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마른 여자들
    2026-09-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1
  • “X같은 의사”… 평범하던 미소년, 열등감이 낳은 ‘악인 스릴러’

    “X같은 의사”… 평범하던 미소년, 열등감이 낳은 ‘악인 스릴러’

    ‘나’는 28세의 남자, 연수다.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마른 체형에 큰 키, 고운 피부 덕에 남자라기보다 앳된 소년처럼 보인다. ‘나’의 표현처럼 “특별할 게 전혀 없는, 모래사장에 뒹구는 모래알 같은 존재”다. 여느 젊은이와 다른 점은 외모 안에 웅크린 “내부의 결함”이다. 연수는 어린 시절 죽은 형에 대한 죄의식과 열등감, 성적 성숙장애, 편집증 등의 정신적 문제로 병원에서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얼마간 ‘나’의 평이한 일상이 평이한 문장과 함께 흐른다. 그러다 남자의 생식기를 뜻하는 음절 하나가 갑자기 문장 안으로 ‘난입’한다. 연수가 정신과 의사의 외모를 떠올리며 “‘X’같은 대머리 의사”라고 회상하는 장면에서다. 뜬금없고 난데없다. 서너 페이지 앞부터 다시 읽어도 왜 갑자기 그게 튀어나왔는지 당위성을 찾기 어렵다. 예쁜 여자가 예쁜 말만 하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서늘한 저주를 내뱉은 느낌이랄까. 작가는 여기쯤에서 독자들이 심리 스릴러물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걸 알아채기를 바랐을까. ‘블랙 먼데이’는 악인에 관한 장편소설이다. 어린 시절 겪은 일들로 일그러진 욕망과 집착을 갖게 된 한 남자가 자신과 주변을 파국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어린 시절 연수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형에게 의지하면서도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다 바다에서 함께 수영하던 형이 파도에 휩쓸려 죽은 뒤 연수는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병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심리학 교수인 아버지는 대학원생인 제자 현진에게 고교생이 된 연수의 심리치료를 맡긴다. 하지만 연수가 현진에게 동성애적 집착을 보이며 갈등이 폭발한다. 현진은 떼버리듯 연수에게 등을 돌리지만, 문제는 연수가 현진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등장인물 가운데 현진과 그의 아내 가희, 연수에게 동성애를 알게 해 준 지태 등은 이름을 가졌다. 대부분 연수의 양성애 대상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없다. 숫제 무생물 취급이다. ‘X같은 대머리 의사’가 닥터 K란 이니셜을 가졌을 뿐, 연수의 시선에선 그저 솜뭉치 노인이거나 하얀 이, 입 큰 개구리일 뿐이다. 어쩌면 주인공은 연수가 아닐 수도 있지 싶다. 작가가 정작 말을 건네고 싶은 대상은 연수 주변의 사람들, 예컨대 “참과 거짓이 한 몸통을 소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속는 것에 익숙한 가희” 같은 여자들일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책 말미에 “열등감을 갖고 불행한 일을 겪는다고 모두가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 몸의 고립에서 벗어나… ‘나’로 살아가시오[연극 리뷰]

    몸의 고립에서 벗어나… ‘나’로 살아가시오[연극 리뷰]

    아주 다른 삶을 사는 쌍둥이 자매가 있다. 어릴 땐 슬프면 신맛, 기쁘면 단맛을 똑같이 느낄 정도로 하나였지만 성장하면서 극단으로 갈라졌다. 동생 로즈는 학교에서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시작한 다이어트가 거식증으로 이어졌다. 언니 릴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을 한다. 쌍둥이의 외모가 양극단으로 흐르는 사이 성적 지향도 달라졌다. 로즈는 동성애자다. 릴리는 이성애자지만 데이트 폭력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한다. 연극 ‘마른 여자들’은 섭식장애 시설에 들어간 로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른 몸을 동경하는 어린 세라, 한때 빼빼 마른 몸으로 소녀들의 스타였던 캣 미첼스, 아이를 낳은 적이 없지만 엄마라 불리는 캐서린 등 시설 안에는 ‘몸의 문제’를 안고 있는 여성투성이다. 시설 밖에도 마른 몸에 집착하는 여학생들의 여왕 제나와 로런이 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서 몸무게를 줄이는 로즈나, 1㎏이 늘어날까 봐 쓰러질지언정 영양제를 맞지 않겠다는 로런이나 모두 ‘자기 파괴’를 향해 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극작·연출을 맡은 박주영은 이를 두고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자기 증명”이라고 봤다. 무대 바닥에 그려진 세 개의 원은 한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밖으로 확장하는지 보여 주는 장치다. 로즈는 릴리와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모습을 통해 삶을 인지하고, 캣은 자신의 팬이었던 세라에게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시설의 안과 밖에서 서로서로 거울이 되며 ‘몸의 고립’에서 벗어나는 마른 여자들의 관계는 지금은 비극이지만 희망을 꿈꾸게 한다. 원작은 뉴질랜드 작가 다이애나 클라크가 2021년 출간한 동명 소설로, 여성의 몸, 퀴어, 다이어트 문화, 사랑과 우정 등을 탐구하고 예리하게 풀어내며 호평받았다. 박주영은 2023년 여성 배 수리공을 소재로 한 ‘고쳐서 나가는 곳’으로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하며 ‘여성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극작가 겸 연출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번 작품도 원작의 핵심을 짜임새 있게 담아내며 연대를 그렸다. 다만 구토, 성적 표현, 다소 거친 대사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마른 여자들’은 오는 28일까지 서울 종로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 ‘몸’에 갇혀버린 여성… 서늘한 억압의 서사

    ‘몸’에 갇혀버린 여성… 서늘한 억압의 서사

    “상쾌하게 걸어 나가는 하얀 양말과 날씬한 종아리. 큰 키와 단발머리.” 경쾌한 시트콤의 대사 같다. 하지만 이런 표현이 뒤이어 나오면 단박에 엽기 서스펜스 드라마로 변한다. “살. 덩어리. 돼지 같은 년. 정말로 내가 뚱뚱해서 싫었어?” 이쯤 되면 어떤 형식의 서스펜스가 이어질 거라 예감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여자들이 자신과 타인의 몸에 대해 갖는 강박은 정말 상상을 뛰어넘는다. 새 책 ‘치유의 빛’은 강화길 작가가 4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이다. 공포와 로맨스 등의 요소가 결합된 이른바 ‘고딕 소설’ 장르다. 그간 작가가 천착해 온 가족, 학교, 지방 소도시, 종교 단체 등 긴밀하고 폐쇄적인 공동체와, 동경·애증·질투·소유욕 같은 여자와 여자 사이에 발생하는 복잡한 감정을 ‘안진’이란 가상의 장소에 거침없이 펼쳐놓는다. 이야기는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과거에서 시작된다. ‘지수’는 존재감이라곤 없는 평범한 여학생이다. 작고 깡마른 체격이 다소 도드라질 뿐, 늘 시선 밖에 머무는 아이다. 그가 주변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 건 열다섯 살 때다. 미칠 듯한 식욕으로 음식을 닥치는 대로 입에 밀어 넣기 시작한 지수는 이듬해 봄 무렵 단숨에 20㎝ 넘게 자라 거대하고 육중한 ‘덩어리’로 변한다. 살과 함께 주변의 시선도 붙기 시작한다. 가족은 부끄러워하는 시선을, 주변 사람들은 눈에 띄게 뚱뚱해진 아이를 향해 내심 경멸 섞인 시선을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수가 늘 동경했으나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던 친구 ‘해리아’가 그의 이름을 처음 부른 것도 이때다. 어린아이에게 쏟아진 시선은 지수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이제 서른둘, 어른이 된 지수는 176㎝ 키에 몸무게 50㎏ 미만이다. 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식욕억제제를 먹고 절식과 폭식을 오간 덕이다. 한데 몸이 약물을 견디지 못하고 통증이 지속되자 지수는 요양차 고향 안진으로 내려온다. 모두가 가까워지고 싶어 했던 예쁜 아이 해리아, 그와 자신 사이에 늘 끼어 있던 ‘신아’와도 재회한다. 그리고 마주한 자신의 과거.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불행은 그들 각자의 삶을 어떻게 좀먹었을까.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매개체는 ‘여성의 몸’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몸’을 통해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타인의 시선에 둘러싸여 고통받던 억압의 역사가 서늘하게 드러난다.
  • 북바인딩 수업/이지혜 [서울신문 2024 신춘문예 - 단편소설]

    북바인딩 수업/이지혜 [서울신문 2024 신춘문예 - 단편소설]

