 각자의 삶을 억누르는 틀을 깨고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미리 말하지만 김정운 작가의 미역창고를 찾아가라는 제안은 아니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않아야 하듯,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남이 좋아하는 것을 헷갈려도 곤란하다. 그리고 여수에는 하루 또는 며칠 정도 슈필라움이 되어줄 만한 섬이 많다. 내 경우는 장도가 여수의 슈필라움이다. 장도는 GS칼텍스재단이 지역사회 공헌 사업으로 조성했다. 섬 전체가 복합문화예술공원이다. 여수 사람들은 ‘질다(길다)’는 전라도 사투리를 그대로 붙여 진섬(長島)이라 부른다. KTX는 여수엑스포역보다 여천역에서 내려 웅천친수공원을 목적지 삼는 게 편하다. 웅천친수공원에 내려 바다 위로 놓인 약 335m의 진섬다리를 걸어 들어가면 장도다. 물때에 따라 입도가 힘들기도 한데 예울마루 홈페이지(www.yeulmaru.org)에서 출입 가능 시간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그래봐야 물에 잠기는 시간은 고작 2~4시간 정도다.) 명색이 섬인데 꽤나 쉬워 허망한 당도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답은 늘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지 않던가. ●장도에서 만난 예술의 길·정원의 길 가을을 전제하기에는 했어도, 김정운 작가는 여수의 잔잔하고 따뜻한 앞바다에서 리스트의 ‘콩솔라시옹(Consolation)’을 떠올린다 했다. 콩솔라시옹은 ‘위로’를 뜻하는 말이다. 작가처럼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까지는 아니어도 진섬다리를 건너며 들을 만하다. 해수욕장의 시끌벅적한 생기가 가라앉고 고요히 바다 위를 걷는 듯하다. 진섬다리 중간 즈음에는 천진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갯바위 위에 선으로 빚은 종이학, 꽃, 게 등이다. 그러고 보니 장도 입구에서 달팽이 작품을 본 듯하다. 텅 빈 작품의 몸체는 배경이 색을 대신한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중화가 최병수 작가의 작품이다. 2005년 요양을 위해 여수 섬에 내려왔고 정착했다. 장도는 크게 서쪽 해안의 창작스튜디오를 지나는 예술의길(편도 30분), 반대편 동쪽 숲을 거니는 둘레길(편도 40분), 그리고 다도해정원과 장도전시관 사이 섬 가운데 언덕을 지나는 정원의길(편도 20분)로 나뉜다. 어느 길로 가든 섬 남쪽 끝의 전망대가 목적지다. 육지 가까운 반대편 북쪽은 저녁이 화려하다. 장도는 오후 10시까지 야간 개방하는데 이이남 작가가 장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미디어 파사드가 볼거리다. 앞서 말한 최병수 작가의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목적이 될 수 있다. 최 작가의 작품에는 친절한 글이 있어 좋다. 설명이나 해설보다는 사유를 이끈다. 예술의길 해안 구간이 끝날 즈음에는 우물쉼터가 나오는데, 바다 쪽 돌담 위에는 자그마한 그릇 하나가 놓여 있다. 최 작가의 ‘달그릇’이다. “작은 그릇에도 우주가 있습니다”라는 설명이다. 달그릇은 주위 풍경을 색으로 입는다. 바다를 담으니 바다 그릇이고 산을 담으니 산 그릇이다. 그 위에 작은 초승달 하나가 걸려 있다. 그 또한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그믐달이기도 하겠다. 장도에는 1930년 초 정채민 씨 일가가 입도해 2015년까지 주민들이 살았다. 우물쉼터에는 나이 든 팽나무 그늘에 펌프 하나가 자취로 남아 있다. 그럼 달그릇은 섬사람들의 기억과 우주를 남기고픈 작가의 바람이기도 했으려나. 그 한 그릇에도 슈필라움이 머문다. ●‘관대함’에 고요히 눈을 맞추다 우물쉼터에서 숲길을 걸어가면 곧 전망대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망대는 아니고 섬의 남쪽 끝에서 가장 먼바다를 마주한 자리다. 난간에는 허공에 옆얼굴 선을 그린 듯한 최 작가의 ‘얼솟대’가 기다린다. 솟대는 평안과 안녕을 빌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 소통의 의미가 있다. 이번에는 ‘우리 얼굴 역시 솟대입니다’라는 글을 덧붙였다. 장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고 많은 이들이 그 곁에서 사진을 찍는다. ‘섬’이라는 글자에서 ‘ㅅ’을 뺀 ‘ ’ 모양의 솟대도 있다. 먼바다의 섬(△)을 겹치니 ‘섬’이라는 글자가 완성된다. 그리고 전망대 우측에는 작은 쪽문이 있으니 잠시 열고 나가 보시길. 섬의 지반을 이루는 바위 기슭 위의 벤치가 쉼을 권한다. 쉬이 지나치기 쉽지만 여유로이 머문 이들은 어렵잖게 찾아낸다. 나는 장도에 갈 때마다 그곳에서 얼마간 숨을 고른다. 도심은 뒤로 하고 눈앞에는 다도해의 섬들이 어른댄다. 그 어딘가 최병수 작가가 사는 섬이 있고 김정운 작가가 사는 섬이 있다. 그들의 슈필라움과 나의 슈필라움이 고요하게 눈을 맞추는 찰나다. 전망대에서는 장도전시관과 아트카페가 가깝다. 마침 전시실에서는 ‘소나무’ 시리즈로 잘 알려진 배병우 사진작가의 ‘여수진경(麗水眞景):하늘과 땅 사이(7월 15일까지)’가 한창이다. 여수는 그의 고향이다. 최초의 방이자 떠나고 싶은 방, 고향은 태초의 슈필라움일 테니까. 장도전시관에서 전망대 반대편으로 나가면 너른 정원이 열린다. 그쯤이 섬의 정상일 듯하다. 하프 모양의 나무를 지나서는 다시 다도해정원이다. 실은 진섬다리에서 가장 가까운 계단이라 곧장 올라올 수 있는 위치다. 그럼에도 섬을 한 바퀴 돌아 다다르니 몸의 열기가 진정되며 섬에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무엇, 마음 한켠에 몽글몽글한 감정이 새순처럼 솟아난다. 분명하지 않아도 안도라는 건 알겠다. 좋아하는 것들은 막연해도 선명하다. 조금 길게 머물겠다면 벤치가 있는 정원의 쉼터를 권한다. 남쪽의 반대편 풍경, 여수 내륙을 바라보는 자리다. 7월 초 개장한 웅천해수욕장은 여름 피서의 풍경이 안긴다. 더위를 피하는 대신 더위에 맞서 즐기는 사람들. 저들 또한 각자의 슈필라움을 찾은 듯하다. 그 순간을 일상에서 지속하고픈 게 모두의 바람일 테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 여행을 떠나온 것일 테지. 김정운 작가는 자기만의 방의 출입문은 앞으로 당기는 여닫이가 아니라, 옆으로 밀어 여는 미닫이라고 했다. 조금씩 보여야 한단다. 그걸 천천히 밀어 열어야 한다고. 타인의 마음도 “사랑할수록 조금씩 밀어 여는 거”라고. 하물며 나의 마음이야. 그는 여수에서 가장 ‘좋은 것’이 아침에 먹는 ‘삶은 계란’이라 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장도의 시간’을 지나고 나니 그 계란 맛이 궁금하다. 결국에는 그 작고 좋은 것이 직선의 삶에서 곡선의 섬이 필요했던 이유는 아니었을까. ●7월 8일의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장도에서 돌아나가는 길에는 정면 망마산 기슭의 GS칼텍스 예울마루가 눈을 맞춘다. 폭 23m, 길이 152m의 초대형 유리 지붕(Glass River)은 6개의 층으로 물결치듯 흘러내린다. 건물은 산 안쪽으로 몸을 숨긴 채다. GS칼텍스 예울마루는 대극장과 소극장, 전시실 등을 갖춘 복합아트센터다. 프랑스국립도서관(BNF)을 설계한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지었다. 