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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포의 문법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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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뻔한 문법 깨고 관념 뒤집었다… 호러에 새옷 입힌 멕시코 소설가

    뻔한 문법 깨고 관념 뒤집었다… 호러에 새옷 입힌 멕시코 소설가

    로커스상·영국 환상문학상 석권공포의 전형·박제된 기대에 반전 괴물의 형상을 한 타자(他者)와 그에 맞서는 백인 남성 주체. 어쩌면 ‘공포’라는 감정 역시 정치적인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반복되는 전통의 답습은 지루함만 안길 뿐이다. 정해진 문법을 처참히 깨부수는 게 소설가의 미덕. 여기, 완전히 ‘새로운 공포’를 들고 찾아온 작가가 있다. 2026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차 한국을 찾은 멕시코 소설가 실비아 모레노 가르시아(45)를 16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만났다. ‘멕시칸 고딕’과 ‘모로 박사의 딸’을 쓴 그는 2021년 로커스상과 영국환상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지난 30년간 비주류 장르였던 호러가 최근 새로운 옷을 입고 과감히 변신하고 있다”면서 “호러소설이 무엇인지 관념 자체가 바뀌고 있는 지금 앞으로 더 다채로운 ‘무서운 이야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폭풍의 언덕’ 같은 소설을 읽으며 언젠간 고딕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는 다 좋았는데, 문제는 이 장르가 너무 ‘유럽적’이라는 점이었죠. 멕시코인이 나오는 고딕소설을 써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고딕소설은 긴장감과 공포를 주된 분위기로 삼는 문학의 한 장르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같은 작품을 떠올리면 된다. 모레노 가르시아가 주목받은 것은 오래된 장르의 문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뒤틀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멕시코인이라는 정체성이 있다. “우리가 장르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독자가 뚜렷하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을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오늘날 그 전통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굉장히 흥미로운 시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가보지 못한 곳으로 데려갈 겁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어진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리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는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문학적 경향을 일컬어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한다. 모레노 가르시아의 소설 역시 ‘마술적’이면서도 동시에 ‘사실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만 기댈 수 없다.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그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에 저항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향한 모레노 가르시아의 감정은 그래서 ‘애증(愛憎)’이다.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호러소설을 쓰면서 장르의 경계를 넓히고 있어요. 요즘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인기가 많죠. 호러소설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출판·편집하는 사람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그만큼 호러소설이 무엇인지에 관한 관념도 달라지고 있고요. 지금은 서부를 배경으로 한 복수극을 쓰고 있어요. 조금 나중에는 인공지능(AI) 이야기도 쓸 거예요. 그런데 ‘터미네이터’ 같은 건 싫어요. AI와 관련된, 아주 ‘이상한(Odd)’ 소설을 써볼 겁니다.”
  • 황금빛 성채, 그 밀실 제단에 똬리 튼 오컬트적 탐욕

    황금빛 성채, 그 밀실 제단에 똬리 튼 오컬트적 탐욕

    유럽 영주의 성을 본떠 올린 최상류층 빌라 ‘프린츠하우스’, 출입구 양 옆에는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에 그윽하게 눈을 내리뜬 잘생긴 청년”과 “민머리에 눈썹이 희미하고 입술마저 얇아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는 노인” 형상을 한 부조물이 자리한다(9쪽). 364㎡(약 110평) 규모 집 안에는 비상용 공간인 패닉룸이 있다. 쓸모없어 보이지만 거주자들에겐 “평당 1억원의 공간마저 낭비할 수 있는 여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아 4층을 홀로 쓰는 선우는 세입자를 들이기로 했다. “눈 허연 광어 같은 죽음의 냄새”(18쪽)를 풍기는 ‘너’가 들어오면서 선우의 일상에 실금이 간다. 강지영의 신작 ‘프린츠하우스’는 전작 ‘살인자의 쇼핑몰’과 ‘심여사는 킬러’로 보여준 이야기꾼의 면모에 오컬트 호러의 문법을 더해 시선을 붙잡는다. 일상의 유채색 공포를 채집해온 교보문고 출판 브랜드 북다의 ‘앙스트(ANGST)’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선우 집의 이전 집주인 딸이던 세입자 ‘너’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벽지 안에 있던 부적을 발견하더니 천주교 신자라며 십자가, 묵주, 성모상 등 온갖 성물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너’의 가족사를 듣고 돌아온 선우는 성물이 부서지고 난장판이 된 집을 발견했다. 심상찮은 일을 겪은 선우는 친한 형님인 무당 한신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너’의 실체는 고독(蠱毒), “독을 가진 생물을 독 안에 모아 서로 다투고 죽이길 기다렸다 살아남은 한 마리로 강한 저주를 걸 수 있는 영적 무기”(91쪽)다. 원과 한을 응축시킨 “최종형의 고독은 본래의 외형을 잃어”(92쪽) 무엇으로든 변신한다. 그 본거지가 되어준 곳이 프린츠하우스다.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고독은 탐욕을 상징하는 마몬이 되고, 무속의 부적은 라틴어 구마경으로 번역된다. 한국식으로 읽으면 부정한 뜻이 되는 이름을 물려받은 구마사제 이사악이 등장하면서 ‘동서양이 만나는 오컬트 호러’(서미애 소설가의 평)가 된다. 패닉룸의 용도, ‘너’와 한신의 본체, 프린츠하우스 거주자들의 역할, 출입구에 놓은 두 조각상의 의미 등 곳곳에 뿌려놓은 소재를 하나하나 건져 올리며 초자연적인 공포를 완성한다. 성욕, 지배욕, 돈과 계급을 향한 권력욕 등 온갖 욕망을 발화하는 프란츠하우스는 퇴마와 굿으로 정화되는 듯 보인다. “불티가 튄 집과 불티를 품은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발아”(276쪽)하는 법. 소설이 말하는 공포의 근원은 책장을 덮은 뒤에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낸다.
  • 타인을 이해하는 첫 관문… 우리는 ‘호러’를 찾아간다

    타인을 이해하는 첫 관문… 우리는 ‘호러’를 찾아간다

    ‘좋은 호러’는 약자에게 서사 부여자신을 괴물로 만든 이에게 저항“진짜 공포는 현실 세계 안에 존재” 소설가 스티븐 킹은 그의 작품 ‘샤이닝’을 원작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을 무척 혐오했다. 킹은 주인공 잭 토런스를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냈는데, 영화에선 그런 면모가 대거 삭제됐기 때문이다. 킹은 큐브릭의 ‘샤이닝’을 대중의 뇌리에서 잊히게 하고자 직접 각색한 미니시리즈 버전도 내놨다. 그러나 노력은 허사였다. 킹의 ‘샤이닝’과 큐브릭의 ‘샤이닝’ 모두 역사에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았다. 1990년대 PC통신을 통해 한국에 장르소설을 보급한 개척자 듀나가 공포의 본질을 추적하는 신간 ‘공포의 문법’(어크로스)으로 돌아왔다. 킹과 큐브릭의 일화는 듀나가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의 대세가 된 호러의 서사구조를 분석한 에세이 15편이 책에 실렸다. 본명이나 나이는 물론 성별조차 철저히 감춘 채 ‘듀나’라는 필명과 토끼 아바타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관을 엿볼 수 있다. “많은 호러 이야기에서 주인공이나 화자는 (백인) 성인 남성인데, 이들은 대부분 시스템의 최강자 또는 포식자로 존재합니다. … 당연히 이들이 두려워하는 타자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약자입니다. 죄 없고 힘없는 사람들을 죽여 놓고 그 사람들을 마녀라고 몰아붙이며 두려워하는 과정의 메커니즘이 호러 장르 전체에 퍼져 있는 것입니다.”(168쪽) 호러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타자화, 괴물화했던 인간 문명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만 머물렀다면 호러는 결코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호러’는 괴물이 된 약자에게 서사를 부여한다. 그리고 자신을 괴물로 만든 주체의 시선에 저항토록 한다. 그 저항을 보며 감상자는 그동안 당연시됐던 ‘정상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최근 호러의 양상이 다채로워지고 있다. 이것은 장르가 스스로 갱신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조던 필을 필두로 한 흑인 호러 감독의 증가, 코랄리 파르자나 쥘리아 뒤쿠르노, 제니퍼 켄트와 같은 여성 호러 감독의 약진이 대표적이다. 듀나는 이에 대해 “공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202쪽)라고 강조한다. 호러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참혹하다. 호러 영화보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상황을 전하는 짤막한 뉴스가 훨씬 더 무섭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 진짜 공포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그건 기껏해야 가짜 피와 특수 분장으로 단련된 호러 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을.”(54쪽)
  • ‘아스달 연대기’ 김원석 감독, 쏟아지는 비판에 “혼돈..즐기시길!”[전문]