    책방 안에 희미하게 레몬빛이 돌았다. 창문에는 아이보리색 커튼이 드리워졌고, 형광등과 보조등에서 퍼져나온 빛이 커튼 위로 어우러져 따듯하면서도 산뜻했다. 윤재는 사람들과 함께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내 기척을 느낀 몇 사람이 얼굴을 돌렸고 윤재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줄지어 선 책장을 지나쳐 테이블 쪽으로 걸었다. 중앙에 자리 잡은 매대 위에는 윤재가 만든 책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 있어요, 오래된 자리, 쓰고 만듦. 이모의 환갑을 열흘 앞두고 윤재는 나에게 다시 연락해왔다. 휴대폰 액정에 윤재에게 온 메시지 알림이 떴을 때 나는 윤재가 환갑잔치 일정을 알려주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메시지에 이모 이야기는 없었다. 윤재는 내가 사는 곳 근처 책방에서 북바인딩 수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날짜는 이틀 뒤였다. - 민정아, 와줄 수 있어? 나는 답장하길 망설였다. 윤재와는 한동안 거리를 두며 소원하게 지내고 있었다. 반년 만에 온 윤재의 연락이 반갑기보다는 어색했다. 윤재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여섯 살 때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나를 이모에게 부탁했다. 동생만 외할머니 집에 데려가 함께 살면서 식당에서 종일 일하며 돈을 벌었다. 아빠가 남긴 유산은 없고 병원비와 빚만 쌓여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훗날 엄마는 설명해 주었다. 일이 년 돈을 모아서 방이라도 얻을 수 있게 되면 나를 데리러 올 예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엄마의 결정과 계획을 당시에는 알지 못한 채로 나는 이모네 집에 들어갔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사촌인 윤재와 함께 자랐다. 윤재가 한 살 많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윤재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윤재의 형인 윤석을 꼬박꼬박 오빠라고 부른 것과 달리 윤재는 이름으로 부르며 친구처럼 대했다. - 이모 환갑은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되묻자 윤재는 만나서 얘기하자고 답장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말을 우리는 반년 전에도 나눴다. 당시 그렇게 말한 건 나였고 윤재는 알겠다고 우선 만나자고 선뜻 대답했다. 그때 윤재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윤재에게 답장을 보내 책방으로 가겠다고 말해 놓고도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도 올까 말까 망설였다. 이런 마음을 모르는 윤재는 웃으면서 나에게 손짓했다. 유난히 하얗고 마디가 굵은 윤재의 손. 어린 시절엔 지금보다 훨씬 작은 손으로 윤재가 내 등을 쓸어내렸던 적도 있었다. 처음 이모네 집에 들어갔을 때 나는 잘 웃지 않았다. 울거나 떼를 쓰지도 않았다.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고, 괜히 말썽을 부렸다가 이모네 집에서 쫓겨나게 될까 봐 불안해했다. 이모나 이모부가 나에게 눈치를 줬거나 윤재나 윤석과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모부는 이 년 동안 나를 거두어 키우면서도 싫은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이를 돕는 일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윤재와 윤석을 대할 때는 태도가 엄격했고, 자녀의 교육과 생활 지도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확고했다. 거기 어긋나거나 미치지 못하면 납득이 될 때까지, 원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 사람을 몰아세웠다. 왜 그렇게 했니. 말해봐, 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왜 말을 못 해. 어떻게 할 거냐니까. 윤석은 공부나 생활 면에서 이모부의 기대만큼 해내는 편이었고 이런 말을 듣는 건 대체로 윤재였다. 이모네 집에 들어간 지 세 달쯤 지났을 때 윤재가 이모부에게 크게 혼났다. 그날은 이모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도중에 이모부가 윤재를 때리려고 해 이모가 말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공부방으로 들어온 윤재가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윤재 눈에서 눈물이 한두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줄줄 흘러내렸다. 소리 없이 우는 윤재를 보다가 나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왜 그랬는지 윤재가 하는 것처럼 숨죽여 울었다.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 내 등을 다독이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윤재가 테이블 앞으로 몸을 숙인 채 내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윤재의 눈에서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간식을 들고 온 이모가 우리 둘 사이에서 눈가를 훔치는 모습을 나는 봤다. 와달라는 윤재의 요청을 끝내 거절하지 못한 것, 머뭇거리면서도 뒤돌아 책방에서 나가지 못한 것, 이게 다 그 순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울었고 또 웃기도 했으니까. 단지 그것뿐이라고 속으로 되뇌며 윤재에게 손을 흔들었다. 모두 여섯 사람이 색지와 실, 송곳 등이 놓인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모서리가 둥근 사각 테이블은 밝은 갈색의 원목 상판과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철제 다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면 스크린 앞에 서 있던 윤재가 목을 가다듬었다. “저는 책 만드는 박윤재예요. 제 목소리가 좀 작은 편이죠? 혹시 안 들리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빔 프로젝트 화면을 넘기자 윤재가 만든 세 권의 책이 스크린에 올라왔다. “그동안 이 책들을 만들었고요. 여러 책방에서 북바인딩 수업을 진행해 왔어요. 첫 번째 책을 만든 게 벌써 칠 년 전이네요.” 윤재는 책들을 소개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고, 어떤 상황에서 만들었으며, 독립출판으로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어려움은 또 어떻게 해결했는지, 하는 내용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낮고 느린 목소리에서 나름대로 강약이 느껴졌다. 가끔 참여자들이 소리 내어 웃기도 했는데 사람들 앞에서 술술 이야기하는 윤재가 나는 좀 낯설었다. 윤재는 참여자들에게도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첫 번째 참여자는 프랑스어를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곧 어학연수에 갈 예정이라며 거기서 보고 느낀 것들을 책으로 펴낼 거라고 했다. 두 번째 참여자는 입을 열기 전, 옆에 앉은 세 번째 참여자를 잠깐 봤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사내 커플이었다. 퇴근 후 함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걸 즐긴다고 했다. “우리가 같이 보낼 시간을 책에 기록하고 싶어요.” 두 번째 참여자가 말하자 세 번째 참여자가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웃으며 박수했고 윤재도 따라서 손뼉을 쳤다. 나는 타이밍을 놓쳐 고개만 끄덕거렸다. 속없이 웃는 윤재가 내심 못마땅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저는 호텔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하던 호텔에서는 팬데믹 시기에 나와야 했고, 요즘 다른 호텔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 말을 덧붙일 순 없었다. 윤재의 사촌이라는 것은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그 후 대화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마지막 참여자가 평소에 책을 좋아해서 신청했다고 말하는 것만 귀에 들어왔다. 내가 처음 호텔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는 윤재가 첫 번째 책을 만들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인턴으로, 정확하게는 프리인턴으로 호텔에 입사했다. 육 개월간의 프리인턴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 일 년제 인턴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호텔이라는 공간이 꽤 그럴싸해 보였고 그 안에서 유니폼을 맞춰 입고 구성원이 되면 든든한 소속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반년이 지나가고 인턴 전환 시험이 다가왔다. 개별 면담과 지필 시험, 조별 면접까지 마치고 며칠간 결과를 기다렸다. 어느 날 쉬는 시간, 직원 로커룸에서 친한 동기가 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내가 뭐 하냐고 묻자 동기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나 집에 가.” 오후 세 시가 되기도 전에 동기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로커룸을 나갔다. 다음 날 나는 인턴이 되어 출근했고 평소처럼 유니폼을 입은 채 일했지만 호텔이라는 공간, 특히 매일 지나는 길고 어두운 직원 통로가 좀 무서워졌다. 나는 이런 일들을 그때그때 윤재에게 알렸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엄마는 이모네 집 가까이에 셋집을 얻었다. 윤재와 따로 살면서도 같이 밥을 먹고 숙제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이미 엄마보다는 이모를, 동생보다는 윤재를 더 친밀하게 느끼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윤재와 가깝게 지냈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윤재에게 연락했다. 내 친구들이 윤재와 내가 연인 같다고 놀린 적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호텔에서 있었던 일들을, 윤재는 책 만드는 작업을 주로 이야기했다. 내가 인턴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자 윤재도 첫 번째 작업에 대해 소식을 전해왔다. 윤재가 처음으로 만든 책 <여기 있어요>는 서울아트시네마가 많은 사람의 후원과 노력에도 낙원상가에서 철수하고 서울극장 삼 층에 단일 상영관으로 축소되어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윤재는 일이 벌어지는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위치를 옮긴 서울아트시네마가 오픈하던 날부터 백 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곳에 갔다. 많은 사람이 거기 서울아트시네마가 들어섰다는 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선 여전히 특별기획 프로그램이 진행됐고 새로운 독립영화가 상영됐고 또 누군가는 계속 극장을 찾았다. 나는 윤재의 책을 통해서 그런 일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윤재는 대학교 사 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윤재가 색지를 테이블 가운데로 옮겨서 색깔별로 펼쳤다. “이 두꺼운 색지는 여러분이 만들 책의 표지가 될 거예요. 좋아하는 색으로 두 장씩 골라주세요.” 같은 크기로 잘린 흰 종이도 색지 옆에 꺼내두었다. “눈에 띄는 색이 없으실까 봐 걱정인데요. 그러면 흰 종이에 색연필이나 펜으로 표지를 꾸미셔도 좋을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표지를 만드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윤재가 혼잣말하듯 덧붙이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러 색의 색지들은 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진달래색 표지 두 장을 손에 들었다. 조금 촌스러운가 생각했지만 그대로 내 앞에 가져왔다. 진달래색 색지는 묘하게 기시감이 들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 매니큐어 색깔과 비슷했다. 며칠 전 나는 발톱에 짙은 분홍색 매니큐어를 발랐다. 꽃잎을 그려 넣듯 하나하나 두 번씩 덧칠했다. 매니큐어가 마른 발을 보면서 색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손을 보며 조금 씁쓸했다. 이제 정직원도 아닌데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내가 답답하기도 했다. “이 얇은 종이들도 열 장씩 가져가세요. 이건 책의 내용을 담을 내지가 될 거예요.” 윤재는 표지와 같은 크기인 흰색 종이들도 테이블 위에 죽 늘어놓았다. 어차피 내지는 다 똑같은 흰 종이라 열 장씩 나눠줘도 될 텐데 한 장 한 장 직접 골라서 가져가라고 했다. 참여자들은 테이블 중앙에 세 줄로 놓인 종이들을 훑어보다가 한 장씩 집었다. 옆 사람이 고르기를 기다렸다가 가져가기도 했고 앞 사람과 손가락이 부딪히기도 했다. 그 과정이 나는 좀 번거로웠는데 옆에 앉은 연인 참가자들은 서로 종이를 골라주며 재미있어했다. 나는 윤재를 흘끔 봤다. 윤재는 테이블 반대쪽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윤재가 나를 왜 이곳에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모 환갑잔치 일정은 전화로도 충분히 알려줄 수 있는 내용이라서 나는 윤재가 그걸 핑계로 나에게 연락해 관계를 회복하려는 게 아닌가 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윤재는 나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 하셨으면 이렇게 표지 사이에 내지를 넣어 보세요. 벌써 책 같은 모양이 됐죠?” 다들 윤재가 말한 대로 표지 사이에 내지를 넣어서 앞뒤로 살폈다. 나도 앞에 놓인 종이들을 한 손에 잡고 어떤 책이 완성될지 가늠해 보았다. 잘 그려지지 않았다. 윤재가 실뭉치와 송곳 두 개를 테이블 가운데로 가져오더니 이제 구멍을 뚫을 차례라고 말했다. 이미 묶어둔 견본을 펼쳐서 우리에게 보여줬다. “구멍을 잘 뚫는 게 중요해요. 그 구멍으로….” 그때 책방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대화 소리가 커서 윤재의 말이 끊겼다. 책방 직원이 다가가 수업 중이니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말했다. “수업이요? 무슨?” 한 사람이 이쪽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책 만드는 수업을 하고 있어요.” 책방 직원이 목소리를 낮춰가며 대답했고 세 사람은 한 마디씩 말을 보탰다. 책이요? 그래, 책을 만든대. 그런 수업도 하는구나. “그걸 어떻게 만드는데?” 셋 중 한 사람이 물었고 실내가 조용해졌다. 세 사람은 서가 앞에 서서 이쪽을 들여다보더니 테이블 위를 둘러보고 윤재와 참가자들도 훑어봤다. “저렇게 만드는가 보네.” 그런가 보다고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는 책방 직원을 향해 그러면 다음에 오겠다고 말했다. 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세 사람이 나간 뒤 닫힌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저걸 왜 만들지.”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윤재는 서너 차례 목을 가다듬었다. 잠깐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 견본을 손에 잡고 테이블 앞으로 내밀었다. “구멍을 잘 뚫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죠? 그 구멍으로 한 장 한 장의 낱장들이 모이고 묶여야 책이 되는 거니까요.” 목소리가 조금 흔들리는가 싶었지만 윤재는 막힘없이 말을 마무리했다.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고 마음이 상한 듯해 보이지도 않았다. 당황하고 마음이 흔들린 쪽은 오히려 나라는 것을 깨닫고 있을 때 윤재는 표지를 자세히 보라며 견본을 들어 올렸다. 구멍 사이의 간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모두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야 했다. 모든 구멍은 왼쪽 끝을 기준으로 가로 0.5cm를 띄워놓아야 했으며, 첫 번째 구멍은 왼쪽 끝 윗면에서 세로 1cm의 간격을 둬야 했고, 두 번째 구멍부터는 세로 2.5cm의 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간격을 유지하다 보면 마지막 다섯 번째 구멍은 자연스럽게 네 번째 구멍과는 세로 2.5cm, 종이의 아랫면과는 첫 번째 구멍과 마찬가지로 세로 1cm의 거리가 생겼다. 표지에 윤재가 알려준 간격대로 점을 찍어 두었다. 송곳이 나에게 넘어오길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책 만드는 모습을 둘러봤다. 옆에 앉은 커플은 알맞은 위치에 점을 잘 찍었는지 서로 확인하는가 싶더니 책을 바꿔 상대방의 책에 구멍을 뚫어주고 있었다. “제일 끝에 있는 구멍은 잘 안 되는데? 잘못했다간 종이 찢어질 것 같아.” “이리 줘. 내가 해볼게.” 여자가 마지막 구멍을 뚫어서 남자에게 건넨 뒤 나에게 송곳을 전해줬다. 여자가 몸을 돌렸고 두 사람은 테이블에 놓인 하늘색 표지 위로 손을 포갰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송곳을 잡았는데 무언가에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벼려진 바늘 끝으로 오래된 흉터를 짓누르는 기분. 송곳을 고쳐 쥐었다. 진달래색 표지와 흰색 내지들을 모아서 왼손에 잡고 오른손으로 송곳을 들어 첫 번째 구멍으로 가져갔다. 종이 위에 찍어 둔 점을 송곳으로 누른 뒤 힘을 줬지만 종이는 뚫리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종이를 내려놓고 왼손 손바닥으로 고정한 채 송곳을 좌우로 돌렸다. 손의 힘이 풀려 낱장들이 자꾸 흩어졌다. 윤재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윤재는 앞 장 표지만 가져가 송곳을 살살 돌려가며 구멍을 뚫었다. 뾰족한 송곳 끝이 표지 반대편으로 빠져나오자 내지를 서너 장씩 집어서 같은 위치에 구멍을 만들었다. 송곳을 돌리는 윤재의 손. 가까이서 보니까 작은 흉터가 많았다. 윤재가 종이를 다시 내게 건넸다. 가지런히 뚫린 다섯 개의 구멍이 흠집 같았고 그 자체로 고리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윤재는 사람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펴보며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았다. 송곳 두 개를 한쪽에 모아놓고 실뭉치를 풀었다. 미리 준비해 둔 실을 손에 잡고 그 길이에 맞춰서 한 줄씩 잘라나갔다. “이제 구멍 사이에 실을 넣어서 책으로 엮어 볼게요. 실 한쪽 끝에 매듭을 만들어 주세요. 구멍에 매듭이 고정될 수 있도록이요.” 참여자들이 그 말에 따라 매듭을 묶고 있을 때 윤재 앞에 놓인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윤재는 한동안 테이블을 내려보다가 빠르게 말했다. “급한 전화라 잠깐 받고 올게요.”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져 통화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곧 몸을 돌려 책방 서가를 가로질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윤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됐다. 반년간 왕래 없이 지내는 동안 윤재에게도 많은 일이 생겼을 것이다. 그전엔 윤재와 이렇게 오래 연락이 끊긴 적이 없었다. 윤재는 만들고 싶은 책이 떠오르면 나에게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며 작업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나갔고, 책이 나오면 나에게 제일 먼저 보여줬다. 그런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는 윤재도 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함께 있는 게 그저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느끼지 못한 동안 윤재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한 뒤 윤재는 내가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대개 카페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은 윤재를 만나러 도서관에 갔다. 윤재는 열람실에서 책을 읽다가 나를 만나러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지, 우선 나갈까? 내가 묻자 윤재는 여기에도 식당이 있다며 내려가 보자고 했다. 우리는 도서관 지하 식당에서 라면과 김밥을 사 먹었다. 내가 내려고 하는 걸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수 없다며 윤재가 막아섰다. 내가 한 번 더 나서자 윤재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럴 땐 좀.” 식사 후에는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며 일 층 만남의 광장에서 조용조용 얘기를 나눴다. 윤재는 당시 구상 중이던 책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내가 딴생각을 하지 않는지 가끔 눈치를 살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부지런히 삼켰다. 그때는 내가 정규직이 된 지 육 개월쯤 지난 시기였다. 인턴 때에 비하면 생활이 조금 나아졌고 해고에 대한 불안감은 없어졌다. 하지만 유니폼이 마치 내 일부인 듯 익숙해지면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나는 뭘 놓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애꿎은 매니큐어만 사서 모으고 있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립스틱이나 아이섀도 같은 값이 더 나가는 것은 사지 못했고 가끔 퇴근길에 매니큐어를 샀다. 화장대 위에 올려둔 매니큐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두세 달이 지나자 두 줄 세 줄로 길어졌다. 업무 규정 때문에 손톱에는 바를 수 없어서 나는 발톱에만 매니큐어를 발랐다. 그날 도서관에서 윤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화장품 가게에 들러 매니큐어를 하나 더 샀다. 일하지 않은 날 매니큐어를 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윤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발톱에만 바를 수 있는 매니큐어 같다는 생각도 그날 처음으로 했다. 이런 시간이 윤재와 나 사이에 난 구멍처럼, 적당하지 못한 간격처럼 느껴졌다. 구멍을 뚫는 건 종이에 손상을 주는 일인데도 그 구멍을 통과해야 낱장들이 하나로 묶여서 책이 된다는 윤재의 말을 곱씹었다. 지난 반년 새 우리 사이에는 확실히 거리가 생긴 것 같았다. 나는 윤재에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지내는 근황을 알리지 못했고 어쩌면 윤재도 나한테 전하지 못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전화를 받으러 나간 윤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불만을 내비치는 사람은 없었지만 하나둘씩 핸드폰을 꺼내기 시작했다. 십 분쯤 지났을 때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어두웠고 아무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층계참에서 방향을 꺾고 뛰어 올라오는 윤재가 보였다. “미안, 많이 늦었지?” 윤재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방금 들은 말과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윤재의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 낯익었다. “아니야, 다들 신경 안 써. 무슨 일이야?” 윤재는 발을 멈추고 주저하다가 그게,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윤재는 참여자들에게 여러 차례 사과했다. “일이 생겨서 시간이 지체됐어요. 죄송합니다.”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근데, 괜찮으신 거예요?” “그래요. 작가님 별일 없으면 됐어요.” 참여자들에게서 괜찮다는 반응과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이어졌다. 윤재는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거듭 시간을 확인했다. “매듭을 만드는 데까지 했죠? 이어서 나가볼까요?” 윤재가 테이블을 훑더니 작업하던 것을 위로 올렸다. “이제 표지 뒷장 두 번째 구멍에 바늘을 넣어서 매듭으로 고정해 주세요.” 두 번째 구멍에서 나온 실로 책등을 한 바퀴 돌려서 묶고 두 번째 구멍으로 다시 돌아왔다. 세 번째 구멍으로 이동해서 또 책등을 한 바퀴 돌리고 한 번 더 옆으로 바늘을 움직였다. 윤재의 손을 따라서 나도 구멍 안으로 바늘을 넣었다. 낱장의 종이들을 묶으려고 하니까 표지와 내지가 모이는가 싶다가도 금방 실이 풀려 흩어지고 말았다. “헐거워지지 않도록 적당한 힘으로 당겨주는 게 중요해요.” 윤재의 말을 듣고 손에 더 힘을 줬다. 다시 옆으로 바늘을 돌려 책등을 만들고 아래로 이동해 나가며 종이를 엮었다. “이걸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옆에 앉은 사람이 혼잣말했다. 여러 방향을 오가며 구멍에 바늘을 넣었다가 빼야 하는 과정이라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시간이 지체된 것 때문인지 윤재는 윤재대로 조급해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통화 내용이나 나와 나눈 이야기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졌을지도 몰랐다. 윤재는 사람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는데 일의 진도는 빨라지지 않았다. 내 옆에 앉은 사람도 같은 자리에서 바늘을 넣었다가 빼기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순서가 바뀐 것 같아요.” 내가 손을 내밀자 그는 나에게 자신의 책을 건넸다. 오렌지색 표지 끝부분에 자리 잡은 구멍으로 실을 빼내고 윤재가 알려줬던 순서로 다시 바늘을 넣었다가 뺐다. 다른 사람의 책을 들고 있다는 게 왠지 긴장돼서 조심히 손을 움직였다. 복도에서 윤재에게 들은 얘기가 떠오를 때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도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선 느슨해진 매듭을 꽉 묶어두고 바늘로 구멍과 구멍을 옮겨가며 그의 책을 엮었다. 팽팽히 묶인 책을 건네고 나자 반대쪽 테이블에서 참여자들을 도와주던 윤재가 고개를 들었다. 몸을 세우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방식은 동양식 바인딩이라고 말한 뒤 이쪽으로 다가왔다. 옆을 지날 때 윤재가 내 어깨에 잠깐 손을 올렸다. 두 시간 전에 고른 열두 장의 종이가 제법 책의 틀을 갖췄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윤재가 입을 열었다. “이제 여러분 책에 내용을 채워 보도록 할 건데요. 책의 제목은 <북바인딩 수업>이라고 정해볼게요. 이 시간 동안에 여러분께 생긴 일, 느낀 감정, 떠오른 생각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윤재는 내지 첫 장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책을 옆으로 돌려서 그 내용에 대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적어주는 것으로 책 속 내용을 채워 나가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여기서 함께 시간을 보낸 건 맞지만, 다 같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이 수업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으니 솔직하게 써볼까요.” 참여자들은 손에 색색의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었다. 색연필을 나눠준 뒤 윤재는 내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옆에 놓인 책장을 곁눈질로 가리켰는데 거기엔 윤재의 세 번째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윤재가 나에게 색연필을 건넸다. 글씨 쓰기 편하도록 끝이 뾰족하게 깎여 있었다. 윤재는 나를 향해 살짝 웃더니 몸을 돌렸다. 앞에 놓인 책의 표지를 넘기고 하얀 바탕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세 번째 책으로 윤재는 독립출판 작가들의 인터뷰집을 만들었다. 다섯 작가의 인터뷰를 싣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책을 만들기 직전, 윤재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윤재는 카페 아르바이트 휴무일에 물류 창고 일을 하러 갔다가 허리를 다쳐 원래 하던 아르바이트도 못 하게 됐다. 당시 나는 정규직 사 년 차로 호텔의 중식 레스토랑과 베이커리를 거쳐 연회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각종 포럼이나 세미나를 위해 준비해야 했고, 결혼식이 주말마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열렸다. 나는 손님들에게 웃으며 인사하다가 또 상사에게 웃으며 고개 끄덕이길 반복했다. 정신이 없을 땐 명찰을 착용하는 것도 잊었다. 내가 호텔 얘기를 하면 이모는 그만둬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모가 윤재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는 건 나중에 전해 들었다. 뭘 선택해도 길은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했든 윤재도 나도 마음껏 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윤재가 마지막 통원 치료를 받았다며 전화를 걸어와 독립출판 작가들을 인터뷰해서 책을 만들 거라고 얘기했을 때 나는 윤재가 답답하다고 느꼈다. 윤재가 책을 만들수록 윤재와 함께할 수 있는 미래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애초에 쉬운 관계도 아닌데. 불쑥 눈물이 나왔다.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다. “그걸 왜 만드는데?” 윤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윤재가 다시 입을 닫았고 나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냥 내가 남았어.” 윤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 근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냥 책을 만드는 내가 남았어. 나는 책이 남는 건 줄 알았지.” 윤재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테이블 위에는 손바닥만 한 책이 아홉 권 놓여 있었다. “다 적으셨으면 다른 사람의 책을 같이 완성해 봐요.” 책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윤재 앞에 오른쪽에서 넘어온 책이 놓였고 나도 옆 사람이 만든 책을 건네받았다. 내 앞에 차례로 전해지는 책들은 이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어떤 책에는 책방 공간에 대한 묘사와 거기서 얻은 느낌들이 적혀 있었고, 다른 책에는 책 만드는 과정과 재미있었던 점이 쓰여 있었다. 참여자들과 겪은 에피소드를 적어둔 페이지에서 나에 관한 내용을 읽었을 때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윤재의 책이 내 앞에 도착했다. 나는 민트색 표지를 넘겼다. 막상 쓰려고 하니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써봤어요.) 앞으로 북바인딩 수업을 쉬려고 했거든요. 책 만드는 것도 그만하려고 했고요. 엄마가 아프셔요. 큰 병은 아니지만 수술을 받고 잘 관리해야 한대요. 엄마 컨디션 때문에 일정이 당겨져서 오늘 수술을 받으셨는데 다행히 경과가 좋다고 연락이 왔어요. 한동안 엄마 옆에 있으려고 해요. 그래도 북바인딩 수업은 계속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서툴게 진행한 부분이 있어서 이번 참여자분들은 다음 수업에 한 번 더 오실 수 있도록 할게요. (그만 사과하라고 하셨지만 정말 죄송해요.) 책, 책이요. 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또 솔직하게 써보자면) 어영부영 책 만든다고 놓치고 산 게 많아요. 우선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싶어요. 못 본 척해 온 것을 이젠 제대로 보고 싶고요. (더 솔직하게는)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보고 싶어요. 오늘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모가 아프다는 말은 복도에서 들었지만 윤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오늘로 북바인딩 수업을 그만하려는 줄은. 그래서 나에게 와달라고 한 건가. 예전에 윤재에게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윤재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책 만드는 걸 쉬겠다는 윤재의 말도 뜻밖이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참여자들이 남긴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머님 쾌차하실 거예요, 작가님 팬인데 책도 계속 만들어 주세요. 다음에 또 뵐 수 있다니 좋네요, 같은 말들이 페이지 가득 적혀 있었다. 내가 윤재에게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병원에 있을 이모가 걱정됐다. 아까 복도에서 윤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수술 전에 엄마가 괜히 겁을 내면서 나한테 당부하더라고. 너를 잘 챙기라고.” 이모는 어째서 윤재에게 나를 부탁했을까. 어째서 윤재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어째서 엄마나 동생이 아닌 윤재에게 나를. 그래도 우선은 수술이 잘 끝난 게 다행이었다. 얼마 전 엄마가 두 번 연달아 전화를 걸어왔는데 아마 이모 소식을 전하려던 것 같았다.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로 나는 엄마의 전화를 피하고 있었다. 그날도 일이 바쁘니 다음에 전화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은 없었다. 선뜻 색연필을 들지 못하다가 윤재의 글을 다시 읽어봤다. 아까는 급하게 읽느라 놓친 것인지 이번에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윤재는 못 본 척해 온 것을 이젠 제대로 보고 싶다고 썼다. 나는 윤재가 어떤 일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반년 전 그날은 이른 장마가 끝난 직후라 여름 한복판에 들어선 듯 무더웠다. 나는 아침에 윤재에게 불쑥 전화해 만나자고 했다. 윤재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와도 만나서 얘기하자고 대답했다. 그동안 만나왔던 루트를 벗어나 윤재와 새로운 곳에 가보면 좋을 것 같았다. 처음 가는 곳에서 윤재와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우리는 우선 경복궁역에서 만나 같이 버스를 타기로 했다. 윤재가 잠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한 뒤 오겠다고 해서 나는 십 분 정도를 더 계산해 집을 나섰다. 십 분 정도 늦게 나가면 시간이 딱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한 시간이 지나서도 윤재는 오지 않았다. 경복궁역 앞 잡화점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밖으로 나와 다시 십여 분을 기다렸다. 윤재는 일이 좀 꼬인다며 금방 온다고만 말했다. 금방 온다고 하지 않았다면 어디 카페에라도 가서 기다렸을 텐데 윤재는 곧 도착할 것 같다고 했고 나는 윤재와 새로운 곳에 가려고 했으므로 땡볕을 참았다. 원래 약속했던 시간보다 삼십여 분이 지나서야 윤재가 지하철 역사 안쪽에서 뛰어 올라왔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했는데 왜 늦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아니, 윤재가 정말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기분이 상해서 윤재가 사과할수록 서운함만 더 커졌다. “뭐 하느라 늦었어?” “미안해.” “왜 늦었는데?” 진짜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윤재는 대답이 없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게 버스 때문에.” “버스?” “딴생각하다가 정거장을 놓쳐서. 괜히 좀 돌아오느라.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윤재의 답은 계속 늘어졌고 종종 끊겼다. 둘러댈 말을 찾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지하철로 왔잖아.” 내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래도 왔잖아.” 윤재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중간에 갈아탔어. 너무 오래 걸려서.” 말을 마치자마자 입을 다물었고 나를 앞질러서 걸어 나갔다. 윤재가 입은 파란색 티셔츠 위에 등을 따라 흐른 땀자국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날 가려고 했던 새로운 곳에 가지 않았고 나는 하려던 말을 하지 않았다.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마주 앉았다. 윤재는 유독 말이 없었고 내가 나서서 평소에 하던 얘기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잘되지 않아 곧 일어났다. 그 후로 한동안 윤재와 연락하지 않았다. 뜸하게 업데이트되는 윤재의 SNS 피드를 보며 나는 혼잣말했다. 그냥, 나를 보듯 너를 보며 살아야 했을까. 그날 내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윤재는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윤재의 글을 한 번 더 읽었다. 색연필을 손에 잡고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하얀 종이 위에 윤재의 이름을 썼다. 윤재를 부르고 나니까 쌓여 있던 말들이 술술 풀려 나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대로 모두 적었다. 나만 너무 길게 쓰는 게 아닌지, 내용이 너무 튀는 게 아닌지, 윤재를 난처하게 할 만한 말은 없는지, 신경을 쓰느라 자주 주저했지만 멈췄다가도 다시 적어나갔다. 그동안 못한 이야기들을 모두 적고 나서 추신을 남겼다. - 너의 다음 책이 또 뭘 남길지 궁금해. 색연필을 내려놓고 앞을 봤다. 윤재도 조금씩 손을 움직여 가며 누군가의 책에 메시지를 적고 있었다. 윤재가 잠깐 고개를 들었을 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어떤 책에 답글을 적고 있는지 윤재가 볼 수 있도록 앞에 놓인 윤재의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윤재가 쓰던 것을 멈추고 책을 덮었다. 나는 윤재의 책을 두 손으로 잡았다가 내려놓고 민트색 표지 위에 내 손을 포개어 올렸다. 나를 바라보던 윤재의 눈매가 조금씩 휘었다. 윤재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우리가 함께 만든 첫 번째 책이야,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문화마당] 죽어야 사는 작가/김동명 영화감독

