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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스티유 감옥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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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려한 불꽃 두른 파리 에펠탑

    화려한 불꽃 두른 파리 에펠탑

    프랑스혁명 기념일인 ‘바스티유 데이’를 하루 앞둔 13일(현지시간) 화려한 불꽃과 드론들이 파리 에펠탑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 최대 국경일인 바스티유 데이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파리 AP 뉴시스
  • 피와 깃발 그리고 자유 [으른들의 미술사]

    피와 깃발 그리고 자유 [으른들의 미술사]

    매년 7월 14일, 프랑스는 바스티유 감옥 함락을 기념하며 자유·평등·우애의 정신을 기린다. 억압의 상징이 무너진 이날은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자 민중 주권의 탄생을 알린 역사적 순간이다. 그러나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불멸의 걸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회상하는 그림이 아니다. 이 작품은 1830년 7월 혁명의 이상이 흔들리고 다시금 자유를 향한 열망이 불타오르던 격동의 시대를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다. 다시 일으킨 혁명: 미완의 이상을 향한 행진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왕정복고는 계속됐고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통치 아래 민중의 불만은 깊어만 갔다. 특히 샤를 10세의 언론 탄압과 의회 해산 시도는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게 했다. 파리 시민과 노동자, 학생들이 거리로 다시 뛰쳐나와 봉기했다. 격렬한 시가전 끝에 샤를 10세는 퇴위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1830년 7월 혁명은 민중이 스스로 왕정을 폐위하고 입헌군주제를 재수립하며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온몸으로 증명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혁명의 심장, 자유의 여신들라크루아의 캔버스 중앙에는 삼색기를 높이 치켜든 자유의 여신이 압도적 존재감으로 전장을 가로지른다. 그녀의 머리에 얹힌 프리기아 모자는 고대 로마의 해방 노예가 쓰던 것으로, 자유 시민의 숭고한 상징이다. 그러나 여신은 고전 조각처럼 완벽하게 이상화된 존재가 아니다. 맨발로 피와 흙으로 얼룩진 전장을 누비며 한 손에는 삼색기를, 다른 손에는 머스킷 총을 쥔 그녀의 모습은 자유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 흘려 쟁취해야 할 치열한 투쟁의 결과임을 웅변한다. 시쳇더미 속에서 피어난 민중의 힘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 뒤를 따르는 민중을 영웅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중절모를 쓴 부르주아, 칼을 든 노동자, 맨발의 부랑자, 쓰러진 병사와 소년까지. 그들은 계급과 신분을 초월해 자유를 향한 열망으로 하나 된 민중의 얼굴이다. 7월 혁명은 바로 이들의 연대와 협력으로 완성됐다. 혁명의 과정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며 피로 얼룩져 있지만, 들라크루아는 그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강렬한 생명력을 포착했다. 그는 혁명을 미화하지 않고 그 본연의 위험하고도 치열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민중이 비로소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는 숭고한 순간을 담아냈다. 이 작품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서 민중의 끓어오르는 힘과 자율성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기록이다. 민중의 함성, 꺼지지 않는 자유의 불꽃이 장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은 아마도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자들의 노래가’일 것이다.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웅장한 다짐이 그림 속 행렬에서 울려 퍼지는 듯하다. 들라크루아는 시쳇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의 숭고한 의미를 포착해 200여년 전 프랑스 국민이 지켜낸 자유가 오늘날 우리가 수호하는 민주주의에 얼마나 값지고 위대한 영감이 됐는지 일깨워준다. 오늘날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수 있다. 당신에게 자유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 ‘휴전국가’ 한국, 이러다 진짜 모병제?…한반도 안보 미래는 [FM리포트]

    ‘휴전국가’ 한국, 이러다 진짜 모병제?…한반도 안보 미래는 [FM리포트]

    대선 앞두고 달아오르는 모병제 공약 6·3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모병제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한반도의 안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주목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모병제를 도입하고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과 핵무기까지 갖춘 북한의 위협이 거센 상황에서 모병제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27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번 대선 과정에서 여러 후보가 모병제를 공약으로 꺼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모든 후보가, 국민의힘에서는 일부 후보가 모병제 추진을 주창하고 있다. 민주당 유력 대권 주자인 이재명 후보는 병역 대상자들이 단기 징집병(복무 10개월)과 장기 모병(전투부사관, 군무원 등 복무 36개월) 중에 고를 수 있는 ‘선택적 모병제’ 도입을 구상하고 있다. 징병제를 유지하되 일정 조건을 갖추면 군 복무 대신 지원병으로 전환하거나 다른 형태의 복무를 선택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7일 대전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해 “수십만의 청년들을 병영 안에서 과거처럼 단순 반복적인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 보다 그 시간에 복합 무기 체계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익히거나 연구개발에 참여하고 전역한 후에도 그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필요하다”며 모병제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김경수 후보는 ‘징·모병 혼합제’를 제안했다. 병력을 35만명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감축하고 부족한 병력은 모병으로 충원하자는 내용이다. 김동연 후보는 2035년까지 단계적으로 모병제로 완전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세 사람 모두 온전히 현역 복무를 한 사람이 없어 ‘군대를 제대로 아느냐’는 비판이 따른다. 이재명 후보와 김경수 후보는 병역 면제, 김동연 후보는 보충역(방위) 출신이다. 국민의힘에서는 보충역 출신의 홍준표 후보가 지난 9일 “모병제를 대폭 확대해 남녀 전문병사를 대폭 증원함으로써 징병제의 부담을 줄이고 군 가산점제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 대위 출신의 안철수 후보는 사병 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전문부사관을 군 병력의 절반까지 늘리는 내용의 ‘준모병제’를 공약했다.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한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여군이 모병제를 통해 장교·부사관으로만 복무가 가능한 것을 사병으로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반면 국민의힘 한동훈·김문수 후보는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공군 대위 출신의 한동훈 후보는 “이재명 대표가 군대를 안 다녀와서 그런지 역시 군에 대해 잘 모르는 게 틀림없다”며 선택적 모병제를 반대했다. 그는 “남북이 대치하는 현실에서 모병제는 우리의 선택지 밖이다. 북한 지상군은 우리 3배 규모”라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모병제에 난색을 보인 김문수 후보는 남녀 구분 없는 군가산점제 부활과 여성 전문군인 확대를 공약했다. 군 면제자인 그는 “성별의 구분 없이 모든 병역이행자에게 군 가산점을 부여해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공정한 보상을 받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병역 제도 전환, 사회적 파급력 큰 문제 젊은 청년들이 강제로 군대에 복무하는 현대적 의미의 징병제는 프랑스혁명 직후 수립된 제1공화국으로 거슬러간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혁명은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워 처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혁명의 기운이 번져오는 것을 경계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을 결성하고 국경을 넘으면서 전쟁이 발발했고 의용군으로 버텼던 프랑스 혁명정부는 18~25세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군인들이 100만명 넘게 모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의 지휘하에 프랑스군이 유럽을 호령하면서 각국이 경쟁적으로 징병제를 도입했다.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은 대표적인 징병제 국가다. 대한민국 남성들은 헌법과 병역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복무 기간도 최소 1년 6개월 이상으로 북한(남성 기준 8년)과 이스라엘(2년 8개월) 정도를 제외하면 어지간한 나라보다 길다. 징병제를 유지하다 보니 과거 유승준의 사례나 최근 BTS 멤버들 사례처럼 군 복무 문제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기도 한다. 병역의 의무를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얻은 유승준은 여전히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처지고, BTS 멤버들은 당당히 현역 복무를 선택함으로써 영원한 ‘까방권’(까임 방지권)을 얻었다. 부유층이나 고위층 자제의 복무 문제는 사회적 관심사가 되기도 한다. 열거할 수 없이 많은 부유층·고위층 자제가 면제를 받아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이처럼 민감한 소재인 병역이 일부 후보의 공약대로 모병제로 바뀌면 군 복무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과 파급력이 지금과는 현격히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병역제도의 변화는 ‘나라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포함해 정치, 경제, 산업, 사회,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모병제의 장점으로는 개인의 자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고 군대를 둘러싼 젠더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병장 월급 200만원 시대가 되면서 인건비가 많이 상승했는데 징병제를 유지하며 드는 인건비를 직업 군인의 대대적인 처우 개선에 쓸 수도 있다. 전문 군인들 위주로 군대가 구성되면 구타나 가혹 행위 같은 부조리도 줄어들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사례에서 보듯 과거와 같은 육탄전보다는 첨단 기술을 탑재한 무기 운용이 더 중요해진 만큼 유·무인 복합체계로 빠르게 전환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굳이 징병제를 유지해 사람 위주의 무거운 조직으로 두지 말고 무기체계 개발에 집중 투자하고 전문 인력을 제대로 양성해 효율적인 군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누가 군대 가겠나” 비판도…포퓰리즘 자제해야 그러나 모병제로 전환하면 인구절벽 시대에 안 그래도 급감하는 병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안보는 외주가 불가능한 영역인데다 모병제로 전환하면 다시 징병제로 되돌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동훈 후보는 지난 25일 이뤄진 홍준표 후보와의 1대1 맞수 토론회에서 “모병제를 섣불리 도입했을 경우에는 없는 집에서만 군대 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유럽의 경우도 제국주의 팽창기와 냉전 시대를 지나 모병제로 전환했지만 2010년대 들어 리투아니아, 스웨덴 등이 재도입하는 등 징병제가 부활하는 추세다. 독일, 영국, 루마니아, 체코 등도 징병제 부활을 검토하고 있다. 징병제 국가인 대만은 2018년부터 복무 기간을 4개월로 줄였다가 2024년부터 다시 1년으로 늘렸다. 국내 상황을 보면 모병제 전환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북한군이 120만명 수준으로 알려진 가운데 한국은 약 50만명 규모로 병력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2020년에 출생아 수가 처음으로 20만명대로 내려앉는 등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당장 있는 자원들도 군대를 빠져나가는 실정이다. 유용원 국민의힘 의원이 최근 국방부에서 제출받은 ‘최근 5년 1분기 육군 부사관 희망전역 및 휴직 현황’에 따르면 정년이 남았음에도 전역을 신청한 부사관 수는 2021년 1분기 315명에서 2025년 1분기 668명으로 증가했다. 휴직 신청자도 2021년 1분기 527명에서 올해 1분기 1276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반면 같은 시기 부사관과 임기제부사관 임용자는 감소하는 추세다. 신규 부사관 임용은 2021년 1분기 2156명에서 올해 1분기 749명, 임기제부사관 신규 임용은 2021년 1분기 1493명에서 올해 1분기 523명으로 감소했다. 직업군인 모집과 유지도 어려운 마당에 모병제로 전환하면 군대의 붕괴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군 관계자는 “모병제 선택하라면 누가 10개월 병사 두고 36개월 부사관하겠느냐”며 이재명 후보의 ‘선택적 모병제’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전 의원도 지난 25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선택적 모병제가) 성공하려면 엄청난 자원이 투입돼야 된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한 의원도 “우리도 공약이 정해진 건 아니라 두고 봐야 하지만 민주당이 내놓는 군대 관련 공약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본다”면서 “국민들도 우리 안보 현실을 감안했을 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훨씬 많을 것이고 당장 표를 위해 현실성 떨어지는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태도라고 본다”고 비판했다. 모병제 논의가 평소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선거 때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표가 되는 소재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의 사례에서 보듯 군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는 비극을 겪을 수 있다. 정치권이 단순히 표만 노리고 정쟁의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상과 한반도 안보 환경에 맞춰 깊이 고민하고 필요한 논의와 정책을 추진해갈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FM리포트’는 우리 군이 지켜야 할 규범(Field Manual), 우리 군이 나아갈 미래(Future of Military)에 대해 씁니다. 잘못을 비판하고 나은 대안을 고민하며 정예 선진강군 육성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 [동영상] 바스티유 230주년 샹젤리제, 플라이보드 날고 최루 가스 날고

