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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남, ‘가미카제 후손’ 日배우 응원 논란에 유튜브 영상 삭제…“일제 미화? 왜곡” 반론도

    강남, ‘가미카제 후손’ 日배우 응원 논란에 유튜브 영상 삭제…“일제 미화? 왜곡” 반론도

    방송인 강남이 일본 배우와 함께 촬영한 콘텐츠를 공개했다가 거센 반발에 직면해 유튜브 영상과 소셜미디어(SNS) 게시물을 모두 삭제했다. 해당 일본 배우가 과거 일제시대 가미카제(비행기 자폭 전술) 특공대원으로 징집됐던 조부를 미화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배우의 조부가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자원했다는 근거도 없을뿐더러 해당 배우가 일제를 찬양하는 식으로 조부를 미화했다는 주장도 억측에 가깝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강남은 지난 20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동네친구 강나미’에 ‘지옥에서 누가 돌아왔게. 강나미 신길동 매운 짬뽕 챌린지 도전합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는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의 일본판 공식 스핀오프 ‘도쿄 버스트: 범죄도시’에 출연한 후쿠시 소타가 출연했다. 최근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후쿠시 소타가 한국어로 자신을 소개하자 강남은 “벌써 한국어로 회화까지 하느냐. 진짜 노력파”라고 칭찬했다. 강남은 SNS를 통해서도 “후쿠시 소타가 작품을 위해 체중을 15㎏ 늘렸다가 다시 감량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영상 공개 직후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후쿠시 소타의 가족사를 문제 삼았다. 그의 조부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 가미카제 특공대원 후보였다는 사실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공개된 바 있기 때문이다. 일본 후지TV는 2015년 8월 15일 종전 70주년 특별 다큐멘터리 ‘우리에게 전쟁을 가르쳐주세요’를 방영한 바 있다. 기획 의도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직접 산 증인을 찾아가 묻는다’는 것으로 후쿠시 소타를 비롯해 오구리 슌, 마츠자카 토리, 히로세 스즈 등 일본의 유명 배우들이 ‘질문자’로 출연했다. 이 중 후쿠시 소타는 가미카제 특공대원과 원폭 관련 주제를 맡아 살아남은 가미카제 특공대원과 히로시마 전차를 운전했던 여성 기관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가미카제 작전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폭탄을 실은 전투기로 연합군 함선으로 돌진하는 자살 공격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후쿠시 소타는 자신의 조부가 특공대원 후보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후쿠시 소타가 만난 특공대원은 다도 가문의 후계자로서 출격을 앞두고 동료 대원들과 함께 출격 전 차를 나눠 마셨는데, 당시 대원들이 참아 왔던 감정을 터뜨리며 “엄마가 보고 싶다”고 부르짖었던 기억을 꺼냈다. 이 특공대원은 “당시 특공대원으로 선발된 사람 대부분 강요당했다. 구타와 가혹행위로 세뇌당했고, 차라리 불시착을 해서라도 돌아가고 싶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지휘관이 종이를 나눠 주며 가미카제 작전 지원 의향에 대해 ‘열망’, ‘희망’, ‘갈 수 없음’ 중 하나를 선택해 적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분위기상 ‘갈 수 없음’이라고 적어 내면 비겁한 병사로 취급받아 온갖 가혹행위를 당할 것이 뻔했다고 주장했다. 후쿠시 소타는 이후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수많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고통스러웠다”면서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가 이런 역사와 사실을 제대로 느끼고 잊지 않은 채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카제 작전에 참여했거나 차출된 이들은 자원 형식으로 포장됐지만, 실제로는 10대 소년병과 학도병 등 미성년자와 청년들이 강제에 가깝게 동원돼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는 조선인 청년과 학생도 포함됐다. 그러나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마치 후쿠시 소타가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일제에 대한 충성과 희생에 대해 슬퍼하고 특공대원인 조부를 존경한다고 발언한 것처럼 알려져 공분을 샀다. 강남의 유튜브 채널에는 “후쿠시 소타의 할아버지가 가미카제 특공대원 후보였다는 사실을 아느냐”, “한국인이 됐으면 역사 공부부터 해라. 우리가 가미카제 후손까지 봐야 하느냐” 등 항의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심지어 “아내(이상화)가 한국 국가대표였는데 일본 가미카제 대원의 후손을 홍보하느냐”면서 아내 이상화까지 거론하는 댓글도 적지 않았다. 결국 강남 측은 유튜브 영상과 SNS 게시물을 모두 삭제한 상태다.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강남은 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상화와 결혼하며 한국으로 귀화했다.
  • [세종로의 아침]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만든 훈장

