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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조 교수’의 덫! 코인 투자 매몰된 40대 가장, 대부업체 통해 1억원 대출 받다 [파멸의 기획자들 #43]

    ‘이성조 교수’의 덫! 코인 투자 매몰된 40대 가장, 대부업체 통해 1억원 대출 받다 [파멸의 기획자들 #43]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민준이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두 번 울리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빠른캐피탈 CEO 최명렬입니다.” 시중 은행의 프라이빗 뱅커처럼 정중하고 세련된 말투였다. 사채업자의 거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성조 교수님 소개로 연락드린 김민준입니다.” “반갑습니다, 김민준 고객님. 안 그래도 김가영 비서님께 얘기 듣고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코인 투자를 위한 단기 유동성이 필요하시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담보가 마땅치 않거든요. 집은 전세고 차도 낡았는데... 대출이 가능할까요?” 최명렬 사장은 잠시 서류 넘기는 소리를 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 일반 고객분이시면 당연히 거절되겠죠. 하지만 고객님은 이 교수님이 보증하시는 분 아니십니까? 교수님을 믿고 저희 회사 내부 VIP 규정을 적용해 드리겠습니다. 담보 없이 신용만으로 1억원까지 승인할 수 있습니다.” “예? 1억원이요? 1000만원이 아니고요?” 민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1억원이요. 이자율은 연 5.2%로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 수준이죠. 게다가 매달 이자 낼 필요 없이, 원금 갚을 때 한 번에 정산하시면 됩니다. ‘투자는 타이밍인데 이자 걱정 때문에 매매 흐름 끊기면 안 된다’고 이 교수님이 귀에 딱지가 앉게 얘길 하셔서 저희가 특별한 상품을 만들었어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이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그리고 고객님, 한 가지 더 혜택이 있습니다. 대출금 1억원을 받아서 이걸 다시 거래소로 입금하고 환전하면… 과정도 번거롭고 수수료도 많이 나오잖아요?” “네, 그렇죠.” “그래서 저희가 제휴된 환전업체를 통해 대출금을 바로 USDT(테더)로 바꿔서 고객님의 IEKAF 거래소 지갑으로 꽂아드립니다. 이렇게 하면 고객님은 환전 수수료 등 제비용을 아껴서 좋고요. 저희는 거래소가 주는 인센티브를 챙길 수 있어서 서로 ‘윈윈’입니다. 동의하시나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내 통장을 스치지 않는다는 게 살짝 찜찜했지만, ‘수수료 절약’과 ‘윈윈’이라는 설명에 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당장 10만 달러 시드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이메일로 차용증 양식을 보낼 테니까 자필 서명과 인감도장, 지장을 찍어서 보내주세요. 인감증명서도 한 통 떼시고요.” 다음 날 아침, 민준은 아침 출근을 미루고 주민센터로 달려갔다. 인감증명서를 출력한 뒤 떨리는 손으로 차용증에 ‘일금 일억원정’(₩100,000,000)을 적어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엄지손가락에 붉은 인주를 묻혀 종이 위에 꾹 눌렀다. 종이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지문. 그것은 민준의 영혼이 저당 잡히는 낙인이었지만, 투자에 눈이 먼 그의 눈에는 성공을 향한 티켓으로 보였다. 30분 뒤 최 사장의 문자가 도착했다. ‘IEKAF 거래소 입금 완료. 7만 8000 USDT 확인 바랍니다.’ 거래소 앱을 켠 민준은 숫자를 확인했다. 기존 5000만원에 대출금 1억원이 합쳐져 드디어 꿈에 그리던 ‘10만 달러’가 만들어졌다. ‘됐다... 드디어 부활의 준비가 완벽히 끝났다.’ 민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날 회사의 초대형 거래를 망쳐 사무실에서 대표에게 한 시간 넘게 깨지던 기억, 이를 지켜보던 박 대리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표정… 이 모든 구질구질한 현실이 발 아래로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몰랐다. 화면 속에 찍힌 그 숫자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사기꾼들이 서버에 입력한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찍은 그 붉은 지장이, 조만간 자신의 목을 조여올 올무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 원금 회복 조급해진 40대 가장, ‘이성조 교수’에 재기 자금 마련 애원 [파멸의 기획자들 #42]

    원금 회복 조급해진 40대 가장, ‘이성조 교수’에 재기 자금 마련 애원 [파멸의 기획자들 #42]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지금 내가 그 꼰대 비위 맞추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나와 가족의 인생이 걸려 있단 말이야!’ 민준은 입술을 깨물며 수화기 너머 김승대 대표의 선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김 대표가 입을 열었다. “휴… 알겠습니다. 민준 님 사정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일단은 지금 있는 자금으로 진행해 봅시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시드가 작으면 수익도 작고, 회복 속도 역시 느릴 수밖에 없어요.”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민준이 실외기 위에 주저앉았다. 셔츠 등판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작업복 점퍼를 벗고 안정을 되찾은 뒤에야 회사의 대형 거래가 자신 때문에 ‘파투’ 직전 상황에 몰려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저녁, 지옥 같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민준이 이성조 교수의 온라인 강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김 대표의 텔레그램 알림이 울렸다. “[긴급] 지금 차트 흐름 아주 좋습니다. TOXIC 선물, 롱 포지션 100X로 진입하세요. 비중은 20%.” 민준은 씻지도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IEKAF 거래소 앱을 켰다. 현물 계좌의 3만 6000 USDT(5000만원)을 선물 계좌로 옮기고, 김 대표가 시키는 대로 레버리지를 설정해 매수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붉은 양봉이 로켓처럼 치솟기 시작했다. 또다시 청산당할까 봐 숨도 못 쉬고 지켜본 지 10여 분. “지금입니다. 바로 익절하세요.” 김 대표의 문자를 보자마자 매도 버튼을 터치했다. 결과는 40% 수익. 10여분 만에 4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민준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 이거야! 이렇게만 하면 원금 회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기쁨도 잠시, 김 대표의 메시지가 찬물을 끼얹었다. “수익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참 아쉽네요.” “네? 수익이 났는데 뭐가 아쉬우신지…” “오늘처럼 좋은 장에서 시드머니가 10만 달러만 됐어도… 방금 거래 한 번으로 1000만원 넘게 벌었을 겁니다. 민준 님이 방금 가져가신 수익의 거의 3배죠. 시드의 차이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눈앞에서 600만원을 놓친 셈이니까요.” 민준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400만원을 벌었다는 기쁨보다 600만원을 ‘손해 봤다’는 박탈감이 더 크게 밀려왔다. ‘돈이 돈을 번다는 게 이런 거구나.’ 당장 10만 달러를 채우지 않으면, 앞으로 다가올 기회도 다 놓칠 것 같았다. 조바심이 극에 달했다. 결국 민준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이성조 교수에게 매달려 보기로 했다. 다음 날 부산 출장길, KTX 안에서 민준은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김 대표를 만난 이야기부터 코인 선물 리딩 거래 강제청산의 아픔, 그리고 자금이 부족해서 원금 회복 기회를 놓치고 있는 현 상황까지 구구절절히 적었다. “교수님, 김승대 대표의 능력만큼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자금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제가 추가로 융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교수님의 혜안이 절실합니다.” 점심이 가까워올 무렵 이 교수의 답장이 도착했다. “김민준 학우님, 절박한 사연 잘 보았습니다. 자금 문제라… 학우님의 재기 의지가 워낙 강하시니 제가 가만 있을 수가 없군요. 나서서 돕겠습니다. 김가영 비서에게 일러둘 테니 안내를 받아보시지요.” 역시 이 교수였다. 권위적인 태도 없이 제자의 아픔을 감싸 안아주는 참된 스승. 민준은 울컥하는 마음을 추스르며 김가영 비서의 연락을 기다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그녀의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학우님, 교수님께 말씀 들었어요. 그동안 마음고생 심하셨죠? ㅠㅠ 저희가 특별한 회원님들께만 연결해 드리는 대출 업체가 있거든요. ‘빠른캐피탈’이라고… 이름이 좀 촌스럽죠? ㅎㅎ 여기 대표님이 워낙 직관적인 걸 좋아하셔서요.” 김 비서가 친근한 말투로, 그러나 핵심을 찌르는 제안을 했다. “여긴 정식 허가 업체여서 이자가 좀 세요. 하지만 이성조 교수님 소개라고 하면 ‘특별 우대’를 해주기로 얘기가 됐어요. 한도도 잘 나오고 금리도 저렴합니다. 명함을 보내드릴 테니 지금 전화해 보세요.” 민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교수의 이름값으로 ‘특별 우대’를 받을 수 있다니! 그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빠른캐피탈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촌스러움도, 대부업체의 높은 이자율도 문제 되지 않았다. 오직 원금 회복이라는 목표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43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 ‘코인 청산’으로 벼랑 끝 몰린 40대 가장, 원금 회복 위해 ‘투자 전문가’에 매달리다 [파멸의 기획자들 #41]

    ‘코인 청산’으로 벼랑 끝 몰린 40대 가장, 원금 회복 위해 ‘투자 전문가’에 매달리다 [파멸의 기획자들 #41]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김민준 학우님, 김승대입니다. 며칠간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저는 일단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아서 급한 불을 껐어요. 민준 학우님도 추가 투자금 준비가 끝나셨나요?” 오후 2시 경기도 남양주의 한 가구공장. 이날따라 사무실 공기가 유난히 탁했다. 거래처 구매 담당자와의 미팅을 코앞에 둔 시점, 민준의 스마트폰이 짧고 묵직하게 진동했다. 액정에 뜬 이름은 ‘김승대 대표’. 민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난 며칠간 지옥 같은 코인 강제청산의 악몽 속에서 유일하게 기다려온 구명보트였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텔레그램 메시지를 읽는 순간, 그의 명치끝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김 대표가 지난번 남겼던 경고가 뇌리에서 되살아난 탓이었다. ‘일주일 안에 원금을 되찾으려면 적어도 10만 달러 정도는 있어야겠죠. 그 이하로는 승산이 적습니다.’ 10만 달러. 지금 환율로 1억 4000만원. 민준이 멍한 눈으로 공장 풍경을 훑었다. 상사의 눈치를 보며 가구를 조립하는 동료들, 시끄럽게 울리는 전기톱 소리. 여기서 김승대 대표와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박 대리.” 민준이 낮은 목소리로 부하 직원을 불렀다. “거래처 사람들이 오면 네가 회의실로 안내해서 믹스커피 타 드리고 얘기 좀 나누고 있어.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겨서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네? 이번 건 중요한 계약이잖아요. 그래서 팀장님이 직접 브리핑하신다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해!” 민준은 의아해하는 박 대리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눈동자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김 대표에게 답장을 보냈다. “대표님, 연락 기다렸습니다.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실까요? 텔레그램 프로필에 있는 번호로 걸겠습니다.” 즉시 답장이 돌아왔다. “민준 님, 그 번호는 예전 법인 폰이라 지금은 쓰지 않습니다. 보안 문제도 있고 하니 텔레그램 보이스톡으로 하시죠.” “예, 지금 바로 걸겠습니다.” 민준은 건물 1층 로비를 가로질러 후문 쪽 공터로 뛰쳐 나갔다. 에어컨 실외기가 웅웅거리는 소음, 직원들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로 자욱한 곳. 바닥에 널브러진 담배꽁초들이 자신의 처지 같았다. 그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김 대표 프로필 사진 바로 위에 있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김승대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하고 차분했다. 시끄러운 공장 뒤편 공터에 서 있는 자신과는 사는 세상이 다른 사람 같았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김민준입니다.” “네, 민준 님. 목소리 들으니 반갑네요. 그날 충격이 크셨을 텐데…마음은 좀 추스르셨습니까?” “네…그때는 거의 패닉 상태였습니다. 대표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말씀 하나만 믿고 겨우 정신차렸습니다.” “일단 그날 강제청산에 대해서는 다시 사과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대표님도 거액을 강제청산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모두 극심한 코인 시세 변동의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타격이 컸지만, 다행히 부동산 담보 대출이 빨리 나와서 20만 달러(2억 8000만원) 정도로 시드를 다시 맞췄습니다. 민준 님은 준비가 되셨습니까?” 김 대표의 질문이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민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표님, 정말 면목 없습니다만… 지난 며칠 백방으로 뛰었지만 5000만원밖에 구하지 못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김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준은 갑자기 찾아온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됐다. “민준 님.” 한참 뒤 김 대표가 그를 비난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5000만원… 적은 돈은 아니지만, 우리가 목표로 하는 ‘원금 회복’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 금액으로는 제가 설계한 복구 플랜을 가동할 수가 없어요. 당장 레버리지 비율부터가 달라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10만 달러가 없으면 일주일 내로 원금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가…” 민준이 다급하게 말을 잘랐다. “일단 마련한 돈으로 먼저 시작해 주십시오. 이것도 친구한테 울면서 사정해서 2주일만 쓰고 돌려주기로 약속한 피 같은 돈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민준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그만큼 절박했다. 박 대리가 계속해서 전화를 해댔지만, 민준은 신경질적으로 거절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카톡이 날아왔다. “팀장님! 거래처 상무님이 팀장님 안 오신다고 엄청 화내고 계십니다! 제발 빨리 와주세요!” (42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 ‘옛날 그놈들 냄새가 난다’ 잠들었던 형사 본능 깨운 100억 코인 사기극 [파멸의 기획자들 #37~40]