    ‘아스달 연대기’ 김원석 감독, 쏟아지는 비판에 “혼돈..즐기시길!”[전문]

    tvN 토일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연출을 맡은 김원석 감독이 방송 이후 쏟아진 다양한 반응과 비판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첫 방송 전 열린 제작발표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김원석 감독은 방송 이후 홍보팀을 통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았고 약 한 달 만인 9일 답변을 회신했다. 첫 방송 이후 평가에 대한 생각과 고증에 대한 비판, CG·소품 완성도에 대한 아쉬움, 다른 작품과 유사성 의혹, 촬영 중 발생한 스태프 장시간 근로 논란에 대한 질문에 답변했다. 김원석 감독은 따끔한 비판도 겸허히 수용하며 “내 탓이다”고 말했다. 현재 ‘아스달 연대기’는 파트1·2를 마쳤다. 남은 파트3은 ‘호텔 델루나’ 종영 이후 9월 7일 방송된다. <이하 김원석 감독의 답변 전문> 1. 드라마 내용 관련 Q. 첫 방송 이후 호불호 평가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요. A. 시청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장르라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릴 것은 예상했습니다. 후반작업을 하면서 애정 어린 비판 의견 충실히 반영하여 남은 회차 더 친근하고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Q. 첫 방송 이후 배우들과 나눈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A. 연기자 분들은 고맙게도 드라마에 만족해 하셨고, 약간 어렵다고 전해들은 분들도 있으나 대부분 주변에서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Q. ‘아스달 연대기’가 김원석 감독님이 기존에 연출한 ‘미생’ ‘시그널’ ‘나의 아저씨’와 같은 드라마와는 규모, 배경, 접근방식이 다른 드라마였을 것 같은데 연출하면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연출할 때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A. 드라마 안의 사람이 보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어떤 드라마를 연출하든 제 가장 첫 번째 목표입니다. 고대의 인물들에게도 현대의 시청자가 감정 이입할 여지는 충분하고, 그렇게 되어야 아스달 연대기를 만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섬, 타곤, 사야, 탄야, 태알하 모두 살아 남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입니다.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살아 내는 모습은 현대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한번도 다룬 적이 없는 시대의 인물에게 어떻게 하면 시청자가 빨리 감정이입 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지만, 어렵거나 낯설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제 노력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그 부분이 가장 아쉽습니다. 이름이라든지, 지명, 생소한 단어들이 글이 아닌 말로 전달될 때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점을 고려하여, 앞으로의 회차를 수정 보완하고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아스달 연대기 속의 ‘사람’들을 더 잘 알게 될 수록 흡인력 있는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어렵다’는 반응을 우려하셨을 것 같은데 시청자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연출자로서 고민한 지점이 무엇이었으며, 방송에 등장한 것 중에 예시가 있습니까. A. ‘아스달 연대기’의 연출 계획을 세울 때, 이전에 없던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줘야 하는 만큼 초반 이야기의 진행 속도를 빠르게 하기보다 그 세계에 대해 익숙해 지는 시간을 갖고, 대신 그 안의 인물을 따라갈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고자 했습니다. 1회는 사람이 뇌안탈에게 행한 잔인한 짓과 이 때문에 희생자가 된 아사혼과 라가즈의 비극을 시청자가 따라가길 바랐고, 2회는 그런 과정을 통해 멀리 오지에서 살아가게 된 은섬의 아픔과 고민을 순박한 와한족들의 모습과 함께 그리려고 했습니다. Q. ‘아스달 연대기’의 강점과 무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점점 좋게 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 져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 작가님들과 만났을 때 작가님들의 고대사와 문화 인류학에 대한 방대한 스터디와 통찰에 놀랐고, 이것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함께 재미 있는 영웅 이야기 속에 잘 녹아 있는 대본을 읽고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요컨대 매력적인 캐릭터와 흥미진진한 스토리라는 김영현, 박상연 작가 특유의 장점과 함께, 고대 인류사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느낄 수 있는 대본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한 스탭들과 많은 좋은 연기자들이 이 대본을 잘 표현하기 위해 그 동안 힘을 합쳐 노력해왔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아스달 연대기 속의 ‘사람’들을 알게되고 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재미와 함께 인간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스케일과 영상미는 호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스토리가 어렵다는 시청자들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아스달 연대기의 공간적 배경은 ‘아스’ 라는 가상의 대륙이고, 시대적 배경은 청동기 시대입니다. 가상의 공간이지만, 청동기라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으므로 문명의 단계를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설정할 수는 없다는 것. 연출자로서 이것은 제약이자 기회라고 느꼈습니다.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청동기 문명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문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태고의 자연 환경과, 발달된 청동기 문명의 화려함을 모두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스달 연대기의 기본 스토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영웅 탄생 신화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세상을 바꿀 운명을 타고난 인물들이 역경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스스로 자신을 증명해 내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는데, 공간과 시간이 이전에 다루지 않았던 설정이다보니 인물의 이름, 지명 등이 생소할 수밖에 없고 이는 글로 읽을 때보다 말로 전해질 때 시청자들이 생경하다고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또, 현대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랑’ ‘배신’ 등의 개념어들이 과거에 똑같이 사용되지 않았을 거라는 가정하에, 작품 안에서 ‘바라다’’저버리다’와 같이 바꿔 쓰이고 있는데 이런 요소들도 쉽게 알아듣기 힘들게 하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꾸준히 보신 분들은 이제 좀 익숙해 지셔서 이해하기 쉽다고 말씀하시지만, 처음 보시는 분들도 쉽게 인물의 감정을 따라갈 수 있도록 소리나, 자막을 더 명료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Q.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스토리 구상하고 8년 만에 제작 결정됐다고 하던데 영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작품인 데도 연출 맡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또 예상대로 구현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A.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연출자로서 표현하고 싶은 인물이 있었고 도전하고 싶은 비주얼이 있었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잘 해내기 위한 엄청난 제작비를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않아 처음에는 고사를 했었습니다. 아스달 연대기는 그 동안 한국에서 언제나 통했던 안전한 장르의 드라마가 아니기에 더더욱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드라마입니다. 하고 싶은 마음과, 해 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극중 은섬(송중기)이처럼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남은 회차 열심히 후반 작업 하고 있습니다. 애초의 의도가 예상대로 구현이 잘 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씬에 따라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극의 상황에 어울리도록 잘 되었느냐의 최종 판단은 시청자 여러분들이 내려 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Q. 배우들의 극중 대사톤이 캐릭터별로 다양한것 같습니다. 연기톤에 있어서 어떤 설정이었는지 궁금합니다. A. 사실 태고시대의 어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들어본 사람이 없을테니까요. 다만 우리가 조선시대 사극에서 흔히 보는 ‘사극 어투’가 있고 이것을 쓰는가 안 쓰는가의 문제를 질문하신 거라고 생각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스달 연대기의 연기 톤을 잡을 때 연기자들에게 요청한 것은 목소리를 지나치게 긁어서 우렁차게 내는 과장된 사극 어투나, 지나치게 현대적인 말투를 모두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의 어느 지점의 말투를 인물별로 각자 어울리도록 준비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지나친 사극 어투와 지나친 현대어 말투 모두 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아르크에서 문명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와한족 사람들은 격식이 없는 말투를 쓸 것이므로 좀 더 현대어에 가까운 느낌인 반면, 아스달의 정치가들은 격식이 있는 말투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사극 어투에 좀 더 가깝게 들리게 된 것 같습니다. 쌍둥이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란 은섬과 사야는 그런 면에서 다른 어투를 쓸 수밖에 없다는 설정입니다.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익숙하지 않은데다 뇌안탈어를 포함한 각종 소수부족의 언어들이 등장하는 아스달 연대기에서 아스어(한국어)는 가장 자연스러운 말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Q. 뇌안탈어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일부 한글을 뒤집어 만든 언어라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뇌안탈어는 작가님들께서 체계를 만든 것이고, ‘발음’에 있어서는 언어학자의 자문을 받아 만들었습니다. 뇌안탈어의 단어를 만들 때 아나그램이 사용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단어를 그저 거꾸로 뒤집어 모든 언어체계를 만든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단어를 조어하는 과정에서 백워드를 비롯한 아나그램이 사용되었고 문법체계와 규칙, 시제, 인칭, 격식 표현과 비격식 표현, 존비어의 체계 등등을 나름대로 만드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들께 구체적으로 여쭤보지 못했지만, 그동안의 작가님들이 공부하신 방대한 양의 문화 인류학 자료를 고려할 때 단순히 편하게 만들기 위해 아나그램을 사용한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피의 색깔, 공동 생활의 유무,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 등 여러 면에서 사람과 반대에 있는 뇌안탈의 언어로 어울리는, 재미있는 설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방송 후 시청자들이 번역기를 직접 만들어 돌릴 정도로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모로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드라마인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발음은 고대 언어의 느낌이 날 수 있도록 언어학 교수님의 자문을 통해 유럽어 및 아랍어의 목젖소리, 목구멍 소리(uvula, pharyngeal consonant), 마야어 및 아이마라어의 분출음(ejective stops)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듣기에도 어려운 발음이지만 정확하게 내기 위해서 따로 상당 시간 연습을 해야 하는 발음들입니다. 연기자들은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따로 발음 지도를 받았고 저와 함께 수차례 따로 연습했습니다. Q. 고조선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중이 알 만한 신화의 재해석도 있을까요 A. 약간은 유머러스 하게 사용된 쑥과 마늘 이야기로부터, 드라마에서 ‘세상을 끝낼 천부인’으로 등장하는 방울과 칼, 거울 역시 단군신화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그러한 재해석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Q. 장르 특성 상 중반 시청자 유입이 다소 어려워 보이는데, 아직 안 본 시청자도 사로잡을 수 있을 작품만의 강점을 꼽아주세요. A. Part1,2가 주인공들이 역경과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각성하는 내용이 주라면, Part3의 내용은 각성한 인물들이 세상을 바꿀 힘을 얻어가는 과정입니다. 가슴 아프고 답답한 이야기 보다 뿌듯하고 감격스러운 이야기가 전개될 것입니다. 이전의 내용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라도 성장한 캐릭터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 해내는 성취의 순간을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방송이 쉬는 동안, 이전의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앞으로의 기대감을 높일 수 있는 영상을 준비중입니다. 