건축가의 의도와 맥락은 예울마루에서 출발해 다리 건너 장도를 잇는다. 예울마루의 건물이 산속에 자리해 망마산의 자연을 넘보지 않듯, 섬 끝의 장도전시관 역시 땅 아래 지어 섬의 지형을 해치지 않고 바다로 스민다. 물론 장도전시관 또한 그가 디자인했다. 그러므로 진섬다리를 건너오며 예울마루를 다음 목적지 삼을까 고민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세계적 건축가의 공간을 탐험한 후에는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즐겨도 좋을 듯하다. 여행지에서 공연이나 전시를 보는 건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또 하나의 경험이다. 군중 가운데 잠시 홀로 머물 수 있는 ‘섬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건 기회다. 다행히 예울마루에서는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공연이 종종 열린다. 장도가 있는 여수시 웅천동은 이순신 장군과 밀접하다. 웅천해수욕장 동쪽 멀지 않은 거리에는 이충무공자당기거지(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가 있다. 장군은 효성이 지극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 변 씨 부인을 여수로 모셨다. 난중일기에는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망마산(望馬山)의 이름 역시 이순신 장군이 전세나 훈련 상황을 살피기 위해 말을 타고 올랐던 산을 의미한다. 이순신 장군이 군관 나대용 등과 거북선을 만든 여수 선소유적 역시 바로 고개 너머다. 항만시설인 굴강, 거북선을 매어두던 계선주, 지휘소였던 세검정 등의 관련 흔적이 남아 있다. 다만 화려하지는 않다. 그저 물길 건너편 벤치에 앉아 선소로 들고나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거북선이 만들어져 세상으로 나아가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따름이다. 하지만 거북선의 시작이 된 자리를 직접 목격하는 일은 어찌할 수 없는 감격이다.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해 승전보를 얻은 건 사천해전이다.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에 이은 이순신 장군의 세 번째 전투다. 1592년(임진년) 음력 5월 29일, 양력으로는 이맘때인 7월 8일의 일이다.
  • 국가대표로 38년… 지금 까지도 선수촌 남은 ‘영원한 국대’[스포츠 라운지]

    국가대표로 38년… 지금 까지도 선수촌 남은 ‘영원한 국대’[스포츠 라운지]

    대한민국 첫 하계올림픽 준비로 온 나라가 분주했던 1987년. 탁구밖에 몰랐던 17세 고교생 김택수도 꿈을 좇아 고향 광주에서 서울로 향했다. 올림픽이라는 가장 큰 무대에서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태극기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도착한 곳, 태릉 국가대표선수촌. 어느덧 55세 장년이 된 김택수는 처음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제 가슴이 가장 뜨겁게 뛰고 흥분됐던 때죠. 지금의 제가 있게 만들어준 곳이 태릉, 국가대표 선수촌입니다.” 국가대표 생활을 시작한 지 38년이 지난 지금도 김택수는 여전히 선수촌에 있다. 다만 지금은 선수촌 위치가 서울 공릉동에서 충북 진천으로 바뀌었고, 그의 위치도 코치, 감독을 거쳐 선수 시절 멀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선수촌장’으로 달라졌다. 촌장실에서 진천선수촌 전경을 바라보면 태릉에서의 첫 입촌 순간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는 그를 지난 14일 만났다. 선수촌 행정동 2층 촌장실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꽃길’이었다. 2년 임기의 촌장에 공식 취임하면서 체육계와 재계 등에서 보내온 꽃바구니와 난 등이 놓여있었다. 현실은 가시밭길이다. 공교롭게도 그를 만난 날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스포츠윤리센터에서 대한탁구협회 기관 징계를 요청했다. 탁구협회 부회장 때 일과 관련해서다. 협회가 규정을 위반해 후원금을 유치한 임원에 인센티브를 제공했다는 조사 결과에 김택수는 “체육인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평생 탁구인인 김택수는 유승민 대한체육회장과 각별한 관계로 주목받았다. 현역 시절 그는 띠동갑 동생인 유 회장에게 닮고 싶은 우상이었고,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선 스승과 제자로 호흡을 맞춰 ‘만리장성’을 넘고 남자단식 금메달을 일궜다. 은퇴 후 두 사람은 탁구협회장과 부회장으로 한국 탁구 발전을 이끌었고, 이제 체육회장과 선수촌장으로 한국 체육계 전반을 관장하게 됐다. 특히 아테네올림픽 당시 김택수는 대표 선발전을 1위로 통과했으나 스스로 태극 마크를 반납하고 대표팀 코치로 변신해 후배의 훈련을 전담했다. “마지막 올림픽에 대한 미련도 없지는 않았다”는 그를 ‘킹 메이커’로 끌어들인 사람은 여자 대표팀 코치를 맡은 현정화 한국마사회 감독이었다. 김택수는 “당시 협회 권유에 고민하던 차에 현 선배가 ‘내가 여자팀, 너가 남자팀을 맡아서 일 한 번 내보자’라고 해서 마음을 굳혔다”면서 “마음을 비운 그 즉시 중국 분석에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유 회장이 유난히 약했던 중국 왕하오에 대비하기 위해 김택수는 손목 인대가 늘어날 정도로 왕하오의 이면 타법을 직접 익혀 금메달 사냥을 도왔다. ‘도와달라’는 유 회장의 요청에 촌장 자리에 앉은 그는 ‘열린 선수촌’을 표방한다. 외부적으로는 그간 폐쇄적이었던 엘리트 선수만의 선수촌을 유소년과 일반에도 개방해 꿈을 심어주며 체육 저변을 넓힌다는 복안이다. 내부적으로는 촌장-지도자-선수 수직 구조가 아닌, 같이 뛰는 선후배의 공간을 꿈꾼다. 취임 초 격무 탓에 “주말을 이용해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간만에 푹 쉬었다”는 그가 선수촌에서 매일 오전 6시 선수들과 새벽 운동을 함께하는 이유다. ‘라떼(나 때) 태릉식 훈련’은 머리에서 지운 지 오래다. 규율과 통제보다는 존중과 자율의 선수촌을 지향한다. 다만 종목별 대회 일정에 맞춘 ‘본훈련’만큼은 양보가 없다. 김택수는 “선수촌에 와서 가장 먼저 바꾼 게 새벽 훈련 자율화”라며 “요즘은 누가 시켜서 하는 세대가 아니다. 자율 훈련임에도 새벽에 나가보면 여전히 많은 선수들이 선수촌의 찬 공기를 가르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이제 우리도 올림픽에서 메달을 몇 개 더 따고 못 따고를 따지던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흔히 인기, 비인기 종목을 나누는데 여기 선수촌에는 대중이 잘 알지 못하는 ‘미인지 종목’도 있거든요. 비인기, 미인지 종목에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어요. 그게 우리나라 체육 생태계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년 뒤 어떤 촌장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김택수의 답변이다.
