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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중심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종’소리 울리는 ‘길’[서울 로드]

    조선의 중심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종’소리 울리는 ‘길’[서울 로드]

    조선 통금·해제 알리던 보신각종서울신문 균열 보도에 모금 운동1980년대 국민 힘 모아 다시 제작전차·가로등·주상복합·주택단지국내 최초의 기록이 즐비한 거리소설가 구보처럼 천천히 걸어볼까조선부터 구름처럼 사람 몰리던 곳고관대작 피하기 위해 ‘피맛길’ 생겨해방 후 예술가·민주화운동의 길로 종로는 서울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이름에 ‘길(路)’을 담고 있다. 종이 울리는 길이란 뜻이다. 조선 초기 도성을 여닫고 인정(人定·통행금지)과 파루(罷漏·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종을 매단 종루(보신각)가 있던 데서 유래했다. 요즘에는 한 해를 보내고 새해의 평안과 희망을 기원하며 찾는 보신각이, 조선 시대에는 일상을 통제하는 국가 시설이었다. 같은 공간이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와 기능을 품은 셈이다. 보신각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의 종은 국민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1984년 서울신문이 보신각종에 생긴 균열을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됐다.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모금 운동이 이어졌고, 국민 손으로 다시 세웠다. 조선 시대에도 ‘종로’는 한양의 중심이었다. 광화문 남쪽으로 뻗은 세종대로는 관청이 늘어선 육조거리였고, 그와 직각으로 놓인 종로는 팔도의 물자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운종가(雲從街)’로 불렸다. 동대문(흥인지문)과 서대문(돈의문)을 잇는 이 거리에는 독점적 영업권이 있는 육의전(명주·종이·어물·모시·비단·무명)이 있었다. 이곳에선 때때로 탐관오리를 공개처형함으로써 국법의 엄중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광화문우체국 맞은편에 표지석으로 남아 있는 혜정교가 그 무대였다. 육조거리와 종로거리가 마주치는 곳인 동시에 죄인을 다스리는 우포도청 앞이어서 공개형을 치르기에는 최적이었다. 팽형(烹刑) 또는 부형(釜刑)으로 불렸는데,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담그는 공개형이란 의미다. 다만, 삶는 흉내만 내 경각심을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권력의 서슬을 피하기 위한 작은 길도 있었다. 말[馬]을 피[避]하기 위해 만든 곳이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고관대작을 피해 서민들이 이용하던 좁은 뒷길, ‘피맛골’이다. 해방 이후에는 문인과 언론인, 예술가의 집합소였고, 독재정권 때는 경찰을 피해 시위대가 숨어드는 해방구였다. 1974년 지하철 1호선 공사 때 일부가 사라진 뒤 종로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3가까지 사잇길이 남았다. 길 양쪽에 해장국과 생선구이, 빈대떡을 파는 식당과 술집이 즐비했다. 2009년 청진동 재개발로 피맛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비판이 제기됐다. 이미 개발이 진행된 곳을 제외하고 종로2가에서 종로6가에 걸쳐 있는 피맛골을 수복재개발구역으로 지정해 예전 모습을 재현하기로 하고, 2012년 종로3가~종묘 구간에 대한 정비사업을 완료했다. ‘청진옥’ ‘서린낙지’ ‘한일관’ 같은 노포가 인근으로 옮겨져 명맥을 잇고 있다. 종로는 근대 문물이 가장 빨리 유입된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돈의문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최초의 노면전차가 개통됐다. 1900년 전차가 야간 운행을 시작하면서 정거장과 매표소를 밝힐 불이 필요했다. 최초의 전기 가로등 3개가 들어섰다. 덕분에 종로의 밤은 대낮처럼 밝고 활기찼다. 일제강점기 종로는 민족의 자존심을 건 격전지였다. 일본인이 명동과 충무로 등 남촌 일대 상권을 개발했다면, 청계천 북쪽 종로 상권엔 조선인이 많았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과 드라마 ‘야인시대’로도 유명한 김두한의 주무대가 이 일대인 까닭이다. 김두한의 흔적이 남은 곳들도 근래까지 꽤 있었다. 김두한이 한때 기거했고, 한국기원 근처여서 지방에서 올라온 바둑기사들이 많이 묵었던 종로 YMCA 옆골목 ‘종로 용일여관’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1980~90년대에 안동식 장터국밥과 석쇠불고기를 파는 ‘시골집’으로도 유명했지만, 2020년 재개발로 사라졌다. 1930년대 종로2가에 있던 화신백화점(현 공평동 종로타워 자리)은 최첨단 문물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1935년 화재 이후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건물로 재건됐다.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일루미네이션이 설치된 핫플레이스였다. 창업자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밀착해 조선 최고 갑부가 된 인물로, 훗날 해방정국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제1호 검거자로 구속됐다. 1934년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구보는 전차에서 내려 이 길을 배회한다. “구보는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구보와 모던보이가 거닐던 경성의 랜드마크 화신백화점은 1970년대까지 명맥을 이었지만, 1980년 부도에 이어 1987년 철거 수순을 밟았다. 화신백화점 자리에서 멀지 않은 북촌의 한옥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데몬헌터스’를 통해 세계적인 유명세를 탔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 디벨로퍼’가 고민 끝에 남긴 흔적이다. 1920년대 ‘건축왕’ 정세권(1888~1965)은 북촌과 익선동 일대에 한옥 단지를 조성했다. 100평 규모의 사대부 한옥이 아니라, 서민도 살 수 있도록 10~40평대로 공급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수도나 전기가 들어오도록 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북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통왕’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과 함께 1930년대 ‘경성 3대 왕’으로 불릴 만큼 부를 일궜지만, 삶의 궤적은 전혀 달랐다. 친일파로 이름을 남긴 다른 둘과 달리 정세권은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조선어학회에 사옥을 기증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문을 당했고, 뚝섬에 있던 3만평 땅과 재산, 건설면허를 빼앗겼다. 그럼에도 지원을 이어갔고 1957년 ‘큰 사전’의 간행을 이끌어냈다. 훗날 고향의 단칸 농가에서 숨진 그가 남긴 것은 ‘큰 사전’과 쌀되, 밥공기, 수저 한 벌뿐이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종로3·4가로 들어서면 개발독재 시대의 잔재가 눈에 띈다. 애초 이 일대는 2차세계대전 말기 미군 공습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소개(疏開) 공지대였다. 목조건물 밀집지대에 소이탄이 떨어질 경우 불이 옮겨붙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중간에 빈터를 마련한 것이다. 1960년대 종묘 앞 일대 ‘종삼(鍾三)’은 길이 1㎞, 넓이 5만㎡의 땅에 2200여 동의 무허가 판잣집과 대규모 사창가가 뒤섞인 슬럼가였다. 역대 서울시장 중 가장 굵은 족적을 남긴 ‘불도저’ 김현옥 시장은 1966년 판자촌을 쓸어버리고 1968년 ‘나비 작전’이란 이름으로 남은 사창가를 없앴다. 그 자리에 세워진 ‘세운상가’ 지구는 한국 최초이자 최대의 주상복합 건물군이다. 당대의 건축가이자 3공화국 핵심들과 교분이 남달랐던 김수근이 설계했다. 1㎞ 길이의 거리가 보행로가 될 수 있도록 입체화시켜 데크로 잇고, 1~4층에는 상가를, 5층 이상은 아파트를 두는 주상겸용 복합건물군을 배치하는 ‘큰 도시 속에 작은 도시들’ 콘셉트였다. 현대상가를 시작으로 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 등 8개 대형건물이 이어진 형태다. 1960년대 후반 세운 지구는 서울의 핵심 상권인 동시에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입주하던 최고급 아파트였다. 하지만 영광은 짧았다. 1970년대 신세계, 미도파에 이어 롯데백화점까지 을지로 일대에 문을 열자 상권의 중심이 움직였다. 강남 한강변에 현대·한양 등 대형 고급아파트가 건립되자 재력가들의 주거도 움직였다. 끝으로 1970년대 김중업이 설계한 삼일빌딩을 비롯한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건물이 속속 들어서자 세운상가를 두고 ‘위압감을 주고 볼썽사납다’는 평가와 함께 서울의 녹지축을 단절시켰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때 미래 서울의 상징으로 주목받던 세운 지구는 도심의 흉물로 쇠락했다. 지난한 논란을 겪고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4구역 개발을 둘러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처럼 종로는 수백년 동안 레이어(겹쳐입기)를 하듯 새 옷을 입고 매무새를 고쳤지만, 어딘가에는 과거를 품고 있다. 왕조의 수도에서 격동의 근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종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길인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 [자치광장] 탑골공원의 ‘종로 모던’/정문헌 서울 종로구청장

    [자치광장] 탑골공원의 ‘종로 모던’/정문헌 서울 종로구청장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현재 유리막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조선시대 예술품으로는 매우 특이하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외부 환경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낮은 기와집들이 즐비했던 운종가(지금의 종로) 일대에서 대리석 특유의 눈부신 빛을 뽐내며 드높이 솟아 있던 탑이다. 그래서 백탑이란 별칭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현대화가 오로지 서구 외세의 영향으로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걸출한 자태 앞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무지함과 자기부정의 표출이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백탑 근처에는 한 그룹의 대단히 특출한 지식인들이 모여 살았다. 박지원과 홍대용, 박제가 등의 인물이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북학파’라고 배운 실학 사상가들이다. 이들이 백탑 근처에 모여 살았다고 해서 ‘백탑파’라고도 부른다. 이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면서 나눴던 깊숙한 대화들은 이때 이미 우리 조상들이 수준 높은 선진시민사회의 사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시로부터 200년이 지난 바로 이 자리, 탑골공원의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우리 역사 최초로 민주공화국이 선포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필연의 이치인 것이다. 백탑파는 우리 민족사의 자생적 근대화 시민운동이라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비록 일제 침략 때문에 그 뜻깊은 시도가 꺾이긴 했지만, 한번 역사에서 확인된 우리 고유의 근대화 에너지는 어디 가지 않았다. 마침내 1960~1970년대 ‘한강의 기적’이 시작되면서 대한민국이 지금의 10대 강국으로 우뚝 서는 저력을 과시했다. 이 모든 과정이 ‘대한민국의 1번지’ 종로에서 이뤄졌다. 20세기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제조업 중심으로 이뤄졌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이 역할을 문화가 담당해 내야 한다. 방탄소년단(BTS), ‘오징어게임’이 세계적 선풍을 일으킨 지금 문화강국은 이미 이룬 것 아니냐고 속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아시아에는 우리보다 먼저 문화적 선풍을 일으켰던 나라들이 많이 있다. 이소룡, 성룡, 왕조현 등은 지금의 중장년 세대가 어릴 적 무척 부러워했던 아시아 이웃의 스타들이다. 이들이 맹활약했던 무대는 지금 어떻게 됐는가. 경제대국 일본도 오랜 세월 우리 대중문화계가 따라잡기 벅찬 상대였다. 그러나 지금 일본 대중문화는 만화 빼고 남은 게 없다는 얘기까지 듣고 있다. 고유의 정체성을 바탕에 두지 못하고 서구의 기준, 서구 소비자들의 기호에만 집착해 한때의 트렌드에 그친 것이다. 모두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우리 고유의 멋이 살아 있는 문화코드만이 지속적으로 세계인의 애호를 받으며 새로운 문화를 선도해 나갈 수 있다. 그 멋을 힘있게, 제대로 살려 내겠다는 것이 바로 종로구의 ‘종로 모던’이다. 3ㆍ1절이 다가오는 지금, 탑골공원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이다.
  • ‘종로의 이야기꾼 전기수’ 청와대 둘레길 걸으며 역사 여행

