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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대구읍성과 ‘중양 타령’

    [씨줄날줄] 대구읍성과 ‘중양 타령’

    1909년 1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중양 타령’이 실렸다. ‘중양가절 말 말아라/ 통곡일세 통곡일세/ 누백년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데 갔노/ 애구(哀邱) 대구’가 1절이다. ‘중양’은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이다. 그가 주도한 대구 읍성 및 감영 철거에 ‘애구 대구’라는 후렴구로 탄식하고 있다. 일제 침략에 따라 읍성과 관아가 본격적으로 철거되기 사작한 것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신호탄이 됐다. 읍성이란 지방 행정기관과 군사 방어시설을 내부에 두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시설이다. 그런데 읍성의 군사적 기능이 박탈된 마당이니 성곽으로 보호할 대상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구읍성과 경상감영은 그보다 앞선 1906년 철거가 시작됐다. 경상도 내륙의 대표적 상업 중심지였던 대구엔 한말 일본 상인들이 대거 찾아들었다. 외곽에 자리잡았던 일본 상인들에게 읍성과 관아는 자신들이 대구 상권의 주도권을 잡는 데 걸림돌이었다. 일본거류민단은 도로위원회를 조직해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 큰 길을 내는 방안도 추진했다. 흔히 ‘신념형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박중양은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대구읍성과 경상감영 객사 철거에 나섰다. 당시 일본 상인들은 저습지를 사들여 유곽 설치에 나섰고 성곽 철거로 나온 석재를 매립에 썼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대구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주민들이 박중양에게 노래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광복절을 앞두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애국지사 박원근의 작품이라고 전시하던 글씨가 같은 이름도 쓰던 박중양의 글씨일 가능성이 제기됐다는 소식이다. 박물관 전시에서 내려진 유묵은 ‘한 그릇 밥도 다 나라의 은혜’(一飯是國恩·일반시국은)라는 내용이다. 박중양은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인물이다. 그러니 박중양의 ‘나라’는 우리나라일 수 없다.
  • 발길은 흐른다, 역사적 원형이 있는 도시로[모종린의 문화로 읽는 AI시대]

    발길은 흐른다, 역사적 원형이 있는 도시로[모종린의 문화로 읽는 AI시대]

    조선시대 25개 거점 도시들 면면 물자·문화 모이고 축적되면서도향교·시장 등 원도심 공간의 기초로골목망·보행중심의 도시로 재탄생5차례 국토 개발의 광풍 속에서도살아남아 새 브랜드의 기초로 활용AI시대가 원하는 경험의 보물창고역사의 공간이 미래 경제 무대로인구 소멸의 시대 ‘부활 디딤돌’ 기대 지역소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나 모든 비수도권 소도시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도시는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모이고, 새로운 브랜드가 탄생하며,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골목이 붐빈다. 전주·경주·강릉·진주·제주가 대표적이다. 사람과 브랜드를 끌어들이는 이들 소도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상식적으로는 국가의 투자와 개발이 집중된 도시일수록 원도심도 활력을 유지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정반대다. 산업단지·혁신도시·신도시가 들어선 곳일수록 원도심은 쇠퇴했고 오히려 개발에서 비켜난 도시들이 원도심의 매력을 지켜냈다. 이 역설을 이해하는 열쇠는 뜻밖에도 240년 전 정조가 반포한 ‘대전통편’에 있다. ●조선시대 25개 핵심 거점 ‘대전통편’(1785) 기준으로 남한 지역의 목(牧) 이상 행정 거점은 24곳이었다. 한성부(서울) 1곳, 유수부의 강화·광주(경기)·수원 등 3곳, 부(府)의 경주·전주 등 2곳, 대도호부의 안동·강릉·창원 등 3곳 그리고 목(牧)의 충주·청주·공주·홍주(홍성)·원주·나주·광주(전남)·제주·능주(화순)·상주·진주·성주·양주·파주·여주 등 15곳이다. 여기에 공식 등급은 도호부였지만 1601년부터 200년 이상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경상도 전체를 관할한 대구를 더해 25개를 핵심 거점으로 삼는다. 이 25개 거점은 수백 년간 지역의 인재·물자·문화가 모이고 축적되는 뇌(腦)였다. 관아·향교·객사·시장이 읍치를 중심으로 배치되었고 그 집적이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원도심 공간의 기초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원도심의 ‘구조’란 작은 필지, 촘촘한 골목망, 보행 중심의 공간 구성처럼 사람과 상업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도시의 물리적 조건을 의미한다. 문제는 개항 후 150년이다. ●국토 개발의 다섯 번의 충격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의 근대화는 다섯 번의 대형 국토 충격을 거쳤다. 그리고 그 어느 충격도 조선시대 거점 체계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더 나아가 기존 원도심 구조를 보존하거나 활용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충격은 개항(1876~1899)이다. 강화도조약이 열어젖힌 개항장-부산·인천·원산·목포·군산-은 예외 없이 조선시대 도호부 급 이하의 포구이거나 어촌이었다. 500년 내륙 거점 체계가 하룻밤 사이에 해안선으로 이동했다. 전주·경주·공주·충주·상주는 졸지에 변방이 되었다. 두 번째 충격은 철도(1899~1906)다. 경부선 초기 노선안에는 청주·상주·공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단거리와 군사 논리가 역사를 우회했다. 완성된 경부선은 이 도시들을 모두 비껴갔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조선시대 3대 내륙 거점이었던 충주와 상주는 급격히 쇠퇴했고, 소읍에 불과했던 대전은 경부선·호남선 분기점이 되어 충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반면 경부선이 통과한 대구는 200년 감영 도시의 상업·문화 집적 위에 철도 교통망까지 더하며 경상도 최대 도시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세 번째 충격은 산업화(1962~1981)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산업단지 입지는 항구·평지·노동력 접근성 논리로만 결정되었다. 울산·포항·구미·여수·창원이 산업도시로 급부상했다. 이 도시들은 창원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시대 도호부 이하였다. 창원대도호부·진주목 같은 경남의 역사 거점들은 산업단지의 배후지로 흡수되거나 기능을 잃었다. 대구는 섬유산업 중심지로 산업화의 수혜를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원도심 상업 구조가 서서히 희석되기 시작했다. 네 번째 충격은 광역화(1963~1997)다.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으로의 인구와 자본 집중이 가속화되면서 주변 소도시들은 광역 대도시권으로 편입되거나 배후지로 전락했다. 수도권에서는 조선시대 유수부였던 강화·광주(경기)·수원마저 서울 팽창의 그늘 속에서 독자적 도시 정체성을 잃어갔다. 영남에서는 부산·대구 집중이 진주·경주 등 역사 거점의 상대적 위상을 약화시켰고 호남에서는 광주 집중이 나주의 배후지화를 촉진했다. 다섯 번째 충격은 신도시(1989~2010)다. 수도권 1기 신도시는 역사 거점과 무관한 신흥지에 세워졌다. 더 치명적인 것은 혁신도시였다. 나주 혁신도시는 나주 원도심에서 7㎞ 떨어진 곳에, 내포신도시는 홍주(홍성) 원도심과 분리되어 건설되었다.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한 정책이 역사 거점의 원도심을 행정·인구·자본이 떠난 문화재 섬으로 만들어 버린 역설이었다. 대구도 수성구·달서구 등 외곽 신시가지의 팽창으로 원도심 공동화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뜻밖의 패턴 그런데 뜻밖의 패턴이 나타났다. 전주를 보자. 경부선도 호남선도 비껴갔고, 전라선이 뒤늦게 연결되었지만 간선 철도의 혜택은 제한적이었다. 광역시도 아니고 국가산단 중심지도 아니다. 대체로 정책의 무관심 속에 놓인 덕에 조선시대 읍치 구조를 기반으로 형성된 필지 구조와 골목망이 유지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이후 한옥마을이 전국적 명소가 된 것은 기획의 산물이 아니라 구조의 생존 덕분이었다. 구조가 남아 있는 도시는 언제든지 콘텐츠를 얹을 수 있지만, 구조가 사라진 도시는 콘텐츠를 만들어도 정착하지 못한다. 강릉도 같다. 영동선이 연결된 것은 1962년으로 경부선보다 57년 늦었다. 국가산단도 없고 광역시도 아니다. 조선시대 읍치 구조를 기반으로 형성된 명주동 원도심의 필지와 골목망이 유지되었고, 2010년대 이후 강릉은 커피·아웃도어·로컬 브랜드의 거점이 되었다. 경주는 산업화의 충격을 비켜 가면서 역사 공간과 근대 원도심이 공존하는 구조를 유지했고, 그 위에 황리단길이 자라났다. 창원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산업화와 광역화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아 인구 100만의 대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창원대도호부의 원도심은 산업단지에 완전히 흡수되어 원형이 소멸했다. 도시가 커지는 동안 도시의 뿌리가 잘렸다. 수원은 화성(華城)이라는 강력한 문화 자산을 보유하고도 삼성전자·광교신도시의 팽창 속에서 원도심의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다. 이 대비에서 패턴이 보인다. 정책 수혜가 원도심 활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책의 소외가 원도심 구조를 보존했고, 그 구조가 2000년대 이후 활력의 토대가 되었다. 핵심은 조선시대 기원 자체가 아니라 원도심 공간 구조의 유지 여부다. 현재 활력을 유지하는 원도심의 필지 구조와 골목망은 조선시대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함께 형성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구조가 5대 충격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었느냐다. ●소도시의 미래 이 원리는 조선시대 거점 도시에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도호부 이하 소읍이었어도 원도심 구조를 유지한 소도시들이 2000년대 이후 새로운 활력을 회복하고 있다. 고창·담양·강진·영월이 대표적이다. 이 도시들은 조선시대 거점 도시가 아니었고 근대 국토정책의 혜택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원도심 구조가 파괴되지 않았다. 고창의 읍성과 골목, 담양의 죽녹원과 원도심, 강진의 강진향교 인근 시가지, 영월의 동강 변 원도심이 로컬 브랜드와 이주민의 거점이 되고 있다. 근대 개항 도시들도 같은 흐름을 보인다. 군산과 목포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거점으로 성장했고, 그 흔적인 근대건축과 골목 구조가 역설적으로 현재의 문화자산이 되었다. 군산 근대역사거리와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 전국적 관광지로 부상한 것은 원도심 구조가 유지된 덕분이다. 구조의 기원이 조선시대든 근대 개항기든 상관없이, 구조가 살아 있는 곳에 사람과 콘텐츠가 모인다. AI가 표준화하는 것은 기능이지만, 원도심 구조가 만들어내는 것은 경험이다. 인공지능(AI) 시대 개인 창업자와 로컬 브랜드는 대형 자본이 들어오기 어려운 작은 필지와 좁은 골목을 찾는다. 역사가 만든 공간 구조가 미래 경제의 무대가 되고 있다. ●미래 국토정책에 대한 교훈 미국의 도시설계 학자 조너선 바넷은 ‘도시설계’(City Design)에서 도시를 개별 건물의 집합이 아니라 거리와 공공공간이 만드는 조직체로 이해한다. 실제로 유럽과 북미의 많은 도시는 역사적 중심지의 거리망과 필지 구조를 유지한 채 새로운 주거지와 업무지구, 산업지구를 바깥으로 확장하며 성장해 왔다. 전주·경주·강릉 역시 원도심 구조를 유지한 채 새로운 경제와 문화를 축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도시 발전의 보편적 경로에 가깝다. 원도심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디지털이 공간의 제약을 허물수록 역설적으로 장소의 고유성이 경쟁력이 되기 때문이다. AI가 복제할 수 없는 것은 수백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원도심 구조다. 조선시대 거점 도시는 단순한 행정 중심지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도시의 작동 방식, 즉 도시 DNA다. 이 DNA는 세 가지로 구성된다. 사람과 상업이 만나는 공간 구조, 생활과 교류가 축적된 문화 자원 그리고 인재와 물자가 순환되던 문화 경영의 전통이다. 문제는 지난 150년의 국토정책이 조선시대 거점 도시 구조와 축적의 방식, 즉 도시 DNA를 계승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존 구조를 활용하기보다 새로운 입지에 기능을 분산시키는 방식이 반복되면서, 도시의 외형은 성장했지만 내부의 축적은 단절되었다. 이제 방향은 분명하다. 새로운 국토정책은 원도심 구조를 중심으로 수립해야 한다. 원도심이 살아 있는 도시는 그 구조를 보존하고 활용해야 한다. 반대로 원도심이 공동화된 도시나 애초에 원도심이 부재한 신도시에서는 건축마을을 공급해 로컬 크리에이터와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수백 년의 역사가 만든 공간을 보존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된 도시 DNA를 현대의 콘텐츠와 산업으로 번역해야 한다.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 전·현직 대구 부시장, 지방선거 출마 잇따라…“행정 전문성 부각”