    [문화마당] 죽어야 사는 작가/김동명 영화감독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다.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고 초가을이 원래 이렇게 추웠었나? 환절기마다의 레퍼토리를 꺼내 든다. 이에 더 심화된 나의 심경은 나이 때문에 노쇠한 육신 덕인지 아니면 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진 황량한 마음 덕인지 이번 초가을 날씨가 더 쌀쌀하고 시리기까지 하다는 것. 이것은 분명 유독 초라해 보이는 나의 현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오늘도 자칭 작가답게 책상 앞에 앉는다. 차가운 공기가 컴퓨터 자판에 올려놓은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엉덩이로 글을 쓴다는 업계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어찌어찌 모니터 안 백색 화면을 채워 간다. 그러나 밖에서 전해져 오는 한기를 막을 길이 없다. 작가로서의 불안한 현실은 얼어 버린 손끝 마디가 먼저 깨닫는다. 이때 누구도 응답 없는 문을 연신 두드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최악의 외로움이 엄습한다. 이러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산산조각 나 버릴 지경이다. 자꾸만 심사가 뒤틀린다. 제발 영원히 사랑받을 시나리오, 영화 한 편만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다면…. 오! 플리즈…. 아뿔사! 뒤틀린 심사는 이렇게 기형적 욕망을 낳기 마련이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는 영생을 원하는, 그것도 아름다움을 항상 유지하며 영원히 살기를 소망하는 여자들의 호러와도 같은 삶을 그린다. 한때 뮤지컬 스타였던 매들린(메릴 스트리프 분)은 어린 시절부터 앙숙이었던 헬렌(골디 혼)의 약혼자 닥터 멘빌(브루스 윌리스)을 빼앗는다. 이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헬렌은 14년간의 은둔 생활을 끝내고 매들린 앞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웬일? 주름 하나 없는 절대미모를 소유한 헬렌이라니! 그녀의 역주행 미의 비결이 궁금해진 매들린은 헬렌이 한 것처럼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영생의 묘약을 수소문하여 마신다. 그 후 결국 앙숙이던 매들린과 헬렌은 절벽에서 굴러 깨지고 부서져도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삶의 동반자가 된다. 영화의 원제 ‘Death Becomes Her’는 영생의 묘약은 곧 영원한 죽음임을 선언한다.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항상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기에 영원한 삶은 곧 영원한 죽음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당연히 이 공식의 끝에 멘빌의 성장이 있는데 매들린과 헬렌 사이를 갈팡질팡하던 심약자 멘빌만이 영생의 묘약을 거부한다. 영원히 사는 것은 악몽이라고! 뭐 당연한 결말이다. 지금 잠깐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영원히 산다는 건 가장 큰 형벌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글 쓰는 입장의 나로서 매들린과 헬렌의 영원한 젊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세상에 영원히 남을 마스터 피스에 대한 작가들의 욕망과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효기간은 다가오고 일궈 놓은 것 없는 이 시기에 ‘죽어야 사는 여자’가 선보이는 블랙유머를 단순히 웃어 넘기기가 힘들다. 근데 유효기간이라니. 유효기간이 있기나 한가? 있다면 작가로서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여전히 응답 없는 문 앞에서 ‘작품으로 영생할 수 있는 작가를 위한 묘약이 있다면’ 하고 위험한 상상을 해 본다. 악마가 속삭인다. “죽어야 사는 작가여. 과연 영생의 묘약을 마실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손끝이 얼어붙자 머리까지 얼어 버렸나. 오늘도 비루한 자칭 작가는 계절의 섭리까지 눈에 거슬린다. 추워진 가을 하늘을 째려본다. 미세먼지 없이 청명한 하늘은 볼만하네. 역시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다시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힘을 준다.
  • ‘여기는 대한민국 이어도입니다’

    ‘여기는 대한민국 이어도입니다’

    “이여도사나 아~아~, 이여도사나~아~아”. 제주도민의 가슴 한 켠에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호 ‘해녀노래’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환상의 섬 이어도가 사진으로 다시 깨어났다. 제주특별자치도 한라도서관과 이어도연구회는 8월 ‘섬의 날’을 맞아 ‘여기는 대한민국 ‘이어도’입니다’ 사진전을 15일까지 한라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 공동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제주의 역사이자 문화유산인 환상의 섬 ‘이어도’의 자연·해양·문화를 소개해 제주 전통문화 속 이어도를 알리고, 어린이·청소년이 이어도의 가치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에서 80해리(149㎞)를 더 가면 ‘보이지 않는 섬’ 이어도가 있다. 가장 높은 곳의 수심이 4.6m, 가장 낮은 곳은 55m로 복잡한 지형의 수중 암초다. 이 수중 암초 위에 2003년 6월 종합해양과학기지가 건설됐으며 SK텔레콤이 유일하게 휴대전화 기지국을 설치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어릴 적 ‘전설의 고향’(KBS2 TV)에서는 이어도에는 여자들만이 사는 낙원으로 그려졌다. 지상에서 남자가 배를 타고 오면 잘 대해주기 때문에 남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바꿔 말해 현실 속 이어도는 옛날 제주 사람들에겐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아들이나 남편의 영혼이 깃든 곳. 평소에는 바다에 잠겨 보이지 않다가 파도가 거세게 칠 때 드러나는 해저섬이기 때문에 이어도가 보이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역설이다. 최근에는 한국과 중국 각자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200해리 사이에 끼어있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관련 사진 20여점,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그것이 알고 싶다!’ 동영상 상영과 더불어 해양과학기지 3D퍼즐 만들기 키트를 배포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김숙희 한라도서관장은 “이번 전시가 코로나19 장기화로 문화예술 향유에 목마른 도민 모두에게 따뜻한 위안을 전하는 정서공간을 제공하기 바란다”며 “‘이어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투옥·고문 속에서도 유신독재에 저항… 죽음을 넘어 생명 노래[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투옥·고문 속에서도 유신독재에 저항… 죽음을 넘어 생명 노래[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지난 8일 김지하 선생이 별세했다. 1941년 신사(辛巳)생이니 우리 나이로 여든둘이다. 재작년쯤부터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지만 결국 생전에 뵙지 못했다. 누군가 세상을 등지면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표현을 하곤 하는데, 김지하 선생만큼 이러한 은유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할 만한 이도 드물 것이다. 선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목포와 원주라는 지명, ‘황토’와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언어의 섬광, ‘꽃 한 송이’라는 뜻의 본명 영일(英一)과 ‘언더그라운드’를 연상시키는 필명 ‘지하’(芝河)를 연쇄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실꾸리처럼 한없이 풀려 나오는 김지하 브랜드의 파상들은 해방 이후 한국 근대사를 아프게 증언하는 역사적, 미학적 원형을 모두 품고 있지 않은가.●감옥에서도 ‘문학’과 ‘사회’ 서적 탐독 선생의 험난한 생애는 이미 가계(家系)에서부터 암시된다. 증조부는 동학군에 참여했다가 돌아가셨고 조부는 노름으로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 아버지는 빨치산 경력으로 죽음을 맞을 뻔했지만 전기 기술을 가지고 있어 천행으로 살았다. 이처럼 가난과 몰락과 소외의 과정에서 선생은 실제적인 죽음도 여럿 보았다. 전쟁 때 뒷산에 수북하게 쌓인 흰옷 입은 시체들도 보았고 이념이 할퀴고 간 마을 사람들의 참화도 뚜렷이 목격했다. 선생이 말년에 펼친 생명사상은 어쩌면 이때 경험이 빚어낸 반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의 내면에서 생명과 죽음은 그렇게 호혜적 반사체가 돼 줬을 것이다.생명과 죽음이 서로를 껴안은 첫 줄기는 1960년 4월 혁명이었다. 1961년 5월 초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이 남북학생회담을 북쪽에 제안했을 때 선생은 남쪽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며칠 후 당시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가 있었고, 그네들이 추진했던 통일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선생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수배와 도피와 체포의 시간을 이어 갔다. 선생은 1964년 6·3항쟁에 참가하면서 첫 옥고를 치렀는데, 이때부터 투옥과 고문, 사형선고와 석방을 반복하는 젊은 날을 보냈다. 이미 선생은 국내외의 수많은 탄원과 강력한 구명운동으로 세계적인 저항시인의 상(像)을 구축한 상태였다. 유신독재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표상이자 민족문학의 상징으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신만의 위상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로터스상,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등 쟁쟁한 국제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인지도와 파급력을 갖추기도 했다. 어둑한 음각이지만 ‘시인 김지하’의 한 절정이 새겨졌던 시기였다. 삽화 하나. 어느 출판사 대표 한 분이 서울역에서 숙대입구 쪽으로 가는 헌책방에서 을유문화사 문고판 에스카르피의 ‘문학의 사회학’을 구했다고 한다. 이채롭게도 장서인(藏書印)은 어느 교도소 이름이었고, 책 뒤에 꽂힌 대출자 카드에는 ‘김영일’이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다. 김지하 선생이 복역했던 시공간과 일치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혼자 빌려 선생은 감옥에서마저 ‘문학’과 ‘사회’라는 두 기둥을 탐독했으리라.●저항문학의 극점기에 생명사상 싹터 1970년대의 언더그라운드에는 ‘3K’가 있었다. 김대중, 김민기, 김지하다. 정치와 노래와 시에서 그들이 던진 메시지는 암울한 시대를 때로는 비추고, 때로는 안타깝게 하는 흐릿한 등불 같았다. 바로 그때 서정적 비극성의 최전선으로 피어난 시집이 ‘황토’였다. “간다/울지 마라/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길/몸 팔러 간다”(‘서울길’) 이런 음색이 담긴 선생의 첫 시집은 선연한 흙빛을 따라 역사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다. ‘오적’(五賊)은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라는 미학적 장치를 통해 비판한 출중한 성취였고, ‘타는 목마름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개진해 간 뜨거운 노래의 성채였다. 이러한 성취는 저항문학의 극점이기도 했지만 이때부터 선생은 이미 생명사상의 맹아를 틔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감옥에 있을 때 운동을 하고 돌아와 누군가 감방 철창 쇠받침과 시멘트 틈에서 돋아난 풀에 물을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풀이 아니라 개가죽나무였다. 바람이 불어 흙먼지와 함께 날아든 씨앗이 시멘트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것이다. 선생은 거기서 진짜 생명을 보았다. 한낱 미물도 저렇게 스스로의 몸을 피워 올리는데 과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자기 연민과 다짐이 동시에 북받쳐 올랐다.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이채로운 책 두 권이 일본에서 출간된다. 작품집 ‘불귀’와 옥중투쟁기 ‘김지하는 누구인가’였다. 발행처는 ‘일본가톨릭정의와평화협의회’라는 곳이었다. ‘불귀’에는 당시 국내에서 읽을 수 없던 시편들과 1975년 5월 서울구치소에서 쓴 ‘양심선언’ 등이 담겼다. 일부 글은 한일대역으로 실렸다. 옥중투쟁기에는 선생의 옥중 메모 친필과 각종 법정 자료들이 실렸다. 이미 선생은 한반도 바깥의 시인이었다. 선생의 30대가 그렇게 저물어 갔다.●1980년대 동학·생명사상 창의적 접목 불혹의 연대 1980년대가 돼 선생은 감옥을 나와 동학과 생명사상을 창의적으로 접목해 ‘애린’, ‘이 가문 날에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등을 썼다. 선생이 주창했던 ‘흰 그늘’과 ‘율려’의 미학은 생명사상의 정점에서 피어난 고갱이였을 것이다. 특별히 ‘흰 그늘’은 후기 미학을 집약하는 비유적 표상이었는데 선생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4·19 직후 서울농대에서 겪은 스무살 때의 아득한 흰 밤길의 한 환상, 민청학련 무렵인 서른세 살 때의 우주에의 흰 길의 한 환상, 재구속되어 옥중에서 백일참선에 돌입했던 서른여덟 살 때의 흰빛과 검은 그늘의 교차 투시, 해남에서 두 계열의 연작시 ‘검은 산, 하얀 방’의 분열 구술, 목동 시절의 컴컴하고 침침한 ‘쉰’의 그늘과 일산 이사 직후의 그 눈이 멀 듯한 ‘일산시첩’의 흰빛들의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날카로운 모순 대립. ‘흰 그늘’은 나의 미학과 시학의 총괄 테마가 되었다.”(‘흰 그늘의 길 1’, 2003) 그렇게 선생의 생애는 역사의 ‘황톳길’에서 생명의 ‘흰 그늘’로 나아갔다. 1990년대 이후 타계할 때까지 선생이 드문드문 보여 준 정치적 선택은 세상을 뜨겁게 달구면서 비판과 논란을 이어 갔다. 1991년 강경대 사건 때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에 쓴 “죽음의 굿판 당장 집어치우라”라는 표현은 두고두고 선생을 따라다니는 전향문 같은 역할을 했다. 죽음의 흐름을 막아 보고자 하는 충심을 읽을 수도 있었지만 강대강(强對强) 대치 상황에서 그러한 속성은 속절없이 잊히고 묻혀 갔다. 이러한 굴곡을 한없이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시인 김지하’, ‘사상가 김지하’는 척박한 한국문학사의 돌올한 유산이자 그때그때의 맥락 속으로 귀환할 강렬하고도 흐릿한 등불로 남을 것이다. 숱한 투옥과 고문의 형극 속에서, 불온을 넘어 저항으로, 폐허를 건너 생명으로, “황톳길에 선연한/핏자국”(‘황톳길’)을 넘어 지금-이곳까지 영욕의 세월을 건너온 선생의 죽음을 마음 깊이 애도한다.●한 시대 전범·한국문학으로 우뚝할 것 앞으로도 우리는 선생이 남긴 아름다운 서정시 ‘황톳길’, ‘녹두꽃’, ‘빈 산’, ‘애린’을 깊은 감동으로 읽을 것이다. 목청껏 불렀던 ‘새’, ‘금관의 예수’, ‘타는 목마름으로’를 때가 되면 줄탁동시의 기운으로 소환할 것이다. “왜 날 울리나 눈부신 햇살 새하얀 저 구름/죽어 너 되는 날의 아득한 아아 묶인 이 가슴”,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그 누가 있어 한 시대를 이렇게 어둑하고도 아름답게 돌파해 갔겠는가.자연인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그래도 ‘시인 김지하’의 언어는 한 시대의 전범이자 한국 문학의 선연한 역사로 우뚝할 것이다. 이제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그 시간/다시 쳐온 눈보라”(‘1974년 1월’)를 맞으면서, 우리는 선생의 언어를 빌려 ‘저항’과 ‘생명’이라는 차원을 새롭게 사유해 갈 것이다. 앞으로 선생에 대한 여러 해석과 평가가 따르겠지만, 첨예한 쟁점으로 김지하 담론이 펼쳐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한 시대의 거인을 추모하면서 선생의 평안을 마음 깊이 빌 뿐이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전통 농업유산 스토리텔러… “잊혀져 가는 마을에 색을 입히죠”

    전통 농업유산 스토리텔러… “잊혀져 가는 마을에 색을 입히죠”

    “무덤 속 문화재는 언제라도 발굴하면 되지만 농촌 어르신들이 갖고 있는 전통 지식은 지금이 발굴해 기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예요.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전통 지식 또한 없어집니다.” 농촌진흥청(농진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환경자원과 정명철 농업연구사는 마을을 다니며 전통 농업유산을 발굴하는 이야기꾼이다. 마을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특색 있는 마을 문화를 찾아 보전하고 선조들이 대를 이어 전승해 온 농업문화와 토지이용 방법을 기록한다. 울릉도 밭농업, 경북 의성 전통수리농업, 경남 고성 해안지역 둠벙관개시스템, 전북 완주 생강 전통농업 등이 정 연구사의 손을 거쳐 국가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 인사혁신처 도움으로 15일 서울신문과 만난 정 연구사는 “연구 현장이 농촌이고, 사람과 만난다는 점이 이 직업의 매력”이라고 소개했다. 정 연구사가 처음 인연을 맺은 마을은 충남 금산군 부리면 평촌마을이다. 60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을 6개월간 수시로 찾아 집집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마을에는 농바우라는 바위가 있어요. 기계로 깎아 놓은 듯 네모반듯해 농바우라고 부르는데, 가뭄이 들면 마을 주민들이 이 바위에 동아줄을 걸쳐 잡아당기는 ‘농바우끄시기’를 해요. 여자들만 참여하는 기우제로 남자들은 근처에도 못 갑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 여자들이 옷을 다 벗어던지고 발가벗은 채 계곡에 들어가 소쿠리로 물을 끼얹으며 날궂이를 합니다. 이 요상한 꼴을 보다 못한 하늘이 노해 비를 내려준다는 거예요.”마을 어르신들을 통해 전해지던 평촌마을만의 특이한 기우제는 정 연구사의 손을 거쳐 충남 무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됐다. 여기에 평촌마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각종 농촌체험을 더해 민속체험 프로그램도 탄생했다. 그는 민속문화 발굴 작업을 “마을에 색을 입히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주민들과 몇날 며칠 이야기하다 보면 옛날 노래도 쑥쑥 뽑아낸다. “6개월 정도 마을을 다니면 주민들과 매우 친해져요. 저한테 별 이야기를 다 하시거든요. 제가 ‘겨울 농한기 때는 뭐하세요’라고 물었더니 마을 어머님들이 ‘물장구를 쳤지’라고 하시더라고요. 항아리 뚜껑에 물을 채우고 박을 뒤집어엎어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장단이 아주 기가 막혀요. 이걸 7~8명이 함께 하는 공연 프로그램으로 만들자고 했지요. 공연 때 마을 주민들이 나와 덩실덩실 춤을 췄어요. 잊히고 사라진 것들을 되돌리니 흥겹기도 하고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정 연구사의 책상에는 이 마을 주민들이 준 감사패가 놓여 있다. 미사여구 없이 ‘고마워요!’라고 적힌 이 순박한 감사패를 그는 애지중지한다. 정 연구사는 “마을의 민속 자원과 이야기를 발굴하고 잘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문화 콘텐츠까지 만드는 작업이 스토리텔링의 완성”이라고 설명했다. 농업 유산을 발굴할 때도 그는 항상 스토리를 입힌다. 사람이 만든 문화이기 때문에 스토리를 넣지 않으면 그 맛을 온전히 살리지 못한다.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울릉도 화산섬 밭농업을 발굴할 때도 그는 울릉도를 수차례 오가며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울릉도는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섬이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척박한 자연환경에 도전하며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험준한 산간 지형에 맞춘 경사지 농업이었다. 경사지의 최고 기울기가 63도에 이른다. “올려다보면 까마득한 곳에서 부지깽이 등 나물 농사를 지어요. ‘이렇게 높고 경사가 심한 곳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으세요’라고 물었더니, 할머니 한 분이 ‘우리는 하나도 안 힘들어. 허리 굽힐 일 없이 서서 호미질을 할 수 있거든’ 하셨어요. 예전에는 산꼭대기 나무에 쇠줄을 걸어 암벽등반 하듯 밭을 올랐다고 해요. 지금은 모노레일이 설치돼 있어요.” 경사가 높으면 물이 고이지 않고 양분도 바로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농사를 지을까. 정 연구사는 조사를 마치고 배를 타러 포구로 나오다가 해답을 찾았다고 한다. “뱃고동은 울리는데 해무가 잔뜩 끼어 몇 걸음 앞에 있는 배조차 보이지 않는 거예요. 알고 보니 이 해무가 정오까지 섬을 휘감고 경사지 밭에 수분을 공급해 주고 있었어요. 양분은 울릉도 칡소를 활용해요. 훌쩍 자라 질긴 나물을 소에게 먹이고, 소의 분뇨를 퇴비로 씁니다. 퇴비는 산나물을 다시 건강하게 키워 줍니다. 이걸 경축순환농법이라고 해요. 자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투여하는 농업이죠.”2018년 의성전통수리농업을 발굴한 과정도 흥미롭다. 학회에서 만난 한 교수로부터 ‘경북 의성군 금성산에 오르니 아랫마을 평야지역에 못이 드글드글하더라’는 얘기를 듣고 의성으로 차를 몰았다. 정말 금성산 일대 평야지역에만 둑을 쌓아 물을 가둔 1500여개의 못이 있었다. 특히 못마다 태조실록에 기록된 전통 배수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수통에서 못종을 뽑으면 못물이 일시에 배수돼 마늘밭을 논으로 바꿔 놓아요. 6월 중순쯤 마늘 수확이 끝나면 물을 채워 벼농사를 짓는 거죠. 마늘 재배 후 벼를 이모작하려면 짧은 시간에 많은 물이 필요한데, 이때 못 수문을 열어 마른 한전(旱田)을 일시에 수전(水田)으로 바꿔요. 우린 이를 ‘한전 수전 극적 전환 시스템’이라고 불렀어요.” 농업은 갈수록 첨단화되는데, 이런 농업유산 발굴이 왜 필요할까. 정 연구사는 “조상의 지혜를 보전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작업이지만, 국가농업유산에 콘텐츠를 결합시켜 특색있는 관광자원으로 만들면 파급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농업유산이나 마을 전통 자원을 발굴하려면 항상 현장에 있어야 하고 주민들을 만나야 해요. 생생한 기록들이 주민들 입을 통해 나오는 데 지난해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마을을 다니지 못하니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70대만 해도 책이나 매체를 보고 배운 학습된 지식을 갖고 있어요. 80대 정도는 돼야 옛날 지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노인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지요. 이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더 많은 기록을 남기려면 서둘러야 해요.” 그는 전통 지식을 연구하는 농업연구사의 자질로 ‘관심’을 꼽았다. “농업연구사는 연구직이니 우선 학문적인 자질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촌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에요. 어른신들의 한평생 지식을 끌어내려면 열정도 필요해요. 자칫 사라질 뻔한 전통유산, 농업유산을 붙잡아 동영상 등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곧 살아 있는 문화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김금숙의 만화경] 다시 초심으로 붓을 들다