    [동영상] 바스티유 230주년 샹젤리제, 플라이보드 날고 최루 가스 날고

    14일(현지시간)은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230주년 기념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매년 기념일에 화려한 열병식이 열리는데 이날 파리 중심가 샹젤리제 거리에서 유럽의 자체적인 합동방어 의지를 과시하는 대대적인 군사 퍼레이드가 진행돼 4300명의 병력, 200여대의 차량·전차, 100여기의 항공기가 동원됐고, 유럽 지도자들이 대거 초청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등과 귀빈들 앞에서는 드론(무인항공기)과 미니 드론, 폭발물 탐지로봇, 드론 저격용 개인화기, 유인 소형비행체(플라이보드) 등 프랑스산 미래형 무기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특히 플라이보드는 전 제트스키 세계 챔피언인 프랭키 자파타가 직접 타고 시연해 가장 많은 눈길을 끌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샤를 미셸 차기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현 벨기에 총리),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 마르셀로 레벨로 데 수자 포르투갈 대통령 등이 참석했다. 당초 참석하기로 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데이비드 리딩턴 국무조정실장을 대신 보냈다. 영국과 독일, 스페인이 공군 항공기들을 대거 파견해 프랑스와의 굳건한 군사동맹을 과시했으며, 특히 올해로 부대 창설 30주년을 맞은 독불여단(BFA) 병력 5000명이 사열에 참여했다. 1989년 출범한 이 부대는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인 두 나라가 2차대전 이후 군사동맹으로 결속됨을 상징했다. 올해 열병식의 화두는 프랑스가 영국·독일·스페인·벨기에 등 유럽 9개국과 함께 추진하는 ‘유럽 개입 이니셔티브’(European Intervention Initiative·약칭 E2I)였다. 유럽연합(EU) 최대 군사강국인 프랑스가 주도하는 E2I는 미국이 이끄는 유럽안보의 근간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관계없이 유럽의 군사력을 하나로 묶어 안보 위기에 대처한다는 ‘유럽 신속대응군’ 구상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혁명기념일 기념 메시지에서 “2차대전 종전 후 유럽이 지금만큼 중요했던 적은 없다”면서 E2I의 목적은 “유럽의 공동대응능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우리의 안보와 국방은 유럽을 통해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열병식을 전후로 ‘노란 조끼’ 시위가 연이어 150명이 넘게 경찰에 연행됐고, 최루가스가 난무했다. 오전에 마크롱 대통령이 프랑수아 르쿠앵트르 합참의장과 함께 샹젤리제 대로에서 군부대를 사열하기 시작할 때 “마크롱 퇴진” 등의 구호와 야유가 터져 나왔다. 경찰은 ‘노란 조끼’ 연쇄 시위의 리더인 제롬 로드리그와 막심 니콜을 불법집회 조직 혐의로 체포했다가 조사 후 석방했고, 또다른 지도자 에릭 드루에도 연행했다. 열병식이 끝나고 오후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시위대가 반(反) 마크롱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대치 끝에 최루탄을 쏘며 강제해산에 나섰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아이언마스크, 쌍둥이란 이유로 평생 마스크 쓴 채 독방행 ‘충격’

    아이언마스크, 쌍둥이란 이유로 평생 마스크 쓴 채 독방행 ‘충격’

    영화 ‘아이언마스크’가 화제다. 2일 오후 1시 EBS1에서 일요시네마 ‘아이언 마스크(The Man In The Iron Mask)’가 방송됐다. 해당 영화는 알렉산더 뒤마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원작 소설과 결말이 다르다. 앞서 MBC ‘놀라운 TV 서프라이즈’에서는 17세기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 감옥 ‘바스티유’에서 독방에 격리 수용됐던 ‘마스크맨’의 이야기가 소개된 바 있다. 그는 수용소에서 항상 검정색 벨벳 마스크를 쓴 사람은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잘 때조차도 가면을 벗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마스크맨’이라고 불렀다. ‘마스크맨’은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마스크를 쓴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평생을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그가 바스티유 감옥으로 온지 5년 만에 사망하자 루이14세는 그가 사용했던 모든 것을 다 태우고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훼손 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1957년 영국의 역사가 휴로스 윌리엄슨은 마스크 맨에 대해 당시 루이 14세의 친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루이 13세가 사실은 루이 14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것. 역사 속에서 루이 13세는 병약해 자식을 없는 상태였고 이에 프랑스 왕실에서는 은밀히 대리부를 두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루이 14세 라는 것.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마스크맨이 루이 14세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프랑스 왕가의 속설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내려왔는데 1638년 쌍둥이를 출산한 안도트리슈 왕비가 왕가의 속설을 의식해 모든 사실을 극비에 부친 뒤 쌍둥이 동생의 존재를 숨겨 마스크맨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처럼 마스크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수백년 동 안 이어져왔고 1847년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소설 ‘철가면’으로 히트를 기록했으며 1998년에는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 주연의 ‘아이언마스크’가 제작됐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동영상] 마리 앙투아네트 침실 등 3년 리노베이션 끝에 재개관