아스달 연대기는 영웅 신화의 이야기 구조입니다. Part3는 드디어 영웅으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처음 보시는 시청자라도 쉽게 이들의 활약을 즐기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껏 보신 시청자분들은 그동안 주인공들의 고난과 역경을 보셨기에, 주인공들의 활약에 더욱 통쾌한 기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Q. 김원석 감독님이 연출자로서 해석한 ‘아스달 연대기’의 파트 1, 2, 3의 세계관은 무엇이며, 앞으로 보여줄 ‘아스달 연대기’의 ‘큰 그림’은 무엇입니까 A. 이번 작품에서도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문명 단계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초적인 역동성을 가지고 있고 본능에 훨씬 충실한 태고의 사람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고대의 사람들을 움직이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공포와 사랑입니다. 미지의 적으로부터, 혹독한 자연환경으로부터 사람은 공포를 느꼈을 것이고, 이에 대해 치열하게 대응하면서 잔인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영현 작가님이 제작발표회에서 말씀하셨듯이, 세상 모든 동물 중에 유일하게 사람만이 아종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포로 무장하고, 사랑으로 연대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과 소통하는 능력에 대한 갈망 역시 바로 공포의 감정에서 출발했다고 봤습니다. 이러한 태고의 인간들이 벌이는 약육강식의 싸움이 아스달의 세계관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현대의 사람들도 똑같이 벌이고 있는 중이라는 점에서 태고의 이야기지만 현재가 보이는 재미있고 의미있는 드라마가 되기를 희망합니다.2. 드라마 제작(및 연출) 관련 Q. 각 배우들의 캐스팅 동기, 각각 캐스팅에서 중요한 섭외기준이 궁금합니다 A. 제가 배우를 캐스팅하는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그 역할에 맞는 이미지와 연기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스달 연대기는 다행스럽게도 저와 작가님들이 가장 먼저 생각한 배우 분들이 흔쾌히 참여해 주셨습니다. 큰 돈을 들여 드라마를 찍는다는 것은 실패할 경우의 위험도 커지는 것이므로 배우들에게도 큰 부담입니다. 그 동안 한국에서 잘 되어왔던 검증된 장르의 드라마가 아닐 경우는 더더욱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아스달 연대기의 캐스팅 제의에 응해주시고,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신 아스달 연대기의 모든 연기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Q. 역사적으로 따지면 청동기 시대인데 긴 쇠사슬 같은 무기가 나오고 의상에도 고도의 기술이 들어가서 어색해 보인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전문가의 고증을 거친 것인가요? 일각에서 미드, 영화, 애니메이션 등과 유사성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비슷하다고 느끼는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A. 아스달 연대기의 공간적 배경은 ‘아스’ 라는 가상의 대륙이고, 시대적 배경은 청동기 시대입니다.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청동기 문명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문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태고의 자연 환경과, 발달된 청동기 문명의 화려함을 모두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양차가 사용하는 청동추의 사슬은 당연히 청동 사슬이고 끝에 달려있는 것도 청동추 이므로 (당시로 보면 무지 비싼 무기였겠지만) 시대에 아주 불가능한 무기는 아닙니다.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실제로 구약성서를 비롯한 여러 고대 문헌에 청동사슬에 대한 내용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되어 드라마에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서에 삼손을 바빌론으로 끌고 갈때 삼손을 힘을 쓰지 못하도록 묶은 것이 청동사슬입니다) 우리가 본적도 없고, 사료로도 남아 있지 않은 당시의 건축물과 복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회의를 거쳤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른바 ‘아스 양식’이 필요했고, 이를 시청자가 그럴 법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논리도 필요했습니다. 아스 대륙은 가상의 대륙이지만, 갑골문 시대의 중국 문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양 어딘가의 대륙이었을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기후는 온대기후. 중국풍이나, 우리나라 삼한시대 드라마에 썼던 의상과 건축물이 나온다면 그보다 수천 년 이상 앞선 문명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반면 서양은 이집트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같은 청동기 문명의 건축물과 이미지가 많이 남아있고, 극화된 콘텐츠도 많아 청동기 문명의 모습을 연상할 때 쉽게 위의 문명들이 떠오른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양과 서양 문명 사이 어딘가 존재했을 법한 문명 양식을 찾고 싶었습니다. 화면에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초기 모습이 함께 보인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스달 연맹궁은 중국 홍산 문명의 원형 제단과, 터키 괴베클리테페의 T자형 돌기둥, 첨성대 모양의 구조물, 메소포타미아 지구라트의 길고 높은 계단 등 동서양의 건축 양식들이 혼재 돼 있습니다. 괴베클리테페는 문명단계상으로는 신석기 문명이지만 불가사의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고, 첨성대 역시 기본적으로는 신라시대 건축물이지만 그 이전과 이후로도 비슷한 모양의 건축물이 없다는 점에서 그 원류가 아스달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습니다. 한자 문명권으로 봐서 연맹궁, 대신전 등의 주요 건축물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 즉 원과 사각형의 기하학적인 조화를 추구하도록 했습니다. 연맹궁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건축물, 의상, 소품, 분장, 미용 등 미술영역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의 혼재된 느낌을 위해, 수많은 역사적 자료와, 영상 콘텐츠를 참고했고 위와 같은 회의를 거쳤습니다. 일부 기존 작품과 유사하다는 평에 대한 판단은 시청자 여러분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스달 연대기의 촬영을 준비하면서 본적 없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매번 위와 같은 조사와 회의를 거쳤고, 그 과정에서 연출자와 스탭은 누구도 쉽게 어떤 콘텐츠를 따라하자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위에서 말씀드린 동양과 서양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아스 양식’에서 아스달 서민들의 옷과 분장에 비해 지배계급의 복식은 조금은 더 서양 쪽의, 시대에 비해 발달된 모습을 띄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동양의 복식에 가깝게 설정한다면 삼국시대를 다룬 기존 우리나라의 사극 양식이 연상되어 그보다 몇 천년 앞선 청동기 시대와 차별화될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고 중국이나 일본풍의 옷을 입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서양 고대 문명의 화려한 복식을 조금 더 참고하고 여기에 동양적인 요소가 조금씩 들어가 있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 이미 비단 등 다양한 옷감으로 옷을 지을 수 있었고, 청동뿐 아니라 금, 은, 보석 등 다양한 소재의 세공기술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옷과 장신구의 재단 및 세공수준이나 모양은 어쩔 수 없이 더 아름다운 쪽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어 드라마 배경보다 더 후대에 등장하는 옷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름답고 화려하면서 동양적인, 그러면서도 동양, 삼국 어느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는 ‘아스 지배 계급의 의복 양식’을 만들어 보려 했던 초창기의 목표에서 조금은 익숙한 모습의 복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특히, 태알하의 의상은 해족이 멀리 레무스라고 하는 발전된 문명세계에서 왔다는 설정으로 조금 더 앞선 단계의 의상과 장신구가 사용되었습니다. 수메르를 거꾸로 읽은 레무스야말로 대표적인 백워드 아나그램입니다. 수메르는 공식적으로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할 수 있는데, 스스로를 검은 머리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작가님들은 수메르에서 우리나라쪽으로 이동한 어떤 무리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고, 그것이 해족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양에서 왔으나 머리는 검고, 복식은 서양풍인 설정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Q. 큰 액수의 제작비가 계속 회자되었는데 부담스럽진 않으셨는지요 A. 네 당연히 부담스럽습니다. 일단 회자되고 있는 제작비는 맞지 않은 액수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역대 한국 드라마 최고 수준의 제작비가 들어간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알려진 제작비가 높으면 ‘들인 돈에 비해 어떻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홍보를 위해 제작비 규모를 알리는 제작사는 없습니다. 스튜디오 드래곤이 상장기업이다 보니 회사의 큰 돈이 움직이는 부분에 대해 투자자들에게 공개를 해야 하는 과정에서 400억 남짓한 정도의 규모가 알려졌고, 예정된 것보다 촬영 일수가 늘어나게 되면서 여러 사람의 추측을 거쳐 지금의 액수까지 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큰 돈을 들여서 드라마를 찍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스달 연대기는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장르의 드라마가 아니라 더더욱 위험이 큰 프로젝트입니다. 이 때문에 프로듀싱의 영역이 중요했습니다.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재원을 조달하고, 이를 다시 회수할 방법을 미리 마련해 두어 위험을 최소화 하는 것이 프로듀싱의 기본이고 스튜디오 드래곤의 프로듀서팀들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드라마의 제작비는 18부 전체에 걸쳐 고루 쓰였습니다. 종종 드라마 초반에 많은 물량을 투입하고 이후 용두사미가 되는 케이스도 있는데, 아스달 연대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끝까지 보시고 판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Q. 제작비에 비해 소품과 CG가 아쉽다는평, 두 부분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지요 A.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알려진 제작비는 업계의 추정치이므로 맞지 않는 액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드라마 최고 수준의 제작비가 들어간 것에 비해 소품과 CG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스달 연대기에 참여한 모든 스탭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고여서 같이 할 것을 부탁드렸고, 촬영을 하면서 최고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준비한 미술팀과 VFX팀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렇게 준비하도록 한 연출의 문제입니다. 물론 전문 스탭들은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연출자와 이야기해왔고, 저 역시 그분들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많은 것을 믿고 맡겨 왔지만, 기본적으로 큰 틀의 컨셉을 잡은 것은 연출이기 때문입니다. - 소품 아스달에 등장하는 소품은 위에서 말씀드린 회의를 거쳐 소품 스탭들이 일일이 만들어 내거나, 어렵게 구한 것들입니다. 청동기 시대이므로 아스달에 등장하는 청동 무기나 제례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들 모두 사전 자료조사를 거쳐 디자인 된 것들입니다. 한 세계의 소품을 모두 마련해야 하는 만큼 그 양과 질을 맞춰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었습니다. 소품에 대해 까다로운 제가 보기에도 완성도가 높은 소품을 준비해준 소품팀에게 저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럼에도 시청자 분들이 아쉬움을 느끼시는 부분이 있다면 제가 컨셉을 잘못 잡은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대흑벽을 오르내리는 데 사용한 ‘도르래’ 기술은 지레, 쐐기, 바퀴 등과 함께 단순기계(simple machine)에 속합니다. 단순 기계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이용해온 도구를 말합니다. 동네 마다 있던 우물의 두레박의 원리가 도르래라는 점에서 도르래의 원형이 되는 물건은 청동기 시대에 있었을 것으로 상상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도르래 기술을 이용해 승강기를 만든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고, 엄밀히 말해 우리나라에서 도르래를 사용한 거중기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 후기에 정약용에 의해서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드라마 안에서 보여진 것 같은 승강기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당연히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고, 해족이 극중 발달된 문명세계에서 넘어온 첨단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는 씨족으로 설정된 만큼 드라마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면 드라마 속에서는 가능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 CG 아스달의 CG는 아스대륙과 아스달성, 연맹궁, 거치즈멍 그리고 대흑벽, 소금사막, 신성한 나무, 예쁜 물가, 폭포 등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표현하는 데 쓰였을 뿐 아니라 늑대, 곰, 뱀, 황소, 말 등 동물들의 연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쓰였습니다. 