    [김금숙의 만화경] 다시 초심으로 붓을 들다

    한밤중에 잠이 깼다. 목이 말랐다. 머리맡에 둔 물잔을 집어들다가 놓쳤다. 물이 쏟아졌다. 하필 한가득이었다. 침대 옆에는 책들이 쌓여 있었다. 자기 전에 읽으려고 두었던 책들이다. 얼른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수건을 꺼내 바닥을 닦았다. 여전히 물이 흥건했다. 수건을 또 하나 꺼내 닦았다. 다행히 책은 젖지 않았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목이 말랐던 것이 생각났다. 물을 가지러 아래층까지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려고 다시 누웠다.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보름달이 떴나? 잠이 오지 않은 날을 생각해 보면 희안하게도 늘 보름달이 떴던 날이었다. 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죽음 때문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두 예술가의 죽음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작년 어느 작가의 죽음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접했다. 나는 그녀의 계정을 팔로하지 않았다. 가끔 그마저도 아주 가끔 눈팅만 했다. ‘좋아요’ 누르며 힘내라는 메시지도 보내고 그녀의 책도 사서 읽고 선물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강했다. 그런 마음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을 생각나게 했다. 어떤 사람은 서른 살에 네 살 아이를 두고 떠났다. 아주 오랜 시간을 아팠다. 그녀의 육체적 기능이 소멸되는 과정을 보았다. 이십 년 전이라 잊은 줄 알았다. 내 마음은 여전히 아파서 신음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무시하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또 하나의 죽음. 김기덕 감독이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파리에서였다. ‘수취인불명’을 보고 며칠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쁜 남자’를 보고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한 심리에 소름이 돋고 바르르 떨렸다. 그의 영화는 내가 다니던 대학교 근처 화양리에 있던 술집에서 붉은 조명 아래 젊은 여자들이 거의 속옷 바람으로 서 있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미술학교에 다닐 때였다. 어딘가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차가 독일과의 국경선에 있는 도로에 잘못 들어섰다. 도로 양옆은 숲이었다. 그 어두움 속에 여자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띄엄띄엄 서 있었다. 젊었다. 키가 컸다. 함께 있던 친구가 말했다. 동유럽 여성들이라고. 아마도 마피아가 저 여자들 뒤에 있을 거라고. 김기덕의 ‘미투’에 대한 기사가 났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 놀라지 않았을까? 그는 자신이 해외에서 코로나 합병증으로 생을 마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한 예술가에게는 지긋지긋하게 아팠겠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고, 다른 예술가에게는 느닷없이 죽음이 왔다. 한 예술가의 죽음 앞에서 많은 사람이 애도했고, 또 다른 예술가의 죽음 앞에서는 ‘거장의 민낯’이라며 애도보다 그의 삶을 비판했다. 시대마다 보는 시각과 각도의 차이가 있지만 지금 이 시대보다 예술가의 삶이 중요했던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전 시대에는 남성 위주의 시각으로 예술 작품과 예술가의 삶이 평가됐다면 오늘은 다르다. ‘미투’ 전에는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아름다운 그림을 무조건 사랑했다면 이후에는 고갱의 그림 속 여성들이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데에 화가의 삶과 그림의 가치가 다시 평가되는 이유다. 나는 올해 50이다. 40대를 떠올려 본다. 지난 10년을 마치 하루를 산 것처럼 살았다.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검은 머리가 흰머리가 되는 줄도 모르게 작업했다. 앞으로 나는 몇 권의 만화책을 쓰고 그릴 수 있을까? 잠시 눈을 감는다. 숨을 길게 내리 쉬어 본다. 문득 발이 시리다. 기가 막힌 깨달음이 있을 줄 알았건만 발이 시려 눈을 뜨다니. 픽 웃음이 난다. 빈 잔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자던 당근이와 감자가 깰까 봐 최대한 살금살금 걷는다. 따뜻한 물을 정수기에서 받는다. 컵을 두 손으로 쥐고 가슴에 댄다. 부엌 창밖을 내다본다. 마른 나무에 잎사귀가 몇 개 달려 있다. 닭이 운다. 새벽이다. 밤은 아직 춥지만 낮은 벌써 봄 햇살이다. 삶과 예술이 하나 되게 작업하며 살자 싶다. 처음 만화를 시작했을 때의 초심으로 다시 붓을 든다. ※그동안 ‘김금숙의 만화경’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작품으로 여러분을 곧 찾아뵙겠습니다.
  • [핵잼 사이언스] 1%만이 가진 ‘살 찌지 않는 유전자’ 특징 찾았다

    [핵잼 사이언스] 1%만이 가진 ‘살 찌지 않는 유전자’ 특징 찾았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태생적으로 가진 ‘살이 찌지 않는 변이 유전자'가 발견됐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및 각국 전문가가 합류한 공동 연구진은 2000년부터 에스토니아에 거주하는 20~44세 국민 4만 7102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 연구 참여자들의 유전자 특징 및 체중과 건강 등을 비교 분석한 결과, 마른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AKL 유전자의 특징을 확인했다. 이 변종 유전자는 세포 성장에 관여하는 역형성 림프종 인산화 요소라는 단백질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쥐와 파리 등을 대상으로 AKL 유전자의 기능에 대해 실험했다. 쥐들에게 맥도날드 식단으로 알려진 고열량의 음식을 먹게 한 결과, 정상 쥐는 비만이 됐지만 AKL 유전자를 제거한 쥐는 마른 상태를 유지했다. 또 연구진은 체질량지수(BMI)가 18 미만인 사람들의 유전자 지도와 정상 체중인 사람들의 유전자 지도를 비교한 결과, 깡마른 체형의 사람들에게서는 AKL 유전자가 변이 됐거나 비활성화 돼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유전자 특징을 가진 사람은 전체 조사 대상 중 1%에 불과했다. 연구진은 이 유전자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이 비만을 치료하는 열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기대했다. 연구에 참여한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조세프 페닝어 박사는 “누군가는 고지방의 음식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으면서도 건강한 신진대사를 유지한다. 많이 먹어고 운동을 덜해도 몸무게가 늘지 않는 것은 선천적인 유전자의 특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다수의 비만 관련 연구는 뚱뚱한 사람과 유전자 간의 상관관계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만,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이제는 날씬한 사람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새로운 영역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진은 파리와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에스토니아 한 국가가 아닌 여러 국가의 인종을 대상으로 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생명과학분야의 최고 학술지 셀(Cell) 최신호에 실렸다. 사진=123rf.com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웃어 주는 여자들? 웃겨 죽는 여자들!

    웃어 주는 여자들? 웃겨 죽는 여자들!

    “이 잘 만들어진 리얼돌도 부족한 점이 하나 있더라고요. 남성분들이 간과한 게 있는데 이 리얼돌이 롱런하려면 이 기능이 추가돼야 해요. 모순적인 명령을 실행하는 기능요. ‘천박하고 퇴폐적이되 기품을 잃지 마.’”(고은별) “‘미쳐도 곱게 미쳐라’는 여자들한테 하는 이야기죠. 여자가 미치면 머리에 꽃을 꽂잖아요. ‘너네가 미쳤다고 꾸밈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어’라는 메시지가 담긴 거죠.”(김보은) 지난 7일 토요일 오후 8시. 서울 용산구의 한 공연장에 관객 100여명이 모였다. 무대 위에 놓여 있는 건 마이크 스탠드와 마이크뿐. 텅 빈 무대에 차례로 오른 여성 7명은 마이크를 잡고 10분씩 ‘농담의 향연’을 펼쳤다. 가부장제의 부조리함부터 연극에서 여성 캐릭터에게 요구되는 이미지, 직장인의 애환, ‘29금’ 성적 농담까지 솔직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우스꽝스러운 분장도, 화려한 무대 장치도, 재미를 극대화할 소품 하나 없이 오로지 입담만으로 무대를 채운 이들은 여성 코미디언으로만 구성된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 ‘블러디 퍼니’다. 이날 첫 정기공연을 선보인 블러디 퍼니의 반전 가득한 이야기에 관객들은 한 시간 30분 동안 깔깔대며 환호했다. 국내에서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스탠드업 코미디가 최근 몇 년 사이 활기를 띠고 있다. 방송인 유병재와 박나래가 넷플릭스를 통해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선보였고, 지난달에는 KBS가 박나래를 진행자로 내세운 ‘스탠드업’을 방영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방송뿐만 아니라 홍대 인근 공연장이나 호프집 등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현장에서도 스탠드업 코미디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지만 남성 중심의 웃음 코드가 뿌리 내린 한국에서 여성 코미디언들의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여자는 남자보다 웃기지 않는다’는 편견 아래 여성은 코미디에서 주체보다는 객체에 머물 때가 많았다. 지난해 2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스탠드업 코미디언 최정윤씨가 지난해 말 여성으로만 구성된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 ‘블러디 퍼니’를 꾸리게 된 것도 이와 맞닿아 있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뒤 번역가, 외신 기자 등의 일을 했던 최씨는 지난해 초 우연히 오픈 마이크(아마추어 공연자가 설 수 있는 무대)에 도전할 기회를 얻어 한 달간 무대에 섰다. 그러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코미디언의 성지’로 여겨지는 미국 뉴욕의 한 코미디 클럽에서 두 달 동안 수업까지 듣고 돌아왔다. 현재는 문을 닫았지만 지난해 6월 문을 연 스탠드업 코미디 전용 클럽 ‘코미디 헤이븐’에서 유일한 여성 출연진으로 무대에 섰던 최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해졌다. 여자 코미디언은 왜 이렇게 적을까. 그래서 최씨는 스스로 ‘웃기는 여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사라진 여자들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서다. 최씨는 먼저 코미디 헤이븐에서 진행된 오픈 마이크에 종종 참여한 최예나씨를 섭외했다. 이후 두 사람이 다른 여성 코미디언들과 함께 서울과 부산에서 진행한 ‘그날’이라는 스탠드업 공연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고은별, 이슬기씨가 팀에 합류했다. 지난 10월에는 스탠드업 코미디와 연극을 결합한 공연에서 협업한 것을 계기로 연극배우 경지은, 김보은씨도 블러디 퍼니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정기공연을 이틀 앞둔 지난 5일 만난 이들은 “여자들은 늘 ‘웃어 주는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회의 편견을 넘어 여자도 ‘웃기는 사람’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여성 코미디언이 적은 이유는 왜일까요. 최정윤 “제 생각엔 웃기는 여자도 되게 많고 코미디를 하고 싶어 하는 여자도 많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여자가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요. 결혼식 사회자만 봐도 여성들이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나이 있는 희극인 남성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몇 번 들었어요. ‘(코미디를) 짜는 여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잘 짜는 여자들은 드물다’고요. 저는 여자들이 코미디를 잘 못 짠 게 아니라 본인의 아이디어를 올릴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해요.” 최예나 “제가 예전에 돌잔치에서 사회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남성분이 저를 보더니 ‘여자가 하네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엔 많은 뜻이 내포돼 있잖아요. 일단 사회를 맡은 여자를 처음 본다는 의미가 있었고 사회를 맡은 저를 약간 못 미더워하는 뉘앙스도 묻어 있었고요. 이런 분위기가 코미디언들 사이에도 있어요. 여자 코미디언이 준비한 코미디는 남자 코미디언들이 많은 곳에서는 공감을 못 얻고 뒤로 밀리거든요.” -여성 코미디언들로만 이루어진 팀이라서 좋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최정윤 “여성 동료들과 공연을 하면서 느끼는 게 웃음을 주는 엔터테인먼트 판에서 저희는 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저희처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고민을 더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코미디의 깊이나 내용의 질적인 부분에서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서로를 보면서 ‘얼마나 잘하나 보자’가 아니라 ‘잘했다’는 응원을 해 주니까 서로 성장할 수 있고요.” 이슬기 “방송에 출연하는 남성 코미디언들을 보면 자신들끼리 서열화된 모습을 개그로 많이 쓰잖아요. 어떤 사람은 신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라인을 따른다’고 언급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되면 누군가는 특정 역할 이상을 맡지 못하게 되잖아요. 저희들끼리는 누가 1등인지 누가 우두머리인지 상관하지 않아도 되니까 눈치를 볼 필요도 없죠.” -각자 생각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매력은 뭔가요. 최예나 “저는 방송사 코미디언 공채 시험을 준비하면서 학원을 다녔었는데 여자들은 주체적으로 웃기기보단 어떤 특정 역할로 많이 쓰여요. 예쁜 역할, 못생긴 역할, 뚱뚱한 역할, 마른 역할 이런 식으로요. 콩트를 짜면 저 같은 경우는 뻔한 역할만 맡았어요. 아줌마나 혹은 마르고 예쁜 여자를 시기하는 못된 선배 같은 역할요. 스탠드업 코미디에서는 남이 부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내고 싶은 목소리를 내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색깔을 보여 줄 수 있어서 좋아요.” 최정윤 “한국에서 코미디언이라고 하면 끼도 엄청 많고 뭔가 나대야 되고 무대에서 기도 안 죽는 사람이어야 하잖아요. 스탠드업 코미디 자체는 내가 어떤 성향인지는 전혀 상관없거든요. 내 매력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농담을 잘하면 좋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될 수 있다는 게 멋있죠.” 이야기의 결은 다르지만 이들이 코미디의 소재로 삼는 건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애환과 고충이다. 지난해 스탠드업 코미디 개론서인 ‘스탠드업 나우 뉴욕’(왓어북)을 펴내기도 한 최정윤씨는 “뉴욕에서 코미디 수업을 들었을 때 선생님이 자신의 감정에 가장 큰 반응을 일으키는 이야기에 재미가 숨어 있다고 했다”면서 “아무래도 일상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최정윤 “저는 낮에는 구성애 선생님이 운영하는 ‘푸른아우성’에서 성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거든요. 성교육 수업을 할 때 아이들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을 때가 많아요. 거기서 이런저런 재밌는 에피소드를 많이 가져옵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릴 때 제대로 된 성교육을 못 받고 성인이 된 탓에 사회문제가 많이 생기는데 그런 면에서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려고 해요.”김보은 “저는 문화예술계 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도 하고 있어요. 무대 예술 작품을 만들 때 왜 젠더 의식이 필요한지 현재 작품들은 어떤 점이 문제인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강의를 할 때 다 하지 못한 말들을 스탠드업 무대에서 하기도 해요.”고은별 “사회적인 이슈 중 여자랑 연관이 없는 게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코미디의 소재로 엮을 수 있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정기공연에서 리얼돌에 대한 이야기도 할 예정이에요.” 아무래도 대중에게 익숙한 코미디는 ‘코미디 빅리그’나 ‘개그 콘서트’와 같은 짜여진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콩트나 ‘몸개그’라고 불리는 슬랩스틱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여성 코미디언은 조롱거리나 희화화의 대상으로 소비될 때가 많다. 남성의 관점에서 얼굴이나 몸매를 평가받고 성적인 농담이나 여성 혐오 발언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기성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여성 코미디언들이 불편한 농담의 대상이 돼야 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최예나 “코미디언 공채를 준비하면서 학원에 다닐 때 성차별 때문에 스탠드업 코미디 쪽으로 도피했거든요. 코미디를 빙자해서 여자 위에 남자가 올라가서 성행위를 하는 듯한 몸짓을 하기도 해요. 경력이 얼마 안 되는 여자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그럴 때 가만히 있지 않고 대들면 예민하고 유별난 사람 취급을 하고요. 여자에 대한 혐오가 너무 심하죠.”경지은 “제 코미디의 소재가 자기 비하적이고 자조적인 내용이거든요. 실제로 외모나 행동이 여성스럽지 못해서 조롱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속한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 자신을 더 격하해서 웃기거나 남자 선배가 내 외모로 웃기려고 할 때 그냥 수긍하기도 했어요. 스탠드업 무대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이제 제가 더이상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 쪽으로 변화했다는 걸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런 점에서 박나래씨가 도전한 스탠드업 코미디쇼 ‘박나래의 농염주의보’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고은별 “내용에 대한 비판을 하기 전에 유명세 있는 사람이 새로운 시도를 한 건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자체가 대단하고 용기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박나래씨 덕분에 스탠드업 코미디에 대한 조명도 많이 되고 있거든요. 관심이 전무하던 상황에서 그 자체로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최예나 “저는 현장에서 직접 공연을 봤는데 반응이 진짜 뜨거웠어요. 어떤 분은 미국 여성 코미디언 앨리 웡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삶이 바뀌기도 했는데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서 아쉬웠다고도 하시더라고요. 제가 생각할 땐 미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여자들의 스펙트럼은 넓고 색깔도 다양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서는) 박나래씨 한 분이 선보인 거니까 그분만 보고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일단 물꼬를 터 줘 고맙죠.”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가요.이슬기 “앞으로 두 달에 한 번씩 정기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지난 9월부터 격주에 한 번씩 해방촌에서 진행하고 있는 오픈 마이크도 계속해서 운영할 예정이고요. 재즈 보컬리스트, 래퍼 등과 협업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날 생각입니다.” 최정윤 “저는 언젠가는 각자 한 시간씩 스탠드업 쇼를 할 수 있으면 멋있을 것 같아요. 한 시간을 메운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어떤 사람은 3년이 걸릴 수도 누군가는 10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모두 다 그걸 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김보은 “저는 다른 여성들도 스탠드업 코미디에 관심을 가져서 꼭 저희 팀이 아니더라도 자신들만의 크루를 꾸려서 코미디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최예나 “나중엔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끼리 타이틀을 걸고 대항전을 해도 재밌겠네요(웃음).”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서울 중구, ‘2019 프린팅 디자인 위크’ 개최

    서울 중구, ‘2019 프린팅 디자인 위크’ 개최

    서울 중구는 오는 17일부터 19일까지 한국 인쇄 메카인 충무로 일대에서 ‘2019 프린팅 디자인 위크’를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 중구에는 모두 5259개의 인쇄산업체가 있는데 이 중 충무로에만 약 4000여개가 몰려 있다. 이에 구에서는 충무로의 핵심사업인 인쇄산업을 홍보하고 브랜드 가치 향상을 위해 이번 축제를 기획했다. 행사는 크게 명보아트홀 광장과 피제이호텔 옆에 있는 A&D빌딩, 충무로 인쇄거리 등 3곳에서 열린다. 축제의 메인무대라 할 수 있는 명보아트홀 광장에서는 ‘충무마켓’이란 제목으로 행사가 진행된다. 참가자들의 사진을 촬영해 포스터 레이아웃, 충무로 거리와 합성해 자신만의 아트 포스터를 만들어 볼 수 있다. 현장에서 선택한 글귀를 흰색 티셔츠에 보라색 텍스트로 프린팅하는 ‘당신의 T by 충무로’도 눈길을 끈다.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업로드하면 추첨을 통해 쿠폰을 선물한다. 충무로 인쇄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제지 등으로 만든 조형물 앞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을 운영하고, 행사장 3곳에 있는 공간을 방문해 스탬프를 찍은 사람들 중 추첨을 통해 제지회사에서 준비한 예쁜 샘플집을 전달하는 ‘스탬프 랠리’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중구 인쇄거리 중간을 관통하는 마른내로에 자리잡은 4층짜리 A&D빌딩은 ‘프린팅 팝업빌리지’로 운영된다. 따라서 충무로 인쇄소에서 보유 중인 다양한 인쇄제품들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부스를 마련했다. 지역 내에 위치한 동국대 창업동아리 학생들이 만든 제품들을 판매하는 ‘Next 메이커스’ 프로그램도 눈여겨 볼만하다. 19일에 진행하는 독립서점 코너는 독립서점 운영자들이 만든 보유 작품들을 직접 보고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사전에 신청한 독립서적 작가들이 충무로 인쇄소에서 20부씩 만든 한정판 제품들을 선보인다. ‘From 인쇄소 워크샵’은 자기만의 책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프로그램이다. 행사에 함께 온 가족 단위 방문객들을 위해 우리 아이들을 위한 책 만드는 법과 인쇄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종이의 다양한 쓰임새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최근에 관심이 높아진 독립출판의 출판 방법부터 컨텐츠 제작까지 강연 형태로 알려는 워크샵도 마련했다. 인쇄방법 중 하나인 실크 스크린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코너도 준비해 참가자들이 직접 에코백에 도안을 찍어볼 수 있다. 아울러 인쇄의 기본 원리인 레터 프레스를 이용해 나만의 수첩을 만드는 프로그램도 이용하면 좋다. 이렇게 완성된 제품을 SNS에 올린 사람 중 추첨을 통해 인쇄 굿즈를 선물할 계획이다. 또한 충무로에 위치한 인쇄소를 방문해 제지 선택에서부터 컨텐츠 편집디자인, 출력, 제본 과정을 볼 수 있는 ‘인쇄 어디까지 가봤니?’도 재미가 쏠쏠하다. 충무로 인쇄거리 일대의 사진찍기 좋은 인쇄거리 7경을 선정해 사진을 찍어오는 참여자에게 출력한 사진을 제공하고, 충무로 인쇄골목 안에 위치한 오래된 슈퍼마켓에서 사용할 수 있는 라면 또는 커피 쿠폰을 전달한다. 인쇄거리의 3곳에서는 작가들의 짧은 시가 새겨진 문장 카드를 전시하고, 참여자들이 직접 골라 맞춤형 컬렉션 북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서양호 중구청장은 “충무로, 을지로 일대가 젊게 변하고 있다. 청년 디자이너들과 예술가들이 유입돼 옛 것을 현대적 감성에 걸맞게 되살리고 있다. 구에서도 이런 변화에 발맞춰 이번 축제를 기획했다”면서 “이번 축제에서 중구의 대표 도심산업인 인쇄산업의 새로운 변화와 발전가능성을 몸소 체험해 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인도의 숨겨진 얼굴 열여섯…산비탈 사이 골짜기 너머 소박한 행복