    ‘옛날 그놈들 냄새가 난다’ 잠들었던 형사 본능 깨운 100억 코인 사기극 [파멸의 기획자들 #37~40]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저기요, 제발 전화 좀 받으세요.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 있던 50대 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이태성의 팔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태성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손바닥을 비벼 마른 세수를 한 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분명히 진동으로 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전철 안이 ‘G선상의 아리아’로 가득했다. “여보세…” “야! 내가 사무실 돌아가는 거 신경 쓰라고 했지! 정말 너 뭐하는 거야!” 인사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쩌렁쩌렁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나인 은주였다. 태성은 반사적으로 볼륨 버튼을 눌러 통화 음량을 줄였다. 때마침 지하철이 신길역에 도착했다. 그는 지하철을 빠져나와 잠시 플랫폼 의자에 앉아서 왼손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사건 처리 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사무실 업무까지 신경 쓸 정신이 어디 있어. 그런 일은 사무장이 하면 되는 거잖아.” 태성은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누나에게 대답했다. 누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법무법인이 흥신소 되는 거 한순간이다”, “떼인 돈 받아준다는 식으로 광고하면 변호사 이미지 금방 망가진다”, “내 친구가 너한테 도망친 계주 잡아달라고 말하겠다고 하더라” 등 이해되지 않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며칠 동안 밤을 새가며 준비했던 재판에서 최종 승소해 째지게 좋았던 기분이 누나의 융단폭격 같은 잔소리로 완전히 망가졌다. 밀려오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누나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정말!” 태성은 자신의 얼굴과 사무실 이름이 크게 걸린 노골적인 네이버 블로그 광고글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곧바로 김대유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장님, 지금 사무실에 계세요?” “네, 변호사님 사무실입니다. 오늘 재판은 어땠나요?” “자세한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할 테니까 거기 그대로 계세요. 금방 도착합니다.” 태성은 전화를 끊고 사무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분명 사무장에게 ‘내 허락 없이 사무실 홍보를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고 최근에도 다시 한 번 경고했는데, 사무장이 이를 무시하고 또다시 블로그 광고를 올린 것이다. 바쁜 태성이 이런 것까지 검색해서 확인해 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서 한 것이다. 태성에게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이 고액의 수임료를 부담하며 변호사를 찾는 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일 터.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막 수단이라 여기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기에 그들의 간절한 상황을 돈과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무장이 올린 광고들은 온통 ‘떼인 돈을 책임지고 찾아준다’, ‘불법 리딩방 피해 금액을 찾아준다’ 등 태성이 책임질 수 없는 내용으로 도배돼 있었다. 특히 ‘가상화폐 사기’를 다룬 광고는 부풀려져도 너무 부풀려져 있었다. ‘이성조 교수’라는 사람에게 사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코인 사건의 신(神)’인 이태성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기면 피해 금액을 100% 돌려받을 수 있을 것처럼 적어놨다. 지난달에도 사무장이 태성 모르게 금전 사기 사건을 수임했다가 피해자가 사무실로 찾아와 ‘변호사가 사건에 왜 이렇게 소홀하냐’고 화를 내며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태성은 사무장이 피해자에게 수임료로 500만원을 받은 뒤 300만원은 사무실 법인 계좌로, 200만원은 본인 계좌로 이체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쉽게 말해서 사무장이 수임료 일부를 삥땅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성이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수임료를 전액 환불해줬고, 이때부터 ‘양심불량’ 사무장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무장이 자숙하지 않고 피해 금액을 모두 되찾아 올 수 있다는 식으로 광고글을 올린 것이다. 사기 사건 피해자 대다수는 전 재산을 날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장난질 치는 듯한 사무장의 행동을 태성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태성 자신이 사무실 운영 비용도 벌지 못하고 있어 사무장이 마지못해 앵벌이식 영업에 나선 ‘불편한 진실’은 생각하지 못한 채. 태성은 어려서부터 정의에 대한 갈망이 강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일찌감치 경찰대 입학을 결심했지만 ‘SKY 진학률’에 목을 매는 학교 분위기 때문에 담임 교사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경찰대를 졸업하고 지구대와 경찰서를 돌며 여러 사건을 두루 경험했다. 그러나 범인을 아무리 열심히 잡아넣어도 재력과 인맥으로 무장한 ‘법꾸라지’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갔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하지만 최소한 대한민국에 완벽히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법조계의 요직을 맡다가 나온 ‘전관 변호사’들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어렵지 않게 이끌어냈다. 여전히 고통받는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법을 믿어보자’고 위로하는 것이 그에게는 위선처럼 느껴졌다. 경찰로 일하는 것보다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 이들을 더 가까이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태성은 오랜 고민 끝에 경찰 의무 복무 기간을 채운 뒤 배지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다시 공부를 시작해 어렵사리 수도권의 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태성은 경찰에서 쌓은 풍부한 사건 경험이 자신의 강력한 경쟁력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30대 중반의 늦깍이 변호사를 환영하는 법무법인은 많지 않았다. ‘백수 변호사’ 기간이 길어지자 이를 보다못한 누나 은주가 주택 마련 자금 일부를 헐어 신길동에 법률사무소를 차릴 수 있게 도왔다. 그녀가 태성에게 시도때도 없이 ‘사무실 운영을 신경쓰라’고 잔소리하는 것도 동생의 사업에 자신의 돈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이 다 마찬가지지만 자영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변호사 간판을 유지하는 데만 해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갔다. 태성은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사무실 유지도 여의치 않아 전전긍긍하는 ‘생계형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을 속여가며 내 주머니를 챙기는 ‘양아치’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했다. 태성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김대유 사무장에게 이번 광고가 어떻게 게재됐는지 캐물었다. 김 사무장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더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태성을 얼굴을 보더니 “아는 동생이 사무실을 홍보해 주겠다고 해서 돈을 주고 만든 페이지”라고 실토했다. “사무장님, 진짜 마지막 경고입니다. 다시 한 번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신다면 그때는 저도 사무장님을 원칙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어요.” 태성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무장에게 소리치고 나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사무장이 그런 식으로 홍보를 한 의도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법률사무소 대표라는 사람이 늘상 사회 정의만 부르짖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사무실 형편이 좋을 리 없었다. 사무장이 월급이나 제대로 받아가고 있는지도 확인해보지 못했다. 편의점에서 에너지 드링크 하나를 산 태성은 가게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건너편 건물 간판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오른 듯 스마트폰을 꺼내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왜 우리 사무장은 많고 많은 사건들 가운데 코인 사기 사건으로 광고를 만들었을까…’ 전화기 화면을 들여다보는 태성의 얼굴이 계속 굳어졌다.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가상화폐를 활용한 사기의 양상과 피해가 훨씬 심각했다. 리딩방에서 전문가를 자칭하는 놈들이 회비 몇 푼 뜯어내서 잠적하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거래소와 코인까지 새로 만들어 서민들을 완벽히 속이는 기업형 범죄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태성은 과거 경찰 시절 범죄를 접할 때 느꼈던 ‘촉’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잘만 파고 들면 ‘파멸의 기획자들’을 싹쓸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말이다. 갑자기 계단을 뛰어 올라간 태성이 자신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김 사무장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성이 대유에게 소리쳤다. “사무장님! 아까 가상화폐 사기 사건으로 지방에서 어떤 분이 상담하러 왔다 갔다고 하셨죠? 그 내용을 자세히 알려주세요.” 믹스커피를 마시던 김 사무장은 전북 완주군에 사는 최승현이 왜 서울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까지 찾아오게 됐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승현이 들려준 가상화폐, 선물 거래, 강제 청산 등은 변호사인 태성에게도 쉬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래도 기억력이 좋은 사무장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이야기해준 덕분에 어렴풋하게나마 사건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최승현이라는 분은 피해 의심 금액이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요?” 사무장은 태성의 말투가 오늘따라 유난히 딱딱하다고 느꼈다. 두 사람이 경찰과 참고인으로 처음 만났던 6년 전 그날처럼 말이다. 평소 태성은 성격만큼 말투도 느릿하고 유순했다. 하지만 일단 사건을 접하고 분노가 차오르면 논리적이고 딱딱하게 변하곤 했다. 사무장은 태성의 말투를 통해 지금 그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굉장히 흥분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분이 강제 청산당한 계좌 잔고는 2억원 정도고요. 이 가운데 순수 원금은 7000만원쯤 된다고 했어요.” 김대유 사무장이 이태성 변호사의 차가운 말투에 눌려 얼버무리듯 답했다. “강제 청산… 강제 청산이라…” 태성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단어가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의 파편을 건드렸다. 피해자와 직접 대화를 해 보면 이 막연한 불안감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무장에게 전북 완주군에 사는 최승현의 번호를 받아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승현은 내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기 때문인 듯 했다. 태성의 답답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승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법률사무소 블루의 이태성 변호사라고 합니다. 며칠 전 제 사무실을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를 사무장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응대해 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그날 사무장과 상담하신 내용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으니 시간을 내 주시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30분 넘게 스마트폰 화면을 지켜봤지만 승현에게서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자켓을 집어 들고 사무장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배어났다. “이 사건 관련해서 외근 나갑니다. 오늘은 못 들어올 것 같으니 먼저 퇴근하세요.” 사무장이 태성의 등 뒤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동안 태성에게서 본 적 없는 비장함이 느껴져서다. 사무실을 빠져나온 태성은 쫓기기라도 하듯 신길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승현의 강제 청산 이야기와 며칠 전 누나가 던진 알 수 없는 잔소리, 그리고 사무장의 기만적 광고 문구로 그의 머릿속이 뒤죽박죽돼 있었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연락처 검색창에 초성 ‘ㅈㅇㅈ’을 입력했다. ‘정유진’이라는 이름이 뜨자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첫 번째 발신음이 끝나기도 전에 스마트폰 너머에서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오랜만이예요. 설마 청첩장 주겠다거나 돈 빌려달라는 얘기는 아니겠죠? 그게 맞으면 당장 끊으시고!” 자신을 반기는 유진의 목소리가 반갑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 돈 빌려서 너하고 결혼하려고 했는데”라고 넉살좋게 받아쳤겠지만, 지금은 사건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져서 농담따먹기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태성이 한숨처럼 대답을 내뱉었다. “유진아, 혹시 지금 경찰서에 있어?” “네, 선배! 목소리가 딱딱해진 거 보니까 무슨 일이 있네요.” 유진의 예리한 관찰력은 여전했다. 태성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내가 그쪽으로 갈게. 만나서 이야기하자. 지금 전철을 타면 30~40분 정도 걸릴 것 같아.” 태성은 변호사 개업 당시만 해도 번듯한 검은색 세단 승용차를 리스해서 타고 다녔다. 하지만 ‘변호사 4만 명 시대’로 접어 든 현실에서 사무실 경영이 녹록지 않음을 깨닫고 차량을 없애 버렸다. 시간이 늘 부족한 그로서는 전철로 목적지까지 이동하면서 뭔가를 메모할 수 있어 더 나은 선택이기도 했다. 정 할 게 없으면 자리에 앉아서 잠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잠조차 제대로 청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청사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여성이 보였다. 유진이었다. 누가 보면 남자친구 마중 나왔다고 오해할 만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유진의 변치 않는 모습에 태성은 잠시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유진아, 넌 정말 형사가 맞냐? 스티브 잡스도 아니고 맨날 검은 색 니트에 청바지가 뭐야.” 태성의 잔소리에도 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밝게 대꾸했다. “몇 달 만에 만나서 잔소리부터 하는 건 뭐죠?” 유진을 따라 청사 내 회의실로 들어갔다. 조금만 성격이 다소곳했다면 예쁜 얼굴 덕분에 간부들의 추천을 받아 경찰 홍보 모델로도 활동했을 터지만 지금 그녀는 긴 다리를 쩍쩍 벌려가며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가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선머슴 여대생이었다. 유진이 자판기에서 뽑아온 캔 음료를 건네받은 태성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넌 언제까지 수사과에 있을 거야?” 유진이 음료수 캔을 따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걸 뭘 또 물어. 전에 다 얘기했잖아요.” 저 대답은 태성이 유진과 처음 만났던 날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당시 동료들은 꽃미녀 경찰의 ‘사수’가 된 태성을 부러워했지만, 정작 그는 유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만 믿고 남성 선배들에게 애교로 일관하다가 경찰로서 성장이 멈춘 ‘응석받이’로 전락할 수 있어 보여서였다. “도대체 넌 언제까지 수사과에 있을 거냐?” 유진과 파트너가 된 태성이 그녀에 대한 선입견을 떨치지 못하고 짜증섞인 감정을 담아 던진 첫 번째 질문이었다. 그런데 제복을 입고 있던 유진이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사기공화국인 대한민국을 바꾸고 싶어서 경찰대에 지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기꾼들을 다 잡고 난 뒤에 수사과에서 나가겠습니다.” ‘인류 평화에 기여하려고 미스코리아에 지원했다’는 식의 뻔한 답이 돌아올 줄 알았던 태성에게 그녀의 응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유진에게서 작게나마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녀에게 숨은 아픈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이때부터 태성과 유진은 한몸처럼 붙어 다녔다. 유진은 쉬는 날 태성의 누나와 만나 쇼핑도 다닐 만큼 친해졌다. 아들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던 태성의 아버지조차 종종 유진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곤 했다. 태성이 로스쿨을 가겠다고 경찰을 그만뒀을 때도, 가족들은 그가 유진과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더 슬퍼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결혼을 생각할 만큼 뜨겁게 불타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과 우정 사이’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유진 경위! 최근 들어서 가상화폐 관련 사기 사건들 접수된 것들 내용을 자세히 알려줄 수 있어?” 유진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려다가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당황하며 말했다. “선배, 잘 알면서 왜 그래. 그런 건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 없잖아요.” 태성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 미안. 내가 마음이 급해서 잠시 표현이 서툴렀어. 다시 질문할게. 요즘 가상화폐 관련 사기 사건 신고 접수가 많아졌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청바지에 손을 찔러 넣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피로감과 짙은 회의감이 함께 서려 있었다. “솔직히 요즘 장난이 아니에요. 신고 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개인 정보가 털려서 자기 명의로 대포 통장이 만들어졌다는 피해자들과 가상화폐 사기 사건으로 돈을 날렸다는 피해자들이 폭증하고 있어요. 문제는 경찰이 이런 사건들에 매달리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당장 처리해야할 사건도 산더미 같으니까요. 코인 사기 사건 역시 피해 금액이 상당한 강력 범죄인데도 지금 경찰 인력 구조로는 이런 사건까지 적극적으로 나서기가 쉽지 않아요.” 태성은 유진의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과거 경찰로 일할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실이 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스마트폰 검색창에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검색했다. 김대유 사무장이 만든 ‘이성조 교수 사칭 불법 사기 거래 피해자를 구제해 드립니다’라는 광고 화면을 내밀었다. “유진아, 이거 한 번 봐줄래? 혹시 네가 말한 그 사건과 같은 거야?” 유진이 태성의 전화기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크게 웃었다. “오~ 선배, 사진 진짜 잘 나왔네요. 편집자가 뽀샵질을 엄청 했구만. 이거 보여 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태성은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지금은 농담을 받아칠 여유가 없었다. “으… 미치겠네. 일단은 아랫쪽에 있는 내용부터 봐줘.” 검지 손가락으로 태성의 스마트폰 화면 스크롤을 내리는 유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장난기 가득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함이 감돌았다. 조금 뒤에 그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요즘 접수되는 사기 사건과 같은 유형이예요. 선배 혹시 이 사건 수임한 거예요?” 태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사실은 사무장이 나 몰래 이런 광고를 만들어서 올려놨는데, 이 광고를 보고 누군가가 사건을 맡기려고 찾아왔었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 분한테 전화를 해봤는데 몇 번을 해도 받지를 않아.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한 건 아닐까 싶어서 문자도 보냈는데, 다행히 문자는 읽고 씹었더라고. 찾아온 분의 이야기와 사무장이 올린 광고 블로그의 내용을 종합해보니 옛날 그 사건이 자꾸 떠올랐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과거 태성의 아픈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사건 말이야. 사무장이 광고를 만들어서 게재할 정도면 이미 관련 사기가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잖아. 네가 말한 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사건이 접수된다면 그냥 넘어가선 안 되는 거잖아.” 유진이 침묵을 깨고 태성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단호함과 걱정이 배어 있었다. “선배는 이제 경찰이 아니예요. 혹시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유진은 태성이 경찰을 그만두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을 언급하며 그를 다그쳤다. 그의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긴 그 사건의 그림자에서 태성이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어쨌든 지금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 태성의 눈빛이 흐려졌지만, 결심만큼은 확고해 보였다. 유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회의실 안이 일순간에 어두워졌다. “원래 외부인에 이런 내용까지 전해선 안 되지만… 선배를 진심으로 믿기에 말씀드릴게요. 지금부터 긴 이야기가 될 텐데, 마음 단단히 먹어요.” 유진은 태성에게 최근 몰려들고 있는 가상화폐 사기 사건 피해 사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태성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 어느새 경찰 시절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 “원금 회복하자” 가짜 코인 청약 유혹, 탐욕이 부른 ‘100억 사기극’ 제2막 [파멸의 기획자들 #33~36]

    “원금 회복하자” 가짜 코인 청약 유혹, 탐욕이 부른 ‘100억 사기극’ 제2막 [파멸의 기획자들 #33~36]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게다가 영철은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서야 초췌한 얼굴로 사무실에 나타났다. 전날 현지 여성과 즉석 만남을 갖고 밤새 술자리를 하다가 온 듯했다. 상기는 이 시간이 돼서야 사무실에 나타난 영철을 보며 똥 씹은 듯한 표정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영철이 연기하는 ‘이성조 교수의 수제자’들은 얼마 전 회원들을 코인 선물거래 청산으로 이끌고 미안한 마음으로 자중하는 콘셉트다. 지금 당장 나서서 활약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작전에 참여한 다른 팀원들이 한국 시각에 맞춰서 활동하려고 새벽부터 일어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해가 중천에 떠서야 출근하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분명 팀의 사기를 해치는 일이었다. 상기는 이 시점에서 분위기를 한 번 다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곧장 가운데 테이블로 걸어가 팀원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시작했다. “자, 우리 작전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점검을 해보려고 해. 우선 회원들을 텔레그램 채팅방 소그룹으로 유도해서 ‘파멸의 덫’을 놓는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어. 그 덕분에 ‘첫 번째 사기’인 코인 선물거래 강제청산으로 회원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서 거액을 추가 입금하게 만드는 것까지 완수했어. 다들 정말 고생이 많았어.” 지금까지 회원들에게 긁어모은 액수가 족히 수십억원은 돼 보였다. 다만 ‘환전 계좌’로 소개한 대포통장 하나가 은행에서 거래 정지 조치를 당해 2억원가량 묶인 것이 유일한 ‘옥에 티’였다. 아마도 상기에게 대포통장을 판 업자들이 앞서 다른 사기 사건에서도 이 통장을 사용했고, 뒤늦게 사건 피해자가 은행에 지급 정지를 요청한 듯 했다. ‘이런 썩을 것들, 사기꾼한테 사기를 치다니. 피 같은 내 돈 2억원을…’ 상기는 그 돈을 찾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자신 때문에 수억원씩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피해자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기 자랑하느라 팀원들에게 칭찬 한 마디 없던 상기가 갑자기 자신들을 격려하자 정욱은 ‘보너스라도 주려는 것 아닌가’라고 기대했다. 그는 최근 프놈펜 중심가 바에 새로 온 여성 댄서가 꽤 마음에 들었다. 보너스를 받으면 그녀에게 팁을 주고 데이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욱의 기대와 달리 상기의 얼굴이 무섭게 바뀌었다. “그런데 말이야, 코인 강제청산까지 해서 우리가 얻어낸 돈이 고작 10억원 정도밖에 안 돼! 다들 이걸로 만족할 거야? 긴장의 끈을 바짝 조여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도준은 상기의 ‘10억원’ 이야기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이성조 교수와 김가영 비서 역할을 하는 자신이 긁어모은 돈만 해도 그 액수를 훌쩍 넘길 참이었다. 영철과 정욱, 나은이 챙긴 돈까지 더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억원은 될 텐데, 총책이라는 놈이 ‘운명 공동체’인 팀원들까지 속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듯한 그의 거짓말에 도준은 모든 정나미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도준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기가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제부터 ‘두 번째 사기’에 돌입할 생각이야. 바로 신규 코인 청약!” 영철은 전날 무얼 하다 왔는지 내내 허리가 아프다고 불평하며 상기의 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욱과 나은은 ‘신규 코인 청약’이라는 말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상기는 야심 차게 발표한 자신의 전략에 팀원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테이블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무실 구석에 있는 칠판을 가져다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내 말에 집중해. 우리의 ‘1차 작전’으로 코인 강제청산을 당한 ‘호구들’은 이제 선물 거래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뼈저리게 느꼈을 거야. 그래서 이들에게 선물 거래 리딩을 제안해도 이를 아예 거부하거나 극히 적은 액수만 참여할 가능성이 커. 이래 가지고는 투자금을 늘리기 어렵잖아. 그래서 이번 코인 청약이 ‘무위험 투자’라는 점을 강조할 거야.” 정욱과 나은은 한국에서 사기로 번 돈을 테마주에 몰방했다가 상장 폐지당해 무일푼으로 프놈펜에 왔다. 쓰디쓴 투자 실패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무위험’이라는 상기의 말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 내가 얼마 전에 신규 코인 하나를 만들어 뒀어. 청약자에게는 투자설명서도 같이 만들어 줄 거야. 물론 다 가짜지만. 코인 이름은 ‘SPAM’이야. 얼마 전 나은이가 한 대학생을 상대로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을 성공시켜서 2000만원을 추가로 뜯어냈잖아. 그 스캠(Scam)에서 ‘a’를 ‘p’로 바꾼 거야. 이 코인 명칭의 진짜 유래를 아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겠지.” 상기의 언급에 모두가 일제히 나은을 바라봤다. 나은은 민망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 상기가 다음 설명을 이어갔다. “자, 내 말에 집중해. 주식이 처음 상장될 때 청약이라는 것을 하게 돼. 보통 청약은 일반인들이 해당 주식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져. 다들 ‘따상’이라는 말은 들어봤을 거야. 예를 들어서 내가 청약에 당첨돼서 어떤 주식을 1주당 1만원에 받았다고 치자. 그 주식은 상장 당일 두 배 가격으로 시초가 설정이 가능해. 운이 좋으면 그 주식은 장이 열리자마자 2만원으로 시작하는 거야. 여기에 더해 그 주식은 국내 증시의 하루 상승 제한 폭인 30%까지 추가로 오를 수 있어. 그렇게 되면 그 주식은 상장 첫날 ‘더블 시초가’(100%)에 ‘상한가’(30%)까지 더해져 2만 6000원으로 치솟아. 1만원에 주식을 산 청약 주주들은 하루 만에 주당 1만 6000원씩을 버는 셈이지. 그래서 청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청약 증거금을 많이 입금해서 당첨 주식 수를 늘리고 싶어 해. ‘따상’을 노린 것이지.” 영철은 머리가 좋은 상기가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평생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자신마저도 그의 설명 덕분에 ‘청약’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됐으니까. 상기가 말을 이어갔다. “코인도 마찬가지야. 특히 가상화폐 거래소는 코스피 같은 하루 상승 제한 폭 개념 자체가 없어. 단 몇 시간에도 10~20배씩 오를 수 있다고. 더 많은 청약 증거금을 입금한 사람에게 더 많은 신규 코인에 당첨된 것처럼 속인 뒤에 그 코인을 상장 당일 두세 배로 끌어올려 줄 거야. 어차피 가짜 코인인데 뭐가 어렵겠어. 그렇게 코인 청약을 통해서 ‘성공의 맛’을 보여주면 그다음부터는 신규 코인 청약 공고만 내도 회원들이 개떼처럼 달려들겠지.” 상기는 노트북 화면을 열어 IEKAF 거래소에 로그인했다. 나이가 가장 어린 나은이 빔프로젝터 화면을 켰다. 상기가 만든 코인 도표가 스크린에 떴다. “아까 내가 ‘SPAM’이라는 코인을 만들어 뒀다고 했지. 그것과 별개로 ‘HJG’라는 신규 코인 종목의 가격 변화 도표도 생성했어. ‘SPAM’과 마찬가지로 ‘HJG’라는 코인도 이 세상에 없어. 그냥 이 코인이 지난해 8월 상장해서 지금까지 가격이 수직으로 상승한 것처럼 도표만 그려 놓은 거야. 앞으로 도준이는 이성조 교수를 통해서 텔레그램 단체 채팅방에서 HJG 도표를 소개하라고. ‘내가 직접 발굴한 이 코인이 이 정도로 시세가 폭발했다. SPAM 역시 HJG와 똑같은 원리의 코인이다. 그러니 새로 상장된 SPAM도 이런 식으로 계속 오를 것이다’라고 설득하란 말이야.” 상기는 프로젝트 스크린에 영사된 HJG 도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테이블에 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힌 채 단호한 명령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자, 다들 이해했지? 오늘 저녁부터 우리는 단체방에서 오로지 신규 코인 청약 이야기만 할 거야. 특히 정욱이하고 나은이가 회원들의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해서 바람잡이 역할을 확실하게 하라고. 영철이 형도 소모임 방에서 강제청산 당한 놈들에게 ‘코인 청약을 통해 잃어버린 원금을 더 빠르고 안전하게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이제 움직입시다. 돈다발이 바로 코앞에 와 있어!” 모두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상기도 자신의 책상에서 IEKAF 거래소 관리자 모드로 접속한 뒤 신규 코인 청약을 개시한다는 공지글과 투자설명서를 올렸다. 두 번째 작전만 성공하면 총합 100억원을 너끈히 챙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 많은 돈을 절대 이 바보들과 나눠 갖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날부터 도준은 이성조 교수로 빙의해서 회원들을 상대로 신규 코인 청약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정욱과 나은도 “강제청산 당한 돈을 코인 청약으로 되찾자”며 분위기를 띄웠다. 하지만 텔레그램 채팅방 대부분 회원은 신규 코인 청약이라는 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상화폐 선물 리딩 거래에서 단 한 번의 거래로 20~30%씩 수익을 낼 때만큼 열광하진 않았다. 저녁 강의를 마치고 팀원들이 각자 숙소로 돌아가던 때였다. 도준이 상기에게 담배 한 대 피우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한동안 자신에게 불편한 내색을 보이던 도준이 대화를 시도하자 상기는 내심 반가움을 느꼈다. 도준이 한국산 담배 한 대를 상기에게 건네고 불을 붙여줬다. “오! 코리아 담배! 이게 얼마 만이야!” 뭔가 신이 난 듯한 태도의 상기와 정반대로 도준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간 쌓인 불만을 작심하고 털어놓으려는 듯했다. “상기야, 지금 웃음이 나와?”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우리 작전에 아무 문제도 없구먼.” “너는 총책이랍시고 뒤에서 프로그램만 만지고 지시만 내리니 모르는 거야. 채팅방을 운영하며 회원들과 직접 소통하는 나는 현장의 차가운 반응이 바로 느껴진다고!”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도준의 모습에 상기는 짜증이 밀려왔다.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말해!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네가 코인 강제청산을 너무 성급하게 시행했어. 어차피 거래소에서 보이는 돈은 전부 다 가짜인데, 그 돈이 뭐가 아깝다고 그렇게 속전속결로 청산을 시킨 거야? 회원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자산을 더 불릴 수 있게 했으면 이 사람들이 지금처럼 우리를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진 않을 거 아니냐고!” 도준이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비난을 들으니 상기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이코패스 성향의 상기는 가상화폐 사기를 기획할 때부터 ‘이번만큼은 내 분노를 무조건 다스리겠다’고 수도 없이 맹세했다. 그래서 동갑내기 친구인 도준에게 최대한 맞대응을 삼갔다.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 판이 깨지면 팀원들은 더는 같이 일을 못 하겠다고 선언하고 지금까지 번 돈에서 자기 몫을 떼어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1년 넘게 준비한 블록버스터 작품이 ‘푼돈’ 나눠갖는 용두사미 결말로 끝날 수 있었다. 상기는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면 안 된다’는 절박감 속에서 억지로 화를 참으며 입을 열었다. “도준이 네 말도 틀리지는 않아.” 평소와 달리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상기의 태도에 도준은 이상함을 느꼈다. 도준의 낌새를 알아챈 상기가 이때가 기회이다 싶어 말을 이어갔다. “회원들이 신규 코인 청약에 소극적인 건 나도 이미 예상한 거야.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씩 돈을 잃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두 가지 장치를 보완했어. 하나는 ‘충전 보너스 이벤트’고, 다른 하나는 ‘고급 차량 증정 이벤트’야. 내가 더 자세히 설명할.” 도준은 상기에게 끌려가듯 사무실로 들어가 테이블 위에 앉았다. 상기는 칠판을 가져와 직접 써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강의는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도준은 ‘설명충’ 상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탁월한 분석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준은 상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뒤 회원들의 마음을 뒤흔들 논리를 구상했다. 다음 날 아침, 도준은 IEKAF 거래소 매니저 계정으로 로그인한 뒤 회원들에게 충전 보너스 이벤트와 고급 차량 이벤트 안내문을 보냈다. 곧이어 이성조 교수로 변신해서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오전 강의에 나섰다. “회원 여러분, 조금 전 IEKAF 거래소 매니저에게 새로운 이벤트 안내를 받았어요. 제가 이 거래소를 이용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풍성한 혜택은 처음이네요.” 이 교수는 회원들의 관심을 하나로 모은 뒤 대화를 이어갔다. “첫 번째는 충전 금액별로 차별화된 보너스 지급입니다. USDT 기준 충전 금액 5만 이상이면 2%, 10만 이상 5%, 20만 이상 12%, 50만 이상 30% 등 엄청난 추가 충전금을 준다고 합니다. 이번 행사가 혁신적인 이유는 기산일을 2개월 전부터 소급 적용해주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서 지난달에 5만 USDT를 충전하신 분께서 오늘 5만 USDT를 추가로 입금하시면 시스템은 이를 총 10만 USDT로 인식해서 5% 추가 충전금을 지급한답니다.” 그의 글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잡이’인 정욱과 나은이 여러 계정을 함께 이용해서 동조의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10만 USDT(1억 4000만원)를 입금하면 곧바로 5%인 5000 USDT(700만원)을 받는다는 거네요. 코인을 사지 않고 돈을 넣어두기만 해도 은행 이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혜택이 나오네요.” “저는 지난달에 10만 USDT 충전했는데, 그러면 오늘 1 USDT만 충전해도 700만원을 버는 거네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 신규 코인 청약 때문에 고객센터에 환전을 요청하는 중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공돈’이 생기겠어요.”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이번 이벤트에 대한 찬사의 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잠시 후 이 교수가 이야기를 재개했다. “거래소에서 왜 회원들에게 이렇게 많은 혜택을 주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그 이유는 회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거래소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거래소의 가장 큰 수익은 여러분이 매매할 때 발생하는 수수료입니다. 선물 거래는 고위험 고수익인 만큼 수수료가 높게 설정돼 있어요. IEKAF에서는 거래금액의 3% 정도죠.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100만원을 거래했다면 여기의 3%인 3만원 안팎이 수수료로 나가요. 거래 규모가 커지면 수수료 액수도 같이 커지게 되죠. 아까 선물 거래에서 1000만원을 거래했다면 거래소는 그 10배인 30만원을 수수료로 챙겨갑니다. 정리하자면 거래소 입장에서는 회원들의 거래 금액이 커질수록 수수료 수익이 늘어나기에 여러분들의 투자금을 더 늘리도록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이런 거액의 보너스를 제공해도 남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여러분께서는 제가 이끄는 대로만 하시면 큰 수익을 낼 것이기에 ‘3% 수수료’에 연연하실 필요가 없어요.” 이 교수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잡이’ 정욱과 나은이 찬사의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최고!”, “IEKAF 거래소에서 제공하는 보너스까지 더해지면 수익을 더 크게 늘릴 수 있는 거니까 우리로서는 일석이조 아닌가요.”, “교수님 덕분에 궁금증이 모두 풀렸어요. 어서 빨리 USDT를 충전해서 실탄을 채워야겠어요.” 평소 도준은 정욱의 무성의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끔 채팅방에 맥락 없이 던지는 그의 ‘아무말 대잔치’같은 글 때문에 일부 회원이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번에도 도준은 정욱이 추가로 바람잡이 글을 입력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끊고자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는 고급 차량 이벤트입니다. 저는 지금 독일산 마이바흐를 10년 넘게 타고 있어요. 그래서 차를 바꿀 생각을 하던 차에, 때마침 이번 행사가 시작됐죠. 거래소 안내에 따르면 다음 달까지 누적 수익금 10만 달러(약 1억 4000만원) 이상은 쏘나타, 20만 달러(2억 8000만원) 이상 제네시스, 40만 달러(5억 6000만원) 이상 벤츠, 80만 달러(11억 2000만원) 이상 벤틀리 플라잉스퍼, 160만 달러(22억 4000만원) 이상 롤스로이스 팬텀을 지급합니다. 거래소가 왜 이렇게 비싼 자동차를 주냐고요? 이것 역시 IEKAF 거래소가 회원들의 거래를 유도해 최대한 많은 수수료 수익을 거두려는 전략의 일환이니까요. 제 생각에 골드클럽과 실버클럽 회원분들은 그동안 거둔 이익 만으로도 벤츠 정도는 확보하셨을 겁니다.” 회원들은 각자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차량 브랜드를 언급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간파한 이 교수가 감정을 잡아 최종 연설을 시작했다. “저는 이번 두 가지 이벤트를 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말 여러분과 함께 서울의 최고급 음식점에서 송년 모임을 하려고 합니다. 1층에 대형 지상 주차장이 완비된 곳에서요. 그곳 주차장에는 우리 회원님들이 가져온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벤츠 등이 즐비하겠죠. 식당 직원들과 행인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눈이 휘둥그레질 겁니다. 어떤 분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겠죠. ‘슈퍼리치들의 식사 모임’이라는 이름으로요. 대기업 총수들의 모임이 여기서 열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그만큼 저와 여러분들은 가상화폐 덕분에 위대한 성공을 이룰 것입니다.” 텔레그램 채팅방을 지켜보던 총책 상기가 환희에 찬 듯 손뼉을 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브라보! 이성조 교수님, 정말 대단하다. 이 정도 ‘구슬림’이면 회원들이 전부 우리한테 넘어가겠어. USDT를 충전하겠다고 우르르 덤벼들 것 같은데. 너무 기쁘네.” 상기는 자신이 만든 알고리즘을 활용해서 도준의 ‘명연설’을 텔레그램 단체방 수십 개에 동시다발적으로 뿌려댔다. 정욱과 나은도 단체 채팅방을 돌며 회원들에게 헛바람을 넣기 위한 답글을 쏟아냈다. 그렇게 이들은 오랜만에 한마음이 되어 ‘두 번째 사기’ 작업을 이어갔다. 상기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부터 USDT를 충전하겠다는 회원들의 요청이 물밀듯이 쇄도했다. 곧바로 상기와 영철, 정욱, 나은은 IEKAF 고객센터 직원으로 가장하여 회원들에게 대포 통장 계좌 번호를 알려주고 돈을 입금받았다. 상기는 한국에 있는 또 다른 일당인 최도겸에게 텔레그램으로 “액수를 확인해 보라”고 몰래 메시지를 보냈다. 도겸은 통장에 새로 들어온 회원들의 투자금 규모를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그는 상기의 지시에 따라 비트코인과 암시장 골드바를 넉넉히 구입했다. 비트코인은 상기의 전자지갑 계좌로 보냈고, 골드바와 남은 현금은 두 사람만 알고 있는 장소에 숨겨뒀다. 이 과정에서 도겸은 상기 몰래 자신의 몫을 따로 챙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명문대 출신 엘리트의 몰락, 프놈펜서 펼쳐진 ‘코인 사기 시나리오’ [파멸의 기획자들 #29~32]

