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청진기/박만호
(무대)
원룸 아파트 아래 위층,301호와 401호
(등장인물)
남:소리감별사
여:빨간 구두의 여인
의뢰인1:50대 초반
의뢰인2:30대 중반
의뢰인3:30대 초반
할머니:꿈속의 환영
딸:중학생
(소리에 대해)
소리는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연기한다. 극의 흐름을 이끌고 가는 극적 요소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 소리를 측정하는 청진기는 ‘호른’의 유려한 곡선 음관을 부착한 특별한 도구이다.
●제1장
어둠 속에서 “영호야- 영호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원룸 아파트 아래 위층인 301호와 401호가 서서히 드러난다. 스탠드만 침침하게 켜져 있는 아래층 301호는 실내가구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 위층 401호는 아직 어둠 속에 싸여있다.
“우웅 우웅-”하는 진동음이 들리자,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귀마개를 벗고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남자.“새로운 메시지가 없습니다.”라는 안내음이 들린다. 이어 아파트의 여러 생활소음들이 와글와글 들려온다. 다시 귀마개를 하고 눕는 남자. 이때 다급한 뾰족구두 소리. 쫓기듯 달려와 위층 401호로 올라간다. 문을 닫고 구두를 벗고 룸으로 들어서는 여자. 외투를 벗고 침대 위로 무너지듯 쓰러진다.
아래층 침대에 누웠던 남자가 슬며시 몸을 일으킨다. 플래시를 켜서 천장을 비춰본다. 위층 여인의 숨소리가 평정을 되찾는다.“끼리리리-”하며 냉장고 가동 소음이 시작된다. 냉장고를 비추는 플래시. 새벽 4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와 함께 암전된다.
무대 밝아지면, 아래층 301호의 실내가 드러난다. 침대와 평범한 실내가구들. 구석 쓰레기통에는 호른 나팔과 야구방망이가 처박혀 있다. 탁자에서 남자에게 소리 감별을 받고 있는 의뢰인들. 호른을 닮은 청진기로 손목시계들을 검진하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소리:(손목시계) “째각 째각 째각 째각-”
남자:이게 불량입니다. 태엽이 긁히는 소리가 나는군요.
의뢰인1:계측기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남자:0.5데시벨의 소음이군요. 계측기는 보통 플러스 마이너스 1데시벨의 오차를 가지고 있지요. 다음 분.
의뢰인2:(믹서기 3개를 탁자에 놓고) 동방가전에서 출시한 신제품입니다. 모델별 소음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소비자에게 주는 청각적 영향 말이죠.(뚜껑을 살피는 남자에게) 저... 뚜껑이 아니라 작동시의 소음만 분석해 주시면.
남자:모든 소리를 다 분석해야죠.
의뢰인2:우리가 필요한 건.
남자:다시 말하지만, 소리는 복합적입니다.
의뢰인1:감별사님을 믿고 따르세요.
남자:G-1800, Q-300, A-7, 이 세가지 모델의 소리 중에서 A-7이 가장 우수합니다.
의뢰인2:그럴리가요.A-7이 가장 구형인데.
남자:신제품이 G-1800이죠? 이건 실패작입니다.110데시벨의 고주파 파동 현상이 발생합니다. 여기에 무방비로 노출되면 고객만족도가 어찌 될까요? 다음 분이오.
의뢰인3:역시 탁월한 분석이십니다.(포도주 2병을 내밀며) 적포도주와 백포도주입니다.
소리:(뾰족구두) “또각 또각 또각 또각-”
(포도주 병을 살펴보다가, 뾰족구두 소리에 눈길을 돌리는 남자. 초인종 소리. 남자가 청진기를 벗고 문을 연다. 복숭아 접시를 들고 들어오는 이층 여자)
여자:안녕하세요? 저는….
남자:위층 401호 분이시죠?
여자:어머나, 어떻게 아셨죠?
남자:(여인의 빨간색 뾰족구두를 보며) 내 추측이 맞았군요. 빨간색일 거라 생각했죠. 어젯밤에 구두 소리를 들었어요.
여자:어머나, 새벽 4시가 넘어 들어왔는데.
남자:새벽엔 더 잘 들리죠.
여자:한데 색깔까지 어떻게 아셨나요?
남자:검은색 구두였다면 소리가 더 낮게 깔리거든요. 낡은 가죽이라 세월의 나이가 느껴지던데요.15년 된 캥거루 가죽입니다!
여자:호호호- 점쟁이신가봐! 어제 이사왔어요. 인사도 드릴 겸 복숭아 좀 드시라고요.(남자에게 복숭아 접시를 건네며) 어머나, 손님들이 많이 계시군요.
남자:제 의뢰인들입니다.
여자:무얼 의뢰 받으시는데요?
남자:소리요.
의뢰인1:제품의 소리를 감별해 주시는 거죠.
의뢰인2:그 느낌까지요.
의뢰인3:감별사님은 기계보다 정확하시죠.
여자:우리 아파트에 대단한 명인이 살고 계시는군요. 저…이것도 감별이 되나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소리가 잘 안 들리거든요.
남자:(휴대전화를 검진하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소리가 작게 설정된 거 외엔.(진동음을 조정하고) 들어보세요.
소리:(휴대전화 진동음) “우웅 우웅 우웅…”
남자:커졌죠? (휴대전화를 여자에게 주며) 이웃사촌이니 감별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여자:아유, 고마워요.
남자:소리를 놓치면 후회가 크답니다.
여자:맞아요. 일년 전에 정말 중요한 연락을 놓친 적이 있어요. 샤워 중이었거든요. 제 인생이 걸린 중요한 기회였는데….30분 늦게 연락하는 바람에 바이 바이! 근데 감별사님은 소리를 어떻게 분석하시나요?
