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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황새 이불감’ 짜던 선경, 석유까지 꿈꾸다…‘SK 성장사’ 첫 장 쓴 최종건 [창업주의 비밀노트]

    ‘봉황새 이불감’ 짜던 선경, 석유까지 꿈꾸다…‘SK 성장사’ 첫 장 쓴 최종건 [창업주의 비밀노트]

    1953년 봄, 최종건(1926~1973) SK그룹 창업회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기 수원시 평동의 선경직물 공장에 섰습니다. 건물은 폭격으로 무너졌고 직기는 뒤틀린 채 잿더미에 묻혀 있었습니다. 폐허 속에서 할 일은 분명했습니다. 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잇는 일이었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잿더미 속에서 쓸 만한 벽돌과 못, 직기 부속품부터 골라냈습니다. 흩어진 부품을 맞춰 직기를 다시 조립하고, 옛 동료들과 인근 광교천에서 자갈과 모래를 날라 건물도 고쳤습니다. 그렇게 처음 되살린 직기가 4대였습니다. 복구 작업에 속도가 붙으면서 석 달 뒤인 그해 7월에는 직기 20대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 반도체, 바이오를 주요 사업으로 둔 오늘날 SK의 출발점은 이 작은 직물공장이었습니다. 선경은 이후 원사와 석유로 생산 영역을 넓히고 유공과 한국이동통신, 하이닉스를 차례로 인수하며 사업의 경계를 확장했습니다. 그 성장사의 첫머리에는 폐허 속 기계를 다시 돌린 최 창업회장이 있습니다. 열여덟 살 직공, 옛 일터를 인수하다 최 창업회장은 1926년 1월 30일 수원 평동에서 최학배·이동대 부부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1944년 일본계 기업 선경직물에 견습기사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나이 18세였습니다. 기계를 잘 다룬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 현장의 조장을 맡았습니다.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떠난 뒤에도 공장에 남았고, 전기가 끊겨 기계를 돌리지 못하는 날에는 직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선경직물은 첫 직장이자 기계와 생산 현장을 몸으로 익힌 곳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은 그 일터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별도로 하던 직물 장사를 접고 옛 공장을 되살리기로 했습니다. 공장이 다시 돌아가면 자신뿐 아니라 일자리를 잃은 수원의 젊은이들도 일터를 얻을 수 있다고 봤습니다. 부친이 종잣돈을 보탰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동생 최종현 선대회장은 자신의 유학비를 형의 사업에 먼저 쓰자며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1953년 4월 8일 당시 국가가 관리하던 공장 부지 일부를 사들였습니다. SK가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삼는 이유입니다. 공장 매수 절차는 9월 30일 마무리됐고 이튿날 선경직물 창립을 공식 선포했습니다. 일본 업체인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선경’에는 ‘빛날 선(鮮)’과 ‘클 경(京)’, 크게 빛나는 기업이 되겠다는 뜻을 새로 붙였습니다. ‘닭표 안감’에서 ‘봉황새 이불감’까지공장을 계속 돌리려면 기계를 늘리는 것만큼 소비자가 찾을 만한 제품을 만드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사장실보다 생산 현장에 오래 머물며 공사와 설비 설치, 제품 생산을 직접 챙겼습니다. 훗날 그는 당시를 두고 “공글이(공구리·콘크리트 작업)도 내가 했고, 기계도 내가 놓고, 거기서 잠도 잤다”고 회고했습니다. 선경직물은 1954년 직기 80대를 사들였고 이듬해 제2·3공장을 세웠습니다. 1958년에는 보유 직기가 1000대로 늘었습니다. 생산 규모가 커지자 경쟁력의 초점도 단순한 물량에서 품질과 상품성으로 옮겨갔습니다. 대표 제품은 ‘닭표 안감’이었습니다. 당시 일부 업체들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생략하던 열처리 공정을 제대로 거친 덕분에 세탁해도 잘 줄지 않았고, 별도의 손질 없이 바로 재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품질이 입소문을 타면서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상공부 장관상까지 받았습니다. 1958년에는 넓은 원단 양쪽에 색동을 붙이고 봉황 무늬를 넣은 ‘봉황새 이불감’을 내놨습니다. 혼수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선경의 이름도 빠르게 알려졌습니다. 이듬해 직물업계가 어려움에 빠지자 기존 제품의 가격 경쟁에 매달리기보다 폴리에스터 등 새로운 소재와 제품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나일론 직물과 당시 유행하던 주름 가공 직물, 앙고라 소재, 조제트 직물 등을 잇달아 선보이며 국내 주요 직물업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산 이름 대신 새긴 ‘메이드 인 코리아’ 국내 시장에서 기반을 다진 뒤에는 판로를 해외로 넓혔습니다. 제품을 더 만들어도 내수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1961년 9월 선경직물을 방문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공장을 둘러본 뒤 “수출을 해보시오”라고 주문했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해외에서 알게 된 인사들에게 견본을 보내며 홍콩 직물상과 거래를 추진했습니다. 일본산 표시를 붙이면 현지에서 더 쉽게 팔 수 있다는 제안도 받았지만, 한국산 제품을 일본산으로 속여 첫 거래를 시작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선경직물은 결국 1962년 4월 ‘메이드 인 코리아’를 새긴 인견직물 10만 마를 홍콩에 수출했습니다. SK는 이를 국산 인견직물의 첫 수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출이 일회성 거래에 그치지 않도록 넉 달 뒤에는 무역을 전담할 선경산업도 세웠습니다. 내수 판매 뒤 남은 물량을 해외에 처분하는 수준을 넘어 제품 기획 단계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하는 수출기업으로 방향을 튼 것입니다. 성과는 곧 뒤따랐습니다. 선경직물은 1963년 수출과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 후 처음 수여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당시 “우리 제품이 외국에 나가 한국의 이름을 빛내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는 취지로 소감을 밝히며, 수출을 통해 선경직물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직물에서 원사·석유로…넓어진 사업판 수출이 늘자 원사 부족이 선경의 성장을 가로막는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주문이 들어와도 원사를 제때 구하지 못하면 직기를 세워야 했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남이 만든 실을 사서 천만 짜는 방식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원사부터 직접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1966년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세운 뒤 완제품 생산업체인 해외통상을 인수하고 선경화섬을 설립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최종현 선대회장은 공장 건설 실무를 맡았습니다.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은 1968년 12월,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은 이듬해 2월 완공됐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일본 데이진과 합작해 선경합섬을 세웠습니다. 선경은 이로써 원사를 외부에서 사들이던 직물업체에서 원사와 직물을 함께 생산하는 종합섬유기업으로 성장했고, 최 창업회장은 1970년 선경그룹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원사 생산에 들어가자 사업의 범위는 다시 넓어졌습니다. 폴리에스터 같은 화학섬유를 만들려면 석유화학 원료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원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던 수직계열화 구상이 원료와 에너지 사업으로 이어진 배경입니다. 최 창업회장은 1973년 일본 이토추·데이진과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울산에는 폴리에스터 원면공장을 착공했습니다. 선경석유도 세워 석유사업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같은 해 워커힐호텔을 인수하며 서비스업으로도 사업 영역을 넓혔습니다. 직물회사로 출발한 선경이 섬유 생산의 앞단까지 사업을 넓히는 동시에 기업집단으로 외연을 확장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사업 현장사업 확장이 본격화되던 1973년 3월, 최 창업회장은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석유사업을 직접 챙기기 위해 귀국했지만 병세는 빠르게 악화됐습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업 현장을 놓지 않았습니다. 수원 정자동 원사공장과 평동 직물공장을 둘러본 뒤에는 토목공사가 80%가량 진행된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건설 현장까지 찾았습니다. 병문안을 온 회사 관계자와 지인들에게는 “종현이를 잘 보살피고 도와 달라”고 거듭 부탁했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그해 11월 15일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끝내 완공을 보지 못한 울산 공장은 이듬해 7월 문을 열었습니다. 최 선대회장은 형이 시작한 사업을 이어 1980년 대한석유공사, 유공을 인수했고 1991년에는 석유에서 화학섬유까지 이어지는 생산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선경은 이후 1994년 한국이동통신, 2012년 하이닉스를 인수하며 정보통신과 반도체로 다시 사업의 경계를 넓혔습니다. 올해는 최 창업회장 탄생 100주년입니다. SK는 지난 4월 창립 73주년을 맞아 최 창업회장과 최 선대회장의 생전 어록과 경영 일화를 재현한 영상을 만들어 구성원들과 공유했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앞서 2023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두 선대 경영자의 삶과 철학이 “단지 기업의 발전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향해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최 창업회장은 생전 “기업의 목표는 더불어 사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스물일곱 살에 선경직물을 인수해 마흔여덟 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가 지켜온 경영의 기준이자, 오늘날 SK가 되새기는 창업 정신입니다.
  • AI로 되살아난 최종건·최종현 회장… SK ‘창업정신’ 강조

    AI로 되살아난 최종건·최종현 회장… SK ‘창업정신’ 강조

    SK그룹이 창립 73주년을 맞아 창업세대의 경영 철학을 인공지능(AI)으로 재현한 영상을 공개했다.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패기’와 ‘도전’이라는 창업 정신을 재확인하고 지속 성장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SK그룹은 고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의 어록과 경영 일화를 기반으로 영상을 제작했다고 14일 밝혔다. 6·25 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을 1953년 재건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나일론 사업 진출과 워커힐호텔 인수, 석유·통신 사업 확장 등 그룹 성장의 주요 전환점을 담았다. 최종건 회장은 영상에서 “할 수 있고, 해야 되고,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강조하며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포착한 창업 초기의 결단을 보여 준다. 뒤이어 경영을 맡은 최종현 회장은 “기업가라면 늘 10년을 내다봐야 한다”며 장기적 시각과 과감한 투자 필요성을 강조한다. SK그룹은 1994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결정하며 현재 정보통신기술(ICT) 사업의 기반을 구축했다. 영상 제작에는 사사(社史), 저서, ‘선경실록’ 등 약 3000여 건의 음성·문헌 자료가 활용됐다. AI가 이를 학습해 스토리 구성부터 영상 생성까지 전 과정을 수행했다. SK그룹이 AI로 창업세대를 전면 재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최태원 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SK그룹은 해당 영상을 서울 종로구 서린빌딩의 미디어월과 사내 방송을 통해 상영하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창업세대의 유산인 패기와 지성이라는 초심과 메시지가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 나침반이자 지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 SK, 개관 30주년 선경도서관에 25억 기부

    SK, 개관 30주년 선경도서관에 25억 기부

    SK그룹이 개관 30주년을 맞은 경기 수원시 선경도서관에 25억원을 기부한다고 28일 밝혔다. 고 최종건 창업회장의 애향 정신을 이어 선경도서관을 수원의 지식과 문화 터전으로 자리잡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선경도서관은 고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이 형인 최 창업회장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1995년 설립했다. 최 전 회장은 최 창업회장의 출생지이자 SK의 모태인 선경직물(SK네트웍스)의 출발점이기도 한 수원에 선경도서관 터를 잡았다. 수원은 당시 인구 75만명의 대도시였음에도 관내 도서관이 2곳뿐이었다. 이 때문에 수원 시민들은 책을 빌리기 위해 다른 도시로 나가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최 전 회장은 수원 팔달산 자락의 부지 매입부터 250억원의 건물 건립 후 기부채납까지 선경도서관 설립의 전 과정을 직접 지원했다. 최 전 회장은 1988년 서울대 경영관에 60억원, 1991년 충남대에 60억원 상당의 임야 304만평, 1992년 한양대 공과대학에 60억원을 기증하는 등 배움에 뜻을 가진 인재에 나눔을 실천해 왔다. 선경도서관은 SK의 이번 출연을 계기로 낡은 시설을 개보수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마련해 복합 문화공간으로 변화할 예정이다. 
  • 첨단과학 수도로, 수원의 도전…‘K실리콘밸리’ 큰~ 꿈이 현실로