    [세종로의 아침]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만든 훈장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자행됐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새겨진 말이다. 전쟁 직후 유럽 대륙의 반민족 부역 행위자에 대한 단죄는 가혹할 만큼 엄격했다. 해방 직후 프랑스는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청산에 나섰다. 나치독일과 협력해 국가 반역을 주도한 최고위 정치인과 관료는 물론 말과 글로 협력한 지식인과 언론인까지 주저 없이 법정에 세웠다. 그 결과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가 6000여 명에 달했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5만여 명이 ‘비국민’으로 규정돼 투표권 박탈과 재산 몰수를 당했다. 사회 주요 직종 진출은 영구히 금지됐다. 즉각적인 숙청이 일단락된 뒤에도 프랑스는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법을 제정해 끈질긴 추적을 이어 갔다. 실제로 50여 년이 지난 1998년 파리 경찰국장, 예산장관까지 지낸 80대 고위 관료 모리스 파퐁이 나치 점령기 유대인 강제 수용소 압송 문서에 서명한 사실이 드러나자 10년 형을 선고한 사례는 그들의 집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등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수만 명의 부역자를 처벌하며 민족과 공동체를 배신한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기준을 분명히 했다. 반면 한국의 과거사 청산은 어땠는가.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출범했지만, 정권의 방해와 분열 속에 1949년 8월 사실상 와해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최근 불거진 한 배우의 증조부 친일 논란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발단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훈장’처럼 꺼낸 가문 이야기였다. 그는 ‘4대째 의사 가문’이라며 증조부가 ‘한양에 서양식 양의원을 최초로 개원하고 고종 황제를 진료한 인물’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증조부인 안상호의 실제 행적이 드러나며 파장이 일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안상호는 이토 히로부미 추도를 위한 ‘국민대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고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경성부 협의회원을 지냈다. 나아가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그가 신문에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고 밝히며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따른 사실까지 확인됐다. 처음 “사실무근”이라던 배우의 소속사는 사료가 확인되자 하루 만에 성급했던 대응을 사과했고, 배우 역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만 알고 가족의 자랑처럼 여겨 왔다”며 고개를 숙였다. 거센 비난 속에 예능 프로그램은 다시보기 서비스를 중단했으며 그를 모델로 세우던 기업들은 광고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일부 일본 언론은 이를 두고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묻는 ‘현대판 연좌제’라며 한국 사회의 반응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의 본질은 배우 개인이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다. 핵심은 조상의 친일 이력에 대한 일말의 성찰 없이, 이를 비판 없이 미화하고 소비한 ‘역사 인식의 부재’에 있다. 거센 비난은 부끄러워해야 할 친일의 유산이 세대를 거치며 자랑스러운 명문가의 훈장으로 둔갑해 버린 상황에 대한 성토인 것이다. 국가보훈부에 등록된 공식 독립유공자가 1만 8776명인 반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은 4776명에 그친다. 엄혹했던 식민지 시절 일제에 부역한 자보다 독립운동을 한 이가 4배가량 많다는 통계는 어딘가 이상하다. 여전히 기록되지 않은 부역자가 훨씬 더 많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번 논란이 한 개인을 향한 맹목적 비난에 그쳐서는 안 된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오늘날에 미친 영향을 냉정하게 묻고 해당 가문의 후손이 “몰랐다”고 말할 수밖에 없던 그 구조를 되짚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윤수경 문화체육부 기자(차장급)
  • 쓰레기 수레에 매인 순종마, 로트레크 [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쓰레기 수레에 매인 순종마, 로트레크 [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유전적 취약성과 사고로 단신의 삶사회 편견의 감옥에서 살았지만회화 통해 동시대 진실 포착 증언그림만큼은 어떤 틀에 가두지 않아“모든 갇힌 것은 죽는다” 그의 말영원의 생명력 가지고 아직 생생 수많은 예술작품 가운데 어떤 작품이 시대를 넘어 불멸의 걸작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저서 ‘명화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명화란 한 시대가 요구하는 주제를 천재예술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깊이 있게 담아내어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구는 시대가 요구하는 주제, 즉 시대정신이다. 명화는 한 시대의 사회와 경제, 문화적 변화를 담아내는 시각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 예술가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를 빼놓을 수 없다. 로트레크가 남긴 편지와 주변 인물들의 증언은 그가 시대를 기록한 관찰자이자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첫 번째 명언 “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며 논평하지 않는다. 나는 기록한다.” 로트레크의 예술세계로 들어가는 첫 문장은 그의 가장 유명한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미술아카데미는 고전적이고 역사적인 주제를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그림을 요구했다. 반면 로트레크에게 회화란 동시대의 진실을 포착하고 증언하는 기록 행위였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가 누렸던 풍요로운 황금기인 벨 에포크의 화려한 조명 뒤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로 향했다. 그의 그림 속에는 몽마르트르의 술집 손님들, 카바레와 댄스홀 무대 뒤에서 지친 몸을 추스르던 무희와 가수, 성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편견 없는 관찰자로서 삶의 진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철학은 대표작 ‘물랭루주에서’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1889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문을 연 카바레 물랭루주의 내부를 배경으로 화려하면서도 퇴폐적인 밤 문화를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화면 속 테이블 주변에는 당대 유명 댄서인 제인 아브릴을 비롯한 단골손님들이 앉아 있다. 화면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초록빛 인공조명을 받아 창백하고도 괴기한 얼굴로 떠오르는 가수 메이 밀턴이 등장한다. 당시 물랭루주를 비롯한 카바레들은 가스등 대신 새로운 문명의 상징인 전기 조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로트레크는 강렬한 전기 조명이 인물의 얼굴에 반사되어 피부색을 초록빛으로 변형시키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인공 빛이 만들어 내는 낯설고도 몽환적인 효과를 통해 화려한 표면 아래 피로와 긴장, 쾌락과 허무함이 뒤섞인 유흥가 밤의 민낯을 보여 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화면 한가운데 로트레크 자신도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곳의 단골손님이자 관찰자로서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장면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기법적으로도 이 작품은 매우 혁신적이다. 