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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 유적지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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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밤의 홍차는 어떻게 혁명의 불꽃이 됐나 [한ZOOM]

    그날 밤의 홍차는 어떻게 혁명의 불꽃이 됐나 [한ZOOM]

    일상처럼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지도가 없어도 길을 잃지 않는 기적 같은 도보여행.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낭만적인 도시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품고 있는 곳, 바로 보스턴이다. 이 도시의 매력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서는 다운타운 바닥에 촘촘히 박힌 ‘붉은 벽돌 선’을 따라가면 된다.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자유의 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1951년 보스턴 헤럴드의 언론인 ‘윌리엄 스코필’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우리 도시에 있는 유서 깊은 독립운동 기념장소를 걸어서 찾아갈 수 있도록 연결하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시정부는 흔한 안내판을 세우는 대신 바닥에 붉은 벽돌을 깔어 도시 전체에 흩어진 16개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했다. 그 덕분에 이 도시를 찾은 사람들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이 선을 따라 걸으며 독립운동 유적지를 완주할 수 있게 됐고, 어느덧 이 길은 보스턴의 자랑거리이자 상징이 됐다. 이제 이 매혹적인 붉은 흔적을 따라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세 가지 장소로 걸어가 본다. ●올드 사우스 집회소 : 홍차를 버린 밤, 미국의 커피가 태어난 밤 “이제 말로써 나라를 구하는 단계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1773년 12월 16일 차가운 밤, 한 남자의 외침과 함께 거친 숨을 몰아쉬는 군중의 함성이 항구로 향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분장을 한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 앞이었다. 이들은 배에 올라 밤새도록 342상자의 홍차를 바다로 던져버렸다. 바다가 찻잔처럼 갈색으로 물들던 그 순간이 바로 세계사를 뒤흔든 ‘보스턴 차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항구로 출발했던 곳은 보스턴 다운타운 한복판에 위치한 ‘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다. 현대적인 고층 빌딩 사이에서 당당히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과 첨탑을 드러내는 모습이 인상적인 공간이다. 특히 좁은 내부로 들어가면 그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그날 이들이 바다에 쏟아버린 것은 단순한 홍차 상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금을 무기로 신대륙 이주민들을 탄압하는 영국에 맞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기 위한 처절한 외침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인들은 영국의 상징인 홍차를 마시는 것을 배신으로 여겼고,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대의 커피 소비국이 된 것은 이 뜨거웠던 밤에서 비롯된 나비효과의 결과인 셈이다. 지금은 평화롭게 커피를 손에 든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광장이 됐지만, 그 평범함을 손에 쥐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제국의 횡포에 맞서 싸운 혁명의 공간이었다. ●폴 리비어의 집 : 어둠을 가르며 새벽을 깨운 장인의 질주 1775년 4월 18일 깊은 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말 한 마리가 새벽을 달리고 있었다. 영국군이 독립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민병대 무기고를 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남자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렉싱턴과 콩코드로 달려가 죽을힘을 다해 영국군이 온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민병대는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고, ‘렉싱턴∙콩코드 전투’는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이자 민병대가 영국을 물리친 첫 승리가 됐다. 이 극적인 밤의 주인공은 정치가도, 군인도 아니었다. 그저 은(銀)을 두드리던 평범한 장인, ‘폴 리비어’였다. 보스턴 노스엔드의 좁은 골목길을 걸으면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에서 홀로 우뚝 서 있는 소박한 회색빛 2층 목조 주택을 만날 수 있다. 1680년경에 지어진 이곳은 폴 리비어가 살던 집으로, 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낮은 천장을 보고 있으면 죽을힘을 다해 말을 달리던 그의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미국의 독립이 절대 영웅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당시 낮에는 먹고사는 고민을 하던 평범한 사람들이 밤이 되면 자유와 정의를 고민했다. 이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오늘의 세계 초강대국 미국은 존재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번커힐 기념탑 : 위대한 패배가 쏘아 올린 승리의 서막 독립전쟁 초기, 번커힐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던 민병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눈앞에서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영국군이 총검을 앞세우고 달려오고 있었다. 반면 민병대는 정규군도 아니었던 데다가 병력도, 무기도 모두 턱없이 부족했다. 객관적인 상황만 보자면 지는 싸움이었다. 이때 민병대 사령관이 명령을 내렸다. “적의 눈동자가 하얗게 보이기 전까지는 절대 총을 쏘지 마라!” 총알을 아끼며 최대한 적을 끌어당겨 단 한 발의 총알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군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민병대는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총알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후퇴하기는 했지만 두려움을 이겨내고 타이밍을 기다려 영국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전투였다. 프리덤 트레일의 종착지인 찰스타운의 언덕 위에는 이 치열했던 전투를 기념하는 높이 67m의 ‘번커힐 기념탑’(Bunker Hill Monument)이 세워져 있다. 탑 주위에는 그날의 분위기와 정반대로 잔디밭에서 사람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 294개의 좁은 돌계단을 올라 도착한 전망대에 서면 보스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역사는 번커힐 전투를 ‘패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했던 민병대가 세계 최강의 영국군에 맞서 “어쩌면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한 전투였다. 그 확신은 독립이라는 위대한 승리를 안겨준 시작이 됐다. 이 기념탑은 그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아꼈던 총알 한 발 한 발의 무게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보스턴 붉은 벽돌길 완주 보스턴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한 역사를 박물관에 박제하지 않았다. 대신 그 역사를 만들어 간 평범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일상을 함께 하는 붉은 벽돌길로 만들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보스턴에 발을 내딛는 순간 스마트폰 지도를 잠시 접어두자. 그리고 발 아래에 펼쳐질 붉은 벽돌길을 따라 걸음을 옮겨보자. 그러면 역사책 속 글자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걸을 수 있는, 세상에 없는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 코트라·보훈부, 국회 보훈사적지 보존관리 활성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와 국가보훈부가 13일 ‘국외 보훈사적지의 보존관리 및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국외사적지란 상하이 정부임시청사처럼 외국에 있는 독립운동 현장이나 유적지로 전 세계 39개국 1400여곳에 이른다. 코트라는 보훈부가 세계 각지의 해외무역관을 활용해 국외 보훈사적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보훈부는 코트라 해외무역관이 현장에서 실질적인 관리와 홍보를 할 수 있도록 국외 보훈사적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코트라는 이번 협약을 통해 우리 기업과 현지 기업이 비즈니스 관계에서 신뢰를 쌓을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한다.
  • 성경책 지게에 얹고 버선 속엔 독립선언서… 선교사들 발자취 따라 저 깊은 ‘나’를 만나다