    [동영상] 마리 앙투아네트 침실 등 3년 리노베이션 끝에 재개관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 안에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들이 3년의 리노베이션 공사를 마치고 다시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나중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조제파 잔은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열다섯번째 딸)로 빈의 쇤부른 궁전에서 태어났다. 막내딸로 사랑과 귀여움을 잔뜩 받는 아이였다고 묘사한 기록도 있고, 어릴 적부터 사치와 방탕 외에는 배운 것이 없었던 아이였다는 부정적 묘사도 남아 있다. 공부나 외국어에 관심이 없어 여제를 걱정시키기도 했으나 춤과 음악에 소질이 있는 데다 움직이는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감탄을 자아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시시각각 변하는 유럽의 정세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결혼으로 결속을 다지려 했고 14세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살 위 프랑스 왕세자 루이와 결혼을 하게 돼 베르사유 궁전으로 왔다. 1770년이었다. 총애하는 궁정 신하, 귀족들과 사치하고 노는 데 열심이어서 막대한 궁정비 지출의 원흉으로 지목됐고 1789년 7월 14일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을 때 군대를 데리고 메스로 피신하라고 루이를 설득하는가 하면 그를 부추겨 국민의회가 봉건제도 철폐와 왕의 권력 제한을 위해 시도하던 일들을 저지시켜 혁명 세력의 원성을 샀다. 파리에서 혁명세력의 인질로 붙잡혀 있다 탈출하려던 부부 모두 체포돼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이번에 리노베이션을 마친 방들은 접견실과 침실인데 1789년 10월 6일 아침 황급히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옮긴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내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프랑스식 궁정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접견실 뒤에는 비밀 출입문을 만들어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거기 숨어 지내며 궁정 탈출을 꿈꿨던 것으로 유명하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김상조 “4대 재벌 개혁, 불태우지 않고 적절히 개조”

    김상조 “4대 재벌 개혁, 불태우지 않고 적절히 개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4대 재벌 개혁에 대해 “불태우지 않고 적절히 개조(리노베이션)하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문제점과 해결책은 이미 각 기업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만큼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겨 달라”고 촉구했다. 지난 14일 정부세종청사 인근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송년회에서다.김 위원장은 인사말에 앞서 자신의 통화연결음을 들려줬다. 팝 가수 알 스튜어트의 ‘베르사유의 궁전’이란 노래였다. 김 위원장은 “바스티유 감옥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왕들은 모두 떠나고 그들의 신하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으로 그들의 저택을 불태웠다”는 노래의 첫 소절을 스스로 읊었다. 이어 “혁명의 방법으로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의미를 부여한 뒤 “우리 사회를 바꾸고 공정한 경제를 만들고 싶지만 그 방법은 혁명이 아닌 진화여야 한다”고 강조했다.‘재벌 저격수’라는 별명이 있는 김 위원장은 지난 15년간 경제개혁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누구보다 급진적인 변화를 갈망했지만 행정가로 변신한 이후 현실의 한계를 인식한 것이다. 그의 복잡한 속내는 건배사에서 엿보였다. “지속가능하고 예측 가능하게 세상을 조금씩 후퇴하지 않게 누적적으로 변화시키고 싶다”며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뜻의 ‘우보천리’로 건배를 제의했다. 김 위원장은 “취임 후 6개월 이내에 개혁을 완수해야 한다는 발상 때문에 지난 30년간 개혁이 실패했다”면서 “절대로 그 길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6월 취임 이후 줄곧 기업을 향해 자발적인 변화를 주문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시’를 내릴 필요는 없다는 게 김 위원장의 일관된 생각이다. 그는 “각 그룹의 현안과 구조적 문제, 해결 방법은 그 그룹이 제일 잘 안다”면서 “실행 결정을 빨리 내리고 변화의 시작을 보여 달라는 것이 불확실한 메시지인가”라며 반문했다. 김 위원장은 국내 최대 대기업집단인 삼성을 예로 들었다. 최근 공정위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적용했던 순환출자 가이드라인 개정에 나선 것과 관련, 김 위원장은 “가이드라인을 바꾼다고 해서 삼성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면서 “핵심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의 관계”라고 말했다. 그는 “공정거래법을 바꿔서 금산(금융·산업) 분리를 사전에 강하게 규제하는 대신 금융감독 통합시스템으로 관리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삼성전자의 지분을 6.6%와 1.2%씩 소유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인 금융그룹 통합감독 시스템이 내년부터 도입되면 계열사 간 출자금액은 금융회사의 적격자본으로 인정받지 못해 삼성생명의 자본건전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또 삼성전자는 지난 4월 지주사 전환 포기를 선언하면서 40조원어치의 자사주를 내년까지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삼성생명·화재의 삼성전자 지분율이 10%를 넘어 금산법에 저촉될 수 있다. 이래저래 금산(금융과 산업) 분리 문제를 우선순위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대차그룹의 숙제는 계열사인 현대모비스가 현대차 지분(20.78%)을 보유하고, 현대차는 기아차 지분(33.88%)을, 기아차는 다시 현대모비스 지분(16.88%)을 소유한 순환출자 구조를 푸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앞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대차는 사업구조나 지배구조 변화를 위한 어떤 결정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며 경고한 바 있다. 지주사 전환을 일찌감치 마무리한 SK와 LG라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SK는 지분율이 0.3%에 불과한 총수일가가 그룹 경영을 좌우하고 있다. SK텔레콤 등을 중간지주사로 전환하는 과제도 풀어야 한다. LG는 4세 경영 승계구도가 불확실한 게 약점이다. 김 위원장은 “재벌 개혁이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이라면 하도급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본령”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한국경제가 저성장·양극화를 겪는 이유는 운동장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낙수효과와 소득주도성장이 선순환하는 평평한 운동장을 만드는 것이 공정위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세종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자폭서 ‘트럭 테러’ 진화… 수백만 찾는 휴양지도… ‘표적’된 군중