    전·현직 대구 부시장, 지방선거 출마 잇따라…“행정 전문성 부각”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현직 대구시 부시장들이 잇따라 출사표를 내고 있다. 이들은 지방행정 실무를 총괄한 경험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표심 공략에 나섰다. 27일 대구 지역 정치권에 따르면 정장수 전 대구시 경제부시장은 이날 오전 국민의힘 대구시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04년 국회의원 보좌관을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국회와 지방정부에서 쌓아온 경험과 능력을 오롯이 중구 발전을 위해 쏟아붓고자 한다”며 중구청장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중구를 역사문화도시, 경제 도시로 만들기 위해 ▲경상감영·달성토성 복원사업 추진 ▲서문시장 4지구 재건축 ▲동성로 쇼핑클러스터 조성 ▲KTX 대구역 정차 등을 공약했다. 동구청장 선거에는 정해용 전 대구시 경제부시장이 출사표를 내고 표밭을 갈고 있다. 재선 대구시의원 출신이기도 한 그는 “골목상권과 전통시장 활성화를 통해 서민경제를 지키는 게 우선 과제”라며 “이와 함께 동대구벤처밸리, 첨단의료산업단지 등에 제대로 된 기업이 오도록 뛰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팔공산 구름다리, 갓바위 케이블카 설치를 통해 관광 산업도 활성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각각 홍준표 전 시장과 권영진 전 시장 재임 시절 정무직인 경제부시장을 지낸 바 있다. 행정관료 출신의 전·현직 부시장들도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대구시 행정부시장을 지낸 이상길 대구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은 북구청장 출마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그는 30여 년 동안 대구시와 행정안전부에 주로 근무했으며, 대구시에선 기획조정실장과 행정부시장을 지냈다. 이 부회장은 2020년 치러진 제21대 총선에선 대구 북구갑 선거구에, 제22대 총선에선 북구을 선거구에 출마한 바 있다. 현직인 홍성주 경제부시장도 달서구청장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그는 이르면 다음 달 초 공직에서 물러나 출마를 공식화할 것으로 보인다. 1996년 지방고시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홍 부시장은 대구시에서 문화예술과장, 정책기획관, 건설교통국장, 재난안전실장, 수성구와 달서구 부구청장을 지냈다. 대구 지역 정치권에선 이들의 출마가 각 지역의 선거 구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부시장 직함이 유권자에게는 매력적인 이력이 될 수 있다”면서도 “다만, 행정 전문성이라는 강점을 유권자의 선택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선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정장수 전 대구 부시장, 중구청장 출마…“완전히 달라진 자치행정 보여줄 것”

    정장수 전 대구 부시장, 중구청장 출마…“완전히 달라진 자치행정 보여줄 것”

    정장수 전 대구시 경제부시장이 6·3 지방선거에서 대구 중구청장에 출마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는 “대구시에서 시작한 일을 중구에서 제 손으로 마무리하겠다”며 자신이 적임자임을 강조했다. 정 전 부시장은 27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국민의힘 대구시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04년 국회의원 보좌관을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국회와 지방정부에서 쌓아온 경험과 능력을 오롯이 중구 발전을 위해 쏟아붓고자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대구의 심장인 중구가 다시 뛰어야 대구 전체가 살아난다”고 강조했다. 정 전 부시장은 최우선 공약으로 역사문화도시 조성을 꼽았다. 그는 “중구는 세계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역사적,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며 “경상감영 복원사업과 달성토성 복원사업을 완수하고, 대구 근대문화골목을 새롭게 정비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중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동성로와 서문시장을 주축으로 한 지역 경제 활성화도 공약으로 내세웠다. 정 전 부시장은 “동성로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직접 추진한 경험이 있고, 동성로 관광특구 지정, 2·28기념공원 리뉴얼 등의 성과를 냈다”며 “서문시장 4지구 재건축과 함께 동성로를 세대공감 쇼핑클러스터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이 밖에도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신천 프로포즈존·웨딩거리를 연계한 대한민국 대표 ‘사랑길’ 조성, KTX 대구역 정차 등을 약속했다. 정 전 부시장은 또 국회 보좌관과 경제부시장 재임 경험으로 현안을 해결하겠다는 자신감도 드러냈다. 그는 “자치구의 재정은 매우 열악하고 중앙정부와 광역지자체의 지원 없이는 변변한 사업 하나 제대로 추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중앙정부와 대구시에 있는 넓고 깊은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구청장 한 사람이 지역과 도시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정 전 부시장은 이재명 정부의 대구 취수원 이전 사업에 대한 입장도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안동댐으로 취수원을 이전하는 방안이 백지화되고 강변여과수와 복류수 활용 방안으로 추진되는 건 대단히 아쉽다”며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안동댐이라는 물그릇을 두고 왜 낙동강 물에 의존하는 지 의문이다. 환경부가 추진하는 방안을 조속히 검증해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정 전 부시장은 LG전자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국회의원 보좌관 등을 거쳐 대구시 시정혁신단장과 정책혁신본부장, 경제부시장을 지냈다.
  • 전국 감 주산지서 햇곶감 경매ㆍ축제 열린다

    전국 감 주산지서 햇곶감 경매ㆍ축제 열린다

    곶감철을 맞아 전국 감 주산지에서 햇곶감을 맛보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충북 영동군은 내년 2월 6일까지 상촌면 임산리 황간농협 상촌지점 집하장에서 햇곶감을 경매한다고 22일 밝혔다. 지난 16일 시작된 경매는 상촌면 장날에 맞춰 매달 ‘1’과 ‘6’이 들어가는 날(1·6·11· 16·21·26일)에 열리며 모두 10차례 진행된다. 주로 5㎏들이 종이상자(1접·100개 단위)를 거래한다. 군은 또 내년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영동곶감 축제’를 열어 감 고을의 위상을 이어갈 계획이다. 경남 산청군도 내년 2월 6일까지 매주 화·금요일 시천면 산청곶감유통센터에서 지리산 산청 곶감을 경매한다. 산청 곶감은 전국 대형할인점, 농협, 산지 직송 온라인 쇼핑몰 등 다양한 경로로 소비자에게 공급된다. 산청 곶감은 고종 황제가 그 맛에 감탄해 이름 붙여진 ‘고종시’로 만든다. 지리산과 덕유산 청정 자연에서 빚어낸 경남 함양군 명품 곶감도 지난 8일 첫 경매를 시작으로 본격 출하에 들어갔다. 이번 경매는 내년 1월 29일까지 매주 월·목요일 총 15회에 걸쳐 안의농협 서하지점에서 실시된다. 함양군은 내년 1월 16일부터 18일까지 ‘제10회 함양 고종시 곶감 축제’를 열고, 1월 말 서울에서 설맞이 특판 행사를 여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설 계획이다. 전국 곶감 판매량 1위를 자랑하는 경북 상주시는 내년 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 태평성대 경상감영공원에서 지역 유일의 겨울 축제인 ‘2026 상주곶감축제’를 개최한다. 곶감 특별경매를 비롯해 눈썰매장, 인형 극장, 전통 놀이 체험장, 겨울간식 코너, 구이마당 등 즐길 거리, 먹거리가 풍성하게 준비된다. 상주에서는 올해 1900여 농가가 1만 160t의 곶감을 생산해 총 35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한다. 앞서 충남 논산시는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양촌면 체육공원 일대에서 ‘2025 논산양촌곶감축제’를 개최했다. 시는 곶감과 크리스마스를 결합한 이색 콘텐츠로 방문객 13만여 명을 끌어모았다.
  • 계성학교 ‘50계단’서 바라보는 서문시장: 대구 근대사의 생생한 파노라마

