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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립아동보호소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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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 서울시가 운영한 아동강제수용시설…법원 “정부가 3억 7000만원 손해배상”

    과거 서울시가 운영한 아동강제수용시설…법원 “정부가 3억 7000만원 손해배상”

    진실화해위,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인정재판부 “국가·지자체 개입해 장기간 이뤄져”정부의 부랑아 정책으로 과거 서울시가 운영한 아동시설에 강제 수용당한 피해자 7명에게 정부가 총 3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부장 최누림)는 10일 서울시립아동보호소 피해자 7명이 국가와 서울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총 3억 7300만원과 이에 대한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사건은 서울시가 정부의 부랑아 정책에 따라 1958년 아동보호소를 설립하고, 보호자 동의 없이 아동을 강제 수용한 사건이다. 보호소에 수용된 아동들은 경기도 선감학원과 목포 감화원 등 다른 아동수용시설로 보내지기도 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4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로 인정하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보호자가 있거나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복장이 남루하거나 행동이 불량하거나 주소를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수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지난해 10월 이들을 대리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원고들 또는 그 가족이 부랑아 정책에 따라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강제 수용된 뒤 감금과 폭행 등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수용 기간 1년당 약 5000만원을 위자료 산정 기준으로 삼고, 수용 기간과 피해 정도 등을 고려해 원고별로 500만원에서 2억원까지 위자료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불법행위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장기간 이뤄진 중대한 인권침해 사안”이라며 “위법성 정도가 매우 중하고 유사한 인권침해행위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영화숙·재생원 생존협 “암매장 친구들 아직 야산에…조사·유해 발굴 중단 없어야”

    영화숙·재생원 생존협 “암매장 친구들 아직 야산에…조사·유해 발굴 중단 없어야”

    “친구들이 아직 이름 없는 야산에 묻혀 있어요. 그 친구들 춥고 어두운 곳에서 이제 밝은 곳으로 데리고 나와야죠.” 12일 손석주(63) 영화숙·재생원 생존자 협의회 대표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숙·재생원은 1962년부터 1971년 운영된 부산지역 최대 규모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이다. 진살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진화위) 조사 결과를 보면 영화숙은 18세 미만, 재생원은 18세 이상을 수용했다. 이곳에서 강제노역과 구타 등 가혹행위, 성폭력, 심지어 시신 암매장까지 자행됐다.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한 경찰의 불법·과잉단속이나 법적 근거 없이 운영한 영화숙·재생원 자체 단속반에 의해 끌려온 이들이었다. 손 대표는 9살 나이에 육성회비를 마련하려고 여름방학 때 부산에 신문을 팔러 왔다가 단속반에게 끌려가 영화숙에 감금됐다. 그는 그곳을 ‘공포 그 자체, 지옥’이라고 회상했다. 손 대표는 “어린애들이 개간지 매립, 돼지 축사 관리 같은 일을 하다가 이유도 모른 채 맞아도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밤이면 서너평 될까 한 방에 수십명 몰아넣고는 대소변통 하나 넣어주고 문을 잠갔다”면서 “그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니 합병증이 와 결국 죽는 사람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어 “단속반은 부모가 있는 강제로 입소시켰고, 심지어는 입소 즉시 이름을 바꿔버리고 가족이 찾아와도 “없는 사람”이라며 발뺌하기도 했다. 수용자 한 사람당 위탁 비용을 받으니, 그들에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니까 그랬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존자협의회가 가장 바라는 건 추가 조사와 유해 발굴이다. 지난 2월 진화위가 영화숙·재생원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하고 신청자 10명과 직권조사 대상자 171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영화숙·재생원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로 국가기관이 공식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생존자협의회는 피해자가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본다. 손 대표는 “영화숙과 재생원에 한 번에 많을 때는 1800명에서 2000명 정도가 수용됐다. 진화위의 진실규명 결정 새로운 피해자 30명이 우리 협의회를 찾아왔다. 영화숙·재생원이 수용자 급식비로 지자체에서 돈을 받은 기록 등이 있는데, 이를 토대로 다른 피해자가 얼마나 있는지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생존자협의회의 가장 큰 걱정은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할 유일한 기구인 진화위 활동 종료다. 진화위 활동 종료는 다음 달 26일로 임박한 상태다. 손 대표는 “진화위 1기는 2010년에 활동을 종료했고, 2기는 10년 뒤인 2020년에 출범했다. 다시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면 생존자들이 모두 죽고, 시신이 암매장된 곳은 개발돼 유해를 발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그래서 진화위 활동을 연장하거나 공백 없이 3기를 출범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협의회는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선감학원 등 전국 수용시설 피해자와 연대할 예정이다. 피해자의 힘을 한데 모아 전국 수용시설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상설기구 설치와 국가의 피해 복구 의무 등을 담은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손 대표는 “지난해 7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에서 국내 집단수용시설에서의 인권침해, 정부의 미진한 피해 구제 등에 관해 증언했고, 고문방지위는 ‘국내법 개정 등을 통해 효과적인 구제 및 배상을 보장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정부가 따를 마음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시대에 이 일들을 끝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 1073장 미공개 사진 들고 광주 찾은 ‘로숑과 쇼벨’ 두 실종 어린이