    성경책 지게에 얹고 버선 속엔 독립선언서… 선교사들 발자취 따라 저 깊은 ‘나’를 만나다

    #감리교 선교 발상지 강원도춘천엔 ‘지게 전도사’ 이덕수 자취 방탕한 청춘 접고 복음 전파 실천 고성엔 2대째 헌신한 닥터 홀 흔적선교 위해 이역만리 조선으로 떠나자유와 평등 가치 전파 위해 사역 아들은 결핵 퇴치 ‘X- mas실’ 보급#3·1운동 불길 이어간 양양·강릉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 숨긴 조화벽만세고개에서 청년들과 독립 함성버스가 강원 고성군 진부령을 향해 굽이굽이 오르는 동안 함박눈이 쏟아졌다. 도로는 뱀처럼 꼬였다. 최신형 고속버스도 이 고개에서는 속도를 낮춰야 했다. 1890년대 성경책을 지게에 얹고, 혹은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이 산을 넘었을 기독교인을 떠올리니 가슴이 서늘하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주최로 최근 진행된 강원도 기독교 근대문화유산 탐방에 동행했다. 춘천, 고성, 양양, 강릉, 원주를 잇는 약 420㎞ 여정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과거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가난했어도 결코 부끄럽지 않았던 우리 과거와 마주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유적지 답사는 우리 내면을 찾아가는 여행과 의미가 같다. 이번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감리교’다. 국내 개신교 중 가장 규모가 큰 교단은 장로교이지만, 유독 강원도만은 감리교의 위세가 압도적이다. 이는 기독교 선교 초기의 ‘선교 지역 분할 협정’ 때문이다.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각 교단이 맺은 약속이었다. 3·1운동도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독립운동이 불붙기 시작할 때 기독교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강원 지역도 마찬가지다. 다만 당시 기독교인들이 한강 이남에서 흘린 피의 역사가 더 광범위하게 알려졌을 뿐이다. ●한국인 전도사 성지 ‘예술마당’ 변신 가장 먼저 갈 곳은 수도권에서 가까운 춘천시 중앙감리교회다. 물론 기독교 선교 초기의 강원권 ‘선교 루트’는 이와 달랐다. 조선 말기엔 북한 지역의 교통망이나 산업 발전 정도가 남한보다 우세했다. 게다가 강원도는 진부령과 대관령 등 험준한 산악 지형에 막혀 접근이 힘든 지역이었다. 이 탓에 초기 선교사들은 상대적으로 평탄한 원산(당시에는 강원도, 현재는 함경남도)까지 육로로 간 뒤, 뱃길을 이용해 고성과 양양, 강릉 등으로 남하하는 경로를 택했다. 강원 지역 선교의 특징은 한국인 전도자들의 활약이 컸다는 것이다. 특히 춘천 지역이 그랬다. 1898년 세워진 춘천중앙교회는 강원 지역 초기 복음화의 중심지다. ‘지게 전도사’로 불린 이덕수(1858~1910) 전도사가 성경을 지고 장터와 마을을 돌며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젊은 시절 술과 노름에 빠졌던 그는 복음을 만나 완전히 달라졌다. 이후 매일 성경책과 전도 책자를 지게에 가득 짊어지고 춘천 시내를 누볐다고 한다. 춘천중앙교회 초기 모습 가운데 현재 남은 건 1950년대 본당이었던 적벽돌 건물이다. 1955년 예수교 병원을 인수해 예배당으로 썼다. 현재는 춘천시에서 매입해 춘천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각 당시의 단아한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춘천미술관 뒤는 중앙교회가 1970년 건축한 이른바 ‘아폴로 예배당’이다. 교회 생김새가 아폴로 우주선을 닮아 이런 별칭을 얻었다. 현재는 복합 문화공간인 ‘봄내극장’으로 쓰인다. 춘천에선 이 일대를 ‘춘천예술마당’이라 부른다. ●태평양 건너온 청진기와 만나다 초봄에도 함박눈 퍼붓는 진부령을 넘어서니 고성군이다.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화창하다. 영서와 영동의 날씨가 서로 딴청을 부리는 듯하다. 고성군에서 만난 기독교 성지는 화진포호다. 송지호와 더불어 고성군을 빛내는 두 개의 맑은 눈동자다. 화진포호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석호(潟湖)다. 내륙의 자연호수와 달리 담수와 해수가 뒤섞였다. 호수 주변에 이승만, 이기붕 등 당대 권력자들의 별장이 몰려 있다는 것만으로 화진포호의 빼어난 자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셔우드 홀 선교사 가족이다. 2대를 이어 한국 선교에 헌신한 미국·캐나다 출신의 의료 선교사 가문이다. 화진포호 초입에 홀 선교사 가족을 기념하는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이 있다. 문화공간의 명칭이 된 셔우드 홀(1893~1991)은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보급하는 등 결핵 퇴치에 앞장선 인물이다. 현재 ‘김일성 별장’이라 불리는 건물을 1938년에 처음 지은 뒤 ‘화진포의 성’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붙인 이도, 이 일대를 외국인 선교사 휴양지로 조성한 이도 그다. 이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다. 2대에 걸친 이 가족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셔우드 홀의 부모는 윌리엄 제임스 홀(1860~1894)과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한국 이름 허을) 부부다. 미국 출신의 의사 커플이었던 둘은 조선에 들어와 평양 선교를 담당하게 된다. 이때 태어난 아들이 셔우드 홀이다. 당시 평양 주민들은 갓 돌을 지난 서양인 아기를 무척 신기하게 여겼고, 부러 구경을 오기도 했다. 이를 선교에 활용한 것이 이른바 ‘구경 선교’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청일전쟁 와중에 부상병을 돌보던 윌리엄 홀이 전염병으로 요절한다. 남편의 부재에도 새색시나 다름없던 ‘허을 여사’의 조선에 대한 헌신은 멈추지 않았다. 그 절절한 과정이 ‘셔우드 홀 문화공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내 심장도 조선과 함께 뛴다” 문화공간 1층은 로제타 홀, 2층은 셔우드 홀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1층에 들어서면 로제타 홀이 미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40일간의 기록을 담은 ‘두루마리 기행 편지’가 객을 맞는다. 고향 집에 보내기 위해 폭 17㎝의 한지 34장을 이어 붙인 편지다. 미국에서의 보장된 삶을 뒤로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겠다”며 불모의 땅으로 향했던 20대 여성 의사의 두려움과 절절한 심정이 담겼다. 허을 여사는 흔히 ‘한국 맹아의 어머니’라 불린다. 평양에 맹아학교를 설립하고 한글 점자를 최초로 사용하는 등 앞을 못 보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여성의 건강권 보장과 여성 의료인 양성이다. 1890년 조선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인 ‘보구녀관’(이화여대 병원의 전신)을 세웠고, 조선 최초의 여의사인 박 에스더(본명 김점동) 등 여성 의료인을 길러냈다. ‘보구’는 보호하고 구한다의 앞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이번 여정을 통틀어 가장 감동적이었던 문장 “나의 청진기로 조선 사람들의 심장을 진찰할 때면 내 심장도 조선과 함께 뛴다”는 말을 남긴 것도 이 즈음이다. 동행한 한교총 대표회장 김정석 목사는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과 여성, 장애인 등 약자를 섬겼던 로제타 셔우드 홀 같은 선교사들이 확산시킨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의 가치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했다. 어머니가 심은 씨앗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셔우드 홀은 어머니가 애정을 쏟았던 ‘이모’ 박 에스더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결핵 퇴치에 헌신하기로 마음먹는다. 1928년 국내 최초 근대 결핵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웠고, 1932년에는 숭례문 도안이 담긴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 강제 출국당하기까지 모두 아홉 차례 크리스마스실을 내놓았다. ‘화진포의 성’은 1940년 일제가 스파이 혐의로 셔우드 홀을 추방하면서 그의 손에서 떠났다. 광복 뒤 이 지역이 38선 이북이 되자 김일성 일가가 휴가 때 사용했다. 그래서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랑과 헌신으로 쌓은 돌집에 분단의 상처가 덧씌워진 것이다. ●두 여성의 길이 만나는 곳 고성에 로제타 홀이 있다면 양양에는 조화벽(1895~1975)이 있다. 유관순 열사의 올케라고 소개하면 좀 더 알기 쉽겠다. 로제타 홀과 조화벽은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려움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 한 사람은 청진기로, 또 한 사람은 버선 속 문서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로제타 홀은 이 길이 옳은 길이기를 되뇌며 태평양을 건너는 배에 몸을 실었고, 조화벽은 버선 안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일제의 검문소 앞에 섰다. 조화벽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양양군 현북면 7번 국도에 있는 만세고개다. 1919년 4월 4일, 3·1 운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 곳이다. 양양 만세운동의 구심점인 조화벽은 감리교 전도사인 아버지와 전도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미국 선교사가 개성에 세운 호수돈여학교에서 공부하며 독립운동에 눈을 뜬 그는 일제의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양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 깊이 숨겼다. 검문소를 지날 때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천신만고 끝에 고향 땅을 밟은 조화벽은 선언서를 꺼내 양양 지역의 감리교 청년 지도자들에게 전달했다. 소식은 들불처럼 번져 만세고개에서 독립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연인원 1만 5000명이 참여한 이 시위에서 3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만세고개에서 내려오는 길, 발아래로 양양의 들판이 펼쳐졌다. 조화벽이 걸었을 그 길에 봄볕이 내리쬐고 있다. 고개는 지금도 그가 남긴 용기를 붙들고 있는 듯하다. ●만세운동과 근대 의료의 자취 강릉중앙교회(1901년)는 영동 지방 선교의 모태다. 이 교회 안경록(1882~ 1945) 목사는 1919년 4월 2일, 교회 청년들을 이끌고 장날 태극기를 뿌리며 시위를 주도했다. 전설적인 ‘원산 대부흥’의 주역인 캐나다 출신 남감리회 선교사 로버트 하디(1865~1949) 기념관도 교회 옆에 마련됐다. 원주에서는 1913년 앤더슨 선교사가 세운 ‘서미감 병원’을 만났다. 스웨덴의 서(瑞), 미국의 미(美), 감리교의 감(監) 머릿글자를 딴 이름에서 보듯, 여러 나라가 협력해 설립했다. 원주기독병원을 거쳐 지금의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으로 이어졌다. 병원 구내에 모리스 선교사 사택(국가등록문화재)이 남아 있다. 1918년 건립돼 현재는 의료사료관으로 쓰인다. 도움말:홍승표 아펜젤러 인우교회 목사·교회사 박사 ■여행수첩 춘천시 외곽의 ‘감자밭’은 베이커리 카페다. 대표 메뉴는 감자빵이다. 쫀득한 겉피에 고소하고 달달한 으깬 감자가 풍성하게 들어가 있다. 고구마빵도 비슷하다. 소양호 아래 신북읍에 있다. 무수히 많은 속초시 해변의 횟집을 보며 ‘선택 장애’가 생긴다면 ‘스끼다시짱 횟집’을 권한다. 양이 푸짐하고, 내는 음식도 다양하다. 원주시 ‘기름장’은 돼지고기 맛집이다. 갈매기살, 항정살 등 다양한 부위를 푸짐하게 내온다. 맛도 정갈하다. 원주 세브란스 병원 인근에 있다.
  • “총 든 여자 안중근”…송혜교·서경덕, 삼일절 맞아 독립운동가 ‘남자현’ 조명

    “총 든 여자 안중근”…송혜교·서경덕, 삼일절 맞아 독립운동가 ‘남자현’ 조명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배우 송혜교가 제107주년 삼일절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알리기에 나섰다. 서 교수는 1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시대의 틀을 깬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해 국내외에 공개했다고 밝혔다. 그는 “4분 분량의 영상은 제가 기획하고 송혜교가 후원했다”며 “한국어 및 영어 내레이션을 각각 입혀 전파 중”이라고 전했다. ‘총을 든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이라는 제목의 영상은 “한국 독립운동사를 빛낸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이자 일제가 ‘전율할 노파’라고 부를 정도로 나이와 성별의 한계를 넘어 활약한 독립투사”라고 남자현을 소개했다. 남자현은 서울에서 참여한 3·1운동을 계기로 당시 다소 늦은 나이인 47세에 만주로 망명해 무장 독립운동 단체 서로군정서에 가입한다. 그는 만주 일대에 교회와 여자교육회를 설립하며 여성 계몽에 열중하고 독립군 부상병 간호에 헌신했다. 이후 독립운동에서 항일 무장투쟁가로 변모했다. 독립단체의 화합을 위해 혈서를 쓰고, 일제가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자 자기 무명지(無名指)를 잘라 쓴 ‘조선독립원’ 혈서를 국제연맹에 보내기도 했다. 그는 61세에 사이토 조선 총독과 무토 전권대사를 직접 처단하기 위해 비밀작전을 수행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체포됐다. 서 교수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재조명하고 국내외에 널리 소개하고자 정정화, 윤희순, 김마리아, 박차정, 김향화에 이어 6번째 영상을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송혜교와 함께 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다국어 영상을 시리즈로 제작해 꾸준히 알려 나갈 계획”이라며 “유튜브 등 각종 SNS를 통해 전파 중이며 전 세계 곳곳의 한인 커뮤니티에도 영상을 공유해 알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와 송혜교는 지난 15년간 역사적인 기념일 등에 맞춰 해외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유적지 37곳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독립운동가 부조 작품 등을 기증해 왔다.
  • 임태희 교육감 “역사는 지킬 것, 버릴 것, 새롭게 바꿀 것 찾는 과정”