화면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인물을 비대칭적으로 배치한 대각선 구도, 강렬한 윤곽선과 평면적인 색면구성은 당시 유럽 예술계를 매료시킨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영향을 보여 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물랭루주를 낭만적으로 미화하지도 퇴폐적이라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냉철한 관찰자적 시선으로 떠들썩한 향락 속에서도 불안과 공허가 감도는 카바레의 현장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두 번째 명언 “자기 자신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로트레크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붙들어야 했던 생존의 문장이다. 그는 남프랑스 알비의 유서 깊은 명문 귀족 툴루즈 로트레크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부와 명예가 약속된 화려한 삶이었지만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취약성에 어린 시절 겪은 두 차례의 골절 사고가 겹치며 그의 키는 성인이 되어서도 152㎝에 머물렀다. 사냥과 승마, 귀족적 기품을 삶의 중심에 두었던 아버지 알퐁스 백작은 신체적 장애를 지닌 아들을 가문의 수치로 여기며 냉대했다. 로트레크는 야외 활동과 사교적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현실 속에서 그림에 몰두하며 또 다른 삶의 출구를 찾았다. 지역 미술교사 르네 프린세토에게 수업을 받으며 익힌 그림은 상처 입은 자아를 치유하는 마음의 피난처가 되었다. 차가운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 아델 백작부인은 외아들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전폭적인 경제적 지원을 보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호에 힘입어 예술가의 꿈을 키운 그는 열일곱 살에 파리로 향했다. 이듬해 그는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 전통적인 회화 기법의 기초를 다졌고 1884년에는 몽마르트르에 자신만의 화실을 마련하게 된다. 학교에서 정교한 데생과 기법을 배웠지만 인간의 다양한 표정과 군중의 심리를 읽는 방법은 길거리와 카바레에서 배웠다. 무엇보다 몽마르트르는 로트레크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자신을 견디는 법을 깨닫게 해 준 장소였다. 그는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하루를 버텨 내는 생의 끈질긴 생명력을 읽어 냈다. 이러한 그의 시선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물랭루주에서 나온 잔 아브릴’이다. 화면 속 여성은 물랭루주를 주름잡던 스타 무희 잔 아브릴이다. 로트레크는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순간보다 공연의 열기와 조명이 사라진 뒤 어두운 밤거리를 쓸쓸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맞춘다. 잔 아브릴의 표정과 자세에는 밤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피로와 권태, 현실의 고단함이 배어 있다. 그는 그녀를 눈부신 스타로 이상화하지도, 유흥의 상징으로 소비하지도 않는다. 대신 박수와 환호가 끝난 뒤 다시 홀로 자기 자신을 견뎌야 하는 고독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이 작품은 그가 왜 밤의 환락가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왜 그들의 삶을 그토록 깊이 이해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추하거나 불완전해 보이는 모습 속에서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안에서 인간의 진실을 읽어 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향락의 기록을 넘어 상처 입은 존재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명언 “포스터, 그것이 전부다.” 이 말은 로트레크가 광고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선구자였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에는 광고나 디자인을 예술의 한 분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에는 회화와 조각 같은 고급 미술과 광고나 디자인 같은 상업미술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로트레크는 그 장벽을 허문 최초의 예술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몽마르트르 밤 문화의 홍보 수단에 불과했던 포스터를 석판화라는 매체를 통해 독립적인 예술의 형식으로 끌어올렸다. 19세기 말 파리는 유흥가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광고 산업과 인쇄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던 시기였다. 포스터는 유흥가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대한 기대와 입소문을 만들어 내는 가장 효과적인 시각 매체로 떠올랐다. 카바레와 무도장, 음악당들은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광고 전쟁을 벌였다. 로트레크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 낸 화가였다. 그에게 포스터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라는 닫힌 공간을 벗어나 대중과 직접 만나고 소통하는 살아 있는 길거리 예술이었다. 그는 누구나 미술을 쉽게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포스터 제작에 쓰이는 석판화 인쇄술에 남다른 열정을 쏟으며 인쇄기법의 표현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했다. 그 결과 그의 포스터는 상업 광고의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예술적 완성도를 지니게 되었다. 강렬한 색면, 과감한 구도, 날카롭게 포착된 실루엣은 멀리서도 대중의 시선을 단숨에 붙잡았고 공연 분위기와 인물의 독특한 개성까지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전달했다. 로트레크의 천재성이 가장 강렬하게 발휘된 작품이 ‘물랭루주: 라 굴뤼’다. 그가 물랭루주를 위해 제작한 첫 번째 포스터이자 하룻밤 사이에 파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포스터 작가로 떠오르게 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전경을 과감하게 가로지르는 독특한 검은 실루엣이다. 바로 스타 남성 무용수 발랑탱 르 데조세의 옆모습으로 길고 유연한 몸의 선이 화면 전체에 강한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그 뒤편 중앙에는 물랭루주의 인기 여성 무용수 라 굴뤼가 흥겨운 음악에 맞춰 특유의 캉캉 춤을 선보이고 있다. 배경에 자리한 관객들의 검은 실루엣은 중절모와 장식 모자를 통해 부르주아 관객층을 암시하며 밝게 빛나는 무대와 어둡게 가라앉은 객석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로트레크는 노랑과 빨강, 검정이 이루는 강렬한 색면 대비와 대담한 실루엣을 통해 감상자가 실제 공연장에 있는 듯한 현장감과 공간감을 만들어 냈다. 또한 화면 상단에 ‘물랭루주’라는 상호를 세 차례 반복해 배치한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광고로서의 기능을 분명히 하면서도 동시에 화면 전체에 시각적 리듬과 역동성을 부여했다. 1891년 12월 이 포스터 3000장이 파리 거리에 붙자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대단했던지 밤마다 사람들이 광고판에서 몰래 포스터를 뜯어내 집으로 가져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생애 동안 31점의 포스터를 남긴 로트레크는 아트 포스터의 시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로트레크는 “나는 매일 저녁 일하러 술집에 간다”고 말할 만큼 술과 여자, 파리의 밤을 사랑했다. 밤의 카페에 앉아 피곤과 권태가 배어 있는 표정으로 술잔을 마주한 두 남녀를 그린 ‘카페 라미에서’는 화려하면서도 퇴폐적인 밤 문화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한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집요하게 응시했던 로트레크의 삶은 동시에 스스로를 서서히 갉아먹는 시간이기도 했다. 파리 유흥가에서의 방탕한 생활과 과도한 음주, 그를 오래도록 괴롭히던 병마는 몸을 빠르게 쇠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1901년 9월 9일 서른일곱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로트레크는 자신의 귀족적 혈통과 장애를 지닌 신체를 대비시키며 스스로를 “쓰레기 수레에 매인 순종마”로 비유할 만큼 사회의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만큼은 어떤 틀에도 가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모든 갇힌 것은 죽는다.”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
  • 2032년 3만석 잠실 돔구장 시대 열린다…5000억원 들여 폐쇄형으로