    1073장 미공개 사진 들고 광주 찾은 ‘로숑과 쇼벨’ 두 실종 어린이

    마음과 몸이 온통 아파오는 18일 밤 10시 KBS1 ‘다큐 인사이트’는 43년 전 광주를 다시 찾은 두 벽안의 사진기자를 만난다.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던 순간순간을 낱낱이 목격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던 프랑스인 두 사진기자 로숑과 쇼벨이 여태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사진 1073장을 돌아본다. KBS는 당시를 기록한 사진들 가운데 세계인의 눈길을 붙들어맨 사진, 하얀 상복의 어린아이 조천호 씨가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사진을 누가 어떻게 촬영했는지 의문점을 품었고, 3년에 걸친 추적 끝에 두 사람을 찾아냈다고 했다. 이 ‘5·18 꼬마 상주’ 사진을 독일에서 가져온 가톨릭 사제, 사진을 전시하고 보도했던 사람들, 그리고 사진에 찍힌 당사자조차 정작 누가, 어떻게 이 사진을 촬영했는지 알지 못했다. 해서 제작진은 1980년대 국내외 보도와 당시 활동한 사진기자들을 다양한 경로로 추적한 끝에 당시 종군기자로 광주에 급파됐던 프랑수아 로숑과 패트릭 쇼벨이 주인공들이란 것을 확인했다. 로숑은 “미국 잡지 뉴스위크의 의뢰를 받아 취재하러 갔다. 이른 아침 광주 교외에 도착했는데 군인들이 나를 막아섰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놀랍게도 쇼벨은 지금도 종군기자로 우크라이나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두 기자는 1073장의 5·18 미공개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고, 비로소 43년 만에 햇볕을 보게 됐다. 사진들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 항전 중 숨진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모습과 광주 YMCA 앞에서 한 청년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참혹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다. 윤상원 열사는 ‘님을 위한 행진곡’의 모티프를 제공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선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이 사진을 통해 YMCA에서의 사망자가 최초 확인됐다고 볼 수 있다. 시신이나 입관 상태의 사진만 있었는데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최초로 찍은, 학살 장면을 찍은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쇼벨이 촬영한 사진 중에는 당시 행방불명자로 처리된 10세 미만의 어린이들 모습도 담겨 있다. 43년 전 홀연히 사라진 어린이들의 숫자는 79명이나 된다. 이번 사진이 공개되면서 계엄군에 의해 어린이들이 강제 연행됐다는 주장이 처음 확인됐다. 그 가운데 당시 일곱 살 이창현 군의 사진도 있다. 1980년 5월 19일 양동 집을 나서 광주역으로 가다가 사라졌는데 같은 달 27일 옛 전남도청에서 연행되는 광주시민들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고, 연행자가 실린 버스에서 수습대책위 이종기 변호사가 데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창현이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쇼벨이 촬영했다.43주기 기념식이 열린 18일 오전 광주 북구 5·18 국립민주묘지 행방불명자 묘역에서 창현 군의 어머니 김말임(77) 씨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이선영(54) 씨도 가묘의 묘비를 바라보며 애통해 했다. 묘비 뒷면에는 ‘내 아들 창현이를 아버지 가슴에 묻는다’라고 새겨져 있는데 아버지 이귀복 씨는 지난해 세상을 등졌다. 다른 사진 속 총 든 계엄군이 데려 가는 어린 아이는 아홉살 때 광주에서 실종됐던 조영운씨로 확인됐다. 계엄군으로부터 가까스로 달아나 서울행 버스를 탔던 조 씨는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보내졌고 청소년기에는 부산보호소에서 생활했다. 5·18진상규명위원회는 행방불명 아동들이 보육시설에 입소, 입양되었을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조사에 착수했다. 쇼벨은 “그 사건을 지워버리려는 어떤 시도가 있더라도 당신들이 조사하고 내 사진들과 우리들의 증언이 있으니 광주에서 싸웠던 분들에 대한 기억은 잊혀질 수 없겠죠. 이것이 저희가 이 일을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두 기자는 43년 만에 다시 광주를 찾아 자신들이 기억하는 80년 5월의 광주와 그 모습이 담긴 미공개 사진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진실을 들려준다. 한편 KBS 광주방송총국은 지난 4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별관 1층에서 두 사진 작가의 미공개 사진들을 공개하는 사진전 ‘1980, 로숑과 쇼벨’을 개막해 오는 31일까지 개최한다.
  • “좋은 곳 보내주겠다”던 경찰, 14살 소년 지옥같은 형제원에 넘겨[형제복지원 피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좋은 곳 보내주겠다”던 경찰, 14살 소년 지옥같은 형제원에 넘겨[형제복지원 피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 새어머니 구박에 이모집 향하던 소년, 경찰 “좋은 데 보내준다”며 형제원 보내 배기열(56)씨는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형제복지원에 갇혀 있던 2년 동안 배씨는 비가 오는 날에도 온몸에 땀이 흐를 만큼 혹독한 기합을 받아야 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기억들은 평생토록 배씨를 괴롭혀 왔다. 1979년 여름, 14살 소년이던 배씨는 새어머니의 구박을 피해 집을 나와 대구에 사는 이모네 집으로 향했다. 기차에서 깜빡 잠이 든 그는 대구를 지나 부산까지 오게 됐다. 역 부근에서 배가 고파 울며 방황하던 그에게 다가온 건 경찰이었다. 경찰은 “좋은 곳에 보내주겠다”며 우는 배씨를 달랜 뒤 파출소로 데려갔고, 이내 완장을 찬 두 남성에게 배씨를 맡겼다. 경찰이 말한 ‘좋은 곳’은 지옥 같은 형제원이었다. 배씨는 그곳에서 매일같이 기합과 구타에 시달렸다. 기합의 종류도 원산폭격, 한강철교 등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았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 등 기독교 교리를 강제로 외우게 한 뒤 틀려도 구타가 이어졌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주면서도 남기면 몽둥이를 들었고, 축구화를 신은 발로 정강이를 찼다. 