이 중에는 비교적 아쉬운 상태로 방송이 된 부분도 물론 있지만 시청자들께서 CG인 것을 눈치 못 챌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CG들도 많습니다. CG는 단순히 기술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기획 단계, 촬영 단계, 후반작업 단계에서 연출, 촬영, VFX부서의 스탭들 간에 긴밀한 협의와 부단한 노력, 그리고 충분한 작업 시간을 거쳐야 완성됩니다. 아스달 연대기는 처음 기획단계부터 두 분의 VFX 슈퍼바이저가 헌신적으로 CG업무를 진두 지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물에 대해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지만, 그중 일부라도 시청자 여러분께서 만족하시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모두 연출의 탓입니다. 3. 편성 관련 Q. ‘아스달 연대기’는 파트별 6회씩, 총 3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파트3 작업은 얼마나 진행됐는지, 이같이 분리편성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A. 모든 촬영은 첫방송 시작전에 종료되었으며, 현재는 파트3의 후반작업이 진행중입니다. 파트1,2가 아스달 중심의 이야기라면 파트3는 아스 대륙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미드로 본다면 시즌 2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분리 편성을 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김영현 작가님께서 말씀하셨듯, 아스달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시청자 여러분이 좀더 친숙해진 이후에 더 확장된 공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더욱 박진감 있는 이야기를 잘 표현하기 위한 후반작업 시간이 더 생긴다는 또 다른 장점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Q. 시즌2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신가요. 저 역시 궁금합니다.^^ 4. 기타 Q. SNS에 남긴 심경글의 의미는 뭘까요 (첫 방송 직후 SNS에 게재하신 장그래 대사 인용글) ‘나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글을 게재한 것이 실제 ‘아스달 연대기’ 반응에 대한 심경이었는지요 A. ‘아스달 연대기’의 촬영 감독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매 씬, 매 컷 쉬운 것이 없네요” 그 동안 스탭, 연기자 모두 힘을 합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찍었고, 이미 촬영은 모두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드라마 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양도 많은 후반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더 열심히 잘 해서, 어렵게 찍은 씬들 고생한 보람이 있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에서 쓴 글입니다. 드라마의 모든 회차가 끝나고 나서 후회 없도록 하자는 의미였습니다. Q. ‘아스달 연대기’는 김원석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A. ‘한계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전에 없었던 새로운 작품을 하는 소감, 목표가 있다면 A.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 더 나올 수 있을 정도의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5. Part2, 3 관련 Q. 쿠키 영상이 매우 흥미로워 쿠키영상을 기다리는 시청자들도 많습니다. 쿠키영상을 도입하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A. 내,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언제나 불안했던 아스달 시민들은 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신의 말씀을 듣기위해서는 제관을 통해야만 했습니다. 제관의 직무를 독점하던 아사씨는 자신들만의 창세신화를 만들어 시민들의 의식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악용해 정적을 무너뜨리고, 부를 축적해왔습니다. 위와 같은 각 씨족의 이해관계라든지, 창세 신화, 리산과 아사신의 이야기, 아라문 해슬라 전설, 칸모르, 뇌안탈 등의 배경 지식을 더 잘 알면 드라마를 좀 더 재미있고 쉽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Q. 송중기의 1인 2역(은섬/사야)이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캐릭터인 은섬과 사야를 연출하는데 있어서 감독님은 어떤 점에 중점을 두셨나요. A. 은섬은 이아르크에서 자연을 맘껏 뛰놀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랐고, 사야는 필경관의 탑에 갇혀 햇빛도 제대로 못보고 외롭게 자란 인물입니다. 일란성 쌍둥이지만 두 극단의 환경에서 자란, 그래서 너무 다른 인물이 잘 표현 되었다면, 이는 전적으로 송중기씨의 노력 덕분입니다. 우선 은섬 씬을 찍기 위해 송중기씨는 몸의 부피를 키워 근육질로 만들었고, 이를 단기간에 근육을 빼고 사야의 몸으로 만드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근육질의 은섬보다 훨씬 말랐을 것이 분명한 사야를 표현하기 위해 몸 대역을 쓸까 고민도 했었지만, 연기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몸을 다르게 만들어 와서 본인으로 찍을 수 있었습니다. 몸 뿐 아니라 목소리와 말투, 눈빛에 이르기까지 연기자가 너무 디테일하게 다르게 준비해와서 연출자 입장에서는 그저 흐뭇하고 감사하게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Q. 파트2에서도 다양한 CG와 시각 효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또 강렬한 엔딩 또한 많이 회자 되었고요. 감독으로서 파트2 촬영당시 가장 공들였던 씬이나 인상 깊었던 씬이 있다면 어떤 장면일까요 A. 가장 인상깊은 씬은 언제나 가장 힘들게 찍었던 씬인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장면이 다 힘들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꼽기 어렵지만 파트2에서는 12회 엔딩인 신성재판 장면과, 돌담불 촬영이 가장 생각이 납니다. 특히 돌담불 깃바닥씬을 찍을 때는 진흙을 퍼올리는 설정상 세트 내부에 물이 고일 정도의 진흙을 깔아 놓고 찍었는데 물이 고여있다보니 하루만 물을 갈지 않아도 좋지 않은 냄새가 나고, 연기자들 피부에 발진도 나고 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진흙바닥에 뒹굴어가며 열연을 보여주신 배우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Q. Part2에서 은섬 사야를 비롯해 타곤, 탄야, 태알하 등 각 주인공이 운명적인 변곡점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또 새로운 인물들도 많이 등장했고요. Part 3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인물관계나 연출포인트는 무엇인가요? A. 은섬은 사트닉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주비놀 산장을 찾았다가 새로운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본인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잠재력과 운명을 깨닫게 되고 탄야와 와한족 사람들을 구하러 갈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됩니다. 탄야 역시 아스달의 대제관 아사탄야로서 타곤과 태알하 등의 기득권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연맹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자신만의 힘을 기르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타곤과 태알하, 그리고 아스달 부족 연맹이라는 기성 권력에 맞서는 과정이 Part3의 중심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타곤과 태알하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이용당하고 학대당한 아픔을 공유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로서 권력 의지를 키워온 캐릭터입니다.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이자 ‘서로를 위해 죽지 말자’고 맹세할 정도로 서로를 마음에 품은 사이입니다. 아사론과 미홀이라는 구세대 권력이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타곤과 태알하는 끈끈한 동지애와 팀웍을 바탕으로 굳건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은섬과, 탄야, 사야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위협이 되고, 안으로는 절대 권력을 향한 두사람의 욕망이 충돌하는 위기를 겪게 됩니다. 타곤과 태알하 둘의 관계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봐야할 점은 욕망에 충실한 이 두 캐릭터가 내뿜는 에너지와 이를 표현하는 두 연기자의 혼신의 연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Part3가 9월 7일 돌아오는데요. Part3을 더욱 즐길 수 있는 관전포인트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세상을 끝낼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은 결국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 운명을 타고났다는 말일 것입니다. 은섬, 사야, 탄야가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전설을 쓰기 시작하는 단계가 Part3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껏 스스로 한계에 부딪치며, 시행착오를 거쳐 성장해온 은섬과 탄야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힘을 얻어 가는지,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인 타곤과 태알하는 ‘사랑’과 ‘권력욕’ 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욕망사이에서 어떤 행보를 할지, 꿈으로 연결된 은섬과 사야는 어떻게 서로를 알아갈지, 대전쟁과 대사냥에서 살아남은 뇌안탈들은 어떻게 ‘사람의 시대’를 살아낼지... 등등 Part1,2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혼돈...! 일단 즐기시길! 흔들리는 모든 것은 결국 멈추는 법이니.” 극중 사야가 극도의 혼란을 일으키며 타곤을 위기에 빠뜨리고 한 말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직전의 혼란스러운 세상, 그 안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위기를 헤쳐 나가는지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스달 연대기는 본격 판타지 드라마라기 보다는 가상 역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문명의 태동기에 국가와 영웅이 탄생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국가도 영웅도 쉽게 탄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동안 주인공들이 역경과 아픔을 겪어왔습니다. 이제 그들이 강해져서 우뚝 서는 이야기가 Part3입니다. 이전에 없었던 드라마, 인류 역사의 기원을 다루는 드라마, 고대 인류의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라는 가치에 스탭과 연기자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최선을 다해 촬영했습니다. 조금 부족해 보이시더라도 버리지 않으신다면 새롭고 다양한 드라마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더욱 힘을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6. 제작환경 관련 Q. ‘아스달 연대기’ 현장에서 발생한 제작환경 이슈에 대해 연출로서의 입장이 궁금합니다. A. 질문에도 있듯이 연출로서, 현장에서 나오는 모든 얘기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어려운 상황의 스탭들 목소리 하나하나에 귀 기울였어야 했는데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한 아스달 연대기의 연출부, 제작부는 현장 스탭들이 제작 가이드 안에서 일하고, 로테이션 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회사도, 저도 열심히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더욱 철저히 지켜질 것이라 믿습니다. Q. 현재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과 개선 움직임에 대한 김원석 감독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현재 제작환경 상황과 향후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A. 반드시 제작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저는 주로 한 팀으로만 촬영을 해 왔는데 주당 2회 방송이 바뀌지 않는 한, 한 팀으로 촬영하는 것은 앞으로 쉽지 않은 시스템일 것 같습니다. 앞으로 모든 촬영은 미리A,B팀을 나누어 준비하고, 기술 스탭 뿐 아니라 미술 스탭도 반드시 로테이션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힘든 상황에 처한 스탭이 없는지 철저히 챙기겠습니다. Q. 고발 관련 현재 어떻게 상황이 풀리고 있는 것인지 A.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고발한 부분에 대해서는 촬영 당시 근로감독관이 현장에 나와 조사했고 현재 심리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촬영 현장에서 뭔가 갈등상황이 드러나게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매우 힘든 상황에 처했던 스탭이 있었고 그 분 혹은 그분들이 어려움을 호소해서 위 단체가 고발을 한 것이므로 연출로서 당연히 책임을 느끼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Q. ‘아스달 연대기’ 촬영 중 발생한 스태프들의 촬영환경 제보 이후 촬영현장의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A. 스탭 제작환경 문제가 불거진 후 더욱 철저하게 A,B팀을 나누어, 하루 촬영시간이 14시간이 넘어갈 경우에는 아예 낮씬과 밤씬을 나누어 하루에도 A,B팀을 돌리도록 했습니다. 로테이션 문제가 제기됐던 미술 스탭에 대해서도 반드시 로테이션이 되도록 권고하고 지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회사의 구체적인 입장 발표문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긴 답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20세기말 대중문화 ‘로그인’… 캐릭터·패러디 찾아보는 꿀잼