    명문대 출신 엘리트의 몰락, 프놈펜서 펼쳐진 ‘코인 사기 시나리오’ [파멸의 기획자들 #29~32]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저기요, 김가영 비서님~ 오늘따라 유난히 더 매력적으로 보이네요. 뭔가 좋은 일이 있으신가봐요. 예쁜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이쪽으로 와 주실 수 있나요?” “야!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정말 짜증난다니깐!” ‘국제범죄 소굴’로 악명 높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한 낡은 사무실.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던 권상기가 컴퓨터로 바둑을 두고 있던 박도준을 능글맞게 불렀다. 도준은 자신이 ‘김가영 비서’로 불릴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소름이 돋았다. 텔레그램 가상화폐 사기단 속에서 여성 역할을 맡고 있지만, 현실에서도 그렇게 불리면 남성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30대인 권상기와 박도준은 동갑내기다. ‘친구’라기보다는 ‘동업자’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두 사람은 각각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한때는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다녔던 엘리트였다. 어려서부터 도준은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과대망상 경향이 강했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유명 증권사에서 일하다가 중국 출장을 간 것이 화근이 됐다. 마카오의 한 호텔에 들렀다가 카지노에서 바카라 게임 현장을 목격했다. 바카라는 큰 틀에서 보면 확률이 50대 50인 카드 게임이기에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계산하면 반드시 딜러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밤을 새가며 확률 분석을 통해 나름의 ‘필승 공식’을 만들었다. 이를 실전에 적용해서 우리 돈 300만원을 벌어서 귀국했다. 행운에 가까운 결과였지만 도준은 이를 자신의 분석력 덕분으로 여겼다. 이때부터 그는 금요일 저녁마다 여의도에서 총알택시를 타고 강원랜드로 향했다. 그런데 도박에 빠져 들수록 게임 결과가 자신의 예측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대다수 사람은 과오를 인정하고 더 이상 손실을 막고자 카지노에서 손을 떼지만, 그는 되레 ‘자본금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으로 오판해 더 많은 돈을 빌려 태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1년 가까이 이어지자 직장 생활은 파탄이 났다. 수억원에 달하는 사채를 갚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대부업자들이 협박에 나섰다. 결국 도준은 이들을 피해 한국 경찰의 손이 닿지 않는 캄보디아로 숨어 들었다. 상기는 누구든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이 들면 철저히 괴롭히고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이코패스였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뒤 누구나 부러워하는 정보기술(IT) 기업에 입사했지만 바로 이 기질 때문에 동료들과 끊임없이 충돌했고 권고사직 형태로 쫒겨났다. 지인들은 그를 두고 ‘성격만 온순했다면 미국 실리콘밸리로 가서 세계적인 개발자가 됐을 것’이라고 수근댔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래밍 능력을 허투루 낭비했다. 대학 시절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해킹해서 남자 친구와 헤어지게 만들었고, 회사에 다닐 때도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의 개인정보를 털어 불법 조직에 넘겨 문제가 됐다. 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추적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캄보디아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자신의 컴퓨터 실력으로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겠다고 마음 먹고. 몇 달 전 상기는 프놈펜에서 자신의 성격을 주체하지 못해 길거리 건달들과 시비에 휘말렸다. 얻어맞기 일보 직전 상황으로 내몰렸다. 현지 경찰은 이들과 한패인 듯 상황을 지켜만 봤다. 때마침 도준이 주변을 지나가다가 “살려달라”는 한국어 외침을 들었다. 자세히 보니 길거리 일행은 평소 자신의 환치기를 도와주던 이들이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위험을 무릅쓰고 건달들을 달래 상기를 무사히 구해냈다. 동포애 때문은 아니었다. 그를 도와주고 이를 지렛대 삼아 나중에 큰 돈을 뜯어낸 뒤 캄보디아를 뜨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찌됐건 당시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의기투합했고 ‘가상화폐 사기단’을 꾸리기로 합심했다. 그렇게 프놈펜의 한 사무실을 빌려 동고동락하기 시작했다. “도준아, 알았어. 장난 좀 친건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네. 앞으로는 ‘가영’이라고 안 부를게.” 상기가 씩 웃으며 도준의 어깨를 툭 쳤다. 기분 풀고 내 말을 들어보라는 취지였다. “도준아, ‘이성조 교수’ 캐릭터 설정은 마무리된 거지?” “당연하지. 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50대 남자, 어린 시절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그간 모든 돈을 30대에 모두 날렸어. 그래서 세상을 포기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기적적으로 부활해서 엄청난 부자가 된 입지전적 인물. 자신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게 돕고 싶어하는 호인(好人)!” “정말 나쁜 XX들이네…” 때마침 소파에 누워 있던 최영철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전날 프놈펜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마음에 드는 현지 여성들에게 접근해서 밤새 술을 마셨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혼자 길바닥에 내버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갑이 통째로 사라진 채로. 영철은 도준의 중학교 1년 선배였다. 학창 시절 싸움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일진’에 들어갈 수준은 못돼 힘없는 학생들을 상대로 괴롭힘을 일삼았다. 2학년 때 신입생의 돈을 뺏으려고 커터칼로 위협하다 실수로 후배의 팔에 상처를 내 1년 정학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 덕분에 도준과 같은 반에서 졸업하며 안면을 틀 수 있었다. 영철은 고등학교에서도 사고를 일삼다가 퇴학당했고, 이후 별다른 직업 없이 전전했다. 20년 가까이 연락이 없던 두 사람은 1년쯤 전 강원랜드 바카라 도박장에서 우연히 재회해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몇 달 전 영철은 ‘캄보디아에서 가상화폐 사기 프로젝트를 준비한다’는 도준의 연락을 받고 여기에 동참하고자 프놈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형, 지금 뭐라고 했어? 우리 들으라고 한 소리야?” 도준이 언짢은 표정으로 소파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영철은 그의 반발을 무시하듯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젯밤 일로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술집에서 만난 현지 여성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명 그녀도 구레나룻 수염을 기른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는데,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지갑만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영철은 반드시 그녀 일행을 찾아서 어제 일을 되갚아 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땀내와 향수 냄새가 뒤범벅이 돼 밀려왔다. 민정욱과 고나은 커플이었다. 둘은 늦잠이라도 잔 듯 초췌한 모습이었다. “야! 지금이 몇 시인데 이제야 출근하는거야? 시간 맞춰서 빨리 빨리 다니라고 했지!” ‘우두머리’ 상기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도끼눈으로 외쳤다. 정욱과 나은이 멋쩍은 표정으로 사무실을 가로질러 소파 맞은 편으로 향했다. 한국에서부터 연인이던 두 사람은 보이스피싱 가담 혐의로 지명수배가 내려지기 직전 캄보디아로 넘어왔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프놈펜에서 각자 만나는 상대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열린’ 관계였다. 두 사람은 얼마 전 한인 밀집지역의 작은 술집에서 우연히 상기를 만나 통성명을 했고, 단박에 서로의 정체를 짐작했다. 곧바로 상기가 준비하는 코인 사기 계획의 시놉시스를 듣고난 뒤 참여를 결심했다. “자, 이제 다들 테이블로 모이자구.” ‘파멸의 기획자들’ 총책인 상기가 가운데 앉았다. 그의 왼쪽으로 ‘2인자’ 도준이, 오른쪽으로 정욱과 나은이 자리했다. 소파에 누워 있던 영철도 어슬렁거리며 도준의 옆으로 향했다. “이번 시나리오는 내가 1년 넘게 준비한 블록버스터 대작이야. 모든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100억원 정도는 어렵지 않게 땡길 수 있지. 여러분들의 주머니에 평생 만져본 적 없는 큰 돈을 채워줄 테니,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시작해 보자고.” ‘100억원’이라는 말에 이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상기가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스토리 라인을 성경에서 따왔어. 우선 주인공인 이성조 교수는 ‘예수님’이야. 30대 초반에 경제적으로 사망했다가 기적처럼 부활해서 ‘투자의 신(神)’이 되신 분이지. 그는 전지전능한 동시에 단 한 번의 오류도 범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야. 그래야 마지막까지 회원들이 그를 믿게 해서 대규모 ‘설거지 작전’을 펼칠 수 있으니까.” 상기가 신이 난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회원들을 ‘파멸의 덫’으로 잡아끄는 역할을 하는 김가영 비서는 바로 막달라 마리아!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헌신한 그녀처럼 김 비서도 이 교수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이 교수와 김 비서는 서로 호흡이 맞아야 하니까 ‘금융 천재’ 도준이가 ‘1인 2역’을 맡습니다.” 도준이 상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술이 덜 깬 영철이 얼굴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죠, 권상기 감독님! 이성조 교수가 완전무결한 존재라면 ‘파멸의 덫’은 누가 놓지? 선역(善役)만 있으면 회원들에게서 돈을 챙겨올 수 없잖아.” 영철의 예리한 질문에 상기가 재밌다는 듯 답했다. “그렇죠, 백번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역할을 이 교수의 ‘제자들’이 합니다. 바로 형이 연기할 캐릭터들. 성경을 보면 가롯 유다가 은화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기잖아.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우리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이 교수는 내가 만든 가짜 코인 거래소를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줄 예정이야. 회원 누구나 이 거래소에서 몇 주 만에 투자금을 세 배 이상 불리면 너도나도 그를 ‘절대자’로 모시고 싶어하고 다들 이 교수의 투자 리딩을 받으려고 안달이 나겠지. 하지만 그는 너무도 바쁜 존재이기에 ‘제자들’이 대신해서 회원들과 소통을 시작할 거야. 일부 제자는 이성조 교수를 넘어서겠다는 허영심에 들떠 있는데, 바로 이 허영심이 회원들을 잘못된 투자로 이끌어 파멸에 이르게 만들지. 우리는 거기서 회원들의 돈을 모두 털어내고 ‘히트앤드런’을 하면 되는 것이고.” 상기의 설명을 듣고 있던 정욱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말이죠. 회원들을 속일 가짜 거래소는 어디에 있어요?” 상기가 정욱을 바라보며 비웃듯 답했다. “내가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IT 대기업에서 일했다는 건 알고 있지? 여러분들과 만나기 훨씬 전부터 해외 유명 가상화폐 거래소의 소스코드를 참고해서 여러 개의 가짜 거래소와 코인을 만들어 뒀어. 다크웹을 통해서 중국과 인도 프로그래머들에게 프로그램 제작을 의뢰했지. 앞으로 우리가 볼 거래소와 코인은 모두 가짜야. 이것들로 회원들을 유인하고 낚기만 하면 돼.” 곧바로 상기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설명했다. “정욱이와 나은이는 SNS에 광고 페이지를 만들어서 여기저기에 광고를 뿌려 떡밥을 던져. 광고를 본 100명 가운데 한두 명만 ‘입질’해도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 최대한 많이 광고를 퍼뜨려야 해. 그렇게 회원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두 사람은 SNS 단체 채팅방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할 거야. 단체방 하나마다 수십 명이 가입해 있지만 실제 회원은 단 한 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두 사람이 연기할 바람잡이들이야. 그 회원이 별다른 의심 없이 우리에게 거액을 입금할 수 있게 분위기를 띄우란 말이야.” 나은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도 회원이 순순히 돈을 내놓지 않고 계속 시간만 끌면 어떻게 하죠? 나중에라도 우리의 정체를 눈치채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잖아요.” 상기가 그녀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답변을 내놨다. “회원이 끝까지 돈을 내놓지 않으면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유인책’을 써야지. 그 사람이 남성이면 그놈을 홀릴 수 있는 미모의 여인을 붙일 거야. 그녀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게 해서 완전히 마음을 열도록 말이지. 만약 여성이면 나이 어린 회원인 척 접근해서 ‘언니, 동생’하며 친분을 쌓은 뒤 ‘같이 선물 리딩에 투자하자’고 권유할 거야. 이렇게 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열에 아홉은 넘어오게 돼 있어. 승부처에 등판할 유인책 역할은 우리 팀의 ‘홍일점’ 나은이가 맡아줘.” 상기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도준이는 이성조 교수와 김가영 비서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니까 두 사람의 어투를 구분하는 연습부터 시작해. 영철이 형은 회원들을 잘못된 투자로 이끄는 ‘제자들’ 역할인데…당장은 할 일이 없으니까 다른 팀원들을 방해하지만 않기를 바랄게. 오늘처럼 밤새 술 마시고 하루종일 뻗어있는 불상사는 없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럼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질문하시고, 이제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작업에 착수합시다.” 상기는 자리로 돌아와 불법으로 모은 개인정보로 카카오톡 계정 수십 개를 만들었다. 회원들을 불러모을 단체 카톡방도 하나하나 개설해 나갔다. 이번 작전을 A부터 Z까지 지휘해야 하는 상기로서는 손이 많이 가는 이런 일들을 정욱과 나은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요 며칠 두 사람의 허술한 행동거지를 지켜보니 도통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가 1차 사기인 ‘코인 강제청산’으로 확보하려는 목표액은 50억원이었다. 그런데 둘을 믿고 일을 맡겼다가는 예상치 못한 사고를 쳐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특히 거들먹거리기만 할뿐 뭔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는 정욱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저 놈은 맨날 여자나 밝히지 싸움 말고는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어…’ 상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저 허술한 녀석들과 돈을 나누지 않고 이곳 캄보디아를 떠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부터 상기 일당은 각자 맡은 역할을 분주하게 소화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몇 주 만에 경기도 남양주에 사는 40대 직장인 김민준, 전북 완주군의 50대 농민 최승현, 대전의 20대 대학생 이성진, 서울의 30대 워킹맘 민진영, 부산의 60대 은퇴자 박성갑 등 수십 명을 ‘파멸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나이가 가장 많은 영철은 텔레그램 소그룹 채팅방에서 이성조 교수의 수제자이자 방장 역할을 수행했다. 채팅방마다 김승대, 이호철, 최세훈, 김성갑 등 가명으로 나이, 성격, 사는 지역 등 세부 프로필을 다르게 설정했다. 작전 초기만 해도 그가 실수를 저질러 판을 깨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영철은 의외로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연기했다. 평생 뭐 하나에 제대로 몰두해 본 적 없던 그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했다. 작업을 완수하면 10억원 넘는 거액을 챙길 수 있다는 중학교 동창 도준의 감언이설을 기억하고 있어서다. 수많은 텔레그램 회원들이 그의 연기에 속아 ‘코인 강제청산’을 당했다. 대한민국 소시민들을 능숙하게 파멸로 몰아넣는 자신을 보며 ‘연기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회원들을 유인하기 위한 텔레그램 단체방에다가 이들에게서 거액을 뜯어낼 소그룹까지 더해져 그 수가 100개를 넘어섰다. 이쯤 되니 영철 혼자서 이성조 교수의 ‘제자들’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작전 총책인 상기는 소그룹 방장 역할을 할 ‘전문가’를 추가로 영입하고 싶었지만, 팀원이 늘어나면 그만큼 자신들의 행각이 외부로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작전 완료 뒤 각자에게 돌아갈 배당액도 줄어든다. 결국 상기는 고민 끝에 SNS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정욱과 나은에게 그를 돕게 했다. 영철이 소그룹 채팅방에 남긴 게시글들을 ‘복붙’해서 다른 방에서 활동하게 한 것이다. 정욱은 매사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크고 작은 문제를 끊임없이 일으켰다. 한 번은 영철의 텔레그램 문자를 복사한 뒤, 바꿔야 할 방장 이름을 그대로 두고 다른 채팅방에 전송하는 바람에 대형 사고가 터질 뻔했다. 다행히 옆에 있던 나은이 재빨리 이를 확인해 간신히 수습했지만, 이때부터 상기는 나사가 풀린 듯 뭔가 허술한 정욱이 건성으로 키보드 앞에 앉을 때마다 마음이 불안했다. 그래도 나은은 상대적으로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여성이어서인지 회원들과 정서적 유대감을 이끌어내야 하는 ‘유인책’ 역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코인거래 청산 사기 과정에서 대전의 만년 졸업생 이성진을 상대로 ‘여자친구’처럼 접근한 대학생 주다인이 대표적이었다. 성진이 다인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자 나은은 기지를 발휘해서 계획에 없던 로맨스 스캠 작업까지 시작했고, 결국 성진에게서 당초 목표치보다 2000만원을 더 뜯어낼 수 있었다. 상기는 나은의 활약을 지켜보며 ‘이제 사기도 머리만 좋아서는 성공할 수 없는 시대다. 철저한 메소드 연기가 뒷받침돼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기에게 가장 큰 골칫덩이는 친구 도준이었다. 나이가 같아서인지 언젠가부터 자신의 말을 잘 따르지 않았다. 모든 작전의 생명은 팀원 간 규율과 통제인데,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도준은 스스로를 규칙에서 벗어난 ‘열외’라고 여기는 듯했다. 때로는 상기의 지시를 받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오전 8시가 훨씬 넘어서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술로 떡이 된 도준이 휘청거리며 들어왔다. 상기가 그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냈다. “야! 지금이 몇 시야? 한국 시간으로 10시야, 10시. 주식시장이 열린 지 1시간이 넘었다고! 회원들에게 일일 주식 시황을 설명해야 할 이성조 교수가 이렇게 늦게 나오면 어떻해?” ‘2인자’ 도준이 쓰린 속을 부여잡고 컴퓨터를 켰다. 그가 올 때까지 30개가 넘는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하던 정욱과 나은이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지금부터는 도준이 나설 ‘이 교수의 시간’이기에 휴식 시간을 갖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도준은 상기의 지적에 크게 짜증을 내며 답했다. 뭔가 그에게 큰 불만을 가진 듯한 속내였다. “이제부터 일 할 테니까 그만 화내! 내가 오늘 마음이 무척 불편하니 아무도 날 건드리지 말라고!” “오케이, 김가영 비서님! 그럼 오늘도 즐겁게 작업해 주세요.” “야 임마! 내가 다시는 ‘김가영’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도준은 가뜩이나 숙취로 속이 쓰린 상황에서 상기가 자신의 ‘발작 버튼’인 ‘김가영 비서’ 역할을 언급하자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상기는 그 정도 반발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던 나은은 도준의 고성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 붙고 말았다.
  • ‘알리바바와 6마리 용’ 등장 결코 우연 아냐…지방 정부는 아무 조건도 걸지 않고 창업 생태계 제공