    자폭서 ‘트럭 테러’ 진화… 수백만 찾는 휴양지도… ‘표적’된 군중

    공연장·축구장·공항 등 공공장소 아닌 경계 느슨한 해변·축제 불특정 다수 노려 니스, 유커 단체관광 기네스기록 세운 곳… 야수파 거장 마티스가 살았던 예술의 도시 伊 “지난 4월 휴양지 테러 계획 정보 입수” 일반 대중을 노린 ‘소프트 타깃’ 테러의 수법이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 테러 대상으로 미국과 유럽 등의 카페와 공연장, 축구장, 공항과 같은 대도시 다중이용시설을 노렸다면 최근에는 공휴일 해변이나 축제장, 휴양지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공격 수단도 무차별 총격이나 자살 폭탄 테러에서 특별히 훈련을 받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차량을 이용한 살상 등으로 점점 다양해지면서 과격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 테러는 세계 각국이 보안을 강화하고, 시민들의 경계심도 높아진 도심 주요시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계가 느슨한 장소와 때를 겨냥해 감행되고 있다. 테러 안전지대가 더이상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대혁명 기념일 공휴일인 14일(현지시간) 밤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니스에서 발생한 트럭 테러는 이 같은 경향을 잘 보여준다. 혁명기념일을 맞아 해변에서 축제를 즐기던 군중을 향해 테러범이 모는 대형 트럭이 덮쳐 최소 84명이 사망했다. 당시 현장에는 최소 1500명이 있었고, 사망자 가운데 어린이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프랑스 당국은 전했다. 니스는 남프랑스 리비에라 해변의 대표적 휴양지로 여름철이 되면 프랑스인뿐 아니라 유럽인과 외국인이 대거 찾아와 휴가를 즐기는 곳이다. 특히 이날은 불꽃놀이 등 휴일 축제로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여름밤을 즐기고 있었다. 전직 프랑스 정보요원인 클라우드 모니케는 이번 니스 테러에 대해서 현지 방송 프랑스앵포에 “장소와 날짜 모두 우연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이번 테러 현장인 해변도로 프롬나드 데 앙글레는 작년 5월 중국의 톈스그룹(天獅集團) 직원 6000여명이 단체여행을 즐겨 기네스 세계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관광명소다. 야수파 거장 앙리 마티스(1869~1954)가 살았던 예술의 도시 니스에는 최근 무슬림 이주민이 급증하면서 반난민 감정도 적잖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알카에다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무장 괴한들이 아프리카 휴양지 코트디부아르 그랑바상의 해변과 리조트를 공격, 휴가를 즐기던 유럽인을 포함해 14명이 숨졌다. 1월 부르키나파소 와가두구의 호텔과 카페에서도 총격과 인질극이 벌어졌다. 해변가 휴양지 테러는 예고돼 있었다. 이탈리아 정보 당국은 지난 4월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올여름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 등 남유럽 지중해 휴양지에서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 등이 전한 바 있다. 독일 당국자도 “IS가 저지르는 새로운 차원의 테러를 마주하게 될 수 있다”며 “휴가철 바닷가는 안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용어 클릭] 佛 최대 국경일 ‘바스티유의 날’은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는 ‘바스티유의 날’은 7월 14일로 프랑스 최대 국경기념일이다. 프랑스혁명기념일 또는 독립기념일로 불린다. 프랑스 국민에겐 한국의 광복절,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같은 의미를 갖는 국경일이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군중이 압제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날과 그 다음해인 1790년 7월 14일 국가화합의 날을 모두 기념한 것으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평등·박애를 기리는 날이다. 당시 파리 시민들은 붉은색 자코뱅 모자를 쓰고 자유·평등·박애를 뜻하는 삼색기를 들며 군대의 탄압에 맞섰다. 바스티유의 날은 1880년 공식 국경일로 제정됐으며 해마다 파리 개선문 앞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군 퍼레이드가 열린다. 프랑스 전역에서도 각종 파티와 축제, 불꽃놀이가 열려 이날을 기념한다. 에펠탑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에서 불꽃놀이 등을 볼 수 있어 외국 관광객도 많이 몰린다.
  • 프랑스 니스 트럭테러, 자유·평등·박애 기리는 ‘바스티유의 날’ 노려

    프랑스 니스 트럭테러, 자유·평등·박애 기리는 ‘바스티유의 날’ 노려

    14일(현지시간) 밤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니스에서 대형트럭 한 대가 군중을 덮쳐 최소 70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현재까지 공격의 배후를 자처하는 단체는 없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번 사건을 ‘테러’로 규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군중들이 모여있던 이날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는 프랑스 최대 국경일 ‘바스티유의 날’이었다. 이날 기념 행사 차원에서 열린 불꽃놀이 축제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번 테러로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바스티유의 날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과 1790년 7월 14일 국가 화합의 날을 모두 기념하며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되새기는 날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18세기말 프랑스가 잦은 전쟁 참전 등으로 경제 위기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가 추가 세금을 걷는 등 무능한 정치를 하자 성난 군중들이 형무소였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사건이다. 바스티유의 날 파리 개선문앞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군 퍼레이드가 진행되며, 프랑스 전역에서도 각종 파티와 축제, 불꽃놀이가 열려 이날을 기념한다. 또 화려한 열병식 등을 보기 위해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인파가 참여한다. 그러나 이날 테러 발생으로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머무르던 올랑드 대통령은 15일 새벽 긴급히 파리로 복귀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손성진 칼럼] 잃을 것밖에 없는 폭력시위

    [손성진 칼럼] 잃을 것밖에 없는 폭력시위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차후 수단으로 폭력을 쓰게 된다. 타일러도 안 되는 자식을 훈육하고자 매를 드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 정권의 독재, 그중에서도 ‘극악의 독재’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저항권을 행사할 때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일상적인 시위에서는 폭력이 허용되지 않지만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는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폭력시위 혹은 폭동에 의해 민중이 탄압받는 현실을 뒤집은 일이 있다. 프랑스 혁명이 그 하나다. 무기를 든 민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결국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혁명은 폭력을 썼지만 독재를 뒤엎는 결과를 얻었다. 이를 볼 때 저항권 행사에서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극악의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이 최후의 수단일 때만 가능하다. 극악과 최후라는 두 전제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극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1980년대까지의 군부 통치는 독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극악의 독재이며 따라서 그 시절의 폭력시위는 정당화할 수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폭력시위가 독재정권 시절에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소위 좌파정권 시절에도 쇠 파이프와 죽창을 쓰는 폭력시위가 자주 있었다. 폭력시위가 독재와는 무관하게 일상화되고 있는 게 문제다. 노동개악 중단, 재벌책임 강화, 쌀 수입 저지, 민생빈곤 해결…. 지난 14일의 광화문 시위대의 11개 요구를 보면 아무리 중요한 문제더라도 폭력을 정당화하기에는 부족하다. 더 중요한 저항에서도 비폭력 시위로 충분히 의사를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했다. 3·1운동은 폭력을 쓰지 않은 만세운동이었다. 4·19혁명은 비폭력 저항으로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주화 운동이다. ‘10·26’을 촉발한 부마사태도 폭력을 쓰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6월 항쟁도 ‘비폭력 평화노선’을 표방했다. “나의 깨끗한 마음은 대포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1915년 영국에 대항해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선언한 간디는 추종자들이 무기로 대항하자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국민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시민 불복종 운동도 그 하나다.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창한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폭력이 아닌 소극적 저항으로 간디와 여러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부른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폭력의 당위성은 인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낳았다. 일상적인 폭력시위가 정부의 노선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 더구나 정부는 폭력이 과격해질수록 제압력을 더 강화할 것이다. 효과의 측면에서도 폭력은 버려야 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위해를 가하는 테러와 폭력시위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파리의 테러는 비난하면서도 폭력시위는 두둔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동의할 수 없다. 같지는 않지만 테러와 폭력시위가 평화와 안전을 위해 모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 테러나 폭력이 최후의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선량한 시민으로서는 모두 목격하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다. 인류사에서 국가 간의 전쟁이 수없이 일어났지만 앞으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고 했듯이 폭력시위는 더욱 과격한 진압을 불러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시위대는 진정한 의사전달을 하기 어려울뿐더러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뿐이다. 폭력시위가 불가피하다고 할 국민은 그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이 정권, 정부가 아무리 잘못하는 것이 많아도 극악한 독재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할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 18세기 프랑스의 SNS ‘詩’… 그 입을 틀어막아라