    첨단과학 수도로, 수원의 도전…‘K실리콘밸리’ 큰~ 꿈이 현실로

    2000년 이전까지 수원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기업 도시였다. 선경직물(1953년), 삼성전자(1969년) 등 유수의 기업이 잇따라 수원에 자리잡았고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1990년대 중반 수원에는 14개 대기업이 있었다. 질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인구는 그만큼 가파르게 늘었다. 1970년 17만명이었던 수원시 인구는 32년 만인 2002년 100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기업이 하나둘씩 수원을 떠났다. 경영 악화와 수도권 규제로 인해 기업들은 지방과 해외로 앞다퉈 옮겨 갔다. 대기업들이 떠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소비가 감소하면서 수원 경제도 조금씩 활력을 잃어 갔다. 수원시 재정 자립도는 1996년 93%에 이르렀지만 올해에는 43%에 그쳐 30년 만에 50% 이상 뚝 떨어졌다. ●민선 8기 16개 첨단 기업과 투자·유치 2022년 7월 민선 8기 수원시 선장에 오른 이재준 수원시장은 경제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섰다. 취임과 함께 그는 “기업을 유치해 수원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수원을 경제특례시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첫날 에스디바이오센서㈜와 투자 협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의 현대약품㈜까지 3년 동안 바이오, 인공지능(AI), 반도체, 응용·게임 소프트웨어 등 첨단 분야 16개 기업과 투자·유치 협약을 체결했다. 올해에만 6개 기업과 투자 협약을 체결하며 투자 유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민선 8기 이 시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수원을 ‘첨단과학연구도시’로 만드는 것이다. AI·반도체·바이오 등 첨단과학 분야 연구단지를 고리 형태로 조성하는 ‘환상형 첨단과학 혁신클러스터’가 첨단과학연구도시의 발판이 된다. 기존 산업 거점인 광교테크노밸리, 델타플렉스와 새롭게 조성할 수원 연구개발(R&D) 사이언스파크, 탑동 이노베이션밸리, 북수원테크노밸리, 우만테크노밸리, 매탄·원천공업지역 혁신 지구 리노베이션 등으로 첨단과학 혁신클러스터를 만든다. 이 시장은 취임 후 첨단과학연구도시 조성에 집중했다. 수원 R&D 사이언스파크는 첫 추진 계획을 수립한 지 12년 만인 지난 4월 조성 사업 부지의 개발제한구역 규제가 해제되면서 첫발을 내디뎠다. 내년 하반기 착공할 계획이다. 입북동 일원 35만 2600㎡ 부지에 최첨단 R&D 사이언스파크를 조성한다. 탑동 이노베이션밸리 개발 사업은 탑동 일원 26만㎡ 규모 부지에 R&D, 첨단기업 중심의 복합업무단지를 조성하는 것이다. 첨단업무용지 3가구(10만 5000㎡)와 복합업무용지 8가구(6만 4000㎡)로 구성되는데 현재 첨단업무용지 입주 시설을 공모 중이다. ●첨단과학 혁신클러스터 조성 박차 수원시는 수원 R&D 사이언스파크와 탑동 이노베이션밸리를 중심으로 ‘수원경제자유구역’을 조성할 계획이다. 지난 4월 경기경제자유구역 추가 지정 후보지 공모에 선정돼 수원경제자유구역 지정을 향한 첫 관문을 통과했다. 첨단과학연구도시의 중심축이 될 수원경제자유구역을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만드는 게 목표다. 수원시는 앞으로 1년 동안 경기도와 함께 개발 계획을 수립해 내년 6월 산업통상자원부에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신청한다. 심사를 통과하면 내년 11월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다. 경기도 평가에서 후보지 3곳 중 수원시만 조건 없는 ‘적정’ 평가를 받았다. 수원경제자유구역의 비전은 ‘글로벌 첨단 R&D 허브’이다. 첨단과학 연구 기업을 유치해 제조업 중심의 기존 경제자유구역과 차별화할 계획이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기술 혁명의 중심지이자 애플, 구글, 테슬라와 같은 세계적인 첨단기술 기업의 본거지다. 창업과 혁신의 상징으로 불린다. 수원시는 수원경제자유구역을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만들 예정이다. 한국형 실리콘밸리는 아이디어와 기술을 바탕으로 창업하고 국내외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미래형 첨단도시다. 인재가 풍부하고 첨단산업 인프라를 갖춘 수원은 한국형 실리콘밸리가 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수원경제자유구역의 핵심 전략산업은 AI·반도체·바이오다. ●사통팔달에 인재까지 최적의 조건 수원은 경제자유구역으로 성공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경제자유구역 후보지인 서수원 일원은 접근성이 무척 좋다. 김포공항과 인천공항까지 1시간 안에 갈 수 있고 평택항 등 수도권 남부 항만과도 가까워 물류 경쟁력이 뛰어나다. 수도권 전철 1호선, 수인분당선, 사업을 추진 중인 수원발 KTX와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C 노선, 신분당선, 동탄인덕원선 등 광역 철도망도 잘 갖춰져 있다. 실리콘밸리의 핵심은 인재인데, 수원은 인재가 풍부하다. 지역 5개 대학에서 매년 3600여명의 이공계 인력을 배출한다. 반경 30㎞로 확장하면 30여개 대학이 있다. 삼성전자 본사, 델타플렉스, 한국나노기술원, 경기경제과학진흥원 등에서 일하는 연구 인력은 4만 3000여명에 이른다. 정주 환경도 우수하다. 주거·교통·문화·여가 등 모든 여건이 전국 최고 수준이다. 프로축구 수원FC·수원삼성블루윙즈, 프로야구 kt 위즈, 프로농구 KT소닉붐, 프로배구 한국전력 빅스톰, 여자프로배구 현대건설힐스테이트 등 수원 연고 6개 프로 스포츠팀의 경기를 1년 내내 즐길 수 있으며 계절마다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펼쳐진다. 이 시장은 3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실리콘밸리는 기술 혁명의 중심지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 혁신을 이끈다”며 “반드시 수원경제자유구역 지정을 실현해 제2의 애플, 구글이 탄생할 수 있는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수원시는 경제자유구역을 ‘완성형 경제복합도시’로 조성할 계획이다. 개발 가용지 중 공적 규제가 가장 적은 330만㎡(약 100만평)의 입지를 선별해 경제자유구역 후보지로 신청했다. 개발 계획을 단기간에 실현할 수 있는 지역이다. 수원시는 글로벌 첨단기업의 연구소, 벤처기업, 창업 지원을 위한 공간뿐 아니라 문화체육시설, 공원 녹지, 주거 공간도 계획했다. 주거·산업·문화·교육·의료 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완성형 복합도시를 조성할 방침이다. 반도체·AI·바이오 등 첨단기업 수요를 기반으로 99만㎡ 규모의 첨단과학연구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다. 그중 50%는 외국인 투자를 위한 전용 용지로 기획했다. 또 경제자유구역 내에 글로벌 특화지구를 조성해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국제 초중고교를 유치하고 외국인 친화형 정주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다. ●지속 가능한 환경과 첨단 기술 융합 수원경제자유구역은 지속 가능한 환경과 첨단기술이 융합된 미래 도시 모델을 지향한다. 황구지천 일원을 도심 속 수변공원으로 조성해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그린 인프라를 만들고 일월수목원, 경기상상캠퍼스, 서울대수목원과 연계해 실리콘밸리의 구글 캠퍼스처럼 자연과 첨단과학연구단지가 어우러지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이 시장은 “수원은 경제자유구역으로 성공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면서 “경제자유구역 후보지인 서수원 일원은 접근성이 무척 좋으며, 입주 의향 수요 조사를 했는데 100개가 넘는 첨단기업이 수원경제자유구역에 입주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인재가 풍부하고 정주 환경이 좋은 것도 수원의 강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시장은 “경제자유구역 개발 계획을 수립할 때 ‘도시정책 시민계획단 토론회’ 등으로 시민 의견을 듣고 반영하겠다”며 “항상 시민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시민과 함께 수원의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 M&A로 이룬 정유·통신·반도체 왕국… SK, 고강도 리빌딩 착수 [2024 재계 인맥 대탐구]

    M&A로 이룬 정유·통신·반도체 왕국… SK, 고강도 리빌딩 착수 [2024 재계 인맥 대탐구]

    1980년 유공 인수해 재계 5위로이동통신 진출하며 사세 크게 확장최근 정경유착 인정 판결에 격앙SK “특혜 아닌 역차별” 반격 예고잠재력 믿고 하이닉스 인수 주효문어발 계열사 수익 악화로 골치이혼소송 2심, 1조원대 재산분할그룹 지배력 유지 여부 관심사로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 1980년 11월 28일 동력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대한석유공사(유공)의 새 주인으로 선경그룹(현 SK그룹)을 낙점하자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연매출 1조원 규모의 유공 인수전에는 삼성, 현대 같은 재계 서열 1~2위 그룹들이 뛰어든 상황이었고 선경은 당시 재계 1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섬유 기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2024년의 SK는 유공을 모태로 하는 SK이노베이션과 한국이동통신에서 변신한 SK텔레콤, 글로벌 반도체 생산 체인의 핵심으로 성장한 SK하이닉스까지 잇단 인수합병(M&A)으로 국내 자산 기준 재계 2위로 자리매김했다. ●최종현 사우디 인맥으로 유공 인수 SK그룹의 시작은 양복 안감과 이불감 등을 만들어 팔던 직물공장이었다. 고 최종건 그룹 창업주는 1953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기 수원시 권선구 평동의 ‘선경직물주식회사’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공장 재건에 나섰다. 현재 그룹명 ‘SK’는 ‘선경’에서 따온 것으로,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선의 선만주단과 일본의 경도직물이 인조견 제조 공장을 합작 설립하면서 두 기업명의 앞 글자를 딴 ‘선경’(鮮京)이라는 기업명이 탄생했다. 최 창업회장이 직물 사업으로 SK그룹의 초석을 다졌다면 그의 세 살 터울 아우 고 최종현 선대회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수직 계열화’ 경영 개념을 도입해 그룹의 양적·질적 팽창을 주도했다. 최 선대회장은 일찌감치 산업 전선에 뛰어든 형과 달리 1952년 서울대 농화학과 재학 중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시카고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73년 11월 최 창업회장이 폐암으로 별세하자 경영권을 이어받은 그는 1975년 신년사에서 “선경을 국제적 기업으로 키우려면 석유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를 확립해야 한다”며 석유 사업을 일찌감치 미래 먹거리로 점찍었다. 기회는 1980년 찾아왔다. 당시 유공 지분 절반을 보유한 미국 걸프(Gulf)사가 앞선 두 차례 석유파동을 계기로 유공 지분 전량을 매각하고 국내에서 철수하기로 하면서다. 선경이 무난히 유공을 차지한 것을 두고 전두환 정권과의 유착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실상은 미국 유학 시절부터 탄탄히 다져 온 최 선대회장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인맥이 빛을 발했다는 게 중론이다. 최 선대회장은 시카고대에서 사우디 왕실 자녀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중동 인맥을 형성했고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 석유파동 당시 직접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가 석유파동을 일으킨 장본인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 사우디 석유장관을 설득해 원유 공급을 이끌어 냈다. 정부는 두 차례나 국가를 에너지 위기에서 구해 낸 최 선대회장과 선경그룹이 유공 인수의 적임자라고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선경그룹은 유공 인수로 단숨에 연매출 3조원 규모 기업으로 성장하며 재계 서열 5위로 뛰어올랐다.●특혜 논란에 포기·재도전… SKT 탄생 SK그룹 성장사에서 꼬리표로 붙은 정경 유착 의혹은 ‘세기의 결혼’에서 ‘세기의 이혼’으로 이어진 최태원(64) SK그룹 회장과 노소영(63)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재조명됐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지난 5월 30일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위자료 20억원과 재산분할로 1조 3808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노 관장의 부친인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비자금과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최 선대회장의 그룹 경영을 지원하고 방패막이가 돼 줬다고 봤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첫해인 1988년 9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최 회장은 1990년대 초 아직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와 제2이동통신 사업 논의가 나오기도 전에 청와대에서 장인인 노 전 대통령에게 직접 무선통신 사업에 관해 시연했다. 이후 정부는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당시 4대 그룹인 삼성·현대·대우·LG의 이동통신 사업 진출을 막았고 결과적으로 SK그룹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그룹의 사세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반면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사돈기업 특혜 논란’을 이유로 사업권 포기를 요구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남아 있다”며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역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통사업권을 한 차례 반납한 이후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며 어렵게 이통사업에 진출했다”고 반박했다. 최 회장은 2심 판결을 두고 “SK의 성장 역사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유감”이라고 불복하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LG반도체→현대전자→SK하이닉스 유공에 이어 한국이동통신까지 품은 선경그룹은 1998년 사명을 영문 첫 글자인 SK그룹으로 변경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이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2012년 하이닉스를 인수하면서 재계 서열 2위의 입지를 굳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이닉스 성공에는 최 회장의 결단이 주효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대기업 사업을 통폐합하는 고강도 ‘빅딜’을 진행했고 이때 LG반도체가 현대전자에 흡수 통합됐으나 채무 문제로 2001년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에 돌입하면서 한동안 주인 없는 기업으로 떠돌았다. 정부에선 팔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고 2009년 효성 그룹이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조카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이 당시 대통령(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위임이 문제가 돼 좌초됐다. SK그룹 내에서는 반도체 사업 진출에 부정적인 기류가 있었지만, 최 회장은 하이닉스가 가진 부채(7조 6000억원)보다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다며 2012년 2월 3조 4000억원을 들여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했다. SK하이닉스는 인수 첫해 2분기 흑자 전환을 시작으로 꾸준히 성장했고 그룹은 에너지·통신·반도체라는 든든한 핵심 사업군을 구축했다.●SK이노·E&S 합병 땐 초대형 기업 탄생 1998년 32조 8000억원 규모였던 그룹 자산 총액은 올해 334조 3600억원으로 10배로 커졌다. 2006년부터 삼성·현대차그룹·SK그룹 순으로 굳어졌던 자산총액 기준 재계 순위는 2022년 SK그룹이 16년 만에 현대차그룹을 밀어내며 2위로 올라섰고, 이런 구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지난해 깊었던 반도체 불황과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은 고속 성장을 거듭해 온 SK그룹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SK그룹은 올해 대기업집단 중 전년 대비 계열사가 가장 많이 증가한 반면 순이익은 가장 악화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SK그룹은 계열사 중복 투자는 줄이고 시장성이 떨어지는 사업은 정리하는 방식으로 투자금 회수에 나섰다. 우선 10개 분기 연속 적자의 늪에 빠진 배터리 계열사 SK온의 재무 개선을 위해 SK온의 모회사인 에너지 계열사 SK이노베이션과 지역 도시가스 사업을 주축으로 하는 SK E&S를 합병하기로 했다. 오는 27일 양사 임시주주총회에서 합병이 승인되면 연내 연매출 88조원, 총자산 106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에너지 기업이 탄생한다. 최 회장의 이혼 판결은 갈 길 바쁜 SK그룹에 최대 리스크로 떠올랐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남았지만 2심 판결이 확정될 경우 1조 3808억원에 달하는 재산 분할액과 위자료를 현금으로 조달해야 한다. 이에 최 회장이 회사 지분 매각, 주식 담보 대출, 배당 확대 등 방편을 강구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SK그룹은 지주사 SK㈜가 SK이노베이션(34.50%), SK텔레콤(30.01%), SK스퀘어(30.55%), SK E&S(90.00%), SKC(40.64%), SK에코플랜트(41.78%), SK네트웍스(41.20%) 등 주력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최 회장이 SK(㈜ 1대 주주(17.73%)로 그룹 전반을 지배하는 구조다. 최 회장은 SK㈜ 지분 외에 SK케미칼(6만 7971주·3.21%), SK디스커버리(2만 1816주·0.12%), SK텔레콤(303주·0.00%), SK스퀘어(196주·0.00%) 일부 지분도 보유하고 있다. 최 회장은 비상장사인 SK실트론 지분 29.4%도 쥐고 있는데, 업계에서는 실트론 지분 가치만 1조원 안팎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아야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회사 주가가 높을수록 이득인 만큼 비주력 계열사를 정리하는 등 그룹 사업 재편 작업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 LG·두산, 어린이날 앞둔 선행 경쟁…구광모·박정원 회장, 가족 돌봄 청년·소아암 환아 총 25억원 지원

