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같은 콘텐츠 왕국 향한다… 김정주의 꿈은 현재진행형 [2025 재계 인맥 대탐구]
허민·박지원·이정헌 등 인재 발굴김택진과 인수 갈등 속 인연 지속200억 쾌척, 첫 어린이 재활병원도‘진경준 게이트’ 후 사업 의지 꺾여2022년 갑작스러운 부고로 혼란中 공룡 텐센트, 20조원대 인수설
“디즈니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라고 봐요. (넥슨이) 어떻게 100분의1이라도 따라가 볼까 싶죠.”(넥슨 기업 자서전 ‘플레이’)
고 김정주 창업주에게 넥슨은 단순한 게임 회사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디즈니’를 꿈꿨고, 그 꿈의 깊이는 남달랐다. 김 창업주는 생전에 디즈니처럼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고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내게 만드는’ 콘텐츠의 힘을 부러워했다. 게임을 넘어선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사람들의 삶에 스며드는 엔터테인먼트 제국을 구상했던 그는 ‘사람’과 ‘연결’을 중시했다.
●자율성 존중하고 도전 격려해 인재 리드
김 창업주의 남다른 행보는 그의 성장 배경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1968년 판사 출신 원로 법조인인 김교창(88) 변호사와 이연자(84)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넥슨 창업 당시 사업 자금을 대 주고 초기에 대표이사를 맡아 법률 자문을 해 준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창업 초기 무차입 경영을 펼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형은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던 김정우(60) 아마 7단이다.
외가에서도 상당한 지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연세대와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역사학자 이홍직의 셋째 딸이다. 큰이모는 아웅산 묘소 테러(1983년) 때 순직한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배우자인 이순자(87) 숙명여대 명예교수이며, 둘째 이모는 이성미(86)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그의 배우자는 문민정부 당시 외무부 장관을 지내고 참여정부 때 주미대사를 역임한 한승주(85) 고려대 명예교수다. 김 창업주의 막내 외삼촌은 역사학자인 이성규(79) 서울대 명예교수로 2009년 외조부의 생애를 다룬 평전 ‘항일노동운동의 선구자 서정희’라는 책을 내놓기도 했다.
넥슨은 김 창업주에게 단순한 회사를 넘어 수많은 인연을 맺고 확장하는 플랫폼이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으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친 김 창업주는 대학 동기이기도 했던 송재경(58) 전 엑스엘게임즈 대표와 함께 1994년 넥슨을 설립하고 ‘바람의 나라’ 개발을 주도했다. 바람의 나라 출시 직전 송 전 대표가 회사를 떠나면서 정상원(55) 전 넥슨 부사장이 개발 총괄을 맡게 됐고, 대학원에서 만난 김상범(58) 전 넥슨 최고창조책임자(CCO)와 서민(58) 전 넥슨코리아 대표 등이 합류한 끝에 바람의 나라가 비로소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김 창업주는 인재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새로운 도전을 격려하는 독특한 리더십으로 많은 이들을 매료했다. 넥슨이 막대한 자금으로 인수했던 네오플의 창업주 허민(49)은 위메프를 창업하며 벤처업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올해 3월까지 하이브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던 박지원(48) 전 대표는 과거 넥슨의 넥슨코리아 대표로 있었다. 이정헌(46) 넥슨 일본 법인 대표는 2003년 넥슨코리아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수장까지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엔씨소프트 창업자 김택진(58) 대표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서울대 선후배 사이로 한국 게임 산업의 두 축을 형성했다. 2010년대 초중반 엔씨소프트에 대한 넥슨의 인수합병 시도 등 비즈니스적 갈등에도 두 사람은 30여년간 인연을 이어 왔다. 네이버 창업자인 이해진(58) 이사회 의장은 대학원 시절 김 창업주의 룸메이트로 한국 인터넷 벤처 1세대를 함께 이끌었던 동료이자 친구다.
김 창업주는 사업적 성공을 넘어 사회적 책임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장애 어린이 재활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는데,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재활 전문 병원인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설립에 힘썼다. 2014년 착공해 2년 뒤 개원한 이 병원은 넥슨이 푸르메재단과 함께 200억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하며 건립됐다.