  • 코로나19 청정지역 광명시 다중시설 방역 등 적극 선제조치

    코로나19 청정지역 광명시 다중시설 방역 등 적극 선제조치

    박승원 경기 광명시장은 25일 페이스북을 통해 “24일 보건소 선별 진료소가 29명을 검체 조사한 결과 모두 음성 판정이 나왔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광명에는 코로나 확진자가 1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박 시장은 “광명시는 코로나19 심각단계 격상에 따라 더 적극적으로 확진 방지에 나서고 있다”며, “기존 다중이용 시설뿐만 아니라 도서관과 종교시설·체육관 등 영역을 넓히고 방역 업체와 방재단 등에서 적극 활동하고 있으며, 광명에 신천지교회는 없지만 복음방 형태 공간들은 패쇄 조치했다”고 전했다. 광명시는 현재 마스크 수량은 계속 확보중에 있고 취약계층에 대한 보급은 1차 마쳤다. 수요 파악을 통해 버스및 택시 등 주요 단체에 단계적으로 지급하고 있다. 주요 시설은 폐쇄하고 휴관·휴강하고 있다. 수영장이나 노인복지관·체육관 등은 이미 대부분 휴관중이며 도서관도 휴관 예정이다. 또 어린집 등은 자율의사에 맡겨 운영하고 있으나 확진자 발생시 휴원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손세정제도 주요 시설에는 비치하고 있고 부족한 경우에는 락스 등을 희석해 사용할 수 있도록 홍보하고 있다. 그러면서 박 시장은 “광명7동의 한 주민은 스스로 매일 아파트를 방역하고 있다는데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광명시가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심각한 상황을 서로 이겨내겠다는 시민 모두의 의지가 필요하고 가짜뉴스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 응원하자”고 당부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길섶에서] 줄에서 벗어난들/박현갑 논설위원

    도시생활은 줄서기의 연속이다. 출퇴근길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입구나 음식점 계산대 앞 등 수많은 줄서기를 한다. 선택의 연속이기도 하다. 지하철 차량의 어떤 공간을 이용할지, 할인마트 계산대 앞 행렬 중 어디에 설지 등 늘 고르게 된다. 줄서기가 사회구성원이 지켜야 할 기계적 규범이라면, 선택은 자율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 자율은 일탈이라는 유혹과 마주할 때가 많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여유공간을 찾는다. 핑크빛 임산부석이 유혹하지만 선택지 밖이다. 아니 기피석이다. 앉았다가 임산부로 보이는 승객에게 비켜 주면 될 텐데 모두들 피한다. 눈총을 받기 싫은 게다. 지하철 역사 안은 또 다른 유혹의 공간이다. 같은 차량, 다른 칸에서 내렸으나 어느덧 동료가 돼 버린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3~4층 위 개표구까지 느릿느릿 갈 것이냐, 승차자 보행공간으로 표시된 라인을 넘나들며 잰걸음으로 갈지를 정해야 한다. 대부분은 행렬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늦었다 싶은 날에는 탈선하는 발걸음도 많다. 산다는 건 줄서기와 선택의 연속이다. 남이 대신해 주면 좋겠지만 이런 일상도 늙게 되면 할 수 없으니, 생활 속 가벼운 일탈을 가자미눈으로만 쳐다보진 말자.
  • 국가 아닌, 시민이 이끄는 민주주의란

    국가 아닌, 시민이 이끄는 민주주의란

    2년여 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로 진화하고 있는 시대에 그 공약은 각계각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주류의 목소리와 이해관계에 무게중심을 더 둘 수도 있다는 위험이 내포돼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집권 3년차. 사회 곳곳에서 그런 우려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고 있다. 정부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비판을 토대로 소통이 이뤄져야 할 민주주의 공간이 국민 내부의 갈등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일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관리하기 위해, 또 국가 중심으로 진행되던 공적 기능과 윤리가 기업, 언론, 시민사회 등으로 넓게 퍼져 스며들어가는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미시 민주주의’라는 담론을 내놓고 있는 조대엽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미시 민주주의의 더욱 실제적인 모델로 ‘생활민주주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조 교수가 내놓은 저서 ‘생활민주주의의 시대’(나남 펴냄) 속 생활민주주의는 이분법적 가치 분류를 지양하는 탈이념의 민주주의 모델이며, 수평적이고 네트워크적이며 참여적인 정치양식 자체를 구현하는 정치 질서를 일컫는다. 그에 따르면 시민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실질적 시민주권으로서 자율의 가치를 핵심으로 하는 ‘생활주권주의’, 국가와 정당이 개인과 책임을 공유하는 ‘생활책임주의’, 마지막으로 공공적 질서를 기반으로 사회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연대하는 ‘생활협력주의’로 구성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환경, 여성, 평등, 인권, 반핵, 복지, 소수자 등의 이슈로 시도되는 시민운동의 정치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생활정당 모델의 출현이다. 특히 생활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최근 정치권에서 여전히 논란 속에 있는 복지담론에 접근하면 비판의 여지와 생활정치의 활동 공간은 더욱 넓어진다. 재정의 소요, 분배 등의 문제로 국가 시혜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복지담론은 국가중심적 정치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는 한계를 내비치고 있다. 조 교수는 자아실현과 자기확장의 정치과정으로서 복지의 생활정치적 재구성을 촉구한다. 그가 제시하는 생활민주주의는 국가주의 정치패러다임에 갇혀 보수주의, 지역주의, 권위주의, 파벌주의 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정당정치를 겨냥한다. 실제 생활정당 모델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이나 ‘중도개혁정당’ 등과는 거리가 있다. 시민, 노동, 생태기반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만큼 생활시민, 노동시민, 생태시민이 주체가 되며 분권정당, 합의정당, 참여정당의 운영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데스크 시각] 체벌의 변증법/심재억 사회부 부장급

    [데스크 시각] 체벌의 변증법/심재억 사회부 부장급