    임태희 교육감 “역사는 지킬 것, 버릴 것, 새롭게 바꿀 것 찾는 과정”

    경기교육청,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성과 공유 경기도교육청은 10월 28일부터 5일간의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1회차 성과를 1일 공유했다. 이번 탐방은 ‘광복 80주년 800km 기억의 길에서 독립을 새기다’라는 주제로 교육과정과 연계해 학생이 주도적으로 기획한 독립운동 관련 역사교육 프로젝트로 마련됐으며, 하얼빈, 연길, 대련과 상하이 난징 등 두 개 권역으로 나눠 중국 내 주요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봤다. 탐방은 1회차 포함 총 5회차에 걸쳐, 617명의 학생과 교사가 참여한다. 하얼빈 권역 탐방 첫날인 10월 28일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조린 공원을 방문해 독립운동의 역사와 그 의미를 배우고, 29일에는 731부대 유적지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헌화식을 진행했다. 30일에는 윤동주 생가와 15만 원 탈취 기념비, 연길 감옥 옛터 등을 찾아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임태희 교육감은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라는 말이 있다”면서 “책에서 배운 역사를 직접 보고 느끼며 배움의 의미를 깊이 새기길 당부한다”라고 학생들을 격려했다. 이어 “역사는 무엇을 지켜야 할지,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판단하고 새롭게 바꿔야 할 것을 고민하는 과정”이라면서 “이번 탐방이 선열들의 뜻을 되새기며 스스로 역사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여정이 되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 탐방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 탐방

    “선열들의 피로 쓴 역사, 경기도에서 지켜낼 것” 광복 80주년을 맞아 중국 내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한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회장 김용성 의원)’와 ‘역사바로세우기 경기연대(회장 김성수 의원)’가 5일간의 일정을 마치며,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경기도에서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영토 주권 수호를 위한 활동을 더욱 강력히 펼쳐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광복 80주년, 역사의 현장에서 대한민국을 만나다 탐방단을 이끈 김용성 의원(더불어민주당, 광명4)은 “이번 5일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하이(上海)에서의 찬란한 시작부터 자싱(嘉興)의 처절함, 그리고 항저우(杭州)의 힘겨운 고난까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열들의 피눈물 어린 길을 직접 따라 걷는 시간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용성 의원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대한민국의 뿌리를 확인했다. 이 뜨거운 감동과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돌아가, 선열들이 꿈꿨던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드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강조했다. 고난의 길 위에서 희망을 보다 김성수 의원(더불어민주당, 안양1)은 방문지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이번 탐방이 남긴 교훈을 설명했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좁은 계단을 오르며 대한민국 첫걸음의 위대함을, 홍커우(虹口) 공원에서는 25세 청년 윤봉길의 거룩한 희생을 마주했다”며, “특히 위안부 박물관의 참혹한 기록과 자싱과 항저우의 피난처에 남은 선열들의 고된 삶 앞에서 우리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며, “이 모든 고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불굴의 독립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고 말했다. 경기도에서 시작될 올바른 역사 세우기 임창휘 의원(더불어민주당, 광주2)은 미래를 향한 다짐을 밝혔다. “독립투쟁의 역사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독도 영유권 문제와 역사 왜곡이라는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번 탐방으로 얻은 역사적 확신과 에너지를 바탕으로 경기도에서부터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우리 영토를 굳건히 지키는 일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싸워나가겠다. 선열들께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편, 경기도의회 내 ‘독도사랑·국토사랑회’와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역사바로세우기 경기연대’가 공동으로 주관한 이번 탐방은, 광복 8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의원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기획되었다. 탐방에 소요된 모든 경비는 경기도의회의 공식 예산 지원 없이 참여 의원 전원이 자비를 모아 진행해 그 진정성을 더했다.
  •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참배....“윤봉길, 스스로 멈춘 시간으로 독립 쟁취”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참배....“윤봉길, 스스로 멈춘 시간으로 독립 쟁취”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 중인 경기도의회 ‘독도사랑ㆍ국토사랑회(회장 김용성 의원)’와 ‘역사바로세우기 경기연대(회장 김성수 의원)’는 탐방 나흘째인 12일(일), 상하이(上海)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을 찾았다. 탐방단은 공원 내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스물다섯 청년의 숭고한 희생이 깃든 현장을 기리며, 대한민국 독립을 향한 치열했던 길을 되새겼다. “자유는 위대한 청년의 희생 덕분” 최효숙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93년 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영원히 멈춘 한 위대한 청년 덕분”이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했다. 최효숙 의원은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중국의 마음을 움직였다”면서, “이는 침체되었던 임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대한독립의 희망을 되살린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강조했다. “평화에서 무장투쟁으로의 전환” 유호준 의원(더불어민주당, 남양주6)은 독립운동이 평화적 저항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된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다. 유호준 의원은 “우리는 본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으며, 3·1운동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비폭력 저항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일제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뿐이었다. 평화적인 외침이 총칼에 짓밟히는 것을 목격한 후에야, 우리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들고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라며, “무력 항쟁은 선택이 아닌, 마지막 남은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고 덧붙이며, 절박했던 임시정부의 역할을 재조명했다. “독립은 선물이 아닌, 피 흘려 쟁취한 승리” 홍헌영 대표(역사바로세우기 시흥시 대표)는 독립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부 세력을 향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홍헌영 대표는 “만약 우리에게 27년간의 치열했던 임시정부의 독립투쟁이 없었고, 윤봉길 의사 같은 분들의 피 끓는 희생이 없었으며,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독립전쟁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의 독립은 강대국이 던져준 ‘선물’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홍헌영 대표는 “그러나 우리는 피로 쓰인 독립투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독립은 결코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아니며, 선열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고, 피 흘려 쟁취해낸 위대한 승리의 역사이다. 이 명확한 진실을 부정하는 것은 선열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일침을 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탐방단은 윤봉길 의사의 결연한 의지가 서린 홍커우 공원을 나서며, 선열들이 피로써 지켜낸 ‘자주독립’의 역사를 굳건히 지키고 미래 세대에게 전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서 헌법 정신을 되새겨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서 헌법 정신을 되새겨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이 시작된 곳입니다.”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 중인 경기도의회 ‘독도사랑ㆍ국토사랑회(회장 김용성 의원)’와 ‘역사바로세우기 경기연대(회장 김성수 의원)’ 탐방단은 11일(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 나라를 잃은 민중의 열망이 모여 위대한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그날의 감격을 되새겼다. 청사 1층 회의실에 들어선 김동영 의원(더불어민주당, 남양주4)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1919년 3.1운동의 거대한 함성이 국경을 넘어 이곳 상하이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국내에서 터져 나온 독립의 열망을 더 이상 흩어진 투쟁으로만 둘 수 없었기에, 김구, 안창호, 이시영 선생님 같은 분들이 민중의 명령을 받들어 1919년 4월 11일 바로 이곳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전국에서 ‘만세’를 외쳤던 수백만 민중의 피와 눈물이 이곳에 모여 새로운 희망의 정부를 세운 것입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생활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극심한 가난과 내부 갈등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빛나는 희망을 만들어냈다. 이채명 의원(더불어민주당, 안양6)은 2층 김구 주석의 집무실을 둘러보며 “이 작고 차가운 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들이 계획되고 진행되었습니다. 청년 윤봉길이 거사를 앞두고 자신의 새 시계와 김구 주석의 낡은 시계를 맞바꿨습니다. “제 시계는 이제 한 시간밖에 쓸모가 없습니다.”라며 조국의 미래를 부탁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곳은 단순히 낡은 건물이 아닙니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영원히 바친 청년의 결의와, 그 청년을 떠나보내야 했던 지도자의 비통한 눈물이 이 방의 공기 속에 그대로 서려 있는 듯합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 충칭(重慶)으로 이어지는 27년간의 고난의 여정 속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광복군을 창설해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외교 활동을 통해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임시정부는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 민족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자 독립운동의 총지휘부였다. 김태용(역사바로세우기 경기연대 사무국장)은 청사를 나서며 “최근 ‘1948년 건국절’이라는, 대한민국의 뿌리를 흔드는 주장이 있습니다. 명백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바로 이곳 상하이 임시정부와 우리 헌법이 그 증거입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서 김태용 사무국장은 “현행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미 끝난 논쟁입니다. 당시 해공 신익희 선생 같은 분들이 ‘대한민국은 1948년에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1919년 선열들이 피로 세운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여 헌법에 새겨 넣었습니다. 만약 1948년을 건국절로 삼는다면, 지난 27년간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이어진 임시정부의 모든 항일 투쟁은 한순간에 나라 없는 이들의 활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는 독립 영웅들의 고귀한 희생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며,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야말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라고 1948년 건국절 주장을 강력히 비판했다.
  •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처절했던 임시정부 이동의 첫 기착지인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를 찾다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처절했던 임시정부 이동의 첫 기착지인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를 찾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 중인 경기도의회 ‘독도사랑ㆍ국토사랑회(회장 김용성 의원)’와 ‘역사바로세우기 경기연대(수석부회장 김성수 의원)’는 10일(금), 처절했던 임시정부 이동 역사의 첫 기착지인 항저우(杭州)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절망 속에서도 다시 희망의 불씨를 지폈던 선열들의 숭고한 고난을 되새겼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의거는 일제의 심장을 겨눈 쾌거였지만, 동시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항저우로 옮겨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머물렀다. 역사바로세우기 경기연대 수석부회장 김성수 의원(더불어민주당, 안양1)은 빛바랜 청사 건물 앞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꺼져가던 독립 의지에 불을 붙였지만, 그 불꽃을 지키기 위해 우리 선열들은 ‘정부’라는 이름마저 숨겨야 했습니다. 이곳 항저우까지 오는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나라의 명맥을 등에 지고 뛴 처절한 피난길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말처럼, 상하이에서 항저우까지의 여정은 조국의 운명을 짊어진 채 일제의 추격을 피해야 했던 눈물겨운 도피였다. 항저우에서의 삶은 곤궁함의 연속이었다. 비좁고 낡은 건물에서 임정 요원들과 그 가족들은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를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유종상 의원(더불어민주당, 광명3)은 “이 작은 공간에서 우리 선열들은 흩어진 조직을 재건하고, 조국의 미래를 다시 설계했습니다”라며, “가장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의지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임시정부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이곳 항저우는 임시정부가 가장 큰 위기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응축했던 재기의 공간이었다. 항저우에서의 짧은 안식 후, 임시정부의 여정은 더욱 험난한 길로 이어졌다.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그리고 치장(綦江)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다다르기까지 8년간의 대장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김동규 의원(더불어민주당, 안산1)은 “창사에서는 김구 주석이 친일파의 총탄에 쓰러져 생사를 넘나들었고, 수많은 요원들이 질병과 폭격으로 희생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하며, “하지만 임시정부는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1940년, 충칭에서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의 결정체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이 기나긴 피난길은 후퇴가 아니라, 광복군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벼려내기 위한 전진의 과정이었던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탐방단은 상하이에서 시작해 항저우를 거쳐 충칭에 이르기까지, 6,000km에 달하는 임시정부가 감내한 고난의 길 위에서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큰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인지 가슴 깊이 새겼다.
  •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광복 80주년 기념 중국 소재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출발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광복 80주년 기념 중국 소재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출발