    ‘종로의 이야기꾼 전기수’ 청와대 둘레길 걸으며 역사 여행

    오랜 유적과 골목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역사의 지문과도 같은 서울 종로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조선 후기에 활동한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가 2022년 종로 도심에 다시 돌아온다. 종로구는 이달 31일부터 11월 9일까지 ‘2022년 종로의 이야기꾼 전기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16일 밝혔다. 각 분야 명사들이 현대판 전기수로 활약하며 지역 구석구석을 참여자들과 함께 걷고 장소마다 깃든 옛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올해는 청와대 개방에 맞춰 주변 관광코스와 연계해 기획했다. 전기수 프로그램은 이달 31일 시작해 9월 14일과 28일, 10월에는 12일과 26일, 11월 9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진행한다. 프로그램은 총 6회 차로 ▲역사여행작가 박광일의 ‘청와대 둘레길1-백사실, 비밀의 숲’ ▲9월 14일 과학탐험가 문경수의 ‘청와대 둘레길2-탐험가의 시선으로 본 백악’ ▲9월 28일 한옥컨설턴트 전상진의 ‘청와대 옆 동네 한옥 짓고 살기’ ▲10월 12일 수도문물연구원 오경택 원장의 ‘운종가의 재발견, 2021 금속활자’ ▲10월 26일 사진작가 김동우의 ‘청와대 둘레길3-사진작가와 함께 걷는 삼청동길’ ▲11월 9일 동부아역사재단 신효승 박사의 ‘청와대 둘레길4-고종의 경복궁 건천궁과 경무대’ 순으로 이어진다. 관심 있는 누구나 프로그램 시작일 3주 전부터 구청 누리집을 참고해 신청하면 된다. 회차별 25명을 선착순 모집하며 참가비는 무료다. 정문헌 구청장은 “청와대 둘레길을 명사와 걸으며 교양을 쌓는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라며 “종로의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을 활용한 관광 프로그램 내실화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 [사설] 한글 금속활자 출토, ‘사대문 내부’ 보존 계기 되길

    서울 인사동의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에서 조선 전기의 한글 금속활자와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를 비롯한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문화 국가이자 과학 국가로 조선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다. 한편으로 화려한 유물이 각광받는 동안 지하에 남은 유적 자체의 보존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현실은 안타깝다. 발굴조사가 이뤄진 종로2가 사거리 북서쪽에는 의금부와 전의감, 순화궁과 죽동궁이 있었다. 남쪽의 오늘날 종로는 상업시설인 시전행랑이 줄지어 있던 운종가다. 조사 지역에선 조선 전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6개의 문화층이 확인됐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퇴적이 이루어졌고 발굴조사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삶의 흔적도 각 문화층에서 드러났다. 서울 사대문 내부인 광화문·종로 일대는 공평지구처럼 ‘도시환경정비’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번에 조사된 지하 유적은 중요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옹색하게나마 흔적을 남기는 ‘이전복원’이 결정됐다고 한다. 신축 상업시설이 500년 수도의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지금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나라가 선진국이고, 문화 국가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사대문 내부를 전면 보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럴수록 정치·행정·상업·생활의 중심 공간만큼은 최소한이라도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치 공간은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의 존재로 크게 모자람이 없고, 생활 공간도 근대에 형성된 것이나마 북촌이 대표할 수 있다. 반면 종로 시전행랑 터와 이어진 공평지구의 상업 공간은 일부라도 원형을 보존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불가능해 보이던 육조거리 관청가의 보존도 광화문광장 재구조화에 따른 발굴조사와 이조 및 호조 터의 일부였을 미국대사관의 이전 계획에 따라 여건이 달라진 것은 다행스럽다. 문화와 관광이 대표할 보존의 경제적 가치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질 것이다. 그런 나라가 문화 선진국이다.
  • “1588년 이후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듯”

    “1588년 이후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듯”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과학 유물이 대거 묻혀 있던 지역은 서울 종로2가 사거리 북서쪽으로 피맛골과 인접한 곳이다. 조선 전기까지 한성부 중부 8방 중 하나로, 경제·문화 중심지인 견평방(堅平坊)에 속했으며 주변에는 관청인 의금부와 상업시설인 운종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금속활자와 주전의 동제품은 항아리 안에 담겼고 일성정시의와 총통류, 동종은 항아리 옆에 놓여 있었다. 특히 금속활자를 제외한 나머지 유물은 작은 파편으로 절개돼 출토됐다. 활자들은 대체로 온전했지만 불에 녹아 서로 엉겨 붙은 것들도 일부 확인됐다. 발굴조사를 맡은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은 “출토 지역 자료를 찾아봐도 관청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면서 “관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고, 평범한 민간에서 사용한 창고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출토 유물들이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귀한 유물이란 점에서 의문이 남는다. 오 원장은 “16~17세기 청진동, 관철동, 관수동 등 청계천 주변에선 이처럼 퇴장 유적, 즉 도망가면서 물건을 묻어 놓고 가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었고, 나중에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문화재청은 “발굴 유물 중 제작 시기가 가장 늦은 것이 1588년으로, 그 이후에 같이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것 같다”면서 “보존 처리와 분석 과정을 거쳐 분야별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 왜 인사동에서 발견됐을까...무더기로 발견된 조선전기 금속유물(종합)

    왜 인사동에서 발견됐을까...무더기로 발견된 조선전기 금속유물(종합)

    서울 종로구 인사동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물시계 부속품 추정 동제품, 천문시계 부품 등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금속 유물이라는 점이다. 29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금속활자와 물시계 부속품 추정 유물만 도기 항아리에 담긴 채로 발견됐다. 천문시계 부품과 조선시대 화포인 총통(銃筒), 동종(銅鐘) 등 상대적으로 큰 나머지 유물은 그 주변에서 출토됐다. 활자를 제외하면 모두 일정한 크기로 부러뜨린 채 묻은 것으로 확인됐다. 활자 일부는 불에 타 엉겨 붙은 상태였다. 발굴조사를 맡은 수도문물연구원 오경택 원장은 “조사 중에 도기 항아리를 보니 금이 나 있었는데, 조각이 떨어지면서 공깃돌 같은 파편 두세 개가 떨어졌다”며 “세척해 보니 금속활자여서 항아리를 통째로 연구원 수장고로 옮겼다”고 설명했다.유물이 나온 지점은 종로2가 사거리, 탑골공원 서쪽이다. 종로 뒤편에 있는 작은 골목인 피맛골과 인접한 땅이다. 이곳은 조선 전기까지 한성부 중부 8방 중 하나로, 경제·문화 중심지인 견평방(堅平坊)에 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변에는 관청인 의금부와 상업시설인 운종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유물이 확인된 곳은 고고학적으로 큰 의미를 둘 만한 장소는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오 원장은 “건물터 형태를 보면 매우 특이하다”며 “관(官)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고, 서울 시내에서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주택의 일자형 혹은 ㄱ자형 창고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습한 유물이 일반 민가에서 소유할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출토 위치가 상당히 미스터리”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도기 항아리를 기와 조각과 작은 돌로 괸 것을 보면 인위적으로 묻은 정황을 알 수 있다”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화포인 소승자총통이 1588년에 만들어져 가장 늦은 편인데, 1588년 이후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묻었다가 잊혀서 다시 활용되지 못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그는 “구리는 조선시대에도 비싼 금속이었다”며 “유물을 재화, 즉 값나가는 물건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고도 주장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서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서울의 중심 종로, 오피스텔 뜬다…‘종로 한라비발디 운종가’ 분양

    서울의 중심 종로, 오피스텔 뜬다…‘종로 한라비발디 운종가’ 분양

    우수한 입지와 특화설계 등 인기 요소를 두루 갖춘 ‘종로 한라비발디 운종가’ 오피스텔이 분양에 나서 실수요자 및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주)한라가 시공하고 무궁화신탁이 자금관리를 맡아 안정성을 더한 ‘종로 한라비발디 운종가’는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하며 지하 5층~지상 21층, 전용면적 19~79㎡ 총 547실 규모로 조성된다. ‘종로 한라비발디 운종가’는 지하철 1, 2호선 및 우이신설 환승역인 신설동역이 직선거리 약 300m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다. 1, 6호선 환승역인 동묘앞역과도 직선거리 약 450m로 가깝다. 또한 서울과 경기 곳곳을 연결하는 29개 버스 노선이 단지 인근을 지나며, 내부순환도로 등 도로망도 잘 갖춰져 있다. 또한, 단지 주변 곳곳에 오피스 및 쇼핑몰이 자리하고 있어 배후수요를 확보하고 있다. 대기업과 서울정부청사, 다수의 로펌, 병원 등이 인근에 위치해 임대수요가 풍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더해 일평균 유동인구만 약 150만 명에 달하는 동대문패션타운단지와 약 1000여개 점포가 성업 중인 경동시장도 인접해있다. 단지 바로 앞에는 청계천을 낀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단지 내에는 입주민의 심신 단련을 위한 피트니스센터, 업무공간이자 소통공간인 비즈니스센터, 게스트룸, 파티룸, 라운지 식음료서비스 등을 제공하 커뮤니티라운지도 들어설 예정이다. 보안 및 경비, 세탁과 청소서비스, 택배 및 우편물 보관 등 생활서비스도 제공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단지 가까이에는 이마트 청계천점과 롯데마트 청량리점, 롯데백화점 청량리점, 신설종합시장, 국립중앙의료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롯데시네마 황학점 등 다수의 생활편의시설이 근접해 있어 주거, 쇼핑, 문화, 힐링 등 모든 가치를 한 곳에서 누리는 원스톱라이프를 경험할 수 있다. ‘종로 한라비발디 운종가’는 대한민국 대표 공공건축가인 승효상 건축가(이로재종합건축사 사무소)가 건축설계를 맡았다. 승효상 건축가는 ‘김수근문화상’, ‘한국건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축계 거장이다. 또한 선유도 공원, 서울식물원,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등의 조경설계를 담당한 서안㈜ 정영선 대표와 창신동 신마루 놀이터 풀무골무, 하늘공원 하늘을 담는 그릇 등을 선보인 임옥상미술연구소 임옥상 소장이 설계에 참여했다. 한편, ‘종로 한라비발디 운종가’의 분양홍보관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조선생존기’ 송원석X박세완, 궁궐 밖 주점 데이트 ‘뜨거운♥ 폭발’