    계성학교 ‘50계단’서 바라보는 서문시장: 대구 근대사의 생생한 파노라마

    대구의 심장부, 서문시장의 역동적인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바로 계성학교의 50계단이다. 이곳에 서면 왁자지껄한 시장의 활기 너머로 대구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한데 얽혀 펼쳐진다. 조선 3대 시장에서 전국 최대 야시장으로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장하면 서울의 경동시장이나 남대문시장이 먼저 떠오르지만, 조선시대 3대 시장은 수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대구의 ‘대구장’, 평양의 ‘평양장’, 그리고 논산의 ‘강경장’이었다. 당시 대구장은 영남 지역의 농산물과 수공예품이 모이는 상업 중심지였다. 대구장의 역사는 지금의 서문시장으로 이어진다. 원래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있었던 시장은 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서문 밖으로 이전했고, 이후 ‘서문시장’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문시장에 가면 구하지 못할 물건이 없다”는 말이 돌 정도로 번성했다. 현재 서문시장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위치인 대구 중구 대신동으로 강제 이전돼 형성됐다. 일제는 도시 구조 재편을 명분으로 ‘천황당지’를 매립하고 이곳에 시장을 옮겼다. 서문시장은 오늘날 대구의 대표적인 야간 관광명소인 ‘야시장’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50계단 품은 근대 교육의 요람, 계성학교 서문시장 옆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계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1906년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아담스에 의해 설립된 계성학교는 영남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이었다. 학교가 들어선 남성로는 원래 대구읍성 남쪽 성벽이 있던 자리로, 일제가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서 생겨난 길이다. 선교사들은 이곳을 대구 근대화의 거점으로 삼아 계성학교·신명여학교 등 교육시설, 제중원(현 동산의료원) 같은 의료기관을 세웠다. 특히 계성학교 내 ‘아담스관’은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이 인쇄된 장소로, 근대 교육과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최근에는 걸그룹 ‘뉴진스’의 뮤직비디오 ‘Ditto’ 촬영지로 알려져 많은 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상업과 근대 문화의 절묘한 만남 서문시장과 계성학교는 불과 수십 미터 거리에 위치하며, 대구의 상업과 근대 문화를 상징하는 두 개의 심장 역할을 해왔다. 일제가 의도했든 아니든, 상업 중심지인 서문시장이 근대화 거점인 남성로 옆으로 이전되면서 대구는 도시 성장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계성학교의 50계단에서 서문시장을 내려다보는 것은 단순히 시장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대구의 과거와 현재,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특별한 역사를 마주하는 경험이다. 왁자지껄한 시장의 활기와 고요한 근대 건축물들이 빚어내는 이 독특한 조화는 대구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특별한 이야기를 조화롭게 들려준다.
  • 계성학교 ‘50계단’서 바라보는 서문시장: 대구 근대사의 생생한 파노라마 [한ZOOM]

    계성학교 ‘50계단’서 바라보는 서문시장: 대구 근대사의 생생한 파노라마 [한ZOOM]

    대구의 심장부, 서문시장의 역동적인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바로 계성학교의 50계단이다. 이곳에 서면 왁자지껄한 시장의 활기 너머로 대구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한데 얽혀 펼쳐진다. 조선 3대 시장에서 전국 최대 야시장으로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장하면 서울의 경동시장이나 남대문시장이 먼저 떠오르지만, 조선시대 3대 시장은 수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대구의 ‘대구장’, 평양의 ‘평양장’, 그리고 논산의 ‘강경장’이었다. 당시 대구장은 영남 지역의 농산물과 수공예품이 모이는 상업 중심지였다. 대구장의 역사는 지금의 서문시장으로 이어진다. 원래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있었던 시장은 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서문 밖으로 이전했고, 이후 ‘서문시장’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문시장에 가면 구하지 못할 물건이 없다”는 말이 돌 정도로 번성했다. 현재 서문시장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위치인 대구 중구 대신동으로 강제 이전돼 형성됐다. 일제는 도시 구조 재편을 명분으로 ‘천황당지’를 매립하고 이곳에 시장을 옮겼다. 서문시장은 오늘날 대구의 대표적인 야간 관광명소인 ‘야시장’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50계단 품은 근대 교육의 요람, 계성학교 서문시장 옆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계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1906년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아담스에 의해 설립된 계성학교는 영남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이었다. 학교가 들어선 남성로는 원래 대구읍성 남쪽 성벽이 있던 자리로, 일제가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서 생겨난 길이다. 선교사들은 이곳을 대구 근대화의 거점으로 삼아 계성학교·신명여학교 등 교육시설, 제중원(현 동산의료원) 같은 의료기관을 세웠다. 특히 계성학교 내 ‘아담스관’은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이 인쇄된 장소로, 근대 교육과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최근에는 걸그룹 ‘뉴진스’의 뮤직비디오 ‘Ditto’ 촬영지로 알려져 많은 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상업과 근대 문화의 절묘한 만남 서문시장과 계성학교는 불과 수십 미터 거리에 위치하며, 대구의 상업과 근대 문화를 상징하는 두 개의 심장 역할을 해왔다. 일제가 의도했든 아니든, 상업 중심지인 서문시장이 근대화 거점인 남성로 옆으로 이전되면서 대구는 도시 성장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계성학교의 50계단에서 서문시장을 내려다보는 것은 단순히 시장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대구의 과거와 현재,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특별한 역사를 마주하는 경험이다. 왁자지껄한 시장의 활기와 고요한 근대 건축물들이 빚어내는 이 독특한 조화는 대구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특별한 이야기를 조화롭게 들려준다.
  • 근대 상업도시 모습 한눈에…‘영시 화재 의연비’ 대구 문화유산자료 지정

    근대 상업도시 모습 한눈에…‘영시 화재 의연비’ 대구 문화유산자료 지정

    ‘대구 영시 화재 의연비(大邱 令市 火災 義捐碑)’가 대구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이 비석에는 1899년 대구 약령시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와 그 복구 과정이 기록돼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30일 대구시에 따르면 의연비에는 화재로 피해를 본 순검교번소(현 경찰 지구대)와 관청 부속건물, 비단 상점 등 19개 상업시설과 민가의 복구를 위해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군이 주도적으로 의연금을 모금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한성은행소와 점포 6곳도 모금에 동참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이 갑오개혁 이후 대구의 상업 구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사료라고 판단해 문화유산자료로 지정했다는 게 대구시의 설명이다. 특히, 근대 대구의 특성으로 꼽히는 ‘상업도시 대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구시는 향후 이 비석을 교육 및 전시 자료로 활용해 시민들에게 대구의 근대사와 공동체 정신을 널리 알릴 방침이다. 이재성 대구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의연비가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며 대구시는 총 338건의 국가유산을 보유하게 됐다”며 “지역 내 국가유산의 보존·관리는 물론이고 지역민들의 역사 학습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2000년 역사 되찾는다…대구시, 달성토성·경상감영 복원 착수

    2000년 역사 되찾는다…대구시, 달성토성·경상감영 복원 착수

    대구시가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달성토성과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경상감영 복원에 나선다. 이를 통해 원도심을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켜 문화·관광자산으로 활용한다. 23일 대구시에 따르면 국가유산청과 협의를 거쳐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국가사적 달성·경상감영 종합 정비계획’은 13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이번 사업은 대구의 고유한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고 원도심 일대를 살아있는 역사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추진됐다. 달성토성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에는 261년 축조된 것으로 나오지만, 초기 철기시대 유물도 다수 발견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 중 하나로 꼽힌다. 둘레 1.3㎞, 높이 최고 15m로 흙으로 쌓은 성곽 위에 고려·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석축을 추가로 쌓아둔 형태로 고대 성곽의 구조와 특성을 잘 보여주는 유산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공원과 동물원 등으로 활용돼 역사적 가치와 정체성이 훼손된 채로 남아있었다. 이에 대구시는 총 655억 원을 들여 정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동물원 이전, 성체 및 내부 복원, 달성역사관·야외전시관·잔디광장 및 휴게공간 조성 등을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한다. 경상감영은 조선시대 경상도의 정치·행정·문화 중심지로 대구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핵심 유산이다. 2017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옛 병무청 부지 등 감영 터를 확보하는 등 총 662억원을 투입해 단계적으로 복원한다. 역사적 고증을 거쳐 일부 관아시설도 복원하고 현재 달성공원에 있는 감영 정문인 관풍루도 제자리로 옮길 계획이다.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대구의 원도심 일대는 달성토성과 경상감영, 근대골목으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는 관광 활성화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게 대구시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정기 대구시장 권한대행 행정부시장은 “이번 사업은 단순한 문화유산 복원이 아니라, 대구의 역사적 정체성을 되살리고, 미래세대에 물려줄 품격 있는 역사문화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며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자산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해 원도심 일원을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 대구 중구 어르신 한마당 행사

    대구 중구 어르신 한마당 행사

    대구 중구 어르신 한마당 행사 12일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에서 열린 ‘중구 어르신 한마당’ 행사를 찾은 어르신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대구 뉴스1
  • “곶감 농가를 살리기 위한 축제로 오세요.”

    “곶감 농가를 살리기 위한 축제로 오세요.”