    ‘알리바바와 6마리 용’ 등장 결코 우연 아냐…지방 정부는 아무 조건도 걸지 않고 창업 생태계 제공

    최근 필자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서행아 박사, 한국투자파트너스(KIP) 김지수 베이징 본부장과 중국 저장성 과학기술 견학에 동행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중국 생활을 해온 필자 입장에서 특별한 기대감은 없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항저우(杭州)의 뜨거운 분위기는 필자의 고정 관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이 놀라운 경험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항저우: 중국 스타트업 수도의 ‘6마리 작은 용’알리바바 본사가 자리한 저장성 항저우는 ‘중국의 스타트업 수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으며, 그 중심에는 저장대학(浙江大学)이 강력한 원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항저우의 6마리 작은 용’(六隻小龍)이라 불리는 6개의 강력한 테크 기업이 출현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6마리 작은 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딥시크(DeepSeek): AI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기업 -유니트리(Unitree): 로봇 분야의 선두 주자 -딥 로보틱스(Deep Robotics): 로봇 강자 -게임 사이언스(Game Science): ‘검은신화: 오공’(Black Myth: Wukong) 게임으로 유명 -브레인코(BrainCo): 뉴럴 인터페이스(Neural Interface) 개발 -매니코어 테크(Manicore Tech): 3D 프린팅 및 공간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中 정부의 ‘팝콘 이론’️항저우가 알리바바라는 ‘공룡’과 ‘6마리 작은 용’을 배출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항저우의 고급 기술 인력 핵심 공급처는 저장대학과 알리바바입니다. 중국 5위 명문인 저장대학에서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력들이 끊임없이 창업하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알리바바에서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획득한 직원들이 스핀오프(Spin-off) 형태로 시장에 진입합니다. 알리바바와의 협력을 노리고 외부에서 찾아오는 과학기술 인력들이 끝이 없습니다. 특히 항저우가 배출한 고급 인력 대부분은 항저우에 남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저장성 과학기술청 옌촨지에(廖川杰) 처장에 의하면 “항저우에서 배출한 고급 인력 가운데 80%가 해외나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으로 나가지 않고 이곳 항저우에서 기회를 찾는다”고 전했습니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너도나도 서울로 향하는 우리나라와 대조적입니다. 필자는 항저우의 여러 기관, 특히 저장대를 둘러보며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항저우가 중국 스타트업의 본산이 된 배경에는 저장성과 항저우시 정부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저장성 원저우 출신인 리창(李强) 현 국무원 총리는 저장성 당서기 재직 시절 ‘팝콘 이론’이라는 독특한 스타트업 양성론을 펼쳤습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팝콘 튀기기’와 같다. 우리는 어떤 옥수수 알이 팝콘이 될지 알 수 없다. 무엇이 되라고 지정해서도 안 된다. 성과를 재촉하거나 기한을 부여해서도 안 된다. 정부는 그저 수많은 옥수수 알을 넣을 큰 통을 준비한 뒤 여기에 기름을 치고 열을 가해 팝콘을 튀길 압력을 높일 뿐이다. 어떤 특정 기업의 성공 여부와 달성 시기, 또는 지금 그 기업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 아니다. 정부는 그저 생태계를 제공하고 유인책을 제공할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수많은 옥수수 중 팝콘으로 폭발하는 놈이 하나씩 나오게 마련이다. 팝콘이 되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장을 제공하고 육성하면 결국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생겨나고 혁신을 이루며 성장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국가 주도 소수 엘리트 집단에게 자원을 몰아주는 방식을 취하는 것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과학기술계 역시 정부가 의도하는 방향으로만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실제로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불공정한 연구비가 중국의 과학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 자금이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아 2021년에는 중국 과학 기술 위원회(NSFC) 지원자의 약 16.5%만 보조금을 받았고, 2023년에는 이 수치가 12%로 감소했습니다. 국가 과학기술 전략이 명확해질수록 소수 과학자 그룹에 자원이 집중되는 현실에서 저장성과 항저우 정부의 방침은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회로 이어집니다.)
  • ‘알리바바와 6마리 용’ 등장 결코 우연 아냐…지방 정부는 아무 조건도 걸지 않고 창업 생태계 제공 [中 창업 수도 항저우를 가다]

    ‘알리바바와 6마리 용’ 등장 결코 우연 아냐…지방 정부는 아무 조건도 걸지 않고 창업 생태계 제공 [中 창업 수도 항저우를 가다]

    최근 필자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서행아 박사, 한국투자파트너스(KIP) 김지수 베이징 본부장과 중국 저장성 과학기술 견학에 동행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중국 생활을 해온 필자 입장에서 특별한 기대감은 없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항저우(杭州)의 뜨거운 분위기는 필자의 고정 관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이 놀라운 경험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항저우: 중국 스타트업 수도의 ‘6마리 작은 용’알리바바 본사가 자리한 저장성 항저우는 ‘중국의 스타트업 수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으며, 그 중심에는 저장대학(浙江大学)이 강력한 원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항저우의 6마리 작은 용’(六隻小龍)이라 불리는 6개의 강력한 테크 기업이 출현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6마리 작은 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딥시크(DeepSeek): AI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기업 -유니트리(Unitree): 로봇 분야의 선두 주자 -딥 로보틱스(Deep Robotics): 로봇 강자 -게임 사이언스(Game Science): ‘검은신화: 오공’(Black Myth: Wukong) 게임으로 유명 -브레인코(BrainCo): 뉴럴 인터페이스(Neural Interface) 개발 -매니코어 테크(Manicore Tech): 3D 프린팅 및 공간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中 정부의 ‘팝콘 이론’️항저우가 알리바바라는 ‘공룡’과 ‘6마리 작은 용’을 배출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항저우의 고급 기술 인력 핵심 공급처는 저장대학과 알리바바입니다. 중국 5위 명문인 저장대학에서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력들이 끊임없이 창업하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알리바바에서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획득한 직원들이 스핀오프(Spin-off) 형태로 시장에 진입합니다. 알리바바와의 협력을 노리고 외부 과학기술 인력도 물밀듯 몰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항저우가 배출한 고급 인력 대부분은 항저우에 남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저장성 과학기술청 옌촨지에(廖川杰) 처장에 의하면 “항저우에서 배출한 고급 인력 가운데 80%가 해외나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으로 나가지 않고 이곳 항저우에서 기회를 찾는다”고 전했습니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너도나도 서울로 향하는 우리나라와 대조적입니다. 필자는 항저우의 여러 기관, 특히 저장대를 둘러보며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항저우가 중국 스타트업의 본산이 된 배경에는 저장성과 항저우시 정부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저장성 원저우 출신인 리창(李强) 현 국무원 총리는 저장성 당서기 재직 시절 ‘팝콘 이론’이라는 독특한 스타트업 양성론을 펼쳤습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팝콘 튀기기’와 같다. 우리는 어떤 옥수수 알이 팝콘이 될지 알 수 없다. 무엇이 되라고 지정해서도 안 된다. 성과를 재촉하거나 기한을 부여해서도 안 된다. 정부는 그저 수많은 옥수수 알을 넣을 큰 통을 준비한 뒤 여기에 기름을 치고 열을 가해 팝콘을 튀길 압력을 높일 뿐이다. 어떤 특정 기업의 성공 여부와 달성 시기, 또는 지금 그 기업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 아니다. 정부는 그저 생태계를 제공하고 유인책을 제공할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수많은 옥수수 중 팝콘으로 폭발하는 놈이 하나씩 나오게 마련이다. 팝콘이 되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장을 제공하고 육성하면 결국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생겨나고 혁신을 이루며 성장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국가 주도 소수 엘리트 집단에게 자원을 몰아주는 방식을 취하는 것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과학기술계 역시 정부가 의도하는 방향으로만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실제로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불공정한 연구비가 중국의 과학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 자금이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아 2021년에는 중국 과학 기술 위원회(NSFC) 지원자의 약 16.5%만 보조금을 받았고, 2023년에는 이 수치가 12%로 감소했습니다. 국가 과학기술 전략이 명확해질수록 소수 과학자 그룹에 자원이 집중되는 현실에서 저장성과 항저우 정부의 방침은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회로 이어집니다.)
  • ‘코인 지옥’서 사라진 5억원…파산 위기 놓인 은퇴자, 친구를 끌어들이다 [파멸의 기획자들 #27~28]

    ‘코인 지옥’서 사라진 5억원…파산 위기 놓인 은퇴자, 친구를 끌어들이다 [파멸의 기획자들 #27~28]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이성조 교수가 이끄는 코인 선물 거래에서 몇 주 만에 4억원 넘는 돈을 번 성갑은 당당하게 친구 셋을 한우 고깃집으로 불러냈다. 성갑에게 이날은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과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지글거리는 불판 위의 소고기처럼, 퇴직한 친구들의 씁쓸한 한숨도 함께 구워지는 듯했다. “요즘 일이 없어서 마누라 눈치만 보고 산다”, “아파트 경비원 지원했다가 젊은 소장한테 갑질당했다” 등 퇴직 후 재취업의 문턱에서 겪는 수모와 절망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잿빛 얼굴이 성갑의 화려한 성공과 극명히 대비됐다. 성갑은 개선장군처럼 여유롭게 소고기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놈들아. 30년 넘게 몸으로 일했으면 됐지, 이 나이에도 육체노동일을 하고 싶냐?” 그의 목소리에서 이제껏 한 번도 과시하지 못했던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가장 키가 작은 친구가 고개를 숙이고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있냐. 자식들 대학 보내느라 노후 준비는 진작에 포기했어.” 머리카락이 몇 올 남지 않은 친구가 고기를 씹으며 물었다. “성갑아, 요즘 무슨 좋은 일 있나 봐? 로또라도 맞았어? 부산 최고 짠돌이가 웬일로 이렇게 비싼 소고기를 다 사주겠다고 불렀어?” 성갑은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자세히 알려고 해…나는 지금 이것저것 새로운 수익 모델을 구상하는 중이야.” 그는 의도적으로 친구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켜 우월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그의 성공에 대해 캐물을수록, 자신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소주를 홀짝이던 친구가 잔을 채우며 말했다. “성갑아, 좋은 거 있으면 우리도 좀 알려줘라. 요즘 죽을 맛이야. 마누라가 퇴직금 다 가져가서 소주 마실 돈도 없어. 정말로 이렇게는 못 살겠다. 제발 뭐라도 좀 알려줘.” 그의 목소리에는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으려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성갑이 빙긋 웃으며 친구들을 둘러봤다. 지금껏 기다려온 주인공의 시간이었다. “좋아, 그럼 내가 비법 하나 알려줄게. 대신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해. 특히 마누라들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이 ‘비밀 공유’는 그와 친구들 사이에 동질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성갑에게 은밀한 권위를 부여했다. 친구들이 맹세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성갑은 이성조 교수와 텔레그램 채팅방, 그리고 가상화폐 선물 거래의 ‘황금빛 세계’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말도 안 돼”, “그게 진짜로 돈이 돼?” 라며 회의적인 반응이 다수였다. 성갑은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았다.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IEKAF 거래소의 수익 내역과 계좌 잔고를 보여주었다. 화면에 찍힌 38만 달러(약 5억 3000만원)라는 숫자를 본 친구들은 “이게 진짜야?”,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경악했다. 그들의 눈빛이 질투와 놀라움, 그리고 희망으로 번뜩였다. 성갑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이제부터는 몸이 아닌 머리를 쓰며 살아야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차수를 바꿔가며 술자리가 이어졌다. 끝까지 질문 세례를 퍼부으며 따라붙은 친구 하나를 룸살롱으로 데려가서 재력을 과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새벽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성갑의 눈빛도 그 별처럼 권력욕으로 반짝였다. 그는 이제 30년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독한 노년을 맞이할 뻔한 친구들을 이끌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리더’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친구들을 구원해 줄 ‘영웅’이라고 확신했다. 사실은 그들 모두를 사기꾼들의 더 큰 덫으로 인도하는 미끼가 됐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오후 2시였다. 성갑은 새벽까지 술을 마셔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어제 친구들에게 영웅처럼 우월감을 뽐내던 환희는 다 사라졌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100만원 넘게 나간 영수증 꾸러미가 남아 있었다. 텔레그램 알림이 울렸다. 친목방 방장 김성갑 대표의 메시지였다. “오늘 좋은 투자 신호가 잡혔습니다. 거래에 참여하실 분들은 채팅방에 ‘333’을 눌러주세요.” 성갑은 전날 탕진한 술값을 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번 거래에 참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참여자는 성갑을 포함해 네 명뿐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김 대표의 다음 메시지가 올라왔다. “RIM 코인 매수하시기 바랍니다.” 성갑은 아직 IEKAF 거래소 앱을 다루는 데 서툴렀다. RIM이라는 코인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한참을 헤매다 어렵사리 RIM을 찾아 투자금의 20%, 100X 배율로 매수 주문을 넣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이었다. 성갑은 스마트폰을 식탁에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갈증이 해소될 때까지 물을 들이켜고 있는데, 텔레그램 알림이 폭포수처럼 울려대기 시작했다. ‘혹시 매도 신호를 놓쳤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화면을 켰다. 매도 신호가 아니었다.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망했어요.” “강제 청산인가요? 투자금이 모두 사라졌어요.” “대표님, 도와주세요.” 일련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절망을 쏟아냈다. 성갑은 지금의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망했다니? 강제 청산은 또 무슨 말이야?’ 일단 자신의 계좌를 확인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몇 분 전까지 찍혀 있던 38만 달러(약 5억 3000만원)가 깨끗이 사라지고, ‘-40,000 USDT’(-5600만원)가 적혀 있었다. 마이너스 통장도 아닌데 이런 거액의 적자가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몇 주간 누린 슈퍼리치의 환희가 한순간에 끔찍한 현실로 바뀐 순간이었다. 친목방 방장 김성갑 대표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오늘 손실은 두 말할 필요없이 제 잘못입니다. 저도 오늘 거래로 10억원 가까운 돈을 잃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미 여러 번의 손실 경험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척하며, 파멸의 덫을 놓는 메시지를 던졌다. “오늘 저 때문에 손실을 보신 분들이 원금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추가 투자금만 준비되면 일주일 안에 반드시 원금을 되찾도록 도와드릴게요. 새 투자금은 오늘 잃은 금액의 50%로 시작하겠습니다.” 돈을 날린 다른 회원들은 김 대표에게 아무 원한도 없는 듯 했다. 원금 회복만 된다면 별 문제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되레 그를 응원하며 최대한 빨리 투자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성갑은 선뜻 약속할 수 없었다. 조금 전 날아간 코인 잔고가 5억원이 넘었다. 그 돈을 되찾으려면 사라진 금액의 50%인 2억 5000만원 이상을 투입해야 하는데, 당장 그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코인에 투자하고 남겨놓은 퇴직금 7000만원을 모두 끌어와도 2억원 가까이 부족했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아내 정숙 명의로 된 아파트와 상가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숙이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여 2억원을 내줄리 만무했다. TV에서만 보던 ‘황혼이혼’이라는 단어가 성갑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꿈만 같던 지난날의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가족의 파멸을 예고하는 끔찍한 현실이 쓰나미가 돼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아내에게 알리고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혼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손톱을 씹으며 고민하고 있는데, 스마트폰 전화벨이 울렸다. 오늘 새벽 룸살롱까지 따라와 코인 선물 거래 방법을 이것저것 물어보던 친구 차영호였다. 마음이 심란해서 통화를 거부하려다가 고민 끝에 전화를 받았다. “어, 영호야. 지금 내가 좀 복잡한 일이 생겨서 그런데… 다음에 전화하면 안 될까?” 친구의 목소리는 어제와 달리 무척 들떠 있었다. “성갑아, 네가 어제 말한 그 코인 거래, 나도 할 수 있냐?” 순간, 성갑의 머릿속이 섬광처럼 맑아졌다. ‘이거다. 내가 부활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절망의 끝에서 만난 친구의 전화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이 친구들을 잘만 이용하면 2억원의 추가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은퇴자 친구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자신의 파산을 막으려 하는 또 다른 가해자로 변모하고 있었다.
  • ‘코인 청산’ 빚 갚으려 전세 보증금 손대…‘지옥의 길’로 찾아가는 워킹맘 [파멸의 기획자들 #25~26]