    LG·두산, 어린이날 앞둔 선행 경쟁…구광모·박정원 회장, 가족 돌봄 청년·소아암 환아 총 25억원 지원

    구인회상점의 후손 LG그룹 구광모(46) 회장과 박승직상점의 후손 두산그룹 박정원(62) 회장이 어린이날을 앞둔 3일 가족 돌봄 청년(영케어러)과 소아암 환아 가족 지원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선경직물의 후손 SK그룹 회장인 최태원(64)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도 이날 신기업가정신협의회(ERT) 행사에 함께 참석해 재계 총수들의 선한 영향력 확산에 박수를 보냈다. 대한상의는 이날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종합사회복지관에서 간병돌봄 가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지원내용을 발표하는 ‘제4차 다 함께 나눔 프로젝트’ 행사를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최 회장과 구 회장, 박 회장,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 강철원 서울시 정무부시장, 조상미 중앙사회서비스 원장 등 민관 인사들이 함께 참석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행사가 열린 서대문종합사회복지관은 구 회장의 할아버지이자 LG그룹의 2대 회장인 고 구자경 회장이 32년 전인 1992년 건립해 서대문구에 기부한 장소이기도 했다. 고 구자경 회장은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사회복지관 건립 지원 사업을 진행해 전국에 14개의 복지관을 기부했다. 구 회장은 이날 행사에 앞서 복지관 역사 설명을 들으면서 “30여년 전 조부께서 기부하신 복지관에서 행사가 열려서 더욱 뜻깊게 느껴진다”며 “가족쉼터가 소아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이 건강히 자랄 수 있도록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구 회장은 최 회장과 박 회장과 함께 복지관 지하 1층 벽면에 걸린 고 구자경 회장의 개관식 사진을 손으로 직접 가리키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LG그룹과 두산그룹은 이날 대한상의 ERT 나눔 프로젝트의 하나로 간병돌봄 가족 지원에 약 25억원 규모의 후원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두산그룹은 전국의 가족 돌봄 청년을 대상으로 매년 10억원 규모의 지원을 계속 이어 나간다는 계획이다. LG그룹은 소아암 환아 가족을 위해 서울 소재 2곳의 가족 쉼터에 15억원 상당의 거주 공간 6개 실을 지원할 예정이다. 두산그룹의 가족 돌봄 청년 지원금은 질병을 앓고 있거나 장애가 있는 부모, 조부모, 한 부모 등 성인 가족을 돌보면서 학업을 이어가야 하는 가족 돌봄 청년들에 전달될 예정이다. 중증질환, 장애가 있는 가족의 돌봄과 생계를 책임지는 13~34세 아동·청년인 가족 돌봄 청년에게 가족 간병과 의료비, 학습 환경 조성과 주거 공간 개보수, 냉난방 시설 등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계획이다. 두산그룹의 지원에는 경제적 도움뿐 아니라 사춘기를 경험하는 가족 돌봄 청년의 마음 건강을 보듬어주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사회복지사로 구성된 ‘영케어러 코디네이터’가 가족 돌봄 청년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학교와 가정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상담하고 점검하는 방식이다. 두산그룹은 앞서 2022년부터 지원을 시작한 창원에 이어 서울, 분당, 인천, 평택, 익산 등 사업장 지역의 가족 돌봄 청년을 찾아 지원을 확대하고 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기적으로 도울 계획이다.박 회장은 이날 행사에서 두산그룹의 지원내용과 관련한 영상을 시청하고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관계자와 경상남도에서 온 사회복지사가 직접 체험한 가족 돌봄 청년 사례 소개를 직접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박 회장은 행사에 참석한 후 그룹 관계자를 통해 “좋은 행사에 동참하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에 관한 관심과 지원이 확대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구 회장도 이날 LG그룹이 지원하는 소아암 가족쉼터 관련 영상을 시청한 후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이사인 김학기 가톨릭대 의과대학 명예교수와 소아암 완치 청년 사례들을 직접 들으면서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세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여간 진행된 행사는 소아암 환자 가족들의 어려움을 전하는 이야기를 모두 숙연하게 듣는 분위기로 진행됐다. 재계인사를 포함한 사회지도층의 선한 영향력 확산에 이바지하는 신기업가정신은 기업이 쌓아온 다양한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더 나아가 사회 발전을 이끈다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의 한국 사회 버전이라는 평가다. 대한상의는 2022년 신기업가정신 실천 의지를 담은 기업선언문을 선포하고 신기업가정신협의회(ERT)를 발족했으며 현재 약 1500개의 기업이 참여 중이다.
  • 故최종현-최태원으로 이어지는 SK그룹 50년 ESG…“기업 이익은 사회의 것”

    故최종현-최태원으로 이어지는 SK그룹 50년 ESG…“기업 이익은 사회의 것”

    고 최종현 SK 선대회장 서거 24주기26일 고 최종현 SK 선대회장 서거 24주기를 맞이해 SK가(家)에 뿌리내린 50년 역사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주목받고 있다. 최 선대회장은 “기업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으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ESG 경영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아들 최태원 현 SK그룹 회장 역시 선대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ESG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고 최종현 선대회장, 친환경·인재양성 박차 1962년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SK에 합류한 최 선대회장은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하고 세계 최초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을 상용화하면서 SK그룹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최 선대회장은 무분별한 벌목으로 전국에 민둥산이 늘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2년 서해개발 주식회사(현 SK임업)를 설립한 뒤 천안 광덕산, 충주 인등산, 영동 시항산 등을 사들여 국내 최초로 기업형 조림사업을 시작한 공이 있다. 선대회장이 조성한 숲은 서울 남산의 40배 크기에 달한다.아울러 인재 양성을 위해 사재를 출연해 1974년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하고, ‘세계 수준의 학자 양성’이라는 목표 아래 매년 유학생을 선발해 해외로 보냈다. 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급하면서도 학위 취득 시 SK 근무와 같은 부가조건은 일체 달지 않았다. 고등교육재단은 현재까지 장학생 4000여명과 박사 820여명을 배출했다. 1973년 광고주를 찾지 못해 폐지 위기에 놓였던 장학퀴즈를 “청소년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단 한 명이 보더라도 조건 없이 지원하겠다”며 단독 광고주로 나서기로 결정한 것도 최 선대회장이다.최태원 회장, SK그룹을 ‘친환경’으로 탈바꿈 아들 최 회장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ESG 경영을 그룹 핵심 성장동력으로 삼고, 경영체질의 전반적인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관계사 각각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과 환경 스토리를 만들어야 하고 남들보다 빨리 움직여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최 회장의 주문에 따라 SK는 2050년까지 사용전력의 100%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조달하는 RE100에 국내 기업 최초로 가입했다. 또한 2050년 이전까지 넷제로를 조기에 달성하겠다고 결의한 뒤 2030년 기준 전세계 탄소 감축 목표량(210억톤)의 1%를 SK가 줄이겠다고 공표했다.최근 SK그룹의 비즈니스 모델도 친환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SK는 2020년 말 수소사업추진단을 조직한 뒤 그룹 내 에너지 인프라를 활용해 수소 생산과 유통, 공급에 이르는 밸류 체인을 구축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 등 전통적 에너지 기업도 전기차배터리와 친환경·신재생 에너지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다. SKC도 2차 전지 소재인 동박을 제조하는 그린 기업으로 전환하고 있고, SK건설은 23년 만에 사명을 ‘건설’에서 ‘에코플랜트’로 바꿔 친환경 기업으로 거듭났다. 최 회장은 국내 기업 최초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이 인정한 탄소배출권을 확보하는 한편 파푸아뉴기니, 스리랑카 등 해외에서도 탄소배출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선대회장 ‘SKMS’ 경영 정립…최 회장도 이사회 중심 경영 최 선대회장은 ESG 가운데 ‘지배구조’ 측면에서도 ‘SK경영관리시스템’(SKMS)으로 정의되는 새로운 뿌리를 내렸다. 1979년 정립된 SKMS는 당시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경영관리 요소와 일처리 방식 등을 분명하게 만들어 기업 경쟁력을 강화했다. 선대회장이 정립한 SKMS는 경영환경과 사회적 요구에 맞춰 2020년 2월까지 14차례 개정을 거쳤다.지배구조 투명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최 회장도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제적으로 도입하며 ESG에 시동을 걸었다. 최 회장은 SK 이사회가 최고경영자(CEO)를 평가·보상하고 대표이사 후보를 추천하거나 중장기 성장전략을 검토하는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이사회 의장을 사내이사가 아닌 사외이사에게 맡기는 등 내용과 형식면에서 외부 인사가 중심이 되도록 했다. 실제로 지난해 8월 SK 이사회에서 최 회장이 반대표를 던진 해외투자 안건에 나머지 이사들이 찬성해 최종 가결되거나 반대로 SKC의 2차 전지 음극재 시장 진출을 위한 해외투자 안건이 부결되는 등 이사회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SK 관계자는 “선대회장은 기업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산림과 인재를 육성해 사회와 국가의 핵심 인프라가 될 수 있도록 했다”면서 “선대회장의 경영철학을 이어받아 ESG 경영을 더욱 고도화해 이해관계자의 행복을 더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
  • 기부천사가 ‘비자금 의혹’이라니… 벼랑에 선 SK 맏형