    ‘조선생존기’ 송원석X박세완, 궁궐 밖 주점 데이트 ‘뜨거운♥ 폭발’

    TV CHOSUN 특별기획드라마 ‘조선생존기’ 송원석과 박세완이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폭발시키며 안방극장을 ‘절대 멜로’로 물들였다. 지난 3일 방송한 TV CHOSUN ‘조선생존기’(연출 장용우, 극본 박민우, 제작 화이브라더스코리아, 롯데컬처웍스, 하이그라운드) 13회에서는 세자빈 대역 한슬기(박세완)가 임꺽정(송원석)과의 비밀 약속에 따라 궁궐을 탈출, 양반 복식으로 변장해 한양에서의 ‘일탈’을 즐기는 과정이 펼쳐져 시선을 집중시켰다. 세자빈의 처소 근처에서 임꺽정이 내는 ‘뻐꾸기 소리’로 서로에 대한 사랑의 사인을 맞춘 두 사람은 궐 안의 망루에서 비밀 접선, 몰래 데이트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임꺽정은 한슬기에게 ‘진짜 한양’인 운종가를 누비고 떡볶이를 먹자고 제안했고, 한슬기는 자신의 친구이자 나인인 초선(유주은)과 옷을 바꿔 입은 채 외출증을 받아 궁궐을 나섰다. 궐 밖에서 재회한 임꺽정과 한슬기는 변복점에서 양반 복식으로 갈아입은 채 인근 폭포로 향했고, 그 곳에는 명월당 기생 식구들과 임꺽정의 친구들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솥에 불을 지펴 만든 라볶이로 ‘특식’을 즐긴 이들은 계곡에서의 물놀이와 노래 대결 등으로 친밀도를 다졌다. 같은 시간 세자빈으로 변장한 초선은 세자와 정난정(윤지민) 등 문안을 오는 궁궐 안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으로 녹음한 한슬기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행들과 헤어진 임꺽정과 한슬기는 둘만의 시간을 조금 더 보내기 위해 ‘내외주점’에 들어가 서로 음식을 먹여주며 다정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한슬기는 임꺽정에게 “’아이 라이크 유’보다 ‘아이 러브 유’보다 더 큰 사랑은 ‘아이 엠 유’래요”라고 말했고, 임꺽정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소”라고 답하며 500년의 시대를 초월한 ‘참사랑’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만취한 한슬기가 임꺽정과 짙은 포옹을 나누는 엔딩으로 극이 마무리되며, 궁궐 안의 심상찮은 상황과 대비되는 전개로 다음 회에 대한 기대감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그런가 하면 이날 방송에서 ‘타임슬립 조종자’ 이지함의 집에서 비밀 쪽지를 발견한 한정록(서지석)과 이혜진(경수진)은 “정묘년 4월의 그림과 계축년 11월의 가마솥”이라는 암호 내용에 ‘멘붕’에 빠졌다. 머리를 맞댄 끝에 ‘정묘년 4월의 그림’이 ‘몽유도원도’라는 추론에 이른 한정록은 몽유도원도의 위치를 추적하고자 했지만, 계유정난으로 인해 그림 속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 ‘금기의 그림’이라는 내시 상훤의 설명이 더해지며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봉착했다. 나아가 이지함을 쫓던 또 다른 인물인 정가익(이재윤)과도 크게 부딪히며, 치열한 ‘현대 리턴’ 경쟁의 서막을 알렸다. 풋풋한 사랑을 이어오던 ‘세자빈 대역’ 한슬기와 ‘백정 출신 의관’ 임꺽정의 흥미진진한 진짜 한양 나들이를 그리며 심장을 간질인 한 회였다. 나아가 ‘여름 놀이’를 즐기는 궁궐 바깥 세상과 달리, 궁 안에서는 명종(장정연)과 윤원형(한재석)의 숨 막히는 기 싸움이 펼쳐져 대조를 이뤘다. 방송 후 시청자들은 “드디어 찾아온 ‘슬꺽 커플’의 날! 오늘은 여기서 눕습니다” “두 남녀의 평범한 데이트가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술 취한 세자빈, 언제 궁궐 안으로 들어갈지 심장 쫄깃!” 등 ‘슬꺽 커플’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드러냈다. ‘조선생존기’ 14회는 오는 10일 토요일 밤 10시 50분 TV CHOSUN에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신입사관 구해령’ 신세경-차은우, 긴박 스틸 “초조 VS 동공지진”

    ‘신입사관 구해령’ 신세경-차은우, 긴박 스틸 “초조 VS 동공지진”

    ‘신입사관 구해령’ 첫 방송을 하루 앞두고 신세경-차은우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포착됐다. 누군가와 긴밀하게 독대 중인 신세경과 긴박한 차은우의 모습이 공개된 것. 두 사람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관심을 집중시킨다. 오는 17일 밤 8시 55분 첫 방송 예정인 MBC 새 수목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 측은 16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운종가에 등장한 구해령(신세경 분)과 이림(차은우 분)의 모습을 공개했다. 신세경, 차은우, 박기웅이 출연하는 ‘신입사관 구해령’은 조선의 첫 문제적 여사(女史) 구해령과 반전 모태솔로 왕자 이림의 ‘필’ 충만 로맨스 실록. 이지훈, 박지현 등 청춘 배우들과 김여진, 김민상, 최덕문, 성지루 등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공개된 사진 속 해령이 진지한 표정으로 세책방 주인과 밀담(?)을 나누고 있다. 해령은 똑 부러지고 당당했던 평소와 달리 어딘가 살짝 긴장한 듯 굳은 표정으로 주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어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특히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세책방 주인과 그 앞에서 초조한 듯 두 손을 맞잡고 있는 해령의 모습은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어 이림과 함께 녹서당에서 동고동락하는 내관 삼보(성지루 분)가 세상 다급한 모습으로 포착됐다. 구름 같이 몰린 사람들을 뚫고 운종가 한복판을 한달음에 뛰어온 삼보는 이림의 팔을 붙잡고 그를 재촉하고 있어 시선을 강탈한다. 이림은 예상치 못한 삼보의 부름에 크게 당황한 듯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어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신입사관 구해령’ 측은 “해령과 이림의 로맨스 실록 공개가 단 하루 만을 남겨두고 있다”며 “두 사람이 운종가에서 어떤 이유로 상반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인지, 이들의 이야기를 오는 17일 밤 공개될 첫 방송을 통해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신세경, 차은우, 박기웅이 출연하는 ‘신입사관 구해령’은 오는 7월 17일 밤 8시 55분에 MBC를 통해 방송될 예정이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3000여개 봉제공장, 그 골목길엔 과거·현재가 살아 숨쉬다