    경기도의회 ‘독도사랑ㆍ국토사랑회’(회장 김용성 의원)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10월 9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중국 상하이(上海) 및 항저우(杭州) 일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독도사랑ㆍ국토사랑회’ 회원들은 출정식을 갖고,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출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번 탐방은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선열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분들이 지켜낸 조국 강토의 소중함을 되새겨 의정활동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마련됐다. 탐방단은 4박 5일 동안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및 김구 주석 피난처 ▲상하이 사범대학 ‘평화의 소녀상’과 위안부 역사박물관 등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사적지를 방문하며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예정이다. 회장인 김용성 의원(더불어민주당, 광명4)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역사의 현장에서, 친일과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서약을 드리고자 한다”며 “이번 탐방을 통해 얻은 역사적 교훈과 책임감을 경기도민을 위한 올곧은 의정활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밝혔다. 김동희 의원(더불어민주당, 부천6)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엄을 짓밟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그 어떤 망언과 2차 가해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면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은 물론, 전쟁 범죄 피해자들의 피맺힌 한이 서린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모든 힘을 보태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미숙 의원(더불어민주당, 군포3)은 “선열들께서 피로 지켜낸 조국 강토를 오늘날 우리가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이번 답사를 통해 얻은 역사적 교훈과 애국정신을 가슴에 새겨, 경기도의 발전과 우리 영토 수호를 위한 의정활동으로 흔들림 없이 이어 나가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한편, 탐방단은 오는 13일 귀국 후 답사 결과 보고회를 갖고, 독립정신 함양과 독도 수호 의지를 높이기 위한 정책적 노력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경기도의회 ‘독도사랑ㆍ국토사랑회’(회장 김용성 의원)는 독도지키기 실현 및 영토주권과 외교적 이슈와 관련해 현지답사는 물론, 연구활동과 실천 캠페인,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나라 사랑의 기반을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2026년 9월 설립됐다.
  • 희양산 정상 벼랑 끝에서… 불꽃같은 그의 삶을 되짚다