    겨울철 대표 간식 중 하나인 곶감 관련 축제가 전남 무안국제공항 여객기 사고 희생자 추모 속에 경남 산청과 충북 영동, 경북 상주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곶감 주산지에서 잇따라 열린다. 산청군은 새해 1월 2~5일 시천면 산청곶감유통센터 일원에서 ‘제18회 지리산산청곶감축제’를 개최한다고 31일 밝혔다. 애초 예정됐던 개막식과 주부가요열창 등 공연 행사는 일체 열리지 않는다. 소원지 달기를 비롯해 윷놀이, 제기차기 등 전통민속놀이와 곶감경매, 곶감떡메치기, 곶감호떡 만들기 등 방문객이 직접 참여하며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군 관계자는 “연간 1300여 농가가 생산하는 2700여t의 곶감 소비 촉진을 위해 축제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영동군도 같은 달 3∼5일 ‘2025영동곶감축제’를 연다. 3일 오후 예정됐던 개막식과 축하공연, 난계국악단 연주회 등이 모두 취소된다. 곶감 음식 만들기 경연과 레크리에이션 등도 열리지 않는다. 대신 행사장인 영동천 하상 주차장에서는 곶감 등 농특산물 판매 부스만 운영된다.군 관계자는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다중이 집합하는 공연 등을 모두 없애는 대신 농민 피해를 우려해 판매장만 제한적으로 열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주시도 같은 달 9~13일 4일간 상주경상감영공원에서 ‘2025 상주곶감축제’를 마련하다. 올해 축제는 총 54개의 곶감판매부스를 마련, 역대 곶감축제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다. 축제장에서는 상주곶감 임금님 진상 재현과 상주곶감깜짝경매·곶감가요제 등이 메인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어린이들을 위해서 회전눈썰매·마술쇼·저글링 등의 놀이가 이어지고 회전바비큐·연돈볼카츠·군고구마 등 풍부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구이존이 운영된다. 코레일은 곶감축제가 이어지는 기간 동안 곶감축제장과 함창명주테마파크·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파머스룸(농장파케먹이주기체험) 등을 둘러 볼 수 있는 ‘기차+버스’ 관광코스를 마련했다.
  • “세계 모자 구경 오세요”…경북 상주서 ‘세계 모자 페스티벌’

    “세계 모자 구경 오세요”…경북 상주서 ‘세계 모자 페스티벌’

    ‘2024 상주 세계 모자 페스티벌’이 오는 4~6일 경북 상주 태평성대경상감영공원 일대에서 열린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다. 3일 경북도와 상주시에 따르면 이번 축제에 세계전통모자 전시관, 세계전통모자 패션쇼, 전통모자 학술 세미나, 전통모자 댄스 경연대회 등 모자를 테마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세계전통모자 전시관은 한국관, 세계관, 영상관으로 구성돼 전통모자에서 패션모자까지 세계 40여 개국의 모자를 전시한다. 갓을 비롯해 옛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전통모자를 디지털 기술로 연출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세계전통모자 패션쇼에서는 8개국 주한 외교사절단을 초청해 각국의 전통 복식을 선보이고, 한국의 시대별 모자와 궁중의상을 소개한다. 전통모자 학술 세미나에서 갓 만드는 장인의 강연을 들을 수 있으며, 전통모자 댄스 경연대회에서는 16개 팀이 모자를 소품으로 활용해 경연 형식의 공연을 펼친다. 또한 이번 축제에는 시민 1000여 명이 참여하는 거리 퍼레이드 전야제, 지역 예술인 공연, 모자 만들기 체험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 지역 명소에서 ‘작은 결혼식’ 어때요

    지역 명소에서 ‘작은 결혼식’ 어때요

    자치단체들이 지역 명소를 결혼식장으로 제공하고 있다. 결혼 비용 부담을 덜어주면서 작은 결혼식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다. 충북도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특별한 결혼식을 꿈꾸는 예비부부들을 위해 미동산수목원 숲속 결혼식장을 운영한다고 28일 밝혔다. 토·일요일만 운영되며 여유롭게 결혼식을 할 수 있게 1일 1예식이 원칙이다. 입장료 및 시설 사용료는 무료다. 작은 결혼식 문화 확산을 위해 하객은 양가 합산 200명 이하로 제한되고 대형 축하 화환 등은 반입이 안 된다. 우천 시 수목원 대강당을 이용하면 사용료를 내야 한다. 도 관계자는 “숲속 결혼식 취지에 맞게 절차와 규모를 간소화한 뜻깊은 친환경 결혼식으로 운영할 예정”이라며 “예식시간은 3시간 이내”라고 말했다. 세종시는 올해부터 예비신혼부부를 대상으로 공공시설을 이용한 나만의 결혼식 사업을 추진 중이다. 결혼식 장소로 개방되는 공공시설은 이응다리, 초려역사공원, 조치원 문화정원, 세종호수공원, 세종중앙공원, 세종시청 4층 책문화 센터, 조치원1927아트센터, 새롬종합복지센터 등 8곳이다. 세종시는 결혼식 공간조성 연출비 150만원도 지원한다. 시 관계자는 “저출산 극복 및 합리적인 결혼문화 확산을 위해 마련한 사업”이라며 “하루 평균 문의 전화가 5건 걸려 오는 등 관심이 높다”고 했다. 서울시는 북서울꿈의숲, 예향재 등 28개 공공시설을 결혼식 장소로 공개한다. 장소별로 결혼전문업체를 지정해 결혼식도 지원한다. 이용료는 장소마다 다른데 공짜인 곳도 있다. 서울시는 지난달 ㈜바른컴퍼니, 한국후지필름㈜과 공공예식장 결혼식 커플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이들 기업은 종이 청첩장 할인권 제공, 모바일 청첩장 무료 제작, 앨범·액자 제작 할인권 등을 지원한다. 경북 상주시는 2022년부터 작은 결혼식 사업을 벌이고 있다. 경상감영공원, 상주박물관 등을 결혼 장소로 제공하고 커플당 500만원의 예식비용을 지원한다. 최근 6쌍을 모집했는데 모두 채워졌다.
  •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최전선 영남 방어 수훈… ‘조선의 양장’ 꼽아[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최전선 영남 방어 수훈… ‘조선의 양장’ 꼽아[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정기룡(1562~1622)은 1592년 왜란 발발 당시 만 30세의 초급 무관이었다. 1586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고 병법 훈련을 관장하는 훈련원의 종8품 봉사(奉事)로 있었다. 이후 7년에 걸친 전쟁은 국가에는 위기였지만 담력과 용력, 병법 지식을 두루 갖춘 젊은 장수에게는 입지를 빠르게 다지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명나라 원병의 제독 마귀(麻貴)는 ‘조선의 양장’(良長·뛰어난 장수)으로 이순신·한명련·권율과 함께 정기룡을 들기도 했다. 정기룡은 정유재란 이후에도 왜적의 재침(再侵) 우려가 높아질 때마다 경상좌·우도병마절도사와 경상도방어사로 최전선인 영남 지역 방어의 책임을 우선적으로 맡았던 대표적 무장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직책이었던 삼도수군통제사로 통영의 진중에서 생을 마쳤다.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은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 땅 곤양 출신이다. 그가 무과에 급제하는 과정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처음 이름은 무수(茂壽)였는데 선조가 신룡(神龍)이 종루(鐘樓)에서 일어나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내관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무과 시험을 보러 온 정기룡이 종루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그를 불러들인 선조가 그의 됨됨이를 보고는 기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줄거리다. 영조시대 문인 황경원이 지은 정기룡 묘지명에도 등장하는데 사실처럼 회자되곤 한다. 그런데 그의 두 형 이름이 몽룡(夢龍)와 인룡(仁龍)인 것을 보면 기룡 역시 원래 이름인 듯하다. 설화는 그가 무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정기룡의 전투 기록은 남원 의병장 출신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처음 보인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던 4월 30일자다. 앞서 조정은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영남 방어의 책임을 맡기는데, 성응길과 조경을 각각 경상도좌우방어사로 삼았다. 훈련원 봉사 정기룡은 이때 조경 우방어사 휘하에 편입된 듯하다. ‘전라도방어사 곽영이 김산(김천) 추풍역에서 접전할 때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경상도우방어사 조경을 치려 했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정기룡이 돌진해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조경의 상처는 심각해 결국 방어사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병력을 해산해야 했다.경상도 순찰사 휘하에 배속된 정기룡은 이탁영이 남긴 ‘정만록’(征蠻錄)에 다시 등장한다. 경상감영 아전 이탁영이 순찰사 김수를 수행하면서 쓴 종군일기다. 정기룡은 충청·전라·경상 3도 근왕군이 왜군에 어이없이 패한 용인전투에 참전한다. 5월 4일자다. ‘멀리 연기와 불꽃이 곳곳에 치솟는다. 사상(使相·순찰사)은 경상도 장사 50명 남짓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유곡찰방 김충민이 적진으로 돌격해 왜적의 머리 하나를 베고 봉사 정기룡과 강만남, 군수 김경로도 각각 하나씩을 베어 왔다. 동향인 박태고도 왜병 둘을 쏘아죽이고 돌아왔다. 그 반가움을 어찌 말로 다 하랴.’ 경상감영 아전의 영남 군사 중심 서술은 불가피했다. 왜란 발발 당시 만30세 초급 무관선조가 ‘기룡’ 이름 내렸다는 설화개전 당시 종8품→정3품 목사로영조, 그의 공 기려 ‘충의’ 시호 내려잇단 전과에 고향 곤양 수성장에용화산 전투 승전 후 상주성 수복왜적 주요 보급로 확보 ‘숨통’ 죄어묘지에 ‘100차례 전투 패한 적 없어’ 정기룡에 대한 설명은 조금 더 이어진다. ‘정기룡은 진산(진주)의 동풍(同風) 강세정의 사위인데 경상도 김산 접전에서 머리 두 개를 베었고, 지금 다시 베어 이미 세 개가 되어 당상관이 될 만하니 축하할 일이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적의 머리 한 개를 베어 오면 공사천을 가리지 않고 등과한 것으로 하며, 두 개를 얻으면 6품관으로 올리며, 세 개는 당상관에 올리고 왜적 장수의 머리를 베면 가선대부로 올린다고 했다’는 것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에 해당하는 품계다. ‘동풍’이란 자신과 같은 아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정기룡을 더욱 강조해서 서술한 이유일 것이다. 잇따라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린 정기룡은 고향 곤양의 수성장(守城將)이 됐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진주성으로 차출되면서 그에게 역할이 맡겨진 것이다. 그런데 초유사 김성일은 정기룡마저 진주성으로 불러들여 유병장(游兵將)으로 삼는다. 김성일은 9월 경상우도관찰사에 오르자 정기룡을 다시 상주 가(假)판관, 곧 임시판관에 임명했다. 상주는 순변사 이일이 가토 기요마사 선발대에 참패한 고을이다. 상주판관 권길도 북천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순국했다. 상주가 지닌 상징성은 컸다. 정기룡은 김산 남쪽 금오산에 진을 쳤다. 상주목사 김해는 고을 백성을 이끌고 일월산 용화동에 머물고 있었다. 왜적이 용화동을 포위한 상황에서 정기룡의 공격이 시작됐다. 묘지명은 당시를 이렇게 적었다. ‘공이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왜노들이 산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지세가 험했다. 이에 우인(優人·배우)이 된 듯 말 위로 올라 “휘익” 하고 길게 휘파람을 불며 서기도 하고 눕기도 했다가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니, 왜노들이 생포하려 공의 뒤를 매우 급하게 쫓았다. 공이 왜노를 유인해 평원으로 나오게 한 뒤 재빨리 공격하자 왜노들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정기룡은 용화동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상주성을 공략한다. 왜적이 상주성에 은거하며 나오지 않자 백성들과 함께 서정(西亭)에 진을 치고 횃불을 묶어 공격했다. 왜적의 방비가 취약한 동문 밖 밤나무 숲에 군사를 숨겨두고 한밤중에 호각 신호로 서문으로 쳐들어가 막사에 불을 붙였다. 왜적이 놀라 동문으로 달아났는데 밤나무 숲 병사들이 400명 남짓한 적의 목을 베고 마침내 성을 수복했다. 1592년 11월이다. 왜적의 부산포 상륙 직후 속절없이 내주었던 경상도지만, 7월 영천성과 9월 경주성에 이어 상주성마저 되찾은 것이다. 왜적은 뜻하지 않게 보급선이 평안도까지 한없이 늘어진 마당이었다. 여기에 길목의 주요 거점마저 조선군에 내주어 교통로 확보가 쉽지 않았으니 군량을 약탈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조선군은 명나라 군사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도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분전하고 있었다. 정기룡의 후손인 정구정이 1746년(영조22) 펴낸 ‘매헌실기’에는 상주 판관 시절을 언급하고 있다. 1593년 봄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살리는 한편 관가의 곡식을 농민들에게 종자로 나눠 주었으며 파괴된 제방을 다시 쌓고 둔전을 경영해 군량미를 확보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 유정, 사대수, 조승훈을 맞아 응접했고, 5월에는 상주 가판관에서 상주 판관으로 승진했다. 6월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부인 진주 강씨가 치마를 잘라 공에게 편지를 남기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정기룡은 8월 상주 가목사에, 이듬해 11월 상주 목사에 잇따라 임명됐다. 1593년 11월 5일 선조실록에는 임금과 대신들의 대화 내용이 실려 있다. 동지중추부사 박진이 “기룡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다시 말을 타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조경이 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고 하자 선조는 “옛적에는 항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했다. 정기룡 같은 사람을 판관에 머물게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항오란 군사를 줄세운 것을 뜻하는데 병졸에서 입신한 무장을 언급할 때 쓰는 표현이다. 개전 당시 종8품 봉사가 만 2년도 되기 전에 정3품 목사로 뛰어올랐으니 그야말로 수직 상승이었다.그러자 영의정 류성룡이 “기룡은 젊고 재략이 있는가 하면 목민(牧民)에도 능하다. 중국 장수를 접대할 적에도 성의를 다한다. 상주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판관을 목사로 올리면 다시 판관을 낼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물다”고 거들었다. 상주 목사는 문관이 맡는 자리여서 군사보좌관인 판관이 있어야 했지만, 정기룡이 목사가 되면 판관을 별도로 임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영의정 겸 도체찰사 이원익이 도원수 권율·방어사 곽재우와 상주에서 계책을 논의했는데 “기룡이 아니면 불가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정기룡은 경상도 지역에 머물며 토왜대장(討倭大將)으로 활약했다. 왜란이 마무리된 다음에도 경상좌·우도병마절도사로 왜적 침입에 대비했다. 묘지명은 상징적 표현을 담아 다음과 같이 정기룡을 기렸다. ‘공은 사람됨이 걸출하고 용맹스러운 위엄이 있었으며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잘했다. 신장 7척에 눈이 밝아 밤에도 터럭까지 볼 수 있었고, 소리는 큰 종과 같아서 길게 휘파람을 불면 10리 밖까지 들렸다. 어렸을 때부터 강개했고 100차례 전투에서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었다. 죽인 적군이 1만명을 헤아리니 왜노들이 지금까지도 그 위엄을 두려워해 어린아이가 울 때 문득 공의 이름을 불러 그치게 하곤 한다.’ 영조가 추증한 시호는 충의(忠毅)다.
  • 국회 예산안 처리 지연에 속타는 지자체