    2032년 3만석 잠실 돔구장 시대 열린다…5000억원 들여 폐쇄형으로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이 오는 2032년 3만석 규모의 최신식 돔구장으로 변신한다.(서울신문 2023년 4월 15일 1·22면 보도) 야구장이 보이는 객실을 갖춘 호텔과 레스토랑 등이 확충된 복합 스포츠 레저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셈이다. 약 5000억원을 들여 폐쇄형으로 지어질 전망이다. 18일 서울시에 따르면 북미 출장 중인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미 프로야구(MLB)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홈구장 ‘토론토 로저스센터’를 방문해 잠실 일대에 돔구장을 비롯한 첨단 스포츠·전시컨벤션 시설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낡고 오래된 잠실야구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3만석 규모의 최신식 폐쇄형 돔구장을 만들어 서울의 랜드마크로 삼겠다는 게 뼈대다. 지난 2015년 구로구 고척동에 지어진 고척 스카이돔은 좌석이 1만 6000석에 불과한데다 교통이 불편하고 주차시설이 부족한 점이 한계로 지적돼왔다. 이에 시는 잠실운동장·마이스 복합사업 우선협상대상자인 ‘(가칭)서울스마트마이스파크(주간사 ㈜한화)’와 함께 국내 최대 규모의 돔구장을 계획하고 있다. 돔구장에선 날씨에 관계 없이 사계절 경기가 열릴 수 있어 야구팬들은 우취(우천취소) 걱정을 덜 수 있다. 야구 경기가 없는 기간에는 대규모 공연, 행사도 개최할 수 있다. 완공 뒤에는 BTS나 브루노 마스 등 수퍼스타들의 대형 공연도 가능하다.마르니 스타크먼 로저스센터 사업운영부 부사장은 “야구 경기가 없을 땐 잔디 위에 판을 깔아 콘서트장으로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시 관계자도 “인조잔디를 깔기 때문에 다수가 모이는 K팝 콘서트 진행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시는 잠실종합운동장 리모델링(2026년 준공), 스포츠 콤플렉스(2029년 준공) 등의 일정에 맞춰 기존 야구장 해체 및 돔구장 착공 시점을 2026년으로 잡았다. 약 5000억원을 투입해 2031년까지 준공한 뒤, 이듬해부터 야구장 등으로 활용한다는 목표다. 시 관계자는 “현재 우선협상대상자와 돔구장, 전시컨벤션센터, 업무·상업·숙박시설 등 공공성과 사업성을 동시에 갖춘 복합시설 조성을 위한 종합 협상을 진행 중“이라며 ”조속히 협상을 마무리하고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내년 말 실시협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시는 돔구장에 호텔을 연계 조성해 야구장이 보이는 객실, 레스토랑 등을 만들고 각종 프리미엄석(스카이박스, 패밀리존 등)도 도입할 계획이다.오 시장이 방문한 로저스센터는 4만 1000석 규모의 세계 최초 자동 개폐식 돔구장이다. 토론토 메리어트시티센터호텔과 연계 조성돼 객실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 숙박비는 경기가 없는 비시즌엔 미화 300달러(약 40만원), 시즌엔 2000달러(약 250만원) 정도다. 시는 잠실돔구장의 경우 300실 규모의 호텔을 조성하고, 이중 120실에서는 직접 야구 관람이 가능한 프리미엄 객실로 꾸민다는 복안이다. 오 시장은 “(로저스센터는) 호텔과 돔구장이 붙어 있어 가족 등 단위로 와서 모임을 하며 야구도 즐길 수 있게 시설이 잘 돼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잠실야구장에서의 프로야구 경기는 일단 2025년 포스트시즌까지 열린 뒤, 2026년부터 중단된다. 시는 잠실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는 LG트윈스와 두산베어스의 홈 경기는 키움 히어로즈가 쓰는 고척 구장이나 SSG랜더스 홈구장인 인천 SSG랜더스필드, KT위즈 홈구장인 수원KT위즈파크 등에서 나눠 치러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시 관계자는 “목동야구장의 경우 경기 때 발생하는 소음이나 빛에 대해 주변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반발이 크다는 점 때문에 대체 구장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오 시장은 로저스센터를 방문한 뒤 산업화로 고립됐던 수변을 생태공원으로 재편한 ‘토론토 워터프론트(Waterfront)’ 개발사업지도 방문했다. 시는 한강과 탄천 수변을 활용해 잠실 일대에 매력적인 수변 생태·여가문화공간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시 관계자는 “잠실운동장·마이스 복합사업과 연계해 특화보행교 등을 갖춘 수변생태공원을 내년 하반기부터 조성에 들어가 2027년까지 만들 것”이라고 했다. 오 시장은 전시컨벤션센터 조성 구상을 위해 19일에는 미국 뉴욕 자비츠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 여성 패션 전시회인 ‘뉴욕 코테리 수주박람회’도 찾는다. 잠실에 들어설 전시컨벤션센터는 전시면적 9만㎡로 자비츠 센터보다 1만㎡나 크다. 삼성동 코엑스의 약 3배다.
  • ‘사치의 여왕’ 이멜다, 93세 생일 전광판…‘사진 도용‧철자 오기’ 망신살