    3000여개 봉제공장, 그 골목길엔 과거·현재가 살아 숨쉬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회 창신동의 재발견’ 편이 지난 11일 창신 1·2·3동에서 진행됐다. 지하철 동대문역 7번 출구 앞에 모인 참가자 40여명은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회원들이 생활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울타리의 삶’ 한울삶에서 투어를 시작했다.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창신동 봉제거리 박물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 뒤 이움피움 봉제역사관에서 ‘봉제의 모든 것’을 관람했다. 가수 김광석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살았던 집에는 부친 김수영씨의 국가유공자 명패와 김광석의 창신동 시절을 기리는 바닥 동판이 붙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 ‘요화’ 배정자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비석이 남아 있는 대한불교 원효종 총본산 안양암~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1956년에 지어진 석조 고딕양식의 전형 동신교회~순댓국집으로 변한 화가 박수근의 화실 겸 집터~한때 ‘연예인아파트’로 주가를 올렸던 동대문아파트를 2시간 30분 동안 돌았다. 어린 시절을 창신동에서 보낸 고교 역사교사 출신 엄태호 해설사가 창신동 설화를 깊고 차분하게 들려줬다.동대문이 곧 창신동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대문은 동대문 안쪽 마을이 아니라 동대문 밖 마을을 일컫는다. 길 이름도 동대문 안은 종로고, 문밖은 왕산로다. 조선시대 동대문 밖은 길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에는 광화문 앞 육조거리와 새문안(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운종가(종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종로의 시전, 서소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인 배오개(이현)시장과 이 전통을 이은 광장시장도 성 안에 있었다. 현재의 동대문시장은 동대문 바깥 창신동을 주 무대로 한 신흥 시장이다. 본래 동대문 밖 10리(성저십리)는 서울을 지키는 훈련도감 소속 하급 군인과 가족의 거주지였기에 이들이 재배하는 야채류가 상거래의 중심 물품이었다. 1905년 설립된 광장시장이 최고의 포목상가로 발돋움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창신동 지역의 공간과 취급품목의 변화를 가져왔다.창신동은 도성의 동쪽에서 도성 안으로 진입하는 문밖 동네였다. 성저(城底)란 성 밖 10리에 이르는 지역이지만 경기도가 아니라 서울의 행정구역 안에 포함되는 특수한 행정구역을 이른다. 서울의 좌청룡(左靑龍) 낙산을 따라 형성된 유서 깊은 동네다. 도성~강원도~함경도를 오가는 길목이어서 고려시대 서울이 남경(南京)일 때부터 번성했다. 창신동은 조선시대 인창방의 ‘창’자와 숭신방의 ‘신’자를 따 1914년 일제강점기 때 급조된 지명이다. 이웃 숭인동 또한 숭신방의 ‘숭’자와 인창방의 ‘인’자를 따서 만들었다. 창신동은 인창방이고, 숭인동은 숭신방인데 교묘하게 순서만 바꿔치기했을 뿐이다. 민족정기를 훼손시키려고 장난질을 했지만 지명의 원상회복은 요원하다. 행정구역상 동대문구 창신동이었다가 1975년 종로구에 편입됐다. 낙산 아래에는 종로구 이화동과 동숭동, 성북구 보문동과 삼선동, 동대문구 신설동 등 3개 구청 관할지역이 맞물려 있다.창신동은 예로부터 ‘돌산’ 낙산의 기운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려 찾아든 권세가의 별서가 들어선 한가로운 지역이었다. 창신초등학교 남쪽 창신1동 82번지쯤에는 동지(東池)라고 불린 사대문 밖 4개 연못 중 하나가 있어서 정자동이라고 불렸다. 사색붕당이 각축하던 시절 동지의 연꽃이 많이 피면 동인이 득세하고, 천연동 서지 연꽃이 많이 피면 서인이 득세한다고 해 양당이 서로 연꽃을 뭉개거나 연못을 메우던 시절도 있었다. 창신1동 128 창신초등학교는 불교계가 도심포교를 위해 지은 원흥사의 옛 터다. 조계사로 옮겨가기 전까지 조선불교의 총본산이었다. 지하철 6호선 창신역 부근에 있던 청룡정은 한량들의 활터였다. 창신동 202번지에는 실학자 이수광이 ‘비를 피하면서 청렴하게 살고자’한 비우당이 있다. 창신3동 7번지에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일화가 깃든 자지동천 우물이 있어서 이웃 숭인동의 동망봉, 정업사지, 여인시장과 어울려 순애보를 이루고 있다. 창신2동 옛 궁골 어림은 봉숭아와 앵두 등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많아서 홍숫골 또는 홍수동(紅樹洞)이라고 불렸다.낙산 전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여서 무속신앙의 대상이 됐다. 창신3동 서일국제경영고등학교 근방 당고개(당현) 바로 위 큰 바위에는 마을의 수호신 낙산신령을 모시는 도당(都堂)이 있었다. 조선 말 점술가 200여호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총독부건물 신축용 돌을 떼어가는 바람에 미아리고개로 옮겨 갔다고 한다. 창신동은 2개 사립대학교와 최초의 민간 여학교 창립의 터이기도 했다. 창신초등학교가 있는 원흥사지에는 동국대의 전신 명진학교가 처음 자리잡았고, 1932년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한 중앙대 설립자 임영신이 창신동에서 학교를 키웠다. 이후 1938년 흑석동에 교사를 신축해 중앙대로 발전시켰다. 창신1동 225번지 현재의 종로구민회관 일대는 1933년 설립된 최초의 민간 설립 여학교 동덕여중고가 방배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교사였다. 1898년 개설된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간 전차가 창신동을 지나가면서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이 틈입했다.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 귀국동포, 사대문 안 철거민까지 몰리면서 도심 인접 달동네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 성벽 아래 토막촌이 해방 이후 판잣집과 도시형 한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1916년부터 8년 동안 낙산 돌산에서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서울시청) 신축용 석재 채취가 본격화되면서 창신동은 피폐해졌다. 채석장 낙석사고가 빈번했고, 강도와 살인 사건은 물론 화재가 자주 발생해 치안위험지대의 오명을 뒤집어썼다.어쩌다가 창신동에 ‘봉제 DNA’가 깃들게 됐을까. 1958년부터 청계천 상류가 복개되면서 1961년 평화시장이 설립된 게 결정타였다. 동대문의류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주거지대화한 것이다. 1970년대 이후에는 평화시장 일대 의류생산 공장들이 대거 창신동으로 이전하면서 동대문 의류산업의 배후지대가 형성됐다. 공장과 주거지, 소비시장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특이한 공간이 자리잡은 것이다. 무허가 판잣집이 도시형 한옥으로 바뀌고, 채석장 자리에 창신시영아파트 3동이 세워졌다. 1964년부터 1969년 사이에 동대문스케이트장과 동대문아파트, 동대문상가아파트, 낙산시민아파트가 차례로 건립되면서 면모를 일신했다. 1971년 동대문종합시장, 동화시장이 설립되고 시외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봉제노동력이 주거지로 쏟아지고, 주거지 내 봉제공장이 확산됐으며 창신동에 봉제인력시장이 생긴 것도 역할을 했다. 이처럼 창신동은 1960~70년대 서울의 도시산업화 과정에서 봉제공장 지대화했다. 동양 최대 규모의 패션산업이 동대문 일대에 불야성을 이루고 있지만 배후지대인 창신동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동대문을 밝히는 보석은 골목골목에 숨어 있다. 동대문시장의 원단이 오토바이에 실려 창신동에 도착하면 옷의 본을 만드는 패턴작업장에서 재단·재봉을 거쳐 안감·주머니·단추를 다는 ‘마도메’, 다림질·포장 등 완성과정의 ‘시아게’를 마치면 옷이 완성된다. 3000여개의 작은 공장들이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인 양 움직인다. 의류의 기획과 생산, 유통과 판매가 원스톱으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최신 유행의 옷 한 벌이 하루 안에 뚝딱 탄생하는 마법이 일어나는 것이다. 완제품은 오토바이를 타고 의류쇼핑의 메카 동대문시장으로 옮겨져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 이 옷에는 ‘메이드 인 창신동’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옷의 고향이 창신동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0회 신림동(대학촌과 고시촌) 편이 지난 24일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서울대학교 정문을 출발한 참석자들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안 예술관(서울미래유산)과 규장각을 둘러본 뒤 캠퍼스를 빠져나와 첫눈이 제법 소담스레 쌓인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또 서울미래유산이지만 지난해 폐차된 콜럼버스 스넥카와 폐가 일보 직전의 조각가 전뢰진 가옥에서 서울미래유산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고시촌과 녹두거리, 지난해 조성한 민주열사 박종철 거리,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자리를 옮긴 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에서 투어를 마무리했다. 1981년 이후로 가장 많은 양의 첫눈이 펑펑 쏟아진 날,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버스가 끊기는 바람에 출발 시간이 30분 지연됐다.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가 시작된 이래 첫 ‘천재지변’이 발생했지만 참가자들은 불평 없이 미끄러운 고갯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그리고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첫눈을 즐겼다. 관악산은 어떤 장소의 역사를 갖고 있을까. 서울을 정치·지리학적으로 설명할 때 역사도심은 한양도성이 에워싸는 내사산(內四山·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 안쪽을 가리킨다. 도성 안에 내수(청계천)가 흐르고 외수(한강)가 도성 밖을 감싸고 있다. 도성 바깥의 북쪽 삼각산(해발 836m), 서쪽 덕양산(125m), 남쪽 관악산(629m), 동쪽 용마산(348m)을 외사산(外四山)이라고 부른다. 외사산은 내사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성저십리(성 밖 십리)와 외사산 영역은 다르다. 성 밖 십리의 북쪽은 비봉~정릉동, 동쪽은 미아리~용답동, 남쪽은 한강변, 서쪽은 역촌동~모래내를 이른다. 도성 밖 십리는 서울의 통치 영역인 반면 외사산은 경기도에 속했다. 한강 이북의 성 밖 십리와 외사산의 영역은 겹치는 곳이 많지만 한강 이남은 소외됐다. 서울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생산기지이자 문화적으로 서울권에 속하는 강남지역은 관악산 안쪽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속하지 않았다. 서울의 풍수개념에서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상산(祖上山)이요, 지리산에서부터 뻗어 오른 관악산은 임금이 아침마다 알현하는 조산(朝山)이었다. 서울의 남과 북을 잇는 축선(軸線)은 삼각산과 관악산 선상에 있다. 광화문네거리에서 보면 서울의 주산 백악산과 경복궁이 직선 라인에 있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서울의 남북 간 축선은 삼각산~백악산~경복궁~숭례문~관악산으로 그어졌기 때문이다. 관악산 정상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듯했다.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라고 부르고, 관악(冠岳)이라고 썼다. ‘벼슬 산’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조선 개국 초 무학대사는 관악산이 화산(火山)이고, 목멱산(남산)은 목산(木山)이어서 관악산 화기가 목멱산 나무를 불쏘시개 삼아 도시를 태운다고 예언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고자 남대문(숭례문) 편액을 세로로 세워 부적을 삼았고, 남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파서 방화수를 채웠다. 불이 길을 따라 올라오지 못하도록 직선도로(세종대로)를 닦지 않고, 숭례문에서 지금의 남대문로를 따라 보신각까지 둘러간 뒤 운종가(종로)에서 꺾여 육조대로(광화문광장)에 이르도록 정(丁)자형 길을 닦았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의 광화문네거리에는 황토마루라는 낮은 언덕을 쌓아 관악산의 불길이 대궐에 미치지 못하게 막았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치 두 마리에게 광화문 앞을 지키게 했다. 모두 5겹의 방화장치를 할 정도로 관악산 화기를 두려워했다. 관악산 기슭 지금의 신림동, 봉천동과 금천구 시흥동 일대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금주, 조선시대엔 금천이라고 불렸다. 고려 강감찬 장군의 5대조 강여청이 터를 잡았으며, 부친 강궁진은 고려 창업과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봉됐다. 장군이 태어난 관악구 낙성대동 218의 14번지 생가 앞마당에 탄생기념 삼층석탑을 세울 정도의 떵떵거리는 호족이었다. 신림동(新林洞)이라는 지명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캠퍼스 안 자하연이라는 연못은 의성 김씨가 모여 사는 자하동이라는 집성촌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야영장 등 군사시설로 썼고, 196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해방촌, 청계천, 이촌동, 대방동 등지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을 수용하는 철거민 정착촌을 형성했다. 1970년대까지 도시빈민의 무허가 건물이 난립하는 기반시설 부재의 우범지대였다. ‘돼지막’이라는 절간 분위기의 하숙방 몇 채가 고시촌의 원조이다. 1969년 서울대를 ‘한강 이남 수원 이북’으로 옮기는 관악캠퍼스 건립계획이 확정됐다. 태릉, 신갈 일대, 과천, 안양 등이 후보지 물망에 오른 끝에 관악컨트리클럽이 있던 골프장 용지가 낙점된 것이다. 일부에선 “서울대 종합화는 구실이고, 데모 막으려고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1975년 2월 28일 동숭동에서 관악산 중턱으로 옮긴 서울대의 시위와 저항정신은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의 열풍으로 타올랐다. ‘관악산의 화염이 나라를 태울 것’이라던 무학대사의 예언이 들어맞은 셈이다. 서울대 정문과 신림동 일대를 중심으로 동맹휴업, 수업거부, 시위, 이념서클활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시인 김지하는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라고 노래했다.학사주점 ‘녹두집’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이용하는 주점, 인쇄소, 당구장, 서점, 사진관, 슈퍼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오늘날 유흥가로 바뀐 녹두거리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젊은 지성의 의식화 공간이요, 은신처였으며, 화염병 제조 공장지대였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하숙집이 있던 골목이었다. 1980년대 말 고시학원이 등장하고, 사법고시를 통해 법조인을 대거 선발하던 1990년대가 되자 전국의 고시생이 신림동으로 모여들면서 신림동 고시촌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녹두거리는 ‘녹두 베가스’로 불렸다. 녹두거리의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은 서울대 학내 시위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1980~1990년대 ‘그날이 오면’, ‘전야’, ‘열린글방’ 등은 녹두거리의 서점 트로이카로 꼽힌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고시생이었고, 전국에서 몰려든 고시생 5만명이 북적거리던 호시절이었다. 흔히 신림동이라고 불리던 신림9동은 2013년 행정명이 바뀌면서 대학동이 됐다. 고시촌은 2008년 로스쿨 도입을 꼭짓점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고시생들은 떠나기 시작했고, 고시 특수 때 신축한 고시원과 원룸의 공실률은 40%를 넘어섰다. 수많은 서점, 헌책방, 복사집, 고시식당, PC방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관악구는 여전히 서울에서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동네다. 10집 중 3집 이상이 1인 가구다. 서울 전역의 고시원 6곳 중 1곳이 관악구에 있다. 고시생들이 떠난 자리에 공무원시험이나 국가고시 준비생, 외국인 유학생이나 취업자, 새내기 직장인, 일용직 노동자, 기초생활대상자들이 스며들었다. 집값이 싸고, 물가가 저렴하고, ‘혼밥 혼술’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없고, 발조차 뻗을 수 없는 1평짜리 고시원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취약계층의 안식처로 풍속도가 변했다. 2018년 신림동 고시촌은 등껍데기가 없는 달팽이처럼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민달팽이족’들이 잠시 머무는 밀실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단편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의 고시와 같은 것이 아닐까…인간은-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고 고시촌 시대의 아픔과 자기성찰을 얘기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후암동 (문화주택단지의 어제와 오늘) ●일시: 12월 1일(토) 오전 10시~낮 12시 30분 ●집결장소 : 지하철 1호선 서울역 5번 출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앞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http://futureheritage.seoul.g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경제·문화 DNA가 흐른다… 종로가 서울, 서울이 종로였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경제·문화 DNA가 흐른다… 종로가 서울, 서울이 종로였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5회 종로(종묘에서 사직까지) 편이 지난 9일 종로구 훈정동 종묘광장에서 사직동 사직단까지 종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서울시와 서울신문사가 제작한 서울미래유산 로고가 인쇄된 빨간색과 밤색 스카프로 멋을 내고 도심을 활보했다. 올해 처음 미래투어에 합류한 강영진 해설자는 집결지인 종묘광장과 세운상가 9층 옥상정원 일원에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의 작동이 일시적으로 원활치 않아 육성으로 답사단을 이끄느라 고군분투했다.이날 투어에는 미국에서 온 중년부부와 남매의 손을 잡고 나온 젊은 엄마, 여행 마니아 대학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가했다. 40명 정원을 채우는 만원사례를 이뤘다. 그랜드투어가 거듭되면서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예약 경쟁도 치열해졌다. 오전 9시 20분쯤 예약한 한 참가자는 “‘대기자5’였다”면서 서울미래유산의 열풍에 놀라워했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절대 통치자를 과거와 미래의 세계에 각각 연결하는 신성한 영적 공간이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의 으뜸 사당이요, 사직은 농경사회의 근본인 토지의 신(國社)과 곡물의 신(國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최고의 제단이다. 종묘사직의 줄임말인 종사(宗社)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국가나 왕조 그 자체였다. ‘좌묘우사’(左廟右社)란 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두도록 명문화한 것이다. 실제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 사직단은 서쪽에 있다. 조선 건국의 역사는 1394년 한양 천도 이후 종묘와 사직을 가장 먼저 세우고, 다음으로 경복궁을 건립했으며, 마지막으로 한양도성을 쌓았다. 일제는 한양도성을 헐고, 경복궁의 전각을 뜯어낸 뒤 총독부를 짓고, 제례를 폐지했다. 종묘에서 사직에 이르는 중심 길, 운종가(종로)는 사실상 서울의 최고, 최대 중심가였다. 사대문 안 서울은 남~북 간 육조가(세종대로)와 동~서 간 운종가(종로) 두 개의 큰길로 이뤄졌다. 지금도 두 간선도로가 강북의 뼈대를 이룬다. 종로가 영적 길이라면 육조가는 의전용 길이었다. 1830년에 그려진 ‘조선성시도’를 기준으로 보면 육조가 앞은 황토마루라는 나지막한 언덕이 버티고 앉았다. 광화문 네거리가 아니라 삼거리였다. 율곡로를 잇는 사직로도 1967년 사직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막혀 있었다. 왕이 사직단에 행차하려면 육조가 공조 터(광화문 현대해상화재빌딩) 뒷길을 따라 서울경찰청 앞을 거쳐야 갈 수 있었다. 도심의 중앙에서 낙산 쪽은 넓고 평평했지만 높고 험준한 인왕산과 무악(안산) 고갯길에 가로막힌 서대문 쪽은 좁고 비탈졌다. 종묘에 비해 사직단 행차는 뜸했다. 20대 경종 이후로 2년에 한 번 정도 행차하는 데 그쳤다.종묘에서 사직에 이르는 동서 간선도로의 특징은 유교 국가 조선의 신성한 종교적 길인 동시에 이덕무가 ‘성시전도시’에서 읊은 것처럼 ‘팔만여 가옥에 세 개의 저자를 낀’ 도성의 저잣거리였다. 운종가 상점은 우산전, 생선전, 사기전(그릇), 상미전(쌀), 면주전, 면포전, 저포전, 지전, 선전(비단), 어물전, 철물전 등 17개 특정 물품을 파는 상점이 진을 쳤다. 종루에서부터 태묘(종묘) 앞까지 2000칸이 넘는 시전행랑이 빌딩처럼 솟았다. 박제가도 ‘온갖 장인이 붐비나니, 온갖 물화가 이문(이익)을 쫓아 수레가 연이었네’라고 한양의 영화를 노래했다. 종묘사직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탑골(인사동)에는 특이한 문사 집단이 깃들었다. 이름해 ‘백탑파’였다. 사대문 안에 들어오면 사방 어디에서나 보이는 하얀 탑, 원각사지십층석탑은 한양의 랜드마크였다. 연암 박지원을 좌장으로 유금, 유득공, 서상수, 이서구, 이덕무, 백동수, 홍대용, 박제가 등 쟁쟁한 ‘북학파’ 선비들이다. 이들 중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은 정조의 명에 따라 지은 13편의 ‘성시전도시’ 중 한양과 운종가의 거리풍경을 묘사한 걸작을 남겼다. 18세기 탑골을 주름잡은 백탑파는 노론명문가부터 서얼까지 출신 성분이 다양했지만 신분을 떠나 어울렸다. 오늘날 인사동의 예술문화 DNA를 심은 사람들이다. 이들 중 서얼 출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돼 정조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했다. 탑골이라는 지명은 대리석으로 빚은 흰 탑에서 따온 것이고, 인사동은 관인방의 ‘어질 인’(仁)자와 대사동의 ‘절 사’(寺)자를 합쳐 만든 국적불명의 지명이다. 오랫동안 종로가 서울이었고, 서울이 종로였다. 적어도 조선 500년간 한양의 굳건한 중심이었다. 매일 도성의 새벽을 깨우던 운종가는 출판문화의 터전이었다.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책 중개인(서쾌), 필사꾼과 함께 유통공간을 형성했다. 1918년 미국인 선교사 쿤즈는 ‘서울에 모두 36곳의 책 대여점이 성업 중인데 독자는 상인, 술집주인, 학생, 노동자와 가정주부’라고 기록했다. 대개 한 집에서 30~ 50책을 대여했다. 탑골과 종루(보신각) 앞에서는 ‘책 읽어주는 노인’ 전기수가 ‘숙향전’, ‘심청전’, ‘설인귀전’ 등을 읽어주고 돈을 벌었다. 훗날 종로에 출판사와 서점, 학원가가 형성된 이유다. 또 개화기 전차, 전기, 빌딩 등 서양문물이 가장 먼저 이식된 첨단유행의 거리였다. 만민공동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삼일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민족저항의 무대였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활개를 치던 근대화의 최전선이었다. 백화점, 서점, 빵집, 음악감상실, 빈대떡집, 다방이 시전행랑의 맥을 이었다. 1980년대까지 대중문화와 민주화의 성지였던 종로는 지금은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야의 종 타종행사가 열리는 서울의 여러 도심 중 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홍대(경의선 철길) ●일시 : 6월 16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 장소 :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본식 가옥 점령 막은 북촌 한옥… ‘서울의 징표’ 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본식 가옥 점령 막은 북촌 한옥… ‘서울의 징표’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특별시,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4회 서울사방 북촌 편이 6월의 첫 주말인 지난 2일 북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북촌의 기와집 처마 아래로 흐르는 초여름 바람이 시원한 하루였다.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예약자들이 몰려오면서 집결 장소인 안국역 2번 출구 앞이 갑자기 북적였다. 신문 기사를 보고 예약 없이 무작정 나오거나, 친구 따라 온 몇 명도 무사히 투어에 합류했다. 다만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이 동나 진행 요원들이 양보해야 했다. 정순희 해설사는 일행을 ‘북촌 신세계’로 이끌었다.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백악산 아랫동네다. 저잣거리인 종로 운종가의 배후도시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왕족과 공신, 고위관료들에게 나눠준 알짜배기 땅이다. 왕조의 심장부 북촌은 개화의 발상지다. 근대의 활시위를 당겼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가장 뜨거운 변혁의 물결이 휩쓴 역사의 무대였다. 개화의 사랑방 역할을 한 박규수의 집이 지금의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으로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의 집도 반경 200m 안에 모여 있었다. 북촌의 사대부들로부터 발화한 근대 개화사상은 기득권 세력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실패했다. 북촌의 붉은 기운은 1919년 3·1운동으로 되살아났다. 계동 중앙고보(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송진우·최남선·최린 등에 의해 싹텄다. 경운동 보성사(조계사 앞)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2만장이 이종일의 집(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전국에 배포됐다. 천도교 대표 손병희의 가회동 집과 불교계 대표 한용운의 계동 집도 지척이었다. 계동 보현빌딩(현대 사옥 맞은편) 자리는 해방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꾸려진 곳이다. 계동에 살면서 12번의 테러를 당한 여운형은 명륜동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결국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는 박규수와 홍영식의 집터이고, 압류당한 홍영식 집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들어섰다. 1993년 헌재가 들어서기 전까지 한성고등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기고등여학교, 경기여고, 창덕여고가 맥을 이었다. 근대 교육과 근대 의료의 모태였다.북촌 한옥은 ‘오래된 도시’ 서울의 징표이자 존재 가치다. 북촌의 영과 욕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씨줄과 날줄이 남긴 산물이다. 기농 정세권(1888~1965)이라는 선각자가 남긴 한옥은 현대 서울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유산이자 미래유산이다. 한옥을 조선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각종 문화재로 지정된 20여채를 제외한 모든 한옥은 1920~40년대 지어진 도시형 개량 한옥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양반가 한옥은 1870년에 지어진 안국동 윤보선가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도 1913년 준공됐다. 현존하는 서울의 기와집 1만 8000채 중 6000채 이상은 기농이 남긴 선물이다.북촌 한옥은 조선총독부를 위시한 일제 통치기구와 수탈기구, 일본식 가옥의 북촌 진입을 차단한 민간 차원의 방어선이었다. 가회동·삼청동·재동·계동·안국동·사간동·소격동·수송동·견지동·관철동·관훈동·익선동·봉익동·권농동·통의동·체부동·사직동·신문로·명륜동·창신동·이화동·신설동·왕십리·행당동·휘경동·충정로에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이 기농의 작품이다. 몰락한 왕족과 벌열(閥閱)들의 고대광실을 사들여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중산층용 개량 한옥을 지어 공급했다. 요즘 각광받는 익선동 166번지도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 한 채를 68채의 한옥으로 재개발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인 기농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의 한옥 개발과 북촌 선점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서울은 적산가옥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기와집이 없는 서울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경남 고성 출신인 기농은 북촌 한옥을 남긴 데 그치지 않고 신간회를 후원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해 조선어사전 편찬을 도왔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해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나는 정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만해 한용운도 “정세권씨가 백난 중에서 회관을 완성하고자 고군분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라고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에 치하하는 글을 보냈다.한옥은 남았지만 그는 잊혀졌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재산을 강탈당하고, 세 번이나 옥고를 치른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건국훈장 애족장 하나뿐이었다.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고, 서울의 미래를 남긴 선각자 정세권을 기리는 날은 없다. 정세권 문화상도 없고, 정세권 동상도 없다. 한편 이날 투어가 끝난 뒤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참가자들은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내세운 참신한 기획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진행과 코스, 해설 내용에도 대만족을 표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종로(종묘에서 사직까지) ●일시 : 6월 9일(토) 오전 10시~12시 ●집결장소 : 종로3가역 11번 출구 종묘광장공원 앞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600년 역사 깨운다 광장의 울림 퍼진다 ‘서울의 찬가’ 울린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600년 역사 깨운다 광장의 울림 퍼진다 ‘서울의 찬가’ 울린다