남자:기억되어 있는 소리들 때문에 분석이 되는 겁니다.
여자:이 세상 소리를 전부 기억하고 계세요?
남자:한 번 들으면.
의뢰인2:스리쿠션 때린 당구공처럼요?
의뢰인3:구구 팔십일 구구단처럼요?
여자: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남자:망각이 안돼요.
모두:오!….
(다시 포도주 병을 검진하는 남자. 가만히 주시하는 사람들)
소리:(포도주) “출렁 출렁 출렁 출렁-”
남자:아르마냑 17년산이군요.
의뢰인3:네! 맞습니다.
남자:색깔도 소리를 냅니다. 적포도주는 백포도주보다 0.3데시벨 정도 고음을 지닙니다. 잔에 따를 때, 잔을 부딪칠 때, 적포도주는 유혹의 소리를 발산하지요. 좋은 술은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우와!….
의뢰인2:선생님. 그 차이를 일반인도 인식할 수 있나요?
남자:그들도 분명 듣습니다. 말로는 표현하진 않지만, 마켓에서 돈으로 표현하죠.
의뢰인들:(박수치며)니즈는 욕망이다!
여자:전 들을 수 없거든요! 색깔이 소리를 낸다고요? 그런 황당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죠? 왜들 무조건 믿는다고만 하시죠?
남자:이걸 쓰고 한번 들어보세요.
(여자에게 청진기를 건네는 남자)
여자:이건 호른의 음관이잖아요!
남자:제가 특별히 제작한 청진기입니다.
여자:(쓰레기통에 처박힌 호른의 나팔부분을 발견하고) 저기서 떼어내 만드셨나요?
남자:네. 난 새로운 악기가 필요하거든요.
여자:이 청진기가 악기라고요?
남자:그럼요.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악기죠.
여자:혼자만 듣는 게 어떻게 악기가 되죠? (청진기를 던지며) 이건 장난감에 불과해요.
남자:진정하세요. 이 세상은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소리를 외면하지 마세요. 제발…. 이리 오셔서 들어보세요. 호른 소리를 음미할 수 있어야 진정한 호른 주자가 될 수 있듯이, 이 청진기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게 해 줍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거죠.(청진기를 여자에게 씌워주고 백포도주를 흔든다.) 들리나요? 눈을 감고 들어 보세요.
소리:(백포도주) “출렁 출렁 출렁 출렁-”
여자:들려요.
남자:이번엔 적포도주입니다.
소리:(적포도주) “출렁 출렁 출렁 출렁-”
남자:안단테 칸타빌레로 사라지는 아련한 고음의 잔상이 왼쪽 귓전을 스치죠?
여자:(청진기를 벗으며) 들려요…. 하지만 차이는 모르겠어요.
의뢰인1:허허허- 소리 감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의뢰인2:그래서 우린 의뢰를 하러 오고요.
의뢰인3:기계보다 정확하시니까요.
여자:흥, 정말로 듣지 못하는 소리가 하나도 없어요?
남자:듣지 못하는 소리라…. 있죠. 잠들었을 때.
여자:밤에도 안 자고 전부 듣는다면서요. 새벽 4시에 제 구두소리도 듣고.
남자:낮에 자나보죠?
여자:농담하세요? 어째 좋은 이웃이 되기는 힘들 것 같군요.
(휭하니 나가버리는 여자. 의뢰인들도 일어선다.)
의뢰인1:허허허. 성질도 급하시네. 오늘도 좋은 감별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뢰인2,3:최상의 분석이었어요.(박수치며) 엑설런트!
(모두 나가면 하품하는 남자. 위층 402호로 들어서는 여자. 소리를 읊조린다.)
여자:“우리 아기 예쁜 배, 할미 손은 약손, 쓱쓱 만져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우리 아기 동그란 배, 할미 손은 약손. 궁글궁글 쓸어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남자, 위층의 소리를 의식하며 침대 밑에서 박스 하나를 꺼낸다. 박스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꺼내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 스케이트 신발의 줄을 풀렀다가 다시 매더니 하품하며 드러눕는다. 조명 분위기가 바뀐다.)
(탁자 위에서 남자의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코를 고는 남자. 이어 부르는 소리)
소리:“우웅 우웅 우웅- 영호야. 영호야-”
남자:(몸을 뒤채며) 순이니…. 인라인 스케이트 사놨다. 어여 신어봐….(부스스 얼굴을 들고) 엥! 내가 자고 있었나. 순이니? 순이 왔니? 날 저물었는데 얘는 뭐하고 안 들어오나. 어휴, 말을 말아야지. 세상 좋아졌다. 맨땅에서 스케이트를 다 타고.(보호장구와 헬멧을 착용해보며) 돈 쓰게 만드는 기술도 가지가지여. 앉아서 이런 거만 연구하는 놈들 천지니. 어뗘. 순이야. 아빠도 멋져 보이냐? 아빠도 소싯적에 얼음지치기 한가닥 했다. 외날 썰매 모르지? 우선 중심을 잘 잡고…. 긴 꼬챙이 하나를 다리 사이로 넣고 얼음을 팍팍 찍으면서 달리는 거여. 대가미 방죽에선 아빠가 일등했다. 니 이렇게 차려입고 씽씽 달리면 동네 남학생들이 줄줄 따르것다. 순이야, 얼른 들어온나. 인제 호른을 필요로 하는 나이트클럽은 없다. 그러니 아빠는 내일이면 배 타러 가야헌다. 한동안 못 보니까 얼른 와.