    국회 예산안 처리 지연에 속타는 지자체

    ‘요즘 지자체 국가예산 담당 공무원들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출근한다. 국회 인근에 아예 캠프를 차진 지자체도 적지 않다. 여야가 내년도 예산안 처리에 합의할 경우 지역 숙원 사업비를 국회 심의 과정에서 한푼이라도 더 반영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예산안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 진전이 없자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처리가 법정 시한을 넘어 계속 표류하자 전국 지자체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전국 17개 시도는 물론 기초지자체들도 지역 숙원사업 관련 예산 반영 여부와 금액이 확정되지 않아 한숨만 내쉬고 있다. 20일 전국 지자체에 따르면 국회의 내년도 예산안 처리가 법정 시한(12월 2일)과 정기국회 회기(12월 9일), 김진표 국회의장 제시 시한(12월 15일) 등을 모두 넘겼다.예산안 대치 국면이 이어지자 지자체들의 긴장감과 피로도는 더욱 높아진 상태다. 국회 인근에 상주하며 국가예산 확보에 총력전 펼쳤던 지자체 공무원들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여야 대치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끝내 여야간 합의가 불발로 끝나 정부 원안이나 민주당 수정안, 의장 중재안으로 예산이 확정될 경우 국회 심의 과정에서 반영하려던 숙원사업들이 대거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지자체들은 정부 예산안이 지난 8월 말 확정돼 9월 2일 국회로 넘겨진 직후부터 지역구 의원과 기획재정부를 방문해 4개월째 줄곧 국가예산 확보 활동을 펼쳐왔다. 지자체 마다 정부예산안에 적게 반영됐거나 미반영된 사업들을 국회심의 과정에서 최대한 살려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재정 여력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서울시도 예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대표적인 사안이 지난 8월 수해 대비를 위해 강남역·광화문·도림천 등 침수 취약지역 6곳에 추진하는 대심도 빗물터널 사업이다. 시는 일단 내년에 399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이중 국비 비중을 25%에서 50%로 높이려고 TF팀을 만들고, 기획재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설명회 등을 통해 설득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오신환 정무부시장이 직접 발로 뛰고 있었지만 예기치 않은 여야 대립에 따라 난관에 부딪힌 상태”라고 토로했다. 이와 함께 65세 이상 무임수송에 따라 서울교통공사가 연 1조원 정도 적자를 보고 있어 예년처럼 올해도 전방위적으로 기재부와 양당에 PSO(공익서비스에 따른 손실보전 지원)를 요청한 상태다. 매입형 공공임대 주택 관련 예산을 늘리기 위한 노력도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예산안이 국회에서 표류하면서 성공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강원도는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도정 핵심 사업인 반도체 교육센터 건립을 비롯해 춘천 서면대교 건설, 양양국제공항 시설 개선 등의 사업 예산을 신규로 넣고, 춘천~속초 철도 건설과 강릉~제진 철도 건설, 이모빌리티 육성 사업 예산을 증액하기 위해 막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강원도 관계자는 “현재 수정안대로 예산이 확정되면 신규 반영이나 증액은 어려워진다“며 “여야 합의가 잘 이뤄져 정상화되길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대전시는 지난주까지 여의도에 캠프를 차리고 사업비 확보에 열을 올렸다. 이번주도 수시로 국회를 찾지만 기상청 이전에 따른 건물 임차비 23억원과 임업진흥원 청사 건축비 550억원 등에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기상청 임차비 확보에 차질이 없어야 이후 청사 건립비 368억원을 확보하는데 유리하고 계획대로 2027년 이전이 순조롭기 때문이다. 최영주 대전시 국비팀장은 “사업비가 제때 확보되지 않으면 그만큼 지역발전이 늦어져 국회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시는 여야의 내년도 예산안 처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예산안 처리가 올해를 넘길 경우 내년 사업 준비에 차질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울산시 관계자는 “국회가 연내 예산을 처리해주면 문제가 없지만, 계속 늦어지면 내년 사업 준비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국회 예산 처리 과정에서 사업별 예산이 변경될 수 있어 촉각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전북도의 경우 새만금 단지내 연결도로 등 70대 사업을 중점과제로 선정하고 지역구 의원과 기재부 등을 집중 공략했다. 국회 상임위 심의 과정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업들은 어떻게든 내년 예산에 최대한 반영시킨다는 전략이지만 언제 여야간 합의가 이루어질지 몰라 답답한 상황이다. 전북도 관계자는 “내년 국가예산 반영 목표를 9조원으로 잡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데 여야간 합의가 최대 관건”이라고 전했다. 충남도는 국내 석탄화력의 절반이 몰린 지역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도청 소재지 내포신도시에 청정수소시험평가기반구축 사업비 40억원, 서천군에 건립할 해양바이오인증지원센터 설계비 3억 5000만원을 확정한 상황이다. 강성만 충남도 국비전략팀장은 “이 사업들은 ‘청정 충남’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이어서 지난주까지 여의도에 국회 캠프를 차리고 활동했다. 조속한 합의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대구시는 지난 9월 경상감영 복원, 농산물도매시장 복구 등 54건에 1970억원의 예산을 증액 요구해 확답을 받았다. 그러나 예산안이 민주당 안으로 통과될 경우 한 푼도 반영안된다. 대구시 관계자는 “민주당 안대로 예산이 통과될 경우 내년에 계획한 사업들이 줄줄이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고 밝혔다. 부산시는 정부안에서 제외된 ▲낙동강 유역 안전한 먹는 물 공급체계 구축사업 ▲부전~마산 전동열차 국가시설 개선 및 운영 사업 설계비 등을 국회 심의 과정에서 확보할 계획이나 여야 대립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부산시 관계자는 “시민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어서 국회 인근에 직원들이 상주하면서 예산 확보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야 대립으로 정확한 상황을 알기 어려워 답답한상황이다”고 말했다.
  • ‘제승방략’ 완성한 군사전략가… 잇단 패전 탈출 ‘생존왕’ 오명[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제승방략’ 완성한 군사전략가… 잇단 패전 탈출 ‘생존왕’ 오명[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1592년 4월 25일 상주 전투는 조선의 중앙군이 개전 이후 처음으로 왜군과 맞섰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주 북천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조선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전투를 지휘한 순변사 이일(1538~1601)은 거의 단신으로 빠져나가 목숨을 부지한다. 사흘 뒤 벌어진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도 이일은 혼자 살아남다시피 하면서 훗날 ‘생존왕’이라는 오명(汚名)마저 얻었다. 하지만 이일은 이탕개의 난을 비롯한 여진의 준동을 분쇄한 북방의 스타였다. 왜란 당시의 조선의 국방 전략인 제승방략을 완성한 당대의 대표적 군사전략가이기도 했다. 상주읍성은 고려 말 왜구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처음 쌓았다고 한다. 읍성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완전히 파괴됐다. 이제 주변은 시가지로 변모해 성곽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4대문과 관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발견됐고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는 해자와 성벽 일부도 확인했다고 한다. 읍성은 해발 72m의 왕산을 아우르며 자리잡고 있었다. 경상감영도 왕산 아래 있었다. 일대는 이제 왕산역사공원으로 탈바꿈해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읍성 북쪽에는 동쪽으로 북천이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고, 남쪽에서는 병성천이 북동쪽으로 흘러 북천과 합쳐진다. 상주 중심가에서 걸어가도 부담 없는 북천 전투의 현장 주변도 도시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군이 진을 쳤을 북천 북쪽 언덕에는 ‘임란북천전적지’가 유적공원으로 조성됐다.상주 전투 참패의 원인으로는 제승방략의 오작동을 들기도 한다. 개전 초기 조선군의 방어전략은 4단계로 가동됐다. 왜군 선발대가 상륙한 부산지역의 경우 부산진성, 다대진성, 동래성이 1차 방어선이 됐다. 여기서 접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울산병영성에 경상좌도 지역 군사가 집결해 2차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전략이었다. 1차 방어선의 결사적 수성전에서는 왜군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울산병영성은 제대로 싸움도 해 보지 못하고 왜적에게 넘겨줬다. 1, 2차 방어선의 지휘관은 지방관이나 지방 군진의 수장이었다. 반면 3, 4차 방어선의 지휘관은 중앙에서 파견한 고위 무관이었다. 3, 4차 방어선의 지휘관 이일과 신립에게는 각각 순변사와 도순변사의 직함이 주어졌다. 순변사가 영남에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역할이라면, 도순변사는 왜군이 도성에 이르지 못하도록 충청, 경상, 전라 하삼도(下三道)에서 차단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당초 3차 방어선의 병력 집결지는 상주가 아니라 대구였다. 이일은 조정에 왜군의 침입 소식이 알려진 4월 17일 순변사에 임명됐다. 이일은 300명의 초급 무장을 대동해 대구에서 지역 병사들을 지휘하려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사흘이나 지체하면서 모은 무장은 60명 남짓에 불과했다. 이일이 한양을 출발한 4월 20일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선봉대가 이미 대구를 점령한 상황이었다. 대구 금호강변에 모여 있던 영남 진관의 병사들은 조정에서 보낸 지휘관의 도착이 늦어지는 사이 왜군이 몰려오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왜군은 곧바로 선산을 점령하고 4월 22일엔 상주로 방향을 잡는다. 순변사 일행이 경상도 땅에 들어선 것은 4월 23일이다. 이일이 결전지로 상주를 선택한 것은 불가피했다. 제승방략은 세종시대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한 김종서가 기초한 것을 이일이 시대상황에 맞게 보완했다. 이일은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시절인 1588년(선조 21) 제승방략 시행을 요청하는 장계에서 분군령에 따라 집결한 군사의 지휘권은 지역 사령관이 행사해야 즉각 대응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예를 들어 함경북도에서 대규모 변란이 일어났을 경우 경장(京將)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함경북병사가 함경남도 군사까지 지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요청했지만 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구에서의 오작동은 이일의 우려가 현실화한 것이다. 4월 24일 북천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장면은 징비록 내용을 옮긴다. ‘이일은 상주에서 겨우 불러 모은 군인들과 서울에서 함께 간 장수를 합쳐서 모두 800~9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냇가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는 가운데 대장기를 꽂아 놓았다. 말 위에 앉은 이일이 깃발 아래 서자, 종사관 윤섬과 박호, 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등이 말에서 내려 그 뒤에 섰다.’ 종사관 윤섬과 박호는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문관들이었다. 두 사람에 이경류를 더해 북천에서 순절한 종사관들을 ‘삼충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상 감사의 보좌관인 판관(判官) 권길은 이일이 도착했을 때 상주관아를 홀로 지키고 있었다. 김종무는 경상도 11개 역(驛) 책임자 가운데 유일하게 동원령에 응해 역마를 이끌고 상주로 달려왔다. 사근도(沙斤道)는 함양을 중심으로 하는 역마 노선이었다. 이일이 급박한 전투에 굳이 다수의 문신을 보좌관 격인 종사관으로 대동한 것은 이례적이다. 난중잡록이 이해를 돕는다. ‘박호는 김수의 사위다. 나이 22세. 18세에 소년 급제해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됐다. 이일은 박호가 자기 군문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해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이일이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전방으로 시야가 넓게 트인 북천 일대를 전장(戰場)으로 선택한 것은 북방 전투에서 얻은 자신감을 배경으로 한다. 두만강 일대 개활지에서 벌어진 여진과의 싸움에서 이일은 기병 전술을 활용해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이일이 상주에서 불러 모은 군사를 ‘징비록’은 ‘병사라고 할 수 없는 농민들뿐’이라고 했지만 학계에서는 상주 일대의 정예기병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병이었으니 북천을 적지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구에 집결했다가 돌아온 상주의 솔령장(率領將) 김준신 등은 직접 경험한 왜군의 기세와 조총의 위력을 설명하며 읍성 수성전(守城戰)을 건의했음에도 이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오판은 이어졌다. 난중잡록은 ‘이일이 척후에 밝지 못한지라,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군중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목 베어 죽인 다음 군중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었다’고 했다. 선조수정실록은 개령 사람이라고 했다. 오늘날 김천의 일부다. 개령 사람은 이일이 곧바로 군율을 집행하려고 하자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보고도 왜적이 오지 않으면 그때 죽이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이일도 일단 그 말을 따랐지만 다음날 새벽 개령 사람의 목을 베자마자 왜군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적이 마침내 조총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사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고 했다. 난중잡록은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았다’고 했다.조선군은 북방에서는 이미 여진족을 상대로 왜군의 조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승자총통을 실전배치해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규모가 더 큰 공용화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쪽에서 왜군을 상대로 조정에서 보낸 장수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일종의 지역 연합군을 지휘하는 상황에서는 화약무기 동원 시스템이 아예 없었거나, 있었다고 해도 작동하지 않은 것도 패인의 하나일 것이다. 수정실록은 전투 기록을 이렇게 끝맺는다. ‘이일은 군관 한 사람, 노자(奴子) 한 사람과 함께 맨몸으로 도망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했다.’ 실록의 원문을 찾아보니 번역본의 ‘맨몸’은 ‘나신’(裸身)이었다. 알몸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왜군에게 군인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무기와 군복을 내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상주 전투는 이렇게 끝났다.
  • 청춘맨숀 모던보이와 ‘삐-루 ’ 한 잔, 구상·이중섭과 노포 속 추억 한 잔