    인도의 숨겨진 얼굴 열여섯…산비탈 사이 골짜기 너머 소박한 행복

    인도 나갈랜드州 코히마·자카마 인도 동북부 끄트머리, 히말라야 자락에 자리한 마니푸르주의 임팔공항에 도착했을 때 여행자를 반긴 건 맑은 공기였다. 미세먼지 가득한 한국의 공기와 질이 달랐다. 목마른 사람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듯 게걸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상쾌한 나무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하지만 불행하게도 맑은 공기는 여기까지였다. 곧 엄청난 먼지를 마시게 된다).임팔공항에서 만난 가이드 에이프릴은 나갈랜드주의 가장 큰 도시인 코히마까지는 차로 약 4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거리는 고작 150㎞였다. 이 말은 도로 상태가 그만큼 좋지 않다는 뜻. 실제로 나갈랜드주를 여행한 사흘 동안 포장도로는 10㎞도 달려 보지 못한 것 같다. 지금도 코히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먼지와 급커브다. 해발 2000m의 산자락에 들어선 이 도시의 모든 도로는 공사 중이었고 언제나 수많은 차들로 정체 상태였다. 차들은 전부 뽀얀 먼지를 쓰고 있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채 길을 걸었다. ●몽골로이드계 나가족… 16개 부족 공존 나갈랜드는 인도 동부에 자리한 주다. 미얀마 북서부에 접하고 있다. 주도는 코히마. 주 전체 인구는 220만명으로 우리나라 충청남도 인구와 비슷하다. 이 가운데 코히마에 90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 몽골로이드계 민족인 나가족이 많이 거주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인도인과는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한때 아삼주에 속했지만 나가족이 꾸준히 분리독립운동을 한 결과 1963년에 나갈랜드주가 만들어졌다. 늦은 밤 코히마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욕실 문을 열었을 때 온수기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뭔가 예감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더운 물은 나오지 않았다. 프런트에 말하니 양동이에 더운 물을 담아 왔다. 방도 너무 추웠다. 후드 재킷을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잤다. 자면서 내일 아침엔 씻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긴 인도니까 하루쯤 안 씻어도 되지 않겠어. 코히마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시내에 자리한 나갈랜드 박물관. 오전 10시 반에 도착했는데 박물관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안내판에는 9시 반에 문을 연다고 분명하게 씌어 있었다. 뭐, 여긴 인도니까. 박물관 앞 마당에는 교복을 입은 다섯 명의 소녀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학교 안 가고 뭐해요?” “오늘 저녁에 시험이에요.” “그럼 시험 공부 해야지.” 소녀들은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가이드 에이프릴은 이들을 보자마자 전부 다른 부족이라고 했다. 인사말도 다 달랐다. “나갈랜드에는 모두 16개 부족이 있고 언어가 다 달라요.” 에이프릴은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학생들이 말한 인사말도 다 달랐다. 공용어는 힌두어와 아삼어가 섞인 나가믹스어와 영어라고 했다. 실제로 코히마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물고기 요리 이름을 주인에게 물었더니 주인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부족마다 이 물고기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요. 그러니까 모두 열여섯 개의 이름이 있는 셈이죠. 그냥 나가 스타일 피시라고 하시죠.” 박물관은 훌륭했다. 과거 원주민의 물건과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미니어처들이 있었는데 볼만했다. ‘나가’(Naga)는 벌거벗은(Naked), 혹은 귀에 뚫은 큰 구멍을 뜻하는 ‘낭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들은 아주 호전적인 민족으로 아이들은 태어날 때 바구니를 하나 받게 되는데 이 바구니는 전쟁에서 머리를 담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코히마 시내 한가운데 시장이 있다. 식재료와 생활용품 등을 판다. 그런데 식재료 코너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애벌레였다. 에이프릴에게 먹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나도 좋아해. 먹어 볼래?”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근데 저기 벌집은 뭐지?” 꼬물거리는 노란색 애벌레 옆에 하얀 스티로폼 같은 벌집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것도 먹는 거야.” “꿀은?” “꿀도 먹고 벌집 속의 애벌레도 먹지.” 에이프릴은 하나를 빼서 권했다. 그래, 먹어 보자. 그래야 뭐라도 쓸 거리가 생기니까. 애벌레 하나를 집어 입 속에 넣었다. 혀 위에 놓인 애벌레가 꿈틀거렸다. 차마 씹지는 못하고 꿀꺽 삼켰다. 근데 목구멍 안쪽에 깊숙이 걸린 애벌레는 한 번에 넘어가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서 꿈틀대고 있었다(여러분 여행작가는 이런 직업입니다. 한 줄 문장을 쓰기 위해 애벌레도 먹어야 한답니다).●전통집 모룽 짓고 사는 평화로운 앙가미족 코히마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자카마 마을이 있다. 1400명 남짓의 앙가미 족 사람들이 전통집 모룽을 짓고 살아간다. 에이프릴은 자기도 앙가미족 후손이라고 했다. 앙가미족은 16개 부족 중 가장 인구가 많다. 마을 이름 마지막에 ‘마’가 들어가면 앙가미족의 마을이다. 마을은 평화로웠고 한적했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공터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길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소녀는 이방인이 나타나자 부끄러운 듯 라켓을 거두어 얼굴을 가렸다. 마을 한가운데는 공동 우물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서 머리를 감고 빨래도 했다. 노인들은 처마 그늘에서 오래된 책을 읽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앙가미족의 전통 가옥 구조는 간단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쌀독이 있는 창고가 먼저 나타난다. 이 쌀독이 많을수록 부자다. 창고를 지나면 부엌. 화덕이 있고 컵과 냄비 등이 그 옆에 놓여 있다. 여자들은 작은 의자에 앉아 요리를 한다. 건너편은 침실이다. 침대 하나가 단출하게 놓여 있다. 쌀로 만든 이곳 전통주를 맛볼 수 있었는데 시큼하고 텁텁한 맛이 막걸리와 비슷했다.에코투어리즘 즐기는 마을 코노마 코노마는 코히마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450여 가구, 2000여명이 모여 산다. 집과 집 사이로 난 작은 골목을 들여다보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이 마을의 명물은 다랭이논. 산비탈을 일궈 만든 논이 마을 앞에 펼쳐져 있다. 여행자들은 이 다랭이논 사이로 트레킹을 즐기고 홈스테이를 하고 마을 문화도 체험한다. 작은 마을이지만 에코투어리즘 여행상품이 잘 갖춰져 있다.마을을 걷다 잔치 준비에 한창인 어느 가정을 방문했다. 노인들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따뜻한 차와 음식을 내주었다. “나갈랜드의 결혼식은 보통 사흘 동안 열려요. 하루는 남자의 집에서, 또 하루는 여자의 집에서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교회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파티를 벌이죠.” 에이프릴이 설명했다. 마을 광장에 자리한 공동 창고에서는 남자들이 소와 돼지를 잡아 뼈와 고기를 해체하고 있었다. 보통 결혼식에 5~8마리를 잡는다고 한다. 갓 잡은 소와 돼지의 대가리가 문 앞에 찡그린 얼굴로 걸려 있었다. 창고 안은 날고기 냄새와 피 냄새로 가득했다. 해 질 무렵 에이프릴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작은 공터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전통옷을 입은 앙가미족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나와 또 다른 한 여행자 단 두 명을 위해 전통 춤을 추었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여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서 골짜기 너머로 멀리 날아갔고 남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후렴을 넣었다. 여자들의 얼굴에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의 공연이 아직은 어색한 듯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에서 뭔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따뜻한 물에 손바닥을 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코히마로 돌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방은 추웠다. 더운 물도 나오지 않았다. 씻을 엄두가 나지 않아 물티슈로 대충 닦고 후드티를 입고 청바지를 입은 채로 잤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며 한 번도 덮지 않았던 옷장 속의 담요를 꺼내 덮었다. 닭과 트럭 소리가 잠을 깨웠다.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마치 길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호텔 현관 앞에서 햇빛을 쬐었다. 방보다 거리가 따뜻하다. 바다 이구아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체온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내 앞으로 학생들이 지나가고 트럭이 경적을 울리고 지나가고 자욱하게 먼지가 인다. 짓다 만 건물들이 어색하게 서 있다. 이렇게 서 있으면 내가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지, 난 여기에 왜 있는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르겠다. 뾰족한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여행을 왔기 때문에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서울에서도 우린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글 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 여행수첩 한국에서 나갈랜드로 가는 직항은 없다. 델리나 콜카타를 경유해 임팔공항 혹은 디마푸르공항으로 가야 한다. 임팔공항이나 디마푸르공항에서 나갈랜드 코히마까지 최소 4시간이 걸린다. 코히마에서는 호텔 우라에 묵었다.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데, 직원에게 부탁하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준다. 코히마의 2차 세계대전 추모 묘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졌던 영국·인도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에서 희생당한 군인들을 묻은 곳이다.
  • [생명의 窓] 11월의 가을 편지/이재무 시인

    [생명의 窓] 11월의 가을 편지/이재무 시인

    십일월을 사랑하리/곡물이 떠난 전답과 배추가 떠난 텃밭과/과일이 떠난 과수원은 불쑥 불쑥 늙어 가리/산은 쇄골을 드러내고 강물은 여위어 가리/마당가 지푸라기가 얼고 새벽 들판 살얼음에/ 별이 반짝이고 문득 추억처럼/첫눈이 찾아와 눈시울을 적시리/죄가 투명하게 비치고/ 영혼이 맑아지는 십일월을 나는 사랑하리 - 졸시, ‘십일월’, 전문 달빛 화면에 자판을 두들겨 대던 귀뚜라미도 탈고했는지 울음 그친 지 오래고, 그토록 빼곡하게 들어찼던 가을이 하나둘 산하를 빠져나가는 십일월은 이래저래 오는 것보다 가는 것들이 더 자주 눈에 밟혀 괜스레 마음 스산해지는 달입니다. 그늘이 고여 어두워지는 골짜기에서 갓 태어난 바람은 자신이 지난 자리에 소소하게 족적을 남깁니다. 맑고 시린 물이 산과 하늘을 품어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계곡에 와서 나는 문장 연습을 하다 돌아오고는 합니다. 십일월은 의붓자식 같은 달입니다. 시월과 십이월 사이에 엉거주춤 낀 십일월엔 난방도 안 들어오고 선뜻 내복 입기도 애매해서 일 년 중 삼월과 함께 가장 춥게 밤을 보내야 하는 달입니다. 더러 가다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메인은 시월이나 십이월에 다 빼앗기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허드레 행사나 치르게 되는 달입니다. 괄호 같은, 부록 같은, 본문의 각주 같은 달입니다. 산과 강에 깊게 쇄골이 드러나는 달입니다. 저녁 땅거미 혹은 어스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달입니다. 물속 돌처럼 공기가 단단해지는 저녁 공원 벤치에 앉아 뿌리 근처로 내려앉는 이파리들을 긁어모아 부어오른 발등을 덮어 봅니다. 바람결에 위태롭게 그네를 타던 홍자색 열매 하나가 자진하듯 가지를 떠나 보도블록 틈새로 얼굴을 뭉개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생산이 없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한여름 밤 수은등에 몰려든 날벌레들의 날갯짓처럼 붕, 붕, 붕 시간의 낭비로 분주했을 뿐 진리에 닿지 않는 날들뿐이었습니다. 소용에 닿지 않는 무위의 나날들이 나를 더욱 지치게 하고 우울감에 젖게 합니다. 죄가 투명해지고 나는 마른 손으로 까칠해진 얼굴을 몇 번이고 버릇처럼 쓸어 봅니다. 단풍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녀들은 목 놓아 울려고 길고 긴 초록의 터널을 무심하게 걸어왔습니다. 붉은 추억으로 남은 여자들이 어깨 들썩이며 신명나게 울음의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눈치코치 보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고이 쟁여 온 울음의 꾸러미들을 꾸역꾸역 꺼내 놓은 뒤 명태처럼 잘 마른 몸들을 또 한기 속으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한 보름 그렇게 가을을 활활 울고 나면 닦아 놓은 놋주발인 양 하늘도 황홀하게 윤이 날 것입니다. 십일월은 억새꽃의 달이기도 합니다. 맑고 푸르고 높고 밝은 하늘을 푹 적셔서 숯불 다리미가 다녀간 광목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능선 일대에 한 획, 한 획 능란하게 일필휘지하는 수만 자루의 붓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지랑이 어지러운 이른 봄부터 서리 내리는 늦가을까지 울퉁불퉁 맨발로 걸어온 한해살이를 그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고 나면 바람이 와서 지우고 쓰고 나면 또 바람이 와서 지우고 있습니다. 공중을 나는, 눈 밝은 새들이 따라 읽다가 때마침 마려운 똥으로 억새꽃들이 써 대는 문장에 쉼표와 마침표를 찍기도 합니다. 만 권의 책을 읽고도 시끄러운 사람의 생애를 도리질 치며 거듭 부인하는 하늘 아래 가장 두꺼운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온으로 몸이 추워지는 십일월 나는 영혼의 방에 주황빛 불을 켜 두겠습니다.
  •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②어기 호수 Ugii lake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②어기 호수 Ugii lake

    ●어기 호수 Ugii lake Өгий нуур 오아시스의 반전 도로와 초원을 덜컹거리는 차에 몸을 맡기고 얼마나 달렸을까. 지나온 게르들과는 사뭇 다른 큰 규모의 게르 캠프가 보이고 푸른 호수도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아르항가이 아이막의 호수는 한낮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게르의 주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게르 근처에 차를 대고 호숫가에 자리를 잡았다. 아르항가이 아이막은 울란바토르와도 가깝고 호수와 산, 초원 등이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몽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이자 몽골 사람들도 휴가로 많이 찾는 곳으로 호수에는 이미 열댓 명의 몽골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운데 터를 비워 두고 빙 둘러 각각 하나씩 자신의 텐트를 치고 의자와 테이블을 꺼내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는 몽골에서 산 재료들을 요리해 몽골식 볶음국수를 해 보기로 했다. 몽골인 가이드와 운전사 친구의 조언을 얻어가며 작은 도마 위에서 양파와 당근을 썰고, 버너에 불을 켜고, 냄비를 달그락거리며 몽골에서의 첫 캠핑을 시작했다. 수제비와 칼국수의 중간쯤 되는 가늘고 짧은 몽골식 면과 쇠고기, 야채를 달달 볶아 만든 음식 앞에 각자의 밥그릇과 수저를 꺼내 들고 모여 앉았다. 내 경우는 이번 몽골 여행이 첫 캠핑이었는데, 캠핑 전문가인 언니들이 나에게 한 첫 조언은 ‘캠핑의 시작은 자기 밥그릇과 수저를 챙기는 것부터’라고 했다. 나무젓가락에 일회용 접시가 아니라, 코펠과 가벼운 포크로 맛보는 몽골의 음식으로 인해 여행 기분이 배가 되었다. 술 한 잔을 곁들여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이 완벽할 뻔한 순간을 방해한 것은 다름 아닌 호숫가에 서식하는 하루살이 벌레들이었다. 이상하게도 음식과 물에는 접근하지 않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벌레들에 둘러싸여 있자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말린 풀 덩어리 같은 바짝 마른 말똥을 한데 모아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해 불을 지피니 천연 벌레 퇴치제가 된다. 시원한 물에 발도 담그고 호숫가 근처에 사이트를 구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더라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는 것이 낫다. 텐트 위로 가득한 하루살이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하루살이들의 역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호수 위에 낮게 펼쳐진 구름은 분홍빛에 가까운 천국의 색을 보여 주었고 물 위에 그대로 비치는 풍경을 배경으로 우리의 베이스캠프는 더욱 아름다워졌다. 각각의 개성이 드러나는 장비들을 자랑하며 캠핑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다 보니 사위가 어두워졌다. 놀랍게도 그때가 밤 10시45분쯤. 그날은 몽골에서 일 년 중 세 번째로 가장 낮이 길다는 날이었다. 호수 위로 낮게 깔린 구름을 아래에 두고 달이 떠올랐다.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서 환한 빛을 발했다. 그 달빛 아래서 우리는 초원 위에 매트를 깔고 누워 앞으로의 여행이 더욱 즐겁기를 바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초원에서 지표를 찾다 하염없이 펼쳐진 초원을 달려 목적지를 찾아가는 몽골 사람들을 보며 궁금해진다. 무엇을 이정표로 해서, 무엇을 표식으로 삼고 나아가는 것일까?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구름 그리고 땅뿐이다. 몽골을 여행하는 동안 발견한 표지판이라고는 한두 개 정도뿐이었다. 길을 떠나며 마주하는 어워에 기원한 사람들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일까, 수십수백의 양떼를 몰며 가는 양치기의 발걸음을 찾는 것일까, 혹은 말을 타고 먼 곳을 바라보며 달리는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를 듣는 것일까. 정착하기보다는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유목민의 삶. 이들이 이 땅덩이 위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정확한 방향을 설정하고 끌려가기보다는 삶이 자유롭게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도, 나를 이끌어 주는 표지판 하나가 없을 지언정, 그저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열심히 나아가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길이 어디 있는지 묻지 않는다. 내 앞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과 하늘이 모두 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초원의 늑대를 숭배하는 유목민족 과거 몽골제국의 기마군대가 서구를 점령할 때, 서구 사람들의 눈에는 다만 말들이 떼거지로 달려오고 있는데, 그 말들이 좀더 가까운 시야에 들어왔을 무렵, 활을 조준하는 무사들이 말의 허리에서 갑작스레 우뚝우뚝 솟으며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었다. 몽골 전사들의 그 용맹함에 가히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경외감과 숭고함과 공포의 세 축이 이 기마민족에 대한 유럽인들의 심경이지 않았을까?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 Travie writer 봉현, 최윤정 큐레이터 일러스트 봉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이승무 취재협조 몽골리아 세븐데이즈 www.mongolia7days.com, 미야트 몽골항공 www.miat.com, 02 756 9761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④엘승 타사르해 Elsen tasarkhai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④엘승 타사르해 Elsen tasarkhai