    18세기 프랑스의 SNS ‘詩’… 그 입을 틀어막아라

    시인을 체포하라/로버트 단턴 지음/김지혜 옮김/문학과지성사/264쪽/1만 5000원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라 진평왕 때 ‘서동요’를 퍼뜨린 백제 무왕은 시와 노래의 위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역사 속 대표적인 인물이다. 설화에 따르면 무왕은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아이들에게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해 여론을 호도한다. 이윽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진평왕의 귀에까지 닿는다. 쫓겨난 선화 공주를 취하면서 무왕은 손쉽게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다.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는 죄목으로 공개 처형된 장성택도 소문의 희생양일 수 있다. ‘백두혈통’에 맞선 반역을 스스로 시인했다지만 그의 숙청 뒤에는 최고 권력자의 여인과 추문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따랐다.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세기 중엽의 파리 거리 한복판에서 뜬소문에 불과했던 시와 노래를 추적한다. 1749년 봄 파리의 치안총감에게 대대적인 체포 명령이 떨어지고 대학생, 교수, 하급 성직자 등 14명이 잇따라 바스티유 감옥에 잡혀 들어온다. 이른바 ‘14인 사건’이다. 경찰은 ‘모르파의 유배’라는 시의 제목 말고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다. 경찰은 매수된 첩자를 통해 프랑수아 보니라는 30대 의대생을 체포한다. 보니는 자신이 시를 쓰지 않았다며 시를 건넨 다른 사람을 지목한다. 생 니콜라 데샹 교구의 하급 성직자인 장 에두아르가 잡혀 오지만 역시 다른 이에게서 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성직자인 몽탕주, 뒤자스에 이어 법학도인 알레르, 법률 서기 주레, 철학도 뒤 쇼푸르도 바스티유로 끌려온다. 이 과정에서 ‘모르파의 유배’ 외에 왕을 검은 괴물에 빗댄 ‘검은 분노의 괴물’ ‘매춘부 사생아’ 등 모두 5편의 시가 왕의 분노를 자아낸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경찰은 불법적인 시 암송에 가담한 혐의로 밀고된 평범한 파리 시민들만 잡아들였을 뿐 시의 창작자는 끝내 밝히지 못했다. 수사의 칼날이 윗선이 아닌 대학생 같은 깃털에만 치우친 탓이다. 수사 과정은 역설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문 구어 세계의 의사소통망을 복원하는 기능을 했다. 바스티유에 남아 있는 경찰의 수사 기록은 문맹률이 절반을 넘던 시절 어떻게 여론이 형성됐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가 됐다. 당시 시구는 시민들의 입과 손을 거치며 첨삭됐고 이 과정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갖췄다. 집단 창작물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시가 회자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쉽게 짐작된다고 말한다. 화려한 정치 풍토를 지닌 베르사유의 궁전 문화는 유독 시를 사랑했고 왕족과 귀족, 왕의 애첩 등은 정적을 숙청하기 위해 시를 활용했다. 30여년간 정권을 잡았던 모르파 백작이 1749년 4월 실각하며 유배된 것도 루이 15세의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을 풍자시를 통해 쳐내려다 역풍을 맞았기 때문이다. 모르파는 궁정 생활과 관련된 시와 노래를 수집해 왕에게 보고했는데 이는 왕의 주변 여론을 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모르파 샹송집’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이 있다. 파리의 골목골목마다 회자되던 낯익은 풍자시 낭송에 루이 15세는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까. 시기가 문제였다. 모르파의 몰락으로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던 왕은 오히려 비난 여론이 들끓자 당황한다.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던 영국 왕실의 망명객 에두아르 왕자마저 추방되자 시민들은 ‘오늘날 이토록 비굴한 국민이여’란 시구를 따라 부르며 왕을 비난한다. 전비 마련을 위한 세금과 왕실의 성적 문란은 불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서 잠시, 작가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을 되돌아 보자. 전체주의 체제에서 유독 탄압받는 지식인의 모습이 담긴 책에는 오늘날 한반도는 물론 과거 프랑스의 모습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반역자들에게는 죄가 있다기보다 ‘건성건성 박수’ 같은 뻔한 죄목이 뒤집어씌워졌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18세기 프랑스의 시와 노래는 오늘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이렇게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은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은 없었다”

    “모든 혁명은 배반당한 혁명이다.” 1960년대 서구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인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 그는 지배계급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해야 할 모든 혁명이 숙명적으로 패배의 요인을 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모순이지만, 일면 시행착오를 통한 역사발전이란 긍정적 요소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혁명의 불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때 인기를 끌던 학부 교양과목인 ‘시민사회와 혁명’은 강단에서 썰물처럼 밀려났고, ‘철 지난 혁명’의 기억은 겨울바다처럼 쓸쓸한 추억으로 남았다. ‘원조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원죄는 아닐까.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우리 아버지 세대가 숨 가쁘게 달음박질쳤던 4·19혁명과 그 아들딸들이 계승했던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은 정녕 사라졌는가”란 물음의 화두를 던진다. 역사학계에선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탈취 사건으로 불거진 200년도 더 된 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엇갈린다. 혁명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시선과 감춰진 이면을 짚어낸 수정주의가 충돌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더욱 풍부한 역사적 해석을 낳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저자는 수정주의적 해석에 힘을 싣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은 없다”고 단언한다. 프랑스 혁명은 지적 모험가들이 탐험을 멈추지 말아야 할 미지의 세계라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는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은 식민지 유색 인종과 여성을 배반했다.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현 아이티공화국)에서 18세기 말 해방운동이 일어났을 때 혁명정부는 노예 해방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시한다. 1791년 봉기 때 처형된 흑인 노예의 소지품에선 인권선언문이 발견됐다. 그만큼 카리브해의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와 평등은 신분제 철폐로 이해됐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달랐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프랑스 혁명의 이데올로그였던 E J 시에예스는 “흑인과 원숭이를 교배시켜 노동전문계급을 만들어 프랑스 노동계층을 노동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사에서 아이티 혁명과 흑인 노예제가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은폐된 이유다. 흑인 반란군의 힘이 세지고 백인 농장주들이 영국, 스페인과 동맹을 맺자 혁명정부는 아이티에서 노예 해방과 노예제 폐지를 조건부로 허락한다. 인권선언의 결과라기보다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들의 영역도 가사, 육아와 같은 영역으로 축소된다. 혁명 이후 나폴레옹 1세가 등장하자 여성 관련 법률은 약화되거나 폐지됐다 나폴레옹 민법은 가장이 원하면 아내와 자녀를 교정원에 감금할 수 있도록 했다. ‘성격 차이에 의한 이혼’이 불허되고, 아내가 간음할 때 남편이 살해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졌다. 초기에 당당하고 주체적인 대접을 받던 프랑스 여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반동분자로 전락했다. 참정권도 주변국보다 30여년 늦은 1940년대에야 얻을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오히려 여성운동을 억압하는 못된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혁명이 외친 자유·평등·우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1789~1795년 세 차례에 걸쳐 발표된 인권선언은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를 말하지 않았다. 보편주의는 남성, 백인, 유산계층에만 적용됐다. 저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은 세계 인권 발전에 오히려 나쁜 기억과 유산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물음 하나. 지난해 대선을 전후해 국내에서 60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 ‘레 미제라블’의 배경은 과연 프랑스 혁명일까. 엄밀히 따지면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 혁명이 아니다. 영화 도입부에 장발장이 석방되던 해는 왕정복고기(1814~1848)의 초입인 1815년이다. 영화 후반부의 파리 시가전도 1832년의 일이다. 저자는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민중은 프랑스 대혁명의 후손들이라고 말한다. 1789년 혁명과 1848년 혁명 사이에 낀 소위 ‘1820년 세대’라는 것이다. 이들은 1792~1803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원조혁명을 마중물 삼아 부르봉 왕가 타도를 사명으로 삼았다. 저자는 나폴레옹 키드인 ‘1820년 세대’와 박정희 키드인 우리나라의 ‘386세대’를 비교한다. 독재타도에 젊음을 바쳤지만 공통점은 딱 여기까지라고 했다. 박제화된 혁명의 기억, 혁명의 퇴보가 ‘386세대’의 특징이란 이야기다. 혁명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과거완료형 사건이 아니라 장기지속적이며 진행형인 미완의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주말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OBS 일요일 밤 11시 25분) 1940년대 일제 치하 경성에서는 민족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이름도 개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본 군부는 신라 1000년의 상징이라 불리던 석굴암 본존불상의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이마에 박혀 있던 동방의 빛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마침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총감은 수년간 집요하게 노력한 끝에 동방의 빛을 얻게 되고 승리를 자축하는 동시에 하루빨리 본국인 일본으로 이송하기 위한 동방의 빛 환송회를 연다. 한편 전도유망한 재력가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천의 얼굴을 가진 경성 최고의 사기꾼 봉구는 동방의 빛을 차지하기 위해 내숭 100단의 경성 제일 재즈 가수 춘자에게 동방의 빛 환송회 자리에 동행하자고 제안한다. ●혁명가의 연인(EBS 토요일 밤 11시) 사비니엥 드 케르파덱 백작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어느 해안 마을에 살고 있다. 그는 부인과 사별한 뒤 친아들 오렐, 대녀 셀린, 그리고 사제 수업을 받던 중 도망쳐 나온 소년 타르캥을 키우면서 하늘을 나는 기구 발명에 몰두한다. 1789년 파리에서는 왕실 감옥 바스티유가 시민들에게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백작은 이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다. 4년 후인 1793년 국왕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프랑스 방방곡곡에서 공화정파와 왕정파가 내전을 벌인다. 공화정 관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타르캥은 혁명공화군에 동참할 병사들을 모으고 셀린에게는 혁명 이념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임무를 맡긴다. 얼마 후 미국에서 귀국한 오렐은 셀린의 마음이 타르캥에게 향해 있음을 알게 된다. ●위대한 유산(EBS 일요일 오후 2시 30분) 소년 핍은 누나와 대장장이인 매형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핍은 부모님의 무덤가에서 탈출한 죄수 매그위치를 만나 음식과 줄을 가져다준다. 죄수는 줄로 쇠사슬을 끊고 도주하려 하지만 뒤따라온 군인들에게 붙잡힌다. 얼마 뒤 핍은 실연의 슬픔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살아가는 늙은 노처녀 해비셤의 저택에서 지내는 대가로 보수를 받게 된다. 음침한 대저택에서 핍은 아름답지만 차가운 소녀 에스텔라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에스텔라가 숙녀 수업을 받기 위해 파리로 떠나고 핍은 매형의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둘은 이별한다. 세월이 흘러 핍이 어엿한 청년이 되었을 때 해비셤의 법정 관리인인 재거스가 찾아와 핍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누가 남겼는지도 모르는 유산을 상속받은 핍은 런던으로 가서 도시 생활에 적응하며 점차 어엿한 신사가 되어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이가 찾아와 유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유산을 상속한 사람이라고 밝히는데….
  • 다시 주목받는 中 인권운동가들