    청춘맨숀 모던보이와 ‘삐-루 ’ 한 잔, 구상·이중섭과 노포 속 추억 한 잔

    지난주에 대구를 찾았다. 광역시인 대구에는 많은 명소가 있지만 오로지 ‘힙성로’를 둘러보기 위함이다. 서울에 힙지로(을지로)가 있다면 대구에는 힙성로(북성로)가 있다. 요즘 대구 시민과 관광객에게 인기몰이 중인 북성로 일대를 부르는 별칭이다. 철가루 휘날리던 공구 상가와 토끼굴 같은 한옥 골목이 있던 낡은 원도심이 젊은 셰프와 바리스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트렌드 중심 거리로 탈바꿈했다.●북성로 공업사 골목… 기술·예술 복합창작 공간으로 탈바꿈 망치나 너트, 혹은 십자와 일자 드라이버에다 드릴까지 갈아 낄 수 있는 근사한 전동공구를 사려고 간 것은 물론 아니다. 쓸 일도 없거니와 무척 화가 났을 때 외엔 이런 걸 찾지도 않는다. 북성로를 찾은 이유는 ‘이곳에 오면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귀에 낯선 이들이 많을 테니 우선 북성로(北城路)가 뭔지 알아보자. 북성로는 대구 한복판의 옛 대구읍성 북쪽 거리를 이른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상인들이 많이 들어와 상권을 형성하며 순식간에 커졌다. 이 지역을 모토마치(元町)라 불렀다. 혼마치(本町)로 경계를 이룬 길 건너 포정동에도 일본인 거류민이 몰려왔다. 옛 대구읍성이 허물어진 자리에 새로운 중심가 모토마치가 조성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꽤 분주한 상권이 생겨났다. 근대식 극장, 식당, 다방 등 최신 상업 시설이 들어와 거리를 채웠다. 일본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조선 1호점도 이곳에 들어섰다. 백화점엔 조선 팔도에 보기 드문 엘리베이터도 있었다.조선인도 그 사이를 비집고 점포를 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도 이곳에 국수 등 식료품을 팔던 삼성상회를 열며 창업했다. 지금도 그 자리가 보존돼 있다. 늘 돈이 돌던 곳이라 신기한 현대 물품들이 선을 보인 곳이기도 하다. 각지에서 ‘모던보이’와 ‘신여성’이 모여들며 커피와 ‘삐-루’, 댄스 등 신문물을 즐겼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스타필드 1호점에다 현대명품아울렛, 홍대 클럽가, 이태원 먹자골목이 동시에 한곳에 생긴 것이다. 우현서루 같은 민족교육기관도 들어섰다.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시인, 소설가 등 문인과 화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도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에 모여 전시회나 발표회를 여는 등 문예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신문 기사도 쓰고 자기 글도 쓰는 언론인도 모였다. 마치 19세기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거리 같았다. 국내 최초 음악감상실인 ‘녹향’(현 대구문학관 지하1층)도 광복 직후인 1946년 이곳에 자리를 틀었다. 구하기 힘든 음반을 들여다 놓고 고급 축음기로 들려줬다. 1950년대 북성로에 공구와 소재, 기계부품 가게가 생겨난 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팔던 거리에서 유래됐다. 이후 대구에 섬유와 식품산업이 발전하며 관련 부품과 소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기지창 역할을 담당했다. 자본과 기술이 서울을 넘볼 정도였다. 북성로는 대한민국 산업을 대표하는 공업 거리가 됐고, 한때 “마음만 먹으면 탱크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돌았다. 그 기술이 지금은 예술이 됐다. 공구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북성로기술예술융합소 ‘모루’가 있다. 장인의 경지에 오른 기술인과 예술인들의 컬래버레이션(이종협업)과 기술 전승을 목적으로 세운 공간이다. 원래 ‘달방’(월세방)을 하던 쪽방여관 건물을 ‘기술×예술’ 복합창작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북성로의 정체성을 여실히 내보이는 곳이다. 현재는 북성로 1가와 바로 붙은 향촌동이나 교동, 서성로 일대까지 뭉뚱그려 ‘힙성로’라 부른다. MZ세대에겐 좁은 골목길과 낮은 건물,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카페와 갤러리, 공방, 베이커리, 바(Bar)가 기존 노포와 함께 공존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힙’(hip)했던 덕이다. 세련되고 유행에 민감하다는 ‘힙’이다. ●철물점 옆 모퉁이 카페 … 젊은 작가 모이는 문화놀이터 옛 북성로는 ‘아재들’의 거리였다. 평균연령이 마흔을 족히 넘었고 성비는 8대2 정도로 중년 남성 비율이 높았다. 서울로 따지면 영등포구 문래동 일대와 닮아 있었다. 1980년대 초반, 길거리에서 눈만 마주쳐도 싸우자고 덤벼들던 ‘춘추전국’의 시대엔 아마 발걸음조차 딛기 꺼리던 곳이었을 게 분명하다.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을 끼고 돌면 온통 철물점이다. 가게마다 트럭들이 ‘스뎅’(스테인리스) 봉과 파이프를 내리고 모터를 싣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지만 수창초등학교로 향한 좁은 골목을 들어서니 작은 카메라를 든 젊은 남녀가 셀피를 찍고 있다. 벽면에는 알록달록 벽화가 그려졌고 얼핏 봐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성들도 두셋 돌아다니고 있다. 달달한 블루베리 요거트를 마실 수 있는 모퉁이 카페도 있다. 북성로엔 이처럼 구(舊)와 신(新)이 공존한다. 영신(迎新)하긴 했어도 아직 송구(送舊)하진 않았다. 북성로의 수십년 역사 중 아주 생경한 풍경일 테지만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갑자기 ‘물’이 바뀐 것은 아니다. 1976년부터 전매청 연초제조창 직원 관사로 사용됐던 수창청춘맨숀은 2016년 문체부 도심 재생 사업에 선정되며 환골탈태했다. 낡은 아파트 숙소의 외벽은 그대로 살리면서 내부를 ‘문화 놀이터’로 만들었다. ‘수창청춘맨숀’으로 명명한 뒤 젊은 작가들이 입주하고 저마다 자신의 창의력을 뽐내는 무대이자 갤러리가 됐다. 얼마 전 유엔이 발표한 연령 구분에 따르면 65세(그것도 만으로)까지 청년이니, 누구든 청춘맨숀에 들러 쉬어 간대도 어색하지 않을 선택이다. 수창청춘맨숀에서 8월 26일까지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다’를 전시한다. 이달 매주 토요일 오후 4시에 거리극, 창작국악, 낭독뮤지컬, 다원예술 등을 소재로 수창청춘극장도 열린다. 일본인 상권이 장악한 북성로였지만, 항일애국지사 150명을 배출한 사학 우현서루(友弦書樓)도 있었다. 현재 북성로 대구은행 자리가 바로 우현서루다. 우현서루는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4년 이상화 시인의 조부 이동진 선생이 창설한 사학이다. 큰아들 소남 이일우 선생은 1만여권의 서적을 수입해 들여 놓고 매년 젊은 지식인을 뽑아 먹이고 재워 가며 가르쳤다. 191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될 때까지 구국 운동의 요람 역할을 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시인은 소남의 조카다. 이곳을 거쳐 간 독립지사들의 이름만 들어도 놀란다. 박은식(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이동휘(임시정부 국무총리), 장지연(황성신문 주필), 여운형(조선건국동맹), 김지섭(이중교 폭탄투척 지사) 등이다. 폐쇄 이후엔 훗날 대륜고등학교의 뿌리가 된 교남학원이 들어섰는데 교사가 이상화, 학생이 이육사였다. 건물 밖에 우현서루 이미지를 형상화해 놓았고. 내부에는 유물과 관련자료를 전시하고 있다.●이중섭 드나들던 백록다방 재현한 향촌문화관 북성로에서 중앙로 쪽으로 길을 건너면 오른쪽으로는 포정동, 왼쪽으로는 향촌동이 나온다. 서울에서 충무로나 종로 일부까지 ‘힙지로’라 부르듯, 보통은 포정동, 향촌동, 교동 일부까지 묶어서 ‘힙성로’라 지칭한다. 북성로에 큼직큼직한 산업시설이 많았다면 향촌동 쪽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자잘한 상업시설이 즐비했다. 꽃자리 다방 등 다방과 술집, 여인숙과 골목 사이엔 주택도 많은 데다 늘 대구역을 오가는 이들이 많아 향촌동 좁은 골목이 인산인해를 이뤘다.