(시계를 흘낏 보다) 아니 근데 이누무 지지배가 아직도 들어올 생각을 안 하고 어딜 싸돌아 다니는 거여. 내 이년을….(휴대전화 메시지를 발견하고) 얼래, 이게 뭐여.“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려 근데.“아빠. 로데오광장 빨리….” 20분전에 온 거네. 로데오 광장? 하하- 요것이 눈치 하난 빨라요. 거기서 스케이트 타고 싶다 이거지? 다른 애들처럼. 오냐. 아빠가 가마. 근데 얘가 스케이트 사논 걸 어떻게 알았지? 돈 없다고 등짝을 후려패서 학교 보내 놨더니…. 하여튼 귀신이여 귀신.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달려 나가는 남자. 그 열린 문으로 여자가 은밀하게 들어와, 가구들 뒤에 무엇인가를 붙여 놓는다. 감별사의 청진기를 보고 자기 심장에 대본다.)
소리:(심장박동) “쿵 쿵 쿵 쿵-”
(남자가 돌아오는 기척. 얼른 복숭아 가져왔던 접시를 드는 여자. 남자가 힘없이 들어선다.)
여자:어머! 오셨네요. 문이 열려 있기에 접시를 가져가려고요. 아깐 제가 너무 흥분했었나 봐요. 어디 산책 다녀오세요?
남자:근처 로데오 광장에 갔었습니다. 아이들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있더군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도 즐거워지거든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지요. 웬 처녀가 글쎄 나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겁니다.
여자:어머나, 그래서요.
남자:후후후. 당황스러워 혼났습니다.
여자:그 아가씨 아빠가 감별사님과 비슷한가 보죠.
남자:하긴…. 그 아가씨도 우리 딸애와 비슷하긴 했어요.
여자:따님이 있으세요?
남자:…….
여자:참, 그거 잘 타세요? 스케이트요.
남자:내 스케이트가 아닙니다.
여자:누구한테 선물하시려나 보죠?
남자:…….
여자:호호- 말씀하기 싫으신가 봐요.(문으로 가며) 그럼 또 뵙겠습니다.
남자:일년 전, 휴대전화 소리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죠? 소리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금방 사라지거든요.
여자:감별사님. 좋은 이웃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여자 나가면, 남자는 박스를 옆에 낀 채 홀로 서성인다. 조명 분위기 다시 바뀐다.)
남자:어휴! 몇 분 차이로 이게 뭐여. 속 터져. 쬐금만 더 기다리지 않고선.(박스를 놓고 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하며) 이누무 기지배는 대체 어딜 간 거여.
소리:“삐- 삐- 새 메시지는 없습니다.”
남자:아! 눈부시다. 눈부셔. 왜 이리 눈이 부시지? 불을 끌 수도 없고. 순이야, 어여 연락 좀 해라. 아빠 이러다가 죽는다잉. 일주일째 이러고 잠 한숨 못 잤다.(침대에 드러누우며) 이러다 아빠 죽겠다. 순이야. 순이야….
소리:(진동소음) “우웅 우웅 우웅 우웅-”
남자:(벌떡 일어나 휴대전화 확인하며) 아니잖아. 어디지? 아래층 201호여! 죽겠네.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뛰어가는 남자. 문을 다급히 두드리는 소리)
남자(E):여보세요,201호 아저씨! 전화 왔어요- 얼른 휴대전화 좀 받아 봐요.
201호(E):돌겠네! 안 받으려던 건데. 알았다니까-
(휴대전화 진동소리 겨우 멈춘다. 다시 들어오는 남자)
남자:싸가지 없는 놈. 끝까지 안 받네. 매너들 없어.
소리:(TV 끝나는 소리)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치이-”
남자:302호 미친놈. 오늘도 저 모양이야. 꺼라. 제발 좀 꺼라. 바로 옆방에서 이러면 어떡하냐.(앞쪽 베란다로 나와서) 302호- 텔레비전 좀 끄쇼. 시끄러워 살 수가 있나.
이웃들(E):조용히 좀 해요.
남자:302호, 조용히 하라잖아요∼
이웃들(E):301호, 당신이 조용히 해∼ 당신 때문에 못자. 아저씨 날마다 이게 뭐예요.
남자:이런 우라질. 귓구멍이 거꾸로 뚫렸나. 나는 니들 때문에 못자- 아! 눈이 터질 것 같네. 그래도 안 끈다 이거지. 니기미! 대한사람 살아야 길이 보전도 된다.
(야구방망이 들고 나가는 남자.302호 문 부서지는 소리. 비명소리. 순찰차 사이렌 소리)
(위층 401호 여자는 나지막이 뭔가를 읊조린다.)
여자:“쓱쓱 만져 주면…뭐든지 다 낫는다…궁글궁글 쓸어 주면…뭐든지 다 낫는다….”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암전.
●제2장
무대 밝아지면, 아래층 301호 침대에 우울하게 앉아있는 남자.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귀마개를 하고 있다. 말씨가 점차로 사투리 운율로 변해간다.
남자:백두산이 다 닳기 전에, 대한사람 살고 보자는데 웬 말들이 많은 겨.(수건을 풀며) 돌아와 보니 문은 닫혀있고 불은 꺼져 컴컴하고…. 아무도 없는 거여. 그냥 빈집이여. 빈집.(귀마개를 벗으며) 기껏해야 한 삼일이면 됐지. 왜 삼일이 열흘 되고 달포 되고 한달 되느냔 말이여. 왜 삼일이 석달 되고 석삼년 되느냔 말이지.
이상타. 참말 이상한 일이다. 어무이는 금가락지 끼워주면 훨훨 날아간다 허지, 딸년은 스케이트 있어야 씽씽 달려간다 하지. 아! 나도 편지 한 장 달랑 써 놓고 부산으로 가서 외항선 탔다 했지? 석달 열흘만 꾹 참고 다녀오자. 어무이도 없지. 딸자식도 없지. 여편네도 없지∼ 허참, 귀신이 곡할 노릇인 거여, 시방 이것이.