    희양산 정상 벼랑 끝에서… 불꽃같은 그의 삶을 되짚다

    일제 멸망 꾀한 아나키스트 가네코양녀로 고초 겪다 3·1운동 뒤 급변평생 같았던 4년 독립투쟁 끝 옥사박열의 흔적 따라 문경 자락에 영면찾는 이 적은 백두대간 내륙의 명산 불교의 성지이자 희양산문의 장소오르기 힘든 만큼 빼어난 풍경 자랑이름값에 견줘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 산이 있다. ‘백두대간의 화강암 돔’ 희양산이다.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이 경계를 이룬 산. 명불허전이라 할 희양산의 풍경도 빼어났지만 그보다 마음을 빼앗은 건 자신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이나 조선의 남자를 사랑했던 일제강점기의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 이야기였다. 힘들게 희양산에 오를 때에도 그의 이야기는 머리를 떠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문경의 박열 의사 생가 옆에 홀로 잠든 그의 묘를 보고, 그의 일생을 정리한 글을 읽는다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희양산에 앞서 가네코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건 이 때문이다. ‘불량스러운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지사 박열(1902~1974)은 지난 2017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을 통해 널리 이름을 알렸다. 한데 그의 첫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1904~1926·대부분의 검색 사이트가 1903년 출생이라 적고 있지만 여기선 한국의 공훈전자사료관과 일본 국회도서관 기록에 따른다)는 당최 생경했다. 영화에선 꽤 비중 있게 등장하는 편이다. 하지만 박열(이제훈)의 사상적 동지, 혹은 죽음도 가르지 못한 연인 정도로 그려져 그의 진면목을 알기엔 역부족이다. 영화에서 말하지 않은 가네코(최희서)의 어린 시절, 교도소에서의 극단적 선택(타살 의혹도 여전하다) 이후 처리 과정, 사형 선고 이후 박열의 행보 등까지 살펴야 비로소 그들의 삶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그 마지막 퍼즐이 있는 곳이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이다. 기념관에 들면 왼쪽으로 묘지가 나온다. 묘비에 “이곳은 일본인으로서 일제의 멸망과 일왕 폭살의 필요성을 주장한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이명 朴文子)의 묘”라고 적혀 있다. ‘박문자’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일본의 관습에 따른 이름이다. 묘역은 봉분 크기에 견줘 전체 면적이 어색할 정도로 넓다. 물론 북한에 잠들어 있는 박열의 유해가 봉환되는 상황을 상정해 넓게 조성한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할 건 가네코는 조선 독립운동가의 일본인 아내이기 이전에 이미 군주제와 군국주의, 남성 우월주의 등 폭력적 이데올로기들에 맞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혁명가였다는 것이다. 영화로 잠시 돌아가자. 교도소 간수가 가네코에게 말한다. “조선에서의 7년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가네코는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서 깨어 있는 거다.” 조선에서의 경험이 그의 삶에서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이 대화를 통해 감지할 수 있다. 가네코는 옥중 자서전을 통해서도 “3·1 독립운동을 목격했을 때 나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했으며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고 했다. “그(박열)와 동지로서 투쟁했던 4년만이 진정한 나의 삶이었다”고도 했다. ●무적자에서 독립투사로 다시 태어나 가네코가 영화에서 독백처럼 읊은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면 이렇다. 그의 친할머니는 그를 “무적자”(無籍者)라고 불렀다.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자, 호적에 오르지 못한 자를 뜻하는 말이다. 가네코가 태어난 곳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다. 하지만 처제와 살림을 차릴 정도로 난봉꾼이었던 아버지와, 재혼을 거듭하던 부창부수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무적자’인 탓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가네코는 친척 집에 얹혀살다 1912년 충북 청주 부강면(현 세종시)에 살던 고모의 양녀가 돼 조선으로 건너간다. 기대와 달리 곧장 식모로 전락한 가네코는 극단적 선택까지 결심할 정도로 할머니와 고모에게 가혹한 학대를 받는다. 그는 부강역 앞 철길로 뛰어들려다 멈추는 일을 거의 매일 반복한다. 그가 이를 멈춘 건 “나는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다. 1919년 3·1 만세운동을 목격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가네코는 도쿄에서 박열을 만나면서 급진적인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된다. ●박열에 대한 연모 갖게 된 시의 첫 문장 “나는 개××로소이다.” 박열이란 이름을 세상에 깊이 각인시킨 문장이다. 가네코에게서 박열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싹트게 된 것도 ‘나는 개××로소이다’라는 시의 이 첫 문장이었다. 둘은 1922년 동지로서의 동거 서약을 맺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는 대역죄로 체포돼 1926년 사형선고를 받고, 이 과정에서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옥중 결혼식을 올리고, 당시 일본 내각 총사퇴를 불러온 ‘괴사진’을 촬영하는 등의 내용은 널리 알려진 바다.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이후 둘의 행보는 갈린다.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는 일왕의 ‘은사장’을 발기발기 찢은 가네코는 도치기현의 우쓰노미야 여자교도소로 이감된 뒤 그해 옥사했다. 그의 죽음이 본인 의지였는지, 타살이었는지에 관해선 갑론을박이 여전하다. 박열은 감옥에서 22년을 복역한 뒤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단장을 맡아 활동하다 6·25전쟁 때 납북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죽어서 다시 돌아왔지만 빈자리 남아 교도소 인근 공동묘지에 묻힌 가네코의 유골은 우여곡절 끝에 그해 조선으로 돌아왔고, 11월 5일 박열 집안의 선산인 문경읍 팔령리에 묻혔다. 그의 소원대로 “박열의 고향마을”에 묻힌 건 2003년 박열의사기념관 조성 당시다. 다만 “박열과 나란히 묻어 달라”는 바람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가네코는 꽃보다 상록수를 좋아했다. 그는 작성 연월일 불명의 옥중편지에서 자신의 묘를 찾는 이들에게 “새싹을 피워 올리고 있는 상록수 한 가지를” 올려 달라고 했다. 피었다가 시드는 꽃보다 “언제나 푸르게 하늘을 향해 활짝 피어나는 상록수의 새싹을 나는 끝없이 사랑”해서다. 죽음의 원인은 불명이지만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사족 하나 덧붙이자. 일본인으로 한국 독립유공자에 헌정된 인물이 둘이다. 한 명은 가네코, 또 한 명은 박열 부부를 변호한 후세다. 가네코는 2018년 애국장, 후세는 2004년 애족장을 각각 받았다. 그중 가네코에 관한 일본 내 재평가 움직임은 1972년 그의 일대기를 그린 ‘여백의 봄’ 출간 이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11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개막한 제30회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도 그의 옥중 자서전과 이름이 같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다. 박열과 교도소를 달리한 이후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만 그린 영화로 올 초에 개봉했다. 영화를 통해 100년 전 국가권력에 항거한 여성 아나키스트의 마지막 길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영화 ‘박열’은 국내 대표적인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볼 수 있다. 이제 희양산으로 간다. 희양산은 중부 내륙의 명산이면서도 찾는 이들이 적다. 산객들이 방문하기에 무척 불편해서다. 들머리는 괴산과 문경 두 곳이다. 한데 문경 쪽은 사실상 막혔다. 산 아래 봉암사가 조계종에서 지정한 특별수도원이라 연중 산문을 걸어 잠근다. 일 년에 딱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만 절집 문과 등산로를 연다. 조계종이 워낙 강력하게 보호하는 곳이라 그날 외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다. 괴산 쪽에선 연풍면 은티마을이 들머리다. 일반인이 희양산에 오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다. 한데 여기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마을 아래 주차장에서 산행 들머리까지 거리가 1㎞를 훌쩍 넘긴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30분 가까이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등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이를 알고 있는 등산객들은 어떻게든 산행 입구까지 차를 가져가려고 하지만, 이를 막는 주민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한쪽은 봉쇄, 한쪽은 눈칫밥이니 아예 희양산을 패스하는 이도 없지 않다. 명산이면서도 찾는 이가 드문 이유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이 남녘을 향해 치닫다가 중부 내륙에서 우지끈 솟아오른 돌산이다. 괴산 연풍면과 문경 가은읍이 이 산에서 경계를 이룬다. 높이는 999.4m. 북쪽을 제외한 삼면이 화강암 암벽이다. 맑은 날 암벽이 볕을 받으면 환하게 빛을 낸다. 한자 이름을 ‘햇볕 희’(曦) 자에 ‘볕 양’(陽) 자로 쓴 이유다. 불교계에선 희양산을 성지처럼 여긴다. 통일신라시대의 선종을 대표하는 아홉 곳의 불교 성지, 이른바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문이 문을 연 곳이라서다. 은티마을 초입에 금줄로 동여맨 돌탑이 있다. 남근을 상징하는 돌무더기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풍수지리상 은티마을은 여근곡 형상이라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이 마을에 은거한 백제군을 신통력으로 꿰뚫어 보고 병력을 투입해 전멸시킨 뒤 ‘남근입어여근즉필사의’(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라는 표현으로 마을 지세를 설명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담긴 내용이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대놓고 남녀상열지사에 비유한 것인데, 마을 입구의 남근석은 그러니까 풍수지리상 비보(도와서 보충함)의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은티마을에서 희양산 정상까지는 편도 4.5㎞다. 마을 주차장에서 걷는 구간을 포함하면 거리는 좀더 늘어난다. 각종 온라인 게시물은 소요 시간을 편도 3시간~3시간 30분 정도라 적고 있다. 이는 전문 산꾼 기준이다. 일반 등산객이라면 최소 편도 4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하산길에서 소요 시간이 준다고 해도 최소 왕복 6시간, 휴식 시간까지 포함하면 7시간 이상 걸린다. 물론 ‘등린이’(등산 초보)를 기준으로 삼으면 소요 시간은 더 늘어난다. ●식수는커녕 화장실도 없는 오지 등산 희양산 정상까지는 지름티재를 거쳐 직벽 구간으로 오르는 코스와 희양산 성터를 거쳐 ‘상대적’ 완경사 구간으로 오르는 코스로 나뉜다. 전자가 거리는 짧되 매우 거칠고 힘들다면, 후자는 다소 길어도 덜 거칠다. 등산로에 계곡물은 거의 없다. 산짐승들이 마실 물 정도만 드문드문 고여 있을 뿐이다. 당연히 식수는 단단히 챙겨 가야 한다.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없다. 그저 정상부 일대에 최소한의 생명줄인 로프가 매어져 있는 게 전부다. 지름티재까지 3㎞ 구간은 된비알이 별로 없다. 이후 1.5㎞의 직벽 구간이 문제다. 특히 정상의 암반부에선 두 팔과 두 다리를 모두 써야 간신히 오를 수 있다. 내려올 땐 더 위험하다. ‘등린이’라면 가급적 성터 코스로 오르길 권한다. ●봉암사 너머 굽이굽이 산세도 일품 정상에서 맞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다. 특히 문경 쪽이 빼어나다. 봉암사와 그 너머 경북 일대의 산들, 조령천과 합류해 남녘으로 굽이쳐 흐르는 영강 등이 절경을 펼쳐내고 있다. 희양산이 깃든 괴산 연풍과 문경 가은 쪽에 가볼 만한 여행지가 많다. 괴산 연풍면 천주교 연풍성지는 조선 후기 순교자들의 유적지다. 너른 잔디밭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어우러져 쉬어 가기 딱 좋다. 문경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다. 그가 태어나자 금빛 안개가 피어올랐다는 금하굴 등의 견훤유적지, 그의 아버지 아자개를 모티브로 삼은 아자개 장터 벽화 거리 등 볼거리가 있다. 등록문화재인 가은역, 석탄박물관과 가은오픈세트장 등으로 구성된 문경 에코월드도 가은읍 내에 있다. 산행의 피로는 온천으로 푼다. 문경새재 아래 온천단지가 조성돼 있다. ‘왕의 온천’이라 불리는 충북 충주 수안보도 희양산에서 멀지 않다.
  • 정근식 교육감 “연내 학습진단센터 설치… 전국 최초 ‘AI 인재상’ 도입”

    정근식 교육감 “연내 학습진단센터 설치… 전국 최초 ‘AI 인재상’ 도입”

    기초학력검사 결과 공개는 신중히하반기 많은 의견 수렴해 결정할 것 학생들의 기초학력 격차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이 21일 서울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올해 안에 서울 모든 지역에 서울학습진단성장센터(진단센터)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또 ‘기초학력 검사 결과를 공개하라’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후속 조치 마련을 위해 “하반기 내 교원·학생·학부모를 대상으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적합한 공개 방안을 찾겠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보궐선거로 서울 교육 수장이 된 정 교육감은 “취임 이후 학생 개개인의 배움과 성장을 보장하는 교육체제 구축을 우선순위에 뒀다”며 “올해 목표였던 4개 권역의 진단센터 설치를 조기에 완료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올해 11곳 교육지원청에 진단센터 설치를 마무리하고 진단부터 교육, 사후검사까지 원스톱 지원하는 체계를 완성하겠다”고 했다. -기초학력 정책을 우선시하는 이유는. “학생의 학습권을 지키는 기본 토대이자 모든 학습과 성장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첫 수학과학융합교육센터도 이달 안에 동작관악지원청에 문을 연다. 이를 통해 기초 부진부터 심화 학습이 필요한 학생까지 탐구 중심의 문제해결력과 창의적 사고를 기르는 기회를 제공하려 한다.” -지난 5월 대법원이 서울 기초학력 검사 결과를 공개하라는 취지로 판결했는데 후속 조치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기초학력 결과에 대한 단순 비교는 일부 지역에 대한 부정적 낙인과 교육 현장 위축, 불필요한 경쟁 유발 등의 우려가 있다. 다만 공공의 알권리와 교육 행정의 투명성도 중요한 가치이므로, 결과 공개가 정책 개선과 자원 배분·학습 지원 체계 강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1차 전문가 간담회를 했고 하반기에 교원·학생·학부모 대상으로 폭넓은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분석과 논의를 거쳐 공개 범위와 시점을 신중히 결정하겠다.” -인공지능(AI) 교육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데 대응 방안은. “학생 역량을 높이기 위해 전국 최초로 ‘AI 인재상’을 수립하고 AI·디지털 리터러시 진단검사를 개발했다. 교원 전문성을 위해선 생성형 AI 활용 등 300여개 직무연수를 운영하고, AI융합교육 석사과정을 지원한다. 전국 최초로 초중고 AI 윤리 교육과정도 개발해 교육에 힘쓸 계획이다.” -고교학점제 시행에 대한 우려가 크다. 현장 안착을 위한 지원책은. “교육청은 ▲교원 증원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 부담 완화 ▲내신평가 및 대입제도의 개선 등을 교육부에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또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 통합 관리 프로그램을 보급해 교사들의 행정 부담을 줄일 예정이다. 교과별 지도 자료와 우수 사례 확산을 통해 학점 이수를 지원하고, 학교 간 공동교육과정과 서울온라인학교도 확대 운영할 예정이다.” -역사교육 강화의 하나로 최근 학생들과 독립운동 유적을 방문했는데. “중국 하얼빈과 백두산을 다녀왔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열들의 뜻을 되새기고 학생들과 밤늦도록 연구보고서 작성을 위해 토론하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서울의 근현대사 유적지를 연계해 역사 자원을 발굴하고, 교사 연수도 운영해 체험 중심 수업을 위한 기반을 만들려고 한다. 현재 운영 중인 독도와 국외 사적지 탐방 프로그램도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하도록 확대할 계획이다.” -남은 임기 동안 중점 과제가 있다면. “학생 마음 건강 지원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위기 학생에게 신속하게 대응하는 ‘100인 응급구조단’과 마음건강학교로 정서·심리적 위기 대응 체계를 강화하고, 초등 저학년 대상 관계회복 숙려제도 안착시키려 한다.”
  • [인터뷰]정근식 교육감 “서울 기초학력 결과 공개, 하반기 시민 의견수렴 하겠다”