현재 힙성로의 힙한 매력은 어쩌면 70여년 전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동성로와 수성못 주변에 ‘빼앗긴 상권에도 봄은 다시 왔으니까’ 말이다. 향촌문화관에 가면 그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당시 ‘리즈’ 시절을 보냈던 향촌동 풍경이 여러 전시물 형태로 있다. 대구 최초 대중교통 부영버스가 거리에 서 있고 오랜 대폿집과 막걸리집이 있다. 피란을 온 이중섭이 매일같이 드나들며 담배 쌈지에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현 갤러리모델 자리), 호수다방, 화월여관(현재 판코리아 성인 콜라텍) 등도 디오라마와 포토존으로 현실 속에 재현해 놓았다. 3, 4층은 대구문학관이다. 시인 구상을 비롯해 현진건, 조지훈, 박두진 등이 대구 향촌동에서 서로 교분을 쌓으며 지냈다. 신상옥, 최은희 등 영화인도 이곳에 있었다. 향촌동 술집 대지바(현재 공사 중)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구를 나누고, 르네상스 음악감상실(현 판코리아 식당)에서 예술혼을 양육했다. 식민침탈 중에도, 동족상잔의 전쟁 중에도 향촌동은 너른 가슴으로 문학을 잉태하고 예술을 생산했다. “함께 읽고 더불어 크게 웃어주게나.” 향촌동에 살던 시인 구상은 이윤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현재 대구문학관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의 육필 원고를 전시 중이다.●‘초토의 시’ 출판기념회 열렸던 꽃자리 다방 1930년대부터 대구 원도심 역할을 톡톡히 해 온 것이 현대에 들어선 오히려 개발을 더디게 했다. 너른 부지가 필요했던 개발 세력은 고불고불한 골목에 낡은 왜식 한옥과 초라한 저층 건물 투성이였던 향촌동과 북성로를 외면했던 것이다. 경상감영 공원이 위치한 포정동부터 향촌문화관까지 향촌동 골목을 둘러보면 화려했던 당시의 영화가 낡은 건물 사이로 투영돼 보인다. 대보백화점, 무궁화백화점 등 당시로선 으리으리한 중대형 유통 시설에다 양화점, 양장점 골목까지 이어지며 ‘대구 멋쟁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맛 좋은 식당도 즐비했다. 그 유명한 뭉티기(생고기 육회)도 이곳에서 시작했다. 생고기며 불고기, 국숫집, 찌짐(전)집, 만두집, 냉면집, 곰탕집, 돼지국밥집 등이 향촌동 나들이를 나온 손님들로 긴 줄을 드리웠다. 저렴한 여인숙과 여관, 호텔 등도 곳곳을 채우며 영남 중심도시 대구의 숙박 기능을 담당했다. 극장 만경관 옆 사보이호텔은 1980년대 이 지역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한때 목욕탕이 딸린 여관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새 단장을 하고 다시 그 이름을 지켜 오고 있다. 덕분에 당시 향촌동 식당가의 불빛은 늦은 밤까지 이어져 대구의 뜨거운 밤을 밝히기도 했으나 1980년대 이후 동성로와 반월당, 수성못 인근으로 대구 중심 상권이 옮겨 가면서 ‘구 시내’로 몰락하는 듯했다.향촌동의 이미지는 2010년에 들어 비로소 재해석됐다. 골목 사이로 젊은 예술가들이 들어왔고 노회한 도시를 지키던 터주들은 이를 반겼다. 수제화 골목에는 달달한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베이커리와 향긋한 커피를 내리는 커피숍, 북카페 등이 들어왔다. 20·30대 시민과 관광객이 너도나도 향촌동을 찾기 시작했다.공구거리 북성로의 정체성을 재해석해 너트와 스패너 모양 마들렌을 구워 파는 북성로 공구빵(베이커리09)도, 예스러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한옥 카페 퍼센트(%) 14-3, 직접 볶아 내린 커피가 맛있는 카페 향촌도 명소다. 예전 구상의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자리를 루프톱 카페로 바꾼 꽃자리 다방, 골목 안 여인숙을 개조한 카페 ‘대화의 장’ 등은 금세 인스타그램 성지로 떠올랐다. 좋은 공간이 하도 많아 힙성로 카페 투어를 다니려면 시애틀 못잖게 ‘잠 못 드는 밤’을 각오해야 한다.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저렴한 가격에 세련되고 단단한 솜씨의 수제 구두를 살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반세기 골목을 지켜 온 구둣방도 덩달아 매출이 올랐다. 공방이 인기를 끌며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한국의 밀라노’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한밤에 북적이는 노포… 3000원에 맛보는 석쇠 불고기 원래 여름에 뜨거운 대구라지만 요즘 대구의 밤도 뜨겁다. 힙성로에 한옥이나 옛 여인숙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와 부티크 호텔이 들어서며 맛난 음식에 술 한 잔 걸치는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고 가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같은 힙성로 구역 내에도 권역은 조금 다르다. 교동 쪽에는 새로 생겨난 현대식 바나 카페가 많고 중앙로를 건너오면 오래된 식당과 주점이 많다.원래부터 유명했던 ‘북성로 돼지불고기’와 ‘북성로 우동’을 필두로, 50년 이상 자리를 지켜 온 노포들에 젊은이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60년 전부터 생고기를 팔던 대폿집 ‘너구리’는 ‘옛날국수’와 합치며 낮엔 국수, 밤에는 술 손님을 받는데 가격이 아주 저렴하다. 넉넉한 양은 냄비 국수(현지에선 국시) 한 그릇에 단돈 2000원. 오리지널 경상도식 진한 멸치육수 국수를 맛볼 수 있다. 3000원을 더 내면 돼지고기를 얇게 저며 간장 양념에 재워 구워 낸 ‘석쇠 불고기’를 ‘반 인분’ 시켜 먹을 수 있다. 반 인분이라니, 얼마나 합리적인가. 무조건 2인분을 시켜야 되는 집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게다가 소주 반 병도 팔면서 싫은 기색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힙성로의 경쟁력은 충분하지 않은가. 이 일대는 죄다 노포다. 모두가 상상 이상으로 저렴하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성식당을 찾았다. 한 입 크기로 얇게 저며 내 불맛에 충실한 석쇠갈비와 쿰쿰한 된장찌개와 함께 마지막 금복주 한 잔의 얼큰함을 즐긴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 70여년 전 어느 밤 이 변함없는 골목길을, 화가 이중섭도 시인 구상도 역시 비틀대며 걷고 있었을 것이라 가만 상상해 보니, 무척이나 영광이며 감회가 새롭다. 왜 낡아빠진 원도심 따위가 내게 이토록 확고한 여행 동기를 부여했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것 같다. 글 사진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힙성로 여행 체크리스트 (지역번호 053) 어떻게 가지?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 역에서 내리면 된다. 2, 3호선 청라언덕 역이나 1, 2호선 반월당 역에서 내려도 그리 멀지 않다. 버스는 대구콘서트하우스 앞이나 경상감영 앞 등의 노선을 타면 된다. 동대구역에선 401번, 909번, 708번, 급행1번 등이 경상감영공원 앞까지 간다. 뭘 먹지? 이 지역에는 노포들이 많다. 국수와 만두는 꼭 챙겨 먹어야 한다. 뭉티기(생고기)를 즐겨 보는 것도 좋다. 대구식 양념장이 색다르다. 좀더 새로운 스타일을 원한다면 동성로로 넘어가면 된다. 다락방만두는 찐교스, 군만두 등이 맛있고 저렴하다. 마산식당은 씨락육국수(시레기 육개장국수)와 돼지국밥이 유명하다. 한성식당은 석쇠갈비와 오뎅탕으로 술안주하기 좋은 곳. 된장찌개도 일품이다. 옛날국수(너구리 본점)는 2000원이란 황송한 가격에 멸치육수 국수를 맛볼 수 있다. 저녁에는 생고기와 간처녑을 먹으러 많이 찾는다. 상주식당은 추어탕으로 유명한 70년 동성로 노포다. 배추를 넣고 시원하게 끓여 낸다. 어디서 잘까? 여인숙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모텔도 많지만 조금 낙후된 편. 도보로 이동하기 좋은 리버틴호텔도 있다. 간단한 조식도 준다. 헤븐스토리호텔은 대구역과 가깝다. 중앙로 역과 가까운 2월호텔(동성로점)은 진골목, 약령시 등에 접근하기 편리하다.
  • 대구역 바로 앞 ‘대구역 한라하우젠트 센트로’ 시선 집중