태평양 넘어 동지나해 건너 알류산 열도 거쳐 부산항에 도착, 광복동 시장에서 딸년 인라인스케이트하고 어무이 서돈짜리 금가락지 서둘러 해가지고 와보이, 종적이 묘연한 것이여. 여편네 줄려고 야들야들한 속곳 둘둘 말아 끼고 왔는디, 입을 사람이 없는 거여. 세상 참 얄궂네. 인생 허망타. 어무이도 없지, 딸자식도 없지. 여편네도 없지∼
소리:(진동음)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얼른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남자.“새로운 메시지가 없습니다.”라는 안내음. 실망하는 남자. 이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 남자가 문을 여니 의뢰인들이 의뢰품들을 들고 들어온다.)
의뢰인들:좋은 아침입니다.
의뢰인1:(전자레인지를 탁자에 놓고) 부품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남자:(청진기로 검진하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흠…흠…
소리:(전자레인지) “위이이잉-”
남자 : 모터가 낡았으니 교체하세요. 다음.
의뢰인2:(책들을 놓으며) 신나라출판사의 기획 시리즈 견본품인데요.
남자:(책장 넘기며) 책도 소리를 가집니다. 종이 지질에 따라서 소리는 천차만별입니다.
소리:(종이) “펄렁 펄렁… 팔랑 팔랑… 풀렁 풀렁…”
남자:이건 모조지, 이건 아트지, 이건 하드보드에 코팅까지. 아트지는 반짝 반짝! 모조지는 서글 서글! 3데시벨의 편차가 있네요.(표지를 보며) “세계의 미스터리”라…. 이 제목에는 모조지보단 아트지가 어울립니다. 미스터리는 반짝반짝해야죠.
(여자가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몰래 엿본다.)
의뢰인3:(돌멩이 2개를 놓으며) 심산인테리어에서 의뢰한 겁니다.
남자:(돌을 살피며) 흥미 있는 소재이군요. 돌의 소리는 가장 심원한 소리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재질이니까요. 돌의 소리는 음악의 근본입니다. 돌로 만든 악기인 편경의 소리는 국악의 표준 음정이죠.(돌을 부딪쳐 본다.) 오만년의 역사를 간직한 소리입니다.
소리:(돌) “딱 딱 딱 딱-”
의뢰인들:정말 탁견이십니다.
남자:저 전자레인지는 전에도 감별해 드린 건데요. 저를 시험하시나요?
의뢰인1:예? 오해십니다.
남자:칠일 전에도 해드렸고, 한 달 전에도 했습니다.
의뢰인1:청진기가 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남자:기계든 인간이든 자기만의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리는 살아있는 생명체죠. 청진기는 거짓을 모릅니다.
여자:(앞으로 나서며) 감별사님의 판단을 믿지 못하시나요?
의뢰인1:음…. 출고담당 직원의 미스인가 봅니다. 확인해 보죠.
여자:(모두 자신을 쳐다보자) 어머나! 안녕하세요. 호호호- 문이 열려있지 뭐예요.
의뢰인1:소리 감별은 회사의 일급 기밀입니다.
여자:한심한 출고담당 재교육도 중요하죠.
의뢰인1:(전자레인지 들고 나가며) 성질도 급하시고 변덕도 심하시군요. 흠, 흠.
여자:오늘의 분석은 어땠나요?
의뢰인2:출판사가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의뢰인2,3도 나간다. 남자가 문을 잠그더니, 얼른 여자를 데리고 구석으로 간다.)
남자:혹시 이 아파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 못하셨나요?
여자:글쎄요?
남자:이사 온 뒤로 다른 주민들 보신 적 있나요?
여자:네… 봤죠.
남자:이상하지 않던가요?
여자:네.
남자:언제부터인가 이 아파트 주민들이 잠만 자고 있어요. 모든 활동이 중지된 겁니다.201호는 휴대전화를 안 받는 버릇이 있고,302호는 지가 무슨 애국시민이라고 날마다 애국가를 시청하더니 모두 조용해 진 겁니다.
여자:에이, 고급 아파트는 원래 조용하잖아요.
남자:(눈치를 보더니 말소리를 죽이며) 나는 저 의뢰인들을 믿지 않습니다.
여자:(놀라며)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남자:뭔가 수상쩍은 음모가 있어요. 의뢰 물품이 변하지 않고 있어요.
여자:날마다 똑같아요?
남자:일주일 주기로 반복되고 있어요. 예전엔 한달 주기였죠.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나는 새로운 소리를 원합니다.
여자:좋아하는 음악은 자꾸 듣기도 하잖아요. 가령 호른 연주는 어때요?
남자:모차르트 호른협주곡 3번 2악장 로만자… 호른은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날마다 다릅니다.(청진기 곡선음관을 어루만지며) 호른을 통해서 들어야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하지만 누가 날마다 같은 구름을 보고 싶겠소. 누가 날마다 같은 바람을 맞고 싶겠소. 출고담당 직원의 미스라고 둘러대지만 실수가 아닙니다. 치밀하게 반복되는 순환시스템이죠. 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이 세상이 죽어가는 것처럼. 저들이 소리를 뺐어가는 겁니다. 아…. 이러다가는 당신의 잠꼬대마저 뺐어갈지도 몰라요.
여자:어젯밤에 제가 잠꼬대했나요?
남자:(흉내 낸다.) “쓱쓱 만져 주면… 궁글궁글 쓸어 주면…”
여자:어머, 어머! 저를 너무 속속들이 아시네. 호호호- 내 정신 좀 봐. 가야겠어요.