    기부천사가 ‘비자금 의혹’이라니… 벼랑에 선 SK 맏형

    고액 기부 ‘아너 소사이어티’ 창립 회원132억 기부 공로 작년 국민훈장 받기도‘선경직물’ 후신 SK네트웍스에 큰 애착檢, 회사 아닌 최 회장 유용에 수사 초점 ‘SK 일가’ 맏형인 최신원(68) SK네트웍스 회장이 200억원대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면서 SK그룹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그룹 경영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 사안으로 보고 수사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국민훈장까지 받은 ‘기부 천사’로 알려진 까닭에 의혹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부장 전준철)는 7일 최 회장의 법인 자금 횡령·배임 혐의와 관련한 압수수색을 지난 6일에 이어 이틀 연속 진행했다. 최 회장 자택과 SK네트웍스, SKC, 워커힐호텔 등 10곳이 대상이 됐다. 최 회장의 비자금 의혹은 2018년 금융정보분석원(FIU)이 회사 내 수상한 자금 흐름을 포착하면서 불거졌다. 검찰이 대규모 압수수색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 것은 혐의를 입증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라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SK그룹 창업주 최종건 선대 회장의 적자인 최 회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혐의가 사실로 드러난다면 그동안 공들여 온 SK네트웍스 경영뿐만 아니라 ‘기부왕’이라는 타이틀마저 무색해질 수 있다. 최 회장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2007년 설립한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클럽 ‘아너 소사이어티’ 창립 회원이다. 지난해 27년간 개인 돈으로 132억원을 기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재계 안팎에서 “최 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했을 리 없다”며 검찰의 압수수색을 의아해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비자금 의혹이 사실이라면 SK네트웍스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한 실탄용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 회장은 SK네트웍스 주식을 꾸준히 사들여 현재 지주회사인 최태원 회장의 SK㈜에 이어 0.83%(206만 9292주)를 보유한 2대 주주로 올라섰다. 최 회장은 SK네트웍스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이 1953년 처음 설립한 ‘선경직물’을 모태로 하는 상징성이 큰 기업으로, 그룹의 뿌리와도 같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이 최신원 회장을 많이 배려하고 두 사람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최신원 회장은 SK그룹을 일군 부친에 대한 존경심과 향수가 각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최근 SK네트웍스에서 주유소 사업과 통신 단말기 판매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차량·가전 렌털 업체인 SK렌터카와 SK매직을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개편했다. 최 회장의 SK네트웍스 지분 매입과 SK그룹의 주력 사업인 정유·통신업과의 선 긋기가 사촌 동생이 회장으로 있는 SK그룹에서 독립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 배경이다. 물론 200억원은 계열사 분리를 위한 자금으론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최 회장의 횡령 혐의에 대한 수사가 현재로선 SK그룹 전반으로 번지진 않을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검찰도 회사 차원이 아닌 최 회장의 개인적 유용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준 기자 the@seoul.co.kr
  • 日 극우논객 “일본이 남긴 재산으로 한국 발전” 황당 주장

    日 극우논객 “일본이 남긴 재산으로 한국 발전” 황당 주장

    “과거 보상 문제는 한국에서 처리하면 돼”‘일본이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 日정부 주장일본 우익 언론이 일본 자산으로 한국이 발전했으니 배상 문제는 한국이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놨다. 일제강점기 징용 배상 판결에 따라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강제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인 가운데 “일본엔 배상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반도에서 수탈한 막대한 재산과 자원,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비판 여론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주재 객원논설위원은 7일 ‘발전의 근원은 일본 자산’이라는 제목의 기명 칼럼에서 “패전 후 일본인이 한반도를 떠날 때 남긴 거액의 재산이 미국을 거쳐 한국 측에 양도됐고 경제발전의 기초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이 남긴 자산총액이 당시 통화로 52억 달러였고 현재 가치로 수천억달러(수백조원)는 될 것이라며 “방대한 일본 자산을 생각한다면 최근 징용공 보상 문제 등처럼 이제 와서 한국 내 일본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른바 과거 보상 문제는 모두 한국에서 처리하면 될 이야기”라고 썼다. 그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끝내고 한국을 떠날 때 두고 간 재산(적산)에 관해 다룬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저서 ‘귀속재산연구’(2015년)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런 주장을 폈다. 이 명예교수는 이영훈·김낙년·이우연·주익종 등 ‘반일종족주의’의 주요 저자가 몸담은 낙성대연구소 창립자다. 구로다 객원논설위원은 SK그룹의 모체인 선경직물이 식민지 시절 일본인의 회사였다면서 “1945년 패전으로 일본인이 철수한 후 종업원이었던 한국인에게 불하돼 한국 기업이 됐다”고 쓰기도 했다. 앞서 일본 정부도 한일 간 과거사 대립이 격해진 시기에 ‘일본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메시지를 뿌렸다. 일본 외무성은 2015년 각국 언어로 제작한 ‘전후 국제사회의 국가건설: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일본’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에서 “1951년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국제사회에 복귀한 일본은 1954년 미얀마를 시작으로 일찍부터 아시아 각국에 대한 경제협력을 개시했다”며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등을 사례로 들었다.구로나 객원논설위원의 칼럼이나 외무성의 동영상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수탈, 착취, 인권 침해 등의 실상은 소개하지 않고 일본이 남기거나 제공한 것만 부각했다. 징용 과정에서 다수의 불법 행위가 발생했고 이에 대한 배상 책임이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단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앞서 대법원은 일본 기업이 징용 피해자를 부린 것이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해 원고(징용피해자)들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며 일본 기업이 위자료를 지급할 책임이 있다고 확정판결했다. 대법원은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과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은 별개라는 의미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28) SK그룹 형제 경영진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28) SK그룹 형제 경영진

    최신원 회장, 오너일가의 맏형으로 ‘형제경영’의 구심점최재원 수석부회장, 최고 엘리트지만 ‘험지경영’도 불사최창원 부회장, 화학·백신 글로벌사업 선도...‘야구광’  SK그룹은 ‘따로 또 같이’라는 경영이념 아래 형제 경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종건 SK그룹 창업주는 1953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선경직물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다. 1973년에는 서울 워커힐호텔을 인수해 일약 재벌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최종건 창업주는 폐암으로 눈을 감으면서 경영권을 동생 최종현 선대회장(당시 선경직물 부사장)에 맡겼다. 최종건 창업주가 20년간 SK의 섬유를 책임졌다면, 25년간 SK를 이끈 최종현 선대회장은 ‘석유’를 개척하고 ‘이동통신’의 길을 터놓았다. 1998년 선대회장이 별세하자 창업주의 장남인 최윤원 SK케미칼 회장 등 다섯 사촌은 한 자리에 모여 경영권을 최종현 선대회장의 장남 최태원 회장에게 넘기기로 합의했다. 사촌 간 경영이다 보니 종종 계열분리설이 제기되지만 창업주의 차남인 최신원(66) SK네트웍스 회장은 그때마다 “SK는 하나의 뿌리에 비롯됐고 최종건·종현 형제간 책임경영이라는 훌륭한 전통이 후대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며 일축하곤 한다. 실제로 최신원 회장은 오너일가의 맏형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최신원 회장은 배문고와 경희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선경합섬(현 SK케미칼)에 입사한 뒤 해외 사업에 주력하다 1998년 SK유통(현 SK네트웍스) 부회장으로 취임해 식품 및 컴퓨터 유통 위주였던 SK유통에 정보통신사업을 새로운 수익원으로 발굴, 육성했다. 2000년 SKC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SKC에도 변화와 개혁의 바람을 불어 넣었다. 2001년 화학사업을 시작하고, 2005년 미디어사업, 2007년 디스플레이 사업을 차례로 분할해 체질을 개선했다. 2016년 3월 SK네트웍스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최신원 회장은 ‘모빌리티’와 ‘홈케어’를 회사의 미래 성장동력원으로 육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AJ렌터카를 인수, 모빌리티 사업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최신원 회장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경영자로도 유명하다. 최 회장은 1억원 이상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창립멤버로 현재 총대표를 맡고 있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2008년 창립 당시 6명에서 시작해 현재 약 2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세계 두 번째 규모의 고액기부자 모임으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최 회장이 기부한 금액은 개인 최고 수준인 40억원에 달한다. 최 회장은 ‘영원한 해병’을 자처하는 해병대 예찬론자다. 1973년 해병대 258기로 입대해 경기 김포시 2사단에서 복무했다.최 회장은 백종성 전 제일원양 대표인 백해영씨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최 회장의 외아들 최성환(37) SK㈜ 상무는 최용우 신조무역 회장 자녀 최유진씨와 결혼했다. 최 상무는 중국 푸단대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LBS)에서 MBA(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병대(1031기)를 제대했다. 맏딸 최유진(40)씨는 디자인 전공으로 미국 유학중에 만난 구 데니스(한국명 구본철) 에이앤티에스 대표와 혼인했다. 구씨는 LG가와 먼 친척뻘이 된다고 알려졌다. 최신원 회장의 차녀 최영진(38)씨는 장기제 전 동부하이텍 부회장의 아들 장용진씨와 결혼했다.최태원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55) SK그룹 수석부회장은 탁월한 글로벌 감각은 물론 탄탄한 기획력과 재무분석 능력으로 SK그룹의 신성장동력을 찾아왔다. 최 수석부회장은 2000년 SK텔레콤의 신세기통신 인수 당시 자금조달 부분을 주도했다. SK E&S 대표이사직을 수행하며 차이나 가스 홀딩스를 통해 진출한 중국 도시가스 사업은 SK의 투자 이후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최 수석부회장의 대표적인 경영 일화는 ‘험지(險地) 경영’으로 요약된다. SK그룹은 지난 2007년 쿠르드 자치지역의 유전개발 참여에 대한 제재조치로 2008년 이라크 지역내 석유개발 입찰자격을 박탈당했고 원유 금수 조치를 당했다. 당시 이라크는 분쟁지역이라 출장보험도 가입이 안될 만큼 위험한 지역이었지만 최 수석부회장은 제재조치 해결을 위해 2009년 12월 직접 방탄복을 입고 이라크 정유공장을 찾았다. 최 수석부회장의 노력으로 원유 수입량은 오히려 이전보다 늘었다. 최 수석부회장은 신일고와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한 뒤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재료공학 석사학위, 하바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아 웬만한 전문경영인의 스펙을 뛰어넘는 자질을 갖췄다는 평가를 듣는다. SK그룹의 계열사 출자금을 국외에서 불법적으로 쓴 혐의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아 2019년까지 SK그룹의 주요 관계사에서 등기이사를 맡을 수 없다. 최 수석부회장은 채서영(54) 서강대 교수와 결혼했다. 채씨는 여의도고 영어교사였던 채희경씨의 장녀다. 자녀는 2남 1녀.최신원 회장의 동생인 최창원(54) 부회장은 SK디스커버리 및 가스 대표이사 부회장과 SK와이번즈 구단주, SK경영경제연구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최 부회장은 폴리에스터 등 섬유 중심이던 SK케미칼의 사업포트폴리오를 개선해 SK케미칼을 코폴리에스터, 바이오에너지 등의 고부가 화학소재와 프리미엄 백신 중심의 글로벌 선도기업으로 발전시켰다. 지난 7월 백신 사업을 분할해 ‘SK바이오사이언스’를 설립했다. 2011년 최 부회장의 취임 이래, SK가스의 변신도 눈부시다. SK가스는 LPG 유통회사에서 벗어나 화학, 발전 등의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글로벌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도약 중이다. 최 부회장은 여의도고와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시간대 MBA를 취득했다. 최 부회장은 변호사 집안의 최유경(51)씨와 혼인, 1남 1녀를 두고 있다. 결혼식 전날 한국시리즈를 보러 야구장에 가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야구를 보러 갔을 정도로 ‘야구광’이다. 최종건 창업주의 장남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2000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부인 김채헌(64)씨는 김이건 전 조달청장의 딸이며 1남 3녀를 두고 있다, 장녀 서희(41)씨는 미국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광복 70년-한국경제를 이끈 기업들] SK, 섬유산업 출발 정보통신·반도체 기업 성장