    [인터뷰]정근식 교육감 “서울 기초학력 결과 공개, 하반기 시민 의견수렴 하겠다”

    학생들의 기초학력 격차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이 21일 서울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올해 안에 서울 모든 지역에 서울학습진단성장센터(진단센터)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또 ‘기초학력 검사 결과를 공개하라’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후속 조치 마련을 위해 “하반기 내 교원·학생·학부모를 대상으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적합한 공개 방안을 찾겠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보궐선거로 서울 교육 수장이 된 정 교육감은 “취임 이후 학생 개개인의 배움과 성장을 보장하는 교육체제 구축을 우선순위에 뒀다”며 “올해 목표였던 4개 권역의 진단센터 설치를 조기에 완료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올해 11곳 교육지원청에 진단센터 설치를 마무리하고 진단부터 교육, 사후검사까지 원스톱 지원하는 체계를 완성하겠다”고 했다. -기초학력 정책을 우선시하는 이유는. “학생의 학습권을 지키는 기본 토대이자 모든 학습과 성장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첫 수학과학융합교육센터도 이달 안에 동작관악지원청에 문을 연다. 이를 통해 기초 부진부터 심화 학습이 필요한 학생까지 탐구 중심의 문제해결력과 창의적 사고를 기르는 기회를 제공하려 한다.” -지난 5월 대법원이 서울 기초학력 검사 결과를 공개하라는 취지로 판결했는데 후속 조치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기초학력 결과에 대한 단순 비교는 일부 지역에 대한 부정적 낙인과 교육 현장 위축, 불필요한 경쟁 유발 등의 우려가 있다. 다만 공공의 알권리와 교육 행정의 투명성도 중요한 가치이므로, 결과 공개가 정책 개선과 자원 배분·학습 지원 체계 강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1차 전문가 간담회를 했고 하반기에 교원·학생·학부모 대상으로 폭넓은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분석과 논의를 거쳐 공개 범위와 시점을 신중히 결정하겠다.” 전국 첫 AI인재상·교육센터…고교학점제 안착 지원 -인공지능(AI) 교육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데 대응 방안은. “학생 역량을 높이기 위해 전국 최초로 ‘AI 인재상’을 수립하고 AI·디지털 리터러시 진단검사를 개발했다. 교원 전문성을 위해선 생성형 AI 활용 등 300여개 직무연수를 운영하고, AI융합교육 석사과정을 지원한다. 전국 최초로 초중고 AI 윤리 교육과정도 개발해 교육에 힘쓸 계획이다.” -고교학점제 시행에 대한 우려가 크다. 현장 안착을 위한 지원책은. “교육청은 ▲교원 증원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 부담 완화 ▲내신평가 및 대입제도의 개선 등을 교육부에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또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 통합 관리 프로그램을 보급해 교사들의 행정 부담을 줄일 예정이다. 교과별 지도 자료와 우수 사례 확산을 통해 학점 이수를 지원하고, 학교 간 공동교육과정과 서울온라인학교도 확대 운영할 예정이다.” -역사교육 강화의 하나로 최근 학생들과 독립운동 유적을 방문했는데. “중국 하얼빈과 백두산을 다녀왔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열들의 뜻을 되새기고 학생들과 밤늦도록 연구보고서 작성을 위해 토론하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서울의 근현대사 유적지를 연계해 역사 자원을 발굴하고, 교사 연수도 운영해 체험 중심 수업을 위한 기반을 만들려고 한다. 현재 운영 중인 독도와 국외 사적지 탐방 프로그램도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하도록 확대할 계획이다.” -남은 임기 동안 과제가 있다면. “학생 마음 건강 지원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위기 학생에게 신속하게 대응하는 ‘100인 응급구조단’과 마음건강학교로 정서·심리적 위기 대응 체계를 강화하고, 초등 저학년 대상 관계회복 숙려제도 안착시키려 한다.”
  • 역사 흔적 담긴 33곳 찾아 광복 80돌 의미 되새기자

    역사 흔적 담긴 33곳 찾아 광복 80돌 의미 되새기자

    한국관광공사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오는 31일까지 국내 여행 정보 플랫폼 ‘대한민국 구석구석’(visitkorea.or.kr)에서 광복절 특집전을 선보인다.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희생과 업적을 기릴 수 있는 역사 유적지부터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명소 등 33개의 뜻깊은 여행지를 소개한다. 광복의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는 특별 전시 정보도 모았다. 항일운동의 흔적을 따라가는 도보여행 코스도 선보였다. ▲3·1운동 전개 과정을 따라가는 서울 ▲일제 수탈의 아픔이 서린 곳, 전북 군산 ▲근현대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는 부산 코스 등이다. 온라인 이벤트도 열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소개된 역사 여행지 50여곳 안에 숨겨진 태극기를 찾아서 응모하면 된다. 이벤트는 오는 31일까지 진행된다.
  • 고구려의 옛 기개 되새기다…광복절 역사 여행지로 ‘여기’ 어때요?

    고구려의 옛 기개 되새기다…광복절 역사 여행지로 ‘여기’ 어때요?

    광복절 연휴를 앞두고 있다. 그저 하루 쉬는 날로 흘려보내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자주’라는 가치와 국토 수호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의미 있는 장소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자리한 고구려의 국경 방어 유적 ‘호로고루’(사적 제467호)가 주목받는다. 외세에 맞선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서 호로고루는 6세기 중반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신라에 빼앗긴 뒤 임진강 일대를 새로운 남방 방어선으로 삼으며 쌓은 국경 성이다. 호로고루라는 이름은 임진강의 옛 이름인 호로하(瓠瀘河)와, 고구려어로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합쳐진 것이다. 삼각 형태의 평지성으로 전체 둘레는 약 400m에 이른다. 성벽의 북쪽과 남쪽은 현무암 절벽을 활용해 천연 방어력을 높였다. 동쪽에는 너비 40m, 높이 10m, 길이 90m의 거대한 인공 석축이 쌓여있다. 흙을 다진 뒤 그 위에 현무암을 층층이 올린 독특한 축성 방식은 고구려의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고구려와 신라의 흔적이 공존하는 성벽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 땅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신라가 고구려 성벽을 허물지 않고, 그 위에 편마암 석재를 덧쌓아 보수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현재의 성벽에서는 고구려 특유의 현무암 축성 기법과 신라의 층적 석축 기법이 한 면에 공존하는 희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두 시대의 이야기가 하나의 돌에 새겨져 있는 듯했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국내 고대 축성 기술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호로고루 유적지에는 발굴 당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된 호로고루 홍보관이 있다. 기와와 토기, 우물 유구 등과 함께 고구려 철갑병 복장을 한 마네킹, 광개토대왕릉비 축소 모형도 볼 수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릉비 모형은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재현한 것으로, 고구려의 자주 외교와 군사 전략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역사 여행 호로고루는 근현대 독립운동 유적은 아니지만 외세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 국경을 지킨 고구려의 역사를 통해 자주정신의 뿌리를 되새길 수 있는 상징적 장소다. 광복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호로고루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탁 트인 초지와 자연경관 또한 호로고루의 매력이다. 해매다 9월에는 해바라기 축제가 열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역사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주변에 고구려 유적인 당포성과 은대리성, 고려 시대 숭의전, 경순왕릉, 선사시대의 전곡리 유적 등 다양한 역사 유적지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도 좋다. 광복절 연휴, 호로고루에서 고구려의 자주정신과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는 역사 여행은 분명 깊은 의미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 고구려의 옛 기개 되새기다…광복절 역사 여행지로 ‘여기’ 어때요?

    고구려의 옛 기개 되새기다…광복절 역사 여행지로 ‘여기’ 어때요?