남자:어젯밤에 당신의 잠꼬대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제발 가지 마세요.
여자:네?
남자:잠꼬대 소린 정말 너무 오랜만에 들어 봤어요. 지금 이 아파트에서 당신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가버린다면 당신도 잃어버릴 것만 같아요. 여기 계세요. 여긴 안전하니까.
여자:(남자를 경계하며)감별사님은 소리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남자:사실은 소리가 무서워요.
여자:왜요?
남자:너무 진실하니까.
(이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온다. 점점 고조되는 온갖 소리들. 서로 뒤섞여 아비규환의 아우성처럼 난무한다.)
소리:“찌르르르… 출렁출렁… 저벅저벅… 쿵쾅쿵쾅… 우웅우웅… 영호야∼영호야∼”
여자:이게 뭐야? 어디서 들리는 소리지?
남자:(귀를 막으며) 아! 아! 저리가. 듣기 싫어. 씨끄러. 듣기 싫어. 아아악-
(남자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워한다. 나가려 하지만 열리지 않는 문. 야구방망이로 치고 머리로 들이받으며 발광하다가 쓰러진다. 여자는 놀라서 남자를 부둥켜안는다. 소리들이 그친다.)
여자:여보… 여보!
(병원 가운을 입은 의뢰인들이 나타난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침대에 뉘고 벨트로 사지를 결박한다. 남자를 청진기로 진단하는 의뢰인1)
여자:아… 어떻게 된 거죠. 무서워요. 무슨 소리였죠? 그이는 괜찮은가요?
의뢰인2:안심하세요. 본 특병동의 소리치료 시스템입니다. 일종의 충격요법이죠.
의뢰인1:상태가 좋지 않아.2단계 프로그램도 실패야. 발작 증세가 멎지를 않네. 더 이상 늦출 수 없어. 내일 수술 일정 잡도록 해.
의뢰인3:근데 보호자께서 동의서에 아직 서명을….
의뢰인1:그깟 동의서 하나를 여태 못 받아? (여자에게) 똑바로 들으세요. 내일도 서명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할 겁니다.(의뢰인2에게) 자네 수련의가 왜 그 모양이야. 그럴 거면 딴 병원으로 가. 내가 이젠 환자한테 훈계까지 받아야 돼? 내가 저를 시험한다고? 미친놈이 입만 살아서. 한데… 어떻게 알았지?
의뢰인2:환자는 지각능력이 있는 게 확실합니다.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에만 몰두하는 주의력 증가 기제가 너무 왕성해서 그렇습니다. 환자의 소리 분석은 정상입니다.
의뢰인1:믹서기 회사에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했잖아.
의뢰인2:그건 생산부장의 말이고요. 오늘 아침에 마케팅팀장과 통화했는데 좋은 지적이라고 반기더군요.2차 분석도 의뢰하겠답니다. 일시적인 “해리성 황홀경”입니다.
의뢰인1:속단하지 말라고 했지? 자네의 진단은 정서적인 판단이 앞서고 있어.
의뢰인2:“뇌손상에 의한 퇴행성 기억장애”란 과장님의 진단은 측두엽의 손상만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거 아닙니까?
(쓰레기통에서 부서진 호른 나팔을 꺼내서 안고 있던 여자가 나선다.)
여자:선생님, 우리 그이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의뢰인1:미치겠네 정말. 아까 발작하는 거 못 봤어요? 가족도 몰라보잖아요.
여자:예전에 연주하던 곡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냈단 말이에요.
의뢰인1:단편적인 기억 정도는 모든 환자들이 다 가지고 있어요.(부적뭉치를 던지며) 이게 뭡니까? 이런 식으로 맘대로 행동하면 퇴거조치시킬 겁니다.
여자:이 부적에 어떤 힘이 있다고 믿으세요? 미신에 불과하다면서요?
의뢰인1:그게 아니고…. 의사의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 아닙니까. 협조요. 협조!
여자:협조했잖아요. 가구며 소지품들 가져다가 집안처럼 꾸며놓고… 순이더러 로데오 광장에서 아빠를 기다리라고 해서 그렇게 했잖아요. 근데 별 이상도 없는 이가 왜 딸을 몰라보나요? 왜 아내도 몰라보나요? 그저 지쳐서 그런 걸 거예요. 집에 가서 잘 요양하면… 고요한 호숫가를 찾아서 호른도 불면서 푹 쉬면 나아질 거예요.
의뢰인1:흥, 호른 분다고 치료가 되면 병원이 뭐하러 있어요! 도대체 의사를 뭘로 보는 거요? 기물을 파손하고 상해를 입힌 환자는 완치되기 전엔 퇴원할 수 없습니다. 내일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세요.(의뢰인3에게) 진정제 5밀리그램…. 아니 7밀리그램 준비하고, 면회는 금지시켜.
(의뢰인1,3 나간다. 흐느끼며 부적을 줍는 여자. 창문으로 복도에서 담배 피우는 의뢰인1이 보인다.)
여자:흑흑흑…. 날더러 어떡하라고요. 기다려라. 기다려라…. 벌써 세 달이 됐어요.
의뢰인2:왜 그토록 소리에 집착하는지 그 압제의 요인을 찾아야 하는데…. 기억 과잉이 문제입니다. 뇌의 측두엽에 너무 많은 소리의 기억들이 축적되어서, 컴퓨터가 다운되듯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치의께선 손상된 부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발작이 계속된다고 보십니다. 삭제키를 눌러야 리소스 부족에서 해방되니까요.
여자:그러면 과거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서요.
의뢰인2:대신 새 기억은 지킬 수 있습니다.