●배우자와 두 딸, 역대 최대 상속세 6조원
2016년 3월 ‘청렴한 벤처기업가’라는 김 창업주의 이미지에 금이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대 86학번 동기인 진경준(58) 당시 검사장이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과정에서 과거 김 창업주로부터 넥슨의 비상장 주식을 매입할 기회는 물론 4억원이 넘는 주식 매입 자금을 받아 100억원 이상의 시세차익을 거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뇌물수수 혐의와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됐고 넥슨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을 맞게 됐다. 결과적으로 김 창업주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진 전 검사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김 창업주로부터 넥슨 주식을 받은 혐의는 무죄로 결론 났다.
그러나 2년 넘게 수사와 재판을 받으며 ‘제2의 디즈니’를 꿈꾸던 김 창업주의 사업 의지는 사그라들었다. 2019년 1월 김 창업주는 돌연 자신이 창업한 넥슨의 지주회사 NXC의 지분 98.64%에 대한 매각을 시도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일각에서는 ‘진경준 게이트’로 인한 피로감, 사업 확장에 대한 고민, 혹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발판 마련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는데 당시 김 창업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 위한 결정”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당시 넥슨의 매각 시도는 10조원 이상의 매각가로 세기의 ‘딜’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고 카카오는 물론 넷마블, 텐센트 등 ‘빅 플레이어’들이 인수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복잡한 지배구조와 높은 가격 등으로 결국 불발됐고, 같은 해 6월 매각 추진은 전면 중단됐다.
2022년 2월 미국 하와이에서 김 창업주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김 창업주의 나이는 불과 54세였다. 한국 게임업계는 물론 사회 전반이 큰 충격에 빠졌다. 회사는 김 창업주가 이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아 왔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했다고 밝혔다. 김택진 대표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사랑하는 친구가 떠났다. 살면서 못 느꼈던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며 “같이 인생길 걸어온 나의 벗 사랑했다. 이젠 편하거라. 부디”라는 글을 올리며 가장 먼저 애도했다.
그의 부고는 넥슨이라는 거대 기업의 오너 공백을 의미했고, 그가 남긴 방대한 유산과 복잡한 지배구조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궁금증을 낳았다. 또 김 창업주의 사망은 가족에게 막대한 유산과 함께 전례 없는 상속세라는 과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유산으로 인해 배우자인 유정현(57) NXC 이사회 이사와 두 딸 김정민(23), 김정윤(21)씨가 부담해야 할 상속세는 국내 역대 최고액인 약 6조원(추정)에 달했다.
천문학적인 금액을 현금으로 납부하기 어려웠던 유가족은 2023년 5월 NXC 지분 약 29.3%를 기획재정부에 주식으로 물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평가받은 지분 가치는 4조 7000억원으로, 이로 인해 기재부는 사실상 넥슨 그룹의 2대 주주가 되는 유례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부는 NXC 지분 공매에 나섰으나 두 차례 유찰됐으며 지난해 말 IBK투자증권을 주관사로 선정하고 매각 절차에 본격 돌입한 상태다.
●‘글로벌 플레이어’로 도약 여전한 꿈
이런 가운데 새로운 변수가 부상했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을 통해 중국의 정보기술(IT) 공룡 텐센트가 넥슨을 150억 달러(약 20조원)에 인수하기 위해 유가족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텐센트는 2019년 김 창업주가 NXC 지분 전량 매각에 나섰을 때도 유력한 인수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 당시에도 10조원 규모의 메가 딜이었으나 매수 희망자를 찾기 쉽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현재 거론되는 20조원대 인수설은 큰 변화를 시사한다.
텐센트는 이미 국내 시프트업, 크래프톤, 넷마블 등 주요 게임 회사 지분을 보유하며 2대 주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넥슨과는 ‘던전앤파이터’ 중국 서비스 협력으로 깊은 인연을 맺어 왔다. 만약 텐센트의 넥슨 경영권 인수가 현실화한다면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 등 규제 당국의 꼼꼼한 심사가 주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넥슨 측은 현재 이 인수설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도 딜 성사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김 창업주는 2015년 출간된 넥슨 자서전 ‘플레이’에서 “(제가) 10년쯤 넥슨을 튼튼하게 만들고 빠지면 또 다른 친구가 와서 다음 단계로 넥슨을 도약시킬 것”이라면서 “모든 회사는 결국 창업자가 한번은 잘리든 물러나든 하게 돼 있고, 그런 다음 도약기로 넘어간다”고 속내를 밝힌 바 있다. 일찍이 국내 상장 대신 일본 상장을 택했던 것처럼 넥슨을 더 큰 회사로 편입시켜 명실상부한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시키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반영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