    [광복 70년-한국경제를 이끈 기업들] SK, 섬유산업 출발 정보통신·반도체 기업 성장

    1953년 한국전쟁으로 무너진 폐허 속에서 경기도 수원시 평동 4 일대에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 공장이 건립됐다.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이 마차로 자갈을 날라 공장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시작한 SK그룹은 2015년 에너지와 화학, 정보통신, 그리고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국경제를 이끄는 국내 재계 서열 3위의 그룹으로 우뚝 섰다. SK 성장을 반추할 때 1973년부터 그룹을 맡았던 고 최종현 선대회장을 빠트릴 수 없다. 그의 지휘 아래 SK는 섬유산업을 바탕으로 석유화학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어 1998년 그룹 총수에 오른 최태원 회장은 SK텔레콤의 2세대 휴대전화 방식인 다중분할접속(CDMA) 서비스에 이어 세계 최초로 동기식 3세대 상용 서비스를 개시하며 SK를 이동통신업계의 선두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의 결단 아래 2011년 인수한 하이닉스는 6분기 연속 영업이익 1조원을 기록하며 그룹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SK는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혁신경영’을 통해 그룹의 핵심역량을 키우고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데 집중한다는 복안이다. ‘사회적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자사가 지원하는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를 중심으로 벤처창업 생태계 만들기에도 진력할 계획이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환갑 맞은 SK그룹 ‘조용한 기념식’

    환갑 맞은 SK그룹 ‘조용한 기념식’

    수출 600억 달러, 고용 8만명의 재계 3위 기업. 8일 환갑을 맞는 SK그룹의 현재 위상이다. 섬유, 석유화학, 이동통신 등을 주력 사업으로 키워 국내 산업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해 왔기에 성대한 ‘환갑잔치’가 당연시되지만 축하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구속 중인 최태원 SK㈜ 회장과 최재원 SK㈜ 부회장의 항소심 첫 공판이 열리기 때문이다. SK그룹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이날 오전 경기 용인 SK아카데미에서 조용한 기념식을 연다. 비공개 행사로, 오후 공판에 출석하는 최 부회장을 비롯해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 하성민 SK텔레콤 사장, 최신원 SKC 회장 등 고위 관계자와 원로들이 참석한다. SK의 역사는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이 1953년 4월 8일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원시 권선구 평동 4번지 일대를 매입해 선경직물을 세우고 16대의 직기를 돌리면서 시작됐다. 이후 최종현 회장이 1973년 선경석유를 설립한 뒤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해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4271억원에 인수해 그룹 사업의 3대축을 세웠다. 1976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SK는 국내 성장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최태원 회장 주도로 글로벌 공략에 주력했다. 이에 따라 2004년 수출 100억 달러, 2005년 2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지난해에는 수출 600억 달러를 넘어섰다. SK 관계자는 “한 갑자(甲子)를 돌았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선에 선다는 것”이라며 “따로 또 같이 3.0의 성공적인 운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SK그룹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김창근 의장은 창립 60주년에 맞춰 발간된 사사(社史)를 통해 “지난 60년은 국민의 의(衣)생활을 바꾸고 산업화시대 한강의 기적을 일궈 낸 에너지를 만들어 왔다”면서 “정보화 시대에는 정보기술(IT) 강국을 선도해 왔다”고 회고했다. 이어 “앞으로의 명제는 행복과 국제화에 있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도 60년사 기념사에서 “SK의 도전·열정의 원천과 목적은 행복에 있다”며 “구성원 모두가 언제나 사회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기업시민으로서 해 나갈 역할을 찾기 위해 힘쓰자”고 당부했다. 한편 최 회장에 대한 항소심 첫 공판은 이날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SK그룹 ‘상징’인 교복사업 손 뗀다

    SK그룹 ‘상징’인 교복사업 손 뗀다

    SK그룹이 모태 기업에서 물려받은 교복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SK네트웍스는 7일 ‘스마트’ 학생복 사업을 스마트의 유통망 및 협력업체들로 구성된 ㈜스마트F&D에 지난달 30일부로 양도했다고 밝혔다. 스마트 학생복 원단 생산(1970년) 시점으로 따지면 42년, 학생복 생산(1990년)으로 치면 22년 만이다. SK네트웍스의 교복 사업은 그룹의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SK그룹의 모태 기업이자 SK네트웍스의 전신인 선경직물이 원단에 이어 교복까지 생산하는 등 SK그룹의 이미지 형성과 성장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SK네트웍스 관계자는 “인수 대상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여러 기업과 개인이 희망 의사를 밝혀 왔다.”며 “스마트F&D가 지난 20년간 협력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스마트 학생복 사업에 대한 애정과 이해도, 관련 사업 역량이 가장 우수하기 때문에 사업 인수자로 결정했다.”고 양도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스마트 학생복 사업은 연간 매출 700억원 규모였다. 매출 규모상으로도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협상을 진행해 오다 이번에 결정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스마트F&D는 올해 겨울복 유통을 시작으로 내년부터 스마트 학생복의 생산, 유통, 판매 등을 직접 하게 된다. SK네트웍스 관계자는 “스마트F&D는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에 사업 경쟁력과 브랜드 가치 등 발전한 모습으로 학생복 업계를 이끌어 갈 것”이라며 “스마트F&D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SK네트웍스는 학생복 사업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SK네트웍스는 학생복 사업을 양도하면서 패션 사업에 주력할 계획이다. 여성복 브랜드 오즈세컨을 포함한 자체 브랜드들의 글로벌 패션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한편 SK네트웍스는 국내에 와인을 유통하는 자회사 WS통상도 ‘중소기업과의 상생’ 차원에서 제3자에 지난 4일부터 매각을 완료했다. WS통상은 2006년에 설립된 외국산 주류 수입 판매업체로 SK네트웍스가 2008년 9월 100% 지분을 인수했다. SK네트웍스는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글로벌 와인 유통 사업에 집중할 방침이다. 홍혜정기자 jukebox@seoul.co.kr
  • SK, 국내 수출그룹 ‘빅6’ 반열에

    SK, 국내 수출그룹 ‘빅6’ 반열에

    SK가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LG 등과 함께 한국 경제의 대들보인 ‘수출 그룹’ 반열에 올랐다. 그룹 차원에서 수출 경영에 드라이브를 건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K그룹은 올해 1분기에 제조업 부문의 수출액이 총 141억 8900만 달러(약 16조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80억 1100만 달러)보다 77.1% 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는 우리나라 1분기 수출액(1349억 3400만 달러)의 10.5%에 해당한다. 또 동기 SK 제조업 총 매출액(194억 7600만 달러)의 73%를 차지함으로써 다른 수출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현대차그룹의 수출 비중은 88%에 달한다. 이로써 SK그룹의 올해 총 수출액은 창사 이래 최대인 550억 달러(6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SK그룹의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SK종합화학, SK루브리컨츠, SKC, SK케미칼, SK하이닉스 등이 제조업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지주회사인 SK이노베이션이 경질유 등 고부가 석유제품의 수출 확대와 해외 석유개발에 힘입어 11조원 이상의 수출 실적을 냈다. 윤활유 전문업체 SK루브리컨츠와 올해 그룹에 합류한 반도체 전문 SK하이닉스는 수출 비중이 각각 87%와 93%에 이르고 있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 취임 전인 1997년만 해도 수출 비중이 30.8%에 머물렀다. 그러나 취임 10주년인 2008년 50%를 넘어선 데 이어 지난해 60%를 돌파했고, 올해는 70%를 뛰어넘었다. 1분기 수출액도 2002년 9억 7000만 달러에서 10년 만에 14배 증가했다. 최 회장은 내수 위주의 SK그룹을 수출주도형으로 변신시키고, 올해를 ‘글로벌 성장의 원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한 올해 총 투자액은 19조 1000억원으로, 지난해(9조원)의 두 배가 넘는 규모이다. SK그룹은 과거 중요한 시점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1956년 선경직물㈜로 출발한 SK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 본격적인 에너지 사업을 통해 기반을 닦았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확보하면서 통신업에 진출, 단단한 수익구조를 다졌다. 그러나 이동통신 등 내수 위주의 사업 구조는 한계를 드러냈다. 최 회장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하이닉스를 선택했다.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하이닉스의 경우 사양이 떨어지는 D램 위주에서 벗어나 낸드플래시, 시스템반도체 등으로 사업영역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에너지·화학 위주의 수출이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한다고 해도 제조업 매출 200억 달러 규모의 그룹이 매달릴 만한 블루오션은 아니라는 것이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박태준 회장 별세 계기로 본 기업별 창업정신

    현재의 포스코를 이룬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별세를 계기로 국내 기업들의 독특한 창업정신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창업정신은 기업구성원 결속을 위한 슬로건으로 기업문화의 바탕이자 경영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 ●SK-패기, 한진- 수송보국 18일 재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현대사를 일군 대기업 창업정신은 ‘나라를 지킨다.’는 ‘보국’(報國)을 빼놓을 수 없다. 삼성그룹은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이 주창한 3대 가치로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와 함께 ‘사업보국’(事業報國)이 뿌리내리고 있다. 기업을 통해 국가와 인류사회에 공헌하고 봉사한다는 사업보국은 삼성이 품질경쟁력뿐 아니라 사회공헌활동도 활발히 전개하는 이유다. 한진그룹은 조중훈 선대 회장이 주창한 ‘수송보국’(輸送報國)이라는 창업 이념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수송 물류 부문 전문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화그룹 창업주인 고 현암 김종희 회장은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고 봉사하는 외길’을 위해 걷자는 마음으로 화약 생산의 자립화에 매진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개척정신 역시 국내 기업들의 창업정신의 기반이다. 현대중공업의 경우에는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의 ‘해봤어’ 정신이 기업문화에 뿌리내리고 있다. LG그룹은 고 연암 구인회 회장이 남긴 ‘연구개발·개척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연구개발을 통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것이다. ●롯데는 내실 지향 ‘거화취실’ SK그룹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은 1953년 4월 전쟁 폐허 속에서 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을 창업했다. 최종건 회장의 ’패기‘는 선대 회장인 고 최종현 회장의 ‘지성’과 함께 SK 정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 롯데그룹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좌우명으로 사용하는 ‘거화취실’(去華就實·화려함을 버리고 내실을 지향한다)의 정신을 기업 문화로 실천하고 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SK, 그룹 모태 ‘교복사업’ 철수 검토

    SK가 그룹의 모태인 학생 교복 사업에서 철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SK그룹 관계자는 6일 “SK네트웍스의 교복 브랜드인 스마트를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인수 대상자 선정 등은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가 없다.”고 밝혔다. SK의 교복 사업은 계속 매각설이 나돌았지만 그룹 내 상징성이 커 존속하는 방안도 저울질됐다. 교복 사업은 모태 기업인 선경직물이 1970년 학생복 원단 사업을 시작한 후 1991년부터 스마트라는 브랜드로 교복을 제조해 왔다. 그룹의 주력 사업이 에너지·화학·통신으로 재편됐지만 고 최종건 회장에 의해 설립된 선경직물의 전통은 SK상사를 거쳐 SK네트웍스로 이어졌다. 교복 사업 철수는 수익성 한계와 중소기업 업종이라는 사회적 여론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 교복 시장 자체가 4000억원대로 협소한 데다 수익률도 높지 않았다. 교복 사업의 연매출은 800억원으로 지난해 SK네트웍스 전체 매출 23조 5000원의 0.5%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대기업이 교복 사업을 한다는 사회적 눈총도 따가웠다. 그룹 내 상징적인 사업이지만 중소기업 업종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았다. 국내 대기업 중 교복 사업을 하는 업체는 SK네트웍스가 유일하다. SK네트웍스와 교복 시장을 놓고 경쟁하던 삼성그룹 계열사인 제일모직은 2001년 손을 뗐다. SK그룹 전체적으로 SK텔레콤의 플랫폼 분사, SK케미칼의 제약 부문 분할, 반도체 기업인 하이닉스 인수 등 굵직굵직한 사업 구조 재편이 진행되는 만큼 교복 사업도 정리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SK네트웍스는 최근 인수 희망 업체들에 대한 교복 사업부 실사를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SK네트웍스 관계자는 “교복 사업은 수년전부터 패션 부문에서 하나의 사업팀으로 존속해 왔고 비중이 크지는 않다.”면서도 “매각과 관련해 공식 결정된 건 없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대한민국 60돌 미래로 세계로] (3) 경제대국을 향해 뛴다