    당신은 학교 체벌과 관련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습니까? 그 기억 속의 체벌이 자신의 과실에 대한 징계였든, 아니면 단체 규율 차원이었든 다 좋습니다. 그 체벌은 당신에게 아름다움입니까, 아니면 모욕스럽거나 혐오스럽도록 잔혹하고 일방적인 그 무엇입니까. 효율만 따지자면 체벌은 여전히 효과적인 리더십의 비밀병기일 수 있습니다. 또 학교라는 갇힌 공간에서 작위적으로 권위를 급조해 내는 요술방망이일 수도 있지요. 여러분이 체험했던 군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까요. 사실,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거나, 현실 너머의 이상에 눈길을 주지 못하는, 그래서 하찮은 절차적 문제 때문에 효율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체벌은 여전히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가의 보도’입니다. 단시간에, 군더더기 없이 지시나 명령을 수행하게 하는 마력, 그런 가학의 관습이 만든 무한한 권능의 단맛은 마약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는 대부분 이런 폭력과 체벌을 체화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체벌로 집체적응력을 키웠고, 사회에서는 음험한 폭력의 위협 때문에 일사불란한 복종과 순응의 미덕을 자기 내면에 이식해야 했습니다. 그런 기성세대에서 체벌옹호론이 불거집니다. ‘교권의 위기’라는 그럴 듯한 수사로 포장된 체벌옹호론은 본질적으로 목표에 집착하는 성과주의의 부산물이자 본질을 배제한 효율지상주의적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정체된 가치로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논란에 대해 변증법은 아주 간명한 이해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변증법적 진보의 핵심 개념인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상이나 가치는 결국 모순을 노정하게 되고, 이 모순에 대한 반동이 새로운 진보의 촉매가 됩니다. 이를 변증법론자들은 ‘정·반·합’으로 정리합니다. 그런 점에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전격적인 체벌금지 선언은 일부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인 셈이지요. 지금도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습관화된 폭력’에 노출돼 있으며, 그들이 학교라는 닫힌 공간에서 구호나 변론의 여지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체벌은 ‘아주 오래, 그리고 공공연히 지속돼 온 응급상황’이며,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절차적 문제는 오히려 하찮습니다. 때리면 얼마나 때리겠느냐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고 방종한 상황인식입니다. 국내 중·고교생의 70%가 교사 체벌을 경험했으며, 이 중에 매주 3회 이상 체벌을 받는 학생도 7.4%나 된답니다. 스웨덴의 중·고교생 98.6%가 체벌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과 견줘보면 참혹하고 부끄럽습니다. 혹자들은 체벌 금지가 교사의 교육권을 위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체벌을 통한 통솔이 오히려 교육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문제를 갖습니다. 교육권의 훼손이 비본질적이라면 교육의 가치 훼손은 본질의 문제입니다. 교육의 가치는 지식의 습득이나 군대식 규율 주입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이 사회에 기여하게 하고, 윤택한 삶을 꾸리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체벌 옹호론자들은 체벌을 통해 완성하는 집체화가 바로 사회생활의 기본이고, 우수한 시민의 조건이라고 우깁니다. 프랑스에서 이런 인지행동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개에게는 체벌 없이 음식을 제공했고, 다른 개에게는 매질을 한 뒤 음식을 먹도록 했습니다. 4주 후 매를 맞지 않은 개는 매우 창의적으로 감춰진 음식을 찾아내는 반면 매에 길들여진 개는 음식을 찾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기를 망설였으며, 누군가 매질을 하자 그제야 편하게 음식을 먹더랍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매질에 길들여진 타율의 객체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모든 체벌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의 주체로 자라기를 바라십니까. jeshim@seoul.co.kr
  • [문화마당] ‘황혼에서 새벽까지’/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2002 한·일월드컵’의 즐거운 난장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왜 이 제목을 뽑았는지 알 것이다. 한국 축구가 포르투갈을 꺾고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을 때, 그리고 기적같은 역전승으로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했을 때, 세종로 사거리는 밤부터 새벽까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도심 속을 활보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어디 세종로뿐이랴. 전국의 모든 거리는 마치 브라질 ‘삼바축제’나 독일의 ‘러브퍼레이드’를 연상케 할 만큼 열정과 환희로 뜨거웠다. 4년 전 이탈리아전 승리를 경기장에서 지켜본 나는 그날 새벽까지 대전 시내를 관통하며, 광란의 질주를 벌이던 청년 폭주족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평상시 같으면 폭주하는 청소년들에게 손가락질하던 기성세대들도 그날만큼은 관용과 박수로 응답했다. 흔들리는 버스 위로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청년들, 다양한 태극 스타일을 뽐내는 여성들, 늦은 새벽까지 거리를 활보하는 10대들은 규범과 권위의 도시를 낭만과 자율의 도시로 바꾸어 버렸다.‘2002 한·일월드컵’의 시간과 공간은 러시아 문학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의 말대로 서로 이질적인 주체들이 모여서 다성적인 목소리를 내는 카니발의 세계였다. 지구촌을 카니발의 세계로 만들 월드컵이 다시 4년 만에 찾아왔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6회 연속 본선에 진출했고, 아드 보카트 체제 아래 세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할 기적을 준비하고 있다. 기적은 경기장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4년 전 거리에서 벌어진 기적같은 응원의 열기, 우리는 이 카니발의 기적을 다시 기다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2006 독일월드컵’은 시차 때문에 우리 시간으로 늦은 밤, 아니면 새벽에 한국 경기가 열리게 된다. 거리 응원의 환경은 최악이다. 과연 시민들은 시차의 난관을 딛고 6월 전설을 떠올리며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 사람들은 경기가 벌어지는 새벽까지 무엇을 하며 지낼까? 아니 새벽에 경기가 끝나고 난 후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다시 집으로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 월드컵은 축구대회가 아닌 세계 모든 인종과 종족이 참여하는 문화축제이다. 문화축제로서 월드컵은 축구장에서만 벌어지는 이벤트가 아니라 거리로 확산되는 카니발이다. 현재 서울시와 정부 관계자들은 밤과 새벽에 벌어지게 될 한국경기의 거리 응원을 놓고 고심 중에 있다. 새벽에 벌어지는 토고와 프랑스와의 경기를 거리에서 응원하자면 적어도 늦은 밤부터 각종 문화이벤트를 열 수밖에 없고, 밤 11시에 벌어지는 스위스와의 마지막 경기 후에 시민들에게 거리를 어떻게 개방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쉬운 결정이 아니다. 안전과 교통문제를 생각해 거리응원을 포기하기에는 4년 전 마술같았던 거리응원의 유산들이 너무 아쉽다. 