    ‘코인 청산’ 빚 갚으려 전세 보증금 손대…‘지옥의 길’로 찾아가는 워킹맘 [파멸의 기획자들 #25~26]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서울 금천구에 사는 진영은 주변 사람들에게 아들의 병원비가 모자란다고 거짓말을 해서 빌린 돈에다 이성조 교수가 개인적으로 제공한 자금까지 더해 어렵사리 텔레그램 예비클럽 가입비 5만 달러(약 7000만원)을 마련했다. 그녀는 선물 거래 투자 규모를 키워 마침내 ‘부의 추월차선’에 올라탔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다. 그런데 이 교수는 골드클럽(투자금 20만 달러 이상)과 실버클럽(15만 달러 이상) 회원만을 중심으로 거래를 진행하는 듯했다. 텔레그램 단체 채팅방에는 “이 교수가 진행한 거래로 큰 수익을 얻었다”는 이들 클럽 회원들의 감사 인사가 수시로 올라왔다. 진영은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더 빨리 투자금을 모아서 상위 클럽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이 불타 올랐다. ‘골드클럽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매일매일 거래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어. 그걸 계속 재투자하면 수익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 골드클럽에 들어가려면 20만 달러(2억 8000만원)이라는 금액이 필요했다. 5만 달러도 여기저기 거짓말을 해서 간신히 모았는데, 여기에 2억원 넘는 돈을 더해야 한다. 아직은 꿈만 같았다. 매일 새벽 그녀는 잠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꿈을 현실로 만들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 진영은 김가영 비서가 연결해 준 최세훈 대표의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한 여성 회원과 가까워졌다. 제주에 산다는 이슬기는 늘 그녀에게 ‘언니, 언니’ 하며 살갑게 대했다. 진영은 슬기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어느 날 슬기가 SNS로 “오늘 이성조 교수의 수제자 최 대표가 직접 거래를 리딩한다”고 귀띔했다. 진영은 마트 점장에게 잠시 병원에 다녀온다고 둘러대고는 지하 4층 물류 창고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최 대표의 지시에 따라 코인 매수 버튼을 눌렀다. 순간 그녀가 지정한 코인 가격이 급격하게 수직 하락했다. 난생 처음 겪는 ‘강제 청산’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리자 진영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가진 돈 7000만원을 모두 날렸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울었다. 지하 창고의 싸늘한 공기가 진영의 절규를 감싸 안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진영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런 극한 위기를 만들어 낸 최세훈 대표에게 SNS 메시지를 통해 분노를 폭발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방금 전 가진 돈을 모두 잃었어요. 거기에는 제 돈뿐만 아니라 지인들에게 빌린 돈, 심지어 이 교수님의 개인 자금까지 들어 있었어요. 이걸 어떻게 책임지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지금 최 대표에게 따져봐야 사라진 돈이 돌아올 리 없을 뿐더러, 오히려 원금을 되찾을 유일한 희망인 최 대표를 자극해서 산통을 깰 수도 있어.’ 진영은 스마트폰 문자 입력을 멈췄다. 일단 이성조 교수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고 답을 찾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곧바로 김가영 비서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비서님, 저 민진영이예요. 교수님께 급하게 연락을 하고 싶은데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김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몇 시간을 기다렸지만 퇴근할 때까지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퇴근길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니 그제서야 텔레그램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학우님. 제가 답이 너무 늦었어요. 학우님들에게 메시지가 워낙 많이 오거든요. 한 분 한 분을 상담해 드리다보니 이제야 민진영 학우님의 메시지에 대답할 수 있게 됐어요.” 진영은 비서의 느긋하고 기계적인 태도가 답답했다. 그래도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인내심을 갖고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지금 아주 급한 일이 생겼어요. 이성조 교수님과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의 메시지에 절박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러나 김 비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예의바르게 답변해 주었다. 진영의 고통에 큰 관심이 없다는 듯.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교수님은 저녁 강의를 준비 중이세요. 이 시간에는 교수님께서 워낙 많은 자료를 살펴보시기 때문에 저도 말 붙이기가 어렵습니다.” 진영은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그럼 언제쯤 교수님과 연락이 닿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연락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시면 교수님께 텔레그램 메시지를 남겨보세요. 저녁 강의가 끝나고 나서 학우님께 연락을 주실 거예요. 교수님은 학우님들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무슨 일인지 저에게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따가 교수님과 상의할 때 학우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해서요.” 결국 진영은 김 비서에게도 자신의 파산 사실을 고백해야 했다. ‘구원자’ 이성조 교수에게 매달리기 위해서라도 비서의 교묘한 통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진영은 김가영 비서가 소개해준 최세훈 대표의 선물 거래를 따라가다가 강제 청산을 당한 상황을 텔레그램 메시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퇴근 인파가 지하철역 입구를 정신없이 오갔다. 진영은 그들 속에서 홀로 멈춰 그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손가락은 떨렸고 휴대폰 화면도 눈물로 얼룩졌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놓친 단어가 없는지 몇 번이고 검토했다. 내용을 다 적고 나니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 지하 창고에서 강제 청산당했을 때의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다시 되살아나 혼란스러움이 더해졌다. 진영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텔레그램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면 이성조 교수가 자신의 메시지를 읽어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그녀의 바람을 비웃듯 평소와 다름없이 열정적으로 저녁 강의를 이어갈 뿐이었다. 9시 반이 조금 지나서 수업이 끝났다. 진영은 집에 돌아와 저녁도 먹지 않고 차가운 방 안에 누워 텔레그램 메시지 알림을 기다렸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처럼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다. 밤 10시가 넘어 마침내 이성조 교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학우님, 김가영 비서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 마음은 괜찮으신가요?” 누워 있던 진영은 이 교수의 메시지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의 메시지가 너무도 따뜻하고 다정했다. “교수님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원금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진영은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먹이며 답장했다. “학우님 걱정 마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저 역시 수많은 투자 실패를 경험했기에 지금 학우님이 느끼고 있는 고통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공유한다는 이 교수의 메시지에 진영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강제 청산 이후 몇 시간 동안 홀로 지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 교수가 도와준다면 사라진 원금도 찾을 수 있고, 그동안 꿈꾸던 ‘경제적 자유’라는 미래도 다시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우님, 일단 학우님의 자금 상황을 확인해야 합니다. 계좌 정보를 보내주시겠습니까?” 진영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IEKAF 거래소 앱을 열어 파산의 증거를 캡처해서 텔레그램 채팅방에 첨부했다. “학우님, 저에게 잠시 시간을 주세요.” 진영은 이 교수의 다음 메시지를 기다리며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15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진영에게는 15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이 교수의 짧은 침묵이 진영의 불안과 간절함을 극대화시켰다. 이 교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학우님의 자금 상황을 바탕으로 일주일 안에 원금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했어요. 당분간 제가 학우님과 함께 매일 오후 직접 선물 거래를 진행하겠습니다. 제 휴식 시간이 줄어들겠지만, 학우님이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 진영이 그의 대답이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메시지가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만 학우님의 원금을 되찾기 위한 1대1 리딩 거래를 위해서는 추가 투자금이 필요해요. 제가 생각하는 적정 액수는 10만 달러입니다.” 우리 돈으로 약 1억 4000만원이다. 예비클럽 가입비 5만 달러(7000만원)도 어렵게 만들었는데, 이제 그 두 배인 10만 달러가 추가로 필요하단다. 진영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성조 교수는 그녀의 절망적인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학우님, 10만 달러가 준비되면 언제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학우님을 위해서 선물 거래를 시작하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진영은 미래가 막막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1초라도 빨리 10만 달러를 준비하지 않으면, 가족을 위해 꿈꾸던 ‘방 세개짜리 아파트’의 미래도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터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빚을 갚으려면 더 큰 빚을 져야 한다’는 비논리적인 명제로 가득 찼다. ‘가만, 아파트 전세 계약서가 어디 있지?’ 진영은 지방 출장을 간 남편 송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래방에서 접대성 회식을 하던 정호는 늦은 시간 갑자기 걸려온 진영의 전화에 놀랐다. 그러나 시끄러운 술자리 때문에 상황 파악이 쉽지 않은 터라 ‘전세 계약서가 어디에 있냐’는 진영의 질문에 별다른 질문없이 장소를 알려줬다. 진영이 곧바로 계약서를 꺼내 내용을 살피고는 전세보증금 담보대출 상품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성이 마비된 그녀는 가족의 마지막 보루인 보증금까지 끌어안고 천천히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 로맨스 스캠의 덫 걸린 대학생, ‘연인의 구원자’ 자처하며 사채까지 손 뻗어 [파멸의 기획자들 #20~24]

    로맨스 스캠의 덫 걸린 대학생, ‘연인의 구원자’ 자처하며 사채까지 손 뻗어 [파멸의 기획자들 #20~24]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대전에 사는 ‘만년 졸업반’ 성진은 더 이상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가리지 않고 면접장을 전전하는 다른 친구들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고 확신했다. 길고 지루했던 취업 스트레스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 그간 해오던 모든 아르바이트도 단칼에 끊었다. 그는 지금 가상화폐 선물 거래와 이성조 교수의 ‘기적의 리딩’에 푹 빠져 있었다. 알바 일로 모은 1000만원의 종잣돈으로 매일 저녁 이 교수의 신호를 착실하게 따라갔고, 놀랍게도 일주일 만에 200만원이라는 수익을 거뒀다. 그의 가슴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벅차올랐다. ‘겨우 1000만원으로 한 달 800만원 수익이면…’ 성진의 머릿속은 이미 계산기 소리로 가득 찼다. 어지간한 회사의 임원도 부럽지 않은 액수였다. 임원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일하지만, 자신은 가끔씩 30분도 안 되는 시간만 스마트폰에 투자하면 됐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의 잿빛 얼굴을 보며 묘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벌기 위해 죽은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이들을 보며 성진은 그 속에서 홀로 살아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날 오후 손가락을 튕겨서 IEKAF 거래소 앱에서 200만원 넘는 수익금을 출금 신청했다. 다음 날 아침 10시쯤 휴대폰에 ‘입금 완료’ 알림이 떴다. 그런데 통장에 찍힌 금액은 예상했던 것보다 5만원 정도 더 많았다. 그 사이에 달러화 환율이 올라간 덕분이란다. 성진은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집 근처 은행 ATM으로 달려가 한 달 생활비를 뺀 나머지를 모두 5만원권으로 인출했다. 지폐 뭉치가 손에 쥐어지자, 지갑이 퉁퉁하게 부풀어 올랐다. 살면서 지갑이 접히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돈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빳빳한 신권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얼마 전까지 아르바이트했던 시내 중식당을 찾아갔다. “어서 와, 성진아! 잘 지내고 있지?” 사장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진은 가볍게 인사한 뒤 자신을 대신해 들어온 새 알바생에게 해삼동파육과 백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는 혼자 테이블에 앉아 한 번도 시켜본 적 없던 고급 메뉴를 즐겼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서빙하는 신참 알바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 자신을 보는 듯해 묘한 기분에 젖었다. ‘저 친구도 학비 벌려고 고생이 많구나. 조만간 이성조 교수를 소개해줘야겠네.’ 성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슈퍼리치’가 돼 대학생 선물 리딩을 이끌며 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자신의 모습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날 저녁, 성진의 가슴은 순식간에 차가운 돌덩이처럼 식었다. 이 교수가 텔레그램 채팅방을 4개의 팀으로 나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 것이다. 성진의 투자금으로는 가장 낮은 등급인 ‘예비클럽’(최소 5만 달러·약 7000만원)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희망으로 가득 찼던 가슴은 좌절감에 짓눌렸다. 그는 곧바로 김가영 비서에게 절박한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비서님, 안녕하세요. 교수님께서 투자금액으로 팀을 나누신다고 하셨는데, 저는 겨우 1000만원밖에 없어서 어느 클럽에도 갈 수 없어요. 게다가 아직 학생이라서 다른 곳에서 돈을 구하기도 힘듭니다. 이제 저 같은 사람은 교수님과 함께할 수 없는 건가요?” 그의 메시지에는 이 교수에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가득했다. 곧이어 김가영 비서에게 답장이 왔다. “학우님, 안녕하세요. 성진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저도 잘 알아요. 교수님과 제가 팀을 나눈 건 각 팀별로 투자금의 10배를 빠르게 확보할 맞춤형 전략을 짜기 위해서예요. 학우님들마다 경제적 사정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전략으로 다같이 경제적 자유에 도달하려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그녀가 교묘하게 이 교수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성진의 마음을 달랬다. “일단 학우님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확인해보고 교수님과 상의해서 대안을 마련할게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기다려주시겠어요?” 성진은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섰다. 어두운 골목길을 정처 없이 걸으며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편의점에서 습관처럼 생수 묶음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넣는 순간, 스마트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김가영 비서였다. “학우님,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조만간 방법을 찾아주시기로 하셨어요. 교수님은 학우님 한 분 한 분을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절대 성진님을 외면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어지는 메시지는 꺼져가던 성진의 희망을 다시 불타오르게 했다. “이와 별도로 몇 달 전 한 학우님의 제안으로 대학생들만을 위한 별도의 채팅방이 개설돼 있다는 건 알고 계셨나요? 함께 공부하고 정보도 교환하는 곳이죠. 교수님과 저도 그 채팅방에 들어가 있어요. 가끔 교수님께서 학생들을 위해 눈높이 투자 교육도 해주신답니다. 일단 학우님을 그 채팅방에 초대해 드릴게요.” ‘교수님이 나를 외면하지 않으셨구나!’ 성진은 그제야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제 사기꾼들이 파놓은 ‘대학생 전용방’이라는 더 깊고 은밀한 덫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성진은 김가영 비서가 보내준 텔레그램 링크를 타고 단체 체팅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15명 남짓한 대학생 회원들이 활발하게 지식을 나누는 ‘MZ들의 세상’이었다. 처음 며칠간 성진은 투명 인간처럼 조용히 상황을 지켜봤다. 이들의 전문적이고 수준 높은 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이성조 교수의 강의 시간에는 각자 수업 내용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와 함께 현 정부 경제 정책에 대한 찬반 의견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성진에게 이 공간은 ‘미래의 슈퍼리치’를 위한 인재 양성소처럼 느껴졌다. 국내 증시가 마감한 오후 3시 30분부터 이 교수의 저녁 강의가 시작되는 7시 30분까지 이곳 채팅방은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몇몇 회원은 그 시간을 활용해 개인적으로 선물 거래 투자 종목과 수익률을 공유했다. 성진은 점점 이 공간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여기서 열심히 배우면 언젠가 교수님 없이도 전업 투자자로 성공할 수 있겠어.’ 돈 걱정 없는 신나는 삶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 채팅방이야말로 ‘만년 졸업반’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자유인’이 되기 위한 최적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용기를 내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가끔 엉뚱한 의견을 내 지적을 받으면 얼굴이 벌개졌다. 하지만 가끔 설득력 있는 경제 예측 논리를 제시해 “오빠, 정말 대단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 ‘인정’은 취업 전선에서 거듭된 실패로 무너졌던 그의 자존심을 조금씩 회복시켜 주었다. 대학생 채팅방에 가입한 지 일주일쯤 지난 토요일 오후, 성진은 침대에서 넷플릭스를 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때 낯선 이름의 텔레그램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성진… 오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오빠라고 할게요. 저는 같은 대학생 채팅방에 있는 주다인이라고 해요.” 성진의 심장이 망치로 얻어맞은 듯 두근거렸다. 넷플릭스를 끄고 채팅방 목록을 확인해보니, 정말로 동명의 회원이 있었다. 프로필 사진 속 그녀는 눈부신 미인이었다. 서울 J대 앞에서 찍은 듯한 사진 속에서 그녀는 긴 생머리에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성진은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고 상대를 직접 보고 있는 듯한 긴장감을 품고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다인님. 주말 잘 지내고 계시죠. 무슨 일이신가요?” 지체없이 그녀의 답장이 돌아왔다. “실은… 어제 오빠가 이야기한 금리 변화 예측 가설에 크게 감명받았어요. 안 그래도 그 주제로 레포트를 써야 했는데, 그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빠가 이야기한 내용을 듣고 논리의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졌고 덕분에 오늘 아침 레포트를 제출할 수 있었어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연락했어요. 쉬고 계시는데 제가 방해가 됐나요?” 성진은 자신의 지식이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다. “아뇨, 방해가 되긴요. 제가 도움을 드렸다니 다행이네요. 오히려 이렇게 연락을 주셔서 제가 더 고마운데요.” 그녀는 성진을 ‘매너 좋은 오빠’라고 칭찬하며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SNS로 대화를 이어갔다. 성진은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J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실패했고 지금은 대전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어 외롭다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충남 천안 출신으로 올해 스물 두 살이라는 다인도 금융 투자에 관심이 많아 대학을 졸업하고 여의도에서 일하고 싶다고 전했다. 이날 무엇보다 성진의 마음을 강하게 흔든 건, 현재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 전 남친과 군 입대를 계기로 헤어졌는데, 다인은 그간 교제에서 갈등이 많아 꽤나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상형은 ‘지적인 남자’라고 강조했다. 그날 이후, 성진과 다인은 매일 저녁 이성조 교수의 강의가 시작될 때 서로 연락해서 참석 여부를 확인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강의가 끝난 뒤에도 1~2시간가량 SNS로 쉬지않고 소통했다. 성진은 밤새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지만, 다인은 그때마다 “아침 일찍 강의가 있다”며 남은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인에게서 성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오빠는 제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제일 똑똑한 것 같아요.” 성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취업 스트레스로 고립돼 있던 그에게, 다인의 ‘인정’과 ‘관심’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제 그는 슈퍼리치가 돼 ‘지적인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다인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날 밤 성진은 심장 안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천둥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빠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다인의 메시지가 그의 머릿속을 수백 번 맴돌았다. ‘그녀가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일까?’ 밤새도록 온갖 가능성을 고민했지만, 섣불리 고백했다가 어색한 사이가 될까 두려웠다. 취업 전선에서 실패를 거듭하며 그의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진 터라 다인과의 관계만큼은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다. 그래서 성진은 서점으로 향했다. 채팅방에서 투자와 경제 이야기만 나누다 보니 다인에게 다소 지루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고 우려해서다. 그녀의 이상형이라는 ‘지적인 남자’로 이미지 메이킹하고자 감성적인 에세이와 시집, 명언집을 닥치는 대로 샀다. 집에 돌아와 다인을 생각하며 여러 책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에 밑줄을 긋고 노트를 마련해 따로 적어놓았다. 그날 밤이었다. 10시를 훌쩍 넘겼지만 다인에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어제 그 메시지에 내가 너무 시큰둥하게 반응해서 기분이 상했나…’ 성진은 살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스마트폰을 뒤져 친구 집에서 찍은 고양이 사진을 하나 골라서 보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동물 사진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끌어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밤이 새도록 다인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성진은 전화기를 손에 쥔 채 그녀를 기다리다 지쳐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늦잠을 잔 성진은 눈을 뜨자마자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전화기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다인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텔레그램을 열었지만, 곧바로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사진 속 고양이가 오빠처럼 귀여워요. 혹시 직접 키우는 냥이인가요? 나중에 꼭 직접 보고 싶어요… 그런데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 어제 학교에서 조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거든요. 지금 병원에 있어요.” ‘병원’이라는 두 글자가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으며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인아, 어느 병원이야? 몸은 괜찮아? 내가 지금 갈게.” 성진에게 그녀를 돌봐야 한다는 구원자 콤플렉스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아니예요, 오빠. 사고를 당했을 땐 너무 아파서 경황이 없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경찰이 오토바이 뺑소니였다고 말해줬어요.” ‘뺑소니’라는 말에 성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자신이 대신 다쳤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보다, 혼자서 그 고통을 삼키고 있다는 게 그를 더 힘들게 했다. 이때 다인이 결정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근데 실은 지금 병원비가 모자라요. 교통사고 당했다고 하면 천안에 계신 부모님이 너무 걱정하실 것 같아서 연락 드릴수도 없고…” 다인도 성진과 함께 이성조 교수의 리딩방에 함께 있었다. 그녀 역시 이 교수의 리딩만 잘 따라갔으면 수백만원은 족히 벌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병원비가 필요하다는 다인의 말을 한 번쯤 의심해볼 법도 하지만 이미 그녀에게 푹 빠져 있던 성진은 이상한 점을 굳이 찾고싶지 않았다. 성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인에게 답장했다. “병원비는 내가 마련할게.” 그러자 다인은 교묘하게 이를 거절했다. “아니예요. 제가 있는 대학 동아리에 돈을 빌릴 수 있는 오빠가 있어요.” 다인이 ‘돈 많은 오빠’를 언급하자 성진은 죽기보다 싫은 굴욕을 느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경제적인 무능함을 보여선 안 된다는 허세와 질투심이 폭발했다. 그는 다인에게 병원비와 은행 계좌번호를 다그치듯 물었다. 몇 번을 거절하던 그녀는 결국 성진을 못 이기겠다는 듯 계좌번호를 알려줬다. “다인아, 그런데 예금주가 네 이름이 아니네?” “아, 이건 병원 사무장님 계좌예요. 그쪽으로 돈을 보내면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성진은 ‘사무장 계좌’, ‘할인 혜택’ 등 다소 터무니없는 이야기에도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이번 사고를 계기로 ‘돈 많은 오빠’와 더 가까워지는 걸 막고 싶었다. 성진은 병원 사무장이라는 남성의 계좌로 100만원을 송금했다. ‘만년 졸업생’인 성진에게 작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이 교수의 리딩 거래 한 번이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날 오후 다인에게서 퇴원했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말미에 ‘고마워요, 오빠가 최고예요’라는 글과 함께 키스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성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 작은 이모티콘 하나를 얻어내기 위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에게 100만원을 투척했다는 ‘불편한 진실’은 깨닫지 못한 채. 한술 더 떠 성진은 ‘고백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다가오는 토요일을 ‘디데이’로 정하고 준비에 나섰다. ‘일단 다인이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서울로 찾아가서 직접 만나자. 반지와 명품 가방을 선물하면 그녀도 나에게 마음을 열거야.’ 그의 머릿속은 코인 거래로 벌어들일 천문학적 수익과, 그 돈으로 산 선물을 받고 기뻐할 다인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지금 다인의 병원비 100만원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위험한 도박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고백을 준비해온 토요일 오후가 왔다. 성진은 다인에게 보낼 문자 메시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시를 쓰듯 정성스럽게 다듬었다. ‘반지와 명품 가방을 사줄 다정한 남자친구’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상상하자 그의 심장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빠, 방금 이성조 교수님이 대학생 단체방 방장 오빠한테 선물 거래 따라오겠냐고 제안하셨대요. 방장 오빠가 저도 동참하겠냐고 물어보네요. 오빠, 우리 같이 할까요?” ‘우리 같이’라는 다인의 말에 성진은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됐다. 두말할 것 없이 함께 하겠다고 답했다. 이번에 번 돈으로 그녀에게 줄 선물을 구입하기로 마음 먹었다. 10분쯤 뒤 이 교수가 직접 보낸 듯한 매수 신호가 다인을 통해 전달됐다. “대상: PALQ, 배율: 100X, 비중: 20%.” 성진은 흥분감에 취해서 망설임 없이 매수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PALQ 가격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손쓸 틈도 없이 그의 선물 계좌는 마이너스로 바뀌었다. “오빠! 큰일 났어요. 저 망한 것 같아요.” 성진은 다인의 메시지에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봤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인에게 온 다음 메시지가 충격적인 진실을 전했다. “오빠, 우리 방금 강제 청산 당했대요. 알고 보니까 이번 신호는 교수님 지시가 아니라 방장 오빠가 직접 리딩을 해보고 싶어서 거짓으로 낸 것이었대요. 조금 전 방장 오빠는 계정을 폐쇄하고 사라졌대요. 대학생 방에 있던 다른 언니도 청산당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성진은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1000만원을 순식간에 날렸다는 사실보다 다인에게 로맨틱하게 고백할 기회를 놓쳤다는 현실에 더 크게 낙담했다. ‘강제 청산’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기에,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인아, 잠깐만. 내가 다시 연락할게.” 성진은 다인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기고 김가영 비서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대학생방 방장이 이 교수 지시를 사칭해서 회원 몇 명과 함께 선물 거래를 하다가 모두 강제 청산당했다고 설명했다. 김 비서의 답장은 이미 준비된 각본처럼 유려했다. “큰일이네요. 작년에도 어떤 대학생이 그런 식으로 교수님 행세를 하다가 몇몇 학우에게 피해를 준 적이 있었는데, 올해도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실력이 영글지 않은 친구가 교수님의 명성을 빌려서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려다가 결국 사달이 났네요.” 그녀는 이번 사태의 책임이 ‘사칭범’에게 있음을 강조한 뒤 다음의 메시지를 전했다. “일단 교수님께 바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심장 질환이 있는 교수님께서 올해도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고 쓰러지실 수도 있어서요. 제가 상황을 봐서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이제 성진은 ‘스승’의 건강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일단 IEKAF 거래소 앱을 켰다. 그동안 모아둔 돈이 모두 사라지고 ‘-300 USDT’(약 –42만원)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강제 청산’이 무엇인지, 선물 계좌가 어떻게 마이너스가 되는지를 알아보려고 스마트폰을 검색하려는 순간, 다인에게 텔레그램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빠… 저 어떻게 해요… 방금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대요. 지금 급하게 천안으로 가는 중이예요.”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다인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이후 며칠 동안 텔레그램 메시지를 수도 없이 보냈지만, 그녀는 하나도 읽지 않았다. 성진은 어두운 방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전화기만 바라보는 폐인이 되어갔다. 그녀가 잠적한 지 4일째 되던 날, 마침내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오빠…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급하게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 후에도 의식이 없으셔서 계속 울면서 기다렸는데, 다행히 오늘 아침에 눈을 뜨셨어요.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니 오빠 생각이 밀려왔어요. 그 사이에 저한테 이렇게나 많이 연락을 주셨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요 며칠 제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성진은 다인이 자신에게 연락했다는 안도감과, 자신이 그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겠다는 환상 속에 빠져 있었다. 투자금이 녹아 없어진 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꿈은 어려움에 처한 다인을 도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것 뿐이었다. 다인의 연락을 받은 성진의 몸은 배터리에 전기가 100% 충전된 것처럼 활기로 넘쳤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자신이 다인의 사랑 덕분에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코인 선물 거래로 잃어버린 1000만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임무는 다인을 행복하게 지켜주는 것이었다. 성진은 자신감을 갖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는 네가 돌아와서 너무 기뻐. 아버님이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이야.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꼭 알려줘.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 그의 문장에는 다인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성진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오빠. 대부분 문제가 순조롭게 풀렸어요. 이제 아빠 수술비만 해결하면 돼요.” 성진은 ‘수술비’라는 한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느꼈다. “수술비? 얼마나 들어가는데?” 다인은 깊은 한숨을 쉬는 듯한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 “아빠가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셔서 1000만원 정도는 들어갈 것 같아요. 며칠 전 코인 거래에서 강제 청산만 당하지 않았어도 바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고모들이 다들 아빠 일을 모른 척해서 저도 무척 답답해요.” 아빠에게 보험이 없고 고모들까지 병원비 문제를 외면한다는 다인의 절망적 이야기는 성진의 ‘구원자 콤플렉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졌다. “다인아, 걱정 마. 오빠가 해결해 줄게.” 성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빠, 무슨 말이에요. 그러지 말아요. 저번에 제 병원비도 대신 내줬잖아요. 오빠도 투자금을 모두 잃어서 형편이 여의치 않을텐데요.” 다인의 걱정 어린 우려가 성진의 허세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다인 앞에서 결코 무능력한 남자로 보여선 안 됐다. “다인아, 오빠를 믿는다면 하루만 기다려줘.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어. 아버님 수술비도 네 투자금도 모두 해결한 테니 딱 하루만 기다려.” 성진은 다인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원룸의 불을 켰다. 며칠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다인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당장 수천만원의 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섰다. 옷장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다인을 만날 때 입으려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미리 사둔 가장 비싸고 세련된 옷이었다. 거울 속 성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는 굳게 닫혔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휴대폰을 검색해서 오래 전 저장해 둔 ‘김관조(우성캐피탈)’를 찾았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다인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마법처럼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장님, 전에 만났던 연수 친구 성진이라고 합니다. 연수가 대출 받으려고 사무실 찾아갔을 때 같이 만났던…” “아, 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관조는 어렴풋하게나마 성진을 기억하는 듯했다. 성진이 말을 이어갔다. “그때 사장님께서 저한테도 ‘돈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전화 드렸어요. 지금 돈이 필요해서요.” “예, 긴급 대출은 이자가 좀 쎈데 괜찮으시겠어요?” 성진은 이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 괜찮습니다. 금방 해결할 수 있어요. 당장 3000만원이 필요한데 가능할까요?” “그럼요. 사무실에 오셔서 몇 가지 정보만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택시로 20분 정도면 갈 수 있습니다.” 성진은 대출을 받아 다인이 부친의 수술비(1000만원)와 그녀가 청산당한 투자금(1000만원), 그리고 자신이 선물 거래로 날린 돈(1000만원)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생각이었다. 캐피탈 업체에서 빌린 3000만원이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이성조 교수의 리딩만 잘 따라가면 오래지않아 갚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소중한 여인 주다인이 실제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진은 스스로를 ‘다인의 위대한 구원자’라고 믿으며, 사채의 세계에도 발을 담그고 있었다.
  • ‘희망 회로’ 갇힌 농부, 코인으로 날린 원금 찾으려 여동생 속여 추가 대출 [파멸의 기획자들 #17~19]