    다시 주목받는 中 인권운동가들

    죽음을 무릅쓰고 시각장애인 인권변호사인 천광청(陳光誠)의 기적적인 탈출을 도와준 중국 인권운동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우편배달원으로 가장해 공안(경찰)을 따돌리고 산둥(山東)성 린이(臨沂)시 이난(沂南)현 둥스구(東師古)촌 집에 있던 천을 베이징까지 차로 데려와 ‘배트걸’이란 별명을 얻은 허페이룽(何培蓉)은 지난 1일 난징(南京)의 자택에 연금 중이라고 홍콩 명보가 2일 보도했다. 영어교사인 허는 수차례 둥스구촌의 천을 찾아갔다가 협박·구타·감금된 바 있는 인권운동가이다. 탈출을 도와준 뒤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네티즌들은 그녀의 아이디 ‘펄 허’(Pearl her)에서 따온 ‘진주를 돌려달라’(還我珍珠)를 구호로 석방촉구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웨이보(微博·트위터)를 통해 장위(姜瑜) 외교부 대변인을 향해 “당신은 천이 자유의 몸이라고 떠들지만 현지 정부 관계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공개 도전했을 정도로 반골(反骨) 기질을 지녔다. 천을 인계받아 베이징 미국 대사관에 들여보낸 궈위산(郭玉閃)은 노벨상 수상자인 류샤오보(劉曉波) 주도로 2008년 303명이 서명한 중국 민주화 촉구선언 ‘08헌장’에 이름을 올린 반체제 학자다. 공맹(公盟) 등 시민단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달 30일 공안당국에서 풀려났다. 총연락책을 맡았던 베이징의 후자(胡佳)와 그의 부인 쩡진옌(曾燕)은 중국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 당초 환경문제로 시작한 후는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도화선이 된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를 위한 추모 행사를 주도하고 납치된 가오즈성(高智晟) 인권변호사 등을 위한 구명을 벌이다 수차례 구류·연금되기도 했다. 2007년 유럽의회에서 중국 인권실태를 증언한 뒤 국가전복 선동 혐의로 3년여간 감옥생활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유럽연합(EU)으로부터 사하로프 인권상을 받은 바 있다. 옥살이 중인 중국의 인권운동가들은 적지 않다. 노동자와 농민, 파룬궁(法輪功) 수련자, 지하교회 신도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에 앞장선 가오즈성 변호사는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감옥에 수감돼 있다. 감옥 내 인권 상황을 폭로한 ‘20세기 바스티유 감옥’의 저자로 유명한 웨이징성(魏京生)은 10여년 수감 끝에 1997년 추방된 뒤 미 워싱턴에서 중국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다. 1996년 사하로프상과 로버트케네디인권상을 받았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잘못된 상식 230개 바로잡아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전화를 발명한 사람은? 증기기관의 발명자는? 의심 없이 에베레스트 산,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제임스 와트라고 대답하겠지만 모두 틀렸다. 답은 하와이 마우나케아 산, 안토니오 메우치, 이집트의 헤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무지에 가깝다. ‘지식의 반전’(존 로이드·존 미친슨 지음, 이한음 옮김, 해나무 펴냄)은 우리 주변에 퍼져 있는 잘못된 상식을 정리했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상식 오류 230개를 바로잡았다.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을 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책이 던지는 상식적 질문의 해답은 아이러니하게 모두 상식적으로 예측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난센스 퀴즈를 모아 놓은 것은 아니다. 잘못된 인용, 잘못된 이해, 심지어 철자를 잘못 읽어 생긴 잘못된 상식을 고발한다. 철자 오해의 대표적 예로는 알래스카에 있는 지명 ‘놈(Nome)’을 소개한다. 1850년 처음 이곳에 도착한 영국 배의 장교는 지도 옆에 ‘이름은?(Name?)’이라고 썼다. 이것을 지도 제작자가 잘못 읽어 ‘Cape Nome (놈 곶)’이라고 썼고 그 이름이 그대로 굳어졌다고 한다. 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은 길에서 팔던 판화 때문에 잘못 알려진 사례다. 사건 당시 실제로 감옥에서 풀려난 죄수는 고작 7명이었다. 하지만 사건 이후 비쩍 마른 죄수들이 해골과 함께 사슬에 묶여 있는 모습을 담은 판화가 거리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릇된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책이 익히 알려진 상식에 대한 도전만 담은 것은 아니다. 바다에서 가장 시끄러운 동물은 새우, 음속의 장벽을 깬 최초의 발명품은 채찍이라는 둥 유머러스하고 엉뚱하지만, 또 우리가 간과했던 과학적 사실도 소개한다. 또 잘못 알고 있는 건강상식 등 실용적인 항목도 함께 다룬다. 영국 BBC 퀴즈 프로그램인 ‘QI(Quite Interesting)’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존 로이드와 작업을 함께 한 존 미친슨이 프로그램에서 다룬 내용을 정리해 단행본으로 낸 것이다. 특히 존 로이드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미스터 빈’의 제작자로, 책 곳곳에서 위트 넘치는 문체를 자랑한다. 의문을 던지는 습관과 함께 깨달음의 즐거움을 준다. 역사, 정치, 문화, 자연, 동식물, 우주, 지구, 언어, 음식, 물질 등 다양한 분야의 상식을 다뤘다. 472쪽. 1만 50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특파원 칼럼] 프랑스 혁명기념일과 축제/이종수 파리 특파원