현재 서울시에서는 청계광장과 시청광장을 2006독일 월드컵 거리응원 장소로 지정하여 이곳에서 다양한 문화이벤트를 개최할 것을 고려 중에 있다. 벌써 몇몇 기업들은 이 곳에서 벌어질 응원문화의 마케팅 효과를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홍보전쟁을 벌이고 있다.“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시청광장의 거리응원을 후원했던 SK Telecom은 당시 수천억원의 광고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올해 독일월드컵 승리를 기원하는 거리응원은 시공간의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이제 6월이 되면 도심 거리는 치열한 문화전쟁의 장으로 바뀐다. 문제는 그 응원의 공간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거리응원은 정부와 지자체가 국민과 시민들을 단합시키기 위해, 기업이 자사의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 방송사가 자사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까? 아니면 시민들의 자발적인 열정이 넘쳐나는 문화해방구가 될까? 경기 장소가 독일이든, 경기 시간이 새벽이든 거리응원의 주인은 시민들이다. 응원의 거리는 정부와 기업과 방송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것이어야 한다. 사사로운 이익에서 벗어나, 잠시동안이라도 시민들에게 축제의 거리를 온전히 내어주는 미덕이 필요하다. 한국의 독일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는 새벽부터, 전국의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다시 마술같은 응원의 카니발이 재연되길 꿈꿔본다.“황혼에서 새벽까지”.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서울이야기] (22) 한옥마을 북촌

    [서울이야기] (22) 한옥마을 북촌

    서울은 지금 문화도시를 꿈꾸고 있다. 문화가 돈이 되고, 문화가 힘이 되는 시대에 서울의 경쟁력을 ‘문화’로 키우겠다는 바람이다. 그런데, 문화도시란 어떤 도시를 말하는가. 문화도시란 우선 기본이 탄탄히 갖추어진 도시를 말한다. 무엇보다 생존 가능한 도시, 안전한 도시여야 한다. 재해로부터, 사고로부터, 그리고 범죄로부터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지켜져야 한다. 문화도시란 지속가능한 도시여야 한다. 차보다는 사람을 중히 여기는, 걷고 싶은 도시여야 하고 약자들도 불편 없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도시여야 한다. 이처럼 시민의 편안한 삶을 담아주는 기초적 어메니티(amenity)를 갖추는 것이 문화도시의 첫 번째 요건이다. 또한 문화도시는 품격 있는 도시, 정체성이 있는 도시를 말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제각기 개성이 있고, 품격이 다르다. 다른 도시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멋과 매력, 다시 말해 자기만의 정체성(identity)을 가진 도시여야 문화도시라 부를 수 있다. 서울은 아주 매력 있는 도시다.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구릉과 평지가 어울려 다채로운 경관을 연출한다. 또한 웅장한 규모의 한강과 지천들이 도시를 굽이쳐 흐르는 빼어난 자연을 가진 도시다. 여기에 더해 서울은 600년의 역사를 보유한 역사 도시다. 그래서 농익은 술이나 그윽하게 우러난 차와 같은 서울만의 정취와 냄새, 빛깔을 가지고 있다. 문화도시의 꿈은 그러나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본을 갖추고 정체성을 지키려는 주민과 시민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시정부의 정책과 실천이 요구된다. 지금 서울에는 문화도시를 꿈꾸는 다채로운 노력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 중, 역사도시 서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문화공간을 지키고 가꾸려는 실험이 한창인 곳이 있다. 북촌이 바로 그 곳이다. ●도심속 900여채 옹기종기 지하철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오면 그곳이 바로 북촌이다. 북쪽으로 길을 걸어 올라오면 헌법재판소와 재동초등학교를 지난다. 가회로를 따라 계속 걷다가 가회동 천주교회 바로 못 미쳐 돈미약국 골목으로 꺾어 들어오면 100채 이상의 한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회동 31번지에 이른다. 회화나무집을 지나 31번지 골목길에 들어서면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기와를 맞대고 늘어선 한옥들과 골목길이 고층빌딩과 광로(廣路)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을 말갛게 씻어준다. 놀랍다. 현대화된 거대도시 서울의 한복판에 한옥마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니. 그것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정겨운 동네가 아직 있다니…. 서울시민들 중에서도 아직 북촌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안다고 해도 직접 가서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북촌은 아직도 숨겨진 동네다. 1000채 가까운 한옥이 남아 있는 북촌은 서울의 대표적 한옥마을이다. 물론 인사동을 비롯해 서울의 도심 일부지역에 한옥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긴 하다. 그러나 주거기능을 유지한 채 군락을 이루며 한옥들이 집단적으로 남아 있는 곳은 북촌이 유일하다. 북촌의 한옥은 대규모 양반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1930년대 이후에 집단적으로 조성되었다. 따라서 북촌의 한옥은 한 채 한 채가 문화재와 같은 가치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범상한 도시형 한옥들이 모여 이루는 골목길과 기와지붕들이 처마를 맞대며 펼치는 마을경관이 더욱 가치가 있다. 또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근대화 이전의 옛 주거형태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점에서도 북촌의 가치는 매우 크다. ●북촌의 새로운 실험, 북촌 가꾸기 북촌에서는 지금 새로운 실험이 한창 진행 중이다.‘북촌 가꾸기’로 불리는 이것은 주민들이 스스로 한옥과 마을을 지키고 가꾼다는 ‘마을 만들기’의 실험이면서,600년 역사도시 서울의 정취를 지닌 도심속 한옥마을을 가장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고자 하는 서울시의 야심찬 역사보전 실험이기도 하다. 이 같은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기까지 북촌은 그동안 적지 않은 몸살을 겪었다.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부 여러 지역들이 재개발사업으로 크게 변모하는 와중에도 북촌은 한옥마을로서의 원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강남개발과 학교 이전은 북촌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학교가 옮겨간 자리에 대형건물들이 세워지면서 북촌의 한옥과 전통경관의 보전 필요성이 크게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70년대 후반부터 고도지구, 미관지구 지정과 같은 한옥보존 정책과 규제가 본격화되었으나, 규제 일변도의 동결식 한옥보전방식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1990년대 이후에는 규제가 크게 완화되었다. 