    ●엘승 타사르해 Elsen tasarkhai Элсэн тасархай 낯선 몽골인의 당부 다시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어느새 아침 9시, 게르 캠프의 식당에서 준비해 준 아침식사로 빵과 따뜻한 차, 오믈렛을 먹고 다시 짐을 꾸렸다. 언제 비가 쏟아졌냐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긴 이동시간과 하루의 캠핑, 소나기로 인해 기온 차이가 커서 그랬는지 약간의 감기기운과 피로감이 몰려왔다. 오늘은 조금 여유롭게 보내자고 의논을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엘승 타사르해. 울란바토르에서 약 280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달리는 내내 끝없는 푸른 초원만을 봤던 우리가 슬슬 무료해질 즈음 사막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거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야트막하고 고운 모래 언덕 ‘바양고비’가 있다. 옆으로 나무들이 늘어져 그늘을 만들어 주고, 모래 언덕에 오르면 멀리로는 돌산과 샛강을 볼 수 있다. 사이트를 구축할 장소를 알아보는데 낯선 몽골인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사용료를 요구한다거나 까다로운 상황이 발생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가이드 친구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는, 이곳에 머물되 불을 피우면 불씨를 남기지 않도록 신경써 주고, 밤에는 동물들이 돌아다닐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쓰레기는 모두 깨끗이 수거해 달라는 걱정과 당부의 말이었다. 몽골의 넓고 광활한 땅덩이 위에서 살아가는 몽골인들의 마음에는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자연이 그렇듯이 어떤 낯선 이라 할지라도 따뜻하게 품어낸다.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풀과 흙과 하늘 그 모두가 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잠시 멈췄다 가는 여행자들은,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그곳의 아름다움을 누려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 소중한 것이 온전히 남을 수 있다. 초원에 차린 한 끼의 저녁 묘한 각도로 기울어진 작은 나무를 기점으로, 차를 대고 텐트를 쳤다. 여자 셋 각각의 개성이 듬뿍 담긴 사이트를 두고 사진을 찍는 것도 이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자연을 닮은 색의 텐트들과 주안나다 언니가 가져온 나무 테이블, 윤정 언니의 티피 텐트는 초원과도 사막과도 잘 어울렸다. 초원 위에 버려진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아 냄비걸이도 만들었다. 냄비를 멋들어지게 걸고, 모닥불 아래에는 감자와 파프리카를 넣어 두었다. 새카맣게 탄 듯한 감자는 껍질을 벗겨내니 보들보들 꿀맛이었다. 이날 베이스캠프 주위에는 수도 시설도, 어떤 건물도 없었다. 큰 페트병에 가득 떠 온 물을 끓여 밥을 하고 국을 끓였다. 한국음식이 그리워진 터라, 고추장과 마늘을 듬뿍 넣고 찌개를 끓여 먹기로 했다. 물론 몽골의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은 불이 너무 잘 타서, 뜨거운 냄비를 젓기가 어려웠다. 괜히 들고 온 것이 아닐까 우려했던 커다란 뒤집개와 국자는, 이곳에서 단단히 한몫을 했다. 그렇게 밥과 국을 만들어 각자의 그릇과 수저로 밥을 먹고 나니 저녁 8시였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몽골에서는 해가 지려면 세 시간은 남았다. 여전히 밝은 오후 같기만 한 밤 시간, 우리는 옹기종이 모여 앉아 그동안 가까워진 만큼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운 일상들, 소중한 사람들, 앞으로의 희망들을 이야기하는 동안 생각했다. 우리의 지금 이 순간 또한 그립고 소중한 것이 되겠구나 하고. 그러는 사이 해는 오늘도 어김없이 지평선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고 그 풍경은 왠지 아프리카의 어느 초원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저 멀리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라 말과 양이었지만. 몽골에서의 일주일을 계획하고 떠나온 지 어느덧 4일, 사실상 내일 하루만 더 묵으면 도시로 들어가 귀국을 준비해야 한다. 사람이라고는 우리뿐인 자연 속에서 하늘과 바람에 둘러싸여 있으니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함께 와 몽골의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 맛있는 음식, 일상의 탈출, 낯선 곳에서의 설렘 모두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지만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람이 아닐까. 자칫 무섭고 두려울 수 있는 낯선 자연 속에서 함께 불을 피우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렇기에 몽골 여행은 더욱 특별하고 평화로웠다. 몽골인들의 기상 몽골인들은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우람한 편이다. 몽골 남성들의 고유 의상은 남성미를 확고히 살리는 차림이기도 하다. 입으면 어깨가 더욱 넓어 보이며, 키는 더욱 훤칠해 보인다. 거기에 말을 타고 달리거나, 큰 짐이라도 이고 가는 모습을 보면 ‘아~ 대륙의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게다가 몽골어 자체는 발음이 독일어와 상당히 유사하다. 소리의 강약, 발음의 세기 정도가 상당히 강건하다. 몽골 여성은 어떠한가. 남자들이 초원을 떠도는 동안 몽골의 가족들을 지켜낸 것은 바로 몽골 여성들이었다. 그리하여 몽골사회를 이야기할 때 모계사회적 특징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문득 북방초원에서부터 공유되는 마고신화 등 ‘여성 창세기 신화’가 이러한 배경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의 선물로 아침을 시작하다 텐트를 거세게 흔드는 바람소리에 눈을 떠 보니 주안나다 언니가 우리를 위해 정성스런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물티슈로 대충 닦은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언니의 작고 고운 손으로 건넨 아침밥은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 그리고 그 옆에 처음 보는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알고 보니 아침 일찍 근처 게르의 유목민이 들러 갓 짜낸 양젖을 주고 간 것이었다. 늘 먹던 익숙한 하얀 우유는 아니지만 진한 크림색의 고소한 우유를 살짝 끓여 커피에 넣어 라떼를 만들어 먹었다. 사과를 곁들여 먹으면서 여느 호텔 조식 부럽지 않다며 칭송해 마지않았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양들을 모으는 어느 몽골 사람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텐트를 거두고 자리를 정리했다. 나뭇가지를 모으며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들도 함께 모아 우리가 하루를 머무는 동안 생긴 자질구레한 쓰레기들과 함께 봉투에 담았다. 초원 위에 펼쳐 놨던 텐트와 식기구, 의자와 옷가지들도 배낭에 가득 담았다. 가볍지 않은 무게지만 배낭 하나에 하루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보니 우리는 어쩌면 필요 이상의 많은 것을 가지고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막은 뜻밖에 재미있다 빨간 배낭, 검은 배낭, 낡은 배낭에 각자의 짐을 담아 메고 사막 썰매를 타기 위해 모래 언덕을 올랐다. 고운 모래가 신발 속으로 새어 들어왔고 발 아래쪽에는 마른 풀들 사이사이로 이름 모를 짐승의 뼈도 간혹 발견되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조금 높이 올라선 곳에서는, 지난 밤 우리가 머물었던 곳이 내려다보였고 멀리에는 오랜 세월 바람을 견뎌 온 산과 들이 보였다. 사이사이로 유목민들의 흔적도 눈에 띈다. 모래 위로 바람의 방향을 따라 모래가 흩날리고 그 길을 따라 그림처럼 무늬가 만들어진다. 옷에 모래가 묻고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면 어떠하랴. 건조함에 손이 조금 거칠어지면 어떠랴. 우리는 모래 위에 앉아 마주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이내 노란 썰매에 몸을 맡겼다. 열심히 올라선 언덕을 단 5초 만에 내려왔다. 발이 푹푹 파이는 모래를 딛고 급격한 경사를 따라 다시 올라가는 건 힘들지만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몇 번을 오르내렸다. 그전에도 몇 번의 사막을 경험했지만 거대한 자연은 언제나 낯설고 새롭다. 사람이 이루어 낼 수 없는 자연의 모습은 늘 특별하다. 캠핑의 여운으로 조금 지치고 초췌해졌지만 우리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아침에 대접받은 양젖을 담았던 주전자를 돌려주러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볼이 빨간 꼬마아이에게 한국에서 가져간 공깃돌을 선물로 주었다. 낯설어 하던 아이는 이내 할머니의 손짓에 이끌려 볼에 수줍은 뽀뽀를 해주었다. 작은 선물로 돌려받은 크나큰 행복의 순간이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 Travie writer 봉현, 최윤정 큐레이터 일러스트 봉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이승무 취재협조 몽골리아 세븐데이즈 www.mongolia7days.com, 미야트 몽골항공 www.miat.com, 02 756 9761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⑤후이 덜렁 후닥 Hui Doloon Hudag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⑤후이 덜렁 후닥 Hui Doloon Hudag

    ●후이 덜렁 후닥 Hui Doloon Hudag Хуй долоон худа 마지막 만찬은 풍성하게 여행의 끝자락. 원래 계획은 울란바토르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마음 가는 대로 아무 곳에서나 캠핑을 하기로 했었는데 밤새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도 부족했고 짐에 가득 묻은 모래의 흔적도 털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몽골에 왔으니 말을 타 봐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우리는 여행사에 문의를 하고 멀지 않은 위치의 게르 캠프를 추천 받았다. 후이 덜렁 후닥의 바얀척드 캠프였다. 후이 덜렁 후닥은 몽골 최고의 축제인 나담축제와 더불어 말경주가 펼쳐지는 지역이다. 말경주는 놀랍게도 4~5살짜리 아이가 같은 나이의 말을 타고 20km의 초원을 달려 결승점으로 들어오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작고 어린 아이들이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린다니! 다 큰 한국의 어른들은 과연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까. 어느새 도착한 바얀척드 캠프는 환호성이 나올 정도로 시설이 좋았다. 샤워시설과 식당 또한 훌륭했다. 미소가 환하던 직원은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텐트와 옷가지에 남은 모래를 털고, 지친 발을 쉬게 했다. 어려 보이는 몽골 아가씨가 다가와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게르가 마치 포근한 나의 집처럼 느껴졌다. 샤워를 하는 동안 그동안 먹고 남았던 마지막 식재료들을 모두 모아 마지막 만찬을 준비했다. 그동안 주로 고기가 많이 들어간 몽골 음식을 먹었던 터라 채소가 먹고 싶었다. 양배추와 오이로 샐러드를 만들고 밥을 하고 라면을 끓였다. 몽골의 마트와 작은 휴게소, 동네 구멍가게 등 어딜 가도 한국 라면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바얀척드 캠프에서는 주방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최소한의 것들만 사용하고 깨끗히 설거지해 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몽골에 왔으니 말을 타 봐야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게르에 돌아와 얼마 안 되어 어느새 해가 졌다. 이동시간이 많아 조금 지쳤지만 게르의 아늑함과 초원의 고요함이 이러저런 고생스러움을 잊게 한다. 게르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몽골의 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의 끝을 따라 별똥별이 떨어지고 달빛을 넘어 하나하나의 별들이 빛나고 있다. 게르 캠프의 불이 모두 꺼지고 사위가 고요한 어둠 속에 잠기자 별들은 더욱 찬란히 빛나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을 보내고 컨디션을 회복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몇 마리의 말이었다. 안전 수칙을 꼼꼼히 숙지하고 헬멧과 보호장비를 착용했다. 각자 조심스럽게 말에 올라타 보니 며칠 동안 지겹게 본 초원이 다시 한 번 다르게 느껴졌다. 말 주인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말을 타고 초원을 거닐었다. 아주 잠깐, 아주 조금 속도를 내어 달려 보긴 했지만 상상했던 것처럼 멋지게 초원을 달릴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안전이 제일이고 이곳의 사람과 동물들에서 폐가 되지 않도록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말들은 순했다. 따각따각 나를 태우고 걷는 말을 쓰다듬으며 ‘고마워’ 하고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여정을 함께했던 예쁜 빈티지 차에 조심스레 올라타 기념사진을 찍고, 게르의 사람들과도 기념사진을 나누어 가졌다. 몽골 사람들은 때로 무뚝뚝해 보이기도 하는데 조금 가까워질 타이밍이 있다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해보자. 무뚝뚝함은 사라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의 몽골 친구를 카메라에 담게 될 것이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 Travie writer 봉현, 최윤정 큐레이터 일러스트 봉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이승무 취재협조 몽골리아 세븐데이즈 www.mongolia7days.com, 미야트 몽골항공 www.miat.com, 02 756 9761 동경의 이유를 헤아리다 최윤정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막연하게나마 대륙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바다가 없으되 하늘과 마주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있고, 행성의 일부 같은 사막과 작지만 거친 수풀로 뒤덮인 초원, 이러한 풍경이 선사하는 바는 먼 옛날 저 초원을 따라 실크로드가 생기고 서로 다른 문화, 이질적인 문화들이 결집한 국제적인 도시들이 생성되고 또한 이후 소멸되는 과정들을 상상하게 하였다. 반도의 땅, 또한 분단으로 인해 섬과도 다를 바 없는 한반도의 좁은 지형에 살면서, 나에게 중앙아시아는 사통팔달의 행로에서 일어났음직한 무수한 서사들에 대한 동경을 갖게 하여 문학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더욱이 좋은 신비적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초원 한복판, 아련하게 전설의 증거들을 담은 유적지들을 탐사하면서 나의 ‘막연한 동경’의 이유를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여정에는 과거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튀르크(돌궐)제국의 유적지와 에르덴주의 불교 사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착했던 그곳들은 그야말로 과거의 환영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몇날 며칠이고 망부석처럼 지새면서 교감하고 싶은 심정을 자아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그 첫 심경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지나고 보니 아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몽골을 다녀온 나에게 새로 붙여진 별명이 있다. ‘몽골유학생 캠퍼, 최큐’, 낯선 이들과 동행한 사막에서의 트레킹이며 호수에서의 캠핑, 그 와중에 우정도 발견하고 의리도 발견하고 친구도 생겼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몽골역사 및 유적, 문화에 대한 많은 공부를 선행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는 하였지만, 이번 여행 덕분으로 다시금 대학시절 읽었던 중앙아시아의 역사책을 다시 펼쳐 들었고, 더불어 그들의 현재, 그리고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새로 생긴 별명이 보다 막역해지지 않겠는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시간 봉현 몽골에서 보낸 일주일은 짧았다. 하지만 긴 시간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뜨거운 햇살만큼 강렬했으며 하늘만큼 푸르렀고 초원만큼 아득한 시간이었다. 마냥 편안하기보다는 조금은 고되고 어려웠기에 함께했던 사람들과도 서로를 더욱 배려하며 여행할 수 있었고 뻔하고 흔한 관광코스가 아니었기에 우리들만의 특별한 일정표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몽골에 대한 이미지는 단순했다. 말과 유목민, 초원 그리고 빛나는 별 정도였다. 그러나 몽골을 여행하고 난 후에 기억되는 순간들은 사뭇 다르다. 볼이 빨간 유목민 아이의 웃음, 초원을 달리는 말과 양의 건강한 움직임, 손에 잡힐 듯이 구름을 비추는 햇빛, 게르의 따뜻한 온기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별을 보며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 몽골 여행이 어땠냐고 물어 오는 친구들에게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마냥 힘들었다고만 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움 또한 컸기에. 그들에게 결국 이렇게 말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마음이 답답하고 일상이 지루한 사람들에게 몽골로 떠나 보라고 말하고 싶다. 탁 트인 초원과 하늘 아래에서 친구의 웃음과 함께 바람을 맞고 별을 보면서 조금은 쑥스럽고 솔직한 마음을 담은 기도를 하고 싶다면 친구들 서너 명과 함께 몽골로 떠나 보라고 말하고 싶다. 배낭에는 내 한 몸 누일 텐트와 침낭, 나만의 밥그릇과 수저를 넣고, 친구들과 함께 나눌 것들은 푸짐하게 꾹꾹 눌러 담아서. 무겁지만 가뿐한 걸음으로 몽골로 떠나는 바로 그 순간, 꿈을 꾼 것만 같은 아름다운 기억들을 현실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travel info 몽골 캠핑을 위한 소소하고 중요한 TIP ! 미야트 몽골항공 미야트 몽골항공MIAT Mongolian Airlines이 인천에서 울란바타르로 가는 직항편을 매일 두 편씩 운행하고 있다. 성수기에는 목, 금, 일요일에 밤늦은 시간대 항공편이 추가되기도 한다. 비행시간은 3시간 남짓. 기내식이 입맛에 잘 맞고 항공기 내부도 깨끗하고 아늑하다. 02 756 9761 www.miat.com 푸르공 차량 구하기 몽골의 대중교통은 러시아, 중국을 잇는 기차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무조건 차를 대절해야 한다. 몽골은 가는 곳이 길이고 차량에 네비게이션이 없기 때문에 행여 직접 렌트할 오기는 부리지 말자. 소수 여행이라면 여행사나 현지 게스트 하우스에 미리 메일로 요청해 러시아제 승합차인 푸르공Furgon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몽골인 운전사와 함께 6~7명이 함께 타므로 조금 불편하지만 푸르공 타고 달리는 여행이 진정한 몽골로드투어란 찬사를 받는다. 몽골, 테마로 즐기기 몽골전문 여행사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몽골리아 세븐데이즈는 단연 눈에 띄는 여행사다. 문화 사업을 겸하고 있는 독특한 배경의 여행사 ‘이안재트래블앤컬쳐’의 여행브랜드로 승마, 캠핑, 에코음악여행, 출사여행, 고비기차 여행 등 다양한 몽골 테마여행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02 6237 3770 www.mongolia7days.com 자외선 차단제 파란 하늘,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몽골은 자외선지수가 매우 높고 건조해 피부와 입술, 머리카락까지 바스러질 정도다. 자외선 차단지수가 제일 높은 걸로 준비하고 입술에도 발라 줘야 한다. 선크림용 미스트도 준비해서 수시로 뿌려 주면 좋다. 천연 벌레 퇴치제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400km 정도 달려 도착한 어기 호수에서의 캠핑은 사진만큼이나 멋지지만 호수 근처의 하루살이떼는 벌레 기둥이 생길 만큼 엄청났다. 호수 가까이보다 한 50m 이상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으면 벌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또 마른 말똥을 피우면 천연 벌레 퇴치제가 된다. 생각보다 냄새도 별로 나지 않는다. 충전 몽골은 백야에 가까워서 밤 10시 반이 지나야 해가 지기 시작한다. 게르에 가지 않는 이상 전기를 충전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태양열충전기가 있으면 매우 유용하다. 한밤에는 달빛 이외에는 빛이 없다. 헤드랜턴은 필수. 침낭과 에어매트 몽골의 밤은 낮과는 정반대로 기온이 낮고 바람이 거세져서 체감온도는 영하로 뚝 떨어진다. 에어매트는 동계용으로 알벨류가 높은 것으로 준비하고 침낭 또한 간절기용을, 추위를 많이 탄다면 동계용을 준비하는 게 좋다. 화장실 몽골 사막이나 오지에서 캠핑을 할 때는 화장실이 따로 없기에 백패킹용 에코삽을 꼭 챙겨 가야 한다. 자기 용변은 자기가 흔적 없이 처리할 것! 가스 어댑터 몽골에서는 스틱형 부탄가스만 팔기 때문에 이소가스용 버너를 쓰기 위해선 몽골에 올 때 가스 어댑터를 꼭 챙겨야 한다. 부시크래프트 몽골에서는 모든 캠퍼들의 로망인 대자연 속에서의 부시크래프트가 가능하다. 남자들 없이 여자들이 부시크래프트를 하려면 직접 사막에서 죽은 나무를 가져와 불을 때고 음식을 하고 하기 위한 소토 같은 캠핑용 라이터, 착화제가 될 고체 연료, 나무 손질용 작은 칼 등이 필요하다. 캠핑기어들 헬리녹스 같은 조립식 의자가 좋고 의자 발에 볼핏 같은 걸 껴야 사막같이 모래로 된 바닥에서 의자가 파고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있다. 의자가 없다면 가볍고 접기 편한 등산용 방석이나 지라이트솔 같은 일인용 매트도 좋다. 테이블은 롤테이블이 여러모로 사용하기 편리하다. 전체를 밝게 비쳐 줄 큰 랜턴도 하나 있는 것이 좋은데 가스가 스틱형만 팔다 보니 LED 충전식 랜턴이 더 요긴하다. 생활용품 물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물티슈가 필수품이다. 손을 닦거나 그릇들을 정리하는 데 사용했다. 라이터를 잃어버리거나 고장났을 때는 준비했던 성냥으로 불을 땠다. 텐트 칠 때 바닥에 가시가 있는 풀이 많으므로 장갑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음식 사막 등 외곽으로 나갈수록 파는 품목도 적고 구멍가게조차 없는 곳이 많다. 길가에 있는 햄 하나만 달랑 들어 있는 김밥을 파는 작은 가게도 있었다. 출발 전 울란바토르 도심의 마트에서 물과 필요한 식료품들을 사는 것이 좋다. 중심가 마트는 한국의 대형마트와 같기 때문에 쌀, 라면, 고추장, 김치 등을 구매할 수 있다. 물은 5리터짜리 페트병으로 넉넉하게 사용하고 바로 먹을 수 있는 500mm 사이즈도 여러 통 샀다.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쉽게 상하지 않는 양파나 감자, 당근 같은 식재료 위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고기가 필요하다면 진공팩으로 포장된 것을 사거나 근처 게르에서 현지인들에게 소량 구입할 수 있다. 작은 통에 든 고추장이나 조미료들과 함께, 라면이나 스프 같은 인스턴트식품도 구입하자. 양고기 초이반(볶음국수), 호쇼르(몽골식 만두튀김), 보츠(찐 만두), 허르헉(몽골식 양갈비찜) 등의 몽골 음식들이 있는데 거의 모든 음식에 양고기를 쓴다. 양고기가 부담스럽다면 쇠고기로 만든 것들도 있다. 향신료는 거부감이 없는 편이라 괜찮지만 양고기 특유의 냄새나 기름기 많은 음식이 힘든 경우를 대비할 것. 옷+신발 낮에는 덥고 밤에 춥다. 낮에는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을 정도의 얇은 바람막이와 챙 달린 모자가, 밤엔 패딩이 필수! 겨울용 외투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추위를 대비해 가져온 스카프를 여행 내내 애용했다. 가시 풀들이 많아 신발은 샌들과 트레킹화 모두 챙기는 것이 좋다. 비가 한번 오면 거세게 퍼붓기 때문에 우산보다는 우비가 더 유용하다. 안전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서 여자들끼리 여행하는 것에 걱정스러울 수 있지만 몽골 현지인 가이드와 운전기사가 여행 내내 톡톡히 안내자이자 보호자 역할을 해준다. 한국어를 잘 하는 현지인 가이드는 이번 여행 내내 특별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에티켓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초원이라고 해도 캠핑 에티켓은 기본이다. 쓰레기는 종이 한 장까지 거두어 오고, 모닥불을 피우면 불씨 하나까지 둘러보며, 풀을 뜯는 양떼들과 소들이 놀라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바라보자. 아름답고 좋아 보인다면 소중히 지켜 주자. 정리 주안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벗지 않아도 ‘카 ~’

    벗지 않아도 ‘카 ~’