    ‘사치의 여왕’ 이멜다, 93세 생일 전광판…‘사진 도용‧철자 오기’ 망신살

    필리핀 독재자이자 부패의 상징이었던 고(故)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64)가 새 필리핀 대통령으로 취임한 가운데, 그의 어머니이자 독재자의 아내였던 이멜다 마르코스가 구설수에 올랐다. 93세 생일을 맞아 도심 대형 전광판에 축하 이벤트가 진행됐는데, 해당 광고판 사진이 원작자의 허가 없이 사용된 것이다. ● 93세 생일 맞은 이멜다…광고판에 ‘다큐 포스터’ 무단 사용 지난 2일 마닐라 도심 부근 EDSA 도로에 위치한 한 빌딩의 대형 LED 전광판에 “퍼스트레이디 이멜다의 93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라는 내용의 축하 메시지와 함께 이멜다의 사진이 등장했다.하지만 해당 사진은 이멜다와 마르코스 가문의 행적을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 포스터다. 영화감독 로런 그린필드는 트위터에 “전광판 소유주는 마르코스 지지자”라면서 “이멜다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저작권을 침해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글 말미에는 ‘도둑질 중지’, ‘킹메이커’라는 해시태그도 달았다. ‘킹메이커’는 한국에서 ‘이멜다 마르코스: 사랑의 영부인’(2019)으로 소개된 다큐멘터리의 원제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멜다의 정치 경력, 마르코스 가문의 흥망성쇠와 권력 복귀 시도 등을 다루면서 이멜다가 아들의 대선 출마를 돕기 위해 남편의 과거 독재 행적을 미화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저작권 문제 뿐만 아니라 ‘93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Happy 93th Birthday)’라는 문구도 네티즌들의 비웃음을 샀다. ‘93rd’가 맞는 표기지만, 해당 광고판에는 ‘93th’로 적혔기 때문이다. 광고를 게시한 업체 디지털 아웃 오브 홈 필리핀(DOOH PH)은 성명을 통해 “저작권 문제를 알지 못했으며, 실수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업체는 문제를 인지한 뒤 즉시 해당 광고판을 내렸다. ● ‘사치의 여왕’ 이멜다…그녀는 누구? 이멜다는 1965년부터 1986년까지 필리핀을 통치한 고(故)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이다. 이멜다 여사는 ‘사치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남편의 재임 동안 사치와 향락을 누리고 살았다. 1986년 2월 항쟁(피플 파워)으로 이멜다 여사는 남편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도망쳤는데, 당시 말라카낭궁(대통령궁)에서 수많은 골드바와 보석, 드레스와 수천 켤레의 명품 구두가 쏟아져 나왔다. 마르코스 일가가 급히 떠나며 다 챙겨가지 못하고 남은 것들이었다. 이멜다는 21년 동안 남편과 함께 추방되기 전까지 역사에 길이 남을 사치를 부렸다. 2003년 제작된 이멜다의 전기 영화에는 ‘이멜다가 8년간 매일 구두를 갈아 신었으며 하루도 같은 구두를 신은 적이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멜다의 구두는 현재 필리핀 마닐라 박물관이 소장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외에도 이멜다가 지냈던 궁의 바닥은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천장은 수정 샹들리에로 장식돼 있었고 욕실에는 100% 황금으로 꾸며진 세면대가 발견되기도 했다. 추방 당시 부정축재만 해도 100억 달러(12조 775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이중 필리핀 법원이 환수한 것은 34억 달러(4조 3435억원)에 불과하다. 이멜다 여사는 1991년 필리핀 대법원의 사면을 받고 필리핀에 귀국했다. 1995년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이후 3회 연임에 성공했다. 지난 5월 9일 치러진 필리핀 대선에서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가 당선되면서 마르코스 집안은 36년 만에 권좌에 다시 오르게 됐다.
  • 마르코스 대선 승리 후 모친 집에 걸린 피카소 추정 그림 주목

    마르코스 대선 승리 후 모친 집에 걸린 피카소 추정 그림 주목

    ‘독재자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이 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한 후 피카소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모친 집에서 목격됐다. ABS-CBN 뉴스, CNN 필리핀 등 현지 언론은 대선서 승리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이 최근 모친 이멜다의 집을 방문했을 때 피카소의 작품으로 보이는 그림이 목격됐다고 지난 14(현지시간)일 보도했다. 당선인 측이 배포한 사진에는 마르코스가 이멜다 여사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 담겼다. 이 때 이멜다가 앉아있는 소파 뒤 벽에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다. 이중 하나가 피카소 작품인 ‘누워있는 여성 VI’으로 보였다. 지난 2014년 필리핀 반부패 법원이 이멜다로부터 압수하도록 한 명화 8점 중 하나인 이 그림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대통령 직속 바른정부위원회(PCGG)의 위원장을 지낸 안드레스 바우티스타는 인터넷 매체 래플러에 당시 압수한 작품은 모조품인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진품 여부를 떠나 이 그림이 공개적으로 등장한 것은 마르코스 일가가 대선 승리로 얻은 권력을 이용해 부정 축재 환수 노력을 억누르려 할 것이라는 우려를 더 키운 것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분석했다. 아들인 마르코스 당선인이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고(故)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장기집권하며 독재자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최근 대선에서 승리한 마르코스는 대통령에 취임하면 직속 기구인 PCGG를 통해 자신의 가문이 부정하게 쌓은 재산을 국가에 반납하는 작업을 감독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대선 과정에서 선친의 행적을 미화한 적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환수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 과거 잊은 필리핀… 독재자 아들·딸 대권 쥔다

    과거 잊은 필리핀… 독재자 아들·딸 대권 쥔다

    36년 전 ‘피플파워’ 혁명에 쫓겨난마르코스·이멜다 아들 당선 유력두테르테 장녀도 부통령 선두에독재 경험 못한 젊은 유권자 공략“정치가문 권력 독점 관례도 문제”36년 전 ‘피플파워’ 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의 아들이 다시 필리핀 대권을 쥔다. 9일 열리는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64) 전 상원의원은 1965년부터 21년간 장기 집권했던 독재자인 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장남이다. 역시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이 유력한 그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 사라 두테르테(사진·43) 다바오 시장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장녀이다.현지 조사기관인 펄스아시아가 지난달 실시한 선거 전 마지막 여론조사에 따르면 마르코스 후보(56%)의 지지율은 2위(23%)인 레니 로브레도(57) 현 부통령보다 두 배 이상 많으며, 사라 시장에 대한 지지율도 절반을 넘은 55%로 부통령 후보 선두에 서 있다. 이변이 없다면 필리핀 권좌는 전·현직 스트롱맨 자녀들이 승계한다. 마르코스 후보의 당선은 독재자 마르코스 일가의 정치적 부활을 의미한다고 가디언 등 외신들은 분석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과 ‘사치의 여왕’으로 통했던 부인 이멜다는 집권 내내 반대파 고문과 살해 등 인권유린과 부정부패로 악명을 떨쳤다. 국고에서 100억 달러(약 12조 7000억원)를 축재한 마르코스 일가는 1986년 수백만명이 참여한 ‘피플파워’ 봉기를 계기로 말라카냥궁(대통령 관저)을 탈출했다. 당시 대통령보좌관으로 활동하던 28세의 마르코스 주니어도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3년 뒤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숨졌다.로날드 멘도사 아테네오대 교수는 시민권력에 의해 축출된 전 대통령의 아들이 다시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이유를 두고 “역사 왜곡과 허위 정보”를 문제로 지적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대선전에서 2차 세계대전 영웅이나 필리핀을 번영으로 이끈 위인으로 미화됐고, 마르코스 일가가 소유한 엄청난 양의 황금이 집권 후 국민에게 분배될 것이란 가짜뉴스도 확산된 바 있다. 소셜미디어에 집중 전략을 펴 온 마르코스 후보의 지지자 상당수가 과거 독재 정치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란 점도 여론 왜곡이 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힌다. 일부 유력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관례도 문제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적했다. 실제로 지방 관료의 약 80%, 국회의원의 약 67%가 필리핀 내 유력 가문 출신이다. 마르코스 후보는 선거 기간 대선후보 토론에 불참했고, 일가의 부정 축재와 탈세 의혹에 대해서도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과거사 반성과 사과 없이 ‘가문의 부활’만 모색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 드라마도 ‘워맨스’가 필요해…여성서사 강해지는 안방극장