이로 인해 한옥을 철거하고 다가구주택을 건설하는 사례가 급증하였고, 한옥마을 북촌의 경관과 분위기 또한 크게 훼손되기에 이른다.1990년대 후반의 IMF사태도 북촌의 바람직한 미래상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9년 9월에 북촌의 주민단체 대표들이 서울시장을 만났다. 과거에 한옥보전에 반대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이들 단체 대표로부터 북촌 가꾸기를 요구받은 서울시는 새로운 정책 개발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의뢰하였고, 연구원은 주민과 전문가를 비롯해 서울시의 관련부서 공무원들과 함께 북촌 가꾸기 정책을 입안하여 서울시에 제안하였다. 새로운 정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전과 같은 행정 주도의 경직된 규제 대신에 주민의 자율의사를 존중하는 ‘한옥등록제’를 도입하여 북촌 한옥을 보전하고 되살린다. 한옥등록제는 주민들이 한옥을 서울시에 등록하면 서울시가 한옥의 수선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를 말한다. 둘째, 서울시가 직접 일부 한옥을 매입하여 개·보수한 뒤 주민을 위한 문화공간, 소규모 박물관, 한옥 게스트하우스, 전통공방 등으로 활용한다. 셋째, 북촌을 살기 좋은 마을로 가꾸기 위한 ‘북촌 환경정비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 또한 북촌 곳곳에 산재해 있는 역사문화자원을 정비하고 활용한다. ● 북촌 가꾸기 4년의 성과 북촌 가꾸기는 2001년 상반기의 준비과정을 거쳐 2001년 7월부터 한옥 등록제의 시행을 계기로 본격화되었으니, 이제 만 4년이 경과한 셈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새롭게 시작된 북촌 가꾸기는 이제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상태이고 시행초기이긴 하지만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한옥 등록제를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북촌 한옥 924동의 3분의1 이상이 주민들의 자율의사에 따라 등록되었고, 이 가운데 200채 이상의 한옥이 개·보수를 완료하였다. 한옥 매입 및 활용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2000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시는 한옥 19채와 비한옥 6채 등 총 25채를 140억원을 들여 매입하였고, 이 가운데 12채의 한옥이 새롭게 고쳐져 북촌문화센터, 게스트하우스, 전통공방, 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환경정비사업 또한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북촌에서도 한옥이 가장 온전하게 집중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가회동 31번지와 가회동 11번지의 골목길 정비사업이 2003년에 완료되어 골목길에 어지럽게 세워져 있던 전신주들이 땅속으로 묻혔으며, 콘크리트 도로포장도 황토색을 띤 전통소재의 포장재로 바뀌었다. 골목길 정비사업은 현재 북촌길과 계동길, 화동길과 풍문여고길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북촌의 변화에 따라 많은 국내외 방문객들이 북촌을 찾고 있다. 우리의 옛 주거형태와 문화에 대한 체험을 갈망하는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북촌을 찾고 있고, 한국 특유의 문화와 정취를 찾는 외국인들이 북촌방문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국내외 언론들도 북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긍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국내 언론들은 주로 새롭게 고쳐진 한옥에서의 편리하고 정취 있는 삶을 소개하고 있고, 영국의 BBC-TV와 일본의 NHK-TV도 뉴스와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북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라운 변화를 흥미롭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주민의 신뢰회복과 활발한 주민참여다. 북촌 가꾸기가 시작되기 전 북촌 주민들의 행정에 대한 불신은 아주 심각한 정도였다. 그러나 서울시의 시가 수준의 한옥 매입과 한옥등록제 시행을 통한 개·보수 비용지원이 약속대로 이루어지면서 주민들의 신뢰는 점차 회복되었다. 주민단체와 시민단체의 참여와 활동이 활발해진 것도 주목할 일이다. 주민단체인 한사모(한옥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모임)와 시민단체인 도시연대(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가 함께 주최하는 북촌 문화의 날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고, 북촌문화포럼을 비롯한 민간단체의 활동이 확산되고 있다. ●문화도시 서울 바람직한 미래모색 시행 4년째를 맞는 북촌 가꾸기는 서울의 바람직한 미래를 모색하는 중요한 실험이다. 역사 도시의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를 지키고 살리는 역사보전의 실험이면서, 문화도시 서울의 성패를 가름하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주민이 스스로의 의지로 동네를 지키고 가꾸는 마을 만들기의 실험이기도 한 북촌 가꾸기에는 문화도시 서울의 꿈과 그 가능성이 그대로 담겨있다. 북촌에서 벌어지는 실험의 성패는 아마도 두 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주민의 손, 그리고 시민의 손에. 북촌에 살면서 동네를 지켜온 북촌사람들의 역할이야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겠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시민의 몫이다. 서울의 옛 모습을 간직한 마지막 동네, 북촌은 비단 주민들만의 고향이 아니기에. 옛 동네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시민 모두의 것이기에…. 정석 서울시정개발 연구원 동북아도시연구센터장
  • 학술신간/동북아시아에서의 경제협력의 정치경제 등

    ◆‘동북아시아에서의 경제협력의 정치경제’(진창수 편,세종연구소) 글로벌화 및 EU 등 지역협의체 활동 본격화로 특징 지워지는 21세기에 동아시아 경제협력의 가능성과 대안을 모색한 책.동아시아 지역주의의 가능성,아시아통화기금 설립의 필요성,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의 가능성과 한국의 선택 등을 다루었다.7000원. ◆언어민족주의와 언어사대주의의 갈등(이민홍 지음,성균관대 출판부) 우리역사속에서 한반도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국가들의 언어,즉 중국어·몽골어·만주어 등 침략언어에 대해 우리 한민족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통시적으로 밝혔다.또 한글이 이러한 침략언어에 맞서 살아남아 찬연히 빛나는 이유가 한민족이 본원적으로 지니고 있는 언어민족주의에 기인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1만 5000원. ◆고려의 지방사회(박종기 지음,푸른역사) 한국 중세사를 전공한 저자가 고려 지방제도와 지방사회에 대한 연구 성과를 담았다.고려의 지방사회는 왕조 정부의 입장에선 지배의 거점이었던 한편,지방세력과 민의 입장에서는 자율적인 공간이었다는 점,즉 지배의 거점이자 자율의 공간이라는 결코 양립할수 없는 모순된 개념이 중첩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2만 9500원.