여자:그토록 찾던 딸이 눈앞에 나타나도 못 알아보는데, 앞으론 영원히 그렇게 되겠죠? 이 빨간 구두요… 15년 된 캥거루가죽 맞아요. 저이가 나이트밴드 아르바이트 뛰어서 첫 월급으로 사준 우리 결혼 선물이죠. 이거 신고 난생 처음 비행기 타고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어요. 이 호른은 방직공장 월급 일년을 꼬박 모아서 제가 사준 거예요.(호른을 쓰다듬는 여자. 창가에서 귀 기울이는 의뢰인1) 서귀포 밤바다는 그날 따라 왜 그렇게 고요했는지, 저이가 부는 호른 소리가 수평선 끝까지 울려 퍼졌어요.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 3번 2악장 알레그로. 그게 저이가 아는 유일한 연주곡이죠. 순이를 낳게 되어서 사범대학을 그만뒀으니… 이 모든 걸 다 잊어버리겠죠?
의뢰인2:아마 그렇게 되겠죠.
여자:그렇게 되면, 우린 이 세상 안 산 거나 같네요. 시골 고등학교 밴드부 남학생이 부는 호른 소리에 바람나 쫓아다니다가…. 외아들 사범학교 나와 선상님이 평생소원이던 홀어머니 가슴에 못질하고, 남자 앞길 망쳤다고 원망들은 촌년이… 저승 가서 어머니까지 못 알아보는 산송장 만들어 놨다는 소린 죽어두 들을 순 없네유. 차라리 청진기 쓰고 세상의 소리에 미쳐서 사는 게 나아요. 저인 소리를 사랑했으니까. 저이 어머니도 소리를 벗삼아 사셨으니 하늘나라에선 서로 알아보겠지요.
의뢰인2:사모님….
여자:선생님도 저이가 미쳤다고 보세요?
의뢰인2:의사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하나 있지요. 알 수 없습니다….
(의뢰인3이 주사기 가지고 들어온다. 의뢰인2가 여자를 부축해 나간다. 의뢰인3이 주사할 준비를 하는데, 창문에서 지켜보던 의뢰인1이 들어와서 부서진 호른을 들어본다.)
의뢰인1:아까 몇 밀리그램이라 했지? (쳐다보는 의뢰인3) 3밀리그램만 투여해.
의뢰인3:3밀리요? 네….
(주사기 용량을 조절해서 남자의 팔에 주사 놓고 나가는 의뢰인3)
의뢰인1:길영호씨. 지금 혼자서 호숫가를 거닐고 있소? (입으로 모차르트 호른협주곡 3번을 불며 빠져든다.) 빠밤 빠바바밤 바밤바 빠바밤- 빠밤 빠바바밤 바밤바 빠바밤-
(이층 401호로 힘없이 들어서는 여자. 부적 뭉치를 탁자에 놓다가 세어본다.)
여자:하나, 둘, 셋, 넷…. 분명 다섯장을 붙였는데. 한 장이 살아있어!
(암전)
(무대 밝아지면, 병실 분위기가 나는 아래층 301호. 환자복이 입혀진 남자가 침대 벨트에 묶여있고, 의뢰인2를 따라 여자와 딸이 들어선다.)
의뢰인2:휴, 제가 미친 거 같네요. 주치의가 회진오시기 전에 끝내셔야 합니다.
여자:고맙습니다. 순이야, 어서.
딸:아빠! 제가 왔어요. 어째 잠만 자는 거야. 흑흑흑…. 아빠 일어나세요. 눈떠- 아빠-
여자:여보! 순이가 돌아왔어요. 이제 일어나세요. 다 잘되었어요. 저도 직장 잡아 돈벌이해요. 지난 일은 잊고, 정신 좀 차리세요.
(여자와 딸이 벨트를 풀고, 사력을 다해 남자를 일으켜 세운다.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하고 무너져 태아처럼 웅크리는 남자)
딸:흑흑흑…. 엄만 대체 무얼 한 거야! 아빠가 저리 되도록.
여자:엄만 안 해본 거 없다. 귀신 쫓는다는 복숭아도 들이고, 부적도 붙여보고, 약손으로 아픈 데 쓸어주시던 할머니 소리도 해보고…. 너는 뭘 하고 있었어. 이년아, 니 아빠 이리된 것 다 너 때문이다. 나가버릴 거면 그냥 나가지 메시지는 왜 남겨!
딸:난 그냥…. 아빠가 기다릴 것 같아서….
여자:그걸 아는 년이 세 달이나 안 들어와! 니 메시지 못 들었다고, 또 올지도 모르니까 지켜봐야 한다고, 휴대전화에서 눈도 못 떼고 일주일을 뜬눈으로 지새우셨다. 그러다 결국 쓰러지신 겨. 산송장 되신 겨. 집으로 가요, 여보.
(남자의 환자복 윗도리를 벗기고 몸을 쓸어주며 사복으로 갈아입히는 여자와 딸.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소리를 하게 된다.)
여자:“우리 아기 예쁜 배, 할미 손은 약손, 쓱쓱 만져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할머니:“우리 아기 동그란 배, 할미 손은 약손. 궁글궁글 쓸어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소리를 받아 부르는 할머니의 환영. 문으로 들어와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
할머니:어여 일어나거라. 영호야. 된장찌개에 밥 말아먹고 어여 핵교 가야지. 온나 온나. 어여…(미소 짓는 남자) 우리 외동이, 온나 온나.
딸:엄마! 아빠가 웃어.
여자:어디? 정말! 여보, 어디 좋은 곳 유람이라두 하는 게유?
할머니:아유, 찌린내. 요 녀석 바짝 섰네. 쯧쯧쯧. 이부자리는 한강이구. 늦게까지 숙제하더니 곤했던 게여. 그려 됐다. 옷 갈아입자. 아부지 모르시게 저리 치워놨다. 인나렴.