    서울신문이 지난 12일부터 서울시 및 서울도시문화연구원 등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를 시작했다. 올해로 세 번째다. 미래유산이란 아직 문화재로 등록되진 않았지만 미래 세대에 물려줄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서울 근현대 문화유산이다. 지난해 투어와 비교할 때 유형의 유산에서 무형의 유산으로, 사대문 안에서 사대문 밖으로 답사 영역을 넓힌 게 특징이다. 투어는 지난해 참가자들이 재체험을 희망한 사대문 안 주요코스 6개, 문학과 영화를 중심으로 새로 선정된 무형 서울미래유산 6개, 그리고 지역별·어젠다별·계절별 코스 23개 등 총 35개 코스로 편성했다. 오는 12월 말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열리며 혹서기인 7, 8월 두 달 동안은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5회 동안 야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22일(토)과 마지막 날인 9월 26일(수) 2회는 ‘한가위 특별투어’로 운영한다. 전문성을 갖춘 18명의 베테랑 해설자가 투입되며 매회 3명 이상의 진행요원이 안전한 투어를 보장한다. 국내 도보답사 프로그램 중 처음으로 오디오 가이드시스템을 도입했다. 소음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뿐더러 해설사 앞에 있어야만 들리던 불편도 해소할 수 있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편안하게 답사여행을 할 수 있다. 이르면 7월부터 서울시 각 중학교에서 추천, 선발된 ‘미래청소년 기자단’도 동행해 탐방 분위기를 풋풋하게 띄울 예정이다. 참가 신청은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에서 참여하기, 탐방, 접수 순으로 하면 된다.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그주 참여자를 선착순으로 30명 받는다. 대기자도 10명 선착순 모집한다. 무료다.# 도로원표·광화문지하보도…걸음마다 미래유산 2018년 첫 투어가 시작된 5월의 두 번째 토요일인 지난 12일 온종일 비가 내렸다. 이날 10시쯤 종각역 4번 출구 앞에서 집결해 오디오 가이드시스템을 지급한 뒤 사용법을 시연할 예정이었지만 빗줄기가 굵어져 역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등행사 등으로 광화문과 종로 일대 차량 진입이 통제돼 불참 및 지각자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됐다. 기우였다. 답사용 단체 카톡방에서 교통통제 및 집결지 변경을 알리는 긴급 메시지를 수신한 예약자 30여명이 예외 없이 시간을 지켰다. 형형색색 우산을 받쳐 든 참가자들은 진행자들의 ‘철통 호위’를 받는 가운데 이기훈 해설사와 함께 정시에 보신각을 출발했다. 지난달 새로 설치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보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울 공인 맛집인 청일집, 미진, 청진옥을 둘러봤다. 중학천을 따라 고종즉위40년기념 칭경비전과 교보문고 앞 벤치에 편안하게 모신 ‘3대’의 작가 횡보 염상섭도 만났다. 도로원표와 광화문지하보도, 충무공 동상, 세종대왕 동상을 차례차례 누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에서 비에 젖은 백악산과 경복궁의 운치를 만끽한 뒤 세종로공원에 서 있는 ‘서울의 찬가’ 노래비에 얽힌 해설과 세종문화회관 40년사를 들으면서 비에 젖은 세종로 투어를 마무리했다. 참석자들은 이날 처음 지급된 고감도 오디오 가이드시스템 덕분에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큰 불편 없이 낭만적인 투어를 즐길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참가자 단체 카톡방에서 바로바로 찾아볼 수 있는 해설 자료는 덤이었다. ‘한국의 얼굴’이자 서울의 중앙인 광화문광장과 세종로의 지층은 현재 아스팔트 지상보다 무려 8m 아래에 있다.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이 활보하던 최초의 인공도로면 위에 조선 중후기 도로 층이 쌓이고, 또 19세기와 일제강점기 때 지층 등 모두 11개의 지층이 겹겹이 덮여 지금의 표면을 이뤘다. 광화문 8m 지층 속에 600년 묵은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셈이다.# 서울의 주축은 백악~경복궁~숭례문~관악 서울은 산과 성곽의 도시이다. 유교와 풍수의 원리가 겹겹이 에워쌌다. 성곽으로 둘러싼 경계에 내사산이 있고 외곽에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은 현무, 동쪽의 낙산(낙타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목멱산)은 주작이 각각 수호신이다. 외사산 북쪽 삼각산(북한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산(祖山·풍수설에서 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이요, 지리산에서 뻗은 관악산은 아침마다 임금을 알현하는 조산(朝山)이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을 조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은 도시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남향을 바라보고 앉았고 남북 간 축선인 주작대로는 삼각산과 관악산 축선상에 놓였다. 도시 중앙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종로(운종가)이다. 오늘의 세종로사거리에는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었다. 관청가인 육조거리와 운종가가 만나는 지점이다.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직통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광화문광장 끝자락에서 왼쪽으로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이른바 정(丁)자형 길이다. 서울의 주축(主軸)은 백악~경복궁~숭례문~관악이었다. 서울 중앙의 매력에서 음식을 뺄 수 없다. 서울음식이란 무엇일까. 명물 음식점은 도심재개발로 옛 터를 잃고 빌딩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다. 투어단은 이날 빈대떡의 청일집, 해장국의 청진옥, 메밀국수의 미진을 순례하면서 서울음식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미래유산 목록에 오른 42개의 음식점 중 종로구에는 이들 3곳을 포함해 이문 설농탕(설렁탕), 진아춘(중식), 형제추어탕(추어탕), 열차집(빈대떡), 원조할머니 기름떡볶이(떡볶이), 유진식당(냉면) 등 모두 9곳이 포진한다. 중구에는 용금옥(추어탕), 은호식당(꼬리곰탕), 문화옥(설렁탕), 우래옥(냉면), 안동장(중식), 명동 할매낙지(낙지볶음), 부민옥(해장국), 오장동 함흥냉면(냉면), 고려 삼계탕(삼계탕), 유림면옥(메밀국수), 산골막국수(막국수), 진주회관(콩국수), 라 칸티나(양식), 무교동 북어국집(북엇국), 전주중앙회관(비빔밥) 등 무려 15곳이 선정됐다. 종로·중구 2개 구에만 전체의 절반이 넘는 24곳이 집중돼 있다.# 궁중요리 등 서울 전통음식은 잊혀져 가 한결같이 서민음식이다. 궁중요리와 반가음식의 고향인 서울에서 살아남은 미래유산은 서울의 전통요리가 아니라 지방과 외국에서 온 이방인들이 퍼뜨린 팔도요리와 외국음식이란 점이 특징이다. 보통 서울음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궁중요리와 설렁탕, 빈대떡, 민어탕, 불고기에서 서울음식의 지평이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서울음식은 종로의 설렁탕과 빈대떡, 신당동 떡볶이, 을지로 평양냉면과 골뱅이, 동대문 닭 한마리, 오장동 함흥냉면, 신림동 순대, 마포 돼지갈비, 왕십리 곱창, 장충동 족발, 성북동 칼국수처럼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특정 음식이 손꼽힌다. 서울로 모여든 이북 사람, 영호남 사람이 음식과 함께 서울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 두루 섞였다. 비빔밥 문화이다. 안타깝게도 서울토박이 음식은 뒷전으로 밀렸다. 글 노주석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사방 동촌(대학로 일대) ●일시 및 집결장소 : 5월 19일(토) 오전 10시 혜화역 2번 출구 마로니에공원 좋은공연안내센터 앞
  • [씨줄날줄] ‘광화문 육의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광화문 육의전’/서동철 논설위원