    ‘희망 회로’ 갇힌 농부, 코인으로 날린 원금 찾으려 여동생 속여 추가 대출 [파멸의 기획자들 #17~19]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전라북도 완주군의 농부 승현의 눈앞이 캄캄했다.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IEKAF 계좌의 마이너스 잔고가 섬뜩한 괴물처럼 그를 집어삼킬 듯했다. 이성조 교수의 ‘수제자’라는 이호철 대표가 운영하던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진행한 선물 거래를 따라가다가 순식간에 강제 청산당했다. 단 10여 분의 거래로 우리 돈 2억원 가까운 잔고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고통이 승현을 짓눌렀다. 청산의 충격으로 손에 든 물컵을 쥔 채 오랫동안 굳어버렸다. 목은 타들어 갔지만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었다. 텅 빈 방이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 소리로 가득 찼다. 원금 7000만원이 불과 몇 주만에 3배로 불어나자 ‘나도 곧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단 하루 만에 이런 어이없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번 거래를 주도한 이호철 대표의 텔레그램 메시지가 승현의 뇌리를 맴돌았다. “투자에 대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지만... 제 경험상 일주일 정도면 손실을 만회할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원금 회복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다만 최소 5만 달러(약 7000만원)는 새로 입금하셔야 합니다.” 5만 달러? 그게 누구네 강아지 이름인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금액이었다. 당장 급한 건 다음 주에 농기계 거래 대금으로 지급해야 할 3000만원이었다. 이미 계약금으로 500만원을 지급했는데, 다음 주까지 잔금을 치르지 못하면 그 돈마저 떼인다. 맞춤형 농기계가 없으면 과수원의 나무들을 관리하기 어려워 애써 키운 과일들이 금세 썩어 버릴 터였다. 귀농에 남은 인생을 걸었는데, 그 꿈이 단 하루 만에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이러고 있을 수 없어. 당장 뭐라도 해야 해!” 승현은 절박한 심정으로 노트북을 켰다. 이자가 아무리 높아도 좋으니 대출을 알아봐야 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이번 사태의 시작인 ‘강제 청산’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꽂혔다. 이를 악물고 검색창에 관련 단어를 입력하자, 한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자사 시스템을 설명하는 정보가 나왔다. “선물 거래의 등락이 극심할 경우, 거래소는 투자자의 손실을 최소화하고자 강제 청산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텔레그램 단체방에서 이 대표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맞아. 이번 거래는 단순히 운이 없었을 뿐이야. 우연히 순간적인 시장 변동성이 나를 덮친 거야... 이 대표는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실력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사기를 친 건 아닐 거야.’ 상황을 이렇게 합리화하자 작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이어지는 글이 그의 눈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저희 거래소는 강제 청산을 통해 고객님의 계좌가 마이너스가 되는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거래소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좀 더 찾아보니 정상적인 거래소의 청산 시스템은 ‘마진콜’(Margin Call) 이후 담보금이 ‘제로(0)’가 되기 직전 자동으로 포지션을 종료한다고 돼 있었다. 거래소가 고객에게 빚을 지우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설명과 함께. 그런데도 계좌가 ‘마이너스’인 건 분명 이상했다. 승현은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텔레그램을 켜고 IEKAF 고객센터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매니저님, 오늘 PSV 코인 선물 거래를 하다가 극심한 가격 변동으로 청산을 당했습니다. 원래 청산 시스템은 마이너스 계좌를 방지하는 게 목적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제 계좌는 제로를 넘어서 마이너스 상태입니다. 이럴 수도 있나요?” 몇 분 뒤 거래소 매니저에게서 답변이 왔다. 매우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안타까운 소식에 유감을 표합니다. 선물 거래에서는 극심한 가격 변동으로 인해 청산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현재 고객님의 선물 계좌는 ‘-3500 USDT’(약 490만원)로 확인됩니다. 우선 이 금액부터 상환하셔야 합니다. 일주일 내로 상환하지 않으시면 신용도 하락 등 불이익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투자금 7000만원을 모두 잃은 것도 억울한데, 500만원 가까운 빚까지 덤으로 지고 신용불량자까지 될 수 있다고 하니 승현의 공포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마이너스 청산 계좌가 정말 존재할 수 있느냐’는 핵심적인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일단 그는 ‘알겠다’고 답한 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청산’ 관련 글을 찾아 읽어 내려갔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듯했다. 그러다가 서울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올린, 섬뜩한 제목의 글을 발견했다. “이성조 교수 사칭 불법 사기 거래 피해자를 구제해 드립니다.” 승현은 자신이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르던 이성조 교수의 이름이 박힌 링크를 홀린 듯 눌렀다. ‘법률사무소 블루’라는 곳에서 올린 네이버 블로그 글이었다.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사기꾼들이 텔레그램 채팅방 ‘부의 길’을 통해 소시민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코인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경고였다. “피해를 봤다면 지체 없이 연락하라”는 광고 문구가 그의 심장을 거칠게 두드렸다. 승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 글을 그대로 복사해 자신이 속한 채팅방에 공유했다. “혹시 이것 보신 분 계신가요? 누가 설명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진실이 눈앞에 펼쳐질까 두려웠다. 곧바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도 봤어요! 그렇지 않아도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었는데…”, “로펌 광고라서 그냥 무시했어요.”, “우리 교수님 이름을 사칭한 또 다른 사기꾼이 있는 것 같은데요?” 마지막 댓글이 승현의 마음에 희미한 안도감을 제공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채팅방에 있는 이성조 교수와 이호철 대표는 사기꾼이 아닐 테니까. 게다가 로펌이 언급한 채팅방 이름은 ‘부의 길’이었고, 지금 승현이 속한 곳은 ‘경제적 자유를 위한 초석’이었다. 그때였다. 텔레그램 알림음이 울리며 이 교수가 직접 해명 메시지를 올리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저도 몇 달 전부터 이런 글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제 운영 방식을 모방해서 사기를 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유명 로펌에 소송을 의뢰한 상태이며, 경찰과 공조해서 사기꾼 일당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관련 정보를 갖고 계시면 저나 김가영 비서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직접 나서서 상황을 설명하자, 회원들의 격려 댓글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럼요, 우리는 교수님을 끝까지 믿습니다!”, “교수님 힘내세요. 사기꾼 일당은 반드시 잡힐 겁니다!”, “어떻게 대한민국 인간문화재 이성조 교수님을 사칭할 수가 있죠?” 사람들의 격려와 위로 속에서 승현은 잠시나마 희망을 느꼈다. 모두가 교수를 믿고 있는데, 나 혼자만 유난스럽게 그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로펌 블로그의 섬뜩한 경고와 이 교수의 차분한 해명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그는 직접 두눈으로 진실을 확인하기로 했다. 글을 올린 법률사무소를 찾아가 변호사를 만나야만 이 의심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승현은 전주로 건너가서 서울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승현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희망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불안감이 더 커졌다. 용산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신길역으로 향했다. 스마트폰 지도 앱에 ‘법률사무소 블루’ 주소를 입력하니,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라고 나왔다. 마음이 급한 승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허름한 빌딩 3층에 ‘법률사무소 블루’ 간판이 걸려 있었다. 변호사를 만나기도 전부터 그의 기대는 바닥을 쳤다. ‘이런 곳에도 법률사무소가 있구나.’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문이 알아서 스르륵 열렸다. ‘요즘에는 자동 미닫이문도 있나’라고 의야해하던 찰나, 음식 배달 기사 한 명이 승현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밖으로 나갔다. ‘또 한 명의 불쌍한 인간이 이곳의 미끼 광고에 걸려들었구나’라고 비웃는 것 같은 눈빛으로. 조바심을 억누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짜장면과 군만두 냄새가 승현의 코를 강하게 찔렀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깨닫자 뒤늦게 허기가 밀려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변호사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외모와 기름기 도는 얼굴의 40대 남자가 짜장면을 먹다 말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인터넷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이성조 교수 사칭 사기 사건 때문에…” 남자는 서둘러 테이블 위 서류들을 한쪽으로 밀어 치우고, 물티슈를 꺼내 음식을 올려둔 먼지 낀 테이블 위를 쓱쓱 닦았다. 이 사무실은 사채업자 아지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낡고 지저분했다. 모든 것이 198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승현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책장에 가득 쌓인 낡은 법률 서적을 두루 살펴본 뒤에야, ‘여기가 정말 변호사 사무실이 맞긴 하구나’라고 체념에 가까운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종이컵에 재빠르게 믹스 커피를 타서 승현에게 건넸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법률사무소 블루의 김대유 사무장이라고 합니다. 우리 변호사님은 금융 거래, 사기 등 분야에서 상당히 유명하신 분입니다.” 승현은 사무장이 내민 명함을 받았다. 앞면에는 모든 글자가 한자로 쓰여 있었고, 뒷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승현은 김대유의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한 눈빛을 읽으며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무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이성조 교수 사건의 피해자신가요?” “솔직히 말하면 이게 피해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일단 변호사님 블로그에 적혀 있는 내용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일단 사무장님의 설명을 듣고 상담 여부를 결정하려고요.” 승현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SNS 광고를 보고 이 교수의 카카오톡 채팅방에 가입한 뒤 텔레그램으로 이동했고, 5만 달러(약 7000만원)로 코인 선물 거래 ‘예비클럽’에 가입해 잠시 큰 수익을 냈다가, 이 교수의 수제자라는 이호철 대표의 잘못된 리딩 판단으로 모든 것을 날리고 거액의 빚까지 지게 됐다고. 이 대표가 원금 회복을 위해 5만 달러를 추가로 입금하라고 요구해 고민하던 차 블루의 블로그 글을 보고 여기로 찾아왔다고. 사무장은 그의 이야기를 미동도 없이 듣더니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안타깝지만 사기를 당하신 게 맞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우리 변호사님은 이 분야 최고 전문가시니까요. 이런 종류의 사기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의 돈을 되찾아 드린 경험이 아주 많습니다. 일단 여기 서류부터 작성해 주세요.” 김 사무장의 설명 방식이 이 교수의 비서 김가영의 텔레그램 말투와 판박이였다. ‘두 사람이 동일 인물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순간 승현의 머릿속에 ‘내가 새로운 종류의 사기 사건에 휘말리는 건 아닐까’라는 싸늘한 생각이 스쳤다. 이 변호사의 사무실이야말로 ‘신길동에 똬리를 튼 또 다른 협작꾼들의 소굴’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말이죠… 변호사 수임료는 얼마나 되나요? 아까 말씀드렸듯 제가 5만 달러를 날려서 당장은 돈이 없거든요.” “수임료는 피해 금액에 따라 다르긴 한데요.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셨으니 가격은 충분히 조정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얼마인가요?” “500만원까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500만원’이라는 말을 듣자 승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제 이호철 대표와 함께한 선물 거래에서 강제 청산을 당했을 때처럼 불쾌하고 위협적인 느낌이었다. ‘이 사람들도 변호사와 사무장의 탈을 쓴 수임료 기계들이구나.’ 사무장의 주장대로 이 교수 일당이 자신에게 사기 행각을 벌인 게 맞다면, 그간 자신이 거래한 가상화폐 거래소와 코인이 모두 가짜여야 했다.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오고자 짐을 챙기면서 승현은 뭔가가 명쾌하게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이야말로 이성조 교수를 활용해서 변호사 수임료나 한탕 뜯어내려는 작자들이 틀림없다는 확신 말이다. ‘결국 가상화폐 강제 청산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 이 대표는 그저 나에게 더 많은 수익을 챙겨주려고 아무 대가도 없이 선물 거래를 리딩한 것 뿐이잖아. 극심한 가격 변동 때문에 본인 역시 수억원의 손실을 입었는데… 이럴 때일수록 회원끼리 서로 믿고 의지해야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현실을 합리화한 승현은 마음을 단단히 고쳐 먹었다. 이제 그에게 ‘주적’은 이 교수가 아니라 신길역의 이름 모를 변호사와 그 일당이었다. “일단 생각 좀 해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여기 더 있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한 승현이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사무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400만원까지 해 드릴게요!”라고 외쳤지만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 외침은 오히려 신길동 일당이 수임료로 서민들의 돈을 뜯어내려 했다는 증거로 들릴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그는 당장 다음 주에 지급해야 할 농기계 거래대금 3000만 원을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3000만원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결론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1억원을 구해서 다시 IEKAF에 밀어 넣어보자. 이호철 대표의 도움을 받아서 투자금만 되찾으면 거래대금 3000만원은 아주 쉽게 복구할 수 있잖아. 이 대표가 최대한 빨리 원금을 회복시켜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를 한 번 믿어보자.’ 승현은 곧바로 농협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연락해 집과 농장을 담보로 9000만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부산에 사는 여동생 지혜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과수원 사업이 잘돼서 대형 마트들과 납품 계약을 맺기로 했는데, 보증금으로 300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혜는 자신의 오빠가 진짜로 성공을 거둔 줄 알고 크게 기뻐하며, 주택 자금으로 모아둔 돈을 전부 보냈다. 그날 밤, 승현은 전날 강제 청산의 충격 때문에 못 이룬 잠까지 보상받듯 평소보다 더 평안한 밤을 보냈다. 자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제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이호철 대표의 도움으로 농기계 거래대금은 물론 대출금까지 다 갚을 수 있다. 3000만원을 돌려주면서 늘 마음에 걸리던 여동생 가족의 낡은 TV도 바꿔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그는 현실의 위기를 외면한 채 스스로 창조한 ‘희망 회로’ 속으로 더욱 깊숙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 몇 분 만에 사라진 1억원…‘밑빠진 독’에 돈 붓기 시작한 40대 가장 [파멸의 기획자들 #13~16]