    [대한민국 60돌 미래로 세계로] (3) 경제대국을 향해 뛴다

    건국 60년의 경제는 한마디로 ‘한강의 기적’으로 요약된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이적인 기록은 한국 경제의 저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한국 경제는 또다른 도전을 요구받고 있다. 도전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다.60년간 우리 경제의 변천과 산업현장의 주역들인 기업의 눈부신 업적 등을 되돌아 보고 글로벌의 파고를 넘는 ‘60년의 미래’를 짚어본다. ■ 소비자물가·경제규모로 본 과거 60년 달걀 1개면 서울시내에서 버스를 5.5번 탈 수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달걀이 아주 귀했던 1948년 건국 시절의 얘기다. 당시 달걀 1개의 가격은 24.8원(圓)으로 서울 시내버스 요금 4.5원(圓)의 5.5배였다. 건국 60년을 맞은 2008년은 어떨까. 2008년에는 거꾸로 달걀을 5.5개를 모아야만 서울서 버스 한번 탈 수 있다. 달걀 한개 가격이 2008년 현재 163원, 서울시내 버스비는 900원으로 역전됐기 때문이다. 달걀은 60년 전에 비해 6572배(두 차례 화폐개혁 반영해 2008년 가격×1000)가 올랐지만, 서울시내 버스비는 달걀 상승분보다 3배 이상 더 올라 20만 배가 됐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신문이 19일 한국은행에 요청해 1948년 건국 이후 60년 간의 생필품 가격변동을 살펴본 결과다. 한은과 통계청에 따르면 소비자물가지수는 60년 동안 1만 1216배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쇠고기 5만 2920배·쌀 1만 7943배 올라 상품별로 쇠고기(500g)는 255.8원(圓)에서 5만 2920배가 오른 1만 3537원이다. 돼지고기는 237.5원(圓)에서 8458원으로 올라 3만 5612배가 뛰었다.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오른 것이다. 한은 물가통계국은 “1945년에는 쇠고기는 15.8원인 반면 돼지고기는 21.7원으로 더 비쌌다.”면서 “일하는 소가 먹는 소로 인식이 바뀌면서 1948년부터 가격이 역전됐다.”고 설명했다. 소주는 83원에서 942원으로 1만 1349배, 밀가루는 102.1원에서 1454원으로 1만 4241배,80㎏ 쌀은 8875원에서 15만 9242원으로 1만 7943배 올랐다. 금 1g은 1401.6원에서 3만 1489원으로 2만 2466배 올랐다. 특히 광복부터 건국까지 3년간은 주요 생필품이 약 11배(1000%)가 올라, 살인적인 물가상승으로 고통받았던 서민들의 애환을 짐작할 수 있다. 주식인 쌀은 3년간 286.5원에서 8875원으로 약 31배가 상승했고, 서울시내 버스요금도 0.16원에서 4.5원으로 28배가 상승했다. 소비자물가지수로 살펴보면 1945년부터 ‘광복 60년’간 소비자물가는 약 11만배 상승했지만,1948년부터 ‘건국 60년’은 1만 2000배로 대폭 축소된다. 이 역시 건국 직전 3년간의 인플레이션을 짐작하게 한다. ●1인당 국민소득 1만9053배로 확대 건국이후 60년간 경제규모는 1만 9053배(달러 기준으로는 746배)로 확대됐다.6·25 전쟁이 끝난 해이자 통계작성 시점인 1953년 473억원(13억달러)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007년에 901조 1886억원(9699억달러)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1인당 국민소득도 1953년 67달러에서 1995년 1만달러를 돌파했고,2007년에는 12년 만에 2만달러를 돌파하는 기념비적인 해가 됐다. 경제성장률은 1954년 5.6%였고 2007년에는 5.0%였다. 자동차 총보유대수는 2008년 5월 현재 1667만대로 1945년의 7326대와 비교해 2200배가 증가했다. 자동차 생산 대수는 1955년 7대에서 2007년 408만 6308대로 엄청나게 증가했다. 선박 건조량은 1만 8955대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 교수가 보는 미래 60년 지역마다 고부가가치 산업 분산 통해 4만달러 시대로 “우리나라 휴대전화가 세계 ‘넘버 원’인 것은 국내의 소비자들이 가장 깐깐하기 때문입니다. 시민과 업체가 끊임없이 함께 토론하고 대안을 찾은 결과죠. 이는 집중을 통해 ‘2만달러 시대’를 맞이했다면 다양한 목소리들의 분산을 통해 4만달러 시대로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모든 유행어는 시대의 조류를 품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88만원 세대’라는 표현이 유행어로 떠오른 것은 20대 비정규직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는 전직 말지 기자인 박권일씨와 함께 저서 ‘88만원 세대’를 내놓으면서 시대의 화두를 던진 경제학자다. 우 교수는 지난 60년의 한국 경제를 ‘압축성장’이라는 단어로 정리한다‘한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궈낼 수 있었지만 경제적인 불균형이란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불균형을 푸는 게 새로운 도약의 시작이라고 우 교수는 지적한다. 이는 유럽의 예와 같이 국가도, 시장도 아닌 ‘시민’이 경제 활동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크게 국가가 운영하는 경제와 시장 중심 경제로 구분한다면 스위스나 덴마크 등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협동조합 등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회적 기업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4만달러 시대’를 맞았습니다. 자원투입형 경제는 이미 ‘과거의 유산’이라는 뜻이죠.”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고유가 시대에서,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 문턱에 와 있는 한국 경제의 수준을 감안했을 때 물량을 투입해서 이윤을 창출하는 기존의 구조는 불가능하다는 게 우 교수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우 교수는 기존의 양을 늘리는 ‘집합의 경제’가 아닌 질을 높이기 위한 ‘분산의 경제’ 체제로 전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좋은 국민경제’의 틀을 갖추는 것은 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분산의 경제는 구나 동 등이 실제로 한 단위가 돼 경제 활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또한 지역 경제가 자생력을 갖기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 충분한 사회적 투자가 진행돼야 하죠. 그러나 부동산 투기로 3∼4년 만에 몇 배의 이윤을 챙길 수 있는 상황에서 누가 투자하고 연구하겠습니까. 결국 독점과 투기를 줄이지 않고서는 좋은 국민경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규모를 키워 2만달러 시대를 맞았다면 사회를 더 효율적으로 재편하고 의사소통을 활발히 진행시켜야 4만달러 시대로 갈 수 있습니다.” 우 교수는 일본의 사례를 조언한다.90년대 초부터 10년 동안의 헤이세이 공황을 겪었지만 교토 등 지역 경제는 중앙과 달리 탄탄하게 유지됐다. 그래서 다시 안정적인 성장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역이 중심이 된 분산의 경제는 자연스레 대규모 공장 대신 경쟁력 있는 소규모 공장 체제로 재편된다. 이때의 자원은 석유가 아닌 지식과 문화다. 우 교수는 “우리는 훌륭한 전통을 물려받은 문화국가인 데다 지난 30년 동안 공업을 발전시켜 본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면서 “스위스의 시계브랜드인 스와치 등과 같이 지역에 맞는 정밀기계나 소재, 정밀화학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일으킨다면 전 국토에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성장 중시<60·70년대>→세계화·IMF체제<90년대 초·중반>→분배<2000년대 전후> 경제 패러다임 변화 ‘성장, 분배, 그리고 세계화.’ 우리나라 경제의 60년을 농축하고 있는 키워드다. 1960년대 경제 개발은 성장을 위한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였다고 볼 수 있다.1·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경제도약의 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1970년대는 중화학공업과 수출 중심의 정책이 추진됐다. 지역간 균형발전을 목표로 새마을운동이 도입된 것도 이 때다. 매달 대통령의 수출확대회의 주재,10대 종합상사 설립 등 전폭적 지지로 10년간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46%였다. 지난 77년에는 수출 100억달러의 위업을 달성했다. 반면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한 수출지상주의는 대기업이 재벌로 성장하는 토대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성장이 이데올로기화되면서 정치·사회발전은 우선 순위에서 밀렸고,1·2차 석유파동과 만성적인 물가상승 등으로 ‘복부인’이란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10·26사태 직후인 1980년 경제성장률은 -2.1%,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8.7%였다. 자연스레 안정성장에 초점이 맞춰졌고, 연 평균 물가성장률을 5%의 틀로 만든 것도 이때부터였다.80년대에는 북방외교 추진, 과거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 및 교역확대, 해외투자 증가 등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무리한 성장정책과 노동력 착취 등은 노사분규를 태동시키는 요인이 됐다. 1993년 등장한 문민정부는 ‘세계화’의 흐름이 경제정책을 주도했다.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고 우리나라는 다음해인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이에 따른 외환규제 완화는 외환위기를 부르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외환위기는 경제의 전반적인 패러다임을 확 바꿨다. 전면적 구조개혁이 이어졌고 무리한 성장정책은 안정적인 성장으로, 한편으로는 ‘성장의 그늘’로 여겨진 소외계층에 대한 분배정책이 경제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분배정책에 치중했던 참여정부는 2003년 경제성장률이 3.1%로 뚝 떨어지면서 저성장 논란에 휩싸였다. 동시에 성장과 분배, 그리고 세계화가 서로 맞물리면서 정책적 우선순위를 놓고 적잖은 논쟁을 불러왔다. 분배중심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성장과 글로벌 경제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연평균 7% 경제성장,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7대 경제강국을 의미하는 ‘747공약’도 이런 토대에서 출발하고 있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섬유·가전으로 성장…반도체·車로 글로벌 기업 배출 80년대 이후 수출 효자 ‘선박’ 대표기업 수출품 변천사 1980년대의 일이다. 삼성전자는 한 식당 주인에게서 변상 요구를 받았다. 세탁기가 막혔으니 물어내라는 요구였다. 서비스팀이 출동해 조사해보니 배수관에 감자 껍질이 무수히 쌓여 있었다. 세탁기에 감자를 넣고 돌리면 껍질이 잘 벗겨진다는 경험담이 입소문을 타면서 식당 주인들이 너도나도 감자를 ‘빤’ 것이다. 처음엔 “황당한 요구”라며 실소하던 삼성전자는 그러나 결국 세탁기를 고쳐줘야 했다. 제품 설명서에 ‘빨랫감 외에는 넣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년 뒤 미국에서 애완고양이를 목욕시킨 뒤 털을 말리려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가 고양이를 잃은 할머니에게 이 전자레인지를 수출한 일본 가전업체가 수억달러를 물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역시 ‘음식물 외에는 넣지 말라.’는 경고를 빠뜨린 탓이었다. 일련의 이 사건들은 삼성을 비롯해 앞만 보고 내달리던 국내 기업들에 ‘소비자의 권익’을 의식하게 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기업의 ‘사회 책임’을 고민하게 했다. ●철광석·포목·오징어로 버텼던 ‘기업 태동기’ 한국 기업의 역사는 1896년 서울 배오개 고개에 둥지를 틀고 옷감 등을 내다팔던 박승직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두산그룹 효시다. 구인회상점(1931년,LG 모태), 삼성상회(1938년, 삼성 모태), 현대토건사(1947년, 현대 모태), 선경직물(1953년,SK 모태) 등도 잇따라 태동했다. 하지만 근대 기업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것은 1950년대 중반이라는 게 대체적 견해다. 미국 달러화에 의지한 ‘원조 경제’ 시대였다. 김성수 경희대 교수는 이 시기 경제의 특징을 “돈벌이 자체에 집착한 천민형 자본주의”라고 정의했다. 주된 수출품도 가공하지 않은 원재료였다. 지식경제부 통계에 따르면 1961년 수출 1,2위 상품은 철광석(530만달러)과 중석(510만달러)이었다. 오징어(5위)와 활선어(6위)도 상위권에 포진했다. ●섬유·가발·가전 꽃피운 ‘고도성장기’ 70년대 들어 한국 경제는 질적으로 도약했다. 중공업 비중이 1975년 처음으로 경공업과 같아지더니 이내 역전했다.‘국산 1호’ 타이틀을 건 치약, 라디오, 전화기, 흑백TV, 세탁기, 자동차 등이 줄줄이 쏟아졌다. 중동 특수가 일면서 건설업도 급성장했다.70년대가 LG(당시 금성)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현대의 전성기였다. 그래도 수출 저변은 섬유·의류산업이 떠받쳤다. 1970년 섬유는 단일품목으로 무려 3억달러 이상을 수출하며 1위 품목으로 올라섰다. 그 유명한 가발(3위) 수출도 이 때 이뤄졌다. 정부 주도 ‘계획경제’의 빛과 그림자가 심화된 것도 이 무렵이다. ●반도체·자동차·선박 앞세운 ‘글로벌 성장기’ 80년대 말의 3저(低) 호황과 88서울올림픽 개최에 힘입어 정부와 기업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노사분규도 급증했지만 ‘고도성장’에 묻혔다.1995년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의 평균 매출 증가율(27.7%)과 영업이익률(11.3%)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최고 기록이다. 산업구조에도 또 한차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반도체, 선박, 컴퓨터, 철강 등이 수출 주력상품으로 전면 부상했다. 반도체는 1992년 수출 1위 품목(68억달러)으로 처음 올라선 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동차도 ‘포니 신화’를 연 지 20년 만인 1995년, 연간 100만대 수출을 돌파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듯이’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경제가 크게 휘청댔다. 재계 판도도 바뀌었다. 외환위기 직전인 97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재계 서열 1위(자산 기준)는 현대(54조원)였다. 삼성은 52조원으로 2위였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올 4월, 삼성(144조원)은 현대차(74조원)와의 격차를 크게 벌리며 부동의 1위 자리를 굳혔다. 롯데가 ‘빅5’로 올라선 것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해서다. 반면, 대우, 한라, 진로, 고합, 해태 등 10개가 넘는 재벌그룹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벤처 버블 붕괴’의 고통도 뒤따랐다. 정구현 삼성경제연구소장은 “해외 현지생산 확대 등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이 본궤도에 오르고 주주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것은 이 시기의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IT 경쟁력으로 中 추격 막아야” 미래 성장모델은 “회사가 10년,20년 후에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이다.”(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5년 전에는 미래를 준비할 시간으로 10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5년간을 여러분(임직원)이 그냥 까먹었다. 이대로 가면 5년 안에 망한다.”(최태원 SK그룹 회장) “해외 진출과 인수합병(M&A)에 대비해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실행역량을 강화하라.”(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미래를 걱정하는 대기업 총수들의 발언에는 한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냉혹한 ‘비즈니스 정글’의 생존명제가 녹아있다. 멈추는 순간 쓰러지고마는 굴렁쇠처럼 진화의 노력을 계속하지 않는 기업은 언제건 과거의 영화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변화·혁신 없인 지속적 성장 어려워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55년 국내 100대 기업에 들었던 곳 가운데 50년이 흐른 2005년에도 순위에 들어있는 곳(상호변경 포함)은 CJ,LG화학, 현대해상, 한진중공업, 대림산업, 한화, 한국전력 등 7개에 불과했다. 기업집단으로 따지면 64년 10대그룹 중 지금도 10대그룹인 곳은 삼성과 LG뿐이다. 변화와 혁신은 기업들이 지속적인 성장을 달성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특히 앞으로는 한국기업 고유의 성장모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따라 배울 수 있는 글로벌 기업들이 많았다. 미국식이나 일본 또는 유럽식 경영모델 중 적합한 것을 선택해 따라가면 됐다. 실제로 많은 국내 기업들이 이런 벤치마킹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다르다. 김신(경희대 교수) 한국기업경영학회장은 국내기업에 특징적으로 부과된 과제를 ▲소유와 경영에서 어떠한 기업행태를 만들어 내느냐 ▲한국기업이 처한 기업지배구조를 어떠한 방식으로 선진화하느냐 ▲초일류 기업으로서 어떠한 글로벌 경영전략을 수립하느냐 ▲이제까지 세계가 보지 못했던 혁신 제품을 어떻게 개발하느냐 ▲선도기업으로서 국제가격과 기술주도권을 어떻게 획득하느냐 ▲한국형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구현하느냐로 요약했다. 김 회장은 “지금까지의 성공적인 발전상을 앞으로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기업의 장점과 단점,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를 철저히 분석하고 여기에 한국적 특수성이라는 변수들을 집어넣어 우리만의 새로운 기업모형과 경영이론을 창출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활용도에 미래경쟁력 달려 이와 함께 많은 전문가들이 국내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요소로 첫머리에 꼽는 것이 세계의 공장 중국의 활용이다. 거의 모든 산업부문에서 중국의 맹추격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버릴 것과 살릴 것을 명확히 구분해 강점있는 분야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산업기술재단 전망에 따르면 현재 한국이 중국보다 우위에 있는 이동통신장비, 디지털TV, 냉연강판 등은 2010년 중국 우위로 역전될 것으로 보인다.MP3플레이어 등에서는 이미 2004년을 전후로 중국에 역전을 허용한 상태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나라들에 대한 진출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을 지칭하는 ‘브릭스(BRICs)’ 국가들을 필두로 베트남·인도네시아·터키·멕시코 등이 꼽힌다.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비상하고 있는 중동 등 산유국도 국내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해 쟁취해야 하는 주력시장이다. ●규모 큰 세계시장에 집중 투자 글로벌 성장 가능성이 높고 세계시장 규모가 큰 분야에 대한 집중투자도 중요하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제품·서비스와 정보기술(IT)·생명공학(BT) 등의 결합·융합 부문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특히 우리나라가 강점을 갖고 있는 IT 분야의 경쟁력을 지렛대 삼아 에너지, 헬스케어, 환경 등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태양광·연료전지 등을 핵심으로 하는 에너지산업, 건강과 장수의 꿈을 실현하는 생명산업, 개인과 기업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부티크·투자은행 등이 유망분야로 꼽힌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미스 선경직물(鮮京織物) 홍혜연(洪惠蓮)양-5분 데이트(77)