    드라마도 ‘워맨스’가 필요해…여성서사 강해지는 안방극장

    최근 드라마에 ‘워맨스‘가 주요 흥행 코드로 떠오르며 여성 서사가 강화되고 있다. 과거 신데렐라 콤플렉스나 여성들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풀던 정형화된 여성 서사에서 벗어나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 등에 포커스를 맞춘 작품들이 주류로 등장한 것. 요즘 안방극장에는 여자 주인공 세명이 등장해 워맨스(우먼과 로맨스를 합친 신조어로 여성 간의 깊은 우정을 이르는 말)를 다루는 드라마가 유독 많다. 이전에는 여자들의 우정 이야기가 러브라인의 곁가지 수준이었다면, 최근에는 이들의 서사를 좀더 세밀하게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흥행중인 신작 드라마에서도 워맨스 코드는 빠지지 않는다. 지난 16일 첫방송한 JTBC 드라마 ‘서른, 아홉’은 고교 시절부터 20년 넘게 끈끈한 우정을 이어 가는 서른 아홉살 세 여자의 우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지난달 24일 방송된 4회에서는 미조(손예진)가 미국행을 포기하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찬영(전미도)를 간호하겠다고 선언하는 이야기가 그려졌다. 절망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세 친구의 이야기에 드라마는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흥미로운 점은 기타 드라마에 비해 세 친구의 워맨스를 다룬 영상 클립의 재생수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10%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흥행중인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도 두 친구의 우정이 다층적으로 그려지며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펜싱 선수 나희도(김태리)와 고유림(보나)은 겉으로는 경쟁자지만, 랜선에서는 채팅친구로서 일상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현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만, 후반부에 이 둘이 관계가 밝혀지며 서로 성장하는 워맨스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이같은 여성 서사의 강세는 지난해 tvN 드라마 ‘마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작품은 동서지간으로 만난 두 여성이 재벌가를 상대로 힘을 합쳐 대항하는 이야기로 여성간의 연대를 다뤄 새로운 여성서사의 등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서현(김서형)과 서희수(이보영)가 권력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여성상으로 대중문화계의 워맨스 열풍에 불을 지폈다.올해 1월 종영한 송혜교 주연의 SBS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도 세 친구의 워맨스에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시한부라는 설정이 다소 진부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디자이너 영은(송혜교)이 암투병 중인 미숙(박효주)의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기 위해 패션쇼 피날레 무대에 세우고, 미숙이 떠난 뒤 그녀의 딸을 살뜰히 챙기는 장면은 큰 여운을 남겼다. 이후 워맨스 열풍은 티빙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이 이어받았다. 이 작품은 직장인으로서의 애환은 물론 가족, 이성 관계 등 MZ 세대 여성들의 워맨스를 현실적으로 그려 호평을 받았다. 흥행에 힘입어 주인공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스핀오프격의 예능 프로그램 tvN ‘산꾼도시여자들‘이 방영 중이며, 드라마 시즌2도 기획중이다. 이같은 흐름에 따라 올해도 다양한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들이 쏟아질 예정이다. 4월에 방영되는 JTBC ‘그린 마더스 클럽’은 녹색어머니회를 중심으로 엄마들의 워맨스를 다루며 김고은, 박지후, 남지현이 출연을 확정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가난하지만 우애 있게 자란 세 자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에 맞서는 여성들의 서사로 주목을 받고 있다. tvN ‘킬힐’(9일 방송)에서 이혜영, 김성령과 호흡을 맞추는 김하늘은 “예전부터 여배우들과 대화하면서 여자들의 감성을 그리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표현도 많고, 여러 감정들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 서사의 강세는 사회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정형화된 여성상을 벗어나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소구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서른, 아홉’이 극 초반 불륜 미화 논란에 휩싸였던 것처럼 기존의 뻔한 코드를 답습하는 데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높다. 박상혁 CJ ENM CP는 “여성들이 연대해서 공동의 목표를 이루고 함께 성장하는 서사는 기존의 잘 다뤄지지 않아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라면서 “여성 서사에 대한 섬세한 이해 없이 무조건 어려명의 여성을 내세우는 단선적인 ‘무늬만 워맨스’는 시청자의 외면을 받을 공산도 있다”고 말했다.
  • “한국군 피로 물들였다” 中 영화에 “굴욕 외교” 논란