    [특파원 칼럼] 프랑스 혁명기념일과 축제/이종수 파리 특파원

    올해도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7월14일의 열기는 뜨거웠다. 1789년 7월14일 군중들이 정치범들이 갇혀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면서 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이날은 프랑스 최고의 국경일이다. 아울러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은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다. 프랑스인이 이날에 부여하는 의미는 여러가지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혁명 100주년인 1889년에는 에펠탑,200주년인 1989년에 바스티유 오페라관을 세웠다. 해마다 수도 파리를 비롯, 전국 주요 도시는 화려한 불꽃놀이와 다채로운 공연 등이 어우러지면서 프랑스 전역이 열광의 도가니로 변한다. 개선문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콩코르드 광장까지 이어지는 올해의 군사퍼레이드에는 4377명의 장병 및 경찰,244마리의 말을 탄 국경수비대 기마병,400여대의 오토바이와 경찰차량,30대의 헬리콥터, 육·해·공군 소속 라팔 및 미라주 전투기 등 65대의 항공기가 동원됐다. 특히 ‘위용의 정치’를 지향하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기획’으로 올해 군사 퍼레이드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참석했고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의 병력이 모두 초청됐다. 나아가 프랑스 혁명기념일은 국민들의 축제로 살아 숨쉰다.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 축제가 벌어지는 에펠탑 앞 광장은 파리 시민과 전국에서 몰려온 프랑스 사람들, 관광객의 물결로 발디딜 틈이 없다. 올해도 불꽃놀이 전에 열린 축하 공연에서 제임스 블런트의 피아노 선율과 뮤지컬 태양왕에 출연했던 크리스토퍼 마에 등의 노래가 열기를 돋우었다. 혁명을 기리는 축제 열기는 전날 밤부터 시작한다. 음악 축제의 여운을 안고 사람들은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정까지 거리 곳곳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언론들도 주요 도시의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그날의 의미를 되새긴다. 축제가 끝난 뒤 한 주불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국민적 축제가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국군의 날은 국군들만의 잔치로 끝나고 만다는 아쉬움도 덧붙였다. 그러나 곰곰 살펴보면 프랑스의 혁명기념일이 오늘처럼 국민적 축제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많은 ‘고통’이 뒤따랐다. 혁명이 일어난 다음해 혁명 정부는 혁명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전국에서 혁명 장면을 재연했다.‘연맹제’라 불리는 혁명축제는 전국에서 같은 시간에 동시에 진행되면서 1년 동안 이어졌다. 1년 전 그날의 열광을 다시 ‘기획’하면서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는 혁명 혹은 혁명 정부의 입장을 설파하는 게 절실했다. 그래서 문화정책 연구론자들 가운데 일부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화정책의 효시를 혁명제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혁명을 재연하는 축제 과정에서 특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혁명 발발 4년 뒤인 1793년 1월 왕정의 절대성을 상징하던 루이 16세의 목이 기요틴에서 날아갔다. 다음해 혁명기념 축제에서 혁명 정부는 ‘왕의 처형’을 온전하게 재연하지 못했다. 왕의 상징물 대신에 범죄자 4명이 처형됐다. 왕의 살해를 공식화하는 것은 몇년 뒤에나 가능했다. 왕을 처형한 행위는 ‘살부(殺父) 콤플렉스’에 가까웠다. 혁명의 주체들에게도 ‘혁명의 무게’는 무거웠다. 이런 고통의 시간을 넘어온 뒤에야 혁명기념일은 국민적 축제로 거듭났다. 우리도 4·19혁명, 광주민주항쟁 등 혁명 혹은 그에 걸맞은 대사건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를 기념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여전히 ‘엄숙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제 우리도 혁명을 기리는 ‘국민적 축제’ 하나쯤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종수 파리 특파원 vielee@seoul.co.kr
  • [386세대가 본 W세대] 새로운 ‘개성시대’

    ‘반짝 가수’로 인기를 끌 수도 있던 강변가요제 출신의 이상은은 인기를 좇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추구한 끝에 ‘음악가’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최근 그녀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 독특한 인생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세계를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지난 16일에는 스무살 먹은,‘스캥크’라는 아명을 쓰는 친구를 초대손님으로 불렀다.스캥크는 음악 전문가는 아니지만,음악을 공유하고 싶어서 자신을 ‘음악 나눔가’라고 부른다.음악을 틀기도 하고,때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어느 때는 환경운동 시위현장에서 참여해 퍼포먼스를 하기도 한다.그는 수능시험 보기가 싫고,자신이 점수로 환산되는 것이 싫어서 대학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그는 요즘 대학에서 청강을 한단다.‘전통음악의 이해’‘대중음악’과목을 듣는데,담당 교수에게 얘기를 해서 리포트도 쓰고 평가도 받는다.물론 그는 학점을 받지 않지만.아르바이트를 해서 스스로 집세와 생활비를 마련하는 그는 앞으로도 ‘오늘 스무살 만큼만 잘 살겠다.’고 한다.스캥크에게 서열화된 대학은 없고,짙은 개성과 학업에 대한 열정이 있다. 수능시험이 끝나자 이른바 ‘이해찬 세대’에 대한 성토가 한참이다.그 핵심은 지적 능력 저하에 대한 일방적 비난이며,기준은 재학생들의 시험 성적하락이다.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평가에 대한 철학이 없다는 것이 더 문제다.수험생 엄마들의 아우성에 편승한 냄비 여론 속에서,과학고 영재 학생들이 기초과학 분야를 빼고 의대만 가겠다고 하는 그림이 오버랩될 뿐이다.정말로 제7차 교육과정은 유죄일까. 요즘 고교 교과서에는 이런 질문이 나온단다.당신(학생)이 바스티유 감옥을 지키는 병사라면,감옥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오는 시민군에게 총을 겨눌 것인가를 묻는 질문.나는 이러한 교육을 받는 세대에게 희망을 느끼지만,이런 질문을 던져놓고도 모법 답안을 외우게 하는 주입식 교육에는 절망한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에서는 지금 축제가 한창이다.집 가까운 곳에 있는 과천고의 축제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감탄의 끝에 서고 말았다.고전적 레퍼토리인 합창·록밴드·방송반의 공연은 물론이고 애니메이션·개그·수화 공연도 있었다.또 록·힙합·헤비메탈 등을 공연하는 밴드도 서넛은 돼 보였다.관계자에게 물어 보니 이 공연들이 급조된 것이 아니라,동아리 활동을 통해 나온 산물이라고 한다.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그들에게는 꿈과 미래가 보였다. 교문을 나서면서 들은 한마디가 귀에 쟁쟁하다.“옛날같이 공부 잘하는 모범생도 샌님처럼 공부만 하지는 않아요.더 잘 놀아요.” 가수 싸이가 노래한다.“소리 지르는 네가 챔피언,음악에 미치는 네가 챔피언,인생 즐기는 네가 챔피언.” 30대의 이상은과 20대의 스캥크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생각도 하고 재미나고 개성있는 새로운 세대가 몰려오고 있다. 유민영 모아이 커뮤니케이션 기획실장
  • 책/카페의 역사/예술의 산실, 민주주의 살롱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한 발 떨어진 다른 세상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카페일 것이다.그래서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카페를 ‘행복이 있는 만남의 광장’이라 했다.역동적인 삶이 살아 숨쉬는 카페는 예술가들에게는 영감의 장이자 창작의 산실이었다. 프랑스 파리 생제르망 거리의 ‘레 되 마고’에서 카뮈는 ‘이방인’을 비롯한 그의 역작을 완성해갔고,철학카페 ‘카페 드 플로르’는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서재였다.피카소,헤밍웨이 또한 몽파르나스에 있는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크리스토프 르페뷔르의 ‘카페의 역사’(강주헌 옮김,효형출판 펴냄)는 예술가와 철학자들의 삶과 예술이 싹트고 무르익었던 프랑스 카페의 역사를 한 편의 소설처럼 풀어낸다. 카페는 17세기 말 파리에 처음 등장한 이래 프랑스 역사와 문화의 일부가 됐다.대중의 사랑을 받은 만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소박하게 꾸민 까닭에 ‘만쟁그(mannezingue,선술집)’‘아소무아르(assommoir,목로주점)’등으로 불렸다.가장 흔한 이름은 비스트로였다.‘예배당’이라 불린 적도 있었다.20세기 초 주로 시골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아침부터 카페로 달려가 술잔을 기울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카페가 단순히 목을 축이는,주흥의 장소만은 아니었다.그보다는 예술가들의 안식처,‘민주주의의 살롱’으로 기억된다. 이 책은 여러 문학작품에 묘사된 카페의 모습을 인용,카페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읽게 하는 독특한 서술방식을 택한다.“팡 가에 엉뚱하게도 카페라고 불린 카바레가 있었다.그 카페에는 오늘날의 역사를 만든 뒷방이 있었다.…1792년 10월23일 산악파와 지롱드파가 유명한 결연을 맺은 곳도 바로 이카페였다.”(빅토르 위고 ‘1793년’) 발자크가 일찍이 카페를 ‘민중의 의회’라 불렀듯이,18세기 말 카페와 정치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프랑스대혁명을 촉발한 바스티유 감옥 습격도 카페에서 비롯됐고,사회주의 운동가장 조레스가 암살된 곳도 바로 카페였다. 카페는 19세기까지 알코올 중독,도박,매춘 등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며 몸살을 앓기도 했다.온갖 위험이 도사린 곳이었다.화가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 ‘밤의 카페’에 관해 이렇게 썼다.“나는 카페를 사람들이 파멸해가는 곳,범죄를 저지르는 곳으로 묘사하고 싶었다.지옥불처럼 뜨거운 열기가 지배하는 곳,옅은 유황빛이 감도는 음울한 선술집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마’라는 비난도 면치 못했지만 카페는 지금도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보듬어 안고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김종면기자 jmkim@
  • 서대문형무소서 ‘예술제’벌인다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로 불리는 여러 이유중의 하나로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을 빼놓을 수 없다.파리오페라극장과 더불어 프랑스 최고의 극장으로 꼽히는 이곳은 18세기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 악명높은 감옥이었다.프랑스 혁명 200주년이던 지난 89년 미테랑 대통령은 바로 그 감옥터에 오페라극장을 세웠다.어두운 과거의 유산을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활용한 프랑스인의 안목과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국내에서도 이처럼 역사적 유적지를 민족문화예술의 장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가 그 현장.한국근·현대사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곳의 역사성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자는 뜻에서 11월5∼7일 ‘제1회 서대문형무소 민족문화예술제-벽,안과밖’이 마련된다.사단법인 서대문형무소 민족문화예술제와 서대문구청이 역사관 개관 1주년에 맞춰 기획한 이번 행사에는 음악,무용,미술,연극,이동마임극,굿,조명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이 폭넓게 참여한다. 먼저 눈길을 끄는것은 총체연극 ‘살(煞)’.시인 황지우가 대본을 쓰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윤정섭 교수가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1907년 일제에의해 지어진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투사를 품어야했던 이곳의 서글픈 운명을 연기·춤·노래 등으로 풀어낸다.유진규네 마임단은 행사 시작전인 30일부터 독립공원 일대와 역사관 옥외에서 하루 3차례씩 잊혀져가는 역사를 재조명하는 마임극 ‘서대문형무소’를 공연한다. 황해도 만신 김매물이 주재하는 해원굿,한서대 이광수 교수와 민족음악원 연주단의 상여소리·살풀이춤 등 전통공연이 열리고,아리사카 등 일본 무용가3명과 한국측 5명이 합동으로 준비한 무용작품 ‘벽,물질’이 공연된다.지난해 죽산예술제에 참가한 인연으로 이번 행사에 동참하게 된 아리사카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무용가로 지난 5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화가 임옥상은 30여점의 회화,조각,멀티미디어 작품을 옥사안에 전시하는 한편 6일 오후2시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그림 그리기를 지도한다. 7일 오후2시30분에는아프리카의 민족음악가 마마두 둠비아의 ‘코라’(아프리카 하프)연주와 신세대 해금연주가 강은일의 ‘울밑에 선 봉선화’등이 선보인다. 이밖에 무대미술가 이상봉의 조명퍼포먼스 ‘빛의 장막’과 음향연출가 김벌래의 ‘소리의 벽,역사의 울림’등도 색다른 예술적 감흥을 선사할 예정. 민족문화예술제측은 “매년 특화된 주제와 해외 동포 예술가의 소개를 병행하는 식으로 행사를 계속할 것”이라며 “향후 서대문독립공원 주차장에 500석 규모의 전용극장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02)782-2790이순녀기자 coral@
  • 양심수에게 펜과 종이를(金三雄 칼럼)