    미스 선경직물(鮮京織物) 홍혜연(洪惠蓮)양-5분 데이트(77)

    「미스·선경직물(鮮京織物) 」 홍혜연(洪惠蓮)양은 올해 22세의 「영·레이디」 . 동그스름한 얼굴, 둥근 눈이 귀염성 스럽지만 꼭 다문 두 입술은 만만치 않은 아가씨임을 느끼게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란 본토박이 서울 아가씨. 딸만 넷이 있는 딸 부잣집의 맏딸. 딸이 많은 집의 딸들이 대개 그렇듯이 옷차림새며 화장 솜씨가 보통을 훨씬 넘는다. 선경직물에 근무한지는 올해로 3년째. 덕성여고(德成女高)를 졸업한 직후부터 죽 이 직장에 근무해 왔고 지금은 사장실의 비서. 『울적할 때는 음악을 자주 들어요. 주로 「팝·송」을 듣지만 때로는 웅장한 고전음악이 듣고 싶어질 때도 있더군요. 요즈음은… 』 이렇게 예쁘기만한 아가씨도 때로는 울적해지기도 하는가 보다. 『기분이 좋을때, 여가가 있을때는 그림을 그립니다. 수채화도 그렸고 유화(油畵) 까지도 그려봤어요. 한때는 미술과(美術科) 계통으로…』 얘기중 나중의 것은 쓰지 말란다. 진학을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겠는데…. 한편 관광엽서를 모으는 취미도 가지고 있어 국내외 것을 가리지 않고 관광엽서를 꽤 가지고 있다고. 종교는 「말일성도(末日聖徒) 예수·그리스도」교. 흔히 「모르몬」교라고 이르는 종교이며 우리나라에 전파된지는 1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또한 3위(位) 2체(體)1영설(靈說)을 신봉하는 종교라고도 일러준다. 「보이·프렌드」라도- 라는 질문에는 『아직 없어요. 앞으로 생기겠죠』 - 분명하게, 또박또박 대답한다. 감명깊게 본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선데이서울 70년 4월 12일호 제3권 15호 통권 제 80호]
  • SK 50년사 발간

    “1953년 당시 수원 선경직물 공장은 종업원들이 최종건 회장의 마차를 이용해 5㎞ 떨어진 광교천에서 돌과 자갈을 날라 만들었다.”(이용진 전 선경직물 전무) SK그룹은 53년 3월 전쟁의 폐허에서 매출 60조원의 국내 굴지 그룹으로 성장하기까지의 50여년 족적을 담은 ‘SK 50년 패기와 지성의 여정’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고 3일 밝혔다. 1380여쪽의 이 책자는 창업주인 최종건 전 회장이 선경직물을 인수해 SK를 일으키는 ‘맨손의 창업’,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이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SK에 합류하는 ‘패기와 지성의 만남’, 울산 정유공장을 완공하면서 수직 계열화를 이루는 ‘수직 계열화의 완성’,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하는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의 두 날개’편 등 모두 7부 22장으로 구성돼 있다. 시대순으로 정리된 사사는 전·현직 임원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일화를 담았다. 또 수백장의 사진 자료와 인물 사진 중에는 62년 11월 선경직물 수원공장 준공식에 최종건 전 회장과 최종현 전 회장이 참석하는 모습 등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도 포함됐다.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①-창업 최종건·종현씨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①-창업 최종건·종현씨