    조선의 도성(都城) 한양은 정치의 거리와 경제의 거리가 분리되어 있었다. 도성 북쪽의 북악산에서는 두 개의 하천이 남쪽으로 흐른다. 서쪽으로는 백운동천이 자하문로를 따라, 동쪽으로는 삼청동천이 삼청로를 따라 이어진다. 두 물길이 합류해 만들어진 것이 청계천이다.백운동천은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이르러 광화문 사거리 방향으로 크게 곡선을 그린다. 백운동천과 삼청동천 사이 삼각형 모양의 땅이 곧 정치의 거리였다. 북쪽에는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자리잡았고, 그 남쪽으로는 관청가인 육조(六曹)거리가 들어섰다.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을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보호하는 일종의 자연 해자(垓子)로 활용한 것이다. 이 자연 해자 내부 지역은 사실상의 정치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태종은 삼청동천 바깥 운종가(雲從街), 곧 오늘날의 종로를 경제의 거리로 만들었다. 개경의 시전을 본떠 이곳에서부터 동대문에 이르는 간선도로의 양옆에 국가 소유로 상인들에게 임대하는 점포인 공랑(公廊)을 지어 재정에 충당한 것이다. 광화문 교보빌딩과 광화문 D타워 사이 삼청동천이 흘러나가는 복개도로가 경계선이었다. 정치의 거리는 특권 계급의 공간이었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과 백운동천 사이에 주거지가 일부 있었지만, 영조가 세자 시절 머물던 창의궁 터의 존재처럼 백성들의 공간은 아니었다. 반면 운종가는 ’높다란 종각 아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네’라고 노래한 조선 후기 문인 강이천의 시처럼 활력이 넘치는 서민들의 공간이었다. 실학자 이덕무는 ‘거리 좌우에 늘어선 천 칸 집에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다’고 했으니 종로의 육의전(六矣廛)거리를 가리킨다. ‘천 칸’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금 육조거리와 육의전거리는 모두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보존 양상은 조금 다르다. 육조거리는 다양한 이유로 과거 모습을 다시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육의전거리는 초입인 청진동부터 훼손되고 있지만 위태로운 가운데 적지 않은 지하 유구는 살아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엊그제 “광화문광장에 조선시대 육의전을 재현하겠다”고 밝혔다. ‘광화문 육의전’을 활성화하고자 광장 양옆에 2층 한옥을 짓겠다는 구상도 덧붙였다. 하지만 육의전은 육조거리 터가 아닌 육의전 터에 복원하는 것이 역사를 보존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싶다. 광화문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방법은 ‘육의전 재현’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육의전 유구는 지금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번화했던 조선의 중심길… 지금도 생활경제 중심축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번화했던 조선의 중심길… 지금도 생활경제 중심축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의 8차 탐사가 지난 15일 서울 숭례문광장에서 보신각까지 ‘남대문로의 풍경’을 주제로 남대문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밤새 장맛비가 내렸고, 중부지방엔 폭우가 예보됐지만 투어 예약자 중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실제 투어 시작 이래 두 달간 진행된 행사에는 투어 신청자 전원이 참석했다. 해설을 맡은 한세화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구수한 어투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투어를 이끌었다.남대문로는 한양의 3대 대로 중 하나다. 오늘의 광화문광장인 육조대로가 동서축선(軸線)인 운종가(종로)를 만나 동대문 쪽으로 뻗었다가 종루(보신각)에서 꺾어져 숭례문까지 이르는 길이 바로 남대문로다. 이것이 조선의 남북축선이다. 일제강점기 지금의 세종대로(세종로+태평로+남대문로)가 만들어지기 전 광화문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신작로였다. ‘고무래 정’(丁)자 형태를 취했는데 ‘불산’ 관악산의 화기가 ‘나무산’인 목멱산(남산)을 불쏘시개 삼아 일직선으로 경복궁으로 향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였다. 불길이 넘지 못하도록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남대문 앞에 팠으며, 불이 타오르는 형상의 ‘숭’(崇)자와 오행상 불에 해당하는 ‘예’(禮)자를 써서 숭례문(崇禮門)이라는 세로 3.5m짜리 편액을 내걸었다. 황토마루라는 언덕을 세종로 네거리에 쌓았고, 마지막으로 ‘불을 다스리는 물의 신’인 해치 한 쌍을 광화문 앞에 세웠다.숭례문인가, 남대문인가. 아직도 숭례문과 남대문 사이에서 헛갈려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우리의 이름체계는 왜 이렇게 다양할까. 사람과 사물, 땅을 부르는 몇 개의 이름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하나로 특정 짓지 않고, 여러 개를 경쟁시켜 적자생존 하도록 한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이름(名)을 받고, 성년이 되면 자(字)를 가지며, 사람에 따라 살아서 호(號)와, 죽어서 시호(諡號)를 갖는 것과 같이 지명과 사물의 이름도 다분히 다중적이고 다의적이었다. 서울의 지명을 예로 들면 한성, 한성부, 한양, 경성, 황성, 수도, 경도, 한도, 왕도, 황도, 도성, 도읍, 경조, 경, 한경, 수선 등 20개에 가깝다. 한강의 이름도 경강, 용산강, 서강 등 3강이 보편적이지만 때론 5강, 8강, 12강까지 세분해 불렀다. 이 밖에 백악산과 북악산, 남산과 목멱산, 삼각산과 북한산 등등 수많은 지명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육조대로와 광화문광장의 경쟁에서는 광화문광장, 청계천과 개천 중 청계천, 종로와 운종가 중에서는 종로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이와 달리 숭례문과 남대문은 애초부터 병존하는 이름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1396) 9월 24일에 “정남은 숭례문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동남은 광희문이니 속칭 수구문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4대문과 4소문의 경우 백성이 사용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로 공식 명칭보다 부르기 쉬운 이름, 즉 ‘속칭’을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광화문이 경복궁의 정문이라면, 숭례문은 수도 한양의 관문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넓고 긴 다리 광통교를 청계천에 놓았고, 이 길을 따라 2000여칸의 시전행랑이 빽빽하게 들어선 최고의 번화가였다. 임금의 행차길이자 의전로였다. 오늘날 광화문과 숭례문을 직선으로 잇는 세종대로 변이 장대 같은 빌딩숲을 이루지만, 종로타워~롯데백화점~명동 입구~한국은행 앞~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조선 길’이 세월이 흘러도 서울의 생활경제 중심축이다.조선의 주작대로인 남대문로는 어쩌다 ‘경성의 길’이 되었나. 대한제국기 고종이 황궁을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긴 것이 임계점이었다. 청국과 일본의 간섭을 피해 외국공관 옆으로 가면서 청계천 이남 정동과 무교동, 소공동, 남대문로 지역이 부상한 것이다. 이는 서울의 중심이 청계천 이북 북촌과 서촌에서 청계천 이남 중촌과 남촌으로 공간이동한 것을 의미한다.이후 일제강점기 남산과 용산에 자리잡은 일제 지배기구와 거류민 주거지를 중심으로 서울의 도시구조가 재편됐다. 본정통(충무로)과 황금정(을지로)-장곡천정(소공로)-어성정(남대문로)-경성역(서울역)-원정(원효로)-영등포-인천으로 이어지는 조선 수탈경제 라인이 형성됐다. ‘경성’이 아니라 ‘게이조’였다. 경성땅의 70%가 일본인 소유였고, 상주인구 3분의1이 일본인이었다. 현재 서울의 중심구가 종로구가 아니라 중구가 된 것도 경성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종로구가 중구가 되고, 중구는 남대문구 정도의 지명을 갖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식민시기 경성은 일본식 자본주의의 산실이자 임상실험실이었다. 중세 성곽도시에서 1000만명이 사는 메트로폴리스로 팽창한 기원이기도 하다. 조선은행(한국은행)과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명치좌(명동예술극장), 2층 한옥상가 등 우리가 보고 있는 남대문로의 풍경은 일본을 경유한 서구 문물의 도입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지층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노주석의 서울살이] 걷고 싶은 도시의 꿈