    “한국군 피로 물들였다” 中 영화에 “굴욕 외교” 논란

    유승민 “중공 찬양 영화 보라는 말인가”최재형 “청소년에게 ‘인민군 영웅’ 보게 해”중국이 한국전쟁 당시 승전을 기념해 만든 영화 ‘1953 금성 대전투’ 상영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영화는 한국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현재의 북한 지역인 강원도 김화군 금성천 일대에서 벌어진 ‘금성 전투’가 배경이다. 국군은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서울시 면적의 3분의1 크기인 금성 돌출부 지역을 빼앗겼으며,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투지역은 북한 땅이 됐다. 국군은 당시 중공군 2만 7000여명을 사살하고 3만 8000여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4㎞를 후퇴했다. 그 과정에 1700여명이 사망하고 7000여명이 부상했으며 4000여명이 실종됐다. 실종인원 상당수는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북한으로 끌려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상태다. ●국군 4000명 실종…상당수 北으로 끌려가문제는 영화가 철저히 중국의 시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중국 유명 배우 오경, 장역 등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중국에서 ‘금강천’이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10월 개봉했다. 제작에 680억원이 투입된 대작이다. 금성 전투를 앞두고 금강천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 중국군이 미국 폭격기의 공습으로 다리가 파괴되자 몸을 아끼지 않고 다리를 쌓아 도강에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군은 ‘적’으로 묘사된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는 ‘1953 금성 대전투’에 대해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7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금성 전투에 대해 “‘한국군 사단의 피’로 물들인 인민군 최후의 전투”라고 미화하는 포스터도 있다. ●“한국군 사단의 피로 물들인 전투” 中 미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지난달 30일 심의를 거쳐 ‘1953 금성 대전투’에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적용하자 정치권에서 비판 여론이 쏟아지고 있다. 영화는 극장 개봉용이 아닌 VOD로 관람할 수 있다.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은 7일 “대한민국을 침략한 중공찬양 영화를 우리 안방에서 보라는 것인가”라며 “문재인 정부의 대중국 굴욕외교의 끝은 대체 어디인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은 지금까지 한한령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를 배척하고 있다”며 “중국 정부에 굴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게 문재인식 ‘문화 상호주의’인가”라고 덧붙였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영화는 금성 전투를 철저히 중국과 북한의 시각으로 제작한 것”이라며 “도대체 전쟁을 도발한 게 누구인가”라고 되물었다. 최 전 원장은 “청소년들에게 침략 전쟁에 가담한 중국 인민군을 영웅으로 묘사한 영화를 보여주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며 “영화에 대한 판단과 비판은 시청자들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 크리스마스 이브, 감성 충만 영화로 코로나 연휴 달래요

    크리스마스 이브, 감성 충만 영화로 코로나 연휴 달래요

    코로나19 3차 대유행으로 ‘원더우먼 1984’를 제외한 블럭버스터 영화들의 개봉이 대거 미뤄졌지만,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에는 연인·가족과 함께 인생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감성 충만한 영화들이 동시에 개봉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적막한 연휴를 그나마 달래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24일 연인끼리 보기 좋은 멜로·로맨스 작품으로는 독일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운디네’(2020)와 프랑스 클로드 베리 감독의 ‘함께 있을 수 있다면’(2007) 등이 있다. ‘운디네’(2020)는 운명이라 여겼던 남자에게 실연당한 운디네 앞에 새 남자가 나타나 벌어지는 사랑과 운명에 관한 드라마다. 박물관 관광 가이드인 운디네(파울라 베어 분)는 운명이라 믿었던 남자에게 실연을 당하고 좌절하지만, 그 순간 만난 산업 잠수부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 분)와 사랑에 빠진다. 물의 정령 운디네와 사랑에 빠진 남자가 그녀를 배신하면 그 남자를 죽이고 고향인 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디네 설화를 현대 독일의 베를린에서 재해석한 영화다. 크리스토프가 잠수하는 장면부터 시작해 수영장과 저수지, 호수, 강가 등 신비한 물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파울라 베어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함께 있을 수 있다면’(2007)은 프랑스 작가 안나 가발다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13년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봉하는 작품이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 함께 살게된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 로맨스를 다룬 작품이다. 화가 지망생이자 환경미화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카미유(오드리 토투), 연극배우를 꿈꾸는 필리베르(로렝 스톡커), 필리베르의 룸메이트인 셰프 프랑크(기욤 까네)가 우연히 함께 살면서 생기는 변화를 그렸다. 카미유와 프랑크는 티격태격하며 앙숙처럼 지내지만, 낮에 박물관에서 일하는 필리베르가 집을 비우면서 함께있는 시간이 많아진 두 사람은 마음을 열게된다.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가족 영화들도 이날 개봉한다. 미국 알렉스 스타더만 감독의 애니매이션 ‘100% 울프: 푸들이 될 수 없어’(2020)는 푸들이 된 유서깊은 늑대인간 가문 후계자 프레디가 진정한 늑대로 거듭나기 위한 모험을 그린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다. 거리의 강아지들과 늑대가 종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다.찰스 마틴 스미스 감독의 영국 영화 ‘내 어깨 위 고양이, 밥2’(2020)는 로저 스포티스우드 감독의 ‘내 어깨 위 고양이, 밥’(2016)의 후속작이다. 전작이 길거리 음악가 제임스 보웬(루크 트레더웨이 분)이 상처입은 길고양이 ‘밥’을 만나 같이 살며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담았다면, 이번 작품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크리스마스에 헤어질 위기에 놓인 밥과 제임스의 분투를 담은 내용이다. 깜찍한 고양이 밥의 독특한 표정이 돋보인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다시 광복 펴다