  • 국민회의 ‘열린 정치 포럼’ 토론회 주제 발표 요지

    새여당인 국민회의내 개혁성향 의원 모임인 ‘열린 정치포럼’은 새정부의 개혁방향과 과제를 점검했다.13일 하오 국회 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고려대 최장집 교수와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이 각각 ‘97년 대선평가와 새정부의 개혁과제’와 ‘새정부 개혁의 방향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다음은 이들 주제 발표의 요지. ◎대선평가와 새정부 개혁과제/IMF 관리로 재벌개혁 쉬워져/민주개혁 도약 위해 보수 목소리 낮추고 취약 인재풀 보강을… 새정부가 될 김대중 정부와 퇴임하는 김영삼 정부는 정부의 성립조건에 있어서 사뭇 대조적이다.김대중 당선자는 파탄난 경제를 물려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통제에 의해 대통령이 정책을 펼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거의 갖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김당선자는 김대통령에 비해 이점도 있다.그는 김대통령이 탈군부권위주의화를 사실상 완료한뒤 정부를 맡게 됨으로써 구체제의 유산과 덜 씨름하게 됐다.또 IMF의 개혁패키지가 근본적인 제약일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큰 개혁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사실 IMF 관리통제가 아니라면 재벌개혁은 불가능하다.현시점에서 개혁에 저항할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인 재벌이 상당히 약화됐다.새정부는 경제적 조건에서 최악의 조건에서 집권함으로써 개혁시 ‘전환의 계곡’을 지나는 동안 비용을 적게 치르고도 개혁이 가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정부가 재벌개혁을 시발로 실질적 민주개혁을 얼마나 밀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제약조건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첫째,새정부는 국민회의와 자민련간 연대에 의해 집권한 연립정권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자민련의 보수주의는 개혁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둘째,집권여당은 여소야대에 의해 제약된다.설사 거대야당이 분해되어 여당이 다수당이 되더라도 당내 보수그룹을 강화하면서 재벌개혁을 위한 물타기를 할 가능성이 크다.셋째,엘리트 충원의 미숙과 제약이다.국민회의가 장기간 야당으로 남아 있었던 동안 지식인 인재풀을 갖지 못했다. ◎새 정부 경제개혁 방향과과제/금리상승 압력 완화가 시급하다/중앙은 여신공급 주력/규제는 가급적 풀고 통상외교체제 서둘러야 신정부는 무엇보다 IMF 금융체제 극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우선 당면한 금융시장의 안정과 금리상승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선 금융경색을 완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에 문제가 있는 만큼 당분간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여신공급 노력이 강화돼야 한다. 취약한 국내 상업금융 기능을 확충하기 위해선 산업은행 등 특수은행의 상업은행 기능을 확충하고 금융 겸업화의 가속화를 통해 은행산업 기능을 높여야 한다.외국은행의 국내은행 인수합병(M&A)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전국 점포망을 갖는 외국은행의 출현을 조기 실현토록 해야 한다. IMF와의 약속대로 금융시장의 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추진,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이를 위해선 정리금융기관(가교은행)제도를 즉각 도입,부실 금융사의 구조조정을 통한 금융시장의 정상화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도 시급한 문제다.특별법이나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하여 구조조정에 장애가 되는 총액출자한도 규제 등 인수합병 시장 활성화를 막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인수합병시 조세부담 완화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신정부는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민간중심의 “규제개혁 위원회”를 설치,경제활력을 저해하는 각종 규제를 없애야 한다. 주요 공익산업의 민영화를 통해 경제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이를 위해 민영화촉진특별법을 제정,전기·통신·가스·철도·수도 등의 수직적 통합상태를 분리하여 경쟁상태를 조정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국제규범의 적극적 수용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이는 문제도 시급하다.WTO(세계무역기구)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다자간 협정 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통상외교체제를 통합·정비해야 한다.
  • 문화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나(「6·29」그후 5년)

    ◎“탈이념물결”… 다양한 소재·목소리 분출/등록제실시로 출판사 3천곳 신설붐/월북작가 해금… 「해방공간」문학사 복원/사전검열 폐지따라 공연예술의 자유 만끽/TV방송 공·민영시대로… 지나친 상업주의 경계해야 문화는 자율성과 다양성의 토양위에서 꽃을 피운다.강압적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화·자유화시대로의 길을 연 6·29선언은 바로 기름진 문화의 토양을 제공했다.6·29선언 이후 지난 5년동안 우리 문화는 그동안의 편협성과 경색에서 벗어나 폭넓고 자유로운 창작활동의 꽃을 피웠다.월북작가작품 해금,무용 및 연극대본에 대한 사전심의제도 폐지,출판활성화 조치등이 6·29선언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졌고 예술가의 상상력을 억압하던 온갖 금기에서의 해방과 함께 탈이데올로기 현상을 겪으며 우리 문화는 비로소 참된 다양성을 획득해 냈다. ▷문화부기자 방담◁ 김정열차장(부장급) 이헌숙기자(차장급) 윤석규기자 김성호〃 백종국〃 김균미〃 김동선〃 ­6·29선언은 문화·예술계에도 민주화의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문학·출판·미술·공연·방송·영화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특히 공연대본에 대한 사전심의 및 출판물납본제도 등을 통해 실질적인 사전검열이 행해져왔던 출판계와 공연예술계에 대한 영향은 대단했습니다. ­88년7월19일에 단행된 월북작가 작품 해금 조치는 그중 가장 뚜렷한 성과였습니다.6·29선언을 뒷받침하기 위한 88년 7·7선언의 후속조치로 나왔던 월북작가작품 해금조치는 박태원 이태준 임화 등 그동안 남한에서 접근과 출판이 용이하지 않았던 1백20여 월북문인들의 8·15이전 작품의 공식출판을 허용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운동권」 예술성 회귀 ­6·29선언은 20년대 이후 해방에 이르는 한국문학사의 공백을 메워 불구의 문학사를 고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또 문화 각 부문에 만연했던 「정치적 기준」을 「문화적 기준」으로 대체하는 상징적 조치로서 이후 보다 개방적인 문화 흐름을 선도하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운동권 문학에 있어서의 문학성의 강조경향,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열기 등도 국제정치환경의 변화와 함께 6·29선언으로 인한 자유화의 진전등 국내상황변화에 크게 힘입은 사례들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출판계의 민주화는 먼저 출판사의 폭발적인 증가로 나타났습니다.87년10월이 지나면서 명실상부한 등록제가 된 것입니다.신고만 하면 출판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된 거지요.80년이래 허가제의 내용을 갖는 이름뿐인 등록제가 자리를 잡은지 8년만의 일입니다.이를 계기로 6·29선언이 있기 전해인 86년말 2천6백여개에 그쳤던 출판사 수가 87년말 3천4개,88년말 4천3백97개,89년 5천97개로 늘었으며 현재는 2배에 가까운 6천개에 육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88년12월 문화부는 공연법 시행령을 고쳐 20년동안 표현의 자유 시비를 불러 일으켜온 무용 및 연극대본에 대한 사전심의제도를 폐지했습니다.마침내 공연예술계가 공연소재와 표현방식 등 공연물에 대한 자율성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이는 공연당사자들이 공연작품에 대한 한계를 미리 설정해 놓고 작품을 구상·준비해 오던 때와 비교해 볼 때 한결 자유롭게 하고 싶은 작업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입니다.작업에 대한 자율성 확보와 함께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비로소 적용될 수 있게 된 셈이지요.이에따라 체제비판적이거나 외설적인 내용 등을 이유로 공연이 금지됐던 「오장군의 발톱」(박조열작)「금지된 장난」(김훈작)「춤추는 인형들」(엄한얼작)등과 같은 작품들이 공연돼 공연의 다양화를 가져왔습니다. ­각 대학의 학생미술운동도 6·29선언을 계기로 활성화됐습니다.