    [노주석의 서울살이] 걷고 싶은 도시의 꿈

    구한말 서울은 불결(不潔)의 도시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 파란 눈의 선교사와 여행가들은 인구는 많고, 도로는 좁고, 오물로 뒤범벅된 도시에 대해 혐오감 어린 악담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실학자들이 도로 확장과 가로 정비를 촉구하고 나섰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사람들이 길을 차지해 말을 탄 사람이 서로 마주치면 지나칠 수 없다”고 했고,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수레를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도로가 나쁜 것은 사대부 탓이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질타했다. 보다 못한 고종이 도성(都城)의 정비를 이채윤 한성부윤(당시 서울시장)에게 맡겼다. 개화파 이채윤은 간선도로 확장에 착수했다. 운종가의 공식 상인조합 건물인 시전행랑(市廛行廊)에 틈입한 무허가 가게, 이른바 가가(假家)를 정리했다. 시전에 딸린 방이 전방(廛房)이 됐다가 나중에 점방(店房)이 되고, 가가가 가게로 명칭이 변이됐으니 이들 가가가 큰길을 암세포처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종로가 왕복 8차선의 도로폭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이 과감한 정비 덕분일지도 모른다. 18세기 후반 장흥 출신 실학자 위백규가 그린 ‘한양도’에서 볼 수 있듯 2000여칸에 이르는 시전행랑은 오늘의 세종대로 일대에 맞먹는 불야성이었다. 시전행랑은 경복궁, 한양도성과 함께 한양의 3대 랜드마크였다. 1960년대 말 지금의 세운상가 터에 자리 잡은 2200채의 무허가 판자촌과 세계 최대 규모의 사창가 ‘종삼’(鐘三)을 밀어버린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업적에 버금가는 ‘원조 도심재정비사업’이라 할 만하다. 요즘 ‘걷자, 서울’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사람 인(人) 자 모양의 심벌을 길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서울시의 새로운 보행 정책이다. 박원순 시장은 “걷는다는 것은 건강·안전이고 행복·자유이며 연결”이라면서 “걸으면 시민 건강이 살고, 서울 경제가 살고, 지구 환경이 살아난다”고 보행천국론을 강조한다. 백번 천번 지당한 말씀이다. 캐나다와 이스라엘의 두 도시학자가 쓴 ‘도시의 정체성’(The Spirit of Cities)이라는 책을 읽어 보면 어떤 도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걷는 것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그 도시의 사람들, 역사와 문화, 사회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서울은 제대로 걸을 수 있는 도시인가. 심벌을 붙이고, 길에 스토리를 입힌다고 될 일이 아닐 성싶다. 최대의 방해물은 노상 적치물이라고 본다. 새삼 말하지만 서울은 걷는 자의 천국이 아니라 노상 적치물의 천국이다. 가끔 서울의 보행로가 공공보도인지, 가게의 점유지인지 헷갈릴 정도다. 너나없이 길에 상품 진열대나 물품을 내두고 공공연히 사용하고 있지만 제대로 단속이 이뤄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노상 적치물 실태조사 현황도 공개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보도환경 개선은 뒷전인 채 딴전이다. 언제까지 보행자가 노상 적치물을 피해 다녀야 하나.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은 상인들이 청계천을 떠나도록 설득했기에 가능했다. 정녕 ‘걷는 도시, 서울’을 만들려면 보행 흐름을 끊는 길거리의 무법자 적치물부터 상가와 점포 안으로 들여놓도록 ‘노상 적치물과의 전쟁’부터 선언하는 것이 순서다. 시류에 영합하는 인기 정책에 예산을 쓰기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도시의 미래를 생각하기를 고언한다. 그래야 업적으로 남는다.
  • [이주의 어린이 책] 조선 선비들이 풀어낸 이야기 보따리

    [이주의 어린이 책] 조선 선비들이 풀어낸 이야기 보따리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한국고전번역원의 우리 고전 이야기책 6권이 출간됐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쓴 원작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 쓴 이야기에다 한국적인 묘사와 채색을 더했다. ‘암행어사를 따라간 복남이’(정혜원 지음)는 조선 순조 때 박내겸이 평안남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돼 겪은 경험을 적은 ‘서수일기’(西繡日記)가 근간이다. 서수일기에 한 차례 등장하는 복남이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유몽인이 이야기 580편을 모은 우리나라 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譚)과 성호학파의 거두인 이익이 자연을 관찰하면서 깨달은 점을 적은 ‘관물편’(觀物編)은 각각 ‘나는야, 이야기 먹는 도깨비!’(박이담 지음)와 ‘아하! 자연에서 찾은 비밀’(조경구 지음)로 새롭게 쓰였다. ‘운명아, 덤벼라!’(강민경 지음)는 두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을 다룬 책이다. 두 사람은 모두 양반가의 서얼로 태어났으나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하면서 벼슬을 했다. ‘궁금증 풍선과 떠나는 금강산 여행’(박은정 지음)은 조선 후기 문장가인 도곡 이의현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바탕으로 쓴 기행문이다. 개구쟁이 서민과 말썽꾸러기 궁금증 풍선이 도곡 할아버지와 금강산을 여행한다는 내용이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주변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살핀 ‘역사 속을 달리는 서울 지하철’(김용인 지음)도 간행됐다. 종각역 근처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시장 거리인 운종가가 있었고, 종로5가역 부근에는 효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어의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권 116∼206쪽. 8000원.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구르미’ 박보검도 반한 김유정, 독무 장면 “두 달 맹연습” 장구+승마까지..