    20세기말 대중문화 ‘로그인’… 캐릭터·패러디 찾아보는 꿀잼

    낡은 트레일러들이 위태롭게 쌓인 빈민촌. 2045년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비아 도심 풍경이다. 드론이 피자를 배달할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미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식량 부족, 빈곤, 인구 폭발 등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사람들은 3D 헤드셋을 쓰고 가상현실 ‘오아시스’로 건너간다. 오아시스에선 원하는 대로 변신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서다. ‘오아시스’의 창시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는 죽으면서 자신이 가상현실 속에 숨겨 둔 이스터에그를 찾는 사람에게 오아시스의 소유권과 막대한 유산을 주겠다고 공언한다. 답은 1980년대 대중문화 속에 있다는 힌트만 남긴 채. 고아로 자란 평범한 10대 소년 웨이드 와츠(타이 셰리던)가 첫 승을 거두자 거대기업 IOI가 그를 제거하고 게이머 수천명을 키워 오아시스를 삼키려 한다.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렇게 디스토피아인 미래를 그리지만 관객들을 데려가는 곳은 1980~1990년대 한가운데다. 가상현실 ‘오아시스’의 환상을 이루는 콘텐츠들이 당대의 풍요로운 대중문화 유산들이기 때문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오아시스를 쟁취하기 위한 모험 곳곳에 이를 절묘하게 배치하거나 기발하게 패러디해 ‘덕후’들의 폭소와 호응을 자아낸다. ‘저작권 영화’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당시 영화나 애니메이션, 비디오게임 속 캐릭터들이 50가지 이상 총출동한다. 첫 액션 장면인 자동차 경주에서부터 ‘백 투 더 퓨처’ 속 드로리안,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주인공 카네다의 붉은 오토바이, ‘스피드 레이서’의 마하5 등이 경합을 벌인다. 이들의 질주를 위협하는 것은 영화 ‘킹콩’의 킹콩과 ‘쥬라기공원’의 티렉스. 뉴욕 도심과 도로를 종잇장처럼 구기고 박살내는 이들의 존재감과 파괴력은 한껏 흥분과 흥미를 불어넣는다.영화는 ‘보는 재미’, ‘찾는 재미’가 풍성해 좀처럼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배트맨, 조커, 에일리언, 아이언 자이언트, 처키, 고질라, 건담 등 친숙하고 반가운 캐릭터들이 언제 어디서 불쑥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무중력 디스코장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온갖 캐릭터들이 집결해 거대기업 IOI와 벌이는 전투 등 현란한 특수효과로 빚은 짜릿한 볼거리를 선사하며 숨 가쁘게 질주한다. 지난 20일 열린 기자 시사회에서는 특히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을 패러디한 부분에서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공포의 쌍둥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핏줄기, 좀비 레이디 등 영화 속 명장면들을 미션 수행 과정에 녹여낸 재치가 빛을 발했다. 반 헤일런의 ‘점프’, 비지스의 ‘스테잉 얼라이브’ 등 주크박스처럼 흘러나오는 영화 속 7080 팝 음악들도 설렘을 부추긴다. 때문에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젊은 감각을 지닌 감독이고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걸 받아들일 줄 아는 대가임을 확인시켜 주는 영화”(박우성 영화평론가)라는 평이 나온다.괴짜 천재, 제임스 할리데이가 자신이 만든 가상현실 ‘오아시스’에 쏟아부은 ‘19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과 경의’는 스필버그 감독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1982년 ‘E.T’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그가 ‘지배’하기 시작했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아바타’(2009)에서 미지의 세계로 미래를 그렸다면, 스필버그 감독은 자신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풍요로운 콘텐츠들로 가상현실을 영리하고 전략적으로 채웠다. 때문에 영화는 “1980~90년대 대중문화에 바치는 스필버그의 헌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박우성 평론가는 “할리우드의 산증인이자 세련된 영화문법의 생산적 계승자인 스필버그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할리우드가 걸어온 역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라며 “그는 할리우드의 위대함을 보여 줄 수 있는 코드들을 자신의 흥행 공식에 맞게 풀어냄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최신의 SF영화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20세기 말 대중문화에 대한 찬사는 당대 출현한 가정용 컴퓨터나 비디오카세트 레코더, 비디오 게임 등이 ‘인류사의 전환점’이자 ‘현재로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는 원작자의 의도가 심어진 것이기도 하다. 동명의 소설을 쓴 어니스트 클라인은 이번 영화에 각본가로 이름을 올렸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당시에는 가벼운 것들이라고 저평가했던 대중문화들이 현재 인문학의 바탕이 되고 한 세대의 고전이 된다는 걸 작품을 통해 보여 준 것이다. 결국 ‘레디 플레이어 원’은 ‘늬들이 20세기를 알아?’로 요약될 수 있다. 다만 80~90년대 대중문화를 모르면 영화 속 패러디들을 보고 웃거나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허남웅 영화 칼럼니스트는 “스필버그는 결국 세상을 지키는 건 일명 ‘덕후들’, 문화를 즐기는 세대들이고 문화가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중요한 방식임을 보여 줬다”고 의미를 짚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만화가 이현세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만화가 이현세