배씨는 “두들겨 맞지 않는 날이면 오히려 두려운 마음이 들어 잠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가게 될 때까지 2년 동안 형제원에 갇혀 있던 배씨는 그곳에서 끔찍한 일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어느날은 운동장에 있다 야전 들것에 실려 가는 사람을 봤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뒷산에서 일하다 맞아죽은 사람이라고 했다. 배씨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매맞아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도망가다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말했다. 아래는 박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만 다듬어 그대로 옮겼습니다.[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배기열 진술내용: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곳. 1979년 어느 무더운 여름 날에 잡혀간 저는 지옥에서 2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은 부산 형제복지원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붙잡혀 가게 된 상황을 설명하자면 어린 나이에 새어머니의 구박에 너무 힘들어 가출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대구 이모집에 가려고 기차를 타게 됐는데 잠깐 잠든 사이에 부산역에 내리게 됐습니다. 부산역 근처 초량동에서 배회하던 저는 배가 고파 울게 됐습니다. 지나가던 경찰 아저씨가 저는 붙잡고 “좋은 데 보내줄테니 울지 말고 따라오라”고 해서 파출소로 따라갔습니다. (경찰은) 잠시후 완장을 찬 어떤 아저씨 두명에게 (저를) 인계하면서 파란차(방계차)에 타라고 해서 올라 탔습니다. 그 차안에는 제 또래와 저보다 어린 사람들, 성인이 10여명 더 있었습니다. 차는 저희를 태우고 한참 덜컹거리며 갔습니다. 철길을 건너는 듯 했고, 언덕을 올라가더니만 큰 철문 앞에 잠시 서게 됐습니다. 차 안에 있던 저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은 함께 내려 왼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간단한 서류들을 적고 옆에 있던 운동장 앞에 줄지어 언덕으로 올라가서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빨개 벗고 형제원이 적힌 옷을 받았고 단체로(20명 정도씩) 수영장(야외)같은 곳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입고 각자 그곳에 있는 내무반으로 임시배치됐습니다. 며칠 후 3소대로 전방됐다가 다시 11소대로 전방가서 2년 동안 매일 반복되는 기합과 구타에 시달렸습니다. 두들겨 맞지 않은 날은 잠은 안 올만큼 매일 지옥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전원을 갈 때까지 지옥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매일같이 갖가지 기합과 구타에 시달려역겨운 음식주며 남기면 매질, 발길질까지 11소대에서 생활을 하면서 매도 엄청 많이 맞았고 기합도 매일 받았습니다. 기합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한강철교, 원산폭격, 어깨동무, 물구나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합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등을 암기하지 못하면 때리고 두 손 들고 기합을 주기도 했습니다. 국민교육헌장도 억지로 다 외우도록 했고 그 밖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합을 받았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는 식사 기도를 하게 했고 밥에서는 이상한 냄새도 나고 애벌레나 쥐똥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상한 생선 쪼가리에선 비릿내인지 역겨운 냄새가 심해서 정말 먹기 힘들었습니다. 음식을 남기면 축구화를 신은 발로 정강이를 차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운동장 뺑뺑이를 돌거나 고문과 다르지 않은 기합들을 받아야 했습니다. 내무반에서는 저녁에 소대장 구호 아래 중대장 점호를 받았습니다. 점호를 받다가 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중대장이 가고 나서 조장, 서무에게 빠따와 기합을 받아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혀올 지경입니다.어른아이 할 것없이 죽어 나가던 형제원“망가진 인생, 국가가 배상해야” 당시 우리 소대 친구들 중에는 귀꼴래, 반달, 뻥구 등의 별명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사건들이 있었고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야전 들것에 누가 실려가는 것을 두 번 목격한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뒷산에서 일하다가 맞아죽은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곳은 감옥보다도 더한 생지옥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일하다 죽고,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매맞아 죽고, 도망가다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열심히 사는 시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부랑자 취급을 한 부산시와 국가는 철저히 우리의 인생을 짓밟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후 그 지옥과 같았던 기억은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커다란 짐이 됐습니다.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비를 맞으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기합받던 일이 떠오릅니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국가는 송두리째 망가진 저희의 인생에 대한 배상을 꼭 해야합니다. 대한민국은 망가진 내 인생을 배상하라. 2021년 6월 20일 형제복지원 피해자 배기열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경제난 그늘 ‘버림받는 아이들’ 증가