    “윤원아, 신원아, 월요일자 신문 꼭 봐라. 우리 회사가 크게 나온다.”(고 최종건 SK 창업주) “아버지,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최신원 SKC 회장) “그때 보면 알 수 있어, 이놈들아.”(고 최종건 창업주) 최신원 SKC 회장이 공개한 워커힐호텔 인수 직전 부자간에 오갔던 대화다.1973년 1월 선경(현 SK)은 정부로부터 서울 워커힐(현 쉐라톤 워커힐)호텔을 26억 3200만원에 인수하며, 당당히 재벌 반열에 들어선다. 선경이 국민과 재계에 던진 ‘무명의 반란’이었다. 최종건 선경(현 SK) 창업주가 맨손으로 선경직물을 일으킨 지 20년만의 일이다. 그러나 최 창업주는 같은 해 11월 폐암으로 별세,‘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원대한 꿈을 동생인 고 최종현 SK(당시 선경직물 부사장) 회장에게 맡긴 채 ‘짧고 굵은’ 인생을 살다갔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최 창업주가 20년간 SK의 섬유를 책임졌다면 25년간 SK를 이끈 고 최종현 회장은 ‘석유’를 개척하고,‘이동통신’의 길을 터놓았다. 고 최종현 회장의 50년 지기(知己)인 언론인 홍사중씨가 본 형제는 이렇다.“형(최종건)은 좋은 의미의 ‘보스형’이었다. 의논할 상대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는 모든 일에 혼자 결정을 내렸다. 동생(최종현)은 ‘리더형’이었다. 형제는 그렇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좋은 짝이었다.” 소리없이 일을 꾸미는 사람은 동생이요, 밖에서 뛰는 사람은 형이었다. 그래서 회사 돌아가는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은 형을 가리켜 ‘용장’이라 했고, 아우를 가리켜서 ‘지장’이라 했다. 형제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SK를 자산규모 재계 4위의 대그룹으로 일궈냈다. ●‘원조 불도저’ 최종건 창업주 최근 재계 CEO(최고경영자) 가운데 강한 추진력과 남다른 승부 근성 때문에 ‘불도저’라 불리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실상 불도저라는 애칭은 최 창업주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의리파, 불같은 추진력, 강한 뚝심’은 최 창업주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비’ 같은 성격에 ‘조조’의 꾀도 많았다. 이런 점을 잘 드러낸 에피소드 하나.1966년 선경직물은 차관 도입 문제로 일본 정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중소기업에 불과한 선경직물의 상환 능력을 의심하며 차관 제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싶었던 최 창업주는 일본 대사관 관계자들을 단골 술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가 술집 마담에게 거짓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하라는 것. 술집 마담은 때가 되자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말을 건넸다. 최 창업주는 일본 관계자 앞에서 “급한 일이 있으니 잠깐 나가겠다.”고 밝힌 뒤 2시간 가량 단잠을 자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이거, 죄송합니다. 저 위에 좀 다녀 오느라 늦었습니다.”고 설명했다. 일본 관계자들은 최 창업주가 정부 최고위층의 부름을 받고 나간 것으로 모두 오해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선경직물이 정부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구나.’를 암시하며, 차관 도입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그의 장비 같은 성격은 또 이렇다. 최 회장의 지인들은 그가 다혈질인 데다 성미가 급하고, 감정을 폭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화가 나면 앞뒤 생각없이 퍼부었다. 그러나 뒤끝은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화난 얼굴로 “누구 불러오라.”고 불호령을 내리면 서울에 있으면서도 일본으로 출장갔다고 곧잘 거짓말을 했다고 회고한다. 최 창업주는 1926년 수원에서 최학배 공과 이동대 여사의 4남4녀(양분, 양순, 종건, 종현, 종분, 종관, 종순, 종욱)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에 견습기사로 취직, 사회 첫 발을 내디뎠다.24세 때인 1949년에는 교하노씨인 노순애(77) 여사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선경직물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상반된 스타일의 ‘안주인’ 노순애 여사가 넉넉한 시골 인심을 느끼게 한다면, 최종현 회장의 부인인 고 박계희 여사는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풍긴다. 노 여사는 시동생과 시누이 등을 거느린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시집살이를 만만치 않게 했다. 차남 최신원 SKC 회장의 얘기다.“100마지기 농사 일에 집안 대소사를 다 챙기셨으니 고생이야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부친은 사업 때문에 공장에서 먹고 자며, 한달 가까이 집에 들어오시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 전형적인 한국 여인이었습니다.” 노 여사의 조용하고, 얌전한 태도에 반한 최 창업주의 누나 최양분(83) 여사는 그를 맏며느리감으로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고 박 여사는 박경식 전 해운공사 이사장의 넷째딸로 1953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 베네트칼리지를 거쳐, 칼라마주대학을 졸업했다. 최종현 회장과 만났을 때는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그는 내성적이고, 자기 의사를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강단있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태원에 가서 1만∼1만 5000원짜리 옷을 사 입을 정도로 검소하고, 깍쟁이였다. 고 박 여사가 모일간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내가 ‘이태원표’ 옷을 입고 있으면 모두들 몇십만원짜리로 아는데, 그래서 더욱 그런데 가서 사 입어도 불편한 게 없어요.” 최 회장도 부인을 깍쟁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병마와 씨름하던 그는 먼저 간 박 여사를 두고 “자기 성격 따라 깍쟁이처럼 죽었다.”고. 박 여사는 1997년 6월18일 최 회장의 폐암 수술 경과가 좋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두 ‘안주인’은 상반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도 적지 않았다. 말수가 적고, 나서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특히 가정 일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박 여사가 미술관에서 일하면서도 최 회장이 일찍 퇴근하면 아무리 중요한 미술관 행사를 주재하는 중이라도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은 “모친은 외출도 좋아하시지 않고, 조용한 성격”이라며 “두 분께서 같이 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골프였다.”고 말했다. ●최종현 회장의 연애론과 혼맥 고 최종현 회장의 연애론은 이렇다. 그가 죽음을 몇 달 앞두고 마지막으로 손질을 한 책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에서 “나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지켜본 바에 따라 나는 남녀간의 연애과정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연애는 ‘date→steady date→I love you’, 이렇게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처음에 호감을 가지고 ‘데이트’를 하다가 다른 사람과는 데이트를 하지 않는 ‘스테디 데이트’를 하게 되고, 그것이 발전되면 ‘아이 러브 유’가 되어 결혼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헤어진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너 없이는 못살아.’가 되는데 이것은 병이다.” 최 회장 본인의 경험 때문일까. 최씨가의 2세들은 정략이나 중매 결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특히 최종건 전 회장이 일찍 별세한 이후 최종현 전 회장이 사실상 10남매의 가장 역할을 자임했던 만큼 ‘큰집’ 조카들도 이같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신원 SKC 회장은 “숙부는 자식들 결혼과 관련해서 복잡한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면서 “예물 등도 가능한 한 안 주거나 받지 않는 주의였다.”고 설명했다. 장남인 최태원(45) SK㈜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44)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결혼했다. 부친과 똑같이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노 관장을 만나 연애했다. 차남인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의 부인은 영어교사였던 채희경씨의 맏딸 채서영(41) 서강대 영문과 교수다. 막내딸 최기원(41)씨는 당시 ㈜선경정보시스템 차장으로 근무하던 김준일(46)씨와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큰집’인 고 최종건 회장의 일가 혼맥도 학계부터 권력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지만 정략적인 냄새는 없어 보인다. 장남인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김이건 전 조달청장의 딸인 채헌(51)씨와 결혼했다. 장녀 정원(50)씨의 남편은 고학래 전 사상계 고문의 아들인 고광천(54)씨며, 차녀 혜원(48)씨는 박주의 전 금융인 아들인 박장석(50) SKC 사장과 결혼했다. 막내 아들 최창원(41) SK케미칼 부사장은 변호사 집안인 최유경(38)씨와 결혼했다. 4녀 예정(43)씨의 남편인 이동욱(43)씨가 최종건가(家)에서는 눈에 띈다. 현재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씨의 부친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최 창업주와 이후락 전 중정 부장은 서로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막역했던 사이였다. 양가가 둘의 결혼을 일찍이 약속을 했고, 결혼은 최 창업주 사후에 이뤄졌다. 고 최종건 회장이 각별하게 지냈던 재계 인물로는 김용산 전 극동건설 회장이었으며, 언론계에서는 고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방계로 넘어가면 장녀 최양분 여사는 한때 종건·종현 형제의 가정교사였던 고 표현구 전 서울대 농대 학장과 결혼했다. 표문수(52) 전 SK텔레콤 사장이 그의 아들이다.3녀 최종분(73) 여사는 고 이한용 신아포장 대표와 혼인했으며, 막내 사위인 정재현(46)씨는 현재 SK C&C 전무로 일하고 있다. 차녀 최양순(82) 여사는 고 여운창 경기개발 대표와 결혼했으며,4녀 최종순(69) 여사는 해군 중령 출신인 고 조제동씨에게 시집갔다. 3남 최종관(71) 전 SKC 고문은 장명순(71) 여사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3녀 경원(42)씨가 김연준 전 한양대 이사장 아들인 김종량(55) 한양대 총장에게 시집갔다. 또 4녀 은성(40)씨는 나웅배 전 부총리 아들인 나진호(42)씨와 짝을 이뤘다. 장녀 순원(47)씨는 존 캐리 퍼크너(47)씨와 국제 결혼했다. 장남인 최철원(36) 마이트엔메인 대표이사는 한숙진(34)씨와 인연을 맺었다. 4남 최종욱(66) 전 SKM 회장은 조효원 전 서울대 교수 딸인 조동옥(59)씨와 결혼했다. 조씨의 남동생이 조동성 서울대 교수다. 미혼인 장남 준원(30)씨는 현재 SK C&C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차녀 윤선(29)씨도 통신·방송장비 전문업체인 SK텔레시스에서 일하고 있다. ●섬유에서 석유…정보통신 SK그룹의 모기업인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은 1930년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만주 일대를 대상으로 직물을 수출하던 선만주단(鮮滿綢緞)과 일본의 교토(경도)직물(京都織物)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교토직물은 현물출자하고, 선만주단은 공장 부지를 비롯한 건물 공사비 등을 투자했다. 상호도 선만주단의 ‘선’자와 교토직물의 ‘경’자를 따서 ‘선경(鮮京)’이라고 지은 것이다. 고 최종건 회장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을 재건하기 위해 1953년 부친 몰래 빼낸 땅문서로 공장을 불하받는다. 이후 선경직물은 나일론 생산을 계기로 본격적인 섬유기업으로 탈바꿈한다. SK의 성장사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면 3단계로 나눠진다.1단계는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현 SK케미칼) 건설.2단계는 유공(현 SK㈜) 인수,3단계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다. 소프트웨어로 볼 때 최종현 회장의 경영 참여와 이순석과 손길승, 김항덕 등 1세대 전문경영인의 합류 등이다. 1980년은 유공 인수로 선경의 숙원 사업을 달성한 해이다. 고 최종건 회장이 울산을 오가며 국내 유일의 정유사였던 유공을 넘본 지 10년 만이다.‘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위해 매진한 결과, 돌아온 보상이었지만 당시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선경은 유공을 손에 넣자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선경이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구상한 것은 80년대 초반까지 올라간다. 당시 국내 어느 기업도 정보통신사업에 대해 꿈도 꾸지 않을 때, 고 최종현 회장은 미국 방문길에서 통신사업에 진출할 것을 결심하고, 미국 현지에 경영기획팀을 만든다. 이것이 훗날 한국이동통신 인수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는 밑거름이 됐다. golders@seoul.co.kr ■ 풍수지리 거부한 최씨 형제 “집터보다 내 기가 더 세니까 염려들 말어.” 국내 재벌가(家)가 최근 서울 한남동과 이태원동에 둥지를 트는 까닭은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곳은 남산을 베개삼아 한강으로 다리를 곧게 쭉 뻗어 복록과 자손복이 대대로 넘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아예 재벌가 ‘집성촌’으로 불린다. 이처럼 집터의 풍수지리를 꼼꼼히 따지는 재벌가에서 유독 이에 무관심한 집안이 있다.SK그룹 최씨가이다. 고 최종건 회장이 1968년 서울 삼청동에 새 집을 마련했을 때의 일이다. 일본 데이진 오야 사장의 부인이 풍수지리를 잘 안다면서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삼청동 자택의 지형 사진을 보내달라고 연락해왔다. 당시 최 회장과 오야 사장은 비즈니스를 떠나 개인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오야 사장은 당시 일본 정·재계의 거물로 최 회장의 호탕한 성격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오야 사장 부인은 매우 까다로운 성격 탓에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잠옷만 두 박스를 가지고 왔으며, 매일 밤 우유로 목욕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최 회장은 이들이 한국에 머물 때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을 본 오야 사장 부인은 “지형이 사나워 좋지 않다.”며 “다른 집으로 이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이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이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삼청동 자택은 화재로 가정부가 화상을 입어 숨진 데 이어 여름 장마철에 큰 물난리를 겪었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집터의 기가 세서 그런 것이니 이사가는 게 좋다고 자주 권했다. 그래도 최 회장은 “내 기가 집터보다 더 세니 염려말라.”고 했다고 한다. 고 최종현 회장도 집터와 관련된 고집은 ‘그 형에 그 동생’이었다. 암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1997년 11월. 풍수지리 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최 회장이 사는 서울 워커힐 호텔 내 빌라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광나루 쪽을 찌를 듯 달려드는 곳인 탓에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며 이사를 권했다. 그는 “그런 곳은 일시 머물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장기간 머물며 살기에는 문제가 많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최 전 회장이 풍수지리 연구를 위해 교수직을 내던진 최 전 교수의 소식을 듣고, 아무런 조건 없이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맺어졌다. 최 회장은 그러나 “집이란 어차피 일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며 “나는 이곳이 좋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집을 옮길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최 회장은 훗날 “형님처럼 기가 세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여기서 산 지가 1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겠느냐.”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golders@seoul.co.kr ■ 1세대 전문경영인 3인방 ‘그룹부흥 한몫’ “손길승 실장은 단순히 내가 부려먹는 사원이 아니라 나의 비즈니스 파트너, 동업자입니다.” 고 최종현 회장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서 조사 받을 때 일개 그룹 기획실장이 거액의 정치헌금을 다룰 수 있느냐는 검사의 추궁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손 회장을 경영 참모가 아닌 동반자로서 얼마나 믿고, 의지했던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정태수 한보 회장의 ‘머슴론’과 비교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SK그룹이 오늘날 재계 서열 4위의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뒤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순석 전 ㈜선경(현 SK네트웍스) 부회장과 손길승 전 SK 회장, 김항덕 고문 등 1세대 전문경영인 3인방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다. 이들의 역할은 이 전 부회장이 ㈜선경, 김 고문은 유공(현 SK㈜), 손 전 회장은 경영기획실로 나눠진다. 특히 손 전 회장은 20년간 기획실에서만 근무해 직업이 ‘기조실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59학번 서울대 상대 동기 출신으로 때로는 ‘맞수’로 경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부회장이 1995년 가장 먼저 SK를 떠났으며, 한때 ‘좌(左)길승, 우(右)항덕’으로 불렸던 전문경영인 체제도 결국 손 전 회장의 단독 체제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김 고문은 손 전 회장이 당시 그룹 회장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최종현 회장이 돌아가시고 난 뒤 그룹 회장을 누가 맡을 것인가에 대해 격론을 벌인 결과, 그룹 전반을 꿰찬 사람은 손길승 전 회장 밖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명분이나 이치에도 맞았고요. 그리고 나는 사심없이 회사를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했습니다.” 손 전 회장은 1998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야인으로 물러났던 김 고문을 회장대우 상임 고문으로 영입했다. 그는 회장 집무실 옆에 자신의 방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김 고문에게 제공했고, 경영 현안이 있을 때마다 그와 상의했다. 그러나 3인방 가운데 ‘SK호’에 가장 먼저 탑승한 사람은 이 전 부회장이다. 그는 1965년 4월 고 최종건 회장의 설득에 못이겨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수원 출신으로 최종욱 전 SKM 회장과는 초등학교 동기다. 김 고문은 일본 이토추상사에서 근무하다가 69년 선경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는 39세 때 대한석유공사의 수석 부사장에 올라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전 부회장의 강력한 권유로 65년 12월에 입사한 손 전 회장은 지난 40년간 고 최종현 회장의 평생 동지이자, 경영 전도사였으며, 일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 정도로 ‘지독한 일벌레’였다. 그는 대졸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그룹 회장에 오른 최초의 전문경영인인 동시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했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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