    대구역 바로 앞 ‘대구역 한라하우젠트 센트로’ 시선 집중

    대구 중심가와 침산권을 잇는 태평로가 새로운 프리미엄 주거라인으로 주목받는다. 그동안 도시철도 2호선과 달구벌대로를 따라 지역 부동산이 들썩였다면, 최근 들어 대구 태평로 일대가 재개발, 재건축 등 정비사업으로 5,800여 세대를 아우르는 대규모 브랜드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신흥 주거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상업, 업무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대구 최중심가 동성로와 대구를 대표하는 주거타운으로 변모한 침산권의 다양하고 편리한 생활 인프라를 바로 한 가운데서 누릴 수 있는 위치인 태평로는 이제 프리미엄대로로 불리운 달구벌대로를 이어 새로운 프리미엄 라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대구역 주변은 대구권 광역철도 개발이 가시화되면서 개발 수혜를 선점하려는 수요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며 부동산 상승세를 이끌고 있다. 실제 대구역은 최근 구미~칠곡~대구~경산간 61.85km를 연결하는 대구권 광역철도 개발 호재가 발표되면서 일대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고 있다. 대구권 광역철도는 오는 2023년 개통을 목표로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며, 개통 시 태평로 인근의 광역교통망은 더욱 편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중구 태평로와 대구역 인근이 대구 부동산 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뛰어난 도심 접근성으로 원스톱 생활특권을 제공하는 ‘대구역 한라 하우젠트 센트로’가 주목받고 있다. 도시철도 1호선 대구역까지 도보 3분 거리인 데다 각종 사업·비즈니스·행정시설 등이 모여 있는 대구 최대 중심가인 동성로는 도보 1분, 롯데백화점까지 약 2분대에 이동할 수 있다. 여기다 단지 주변에 2·28기념중앙공원, 경상감영공원 등이 가까우며, 문화생활을 위한 대구콘서트하우스, 대구복합스포츠타운, 오페라하우스,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등이 인접해 있어 침산권 생활권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대구역 한라하우젠트 센트로’는 대구역 맞은편 태평로 중심 단지로 아파트 전용 84㎡A, 84㎡B 132세대, 오피스텔 27㎡OA, 59㎡OB 96실로 구성된다. 다양하고 편리한 교통편으로 도심 접근성이 뛰어난 데다 생활 인프라까지 탄탄히 구축돼 있어 분양 오픈 전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라공영은 합리적인 분양가로 혁신평면과 다양한 옵션품목을 무상 제공할 예정이다. 특히 오피스텔 분양을 희망하는 수요자를 대상으로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기본 무상옵션에 의류건조기 또는 양문형 냉장고를 추가로 제공하는 사전의향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모델하우스는 대구 동구 신천동에 선보이며, 근일 공개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상감영 실체 최초 확인

    경상감영 실체 최초 확인

    조선후기 경상도 중심관청이었던 경상감영(사적 제538호)의 원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흔적이 100여년 만에 발굴됐다. 17일 대구시에 따르면 경상감영의 정문 누각인 ‘관풍루’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관풍루는 100년 전인 1920년 경 현재 달성공원으로 옮겨졌다. 경상감영 진입로와 부속 건물들이 일본군 헌병대 건물로 교체될 때다. 나중에 대구경북지방병무청이 들어섰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갔으나 관풍루 흔적은 그동안 확인할 수 없었다. 또 이번 조사에서 경상감영 기초시설인 중삼문과 부속건물지 등도 실체가 드러났다. 중삼문은 관풍루와 선화당를 이어주는 문이다. 관풍루 이전 당시 철거됐는데 그동안 대략적인 위치만 가늠할 수 밖에 없어 감영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아쉬움이 많았다. 선화당 마당에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전해지는 ‘석인상’도 출토됐다. 발굴팀은 관아에서 석인상이 출토된 것을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시는 문화재청 허가를 받고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지난 4월 20일부터 대구 중구 옛 대구경북지방병무청 부지에서 경상감영지 유적 발굴 조사를 벌였다. 박희준 대구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이번 조사 결과가 경상감영의 배치 양상 및 구조를 복원하고 그 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학술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초역세권 49층 지역 랜드마크 역할 기대

    초역세권 49층 지역 랜드마크 역할 기대

    현대건설은 대구 중구 태평로 2가 7-1 일대에 ‘힐스테이트 대구역’을 11월 분양한다. 힐스테이트 대구역은 지하 4층~지상 49층, 오피스텔 1개 동과 아파트 5개 동 등 총 6개 동 규모로 들어선다. 오피스텔은 ▲43㎡A 50실 ▲43㎡B 50실 ▲46㎡ 50실이며 아파트는 ▲84㎡A 172가구 ▲84㎡B 89가구 ▲84㎡C 374가구 ▲112㎡ 168가구로 구성된다. 단지는 대구 구도심 중심이자 대구역 바로 앞에 위치해 말 그대로 초역세권 입지를 갖췄다. 대구 중구에서 가장 높은 49층의 최고층 단지로 조성돼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구도심 중심에 위치한 만큼 입주민들이 대구역 인근의 도심 생활인프라와 교통편의를 모두 누릴 수 있다. 대구지하철 1호선 대구역은 물론 개통 예정인 대구권 광역철도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신천대로, 태평로 등 대구의 주요 간선도로와도 가깝다. 2023년 개통을 앞두고 있는 대구권 광역철도 공사도 진행 중이다. 교육환경도 우수하다. 단지 인근에 종로초를 비롯해 달성초와 경일중, 경명여중·고, 칠성고 등이 있다. 대구 중앙도서관도 가깝고 대구가톨릭대와 경북대 의과대학도 인근에 있다. 도심 속 공원인 경상감영공원, 달성공원이 인접해 자연 친화적 주거환경을 갖췄다. 힐스테이트 대구역의 견본주택은 수성구 달구벌대로 만촌역 인근이며 다음달 중 개관할 예정이다. 견본주택 개관 전까지 중구 국채보상로 일대에서 홍보관을 운영한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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