    “아빠가 세 밤만 자면 데리러 온다고 했어.” “이 바보야,거짓말이야.넌 이제 아빠는 없어.” 이달 초 서울 강남구 수서동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맡겨진 이모양(6)이 같이 소꿉장난하던 친구들에게 말을 꺼내자 친구들은 금방 그 꿈을 산산히 부숴버린다. 그래도 이양은 “아빠가 엄마 찾으러 다녀온다고 했어.곧 올거야”라며 우긴다.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앞두고 모두가 들뜰 때 부모가 있어도 부모의얼굴을 볼 수 없는 아이들은 더욱 외롭다. 서울의 남쪽 끝자락 수서동 야산에 외따로 자리잡은 시립아동보호소는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다.석 달이 되도록 연락이 없으면 보육원으로 보낸다.올 들어 지난달까지 이곳을 거쳐 고아원으로 간 아이는 520여명.매일 2∼3명이 새로 들어온다.IMF 한파를 겪던 98년에는 700여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지난 10월 고모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온 강모양(11)은 14일 “아빠가 고모네 집에 데려다 줬는데 고모는 여기 있으면서 고등학교를 나오면 같이 살자고 했어요”라며 먼 미래에 짐짓 희망을 건다. 저녁식사를 앞두고 2층 놀이방에 모여 장난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집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하지만 아이들의 가슴에는 깊은 생채기가 남아 있다. 백화점에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던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엄마가 계단에서 굴러 다치면서 장애인이 되자 아빠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돈벌러 간 엄마를 찾으러 나선 아빠를 기다리다가 이웃 사람들의 손에끌려 이곳에 온 아이.모두 하루종일 엄마 아빠를 기다린다. 체념한 아이들은 깨끗한 옷과 따뜻한 방,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늘 허전하다.엄마랑목욕탕에 갔던 일,놀이동산에 갔던 일 등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고모양(7)은 “선생님한테 혼날 때면 엄마가 더 보고싶어진다”면서“엄마는 과자 사먹으라고 용돈도 줬는데…”라며 아득한 기억을 더듬는다. 형제나 자매도 있다. 지난 9월 말 한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이곳에온 금모군(6)은 항상 동생과 붙어다닌다.친구들이 괴롭히면 형제가함께 대든다.잠잘 때도 꼭 붙어 잔다. 이곳에 맡겨진 뒤 부모가 다시 데려간 아이는 10%도 되지 않는다.이곳의 아이들은 엄연히 친권자가 있으므로 입양될 수도 없다.부모가데려가지 않으면 영원히 ‘부모’를 가질 수 없다. 이정선(李正善)보호소장은 “경제가 어려워지면 버려지는 아이들이더 늘어난다”면서 “불가피한 사정으로 아이를 시설에 맡겼더라도자주 찾아와 버림받지 않았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심성이 삐뚤어지지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송하기자 song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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