    광복절 연휴를 앞두고 있다. 그저 하루 쉬는 날로 흘려보내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자주’라는 가치와 국토 수호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의미 있는 장소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자리한 고구려의 국경 방어 유적 ‘호로고루’(사적 제467호)가 주목받는다. 외세에 맞선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서 호로고루는 6세기 중반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신라에 빼앗긴 뒤 임진강 일대를 새로운 남방 방어선으로 삼으며 쌓은 국경 성이다. 호로고루라는 이름은 임진강의 옛 이름인 호로하(瓠瀘河)와, 고구려어로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합쳐진 것이다. 삼각 형태의 평지성으로 전체 둘레는 약 400m에 이른다. 성벽의 북쪽과 남쪽은 현무암 절벽을 활용해 천연 방어력을 높였다. 동쪽에는 너비 40m, 높이 10m, 길이 90m의 거대한 인공 석축이 쌓여있다. 흙을 다진 뒤 그 위에 현무암을 층층이 올린 독특한 축성 방식은 고구려의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고구려와 신라의 흔적이 공존하는 성벽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 땅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신라가 고구려 성벽을 허물지 않고, 그 위에 편마암 석재를 덧쌓아 보수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현재의 성벽에서는 고구려 특유의 현무암 축성 기법과 신라의 층적 석축 기법이 한 면에 공존하는 희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두 시대의 이야기가 하나의 돌에 새겨져 있는 듯했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국내 고대 축성 기술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호로고루 유적지에는 발굴 당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된 호로고루 홍보관이 있다. 기와와 토기, 우물 유구 등과 함께 고구려 철갑병 복장을 한 마네킹, 광개토대왕릉비 축소 모형도 볼 수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릉비 모형은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재현한 것으로, 고구려의 자주 외교와 군사 전략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역사 여행 호로고루는 근현대 독립운동 유적은 아니지만 외세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 국경을 지킨 고구려의 역사를 통해 자주정신의 뿌리를 되새길 수 있는 상징적 장소다. 광복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호로고루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탁 트인 초지와 자연경관 또한 호로고루의 매력이다. 해매다 9월에는 해바라기 축제가 열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역사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주변에 고구려 유적인 당포성과 은대리성, 고려 시대 숭의전, 경순왕릉, 선사시대의 전곡리 유적 등 다양한 역사 유적지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도 좋다. 광복절 연휴, 호로고루에서 고구려의 자주정신과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는 역사 여행은 분명 깊은 의미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 “최대 年 8%대 금리 적금·유공자 후원”… 은행권, 광복 80주년 ‘보훈 예우’ 경쟁

    광복 80주년을 맞아 주요 은행이 관련 금융상품을 잇달아 내놨다. 일부 상품은 최대 연 8%대 금리를 제공하며 독립유공자 후원에도 동참할 수 있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IBK기업은행은 고객이 ‘후원하기’를 눌러 참여하면 은행이 대신 기부하는 ‘8로업 후원 챌린지’를 시작했다. 고객이 후원 대상을 선택하면 참여 인원에 따라 최대 5억원까지 국가유공자 등 헌신 단체에 후원금이 전달된다. 참여 고객은 ‘IBK 디데이 적금’ 우대금리 연 3.65% 포인트가 적용돼 최고 연 8.0% 금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6월 대전지방보훈청과 협력해 ‘대한민국만세 80주년 적금’을 출시했다. 국가유공자·군인·경찰·소방공무원을 대상으로 최고 연 8.15% 금리를 제공한다. 올해 출생한 신생아의 부모, 첫 거래 고객, 나라사랑 실천 서약 참여자 등에게도 우대금리를 적용한다. 고객 이자 일부와 은행 지원금 815원을 더해 계좌당 1630원이 독립유공자 후원금으로 기부된다. 광복절 기념 캠페인도 활발하다. KB국민은행은 2019년부터 진행 중인 ‘대한이살았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올해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협업한 ‘독립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 시리즈의 역사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는 ‘역사여행’ 영상 콘텐츠를 제작해 공개할 예정이다. 하나은행은 가족금융 플랫폼 ‘아이부자’를 통해 ‘한국관광 100선’ 방문 인증 이벤트를 운영 중으로, 독립운동지 13곳 인증 시 추첨 확률이 2배로 높아진다.
  • 비단강 따라 흐른 희생…독립의 씨앗이 자라다

    비단강 따라 흐른 희생…독립의 씨앗이 자라다

    美 전킨·드루 선교사 군산에 도착구암동 일대 ‘궁멀’ 호남 선교 기지영명학교는 ‘3·5 만세운동’ 진원지한국 침례교회 역사 강경서 시작 ‘정사각형 기와집’ 강경성결교회병촌성결교회 ‘전우치 나무’ 유명 공주 영명학교의 사애리시 선교사유관순 열사 등 여성 지도자 길러내 시인 이상화 등 제일감리교회 인연 우리에게 근대는 어떻게 왔을까. 제힘으로 열어젖히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가진 우리로선 불편한 주제다. 우리의 개화에 일제의 공이 컸다고 신봉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더 민감하다. 기독교에선 달리 본다. 이 땅의 근대 성립에 선교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그 근거를 찾기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과 함께 전북 군산, 충남 강경, 공주 등의 기독교 유적지를 차례로 돌아봤다. 지난해 전남 일대 순례에 이은 두 번째 발걸음이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가 발견일 텐데, 기독교 유산 순례는 많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이끈다는 점에서 꽤 큰 기쁨을 안겨 준다. 왜 군산이고, 강경이고, 공주였을까. 당대의 시선으로 보자. 요즘처럼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는 상상도 못 하던 때다. 당시 고속도로 역할을 했던 것이 내륙에선 강이다.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두루 적시며 흐르는 ‘비단강’ 금강도 그중 하나다. 선교사들 역시 사역의 여정을 위해 당연히 금강을 눈여겨봤다. 꼬박 130년 전인 1895년 3월, 미국인 목사 윌리엄 전킨(한국명 전위렴·1865~1908)과 의사 알렉산드로 D 드루(유대모·1859~1926)가 군산의 금강 변에 뱃머리를 대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들은 인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열흘이 넘는 항해 끝에 막 도착한 참이다. 1892년에 미국 버지니아항을 출발해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일본 요코하마, 부산 등을 거쳐 온 여정까지 포함하면 뱃길만 꼬박 3년이다. 군산 하면 대개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를 떠올린다. 히로쓰 가옥 등 군산 여정에서 들르는 대부분의 명소 역시 이와 연관된 것들이다. 한데 시선을 달리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독교의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가 맨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일제강점기 군산세관 앞이다. 고색창연한 옛 모습 그대로여서 많은 이들이 이 건물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다. 바로 그 자리,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이가 발 딛고 선 자리가 선교사들이 하선한 자리다. 자그마한 표지판 하나가 전부지만, 바야흐로 군산의 근대가 여기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인근 수덕산 아래 두 채의 초가를 50달러에 사들여 교회와 진료소로 사용했다. 서종표 군산중동교회 목사에 따르면 “당시 50달러는 엽전으로 한 가마니” 정도 되는 돈이었다. 일제는 선교사들이 수덕산 아래서 군산 민중의 아픈 곳을 긁어주는 게 영 못마땅했다. 그래서 조계지 조성 운운하며 쫓아냈고, 이들이 새로 정착한 곳이 ‘궁멀’, 현재의 구암동 일대다. 여기에 당대의 유산들이 꽤 있다. 군산시에서 3·1운동 사적지로 신경 써 관리하는 곳이다. ‘궁멀’은 호남 최초의 선교 기지다. 선교사들은 교회와 병원 외에 학교를 더했다. 이른바 ‘선교의 삼각 구도’가 비로소 틀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수덕산에 꾸린 의료 시설이 진료소 수준이었다면 1899년 세운 야소(예수의 일본말)병원은 규모가 더 컸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야소’란 표현을 쓰지 못하게 됐고, 결국 구암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03년엔 전킨 선교사 부부가 학교를 세우고 영명(永明)이라 이름 지었다. 영명은 ‘영원한 생명의 빛’이란 뜻이다. 영명학교(현 군산제일중·고교)는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1919년 ‘3·5 만세운동’의 진원지다. 교사와 학생에 이어 주민이 가세하면서 군산의 만세운동은 호남 전체로 번졌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상징과 같은 3·1 만세운동은 하루 열리고 만 집회가 아니다. 경성에서 시작된 민중들의 봉기는 시차를 두고 각 지역으로 퍼졌다. 군산의 경우는 3월 5일이었다. 날짜는 달랐어도, 밑바탕에 깔린 정신은 당연히 3·1운동이다. 군산을 포함한 전국의 만세 운동 진원지를 모두 ‘3·1운동 유적지’라 통칭하는 이유다. 허은철 총신대 역사학과 교수는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가 독립운동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줬다”고 의미를 평가했다. 그러니까 선교사들의 사역 여정이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군산 야구계의 시각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가 도입된 곳도 영명학교다. 공식적인 한국 야구의 역사는 1905년 시작됐다. 미국의 필립 질레트(1872~1938) 선교사가 서울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시초다. 군산 야구계에선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윌리엄 포드 불(1876~1941) 선교사가 1899년 군산 땅을 밟은 이후 야구가 시작됐을 것이라 본다. 영명학교에 야구부가 조직됐고 톱타자였던 양기준은 호남 최초의 야구인으로 기록됐다. 영명학교가 1903년 개교한 걸 고려하면 질레트 선교사에 앞서 불 선교사가 이 학교 학생들에게 야구를 전해줬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공식 야구 역사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군산이 2009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V10을 일궈 낸 호남 야구의 발판이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구암동산 가장 높은 곳, 그러니까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뒤에 선교사 묘역이 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에서 부인과 어린 세 아들을 잃었다. 그도 장티푸스에 걸려 43세에 목숨을 잃었다. 온 가족이 낯선 타국에서 생을 다한 것이다. 전킨 선교사는 생전 “나는 궁멀 전씨다. 내가 죽으면 궁멀에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전주에서 사망한 그가 군산에 와 묻힌 이유다. 아쉽게도 현재 ‘궁멀’의 묘역은 가묘다. 6·25전쟁 등 혼란의 와중에 묘지가 멸실됐고, 대신 네 쌍의 선교사 부부 고향에서 흙을 가져와 묘소로 추정되는 곳에 안장했다. 유일하게 미국에 묻힌 드루 선교사의 유골은 현지 가족의 동의를 얻어 조만간 이곳으로 이장할 예정이다. 영명학교 후신인 군산제일고 출신으로, 이 일대 기독교 유적지 조성에 발 벗고 나선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는 “전킨 선교사의 유해를 돌보지 못한 건 한국교회 모두의 책임”이라며 “100년 전 이 땅을 찾은 선교사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경은 군산과 지척이다. 군산이 작은 어촌이었을 당시 강경은 대구, 평양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 꼽힐 만큼 큰 도시였다. 강경에서 눈여겨볼 곳은 옥녀봉 바로 아래 강경침례교회다. 우리나라 침례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당시 미국 보스턴의 부유한 가문의 딸이었던 엘라 싱이 어린 나이에 죽음을 앞두고 가장 선교가 덜 된 나라에 자신의 유산을 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지를 받들어 조성한 곳이 강경침례교회다. 초기 교회가 대부분 그렇듯 강경침례교회 역시 남녀 출입구와 앉는 자리를 구분한 기역자 형태다.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생긴 기역자 형태의 집이라고 한다. 옥녀봉 일대에 봉수대, 소설가 박범신의 문학관과 그의 소설 ‘소금’의 무대가 된 ‘소금집’ 등 볼거리가 있다. 옥녀봉 들머리의 강경성결교회는 국내 유일의 정사각형 기와집 교회다. 내부는 당시 유교적 생활 습관에 따라 기역자로 조성됐다. 현재 국가유산청이 해체, 수리 중이어서 관람할 수는 없다. 1933년 세워진 병촌성결교회는 6·25전쟁 당시 교인 66명이 북한군과 그 추종자들에게 목숨을 잃은 곳이다. 충남 지역에선 가장 많은 개신교 순교자이고, 전국적으로는 전남 영광의 염산교회에 이어 두 번째다. 이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아름답다. 교회 앞의 은행나무도 볼거리다. 흔히 ‘전우치 나무’라 불린다. 조선시대 기인이자 실존 인물이었던 전우치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 은행나무 노거수가 됐다는 이야기가 담겼다. 공주로 넘어간다. 백제의 고도로만 알았던 공주에 뜻밖에 개신교 유적지들이 많다. 대표적인 곳은 영명학교다. 군산의 영명학교와 이름이 같다. 기독교에서 빛은 예수를 상징한다. 그러니 ‘영원한 빛’이란 학교 이름은 결국 예수를 지칭하는 표현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바로 이 학교에서 사애리시(史愛理施·1871~1972) 선교사와 만난다. 수많은 여성 우국지사와 지도자를 길러내는 등 이 땅의 근대 여성 교육에 헌신한 미국 여성 선교사다. 특히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 중 한 명인 유관순 열사와의 애틋한 관계로 요즘 주목받고 있다. 사애리시는 앨리스 샤프란 이름을 한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성인 사는 샤프, 이름인 애리시는 앨리스를 음차했다. 애리시란 한문을 풀면 ‘사랑의 이치를 널리 편다’는 뜻이니, 그의 평생 행적이 이름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 뉴욕의 감리교 선교훈련원에서 선교사 교육을 받았다. 조선에 온 건 1900년이다. 이화학당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1903년 같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로버트 샤프(1872~1906)와 결혼한다. 그가 샤프라는 성을 갖게 된 건 이때부터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인 서만철 전 공주대 총장에 따르면 둘은 뉴욕에서 수련받을 때부터 연인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다 사애리시 선교사가 먼저 조선으로 왔고, 로버트 샤프 선교사도 뒤따라 조선행을 택했다는 것이다. 당시 충남 공주는 개신교의 선교지 협정에 따라 감리교단이 선교 대상지로 삼았던 곳이다. 샤프 선교사가 공주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자, 사애리시 부부는 1905년에 아담한 양옥집을 짓고 공주로 이주했다. 이 집이 영명동산에 있는 문화유산 ‘공주 중학동 (구)선교사가옥’이다. 샤프 선교사는 당시 집 양편에 살구나무를 두 그루 심었다. 살구나무(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만나, 석판과 함께 기독교 언약궤 안에 있었다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다. 성경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는 길(아론의 싹 난 지팡이)이요, 진리(십계명 석판)요, 생명(만나)이니”는 바로 이 세 가지 보물을 일컫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랑의 매로 살구나무 가지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샤프 선교사는 공주 제일감리교회에 부임한 지 채 6개월도 못 돼 소천하고 만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 미국으로 돌아가 2년가량 안식년을 보낸 사애리시는 1908년 남편이 묻힌 공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이어 갔다. 이 과정에서 만난 이가 유관순 열사다. 유 열사의 빛나는 자질을 알아본 사애리시는 그를 수양딸로 삼아 공주로 데려왔고, 영명학교에서 2년가량 가르친 뒤 이화학당에 편입시킨다. 유 열사의 인성 형성에 사애리시가 무척 큰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사애리시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후임자로 파송된 우리암(禹利岩·프랭크 윌리엄스·1883~1962) 선교사도 빼놓을 수 없다. 1906년 공주영명학교를 설립하고 30여년간 교장으로 근무했다. 우리암 선교사 부부는 조선에서 다섯 자녀를 낳았다. 그중 장남 조지 윌리엄스(1907~1994)와 딸 올리브(1909~1917)가 영명동산에 잠들어 있다. 이 사연도 애틋하다. 조지 윌리엄스의 한국 이름은 우광복(禹光福)이다. 조선의 광복을 기원하며 지은 것이다. 서만철 회장은 “이름에 ‘회복할 복’(復) 자 대신 ‘복 복’(福) 자를 쓴 건 일제에 노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방편”이라고 설명했다. 우광복은 광복 후 미군정에 군의관으로 파견됐다가 당시 군정사령관이던 존 하지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서 회장은 “미군정과 한국인 엘리트 그룹을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했으며 이념 대립이 치열하던 정국에서 우익 주도 흐름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여동생 곁으로 보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 일부가 영명동산에 모셔졌다. 이들이 얽혀 만들어 낸 역사는 공주제일감리교회(현 공주기독교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미 감리회 선교사들의 유품과 사진 등 자료가 전시돼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와 서온순, ‘나그네’를 지은 박목월과 유익순이 이 교회에서 혼례를 올렸고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 공예의 선구자인 이남규가 개신교회 내 첫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이 교회 벽면에 조성했다. 유관순 열사의 영명학교 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 사애리시와 함께 생활하며 사용했을 식기 등도 전시됐다.
  • “사이판 다녀왔어요”…서경덕·송혜교 ‘이 프로젝트’ 위해 뭉쳤다