    갓 태어나서 큰집에 양자로 갔다 10대의 나는 연좌제에 떨었다 20대의 나는 까치였다 30대의 나는 최고 작가였다 40대의 나는 영화를 말아먹고 심의·검열과 싸웠다 50대의 나는 내 시대는 갔다고 생각했다 60대의 나는 웹툰을 배웠고 처음 신인상도 받았다 70대의 나는 동화를 쓰고 싶다 20년 동안 ‘삼촌’과 ‘숙모’로 알아 왔던 분들이 실제로는 나를 낳아 준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의 우둔함에 질식할 것 같았고, 아무 말도 안해준 식구들이 야속했다. 방황하기를 한 달여, 그 숙모가 조용히 말했다. “친자식에게 더운 밥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인 나만큼이나 아프겠니. 나를 봐서라도 이래선 안 된다.” 어머니는 눈빛으로 아들의 마음을 읽으셨던 것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박찬호가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자기가 이긴 게임에서 던진 공들, 경기장 입장권을 다 갖고 있는 친구예요. 미국 생활에서 여러 번 위기가 왔는데, 그때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서 포기를 못했다더군요.” 화실 창가에 놓인 박찬호 투구 모습 모형(피규어)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그가 말했다. 그는 박찬호를 매우 좋아하고, 또 친하다고 했다. 그의 등번과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사러 미국 LA 다저스 구장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자기를 정말 사랑합니다. 자유, 독립, 자존이라는,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3가지 가치를 가장 확실히 실현한 친구죠.” 그건 어떻게 보면 자신과 닮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화실. 이현세(60) 만화가는 아무런 준비 없이 평소처럼 앉아 있었다. 눈가의 주름과 희끗희끗한 머리만 빼면 영락없는 ‘까치’였다. -‘현세는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아직 모르나 봐요.’ 친척들이 하는 나직한 수군거림이 대형 스피커 음량으로 내 귀에 꽂혔다. 경주 시내로 나가 재수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20년 동안 ‘삼촌’과 ‘숙모’로 알아 왔던 분들이 실제로는 나를 낳아 준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참석한 문중 시제(時祭). 엄마와 숙모, 누나들 모두 나에게 비밀로 해 왔던 ‘천기’를 집안 어른들이 누설하고 말았다. 내가 갓난아기 때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고, 생부는 내가 아홉살 때 돌아가신 삼촌이었다는 사실. 나 자신의 우둔함에 질식할 것 같았고, 아무 말도 안 해준 식구들이 야속했다. -수험서를 덮고 매일 술만 마셨다. 왜 그렇게 20년을 꽁꽁 숨겼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혼자서 끙끙 앓으며 방황하기를 한 달여. 어느날 밤 술에 취해 ‘숙모’의 품에 안겨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그 숙모가 조용히 말했다. “친자식에게 더운 밥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인 나만큼이나 아프겠니. 나를 봐서라도 이래선 안 된다.” 어머니는 눈빛으로 아들의 마음을 읽으셨던 것이다. -그 일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대학을 포기하고, 만화의 길을 걷기로 했다. 혼자서 서울로 왔다. 경주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서울은 또 달랐다. 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정착할 곳도 찾아지지 않았다. 문하생으로 받아 달라고 무수한 만화작가 화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내가 제법 ‘성공’을 한 뒤 그분들 중 한 분을 뵀는데 “눈빛에 반항기가 줄줄 흘러 부담스러웠다”고 당시 얘기를 하셨다. 처음 자리잡은 곳은 순정만화로 유명한 나하나 선생님 화실이었다. 그다음은 개그만화의 하영조 선생님 화실. 액션만화를 추구했던 나에게 두 분 선생님과의 작업은 오히려 큰 도움이 됐다. 순정만화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미학과 개그만화의 익살맞은 표정 연기 등이 합쳐져 까치를 비롯한 내 만화의 등장인물 라인업이 구축될 수 있었다. -분단의 비극을 오롯이 간직한 우리 집의 가족사를 떼어 놓고는 나와 만화를 말할 수 없다. 일제 때 만주에서 살던 할머니는 해방 직후 서른 언저리에 아들 셋을 데리고 경북 울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향이라고 해도 먹고살 게 없었다. 얼마 후 둘째 아들은 “내가 돈 벌어 오겠다”며 다시 만주로 나갔다. 그러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둘째는 졸지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됐다.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6·25가 터지고 북한 인민군이 남쪽까지 밀고 내려오면서였다. 둘째는 인민군이 돼 나타났다. 형제가 어울리는 모습이 마을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화근이 됐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 첫째 아들이 괴뢰군 부역자로 몰려 헌병대에 끌려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큰아들은 처형되고 둘째 아들은 월북. 할머니는 차라리 만주에 계속 있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1956년 셋째 아들의 장남으로 내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나를 큰며느리에게 양자로 보냈다. 종가의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우리 일가는 내가 태어나기 전 전쟁 직후에 흥해(현재 포항시 북구 흥해읍)로 터전을 옮겼다. 부역자 가족이란 딱지를 달고서 울진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길러 준 어머니는 잡화점을 냈고, 낳아 준 아버지는 자갈땅을 사서 밭을 일궜다. 그 덕에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됐을 때 ‘삼촌’이 경주역의 기차 수리 공장에 취직했다. 어느 날 삼촌에게 “크레파스를 사 달라”고 졸랐다. 선뜻 돈을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극장에서 서부영화를 보고 만화책을 빌려 보느라 그 돈을 다 써 버렸다. 다음날 저녁 삼촌이 집에 들러 새로 산 크레파스로 그림 한번 그려 보라고 하셨다. 엉겁결에 나는 “저한테 돈 주겠다고만 하시고 그냥 가셨잖아요”라고 둘러댔다. 삼촌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가 착각했다”며 다시 돈을 주셨다. 아들이 거짓말하는 걸 다른 가족들이 알게 되는 게 싫으셨던 것이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날 수업을 받는데 작은누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교실로 왔다.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으로 뛰어갔는데 할머니와 큰어머니, 숙모가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앞에는 아버지가 하얀 무명천에 덮여 누워 있었다. 전기 감전이라고 했다. 삼일장 내내 나는 학교에 있었다. ‘삼촌은 나를 거짓말하는 아이로 알고 돌아가셨겠구나’ 생각하니 죄스럽기도 했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10여년 후 그가 나의 진짜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그 일이었다. -학교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그럭저럭 공부를 잘해서 지역 명문인 경주중에 입학했지만 줄곧 형사들의 감시 속에 살았다. 연좌제에 걸려 인생이 막혀 있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 갔다. 경주고에 들어가면서 원래 좋아했던 술이 더 잦아졌다. 방과 후에 당시 경주오거리에 있던 막걸리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고등학교 때 가장 열성이었던 건 미술부 활동이었다. 고1 때 유도에 빠져 2학년 때는 경북 대표로 전국체전까지 나가기도 했지만, 미술만큼은 아니었다. 특히 스케치는 어렸을 때부터 꽤 소질이 있었다. 미대 진학을 유일한 길로 생각했다. 연좌제의 공포가 나를 더욱 미술로 몰아갔다. 그러나 미대 입학원서를 쓰기 위해 안과에 가서 색맹검사를 했더니 색약 판정이 나왔다. 그때는 왜 그렇게 색약에 대해 엄격했는지. 당시 입시제도하에서 나는 미대 지원을 아예 할 수가 없었다. -유신과 군사정부 치하에서는 노래나 영화가 그렇듯 만화에 대해서도 검열이 심했다. 이를테면 갈등이 증폭되는 스토리나 격투 장면 같은 게 들어가는 그림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액션만화를 보면 커서 데모를 하기 쉽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스포츠 만화로 방향을 돌리고 ‘공포의 외인구단’을 처음 내놓은 것이 1982년. 26세 때였다. -내가 만화를 그리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캐릭터다. 날 대신해 움직여 줄 수 있는 아바타만 구현하면 그다음부터 소재나 스토리는 부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스토리 궁핍을 느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게 필생의 캐릭터인 ‘까치 오혜성’이다. 한(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의지로 부딪쳐 결국 파괴되는 인간이랄까. 가족사 때문에 트라우마와 핸디캡에 시달려야 했던 성장기의 아픔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기도 하다. -‘공포의 외인구단’ 이전에도 나는 대본소(만화방) 시장에서 꽤 인지도 있는 작가였다. 하지만 외인구단은 기존 작품과 차원이 달랐다. 어린이 만화만 있던 시절, 극단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주인공 영웅이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고난에 시달리다 결국 이를 극복하지만 최후에는 처절히 파멸하는 이야기의 만화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대략 한 달에 한 권씩 2년간 30권을 내놨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본소의 맨 앞칸에는 언제나 외인구단이 자리잡았다. ‘까치’를 이름으로 내건 만화방들이 속속 생겨났다. -나이 서른 전에 최고액을 받는 작가가 됐는데, 권투(‘지옥의 링’)든 시대극(‘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이든, 페미니즘(‘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이든 뭘 그려도 잘 팔렸다. ‘남벌’은 서울대 신입생들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로 선정됐다. 만화가 뜨니 나도 스타가 됐다. 맥주 등 광고 CF에까지 나올 정도였다. 돈도 정말 많이 벌었다. 돈이 나를 거쳐 밖으로 흘러나가는 게 문제였지만. 마흔을 갓 넘긴 1997년부터는 세종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나의 40대는 ‘전쟁’의 시기였다. 첫 번째 난관은 1996년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아마게돈’의 대실패였다. 한동안 영화계에서 최고의 손실액 기록을 보유했을 정도다. 총감독으로서 투자를 담당했던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손해를 많이 봤다. 돌이켜보면 그건 영화도 아니었다. 영화 문법도 모르는 총감독의 오만과 무지 탓이다. -두 번째 난관은 ‘천국의 신화’ 필화 사건이다. 대하 역사물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서른 살 때였다. 미국에 가서 광활한 그랜드캐니언을 마주하고 나니 ‘내가 왜 스포츠 만화나 그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0여년간 ‘환단고기’ 등 역사서들을 공부하고 ‘100권’을 목표로 1996년 1부 3권을 내놨다. 그러나 2년 뒤 청소년 음란물 시비로 검찰에서 기소하고, 법원이 300만원의 벌금형을 내렸다. ‘터무니없는 심의와 검열에 내가 고개를 숙이면 어느 작가가 이겨 낼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최종 무죄 선고를 받은 것은 6년이 흐른 뒤였다. 당시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1남 2녀)이 끝까지 아버지를 믿어 준 데 대해 지금도 고마움이 크다. -50대가 되니 세상이 많이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예전의 인기 만화 작가 ‘이현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엔 ‘내 시대는 갔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지만 이게 당연한 세상의 섭리 아닌가.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그려 큰 인기를 얻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표현이 좀 과한가?(웃음) 완벽하다고 여긴 작품은 없다. 그리고 원래 나는 ‘옥에 티’가 많은 작가다. ‘공포의 외인구단’에도 같은 사람인데 야구 글러브가 왼손, 오른손 바뀌어 그려진 장면들이 있다. 나는 쓰레기통 속에서 수많은 ‘가짜 꽃’을 피우다가 언젠가는 한 송이 진짜 꽃을 피우는 게 작가라고 여긴다. 내 작품은 아직도 쓰고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질 습작의 연장선상이다. 난 천재형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부모님께 극단적인 집중력과 낙관주의를 물려받았다. 한창때는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하루이틀 꼬박 밤을 새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덕분에 마감은 종종 늦었지만 펑크를 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남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어떻게 배가 고프고 화장실에 갈 수 있을까’ 생각했을 정도다. -얼마 전부터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서 ‘천국의 신화’ 6부를 시작했다. 남녀노소 다 볼 수 있도록 수위를 조절했지만, 나로서는 무척 감사한 일이다. 작년 말에는 네이버에서 ‘웹툰 신인상’까지 받았다. “60 평생에 처음으로 신인상을 받았다”고 하니 후배 작가들이 다들 자지러졌다. -지금 연재 중인 천국의 신화는 10년 정도 더 해야 한다. 6부는 고조선 멸망으로 끝난다. 이후 여러 민족들이 군웅할거했던 시기를 지나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예정이다. 그 뒤에는 나도 70대가 된다. 그때는 동년배를 위한 동화를 그리고 싶다. 아니면 손주를 위한 동화를 쓰고 있을지 모르겠다. 문제는 큰아이가 30대 후반인데, 이 녀석들이 셋 다 결혼을 안 했다는 거다. 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만화가 이현세(60)씨는 한국 만화의 ‘오늘’을 있게 한 대표적인 작가다. 1979년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한 그는 1982년 ‘공포의 외인구단’을 통해 운명에 맞서는 열정과 지고지순한 사랑을 역동적인 그림체로 선보여 만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이후 ‘지옥의 링’(1985), ‘야수의 전설’(1985),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1988), ‘아마게돈’(1988), ‘블루엔젤’(1989), ‘폴리스’(1992), ‘남벌’(1994), ‘천국의 신화’(1997) 등 히트작과 문제작을 내놓으면서 ‘불온’과 ‘미숙’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던 만화를 대중문화의 중심부로 격상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초로(初老)의 나이에도 ‘천국의 신화’ 6부를 웹툰에 연재하는 여전한 ‘현역’이다. ▲경주중·경주고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1997~) ▲한국만화가협회 회장(2005~2007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2009~2012년)
  •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⑨ 만화의 OSMU를 말하다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⑨ 만화의 OSMU를 말하다