    ‘구르미’ 박보검도 반한 김유정, 독무 장면 “두 달 맹연습” 장구+승마까지..

    ‘구르미’ 박보검도 반한 김유정 독무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됐다. 지난 30일 방송된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4회분에서 왕(김승수 분)의 사순 잔치에서 독무를 추기로 한 애심(차주영 분)이 사라지자,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세자 이영(박보검 분)이 곤란에 빠질 것을 염려한 홍라온(김유정 분). 여자임을 들킬까 조심조심 살아가던 그녀는 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기꺼이 여자가 됐다. 내시가 아닌 무희로 나타나 아름답고도 아련한 몸짓으로 영은 물론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울렸다. 털털한 남장 여자 홍삼놈이 아닌, 예악을 즐길 줄 아는 여인 홍라온의 독무 씬을 위해 약 두 달간 연습했다는 김유정. “홍라온의 위장 내시라는 캐릭터의 기본 틀을 가장 많이 깨뜨리는 장면”이었기에 윤미영 무용감독과 함께 라온의 자유로운 감성과 여성스러운 느낌이 공존할 수 있도록 의논을 거듭하는 등 의욕적으로 참여했다고. 두 달간 김유정을 지도한 윤 감독은 “극 중 이영의 말처럼, 고증에 입각한 궁중의 정재는 정적이지만, ‘라온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으로 안무를 만들었다”며 “고맙게도 김유정이 두 달 간 열심히 연습한 만큼, 독무 씬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더라”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김유정은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무용 이외에도 운종가의 사당패 씬을 위해 장구도 연마했고, 사극의 필수인 승마도 배우며 홍라온이 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녀는 “여러 가지로 많이 배웠고, 배우면서 나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라며 배우로서 성장하는 즐거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구르미 그린 달빛’은 오는 5일 밤 10시에 제5회가 방송 된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근현대 유통 핵심지 종로5가…111년 패션 1번지 광장시장…상인정신 숨쉬는 방산·중부시장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근현대 유통 핵심지 종로5가…111년 패션 1번지 광장시장…상인정신 숨쉬는 방산·중부시장

    서울미래유산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미래유산의 유형은 문화적 인공물, 문화적 행위·이야기, 배경으로 구분된다. 문화적 인공물에는 토목구조물, 건축물과 같은 건조물, 그림, 조각, 공예품, 공산품 등이 포함된다. 문화적 행위·이야기는 의식이나 기술, 전통과 명성, 이야깃거리 같은 무형 유산을 의미한다. 배경은 문화적 인공물이나 문화적 행위, 이야기 등이 만들어지는 배경을 의미한다. 서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특색 있는 장소나 경관이 포함된다. 미래유산 선정에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은 ‘보존이 필요한 공통의 기억과 감성’이다. 서울시는 서울신문, 문화지평과 함께 미래유산에 대한 보존과 홍보를 위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앞으로 남은 답사 코스를 확인할 수 있고 참가 신청도 가능하다. “전국에 전통시장이 몇 곳인지 아시는 분?” 이희준(29) 전통시장해설사이자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질문을 던졌다. 답사에 나온 시민들은 어림짐작으로 답해 보지만 정답 근처도 못 갔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1398개의 전통시장이 있고 그중 330여개의 시장이 서울에 집중돼 있습니다. 시장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선사시대 제전시가 열렸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시장은 인류 역사와 함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23일 서울미래유산 탐방답사 네 번째 시간은 서울의 전통시장인 광장, 방산, 중부시장이 주인공이었다. 20대인 이 해설사는 전국 전통시장 798곳의 방문기록을 가진 ‘시장덕후’이다. 이 해설사는 MBC 생활정보프로그램 ‘생방송 오늘 저녁’에서 전국 전통시장을 소개하는 시장 전문가다. 얼마 전에는 구로시장 영프라자에서 참기름, 들기름을 파는 방앗간 ‘청춘주유소’를 개업한 청년창업가이기도 하다. 설명은 50대 아저씨처럼 구수하게 술술 풀어간다. 광장시장은 서울 전통시장 1호…동문 옆 신발점은 미래유산 지정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은 어디일까요?” 이 해설사는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이날도 답사 내내 다양한 질문으로 시민들을 긴장(?)시키면서 전통시장 매력에 푹 빠져들게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12년(490년) 오늘날 경주 지역에 국가에서 직접 설치한 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백제 가요 ‘정읍사’에도 시장의 존재를 짐작게 하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 7번 출구에 모인 서울미래유산 탐방답사단은 이곳에서 시장의 역사에 대해 선행학습을 하고 시장답사에 나섰다. 시장답사라서 그런지 앞선 답사 때보다 중년 여성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 해설사의 설명이 거침없이 이어진다. “조선 초 1414년 경복궁 앞 시전에 무려 2827개 가게가 있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 한성부조’에 남아 있는데 이를 운종가라 불렀습니다. 조선 후기 무렵에 지금 남대문시장 자리에는 ‘칠패시장’이, 동대문시장 자리에는 ‘이현시장’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운종가는 지금의 광화문과 종로1가 인근을 말하는데 조선 왕조가 허용한 유일한 공식 시장 ‘육의전’이 있던 곳이고 칠패시장이나 이현시장은 이른바 ‘난장’이다. 답사팀은 광장시장 동문을 통해 시장으로 들어갔다. 동문 입구 옆에는 상호명이 서울고무상사(프로월드컵)인 신발가게가 있다. 1955년 개업해 주인은 몇 번 바뀌었지만, 60년 동안 신발가게로 한자리를 지켜온 이유로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됐다. 광장시장은 이현시장 후신으로 1905년 한성부에 등록된 서울 공식 전통시장 제1호이면서 최초의 사설시장이다. 청계천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어서 광장(廣長)시장으로 불렸다. 1905년 7월에는 동대문시장으로 이름을 확정했다가 나중에는 ‘넓게 저장한다’는 의미의 광장(廣藏)으로 정해졌다. 서울미래유산은 아니지만 문화재적 가치는 그 이상이다. 답사팀은 광장시장의 광장(廣場)에 모였다. 이곳은 먹거리 구간을 지나 견과물 구간에서 좌회전해서 포목부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시장의 중심이다. 포목을 사러오지 않는 이상 이 공간을 접해 보기 힘들다. 답사단은 광장에 다다르자 놀랍다는 반응이다. 이경윤(55·나눔마켓 대표)씨는 “지금껏 광장시장 하면 빈대떡이나 육회 같은 먹거리만 떠올렸지 이런 곳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포목부를 지나면서 이 해설사가 “뭔가 이상한 간판이 있을 것”이라며 궁금증을 유발했다. 주변을 살피자 포목점 간판들 사이에 ‘장안백화점’이란 간판이 낯설다. 이 해설사는 “과거 백화점들이 별도 건물을 짓는 대신 상권이 발달돼 있는 시장에 ‘숍인숍’(가게 안에 또 다른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것) 형태로 들어온 흔적”이라며 “지금도 수원 남문시장(글로벌명품시장, 팔달문시장 주변 9개시장 연합) 중 하나인 영동시장에는 영동백화점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창섭(47·중소기업진흥공단 홍보실장)씨는 “전통시장 안에 백화점이 있었다는 것도, 그 백화점이 지금은 초라하게 변한 것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며 “예전의 화려함이나 생기는 잦아들었지만, 그럼에도 전통시장은 그 나름대로 멋이 있다”고 말했다. 성은도서 서울미래유산 후보감…예지동 시계골목 보존가치 높아 광장에서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도 포목상점과 한복점들이 즐비하다. 구석진 상가 몇 곳은 셔터가 내려져 있다. 이에 대해 이 해설사는 “주인들이 고령화되면서 가업 승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포”라며 “저곳에 청년들이 들어와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책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중앙직물부 2층에 가면 ‘성은도서’라는 세 평 남짓한 허름한 책방이 있다. 이곳은 40년 넘게 패션 디자이너와 관련 학과 학생들에게 수입 패션도서를 공급하고 있는 곳이다. 사장님은 “작고한 앙드레 김도 단골이었다”며 “유명 패션디자이너 중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층 한쪽에는 저렴함을 자랑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수입 구제상가도 있다. 이현주 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관은 “시장 답사를 통해 아주 오래간만에 전통시장의 정을 느끼고 왔다”며 “광장시장의 떡볶이 먹으러 꼭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다음 답사지인 방산시장을 가기 위해 예지동 시계골목을 지났다.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 옛 풍경을 간직한 골목이다. 고급 손목시계를 고치기 위해 일부러 외국서 찾아오는 곳이다. 시계태엽을 직접 깎아 만드는 장인들이 아직도 활동 중이다. 이 해설사는 “대부분 시계공들과 장인들이 예지동을 벗어나 인근 세운상가와 전국 각 지역으로 흩어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며 “세계 어느 장인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이들의 숙련된 기술과 시계 골목의 역사는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크다”고 강조했다. 방산시장은 1976년 9월 폐교된 방산국민학교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방산이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청계천에서 떠내려온 부산물과 흙이 쌓여 있던 걸 퍼 올려 산처럼 쌓아 놓았다고 해서 가산 또는 방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분뇨가 많이 쌓이자 향기로 덮기 위해 꽃을 심은 데서 유래한다. 방산시장의 주력 상품은 얼마 전까지 초콜릿과 제과제빵 재료였다가 지금은 공교롭게도 향수와 디퓨저다. 방산시장 이름과 어울리는 품목이 자리잡은 셈이다. 방산시장을 둘러보다가 비교적 보존이 잘 된 적산가옥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재미다. 시장 인접에는 김치찌개가 유명한 은주정이란 밥집이 있다. 답사단은 이날 은주정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은주정은 문턱이 없어 이동장애를 가진 이경윤씨의 휠체어가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광장시장·방산시장·중부시장…모두 후대를 위해 보존할 곳 답사단은 서울미래유산인 중부시장을 가기 위해 길을 건넜다. 이 시장은 1950년대 후반 남대문과 동대문 인근에서 건어물을 팔던 상인들이 모여 만든 시장이다. 개설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개소식에 참석할 정도로 시장 규모와 거래액이 상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해설사가 답사단을 이끈 곳은 50년간 황태 등 건어물을 판매하는 서울상회다. 정문교 사장은 개성 있는 필체로 갖가지 교훈이 되는 글을 써서 점포 밖에 걸어 뒀다. ‘정직·정확·정성’이란 상훈(商訓)도 써붙여 놨다. 정 사장은 이날도 성경을 붓글씨로 필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 사장은 “장사는 모름지기 신용이고 사람은 됨됨이가 중요하다”며 답사단에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몇 마디 건넸다.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중부시장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서쪽 끝이다. ‘오신 손님 친절하게 소비자를 보호합시다’라는 오래된 간판이 보이고 회랑이 있는 오래된 건물이 서 있다. 이 해설사는 “시장은 아침, 점심, 저녁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 내일이 다른 것처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전통시장의 역사와 상인들의 이야기, 특화된 상품에 대해 듣는 것만으로도 시장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마무리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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