    모터쇼는 연인이나 부부가 함께 찾으면 안 되는 곳 1순위로 꼽힌다. 남자들에게는 모델들과 비교하면 빠질 수밖에 없는 내 여자의 외모를, 여자들에게는 입을 벌린 채 미녀 모델을 쳐다보는 내 남자의 속물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8등신의 미녀군단이 대거 등장하는 한국 모터쇼의 현실을 빗대는 우스갯소리지만 정색하고 부인하기도 어렵다. ‘2015 서울모터쇼’ 일반인 관람이 시작된 3일 경기 일산 킨텍스 1전시장 닛산 부스. 마치 기자회견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50여대의 카메라가 연신 플래시를 터뜨린다. 일제히 카메라 렌즈가 향하는 곳은 신형 무라노 옆에서 포즈를 취한 허윤미(27)씨다. 최근 레이싱모델 중 가장 잘나간다는 허씨가 무대를 내려오자 타이밍을 놓칠세라 재빨리 간식 등 선물을 전달하는 남성도 눈에 띈다. 20대부터 50대까지 팬층도 다양하다. 행사 관계자는 “허씨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해당 부스의 관람객 수가 현저하게 달라질 정도”라고 말했다. 허씨와 같은 스타급 모델의 집객 효과 때문에 라이벌 회사 간에 모델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적잖은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자동차 브랜드들이 스타급 모델들을 전진 배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BMW, 마른 체형… 포르쉐, 육감적 모델 등 선호도 달라 서울모터쇼에 참여한 32개의 완성차 브랜드는 많게는 10여명에서 적게는 3~4명의 카모델을 배치한다. 굳이 카모델이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를 쓰는 것은 최근 모터쇼 모델 업계에 부는 변화의 바람 때문이다. 과거 모터쇼는 레이싱모델이 부스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시됐지만 최근에는 패션모델들이 빠르게 영역을 넓히고 있다. BMW나 메르세데스-벤츠 등 소위 프리미엄 브랜드일수록 변화의 속도는 빠르다. BMW 관계자는 “시선을 확 끄는 레이싱모델들도 장점은 있지만 패션모델은 보다 고급스러움에 신선함을 더할 수 있다”면서 “모델보다는 차를 보라는 일종의 장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최근 이런 추세에 현대·기아차도 합류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김재범(31)씨와 김준영(30·여)씨 등 대다수 카모델을 정통 패션모델 출신에서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주류는 레이싱모델이다. 그들만의 장점도 있다. 2년차인 문다경(28)씨는 “레이싱모델 출신들은 전시 차의 특성을 제대로 표현하고 관람객과 소통한다는 면에서 일반 모델과는 차별되는 강점을 가진다”면서 “패션모델을 기용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잘라 말했다. 또 다른 변화는 남성 모델들을 채용하는 부스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차를 구입하는 여성 고객 비중이 늘고 있는 데다 차량의 디자인보다 성능 등을 강조하는 데는 남자 모델이 적격이라는 판단에서다. 미니와 아우디 등이 대표적이다. 미니 모델인 김우래(32)씨는 “귀엽고 깜찍한 차는 자칫 성능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 남성 모델은 이런 점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의 바람을 타고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2년차 레이싱모델인 설레나(24)씨는 “한 브랜드의 메인으로 발탁되기 위해서는 보통 100대1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면서 “패션모델이나 일반 사진모델, 미스코리아 출신까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이 업계에도 취업 경쟁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과거 모터쇼에 비해 노출이 줄고 의상도 차분해졌다는 점도 작은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 직후 노출을 자제한 부산모터쇼의 분위기가 하나의 트렌드로 잡히면서 서울모터쇼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사실 그동안 국내 모터쇼장은 지나친 노출로 가족 나들이를 하기엔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입은 극비… 일당 40만~100만원으로 지명도 따라 달라 모두 차를 파는 회사들이지만 브랜드별로 선호하는 모델도 갈린다. BMW와 벤츠는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중시한다. 패션쇼 런웨이에서 만날 법한 전문 모델을 고르는데 자사 브랜드를 더 품격 있게 보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단 벤츠는 첫날 프레스데이 행사 때만 모델을 쓰고 일반 관람 때는 차만 배치한다. 같은 스포츠카인 포르쉐는 독일브랜드지만 섹시하면서도 육감적인 모델을 선호한다. 섹시한 차는 모델도 섹시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반면 닛산이나 토요타 등 일본차 메이커들은 보통 순정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작은 얼굴에 눈이 큰 모델을 뽑는다. 이른바 베이글녀(베이비+글래머 합성어)를 찾는데 키가 좀 작은 것은 용인해도 볼륨감이 모자라면 탈락이다. 현대·기아차는 스타급 레이싱 모델을 꺼린다. 오히려 일반인에게 덜 알려진 이들 중에서 세련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얼굴을 선호한다. 같은 브랜드라도 차종에 따라 모델은 달라진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차 자체가 큰 만큼 상대적으로 키가 더 크고 중성적인 마스크의 모델을, 고급 세단 등 중형차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모델을, 경차는 작아도 귀엽고 발랄하고 개성 있는 모델을 쓴다. ●킬힐에 근육통 호소… 특정 부위만 찍는 관람객도 골치 이들은 과연 얼마나 벌까. 모델들은 수입을 밝히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여긴다. 자존심 문제도 있지만, 자칫 자신의 임금이 굳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특히 몇 년 전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A씨의 수입이 기사화되면서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이어졌다는 소문이 퍼져 수익에 대해서는 극히 민감하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특A급은 일당 100만원 이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상위 1%도 안 되는 극소수다. 한 모델 에이전트 관계자는 “카 모델은 최소 B급 이상을 세운다”면서 “A등급은 일당 70만~100만원, B등급은 40만~6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말했다. 해당 등급은 철저히 지명도에 따라 매겨진다. 또 받는 돈의 30% 정도는 에이전시에 수수료로 떼어 줘야 하는 게 업계 관례다. 미스 대구 출신인 윤아름(27)씨는 “많이 버는 것 같지만 일반 직장처럼 고정된 일자리가 아니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레이싱걸은 “최근에는 행사를 통해 스타가 되겠다는 욕심에 스스로 일당을 아주 적게 불러서 전시장에 들어오는 신입들이 있어 실제 버는 돈은 천차만별”이라고 말했다. 고충도 적지 않다. 10~16㎝ 이상 킬힐을 신고 오랜 시간을 서 있어야 하는 직업인지라 근육통은 기본. 허리나 무릎에 무리가 와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는 이도 적지 않다. 모델들의 치마 속이나 특정 부위만을 찍는 관람객을 피해야 하는 것도 골치거리다. 시트로엥 모델인 김예하(25)씨는 “이틀에 한 번꼴은 이런 관객이 출몰하는데 모델들끼리 카톡 등으로 인상착의 등을 알리며 주의하라는 메시지를 보낸다”면서 “처음엔 포즈를 바꿔 방어를 하지만 정 아니다 싶으면 직원이나 경호원에게 살짝 사인을 주는 식으로 대처한다”고 말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6. 방년 20세의 슬픈 겨울…늘어나는 여성 자살 [선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

    6. 방년 20세의 슬픈 겨울…늘어나는 여성 자살 [선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

    한국 자살률 OECD 최고 수준…지난해 하루 평균 40명 스스로 목숨 끊어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이 23일 발표한 ‘2013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만 4427명으로 1년 전보다 267명(1.9%) 늘었다. 하루 평균 39.5명이 자살로 생을 마ㅁ감한 것. (중략)연령별로 보면 1년 전보다 30대(3.8%), 40대(6.1%), 50대(7.9%)의 자살률이 증가했다. 자살은 10대, 20대, 30대 사망원인 1위로 꼽혔다.지난 9월 23일 서울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유독 높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46년 전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기사를 소개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당시에도 한국은 최고의 자살률 국가였습니다. 물론 세계 최빈국에 가까웠던 당시와 지금의 자살 원인은 상당히 다르지만 말입니다. 당시에는 특히 여성 자살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컸던 모양입니다. 내용을 한번 보시지요. ▒▒▒▒▒▒▒▒▒▒▒▒▒▒▒▒▒▒▒▒▒▒▒▒▒▒▒▒▒▒ “잠깐 참으셔요” 방년 20세의 겨울…늘어나는 여성자살 전체 사인(死因)의 제2위- 선데이서울 1968년 10월 6일자, 1971년 5월 16일자, 1972년 4월 2일자 종합 딱한 여심(女心)몇 가지 사례1: 한낮에 서울 마포의 한 여관에서 이모(20·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남 지역 산골 출신인 이씨는 중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놀다가 4년 전 돈벌이를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식모살이, 병원 종업원, 다방 종업원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지만 아직 채 피어보지도 못한 그녀의 인생은 고달프기만 했다. 이씨는 넉달 전 다방일을 하면서 알게 된 전기회사 직공(23)과 사흘을 한방에서 지내다가 마지막 날 생을 마감하는 극약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경찰은 “오늘도 지겨운 하루가 지났다”,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들고” 등 이씨의 수첩 메모로 미루어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냈다.(1972년 3월) 사례2: 경기 화성군 반월면의 박모(23·여)씨는 신혼 첫날밤을 치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씨는 김모(26)씨와 결혼, 첫날밤을 보냈느데 일을 마친 뒤 신랑 김씨가 대뜸 “처녀가 아니다”라면서 이혼을 요구하자 “숫처녀임을 입증하겠다”며 극약을 먹고 자살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1971년 5월) 사례3: 최모(32·여)씨는 어머니날(현 어버이날)에 세 딸과 함께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결국 자신과 두 딸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10월 남편과 사별한 최씨는 “남은 두 아들을 공부시켜 달라”는 요로에 보내는 유서를 남겼다.(1968년 5월) 사례4: 김모(27·여)씨는 이룰 수 없는 결혼을 비관, 애인 집의 연탄난로에 머리를 묻고 자살했다. 김씨는 애인과 깊은 관계를 맺어 임신까지 했으나 사회적인 흠(전과자)이 있는 남자에게는 딸을 줄 수 없다는 집안의 반대에 좌절, 자살을 선택했다. “엄마의 훌륭한 딸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그분을 버릴 수는 없었어요….” 그의 유서다.(1968년 6월) 사례5: 이모(21·여)씨는 조흥은행 본점 12층에서 투신자살했다. 이씨는 모 공대건축과 2년생. 2년 동안 서울대, 연세대를 계속 낙방한 것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968년 6월) 사례6: 홍모(35)씨는 11세 어린 연하 애인(24)과 인천의 한 여관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손아래 남자와의 사랑이 빚은 비극적인 정사(情死)였다. (1968년 1월)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 지라”(마태복음 27장 5절) 유다 이후 많은 인간 가족이 저마다의 절박한 이유로 자살을 했다. 클레오파트라나 오필리아, 마릴린 먼로는 결국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여심(女心)의 선각자이지만 현대인에 있어, 특히 여자의 경우 자살은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까지 언제부터인가 심상에 뿌리박혀 버리고 말았다. 세계에서 자살률(인구 10만명당)이 제일 높은 나라는 덴마크로 29명에 이른다. 자살률이 가장 낮은 나라는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각 2명 꼴이다.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25명 정도로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덴마크 등과는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판이하게 다른다. 우리나라의 자살이 ‘가난형’인데 반해 덴마크 같은 쪽은 ‘부자형’으로 통한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너무나 스트레스가 없어도 파멸적인 고적감을 느끼게 된다는데 덴마크같은 선진국의 자살이 이런 케이스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살 기도자는 여성 쪽에 많은데, 남자와의 비율이 1대 1.3 정도다. 그러나 여자에겐 자살 미수가 많아 실제로 사망하는 숫자는 남녀가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최근 자살 추세를 보면 10대와 젊은 여성층에서 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한국적인 경향이라고 한다.   인간해약(解約) - 20세가 절정 1967년 한 해 동안의 통계에 의하면 서울 시내에서의 여성의 자살은 전체 사망 원인 2위를 차지하고 있다. 1위는 결핵, 3위는 암이다. 우석의대 산부인과 교실에서 최근 조사한 사인별 사망통계에 의하면 총 대상 1900명 중 결핵으로 인한 사망은 309명이며 2위인 자살은 288명, 3위인 암은 209명이었다. 그 다음이 뇌일혈(뇌졸중) 167명, 모성 사망(임신·분만 관련 사망) 128명, 고혈압 110명 순이다. 자살자 중 36%인 105명은 겨울에 사망했으며 여름 80명, 가을 53명, 봄 50명 등이었다.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여성군(群)은 어느 연령층일까? 우석의대의 조사에 의하면 288명의 자살여성 중 33%인 95명은 20세에서 24세까지의 방년. 다음이 15세에서 19세까지의 10대 여성이며(47명), 25~29세는 46명, 30~34세는 36명, 35~39세는 21명, 40~44세는 18명, 그리고 45~50세는 21명으로 되어있다. 결국 많은 수의 24세 이하 꽃다운 처녀들이 겨울을 택해 스스로 인간해약(人間解約)을 하고 있다고 우석대 조사팀은 말하고 있다. 여자들은 왜 자살에 매료되는가? 장병임 교수(서울문리대)는 가능한 자살예방 수단으로 초자아(超自我)를 역설한다. “정신분석학상의 초자아는 교육이다. 젊은 여성들의 자살은 90%가 애정 문제에 원인이 있는데 이것은 가정교육이라는 하나의 절대수단으로 극복될 수 있는 문제이다. 요즘 부모들은 딸에게 이성교제(정신적인)는 허용하면서 막상 정조관에 있어서는 애매하고 엄격한 자신들의 견해를 강요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결국 자살을 할 수 밖에 없는 젊은 여성들의의식의 파탄은 부모에게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자살예비역 하루 20명꼴…‘살 수 없어’ 아닌 ‘싫어서’ 성모병원 안에 있는 음독자살예방센터에는 해마다 약 900명의 음독자가 들어온다. 1967년 한 해 동안 이곳 신세를 진 자살 기도자만 해도 남자 355명에 여자 488명 등 도합 843명. 그런가 하면 서울, 연세, 우석, 적십자 등 비교적 큰 종합병원의 응급실에 실려오는 자살예비역만 해도 하루 20여명을 헤아린다. 지난 1963~67년 5년 동안 성모병원의 자살예방센터에서 치료받은 음독자는 모두 4548명에 이르고 있다. 남자 1975명, 여자 2573명으로 여성 우세는 여기서도 예외가 없다. 전체 자살기도자의 57%인 2591명이 20대, 17.5%인 792명이 10대다. 16.3%는 30대, 9.23%는 40대다. 여성자살자에게는 자살원인, 자살방법, 연령분포 등 자살 주변에 얽힌 심리적 델리커시가 현란하리만큼 많다. 한마디로 ‘살 수 없어 죽는다’보다는 ‘살기 싫어서 죽는다’가 그녀들의 죽음의 변(辯)인 셈이다. 20대 여성의 경우 자살 원인의 46%가 애정 갈등으로 되어 있으나 간접적이고 충동적인 것까지 합하면 거의 90%가 애정문제에 귀착되고 있다. 도니제티의 멜로디 같은 ‘사랑의 묘약’이 그녀들의 목마른 상심엔 필요하다는 얘기다. 좀 묵은 통계지만 이 땅 춘향의 후예들에게는 거의 자연스럽다고 할 정도로 자살에의 향수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수년 전 가톨릭의대에서 3000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여고생의 49%, 여대생의 62%가 “자살을 할 수도 있다”는 우울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의지 박약에서 오는 생활의 도피”라는 뒤르켕의 자살론은 이젠 아무래도 너무 낡은 관념론인 것 같다.  ”한국은 자살자의 천국” 장병임 교수는 여자들, 특히 젊은 여자들의 자살을 최대한 막는 효과적인 처방으로 “올바른 성교육의 실시”를 주창한다. 이성교제 자체를 터부시 하든지, 그렇지 않을 바에야 최소한 정조관에 대한 개념의 정립 만큼은 딸들에게 세워 주어야겠다는 것이다. 한국가이던스센터에 찾아오는 여성 중 자살에의 의지를 호소하는 층은 하이틴과 25세 이전의 미혼여성들. 카운셀링의 내용도 이상적인 상대를 얻기 위한 것보다는 이미 저질러진 사건들, 이를테면 처녀성의 상실이라든지 혼전임신 같은 건강치 못한 “어찌 하오리까”뿐이라고 장 교수는 개탄한다. 음독자살예방센터 김종은 교수는 이와는 좀 다른 각도에서 자살예방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전체 자살자의 반이 약물에 의한 자살을 기도하고 있으며, 약물의 58%가 정신신경안정제인 만큼 이들 약품의 판매를 엄격히 규제하면 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자살약으로 이용되는 정신신경안정제를 거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대만, 태국 정도 뿐이라고 한다. 외국의 경우 한 번 자살을 기도한 사람은 으레 정신과에 입원시키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35%만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음독자살예방센터의 집계에 의하면 자살 재기도자는 전체의 10%이며 “또 자살을 하겠다”는 사람만도 전체 자살기도자의 43%나 되는 딱한 실정이다. 정리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신문은 1960~70년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다양한 사건 기사들을 새로운 형태로 묶고 가공해 연재합니다. 일부는 원문 그대로, 일부는 원문을 가공해 게재합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어린이·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 당시의 우리 사회 모습을 현재와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원문의 표현과 문체를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부는 오늘날에 맞게 수정합니다. <편집자註> *서울신문이 발간했던 ‘선데이서울’은 1968년 창간돼 1991년 종간되기까지 23년 동안 시대를 대표했던 대중오락 주간지입니다.
  • [2014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길을 잃다/이태영