    최근 안방극장에서 사랑받고 있는 드라마 ‘각시탈’은 원래 허영만의 만화가 원작이다. 1974년 만화계에 데뷔한 허영만은 두 번째 작품인 ‘각시탈’을 통해 인기 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이 만화는 1978년 김추련 주연의 ‘각시탈 철면객’이라는 영화로 변신해 스크린에 걸렸다. 1986년에는 일제시대가 배경인 원작과 달리, 북한을 배경으로 한 반공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만화의 ‘원소스 멀티유스’(OSMU·하나의 소재를 여러 장르에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만화가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변신하는 것은 기본. 음악과 공연, 게임, 캐릭터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화는 여러 콘텐츠 산업 분야에 풍부한 소재와 상상력을 제공한다. ‘각시탈’ 사례에서 보듯 다양한 형태의 재탄생을 통해 만화 자체의 생명력도 길어진다. 만화 창작자에게는 창작 활동을 뒷받침할 수익원의 다변화를 보장한다. 2010년 만화 산업의 OSMU 효과는 3144억원에 이르며, 이를 포함한 전체 전·후방 경제 유발 효과는 1조 3600억원으로 추산된다. 제작과 유통까지 포함하면 2조 1000억원대다. 만화의 영화화에 물꼬를 튼 작품은 1924년 첫선을 보인 노수현의 ‘멍텅구리 헛물켜기’다. 국내 네 컷 만화의 효시로 알려진 이 작품은 1926년에 미국 할리우드 코미디 형식을 빌린 우리 영화 사상 최초의 풍자 희극 영화 ‘헛물켜기’로 만들어졌다. 물꼬는 일찌감치 터졌으나 1970년대까지 스크린으로 옮겨진 만화는 그리 많지 않다. ‘각시탈 철면객’ 외에 김승호 주연 ‘고바우’(1959), 도금봉 주연 ‘왈순 아지매’(1963), 장미희 주연 ‘순악질 여사’(1979) 정도다. 다들 원작이 이야기 만화가 아니라 시사 만화라는 점이 흥미롭다. 각각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 정운경의 ‘왈순 아지매’, 길창덕의 ‘순악질 여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원작 인기가 영화화로 이어졌겠지만, 당시까지 이야기 만화는 어린이용이라는 사회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사영화 외에 1967년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이 처음 등장한다. 국내 최초 극장판 장편 애니메이션인 ‘홍길동’이다. 동생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을 형 신동헌이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 이 작품 이후 2010년 ‘마법 천자문’까지 국내 만화를 원작으로 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나, 그 숫자는 많지 않다. 1980년대에는 만화 르네상스에 힘입어 이현세의 ‘떠돌이 까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 등이 TV 애니메이션으로 활발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만화의 영화화는 1980년대 들어 본격화된다.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28만명을 끌어모은 ‘이장호의 외인구단’이 기폭제가 됐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원작이다. 이후 이현세·박봉성·허영만 작품 등 선 굵은 극화들이 잇달아 영화로 옮겨진다. 1990년대 초반에는 배금택의 ‘변금련’, 한희작의 ‘러브러브’, 강철수의 ‘돈아 돈아 돈아’ 등 농도 짙은 성인 만화들이 스크린 나들이를 하며 또 다른 흐름을 형성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만화 원작 영화가 개봉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됐다. 이 때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일본 만화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이 대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김용화 감독의 ‘미녀는 괴로워’다. 2006년에 나온 허영만 원작의 ‘타짜’는 관객 680만명을 동원하며 역대 만화 원작 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만화의 영상화는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공교롭게 만화 원작 첫 드라마도 시사 만화에서 비롯됐다. 1967년 TBC에서 방송한 ‘왈순 아지매’가 그 주인공. 이후 만화 원작 드라마가 안방극장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87년 허영만 원작의 ‘퇴역전선’이었다. 1990년대는 만화 원작 드라마의 가능성을 확인한 시기였다. 청춘스타 이병헌이 주연을 맡았던 1993년 이현세 원작의 ‘폴리스’와 1995년 허영만 원작의 ‘아스팔트 위의 사나이’가 성공을 거둔다. 특히 1998년 김희선·김민종이 주연을 맡은 허영만 원작의 ‘미스터Q’가 정점을 찍는다. ‘미스터Q’가 세운 최고 시청률 45.3%(평균 35.5%)는 역대 만화 원작 드라마 사상 최고 기록으로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서는 만화 원작 드라마 제작이 급증한다. 그러면서 2003년 방학기 원작 ‘다모’, 2004년 원수연 원작 ‘풀하우스’, 2005년 강희우 원작 ‘불량주부’, 2006년 박소희 원작 ‘궁’, 2007년 박인권 원작 ‘쩐의 전쟁’, 2009년 일본 만화 원작 ‘꽃보다 남자’ 등이 꾸준히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며 만화의 입지를 넓혔다. 특히 ‘다모’의 경우 팬덤을 형성하며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최근 만화 영화화의 대세는 웹툰이다. 웹툰에 내러티브를 본격 도입한 강풀 같은 경우 ‘아파트’를 시작으로 많은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 연극,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올해도 ‘이웃사람’과 ‘26년’이 대개 중이다. 강풀 작품을 비롯해 지금까지 영화·드라마로 만들어졌거나 판권 계약을 맺은 웹툰은 20개가 넘는다. 드라마의 경우 ‘꽃보다 남자’ 이후 일본 만화 원작이 크게 늘고 있다. 국내 만화계에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일단 지상파 외에 케이블TV 등 매체가 늘어나며 검증된 원작에 대한 수요가 커졌기 때문으로 보이지만 아시아 시장, 특히 일본을 겨냥한 드라마 수출도 고려된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 작품이 해외에서 재탄생하는 사례도 나오기 시작했다. 형민우의 ‘프리스트’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돼 지난해 개봉했으며, 하일권의 ‘3단합체 김창남’은 영국 제작사와 판권 계약을 맺은 상태다. 만화의 OSMU는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가 영화계, 방송계의 주축으로 성장하며 만화적인 문법과 아이디어, 클리셰(정형화된 표현)를 차용한 영화, 드라마가 쏟아지고 있다. 간혹 도용 내지 표절 시비가 일기도 한다. 명확한 기준이 없어서다. 창작자 사이에서 만화와 관련한 지적 재산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하는 이유다. 만화 원작자에 대한 권리 보호도 시급하다. 웹툰의 경우 1차적으로 무료이다 보니 저작권료가 저렴하게 책정되기도 한다. 또 만화가들이 계약에 서툴러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기도 한다. 이 때문에 만화가를 위한 매니지먼트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만화의 OSMU는 아직 시작 단계로 볼 수 있다. 미국·일본에 견줘 원작 만화와의 산업적 연결성이 약한 게 아쉽다. 게임, 캐릭터, 패션 등 부수적인 라이선스 사업들이 따라와야 하는데 우리는 대부분 영상화에 그치고 있다. 보다 넓은 영역에서 OSMU가 유기적으로 이뤄지고 그 피드백이 만화 창작 쪽으로 돌아오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백수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한국만화 명작 100선] 80년대 주름잡던 ‘공포의 외인구단’ 추억 넘어 전설로