또 문예진흥원 등 관계당국은 행정적인 차원에서 과거 「민중미술」을 이끌어온 「현실과 발언」,민중미술협의회 등에 전시지원을 했습니다.6·29선언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군·빨치산소재 등장 ­영화와 방송분야도 6·29선언의 덕을 톡톡히 누리게 됩니다만 다른 분야에 비해 두드러진 대중성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제약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출판·학술 분야의 민주화는 분명 6·29선언에서 시작되었으나 구소련 및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 또는 개방까지기다려야 했습니다.출판사들의 등록이 자유로워졌고 이에따라 각종 출판물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실정법 위반 시비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정치적인 결단인 6·29선언에 따른 입법조치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공연예술계는 자율화의 혜택을 크게 누렸습니다.정부는 제도권 밖의 「민족극」극단의 활동에도 관용을 보였습니다.이에따라 그동안 제도권내에서 유일하게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창작극만을 공연해온 극단 연우무대가 설 자리를 잃고 새로운 위상을 모색해야 하는 재미있는 일도 벌어졌습니다.어떻든 공연여부로 화제를 모았던 극단 아리랑의 「아버지의 해방일기」와 「격정만리」등도 무난히 관객들의 앞에 올려졌습니다. ­6·29선언에서 비롯된 문화 전반의 민주화·자율화 분위기는 결국 문화의 다양화에 기여했습니다.문학·방송·미술·공연·출판·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문학의 경우만 해도 많은 소설가들이 그동안 금기로 되어왔던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김신의 「쫄병시대」,복거일의 「높은 땅 낮은 이야기」,고원정의 「빙벽」등 88년부터 쏟아져 나왔던 군병영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군의 비리까지도 일정부분 소설화했던 현상은 6·29선언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것입니다.그리고 분단이나 빨치산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에서 좌익의 시각을 과감하게 수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이밖에 운동권 문학에서도 문학성을 강조하는 추세로 돌고 있습니다. ­6·29선언 뒤 몇년동안 북한원전과 기행문,마르크스·레닌 원전 등은 출간붐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그 결과 탈이데올로기 현상이 빚어졌고 동유럽 공산국가의 몰락으로 이념서적의 인기가 급락하고 말았습니다. ­90년대 들어 미술분야에서는 「민중작가」가 아닌 일반작가들도 통일문제를 들고나와 나름대로 이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소재로 삼는 대상이 다양해진 것이지요.이에 비해 「민중미술작가」들은 과거에 비해 그림들이 예술적으로 순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철학적·미학적으로 자기반성하는 자세를 가지면서 과거처럼 급진적이고 지나치게 선동적인 모습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왔던 사회고발영화와 농도짙은 성애영화가 대거 등장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5공의 비리를 핵심권부에 맞춰 그린 정치소재의 「서울무지개」(감독 김호선)와 성을 소재로 한 「매춘」(감독 유진선)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또 「전쟁과 평화」「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국두」 등 구소련과 중국영화들이 국내극장가에 처음 나붙게 됐습니다.6·29 이후 본격화된 북방정책의 결과이지요. ○특수방송 잇단 설립 ­외형적으로 공영체제가 허물어지는 흐름에서 평화방송 교통방송 불교방송 등 특수방송이 잇따라 설립됐으며 지난해 서울방송 라디오·TV개국으로 공·민영 혼합체제가 구축됐습니다.또 토론프로그램이나 코미디·드라마 등에서 비판금지대상이나 소재의 벽이 허물어져 다양한 프로그램의 제작이 가능해졌습니다. ­통일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민족동질성의 뿌리를 찾아내기 위한 당국의 배려도 이젠 많이 늘어났다고 봅니다.올상반기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북한미술전이 그 한 예입니다.북한의 화가들이 작업한 수많은 원화들을 일반인들이 여과없이 접할 수 있었다는 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죠.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북방과의 문화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종교계의 경우 지나친 북방선교가 문제가 될 정도로 적극적인 북방진출이 이루어졌지요. ­자율화 민주화 과정에서 지나친 상업주의에 의한 문화왜곡등 부작용도 없지 않았습니다.올해들어 방송위원회가 대폭 개정한 방송심의규정은 자율화·민주화의 한계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을 생각하게 해줍니다.이번 개정에서 오히려 내용이 강화된 것으로 ▲인권 보호 ▲방송언어의 순화 ▲광고의 국민건강을 위한 규제가 들어 있습니다. ­아무튼 6·29선언은 그 시행과정에서 많은 과제를 노정시켜왔으나 문화의 다양화 작업을 가능케했으며 탈이데올로기에 따른 한민족 문화의 뿌리 찾기등 값진 성과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이같은 변혁은 바로 우리 문화의 총량을 제고하는 귀중한 계기였다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전문가 평가/김윤식 문학평론가/자율성의 참뜻 되새길때 6·29선언이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였음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8개항으로 된 이 선언을 검토해보면 한갓 시국수습안의 일종이었음이 드러난다.이점에서만 보면 그것은 시류적인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문건이다.그러나 좀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국민대단합이라는 커다란 명제가 놓여있다.국민대단합이라는 명제를 내걸었다는 것은 그것이 당시의 제일 중요한 과제였음을 새삼 말해주는 터이다.무엇이 국민대단합을 저해하고 있었던가.8개항의 수습책이 달성되지 않는 한 국민대단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8개항을 수습할 수 있는 기본항이랄까 원칙이란 무엇일까.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쉽사리 그것이 자율성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각 부문별 자치와 자율의 확대는 다양하고 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해진 것은 8개 수습항목중 6번째에 해당되는 것이다.그러나 이 항목이 실상 6·29선언의 으뜸 항목임은 일목요연하다. 자율성의 원칙이 모든 문제해결의 기본항을 이룰 때 어떤 사회도 상당한 혼란을 면하기 어렵다.국가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의해 사회적 욕망분출이 조정되던 사회보다 자율성으로 그것을 해결하는 사회가 한층 바람직한 것이라면 그 바람직한 사회의 도래를 위해 상당한 기간의 혼란은 불가피한 법이다.이 원칙이 세계사의 변화라든가 후기 산업정보사회의 급속한 진전과 더불어 5년간을 두고 알게 모르게 실천되었음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이 자율성의 달성이 얼마나 소중한 과제였는가는 6·29선언에서도 지적된 물가안정이라든가 흑자경제 등 5공화국의 치적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위협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터이다.6·29선언이 단순한 시국수습책에 멈추지 않는,역사적인 문건으로 평가되는 참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역사전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야가 문화(문명)쪽이라는 사실은 새삼 강조해둘 필요가 없을까.문화란 개성에 바탕을 두는 것이며 따라서 무정부주의적인 성격으로 규정된다.자율성이 조금도 억압되지 않는 사회만들기야말로 문화의 방향성이라 함은 이를 가리킴이다.이 점에서 6·29선언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지향성의 표현이었다.기업문화,정치문화,교통문화 등의 표현이 가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그렇다면 새삼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이러한 자율성이 후기 산업사회 속에서 얼마나 지켜질 수 있느냐에 있다.그동안의 자율성의 옹호가 문화의 특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었음이 사실로 인정되지만 동시에 그것에 포위되어 위기를 맞이하고 있음도 사실로 인정되는 터이다.문화창출의 자율성이 문화유통의 자율성(상업주의)에 의해 좌우될 때 문화가 도리어 위협받게 되는 것,이 이율배반 앞에 놓인 것이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6·29선언의 한가지 귀결이다.자율성,그것은 문화쪽에서 보면 해결하기 어려운 일종의 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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