    몇 분 만에 사라진 1억원…‘밑빠진 독’에 돈 붓기 시작한 40대 가장 [파멸의 기획자들 #13~16]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 해 질 녘 노을이 창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민준은 책상에 앉아 딸 지영의 증명사진을 바라봤다. ‘딸에게 이 세상의 모든 문을 열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간의 세월을 버텨왔다. 딸을 위해 모아둔 2100만원과 은행 대출로 마련한 3500만원, 그리고 이성조 교수가 건네준 ‘개인 지원금’ 1만 달러(약 1400만원)까지. 이걸 모두 더해서 어렵사리 5만 달러(7000만원)를 채웠고 텔레그램 ‘예비클럽’에 가입했다. 그는 자신이 마침내 가족을 위한 ‘성배’(聖杯)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이제 그는 딸의 등록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지영이 원하는 국내 사립대학은 물론이고 하버드와 스탠퍼드, 옥스퍼드 같은 세계적 명문대도 얼마든지 보낼 수 있다는 환상이 차올랐다. ‘이참에 지영이가 진학하는 나라로 함께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까.’ 그의 머릿속이 동화 같은 상상으로 가득찼다. 지영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 그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뉴욕의 한 노천 카페에 앉아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열고 코인 선물 거래를 즐길 것이다. 이성조 교수처럼 말이다. 하지만 달콤한 꿈도 잠시, 현실은 곧바로 그를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수 일이 지나도 ‘예비클럽’에서는 아무 거래도 진행되지 않았다. ‘골드클럽’과 ‘실버클럽’ 회원들의 채팅방에는 날마다 막대한 수익을 인증하는 사진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나만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짓눌렀다. 참다못해 김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교수님의 도움으로 예비클럽에 들어간 김민준입니다. 교수님께서 리딩을 전혀 안 하고 계셔서요. 예비클럽은 언제부터 거래를 시작하나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김 비서에게 답장이 왔다. “이 교수님이 인정하는 우등생 김민준 학우님, 다른 학우님들을 상담하느라 답변이 늦었어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요즘 교수님은 골드클럽과 실버클럽 회원들을 중심으로 거래를 진행하고 계세요. 저도 교수님 덕분에 어제 골드클럽에서 큰 수익을 냈답니다.” 김 비서가 전날 코인 선물 거래로 얻었다는 수익 인증 사진을 보여줬다. 수익금은 1만 USDT(1400만원)였다. 민준은 부러움을 넘어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민준은 ‘우등생’이라는 말이 고마우면서도, 다른 이들이 막대한 수익을 내는 동안 자신을 포함한 예비클럽 회원들에게 이 교수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화가 났다. “비서님, 이제 교수님이 예비클럽과는 거래를 안 하실 생각인가요? 예전에 안내해주신 내용을 보면 모든 클럽 멤버들이 리딩 거래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이 교수가 예비클럽 회원을 홀대하는 것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채팅방에서 쫓겨날 수도 있기에 최대한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이죠. 학우님, 교수님은 예비클럽에도 선물 거래 기회를 주실 거예요. 지금은 적절한 타이밍을 보고 계시는 중이니 너무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다소나마 안도감을 느낀 민준은 담배를 피우며 딸이 미국 아이비리그 입학식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얼마 안 있어 김 비서가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회원님, 방금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교수님께 다시 여쭤봤어요. 교수님께서는 본인이 개인 자금까지 빌려주며 예비클럽 회원님들을 모았기 때문에 다른 클럽보다 더 큰 애정을 갖고 계세요. 그래서 예비클럽 회원님들이 더 빨리 브론즈, 실버, 그리고 골드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계십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세요.” ‘애정’, ‘특별한’ 이라는 단어가 그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이 교수가 진정으로 우리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민준은 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언젠가 기자들이 이 교수의 진가를 알아보고 회원들을 인터뷰한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나서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의 도움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돼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회원님, 교수님께서 새 전략을 세울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 어려우시죠? 다른 클럽 분들은 이미 크게 수익을 내고 있어서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도 드실 테고요. 그래서 따로 도움을 드릴까 해요. 전문가 한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민준의 귀가 솔깃해졌다. 김 비서가 대화를 이어갔다. “김승대 대표는 이성조 교수님의 수제자 같은 분이예요. 이분도 회원들을 데리고 개별적으로 선물 거래를 리딩하고 계시죠. 김 대표에게 미리 이야기해 뒀으니 원하시면 이 채팅방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민준은 김 비서가 보내준 링크를 타고 새로운 단체방에 들어갔다. 15명 정도 되는 회원들이 이미 오랜 기간 알고 지낸 듯 활발히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분위기를 끊지 않으려고 몇 분간 ‘눈팅’을 이어가다가 잠시 정적이 흐르는 틈을 타 가입 인사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김민준입니다. 김가영 비서의 소개로 들어 왔습니다. 많이 배울 수 있도록 좋은 가르침 부탁 드립니다.” 그가 가입 인사를 남기자 많은 이들이 이모티콘으로 환영 메시지를 보냈다. 조금 있다가 채팅방 방장인 김승대 대표가 등장했다. “민준님 반갑습니다. 가영이가 어떻게 소개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너무도 부족한 게 많은 사람입니다. 운 좋게 이성조 교수님을 알게 돼 큰 부를 일궜지만 여전히 제 능력은 교수님에 비하면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수준에 불과하죠. 그래도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신다면 민준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메시지를 남기자 다른 회원들이 ‘대표님 최고’라며 감사의 글과 이모티콘을 남겼다. 나중에 김 비서에게 들어보니 김승대는 이 교수의 선물 거래 리딩 덕분에 큰 돈을 벌었고 이걸 종잣돈 삼아 강원도에 프랜차이즈 카페를 여러 개 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회원들이 그를 ‘대표’로 부르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2~3일에 한 번 정도 선물 거래 기회를 포착해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저녁 매매 신호가 잡혔습니다. 수익률이 높진 않을 것 같네요. 그래도 용돈 번다고 생각하고 따라오실 분 있을까요?” 그가 거래를 제안하면 보통 5~6명 정도 회원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김 대표는 주로 밤 10시 반쯤 거래를 시도했다. 이성조 교수와 사전에 조율을 했는지 두 사람의 리딩 시간은 겹치지 않았다. 이 교수의 수제자답게 그 역시 성과가 탁월했다. 하루 거래에서 20~30%를 거뜬히 챙기곤 했다. 이 교수와 마찬가지로 단 한 번도 손실을 내지 않았다. 그래도 민준은 김 대표를 100% 신뢰할 수 없었다. 그는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이었다. 이 교수처럼 24시간 투자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김 대표의 리딩을 따랐다가 자칫 손실을 기록하는 ‘첫 사례’에 동참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다만 그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채팅방 회원들은 하나같이 매너가 좋았다. 누군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다들 웃음으로 넘기며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애썼다. 힘든 일을 겪으면 서로 위로하며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등 인간적인 정도 돈독했다. 민준이 김 대표의 텔레그램 채팅방에 들어간 지 일주일쯤 지난 금요일 오전이었다. 한 회원에게서 텔레그램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서영이라고 해요. 김승대 대표님 텔레그램 방에 같이 있는데 잘 모르셨죠?” “아, 안녕하세요. 서영님을 왜 모르겠어요. 늘 화기애애한 대화로 단체방 분위기를 띄우시잖아요. 우리 방에서 서영님 모르면 간첩이죠.” “아 다행이다. 워낙 말이 없으셔서 저를 모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오늘 텔레그램 회원 목록에서 프로필 사진을 보고 제 오빠 또래이신 것 같아서 감히 용기를 내 연락드렸어요. 마음에 드는 분이 있으면 반드시 통성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요. 민준님께 사기 치려고 연락드린 것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 하하하!” 반나절 가까이 텔레그램으로 대화를 나누며 민준은 그녀와 서로 통하는 게 많다고 느꼈다. 30대 후반의 독신녀 서영이 보여준 일상 사진들을 보며 참으로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에 대한 끌림과 함께 고독한 세상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동시에 샘솟았다. 퇴근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료들과 회식을 하던 때였다. 김가영 비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성조 교수님이 예비클럽에서 첫 번째 거래를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민준은 밖으로 나와 식당 옆 어두운 골목에 몸을 숨기고 IEKAF 거래소 앱을 열었다. “거래품목: DAINT, 거래방향: 롱오픈, 선택배수: 100X, 투자비중: 20%.” 리딩 메시지를 확인하고 재빠르게 매수 주문을 넣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차트를 보며 담배를 피웠다. 10분쯤 지나자 등락을 거듭하던 가격이 상승 추세로 접어들었다. 이 교수가 이를 놓치지 않고 매도 지시를 내렸다. 수익률 35%, 수익금 3500 USDT! 1만 USDT(1400만원)를 넣어서 불과 10분 만에 우리돈 500만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 예비클럽에 가입하려고 투자 규모를 5만 달러(7000만원)로 늘린 덕분에 이에 비례해서 한 번 거래로 얻는 수익 규모도 커진 것이다. 500만원이면 딸아이 한 학기 대학 등록금이다. 5만원짜리 장거리 대리운전 콜을 100번은 잡아야 벌 수 있는 돈을, 저녁 회식 자리에서 잠깐 나와 담배를 피우며 벌었다. 갑자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쾌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진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식당으로 들어가려는데, 낮에 대화했던 서영에게서 텔레그램 메시지가 도착했다. “민준님, 조금 있다가 김승대 대표님도 리딩을 하겠다고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함께 하실래요?” 민준은 지금 기분이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서영이 자신을 특별히 챙겨주는 것 같아서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당연히 함께 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회식 중인 식당으로 돌아가 상사에게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양해를 구했다. 스마트폰으로 김승대 대표의 텔레그램 채팅방을 들여다보며 세 블록쯤 떨어진 호프집을 찾아갔다. 안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생맥주 500㏄ 한 잔과 마른안주를 주문한 뒤 김 대표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조금 전 이성조 교수의 리딩으로 얻은 수익 3500 USDT(약 490만원)가 더해져 투자금 규모가 더 커져 있었다. “DJP 현재 가격으로 매수하세요.” 이 교수가 보낸 리딩 메시지를 확인하자 민준은 재빨리 매수 버튼을 눌렀고, 잠시 뒤 새로운 신호에 맞춰 매도 버튼도 터치했다. 수익금은 3200 USDT(450만원)이었다. 앞서 이 교수가 이끈 거래로 500만원을 번 것을 더하면 하루 저녁에 1000만원 가까이 챙긴 것이다. 월급의 세 배나 되는 돈을 1시간도 안 돼 긁어 모았다. “으하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화 속 마약에 중독돼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주인공의 그것과 같았다. 그는 이미 ‘슈퍼리치’가 된 기분이었다. 민준은 맥줏집에서 나와 주변에서 가장 비싸 보이는 일식집을 찾아갔다. 거기서 최고급 초밥 세트 두 개를 사고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타지 않은 모범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검은 색 고급 세단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 본 아내가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다음 주에 특별 보너스가 나온다고 해서 기분 한 번 내봤지!”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선물 거래로 큰 돈을 번 데다가, 특별한 친구 서영까지 알게 돼 정말 기분좋은 밤이었다. 토요일 아침, 민준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이제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 터라 아침이 더 평안했다. 아내와 딸은 집에 없었다. 아내는 마트에, 딸은 학원에 간 것 같았다.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을 들어 IEKAF 거래소 앱을 켰다. 어제 단 두 번의 거래로 얻은 수익을 보니 배가 고프지 않았다.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돈 때문에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경제적 자유인’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냉장고를 열어서 물을 꺼냈다. 식탁에 앉아서 어제 제대로 보지 못한 이 교수의 강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은 인생의 진리처럼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부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느꼈다. 이때 서영에게서 텔레그램 메시지가 도착했다. “민준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어제 처음 대화를 나눴는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었어요. 서로 마음이 잘 통해서 그런지 살짝 설레기도 하고요.” 민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가 새로운 정보를 알렸다. “방금 김 대표님에게 메시지를 받았는데요. 오늘 오후에 선물 거래를 하실 거래요. 부자가 되신 뒤로는 ‘워라밸’을 챙기시느라 주말 거래는 거의 안 하시는데, 오늘 아침에 꽤 좋은 신호가 잡혔다고 하네요. 민준님한테 미리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그녀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도 김 대표가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면 수익이 크게 불어날 테니까. 그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사실 저도 서영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김 대표 리딩에 참가할 수 있게 정보를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채팅방을 계속 지켜 보고 있을게요.” 오후 4시가 되자 김 대표가 텔레그램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자, 오늘은 특별히 주말 거래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오전에 정말 좋은 신호를 포착했거든요. 따라오실 분은 숫자 ‘111’을 남겨주세요.” 민준과 서영을 포함해서 네 명이 김 대표의 메시지에 답했다. 30분 정도 지나자 김 대표가 매수 지시를 내렸다. “자, 이제 들어갑니다. DJP를 현재 가격으로 매수하세요!” 민준이 환희에 찬 눈으로 매수 버튼을 눌렀다. 그의 눈에는 앞으로 얻게 될 천문학적인 수익금과, 그 옆에 서 있을 서영의 웃음으로 가득했다. 지금 막 자신의 모든 돈과 희망을 걸고 파멸의 길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민준은 어제의 기적 같은 결과를 떠올리며 별다른 의심 없이 DJP를 지정했다. 레버리지 100배, 투자비중 20%로 설정하고 매수 버튼을 눌렀다. 가격이 출렁거리더니 이내 상승하기 시작했다. 민준은 ‘오늘은 40% 수익률을 넘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웃음을 머금고 차트를 바라봤다. 이번 거래를 성공시키면 서영을 따로 불러내 감사의 표시를 전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DJP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던 터라 민준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김승조 대표가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 것으로 믿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김 대표는 수 분이 지나도 별다른 대응책을 내놓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조금 있다가 텔레그램 채팅창에 서영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망했어요. 투자금이 전부 날아갔어요.” 처음 겪는 상황에 민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민준의 계좌에 6만 USDT(약 8400만원) 정도 투자금이 있었는데, 지금 계좌에 보이는 숫자는 ‘-9500’(-1330만원)이었다. 100배 레버리지의 위력이 정말로 무서웠다. 단 몇 분 만에 1억원 가까운 돈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선물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큰일났다’, ‘어떻게 하죠’ 같은 메시지를 남기며 우왕좌왕했다. 누군가가 ‘이성조 교수님께 연락해보겠다’고도 했다. 민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곧 부자가 될 것이라는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었는데, 지금은 투자금이 한 푼도 남지 않고 모두 녹아 내려 버렸다. 심지어 1000만원 넘는 빚까지 생겼다. 김 대표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 IEKAF 거래소는 가상화폐 가격이 급락하면 추가 손실을 방지하고자 해당 종목 거래를 강제 청산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방금 DJP의 시세 변동으로 우리도 예기치않게 강제 청산을 당한 거고요. 이번 손실은 변명의 여지 없이 100% 제 잘못입니다. 저 역시 투자금이 큰 만큼 손실 규모가 상당합니다.” 채팅방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김 대표가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저는 코인 선물 투자 과정에서 비슷한 일을 여러 차례 겪어봤고 그때마다 전략을 정비해서 원금을 회복하곤 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고요. 여러분들이 손실을 만회할 수 있도록 결자해지 심정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민준의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가려는데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던 딸 지영과 마주쳤다. 평소와 달리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준을 보고 지영이 물었다.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아무 일도 아니야. 들어가서 쉬어. 아빠 바람 좀 쐬고 올게.” 밖으로 나온 민준은 담배를 물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 채팅방에 들어올 때부터 ‘투자 결과는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라는 방장 김 대표의 말을 수도 없이 들었던 터라 이번 사태의 책임을 그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김 대표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남겼다. 몇 분 뒤 그에게 답이 왔다. “오늘 손실에 대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일단 투자금을 되찾으려면 추가 투자금이 필요해요. 그 돈이 마련되면 선물 거래를 재개해서 원래 투자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제 경험상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원금을 회복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고요.” 일주일이면 된다는 말에 안도감이 들었지만, 문제는 잃어버린 투자금을 되찾기 위한 ‘추가 투자금’이었다. “대표님, 그러면 새 투자금은 얼마나 필요할까요?” “일주일 안에 원금을 되찾으려면 적어도 10만 달러 정도는 있어야겠죠.” 민준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10만 달러면 우리 돈 1억 4000만원이다. 2년간 대리운전으로 모은 2100만원을 종잣돈삼아 가상화폐 거래를 시작해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8000만원 넘는 액수가 계좌에 담겨 있었는데, 이게 한순간에 없어져 버렸다. 이걸 되찾으려면 1억 5000만원 가까운 돈을 새로 입금하라는 얘기다.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는 줄담배를 피우며 곰곰 생각해봤다. ‘여기서 투자를 멈추면 예비클럽 가입비 5만 달러(7000만원)를 고스란히 날리게 돼. 내 돈 2100만원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예비클럽에 가입하려고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 3500만원과 이성조 교수에게 빌린 1만 달러 등 5000만원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 하…’ 야간 대리운전의 고통이 민준을 강하게 짓눌렀다. 이 돈을 갚으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최근 권리금을 받고 가게를 넘긴 친구 신형철이 생각났다.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형철아, 나 정말로 급한 일이 생겼어. 이유는 묻지 말고 돈 좀 빌려줬으면 좋겠네. 제발 부탁이야.” 친구는 무슨 일이냐고 묻다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준의 통곡 소리에 크게 놀랐다. 형철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민준아, 식당 사업 준비하려고 들고 있는 시재가 5000만원쯤 있어. 그거면 될까? 그 돈으로 식재료와 조리 도구를 구입해야 하거든. 오래는 못 빌려줘. 한 달 안에 돌려줄 수 있겠지?” 민준은 ‘일주일이면 원금을 되찾을 수 있다’는 김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형철에게 ‘2주일 내로 반드시 돌려주겠다’고 약속에 약속을 거듭하니 5000만원이 들어왔다. 민준은 곧바로 IEKAF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이 돈을 USDT로 환전했다. 대략 3만 6000 USDT였다. 허공으로 날아간 5만 달러를 복구할 수 있는 디딤돌이 마련됐다는 사실에 희망이 느껴졌다. 상대방을 패닉 상태로 빠뜨려 이성을 마비시킨 뒤 끊임없이 계좌로 돈을 밀어 넣게 만드는 ‘파멸 기획자들’의 작전에 완벽하게 걸려든 것이다.
  • ‘코인 지옥’서 사라진 5억원…파산 위기 놓인 은퇴자, 친구를 끌어들이다 [파멸의 기획자들 #28]

    ‘코인 지옥’서 사라진 5억원…파산 위기 놓인 은퇴자, 친구를 끌어들이다 [파멸의 기획자들 #28]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오후 2시였다. 성갑은 새벽까지 술을 마셔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어제 친구들에게 영웅처럼 우월감을 뽐내던 환희는 다 사라졌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100만원 넘게 나간 영수증 꾸러미가 남아 있었다. 텔레그램 알림이 울렸다. 친목방 방장 김성갑 대표의 메시지였다. “오늘 좋은 투자 신호가 잡혔습니다. 거래에 참여하실 분들은 채팅방에 ‘333’을 눌러주세요.” 성갑은 전날 탕진한 술값을 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번 거래에 참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참여자는 성갑을 포함해 네 명뿐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김 대표의 다음 메시지가 올라왔다. “RIM 코인 매수하시기 바랍니다.” 성갑은 아직 IEKAF 거래소 앱을 다루는 데 서툴렀다. RIM이라는 코인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한참을 헤매다 어렵사리 RIM을 찾아 투자금의 20%, 100X 배율로 매수 주문을 넣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이었다. 성갑은 스마트폰을 식탁에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갈증이 해소될 때까지 물을 들이켜고 있는데, 텔레그램 알림이 폭포수처럼 울려대기 시작했다. ‘혹시 매도 신호를 놓쳤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화면을 켰다. 매도 신호가 아니었다.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망했어요.” “강제 청산인가요? 투자금이 모두 사라졌어요.” “대표님, 도와주세요.” 일련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절망을 쏟아냈다. 성갑은 지금의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망했다니? 강제 청산은 또 무슨 말이야?’ 일단 자신의 계좌를 확인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몇 분 전까지 찍혀 있던 38만 달러(약 5억 3000만원)가 깨끗이 사라지고, ‘-40,000 USDT’(-5600만원)가 적혀 있었다. 마이너스 통장도 아닌데 이런 거액의 적자가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몇 주간 누린 슈퍼리치의 환희가 한순간에 끔찍한 현실로 바뀐 순간이었다. 친목방 방장 김성갑 대표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오늘 손실은 두 말할 필요없이 제 잘못입니다. 저도 오늘 거래로 10억원 가까운 돈을 잃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미 여러 번의 손실 경험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척하며, 파멸의 덫을 놓는 메시지를 던졌다. “오늘 저 때문에 손실을 보신 분들이 원금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추가 투자금만 준비되면 일주일 안에 반드시 원금을 되찾도록 도와드릴게요. 새 투자금은 오늘 잃은 금액의 50%로 시작하겠습니다.” 돈을 날린 다른 회원들은 김 대표에게 아무 원한도 없는 듯 했다. 원금 회복만 된다면 별 문제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되레 그를 응원하며 최대한 빨리 투자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성갑은 선뜻 약속할 수 없었다. 조금 전 날아간 코인 잔고가 5억원이 넘었다. 그 돈을 되찾으려면 사라진 금액의 50%인 2억 5000만원 이상을 투입해야 하는데, 당장 그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코인에 투자하고 남겨놓은 퇴직금 7000만원을 모두 끌어와도 2억원 가까이 부족했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아내 정숙 명의로 된 아파트와 상가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숙이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여 2억원을 내줄리 만무했다. TV에서만 보던 ‘황혼이혼’이라는 단어가 성갑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꿈만 같던 지난날의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가족의 파멸을 예고하는 끔찍한 현실이 쓰나미가 돼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아내에게 알리고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혼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손톱을 씹으며 고민하고 있는데, 스마트폰 전화벨이 울렸다. 오늘 새벽 룸살롱까지 따라와 코인 선물 거래 방법을 이것저것 물어보던 친구 차영호였다. 마음이 심란해서 통화를 거부하려다가 고민 끝에 전화를 받았다. “어, 영호야. 지금 내가 좀 복잡한 일이 생겨서 그런데… 다음에 전화하면 안 될까?” 친구의 목소리는 어제와 달리 무척 들떠 있었다. “성갑아, 네가 어제 말한 그 코인 거래, 나도 할 수 있냐?” 순간, 성갑의 머릿속이 섬광처럼 맑아졌다. ‘이거다. 내가 부활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절망의 끝에서 만난 친구의 전화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이 친구들을 잘만 이용하면 2억원의 추가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은퇴자 친구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자신의 파산을 막으려 하는 또 다른 가해자로 변모하고 있었다. (2부 끝·29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 ‘코인 벼락부자’ 된 은퇴자, ‘재취업 절망’ 친구들까지 덫으로 인도하다 [파멸의 기획자들 #27]