    [한국만화 명작 100선] 80년대 주름잡던 ‘공포의 외인구단’ 추억 넘어 전설로

    전문가 100명을 통해 엄선한 ‘한국 만화 명작 100선’은 우리 현대사의 흐름과 삶의 패턴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포함된 가운데 한국 만화의 황금기로 평가되는 1980~1990년대 작품이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다. 황금기에 한몫했던 순정만화와 2000년대 이후 한국 만화를 이끌고 있는 웹툰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 ‘아기공룡 둘리’ 2위에 선정 만화 전문가들에게 최고의 명작으로 꼽힌 작품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1982)이었다. 당시 사회상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등 억눌린 젊은이들의 감성을 대변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이다. 이 만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뒀고, 그 주제가도 인기를 끌었다.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83)는 1위를 놓고 끝까지 경합하다 아쉽게 2위로 밀렸다. 전문가들은 허영만 ‘오! 한강’(1987), 고우영 ‘삼국지’(1968), 이두호 ‘임꺽정’(1991), 윤승운 ‘맹꽁이 서당’(1983), 길창덕 ‘꺼벙이’(1970), 양영순 ‘누들누드’(1995), 김산호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1959), 윤태호 ‘이끼’(2007) 등을 시대별로 고르게 10위권에 포진시켰다. 독자들의 선호도는 크게 달랐다. 인기 1위는 여전히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다. 그러나 그 뒤를 허영만 ‘식객’(2002), 박소희 ‘궁’(2002), 강풀 ‘그대를 사랑합니다’(2007), 전극진·양재현 ‘열혈강호’(1994), ‘아기공룡 둘리’, 천계영 ‘오디션’(1998), 조석 ‘마음의 소리’(2006), 허영만 ‘타짜’(1999),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1987)가 이었다. 비교적 창작 시기가 오래되지 않은 1990년대 이후 작품이 다수 포함되며 톱 10 목록이 달라졌다. 일반 독자 선호도 조사는 전국 15세 이상 49세 이하 남녀 가운데 명작 100선에서 5편 이상 읽은 1000명을 대상으로 올 1월 26~30일 이뤄졌다. 오차범위 ±3.1%로 신뢰수준 95%다. 선호도를 떠나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읽었는지를 뜻하는 열독률에서도 순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1위는 ‘아기공룡 둘리’(67.5%)가 차지했다. ‘먼나라 이웃나라’와 배금택 ‘열네살 영심이’(1988)가 63.1%로 공동 2위였다. 이진주 ‘달려라 하니’(1985), ‘공포의 외인구단’, ‘식객’, 이두호 ‘머털도사님’(1985), ‘꺼벙이’, ‘궁’, ‘타짜’가 뒤를 이었다. 남녀노소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명랑 만화체 작품이 크게 늘어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허영만 다섯 작품 선정돼 최다 영예 명작 100선 선정은 작가가 아니라 작품을 기준으로 진행됐다. 이 때문에 100선에 1편 이상 뽑힌 작가도 16명에 달했다. 이현세와 함께 한국 만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인 허영만이 무려 다섯 작품을 올려 1위를 했다. 초창기 ‘각시탈’(1974)에서부터 ‘오! 한강’과 ‘비트’(1994)를 거쳐 ‘타짜’, ‘식객’까지 포함됐다. 데뷔 40년이 가깝도록 항상 변화를 추구, 여전히 정상을 지켜내며 시대를 뛰어넘는 이야기꾼임을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만화는 어린이만 보는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린 성인만화의 개척자 고(故) 고우영도 시대를 반영한 해학과 풍자를 섞어 고전을 재해석한 ‘삼국지’와 ‘수호지’, ‘임꺽정’(이상 1974), ‘일지매’(1977) 등 네 편을 올렸다. ‘순정만화 레전드’ 가운데 한 명인 김혜린과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그리며 ‘국보급 작가’로 꼽히는 이두호가 각각 세 편을 100선에 진입시켰다. 이두호는 ‘머털도사님’, ‘객주’(1988), ‘임꺽정’이고 김혜린은 ‘북해의 별’(1983), ‘비천무’(1988), ‘불의 검’(1992)이다. 이 밖에 강풀·권가야·김수정·신문수·신일숙·양영순·윤태호·이상무·이정문·이희재·최규석·황미나도 두 편의 작품을 100선에 진입시켰다. ●1980~90년대 순정만화 14개 ‘약진’ 성별에 따라 선호도가 확연하게 갈리는 순정만화가 대거 포함된 점도 눈에 띈다. 모두 열네 작품이 포함됐다. 김혜린의 작품을 비롯해 황미나의 ‘굿바이 미스터 블랙’(1983)과 ‘레드문’(1994), 이진주 ‘달려라 하니’, 신일숙 ‘아르미안의 네딸들’(1986)과 ‘리니지’(1993), 강경옥 ‘별빛속에’(1987), 김진 ‘바람의 나라’(1992), 원수연 ‘풀하우스’(1993), 박희정 ‘호텔 아프리카’(1995), 천계영 ‘오디션’, 박소희 ‘궁’이다. 각종 만화 잡지가 쏟아지며 한국 만화가 황금기를 이뤘던 1980~90년대에 집중된 점이 눈길을 끈다. 대개 타 장르도 비슷한 상황이긴 하나 순정만화 장르가 잡지 시장이 열악해진 1990년대 후반 이후 약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2000년대 ‘웹툰’ 주류가 되다 역사는 짧지만 현재 한국 만화를 견인하고 있는 웹툰이 다수 포함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웹툰은 1990년대 후반에 싹을 틔워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의 톡특한 만화 장르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만화와 달리 독자와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졌다. 또 ‘디지털 키즈’를 끌어당기는 스토리텔링과 연출 방식으로 짧은 시간에 전통적인 만화 플랫폼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기성 만화가들은 디지털에 아예 진입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만화 문법에 적응하지 못하며 도태되는 경우가 많아 한국 만화계에 희망과 고민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강풀의 ‘순정만화’(2003)와 ‘그대를 사랑합니다’, 양영순의 ‘천일야화’(2005),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2006), 조석의 ‘마음의 소리’(2006), 윤태호의 ‘이끼’(2007), 주호민의 ‘신과 함께’(2010) 등 2000년 이후 작품 가운데 절반인 일곱 개가 웹툰이다. 웹툰 고유의 스크롤 방식은 아니지만 온·오프라인 동시 연재를 했거나 온라인에서 먼저 선보였던 허영만 ‘식객’과 최규석 ‘100도씨’(2009)까지 넓은 의미의 웹툰으로 포함한다면 웹툰이 한국 만화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확연해진다. ●이제 만화도 스마트 시대 명작 100선 선호도 조사와 함께 진행된 만화 열독 방식에 대한 조사 결과도 매우 흥미롭다. 만화를 즐기는 방식에 있어서 변화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1000명에게 만화를 보는 주된 방법을 물었더니 노트북이나 데스크톱 컴퓨터 등으로 본다는 응답이 42.7%로 가장 많았다. 주로 스마트폰을 이용한다는 응답자도 21.6%에 달했다. 결국 디지털 방식으로 만화를 즐기는 비중이 64.3%에 이른다는 뜻이다. 반면 전통적인 방식은 크게 위축됐다. 단행본 등 책 형태로 본다는 응답자는 22.9%, 스포츠신문에서 본다는 응답자는 9.4%에 머물렀다. 최근 흐름에서 가장 눈여겨볼 지점은 스마트 기기 부문이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보유한 비중은 79.2%로 집계됐다. 10명 중 8명이 스마트 기기를 보유한 셈이다. 이 가운데 스마트 기기를 통해 ‘매일’ 만화를 본다는 응답자는 16.0%였다. 매일 보는 경우를 포함해 ‘주 2~3회 이상’ 스마트 기기로 만화를 보는 비율은 44.3%에 달했다. 전체적으로 따져보면 스마트 기기 보유자들은 스마트 기기를 통해 만화를 월평균 8.3회 보는 것으로 분석됐다. 국내 만화계가 스마트 기기에 어울리는 만화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는 까닭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케이블·위성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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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쿨한 공포 국산 2편 자기야, 눈떠 응?

    ●‘4인용 식탁’ #“보이지 않는 것도 믿어야 해!” 피를 흩뿌리지 않으면서 침착한 주술적인 분위기의 공포를 원한다면 ‘4인용 식탁’이 제격이다.‘엽기적인 그녀’에서 화끈하게 잘도 웃던 전지현이,이번엔 남의 과거를 보는 신통력을 가진 기면증(갑자기 잠에 빠져드는 병) 환자가 됐다. 결혼을 앞둔 인테리어 디자이너 정원(박신양)은 지하철에서 죽은 아이들을 본 뒤로 신혼집 식탁에서 자꾸만 아이귀신들을 본다.헛것을 봤다고 믿고 싶지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연(전지현)을 만나면서 자신이 본 게 환상이 아니었음을 알고 경악한다. 영화는 단순한 공포물이라기보다는 비극적 미스터리극에 가깝다.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과거를 본다는 이유로 주위와 단절된 채 살아야 하는 연의 캐릭터는 비극을 구현해내는 극중 주요장치.아이귀신,정원의 거듭되는 악몽,고층아파트에서 아이가 떨어지는 장면 등에서 느껴지던 원색적 공포는 점점 슬픔으로 색깔을 바꿔간다.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진실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관계’가 얼마나 슬픈 것인지 영화는 섬뜩한 어법으로 웅변한다.피해의식에 젖어 세상에서 겉돌기만 하던 연과,그녀를 통해 자신의 어릴적 비밀을 들여다본 정원은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이수연 감독의 장편데뷔작.여성감독의 감수성이 녹아든 섬세하고 차분한 진행이 돋보인다.그러나 성마른 관객에겐 그게 오히려 걸림돌이다.특별한 반전장치없이 지나치게 느린 전개,속도감 없는 카메라 움직임,극도로 절제된 음향효과 등이 무료한 진공상태로 빠뜨리는 듯해 아쉽다.상영시간이 길다.2시간3분. ●‘거울속으로’ #””보인다고 다 믿지는 마!” 물이나 공기처럼 흔한 일상의 소재가 공포의 대상으로 돌변하는 것만큼 소름 돋는 설정이 있을까.김성호 감독의 장편데뷔작 ‘거울속으로’에서는 일상 어디에나 널려있는 거울이 공포의 근원이다. 화재사건으로 문을 닫았다가 재개장을 눈앞에 둔 백화점에서 의문의 연쇄살인이 일어난다.사장의 조카이자 퇴직한 형사인 우영민(유지태)이 보안책임을 맡지만 속수무책.옛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하형사(김명민)가 사건조사차 파견되지만,연쇄살인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 뿐이다. 영민과 하형사의 해묵은 갈등을 수면위로 노출시킨 뒤 둘을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영화는 하나둘 퍼즐을 짜맞추는 재미를 안긴다.물론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적 상황이나,익숙한 공포문법을 번갈아 동원하며 관객을 겁주기도 한다.천장 환풍구에 카메라가 찜찜한 시선을 보내거나,갑자기 자동차 문이 닫히고 피사체의 움직임과 거울의 이미지가 딴판인 장면 등은 관객을 꼼짝못할 정도로 긴장시킨다. 사건의 열쇠가 허무할 만큼 쉽게 노출되는 게 흠.백화점 화재때 죽은 여직원의 쌍둥이 여동생이 사건현장에 번번이 나타나고,그의 대사를 통해 일찍부터 공포의 실마리가 드러난다.‘꽃섬’에서 얼굴을 비쳤던 신인배우 김혜나가 억울하게 죽은 여직원 자매로 1인2역을 잘 소화해냈다. 황수정기자 s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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