    金大中 대통령을 국빈으로 맞은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백악관의 정상회담에 앞서 가진 모두발언에서 金대통령의 옥중서신에 있는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않았다’는 구절을 인용, 金대통령의 정치역정에 대한 경탄을 거듭 나타냈다고 국내 언론이 보도한 바 있다. 클린턴이 인용한 이 시구는 원래 영국 시인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의 마지막 구절 “if winter comes, can spring de far behind?(겨울이 만일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이다. 金대통령은 사형선고를 받은 참담한 상황에서도 셸리처럼 언젠가 찾아올‘봄’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짧은 지면에 긴 글을 썼다. 옥중의 DJ도 여느 수형자들과 같이 한달에 한번 단 한장의 봉함엽서로 그것도 가족에게만 편지쓰는 것이 허락되었다. 손바닥만한 우편봉함엽서에다 그는 깨알만한 크기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적어보냈고 이것이 후일 「김대중옥중서신」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당시 양심수에게 집필이 허용되었다면 그는 6년여 동안의 옥살이에서 많은 글을 썼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문화의 값진 자산으로 남았을 것이다. 金대통령 뿐만 아니라 지난날 어두웠던 시절에 옥살이를 한 수많은 양심수들에게 펜과 종이가 주어졌다면 우리의 정신문화는 훨씬 다채로워졌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군사정권에 이어 金泳三정권은 양심수들이 글쓰는 것을 철저히 막았고, 지금까지 이런 규제는 풀리지 않고 있다. 당장 일반 수형자들에게까지 집필을 허용하기가 어렵다면 먼저 양심수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쓸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우리가 문명사회이기 때문이다. ○옥중에서 쓰여진 명저 지금 인류의 값진 유산으로 전하는 명저 가운데 상당수가 감옥에서 집필되었다. 니체의 표현처럼 그야말로 ‘피로 쓰여진’저작물들이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면서 옥중에서 ‘사기’를 썼고, 볼테르는 왕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바스티유감옥에 갇혀 ‘앙리아드’를 썼으며, 존 번연은 베드포드 군형무소에서 11년간 옥살이하면서 ‘천로역정’을 집필했다. 세르반테스는 왕실감옥에 갇혀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쓰기 시작했으며, 마르코폴로는 포로가 되어 ‘동방견문록’을 썼고, 오헨리는 ‘점잖은 약탈자’등 주옥같은 단편을 옥중에서 썼다. 프랑수아 비용은 사형을 선고받고 지하토굴에 갇혀서 ‘유언시’를 지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투옥되어 ‘살로메’ 등 명작을 남겼다. 인도의 네루는옥중에서 ‘세계사 개설’을 썼으며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많은 책을 썼다. 그들에게서 펜과 종이를 박탈했을 경우인류의 정신사가 얼마나 황폐했을 것인가 두렵다. ○읽고 쓰는 자유 문명사회의 기본 지금 감옥에는 적잖은 양심수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채 ‘안부편지’정도만 가족과 나눈다. 수백년 수천년 전에 인류는 이미 감옥이나 유배지에서 글을 쓰는 전통이 확립되고, 그 결과물이 값진 유산으로 전하는 터에 문명사회를 자처하는 우리는 언제까지 수인(囚人)들의 붓과 종이를 빼앗을 것인가. 얼마전 출감한 황석영씨가 옥중에서 소설을 썼다면, 신영복 교수가 집필의 자유를 가졌다면, 우리는 보다 풍성한 문학과 사유의 향연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수인의 집필금지는 국력의 손실임을 절감하게 된다. 연장선상에서 박노해씨나 박태웅씨 등이 지금 감옥에서 글을 쓸 수 있다면 후일 값진 문화적 자산을 남기게 될 지도 모른다. 아침햇살에 골안개 사라지듯 하는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조를 이유로 양심수들의 집필권을 박탈하는 것은 반문명적 시대착오다. 펜 한자루와 종이 한장이 아쉬워 봉함엽서에 5천여자를 썼던 金대통령의 아픔을 이해한다면 새정부는 양심수들에게 펜과 종이를 주는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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