    [2014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길을 잃다/이태영

    소니가 앞뒤로 몸을 흔든다. 몸을 숙일 때마다 등의‘보호외국인’이란 흰 글자가 형광등 불빛에 번쩍거렸다. 흔들림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하필 근무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여자 보호실에는 그녀와 나 단 둘뿐이었다.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당직실로 연락하라고 이 반장은 말했었다. 소니가 요란하게 몸을 떨더니 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당직실 내선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갔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 반장은 밤새 직원이 당직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라 했었는데,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망연히 소니만 바라봤다. 소니는 비린내를 맡은 임산부처럼 헛구역질을 해댔다. 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소니가 말했다. “언니, 제발, 소니 물 줘.” 소니의 일그러진 입가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눌한 소니의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소니도 영문을 모른 채 나를 따라 웃었다. 보호소를 안내해주던 이 반장은 말했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소니한테 물어보라고. 저래 보여도 사무소에서만큼은 나보다 선임이니깐.” 이 반장은 소니를 가리키면서도 내 쪽을 흘끔거렸다. 철장 안의 소니보다 나를 더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살아오며 항상 마주쳐야 했던 눈빛이었기에 새삼스럽진 않았지만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라면 많은 혼혈을 봤을 텐데. 마치 외국인을 처음 본 사람처럼 계속해서 곁눈으로 슬그머니 흘겨봤다. 아마도 같이 일하는 사람 중 혼혈은 처음인 것 같았다. 나는 이 반장이 가리키고 있는 소니를 쳐다봤다. 내 옅은 커피색 피부보다 소니의 피부는 희었다. 소니의 피부는 한국인들이 살색이라 부르는 옅은 귤색에 가까웠다. 나는 종이컵에 물을 따르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소니가 언니, 하며 나를 불렀다. 그녀는 한 아름 크기의 원을 손으로 그렸다. 나는 그녀의 뜻을 이해했지만 왜 그렇게 많은 물이 필요한지 이해되지 않았다. 소니가 다시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가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왔다. 대야 한가득 담긴 물을 본 소니는 구역질을 멈췄다. 소니는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수면 위를 내려다봤다.‘후훕 후훕’소니의 날숨과 들숨소리가 보호실에 울려 퍼졌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소니가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대야에 담갔다. 넘쳐난 물이 바닥을 적셨다. 정수리까지 잠기자 찰랑대며 흘러넘쳤던 물결이 잠잠해졌다. 소니의 숨소리가 사라지자 보호소는 파도가 멈춘 바닷가처럼 고요해졌다.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얕은 내 숨소리뿐이었다. 소니의 앞머리가 흘러내렸다. 수면 위로 소금쟁이 발자국 같은 작은 물결이 일렁였다. 얼마나 지난 걸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고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소니는 미동조차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마음이 초조해졌다. 철창을 열려는데 소니가 대야에서 고개를 들었다. 물방울들이 그녀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졌다. 소니가 소매로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소니 땅 멀미했다. 이젠 괜찮다.” 땅 멀미? 배를 오래 탄 선원들이 뭍에 올라오면 멀미를 한다고 하던데, 그걸 말하는 건가. 소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같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도 온전히 자기 뜻을 전달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소니는 지금 외국어를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쇠창살에 기대앉은 소니가 말했다. “소니는 바다에 살았다. 발, 땅에 안 디뎠다.” 물방울이 소니의 이마에서 볼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다. 채 마르지 않은 물방울의 궤적을 따라 형광등 불빛이 반사됐다. 소니가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치며 말했다. “소니 여러 여름 전, 바다 떠났다.” 그녀는 땅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올라선 땅은 흔들렸다. 바다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울렁거림을 겪어야 했다. 바다를 떠나야 했던 이유를 그녀가 설명했지만 어눌한 발음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땅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한국까지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에서도, 쪽방에서도, 화장실에서도 매 순간 속은 메슥거렸다. 나는 며칠 전 봤었던 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바다에서 생활하는 소수종족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바다 집시라 불리는 그들은 육지에 올라오면 오히려 멀미를 느낀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온난화와 주변 국가의 압력 때문에 땅에 정착해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엄마가 동생을 낳다 죽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 그녀의 국적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저 내 피부색을 보며 다큐멘터리에 나온 저들처럼 바다와 강렬한 해가 있는 지역 출신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 그러고 보니 소니의 피부색은 그들이나 나보다 옅었다. 지하층 계단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 등이 나간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집주인은 갈아주지 않고 있었다. 흐릿한 빛에 의지해 현관문을 열었다. 안은 말라버린 우물 속처럼 컴컴했다. 벽을 더듬자 콘크리트의 냉기가 손끝에 스며들었다. 스위치를 찾지 못한 나는 어둠 속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채 몇 걸음 떼지도 못한 채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무릎과 정강이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 찔끔 오줌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퀴퀴한 지린내가 밀려왔다. 나는 팬티를 갈아입을 생각도 않은 채 그대로 침대까지 기어가 누웠다. 첫 밤샘근무였고 한밤중에 소동까지, 피로에 찌든 몸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다. 얼마나 잔 걸까? 알 수 없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눈가를 만졌다. 다행히 손끝에 느껴지는 물기는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채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눈에 무슨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꿈을 꾸며 눈물을 흘린다는 걸. 무슨 꿈인지는 알지 못했다. 마치 교통사고 후의 기억상실증처럼 꿈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깨어날 때마다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허기가 엄습해왔다. 더듬거리며 일어나 방에 불을 켰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밤중이었다. 통증처럼 허기가 밀려왔다. 라면 두 개를 끓였다. 밥까지 말아 먹고 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다 먹고 난 냄비를 싱크대에 놓았다. 수도꼭지를 틀자 빈 냄비 속으로 물이 쏟아졌다. 냄비 속 옅어진 갈색 국물이 거품을 내며 소용돌이쳤다. 밥풀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다 넘쳐나는 물을 따라 개수대로 흘러갔다. 땅멀미를 한다는 소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멀미할 때처럼 속이 울렁였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동생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울렁임은 더욱 심해졌다. 배를 채우면 이 메스꺼움이 좀 가라앉지 않을까. 찬장에서 감자칩을 꺼내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키듯이 넘겼지만 메스꺼움은 쉬이 달래지지 않았다. 보호실 철문이 열리고 이 반장과 함께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이런 곳이 처음인지 창살 안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어린이 팔뚝만 한 쇠봉이 한 뼘 간격으로 세워진 창살 안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여자 외국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마루 형식으로 된 바닥에 국적별로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소니만이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은 채 구석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사무소 직원이 아닌 듯 남자는 관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검은색 쟈켓에 베이지색 면바지, 그리고 특징 없는 인상은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십대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이 반장이 소니를 조사실로 호출했다. 남자는 조사실로 들어갔다. 둘은 삼십 분 정도 조사실에 있었다. 가끔 소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끈적끈적하니 교태가 묻어있는 웃음이었다. 조사실에서 나온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어그러뜨렸다. 황당하다는 웃음 같기도, 싱겁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남자와는 다르게 뒤따라 나오는 소니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남자는 이 반장에게 짧게 말을 전한 후 돌아갔다. 나는 이 반장에게 다가갔다. 저분은 누구예요, 라는 내 물음에 이 반장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밀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순순히 돌아갔다. 내 태도에 이 반장은 당황한 듯싶었다. 쩝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더니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소니가 진짜 이름일까?” 나는 그제야 이 반장이 비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는 걸 눈치챘다. 나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최대한 지어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잘 직시하지 못했다. 나의 피부색을 처음 본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표정이 굳는다. 그리고는 바로 꼬인 가방끈을 고쳐 매듯 낯을 바꾼다. 마치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어떤 반감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냥 본능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그 표정을 본 나로서는 더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 반장은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말했다. “당연히 진짜 이름 아니지. 소니 들어봤잖아. 워크맨 만드는 전자회사” 작년 겨울, 한 베트남인이 여고생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 사건은 십분 정도 모 포털 사이트 검색어 톱을 차지했다. 첫눈이 오기 전날 대대적인 불법 체류 외국인 단속이 벌어졌다. 그날 밤 노래방을 덮친 경찰은 손님의 노래에 맞춰 탬버린을 치고 있는 소니를 붙잡았다.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녀는 첫눈을 맞으며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넘겨졌다. 그녀의 지문과 일치하는 한국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입국 관리 사무소로 넘겨진 불법 체류 외국인들은 사무소 내에 있는 보호실에 임시로 수감된다. 제일 먼저 그들의 국적을 확인하는데 가끔 추방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국적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소니는 아예 한국어를 모르는 척했다. 여러 언어의 통역사들이 말을 걸어봤지만, 그녀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척 연기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협조하지 않는 한 그녀의 모국어가 무엇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굉장히 난감해했다. 직원들은 소니의 소지품을 확인했다. 수거된 소지품에서 신원의 단서를 찾아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품에 지니고 다닌다. 신분증부터 휴대폰, 수첩, 메모 등. 그러나 그녀의 소지품이라고는‘SQNY’라고 로고가 박힌 짝퉁 휴대용 라디오뿐이었다. 나중에 그녀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은 발각되었지만, 그녀의 국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절대 신원의 실마리가 될 이야기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 마지막 눈이 녹았지만, 여전히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심문에 잘 대답하다가도 신분이 노출될 만한 질문이 들어오면 입을 다물거나 딴소리를 해댔다. 그 엉뚱한 말들 때문이었을까, 심문했던 직원들 중 몇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원에 보내져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각국 대사관에 그녀의 사진이 포함된 협조문도 보내졌다. 미친 것은 아니라는 의사의 소견과 자기네 국민이 아니라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몇몇 국가는 아예 회신조차 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출입국 관리 사무소의 보호실은 외국인 보호소로 이송되기 전, 하루나 이틀 정도 임시 수용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골치 아플 것을 눈치챈 외국인 보호소는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버렸다. 이름이 없으니 불편함을 느낀 직원 하나가 그녀를 소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도 그 이름이 맘에 들었는지 자신을 소니라 소개했다. 이야기를 듣던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근무 첫날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이 반장에게 했다. 소니가 바다에서 왔다는 내 말에 이 반장은 껄껄대며 웃었다. “소니는 신입이 오면 꼭 한 번씩 골탕을 먹이더라고. 내가 말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그냥 맘 편하게 신고식이었다고 생각하도록 해.” 이 반장은 은근히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이 반장은 말했다. “나도 올 초 여기 사무소로 발령받아 왔을 때 감쪽같이 속았다고. 소니가 자기는 동생한테 이름을 빼앗겼다는 거야.” 소니는 자신이 일 가구 일 자녀 정책을 펴는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이 반장에게 말했었다. 소니의 아버지는 아들을 원했다. 첫아이가 소니이자 벌금을 낼 형편이 못 됐던 그녀의 아버지는 앞으로 태어날 남동생을 위해 그녀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대신 미리 지어 놨던 남자 이름, 남동생에게 주어질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태어난 남동생이 가져가 버렸다. 그녀는 이름도 없고 서류상으로도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소니의 비밀을 알게 된 이 반장은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런데 다 거짓말이었어. 중국대사관에 동생 이름을 문의해 봤더니 그런 자는 없다는 거야.” 소니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상하게도 먹먹해진 내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내 안의 무언가가 건드려진 것 같았다. 나는 만난 적 없는 엄마와 기억나지 않는 꿈을 떠올렸다. “아마도 소니는 여기서 두 번째 겨울은 나지 못할 것 같아.” 이 반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나 보다. 내 반응에 이 반장은 신이 났는지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아직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윗분들이 그녀를 풀어주려 한다고 했다. 어차피 더는 그녀의 신원을 알아낼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가둬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혹시 간첩이 아닐까 ’누군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방금 전 소니를 조사했던 남자는 이를 규명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남자가 지었던 표정으로 봐서 그녀는 간첩이 아닌 게 분명했다. 창살 사이로 소니를 바라봤다. 분명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그녀는 시치미를 뚝 떼고 티브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터운 쌍꺼풀에 불거진 광대뼈, 두꺼운 입술 위로 큼지막하게 자리한 뭉툭한 코. 아무리 뜯어 봐도 어디 사람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속으로 삼키듯 소니를 발음해 봤다.‘SONY’라는 글자를 전 세계 사람 모두 소니라고 발음한다는 기사를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똥별 같은 느낌을 주는 소니라는 어감은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최소화한다고 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그녀와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 비록 ‘SQNY’라 적힌 그녀의 라디오는 짝퉁이지만. 핸드폰 벨소리에 눈을 떴다. 팔을 뻗어 보려 했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야간근무를 시작한 후부터 낮에는 앓는 사람처럼 곯아떨어져 버렸다. 벨소리는 곧 끊어졌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동생에게서 부재중 전화와 함께 문자가 와 있었다. ‘어머니 제사 때는 집에 올 거지?’ 동생의 문자를 다 읽은 나는 그대로 이불 위로 쓰러졌다.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며 꿈을 기억해 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의 추억처럼 꿈은 기억나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 문을 열자 어제 먹다 남긴 치킨이 보였다. 차가운 치킨을 데우지도 않고 먹기 시작했다. 살코기는 푸석댔고 닭 껍질은 질겼다. 차가울 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기계적으로 씹을 뿐이었다. 접시 위의 치킨은 모두 없어졌지만,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온전한 것을 찾아 수북이 쌓인 닭 뼈 사이를 뒤적였다. 손에 닭 목이 걸려 올라왔다. 튀김가루가 다 떨어져 앙상해진 닭 목을 통째로 씹었다. ‘빠드득’ 입안에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어금니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입 밖으로 삐죽거리며 새어 나왔다. 엄마의 제사는 연극 같았다. 나는 엄마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엄마는 불법 체류 외국인이 되어 아직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나를 낳았는지, 왜 고향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지만 나는 엄마를 찾지 않았다. 대신 단속에 걸린 불법체류 외국인들이 보호실로 들어올 때마다, 엄마 또래의 외국인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얼굴을 모른다. 마치 쏘기 직전의 활처럼 소니와 나이지리아 여자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어제 들어온 금발의 우즈베키스탄 아가씨는 커다란 눈망울로 둘의 눈치만 살폈다. 나는 슬며시 수화기를 들어 이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이지리아 여자는 들어온 지 일주일이 넘었다. 벌써 외국인 보호소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난민신청 문제로 이송이 지연되고 있었다. 소니는 그동안 보호실의 터줏대감처럼 행동했었다. 워낙 오래 있었고 기가 셌기 때문에 처음 들어온 외국인들은 그녀에게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여자는 자신의 덩치를 믿고 그녀를 무시했다. 아슬아슬했던 둘 사이가 결국 터지려 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 여자가 소니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금이 그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소니의 영역은 티브이 맞은편 창가 아래였다. 사람들은 아무리 보호실이 붐벼도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고 직원들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다른 수감자들과는 달리 소니는 너무나 편안한 얼굴로 그곳에서 티브이를 보거나 낮잠을 청했다. 소니가 나이지리아 여자에게 먼저 주먹을 날렸다. 소니의 주먹이 정확히 나이지리아 여자의 얼굴을 때렸지만, 나이지리아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이지리아 여자가 성큼 달려들어 소니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검은 표범을 연상시키는 그녀는 보통의 남자보다 몸무게도 더 나갔으며 몸도 더 우람했다. 작은 키에 마른 편인 소니는 금방이라도 찢길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나이지리아 여자는 소니의 머리를 흔들어 대며 괴성을 질러댔다. 그 기세에 우즈베키스탄 아가씨는 구석으로 도망쳤고 철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나도 멈칫했다. 아직 이 반장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잠깐 망설였지만 뭉치로 뽑혀 휘날리는 소니의 머리카락을 보자, 큰일 나겠다 싶었다. 무작정 안으로 뛰어들어 나이지리아 여자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나이지리아 여자가 파리를 쫓듯 팔을 휘젓자 나는 그대로 날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틈에 소니는 나이지리아 여자의 팔을 깨물었다. 나이지리아 여자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소니의 머리카락을 잡아끌었다. 얼마나 세게 당기는지 소니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고 눈초리는 찢어질 듯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소니는 나이지리아 여자의 팔을 두 손으로 꽉 쥐고는 놓아주지 않는다. 흰자위로 금이 가듯 붉은 실핏줄이 섬뜩하게 번져 갔다. 이 반장이 도착했을 때 나이지리아 여자는 제발 놓아 달라며 울고 있었다. 나와 이 반장, 우즈베키스탄 아가씨가 달려들어 겨우 소니를 떼어 놓을 수 있었다. 소니의 입은 거품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나이지리아 여자의 팔뚝은 처참하게 살점이 뜯겨 있었다. 소니는 분이 안 풀리는지 몇 번이고 이를 드러내며 나이지리아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보고를 받은 김 실장이 달려왔다. 나이지리아 여자는 병원으로 이송됐고 김 실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소니를 한참 동안 노려봤다. 다음 날 아침, 퇴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반장이 들어왔다. “같이 병원 좀 가줘야겠는데.” 이 반장은 소니와 나를 차에 태우고 인근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어제 싸움을 보고 김 실장이 특별 지시를 내린 모양이었다. 여자 수감자가 외출할 때는 반드시 여직원이 동행해야 했다. 소니는 차창 밖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랜만의 외출이어선지 살짝 들뜬 것처럼 보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병원 대기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번 왔었는지 이 반장은 간호사와 아는 척을 했다. 대기 순번을 보니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접수를 마친 이 반장은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펴들었다. 느긋한 그의 모습을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 지금쯤이면 거의 집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당장 쓰러질 것같이 피곤했다. 핸드폰 벨소리가 고요한 대기실에 울렸다. 이 반장이 황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갔다. 간호사들만 이리저리 바삐 움직일 뿐 대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멍하니 티브이만 들여다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밖으로 나간 이 반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어스레했었는데 어느새 대기실은 햇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슬슬 데워지기 시작한 볕은 커피 잔의 온기처럼 따스했다. 머리가 무거워지며 눈꺼풀이 스르륵 감겨 왔다. 고개를 흔들어 봤지만 집요하게 따라 붙는 졸음을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슬쩍 소니를 쳐다봤다. 소니도 대기실의 다른 이들처럼 아침드라마에 넋을 놓고 있었다. 열중했는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이 스르륵 풀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사막에 있었다. 작은 모래 구릉들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었다. 나 이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일 높아 보이는 모래 구릉으로 올라갔다. 주변을 살펴봤지만, 예상대로 모래벌판 외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모래 속에서 한참을 달렸지만, 소리의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 기진맥진해진 나는 멈춰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 격양된 노인의 언성과 가는 아이의 음성, 사투리도 들려왔고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도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무력감에 빠져 주저앉는데 저 멀리 누군가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히잡 같은 스카프를 머리에 둘렀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를 쫓았지만, 그녀와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두려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여보세요!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제발 알려주세요.’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녀가 바로 엄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눈을 떠 보니 간호사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손을 들어 눈가로 가져갔다. 축축한 물기가 만져졌다. 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간호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환자분 어디 가셨어요? 진료실로 들어오시라는데.” 옆을 보니 소니가 앉아 있어야 할 의자가 비어 있었다. 뒤통수가 서늘해지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기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뒷줄에 새로 온 이들이 보였다. 화장실로 달려가 봤지만, 소니는 없었다. 사람들에게 소니를 봤는지 물어봤지만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목이 탁 막혀 왔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이 반장이 들어왔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소니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내 이야기를 들은 이 반장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이 반장을 쫓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 반장의 모습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소니는 어디로 간 걸까. 소니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뿐, 어디로 갔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수많은 목소리와 거리의 소음들이 한꺼번에 귀로 파고들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 내 모습이 이상했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은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문득 스쳐 가는 한 여자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옆모습은 소니와 닮아 보였다.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안경을 쓴 여자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소니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 여자에게 사과한 후 무턱대고 앞으로 걸어갔다. 정류장이 보였다. 버스가 멈춰 서자 소니와 닮은 여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나는 누구를 쫓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가방을 멘 여자를 따라갔다. 한참을 쫓는데 여자가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에도 소니가 아니었다. 여자의 한국말은 너무나도 유창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반장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출입국 관리 사무소로 돌아갈까.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데 옅은 커피색 피부의 손등이 보였다. 보호소 철장 안에 이런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은 많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도망쳐 나온 게 내가 아닐까.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리를 가득 메운 간판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일그러진 간판의 글자들은 처음 보는 외국어처럼 낯설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여기 이곳의 내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빈 석상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던 걸까, 핸드폰이 울렸다. 이 반장에게 온 전화였다. 그는 소니를 찾았으니 집으로 퇴근하라 했다. 소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침한 표정으로 자신의 영역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내 기분은 가을비처럼 오락가락했다. 도망친 것에 대해 화가 나기도 했고 돌아와 준 것에 대해 고맙기도 했다. 소니는 도망친 지 네 시간여 만에 자기 발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직원들은 그녀가 어디를 갔다 온 건지 몸이 달 정도로 궁금해했다. 하지만 소니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았다. 며칠 후 이 반장이 비디오테이프를 가져왔다. 병원 근처 지하철역의 개찰구와 그 앞 대합실을 찍은 CCTV 영상이었다. 하단의 숫자는 소니가 도망친 날의 아침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 반장이 ‘저기다. 저기’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화면 끝에서 소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아홉 시 삼십 분이었다. 병원에서 역까지는 걸어서 십분 정도 거리였다. 내가 졸자마자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녀는 대합실에 설치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하단의 숫자가 열두 시를 넘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눈길을 보내지도 않았다. 이 반장이 비아냥거렸다. “돈이 없으니 아무 데도 못 가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아는 소니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사람을 속여서라도 갈 사람이었다. 이 반장은 의심스러운 장면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며 한 번 더 비디오를 틀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화면을 스쳐 지나갔고 의자에 앉은 소니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반장과 나는 어떤 징계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소니의 도주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갈까 봐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그 사건 이후에도 소니는 예전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새로 들어온 외국인들에게 텃세를 부렸고 자신의 영역에 누워 드라마를 봤다. 그렇게 소니가 또다시 겨울을 보호소에서 날 줄 알았다. 하지만 첫눈 예보가 있던 날 소니의 석방이 통보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소니는 거품을 물고 뒤로 나자빠졌다. 그래도 통하지 않자 자신의 몸에 자해를 했다. 결국, 소니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하지만 윗사람들은 단호했다. 그런 소동을 부렸음에도 다음 날로 석방이 미뤄졌을 뿐이었다. 새로 온 소장은 골치 아픈 문제를 빨리 치우고 싶어 했다. 이 반장은 병원에서 돌아온 소니를 잘 감시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첫날처럼 보호실에는 나와 소니 둘만이 남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다른 수감자들은 일찌감치 외국인 보호소로 보내 버렸다. 취침시간이 지났는데도 소니는 자리에 눕지 않았다. 불을 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답을 바라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톤으로 소니가 말했다. “소니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지하철역을 말하는 건가,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소니가 말했다. “사람들은 걸을 때 참 무서운 얼굴을 한다. 그런 얼굴로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소니는 고개를 돌려 나의 눈을 바라봤다. 소니의 눈동자는 마치 갓난아기의 눈처럼 샛말갰다.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흰 얼룩 같은 눈송이가 쌓이고 있었다. 어제 내릴 거라던 첫눈은 오늘 아침에야 내리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파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소니는 예정대로 오늘 아침 석방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불법체류 외국인들이 이송되어 왔기 때문에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소니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소니는 어디로 간 걸까. 마치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거리에는 눈이 쌓여 가고 있었다. 나는 소니의 발자국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벌써 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에 의해 어지럽혀 있었다. 무작정 소니의 흔적이라 짐작되는 발자국을 따라갔다. 눈바람이 날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발자국들은 뭉개졌다. 나는 발자국을 놓쳤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역 앞이었다. 나는 역으로 들어갔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역은 붐볐다. 부딪히지 않게 나는 어깨를 움츠려야 했다. 그때, 왠지 낯이 익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도망친 소니가 앉았던 지하철역의 의자였다. 나는 그 의자로 가 앉았다. 소니의 말대로 사람들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빠르게 내 앞을 지나쳐 갔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나는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지우개로 지워지듯 오고 가는 사람들은 점점 옅어져 갔다. 결국, 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져 버렸고 역에는 나 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소리들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주변 소음은 오히려 증폭되어 귓전을 때렸다. 전차가 진입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전차는 A시 공단역으로 갈 것이다. 엄마는 A시 공단역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소니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끝>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