    “사이판 다녀왔어요”…서경덕·송혜교 ‘이 프로젝트’ 위해 뭉쳤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배우 송혜교와 함께 미국 자치령 북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및 티니안 섬에 한국 역사 안내서를 기증한다고 밝혔다. 8일 서 교수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지난 주말 사이판과 티니안을 다녀왔다”며 “그저 관광지로만 알려진 곳에서 우리 역사를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곳의 역사를 알리는 한국어 안내서를 제작해 온오프라인으로 제공할 예정”이라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희생당한 한국인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민간인들이 앞장서서 만든 곳”이라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일본 군사기지가 있었던 티니안에는 한국인 징용자가 많았다”며 “티니안에서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거나 자살을 강요당해 희생된 한국인만 5000여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이 첫째고, 오키나와 지역민이 둘째고, 차모로족이 셋째고, 돼지가 넷째인데 그 돼지는 조선인이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며 “정말 참담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에 남아있는 대한민국 역사 유적지의 보존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라며 “우리 국민들의 꾸준한 관심과 방문이 해외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보존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 교수는 이번 기증을 시작으로 광복 80주년 기념 프로젝트를 두 차례 더 진행할 예정이다. 서 교수와 송혜교는 지난 2012년부터 역사적인 기념일에 맞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 37곳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부조 작품 등을 기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두 사람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보스턴 미술관,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ROM) 등 세계 유명 미술관 및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서를 기증했다. 송혜교는 지난 2016년 미쓰비시사로부터 중국 현지에서 공개되는 광고 모델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송혜교는 “한국인을 2차대전의 강제 노역에 동원해 소송 중인 기업의 광고 모델은 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들은 강제노역 피해 할머니는 송혜교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 화제가 됐다. 송혜교의 소속사 UAA는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의 모델로 활동할 수는 없다”며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당시 서 교수는 송혜교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미쓰비시가 전범 기업임을 확인했다며 “그는 우리 문화와 역사를 사랑할 줄 알고, 지킬 줄 아는 멋진 배우”라고 극찬했다.
  • “각종 SNS를 통해 전파 중”…송혜교가 후원한 ‘이 여성’ 정체는?

    “각종 SNS를 통해 전파 중”…송혜교가 후원한 ‘이 여성’ 정체는?

    3·1절을 맞아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배우 송혜교와 의기투합해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을 알리는 영상을 제작해 각종 소셜미디어(SNS)에 전파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일 서 교수는 “한국어 및 영어 내레이션을 입힌 영상 ‘독립군 여전사, 박차정’을 유튜브 등 각종 SNS를 통해 국내외 누리꾼에게 전파 중”이라고 밝혔다. 4분 30초 분량의 이 영상은 서 교수가 기획을 맡고 송혜교가 후원했다. 영상은 의열단장 김원봉의 아내로 항일 여성운동 단체 근우회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다 일본군과의 교전 중 부상, 그 후유증으로 숨진 박차정의 생애를 상세히 살펴본다. 중국에서 난징조선부녀회 창립을 주도하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서 교수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재조명하고 전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자 정정화, 윤희순, 김마리아에 이어 네 번째로 영상을 올리게 됐다”며 “앞으로 꾸준히 시리즈로 선보일 것”이라고 전했다. 서 교수와 송혜교는 지난 2012년부터 역사적인 기념일에 맞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 37곳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부조 작품 등을 기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두 사람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보스턴 미술관,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ROM) 등 세계 유명 미술관 및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서를 기증했다. 앞서 송혜교는 지난 2016년 미쓰비시사로부터 중국 현지에서 공개되는 광고 모델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송혜교는 “한국인을 2차대전의 강제 노역에 동원해 소송 중인 기업의 광고 모델은 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들은 강제노역 피해 할머니는 송혜교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송혜교의 소속사 UAA는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의 모델로 활동할 수는 없다”며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당시 서 교수는 송혜교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미쓰비시가 전범 기업임을 확인했다며 “그는 우리 문화와 역사를 사랑할 줄 알고, 지킬 줄 아는 멋진 배우”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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