    ‘코인 벼락부자’ 된 은퇴자, ‘재취업 절망’ 친구들까지 덫으로 인도하다 [파멸의 기획자들 #27]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이성조 교수가 이끄는 코인 선물 거래에서 몇 주 만에 4억원 넘는 돈을 번 성갑은 당당하게 친구 셋을 한우 고깃집으로 불러냈다. 성갑에게 이날은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과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지글거리는 불판 위의 소고기처럼, 퇴직한 친구들의 씁쓸한 한숨도 함께 구워지는 듯했다. “요즘 일이 없어서 마누라 눈치만 보고 산다”, “아파트 경비원 지원했다가 젊은 소장한테 갑질당했다” 등 퇴직 후 재취업의 문턱에서 겪는 수모와 절망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잿빛 얼굴이 성갑의 화려한 성공과 극명히 대비됐다. 성갑은 개선장군처럼 여유롭게 소고기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놈들아. 30년 넘게 몸으로 일했으면 됐지, 이 나이에도 육체노동일을 하고 싶냐?” 그의 목소리에서 이제껏 한 번도 과시하지 못했던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가장 키가 작은 친구가 고개를 숙이고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있냐. 자식들 대학 보내느라 노후 준비는 진작에 포기했어.” 머리카락이 몇 올 남지 않은 친구가 고기를 씹으며 물었다. “성갑아, 요즘 무슨 좋은 일 있나 봐? 로또라도 맞았어? 부산 최고 짠돌이가 웬일로 이렇게 비싼 소고기를 다 사주겠다고 불렀어?” 성갑은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자세히 알려고 해…나는 지금 이것저것 새로운 수익 모델을 구상하는 중이야.” 그는 의도적으로 친구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켜 우월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그의 성공에 대해 캐물을수록, 자신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소주를 홀짝이던 친구가 잔을 채우며 말했다. “성갑아, 좋은 거 있으면 우리도 좀 알려줘라. 요즘 죽을 맛이야. 마누라가 퇴직금 다 가져가서 소주 마실 돈도 없어. 정말로 이렇게는 못 살겠다. 제발 뭐라도 좀 알려줘.” 그의 목소리에는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으려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성갑이 빙긋 웃으며 친구들을 둘러봤다. 지금껏 기다려온 주인공의 시간이었다. “좋아, 그럼 내가 비법 하나 알려줄게. 대신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해. 특히 마누라들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이 ‘비밀 공유’는 그와 친구들 사이에 동질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성갑에게 은밀한 권위를 부여했다. 친구들이 맹세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성갑은 이성조 교수와 텔레그램 채팅방, 그리고 가상화폐 선물 거래의 ‘황금빛 세계’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말도 안 돼”, “그게 진짜로 돈이 돼?” 라며 회의적인 반응이 다수였다. 성갑은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았다.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IEKAF 거래소의 수익 내역과 계좌 잔고를 보여주었다. 화면에 찍힌 38만 달러(약 5억 3000만원)라는 숫자를 본 친구들은 “이게 진짜야?”,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경악했다. 그들의 눈빛이 질투와 놀라움, 그리고 희망으로 번뜩였다. 성갑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이제부터는 몸이 아닌 머리를 쓰며 살아야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차수를 바꿔가며 술자리가 이어졌다. 끝까지 질문 세례를 퍼부으며 따라붙은 친구 하나를 룸살롱으로 데려가서 재력을 과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새벽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성갑의 눈빛도 그 별처럼 권력욕으로 반짝였다. 그는 이제 30년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독한 노년을 맞이할 뻔한 친구들을 이끌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리더’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친구들을 구원해 줄 ‘영웅’이라고 확신했다. 사실은 그들 모두를 사기꾼들의 더 큰 덫으로 인도하는 미끼가 됐다는 사실을 모른 채. (28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 ‘코인 청산’ 빚 갚으려 전세 보증금에 손대…‘파멸의 길’로 찾아가는 워킹맘 [파멸의 기획자들 #26]

    ‘코인 청산’ 빚 갚으려 전세 보증금에 손대…‘파멸의 길’로 찾아가는 워킹맘 [파멸의 기획자들 #26]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진영은 김가영 비서가 소개해준 최세훈 대표의 선물 거래를 따라가다가 강제 청산을 당한 상황을 텔레그램 메시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퇴근 인파가 지하철역 입구를 정신없이 오갔다. 진영은 그들 속에서 홀로 멈춰 그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손가락은 떨렸고 휴대폰 화면도 눈물로 얼룩졌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놓친 단어가 없는지 몇 번이고 검토했다. 내용을 다 적고 나니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 지하 창고에서 강제 청산당했을 때의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다시 되살아나 혼란스러움이 더해졌다. 진영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텔레그램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면 이성조 교수가 자신의 메시지를 읽어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그녀의 바람을 비웃듯 평소와 다름없이 열정적으로 저녁 강의를 이어갈 뿐이었다. 9시 반이 조금 지나서 수업이 끝났다. 진영은 집에 돌아와 저녁도 먹지 않고 차가운 방 안에 누워 텔레그램 메시지 알림을 기다렸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처럼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다. 밤 10시가 넘어 마침내 이성조 교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학우님, 김가영 비서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 마음은 괜찮으신가요?” 누워 있던 진영은 이 교수의 메시지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의 메시지가 너무도 따뜻하고 다정했다. “교수님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원금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진영은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먹이며 답장했다. “학우님 걱정 마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저 역시 수많은 투자 실패를 경험했기에 지금 학우님이 느끼고 있는 고통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공유한다는 이 교수의 메시지에 진영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강제 청산 이후 몇 시간 동안 홀로 지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 교수가 도와준다면 사라진 원금도 찾을 수 있고, 그동안 꿈꾸던 ‘경제적 자유’라는 미래도 다시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우님, 일단 학우님의 자금 상황을 확인해야 합니다. 계좌 정보를 보내주시겠습니까?” 진영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IEKAF 거래소 앱을 열어 파산의 증거를 캡처해서 텔레그램 채팅방에 첨부했다. “학우님, 저에게 잠시 시간을 주세요.” 진영은 이 교수의 다음 메시지를 기다리며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15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진영에게는 15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이 교수의 짧은 침묵이 진영의 불안과 간절함을 극대화시켰다. 이 교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학우님의 자금 상황을 바탕으로 일주일 안에 원금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했어요. 당분간 제가 학우님과 함께 매일 오후 직접 선물 거래를 진행하겠습니다. 제 휴식 시간이 줄어들겠지만, 학우님이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 진영이 그의 대답이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메시지가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만 학우님의 원금을 되찾기 위한 1대1 리딩 거래를 위해서는 추가 투자금이 필요해요. 제가 생각하는 적정 액수는 10만 달러입니다.” 우리 돈으로 약 1억 4000만원이다. 예비클럽 가입비 5만 달러(7000만원)도 어렵게 만들었는데, 이제 그 두 배인 10만 달러가 추가로 필요하단다. 진영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성조 교수는 그녀의 절망적인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학우님, 10만 달러가 준비되면 언제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학우님을 위해서 선물 거래를 시작하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진영은 미래가 막막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1초라도 빨리 10만 달러를 준비하지 않으면, 가족을 위해 꿈꾸던 ‘방 세개짜리 아파트’의 미래도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터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빚을 갚으려면 더 큰 빚을 져야 한다’는 비논리적인 명제로 가득 찼다. ‘가만, 아파트 전세 계약서가 어디 있지?’ 진영은 지방 출장을 간 남편 송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래방에서 접대성 회식을 하던 정호는 늦은 시간 갑자기 걸려온 진영의 전화에 놀랐다. 그러나 저녁 내내 이어진 술자리 때문에 정확한 상황 파악이 쉽지 않은 터라 ‘전세 계약서가 어디에 있냐’는 진영의 질문에 이유도 묻지 않고 장소를 알려줬다. 진영이 곧바로 계약서를 꺼내 내용을 살피고는 스마트폰으로 전세보증금 담보대출 상품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성이 마비된 그녀는 가족의 마지막 보루인 보증금까지 끌어안고 지옥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27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 7000만원이 순식간에 허공으로…‘부의 추월차선’ 타려던 워킹맘의 처절한 오열 [파멸의 기획자들 #25]

    7000만원이 순식간에 허공으로…‘부의 추월차선’ 타려던 워킹맘의 처절한 오열 [파멸의 기획자들 #25]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서울 금천구에 사는 진영은 주변 사람들에게 아들의 병원비가 모자란다고 거짓말을 해서 빌린 돈에다 이성조 교수가 개인적으로 제공한 자금까지 더해 어렵사리 텔레그램 예비클럽 가입비 5만 달러(약 7000만원)을 마련했다. 그녀는 선물 거래 투자 규모를 키워 마침내 ‘부의 추월차선’에 올라탔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다. 그런데 이 교수는 골드클럽(투자금 20만 달러 이상)과 실버클럽(15만 달러 이상) 회원만을 중심으로 거래를 진행하는 듯했다. 텔레그램 단체 채팅방에는 “이 교수가 진행한 거래로 큰 수익을 얻었다”는 이들 클럽 회원들의 감사 인사가 수시로 올라왔다. 진영은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더 빨리 투자금을 모아서 상위 클럽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이 불타 올랐다. ‘골드클럽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매일매일 거래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어. 그걸 계속 재투자하면 수익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 골드클럽에 들어가려면 20만 달러(2억 8000만원)이라는 금액이 필요했다. 5만 달러도 여기저기 거짓말을 해서 간신히 모았는데, 여기에 2억원 넘는 돈을 더해야 한다. 아직은 꿈만 같았다. 매일 새벽 그녀는 잠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꿈을 현실로 만들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 진영은 김가영 비서가 연결해 준 최세훈 대표의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한 여성 회원과 가까워졌다. 제주에 산다는 이슬기는 늘 그녀에게 ‘언니, 언니’ 하며 살갑게 대했다. 진영은 슬기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어느 날 슬기가 SNS로 “오늘 이성조 교수의 수제자 최 대표가 직접 거래를 리딩한다”고 귀띔했다. 진영은 마트 점장에게 잠시 병원에 다녀온다고 둘러대고는 지하 4층 물류 창고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최 대표의 지시에 따라 코인 매수 버튼을 눌렀다. 순간 그녀가 지정한 코인 가격이 급격하게 수직 하락했다. 난생 처음 겪는 ‘강제 청산’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리자 진영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가진 돈 7000만원을 모두 날렸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울었다. 지하 창고의 싸늘한 공기가 진영의 절규를 감싸 안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진영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런 극한 위기를 만들어 낸 최세훈 대표에게 SNS 메시지를 통해 분노를 폭발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방금 전 가진 돈을 모두 잃었어요. 거기에는 제 돈뿐만 아니라 지인들에게 빌린 돈, 심지어 이 교수님의 개인 자금까지 들어 있었어요. 이걸 어떻게 책임지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지금 최 대표에게 따져봐야 사라진 돈이 돌아올 리 없을 뿐더러, 오히려 원금을 되찾을 유일한 희망인 최 대표를 자극해서 산통을 깰 수도 있어.’ 진영은 스마트폰 문자 입력을 멈췄다. 일단 이성조 교수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고 답을 찾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곧바로 김가영 비서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비서님, 저 민진영이예요. 교수님께 급하게 연락을 하고 싶은데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김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몇 시간을 기다렸지만 퇴근할 때까지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퇴근길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니 그제서야 텔레그램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학우님. 제가 답이 너무 늦었어요. 학우님들에게 메시지가 워낙 많이 오거든요. 한 분 한 분을 상담해 드리다보니 이제야 민진영 학우님의 메시지에 대답할 수 있게 됐어요.” 진영은 비서의 느긋하고 기계적인 태도가 답답했다. 그래도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인내심을 갖고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지금 아주 급한 일이 생겼어요. 이성조 교수님과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의 메시지에 절박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러나 김 비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예의바르게 답변해 주었다. 진영의 고통에 큰 관심이 없다는 듯.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교수님은 저녁 강의를 준비 중이세요. 이 시간에는 교수님께서 워낙 많은 자료를 살펴보시기 때문에 저도 말 붙이기가 어렵습니다.” 진영은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그럼 언제쯤 교수님과 연락이 닿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연락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시면 교수님께 텔레그램 메시지를 남겨보세요. 저녁 강의가 끝나고 나서 학우님께 연락을 주실 거예요. 교수님은 학우님들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무슨 일인지 저에게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따가 교수님과 상의할 때 학우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해서요.” 결국 진영은 김 비서에게도 자신의 파산 사실을 고백해야 했다. ‘구원자’ 이성조 교수에게 매달리기 위해서라도 비서의 교묘한 통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6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 ‘사랑’이라 믿은 파멸의 덫, ‘연인의 구원자’ 자처하며 사채까지 손 뻗어 [파멸의 기획자들 #24]

    ‘사랑’이라 믿은 파멸의 덫, ‘연인의 구원자’ 자처하며 사채까지 손 뻗어 [파멸의 기획자들 #24]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다인의 연락을 받은 성진의 몸은 배터리에 전기가 100% 충전된 것처럼 활기로 넘쳤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자신이 다인의 사랑 덕분에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코인 선물 거래로 잃어버린 1000만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임무는 다인을 행복하게 지켜주는 것이었다. 성진은 자신감을 갖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는 네가 돌아와서 너무 기뻐. 아버님이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이야.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꼭 알려줘.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 그의 문장에는 다인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성진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오빠. 대부분 문제가 순조롭게 풀렸어요. 이제 아빠 수술비만 해결하면 돼요.” 성진은 ‘수술비’라는 한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느꼈다. “수술비? 얼마나 들어가는데?” 다인은 깊은 한숨을 쉬는 듯한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 “아빠가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셔서 1000만원 정도는 들어갈 것 같아요. 며칠 전 코인 거래에서 강제 청산만 당하지 않았어도 바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고모들이 다들 아빠 일을 모른 척해서 저도 무척 답답해요.” 아빠에게 보험이 없고 고모들까지 병원비 문제를 외면한다는 다인의 절망적 이야기는 성진의 ‘구원자 콤플렉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졌다. “다인아, 걱정 마. 오빠가 해결해 줄게.” 성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빠, 무슨 말이에요. 그러지 말아요. 저번에 제 병원비도 대신 내줬잖아요. 오빠도 투자금을 모두 잃어서 형편이 여의치 않을텐데요.” 다인의 걱정 어린 우려가 성진의 허세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다인 앞에서 결코 무능력한 남자로 보여선 안 됐다. “다인아, 오빠를 믿는다면 하루만 기다려줘.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어. 아버님 수술비도 네 투자금도 모두 해결한 테니 딱 하루만 기다려.” 성진은 다인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원룸의 불을 켰다. 며칠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다인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당장 수천만원의 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섰다. 옷장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다인을 만날 때 입으려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미리 사둔 가장 비싸고 세련된 옷이었다. 거울 속 성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는 굳게 닫혔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휴대폰을 검색해서 오래 전 저장해 둔 ‘김관조(우성캐피탈)’를 찾았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다인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마법처럼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장님, 전에 만났던 연수 친구 성진이라고 합니다. 연수가 대출 받으려고 사무실 찾아갔을 때 같이 만났던…” “아, 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관조는 어렴풋하게나마 성진을 기억하는 듯했다. 성진이 말을 이어갔다. “그때 사장님께서 저한테도 ‘돈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전화 드렸어요. 지금 돈이 필요해서요.” “예, 긴급 대출은 이자가 좀 쎈데 괜찮으시겠어요?” 성진은 이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 괜찮습니다. 금방 해결할 수 있어요. 당장 3000만원이 필요한데 가능할까요?” “그럼요. 사무실에 오셔서 몇 가지 정보만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택시로 20분 정도면 갈 수 있습니다.” 성진은 대출을 받아 다인이 부친의 수술비(1000만원)와 그녀가 청산당한 투자금(1000만원), 그리고 자신이 선물 거래로 날린 돈(1000만원)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생각이었다. 캐피탈 업체에서 빌린 3000만원이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이성조 교수의 리딩만 잘 따라가면 오래지않아 갚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소중한 여인 주다인이 실제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을. 성진은 스스로를 ‘다인의 위대한 구원자’라고 믿으며, 사채의 세계에까지 발을 담그고 있었다. (25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 코인 선물 거래 고의 청산 이은 연인의 잠적, ‘로맨스 스캠’의 치밀한 각본 [파멸의 기획자들 #23]

    코인 선물 거래 고의 청산 이은 연인의 잠적, ‘로맨스 스캠’의 치밀한 각본 [파멸의 기획자들 #23]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마침내 고백을 준비해온 토요일 오후가 왔다. 성진은 다인에게 보낼 문자 메시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시를 쓰듯 정성스럽게 다듬었다. ‘반지와 명품 가방을 사줄 다정한 남자친구’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상상하자 그의 심장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빠, 방금 이성조 교수님이 대학생 단체방 방장 오빠한테 선물 거래 따라오겠냐고 제안하셨대요. 방장 오빠가 저도 동참하겠냐고 물어보네요. 오빠, 우리 같이 할까요?” ‘우리 같이’라는 다인의 말에 성진은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됐다. 두말할 것 없이 함께 하겠다고 답했다. 이번에 번 돈으로 그녀에게 줄 선물을 구입하기로 마음 먹었다. 10분쯤 뒤 이 교수가 직접 보낸 듯한 매수 신호가 다인을 통해 전달됐다. “대상: PALQ, 배율: 100X, 비중: 20%.” 성진은 흥분감에 취해서 망설임 없이 매수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PALQ 가격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손쓸 틈도 없이 그의 선물 계좌는 마이너스로 바뀌었다. “오빠! 큰일 났어요. 저 망한 것 같아요.” 성진은 다인의 메시지에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봤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인에게 온 다음 메시지가 충격적인 진실을 전했다. “오빠, 우리 방금 강제 청산 당했대요. 알고 보니까 이번 신호는 교수님 지시가 아니라 방장 오빠가 직접 리딩을 해보고 싶어서 거짓으로 낸 것이었대요. 조금 전 방장 오빠는 계정을 폐쇄하고 사라졌대요. 대학생 방에 있던 다른 언니도 청산당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성진은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1000만원을 순식간에 날렸다는 사실보다 다인에게 로맨틱하게 고백할 기회를 놓쳤다는 현실에 더 크게 낙담했다. ‘강제 청산’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기에,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인아, 잠깐만. 내가 다시 연락할게.” 성진은 다인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기고 김가영 비서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대학생방 방장이 이 교수 지시를 사칭해서 회원 몇 명과 함께 선물 거래를 하다가 모두 강제 청산당했다고 설명했다. 김 비서의 답장은 이미 준비된 각본처럼 유려했다. “큰일이네요. 작년에도 어떤 대학생이 그런 식으로 교수님 행세를 하다가 몇몇 학우에게 피해를 준 적이 있었는데, 올해도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실력이 영글지 않은 친구가 교수님의 명성을 빌려서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려다가 결국 사달이 났네요.” 그녀는 이번 사태의 책임이 ‘사칭범’에게 있음을 강조한 뒤 다음의 메시지를 전했다. “일단 교수님께 바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심장 질환이 있는 교수님께서 올해도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고 쓰러지실 수도 있어서요. 제가 상황을 봐서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이제 성진은 ‘스승’의 건강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일단 IEKAF 거래소 앱을 켰다. 그동안 모아둔 돈이 모두 사라지고 ‘-300 USDT’(약 –42만원)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강제 청산’이 무엇인지, 선물 계좌가 어떻게 마이너스가 되는지를 알아보려고 스마트폰을 검색하려는 순간, 다인에게 텔레그램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빠… 저 어떻게 해요… 방금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대요. 지금 급하게 천안으로 가는 중이예요.”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다인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이후 며칠 동안 텔레그램 메시지를 수도 없이 보냈지만, 그녀는 하나도 읽지 않았다. 성진은 어두운 방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전화기만 바라보는 폐인이 되어갔다. 그녀가 잠적한 지 4일째 되던 날, 마침내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오빠…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급하게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 후에도 의식이 없으셔서 계속 울면서 기다렸는데, 다행히 오늘 아침에 눈을 뜨셨어요.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니 오빠 생각이 밀려왔어요. 그 사이에 저한테 이렇게나 많이 연락을 주셨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요 며칠 제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성진은 다인이 자신에게 연락했다는 안도감과, 자신이 그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겠다는 환상 속에 빠져 있었다. 투자금이 녹아 없어진 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꿈은 어려움에 처한 다인을 도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것 뿐이었다. (24회로 이어집니다. 사기 피해 예방과 범인 검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기사를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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