(여자와 딸이 남자의 아랫도리도 사복으로 갈아입힌다. 할머니는 싱크대로 가서 도마를 꺼내 칼자루 끝동으로 마늘을 다진다.)
소리:(마늘 다지는) “쫑 쫑 쫑 쫑-”
여자:여보,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눈을 떠요.
딸:아빠. 눈 떠. 제가 잘못했어요. 흑흑흑. 아빠. 제발!
남자:불…. 불이여….
딸:뭔 불이 나?
남자:집에 불났다. 어쪄 어무이.
할머니:간밤에 어매가 호롱불 꺼놨다. 걱정 말그라, 불 안 났으니. 밥 다됐다.
소리:(찌개 끓는) “보글 보글 보글 보글….”
(마침내 힘없이 눈 뜨는 남자)
할머니:됐다. 눈 떴다!
딸:아빠!
여자:여보!
할머니:어매는 좀 쉴란다.
(이젠 할머니가 기력이 다한 듯 눕는다. 중얼거리며 그 옆으로 다시 무너지는 남자)
남자:왜 이리 자꾸 졸리지. 어무이 괜찮으셔유? 주무시는가베. 순이야, 엄마는 일 나갔니? 밥은 먹었니? 그래 아빠 잠깐 눈 좀 붙였다 일어날 테니 뭔 일 있으면 깨우렴. 아주 잠깐이다…. 아빠가 일어나서 떡볶이 해줄게. 설탕도 넣고 달달하게….
(모로 쓰러진 남자 어느새 코를 곤다. 할머니가 부스스 일어나 아들과 손녀를 보더니 천천히 문으로 걸어 나가며 아들을 부른다.)
할머니:애비야…. 영호야! 영호야….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남자)
남자:어무이!
딸:아빠. 꿈에 할머니 봤어?
남자:순이야. 혹시 할머니가 뭐라 하셨니?
딸:언제요?
남자:돌아가시기 전에.
딸:(할머니 목소리로) “애비야…. 영호야! 영호야….”
남자:그래… 맞았어. 어무이가 날 부르는 소리였어.(딸을 안으며) 순이야. 할머니가 아빠를 불러주셨구나. 아빠는 할머니가 한마디도 안 하고 그냥 가신 줄 알았다. 여보, 어무이가 나를 불러 주셨대. 날 용서하신 거여.
여자:여보, 흑흑흑….
딸:내가 아빠를 얼마나 깨웠는 줄 알어?
남자:기특한 것. 아빠가 잘못했다. 어무이, 지가 죽일 놈입니다.
여자:아니에요. 지가 죽일 년이에요.
남자:어무이 손은 약손이여. 암…. 그렇구 말구.
딸:할머니 손이 약손?
남자:니 여섯 살 때, 맹장염을 앓았단다. 할머니가 밤새 순이 배를 문질러 주셨대. 할머니 약손으로. 니가 잠이 들어서 새벽이 됐는데, 아빠가 나이트 일 마치고 와보니 이미 혼수상태인 거라. 그래 아빠가 들쳐 업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은 거여.
딸:애게, 약손이면 맹장도 고쳐야지.
남자:아픈 걸 잊게 해주셨잖니. 그러니 약손이지. 이렇게 배를 쓸어주시면서….
(약손 소리를 함께 부르는 가족. 할머니가 밖에서 창문을 열고 함께 부른다.)
가족:“우리 아기 예쁜 배, 엄마 손은 약손, 쓱쓱 만져 주면 뭐든지 다 낫는다.”
할머니:“우리 아기 동그란 배”
가족:“엄마 손은 약손”
할머니:“궁글 궁글 쓸어 주면…”
(노래하다가 침울하게 그치는 할머니)
할머니:인자 이 손 약발도 다 떨어졌는가부다. 이 손으로 아범 뺐어가려던 저승사자들 다 쫓아 버렸는데 이젠 안 되는가부다. 내 다시는 약손 안 할란다.
남자:어무이, 이참에 그 달랑무 소리도 그만 두세요. 동네 애들이 벌써 순이를 놀린대요.
할머니:내 그리하마…. 달랑무 소리두 안 할란다.
(창문을 닫는 할머니. 의뢰인1이 방으로 들어선다. 긴장하는 의뢰인2)
의뢰인2:선생님,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어제 2단계 프로그램의 효과인 것 같습니다. 옷은 환자가 갈아입고 싶다고 해서….
의뢰인1:음…. 잘했구만. 길영호씨. 이제 환청이 들리지 않습니까?
남자:네, 사라졌습니다. 의뢰인님.
의뢰인1:허허허…. 잊으세요. 불필요한 소리들을. 불필요한 기억들을.
(의뢰인3이 호른 케이스를 하나 들고 들어온다.)
의뢰인3:지금 도착했습니다.
의뢰인1:(케이스를 남자에게 주며) 퇴원하게 되면 이게 필요하실 겁니다.
여자:호른이잖아요?
의뢰인1:제가 30년간 가지고 있던 겁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죠. 한적한 호숫가를 찾게 되거든 연락 한번 주세요.(나가며) 한번 들으러 가고 싶군요.
의뢰인2:선생님!
의뢰인1:자네가 “알 수 없습니다.” 하는 순간, 나도 알 수 없어 졌다네. 의사는 신이 아니지 않은가.
남자:선생님. 신은 이 수많은 세상의 소리를 어찌 다 들을까요.
의뢰인1:허허허- 다 듣다간 신도 입원해야지요.
(마주보고 씩 웃는 그들. 의뢰인들 나간다.)
남자:어머니더러 달랑무 못 파시게 한 그것이 내내 걸리는 거여. 바깥출입도 안 하시구 말수도 적어지더니 그냥 가신 거여.
여자:제 잘못이에요. 동네 푼수들 말만 듣고….
남자:어무이는 소리 힘으로 사신 겨. 그게 어무이 약손이여.
(문이 열린 채다. 그 문으로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어머니가 다시 들어와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뭔가 바람에 날려 쿵- 엎어지는 소리)
할머니:영호니? 영호야- 야가 삼일씩이나 어딜 간 거여. 저게 누구여. 영호지. 어여 어여 온나. 세상에! 야가 못 먹어서 눈이 십리는 들어갔네. 집 놔두구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겨. 들어가 밥 묵자. 엄매가 된장국 끓여놨다.(흰 고무신을 주며) 봐라. 흰 고무신 사놨다. 따습지? 어여 신어봐.
(흰 고무신을 받아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가, 가슴에 끌어안고 웅크리는 남자)
소리:(소년) 흰 고무신 때 타면 어쩐대유.
소리:(할머니) 영호야 자니? 엄매는 그깟 금가락지 없어도 된다. 영호만 있으면 된다.
소리:(소년) 어무이. 흰 고무신… 내 눈 내리면 신을란다.
소리:(눈 밟는) “뽀작 뽀작 뽀작 뽀작”
할머니:멋지다. 헌헌장부 났다.
남자:남학생들이 줄줄 따르것다잉. 손이 얼은 것 좀 봐. 요리로 들어와. 어여.
(어느새 인라인 스케이트 신고 헬멧 쓰고 서있는 딸. 아빠 엄마 있는 침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문가에서 고개 끄덕이던 할머니, 달랑무 팔러 가신다.)
할머니:달랑무∼ 있어. 푸성귀나∼ 달랑무∼ 있어.
무대 서서히 어두워지며 암전.
■ 희곡 당선소감
게으른 며느리에게 시켜야 할 일은 두부 만드는 일이랍니다. 느긋하게 일해야 맛있는 두부가 만들어진다죠. 군대 지휘관도 게으른 사람이 좋답니다. 게으른 천재여야지 괜히 아랫사람 생고생 시키지 않는다는 건데….
요건 사실 게으른 아랫사람들의 소망이죠. 부지런한 천재 즉 이순신 같은 양반 만났다간 그저 죽었구나 하고 뛰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는 없지요. 안 뛰면 바로 곤장 맞지요. 난중일기 쬐금 보니까, 임진왜란 발발 전에 이 어른 매일 하는 일이 순찰 나가서 하급지휘관 곤장 치는 게 주업무이시더군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다 하셨으니 백전백승의 신화를 창조하셨던 게죠.
선친께서 제 원래 이름자에 늦을 만(晩)자 하나를 넣어주신 덕택에 이렇게 느즈막히 입문하게 되었나 봅니다.
작은 상 하나를 펴놓으시고 늘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셨던 아버님께서는 교단 은퇴 후에 스스로 책 몇 권을 출간하셨죠. 그러곤 집안잔치가 있으면 친구 분들께 그 책을 선물하던 낙으로 사셨습니다.
평생 글을 쓰시던 열정은 정말 프로작가 못지않으셨지요. 이제부턴 저도 작심하고 자세 가다듬어 열심히 쓰겠습니다. 작은 상 앞이 아니라 PC 앞이 되겠네요. 축하해주는 벗님들, 사랑하는 영두와 영소, 그리고 가족들. 더불어 삶의 위안과 기쁨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아울러 미흡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약력
1959년 충북 제천 출생
중앙대 교육대학원 무용 석사과정
■ 심사평
세상이 어수선한 탓인지 응모작들 중에서도 투신자살, 노숙자, 입시부정, 로또복권 등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담은 작품들이 유난히 많았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그리고 각종 드라마 매체에 많이 노출된 탓인지 대화체의 이야기 구사에는 능숙해졌으나 막상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작품은 드물었다.
최종적으로 심사자들의 손에 남은 희곡들은 박만호의 ‘청진기’, 김성제의 ‘바다로 가는 성북행’, 그리고 류세균의 ‘달 속의 그늘’이었다. 공사판의 살인사건을 그린 ‘달 속의 그늘’은 밑바닥 인생들의 성격설정이나 대사구사에 능숙했으나 극 구성이 너무 평이하고 결말 부분을 배영감의 감상적인 인생고백으로 가져간 점이 지적되었다. 지하철 승강장을 배경으로 해서 사회적으로, 성적으로 상처받고 억압된 두 모자의 아픈 일상을 포착해낸 ‘바다로 가는 성북행’은 살아있는 독특한 정서가 심사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식당 파출부인 엄마와, 성전환 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돈벌러 가는 여성적 아들의 아픔을 과장되지 않은 일상적 대사 속에 담아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극적 상황과 행동을 충분히 연극적으로 객관화시키지 못했고 극이 아직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 안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있다.
현대생활을 지배하는 각종 소음과 어린 날에 듣던 정겨운 소리들을 대비시킨 ‘청진기’는 ‘소리’를 극적으로 전경화시킨다는 아이디어나, 신경증환자인 남편을 아내가 의료진과 공모해서 연극적으로 치유한다는 설정 등이 충분히 연극적이며 대사나 극 전개 기법도 상당히 감각적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비인간성/어린 시절의 순수함’이라는 대비가 도식적이며, 극전개의 생략과 비약이 과도한 점에서 어느 기성작가를 연상시킨다는 점이 다소 걸렸다.
결국 각각 장단점을 갖춘 ‘청진기’와 ‘바다‘를 두고 고심을 거듭하다가 그 나름의 완성도와 무대적 상상력을 높이 사 ‘청진기’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김철리(연출가)·김방옥(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