    다시 광복 펴다

    일흔다섯 해를 맞은 광복절을 앞두고 잊힌 독립운동가를 기억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만화라면 좀더 다가가기 쉬울듯하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함께 일본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시로 풀어낸 재외 한국작가의 시집, 해방 후 혼란을 극복하지 못해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원자폭탄을 재건에 활용한 일본 등 주목할 만한 책을 다양한 장르로 추려 봤다.●잊힌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라 ‘의병장 희순’은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의병장 윤희순을 다룬 만화다. 한양 선비 윤익상의 딸로 태어난 그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으로 가문의 남성들이 의병에 참여하자 후방에서 식량 조달과 군자금 모집, 탄약 제조 등을 맡았다. 이어 여성 의병단인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노학당’을 운영하며 항일 전사를 양성했다. ‘조선독립단’을 조직해 무장투쟁에까지 나선 윤희순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렸다. 민족의 암흑기에 이국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짧은 생애를 마친 김산(본명 장지락)은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린다. 신문기자인 님 웨일스가 1937년 중국에서 김산을 만나 불꽃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기록했고, 1941년 미국에서 ‘아리랑의 노래’로 출간했다. 1984년 국내에 번역된 책을 박건웅 작가가 신간 만화 ‘아리랑’으로 다시 냈다. 의학을 공부하다 혁명을 위해 이국을 누비며 투쟁한 식민지 조선 청년의 고뇌와 투쟁이 깊은 울림을 준다. 잊힌 독립혁명가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이가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영화 ‘밀정’(2016)을 비롯해 다양한 각도로 그의 삶을 재조명하지만, 월북 행적 때문에 논란도 많다. 허영만 작가가 ‘독립혁명가 김원봉’으로 약산의 삶을 만화로 복원했다. ‘정의(正義)로운 일을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뜻으로 붙인 의열단의 탄생과, 그들의 일제에 맞선 폭력투쟁, 광복 이후의 삶까지 생생히 담았다. ●여전히 생생한 피해자·가해자 증언 열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에밀리 정민 윤은 대학 시절 논문을 작성하다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접하고 이를 시로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 35편을 담은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남성성, 군국주의, 제국주의, 전쟁, 인종차별을 다룬다. 특히 7명 위안부의 증언을 시로 풀어낸 2장 ‘증언´에서 일제의 만행을 시로써 고발한다. 위안부로 시작한 그의 시는 현대에 벌어지는 성차별, 성폭력에 관한 여성들의 이야기까지 닿는다. ‘악한 사람들’은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실험하고 죽인 731부대를 소환했다. 이제서야 “그때를 후회한다”고 하는 전범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악을 타자화하면 결국 타인을 악으로 만들게 된다”고 주장한 저자 제임스 도즈는 인간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조직적, 구조적, 심리적 과정을 분석한다.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에 주목하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한국 현대사의 첫날인 1945년 8월 15일부터 조선총독부 청사에 성조기가 게양되는 9월 9일까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일본 패망과 조선 해방을 직감한 여운형의 전화로 시작하는 해방 전야부터 송진우와의 좌우합작 시도까지 단 하루가 1부, 해방 이튿날부터 9월 9일까지 ‘분단’에 이르는 25일을 2부로 구성했다. 저자는 75년 전 가장 밝았던 광복, 그날 이후 25일간은 어둠이 빛을 삼켜 가는 시간이었다고 결론짓는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은 흔히 ‘잿더미’로 상징된다. 매년 3월에 열리는 도쿄대공습 추도식 전이나 8월 ‘종전의 날’이 다가올 때마다 미디어에서는 패전 당시에 촬영된 불탄 들판 사진 등 ‘잿더미’를 끌어온다. ‘‘잿더미’ 전후공간론’은 암시장으로 대표되는 당시 일본 사회와 각종 문학 작품을 통해 일본이 피해자 이미지를 부각하고, 동시에 ‘일본인은 이 비참함에서 다시 일어섰다’라는 서사를 생산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미화한 이미지가 우리와 같은 피해자들의 현실을 가린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겸재가 아낀 소악루 올라 옛 서울 정취를 읽다

    겸재가 아낀 소악루 올라 옛 서울 정취를 읽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3차 양천고성’ 편이 지난 7일 양천구 신정동과 강서구 가양동 일대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양천구청역 1번 출구를 출발, 갈산공원 대삼각본점을 둘러봤다. 이날 서울미래유산은 갈산 대삼각본점이 유일하기 때문에 이곳을 거쳐서 궁산 양천고성 터로 가느라 이동시간이 오래 걸렸다. 모두 461개에 이르는 서울미래유산 대부분이 서울 중심부에 몰린 탓에 넓디넓은 강서구와 양천구에는 단 2건밖에 없어서 생긴 일이다. 일제강점기의 산물이지만 지금도 모든 지적의 기준점으로 쓰이는 대삼각본점을 보고 5호선과 9호선을 갈아타 양천향교역으로 이동했다. 양천향교 앞 하마비~궁산 땅굴~궁산 양천고성~소악루~양천향교를 차례로 탐방했다. 민둥산 양천고성터는 을씨년스러웠지만 소악루의 풍광은 일품이었다. 해설을 맡은 강영진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원은 복잡한 코스를 잘 꾸렸다.지명은 지역의 내력과 곡절을 숨죽여 외친다. 삼국시대 이후 서해에서 강화도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려면 행주나루와 공암나루를 거쳐야 했다. 영화를 누리던 두 나루는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다. ‘임진왜란 3대첩’의 현장 덕양산 행주산성과 행주나루는 기능을 상실했다. 행주는 고려시대의 마을 지명이고, 덕양산의 덕양은 행주의 다른 이름 중 하나다. 행주대첩은 ‘행주치마’의 전설을 남겼으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행주치마와 관련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1593년 선조실록에 “…그곳에 돌이 많았기 때문에 모든 군사들이 다투어 돌을 던져 싸움을 도왔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올 뿐이다. 공암나루는 삼국시대 지역명 재차파의에서 유래했다. 고려시대까지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 고량포를 거쳐 개성으로 가는 길목이던 공암나루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쓸모를 잃었다. 재차파의현은 오늘의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를 이르던 우리말 지명이다. 이두로 재차란 구멍이고, 파의는 바위이므로 이른바 ‘구멍바위’다. 신라 경덕왕 때 모든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공암이 됐다. 양천 허씨의 발상지 허가바위(광주바위)가 공암이다. 양천관아와 양천향교 뒷산을 궁산, 성산, 파산, 관산, 진산이라고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이 중 파산은 재차파의에서 유래했고, 궁산은 공자를 모신 향교를 궁으로 본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동의보감’의 저자인 구암 허준의 이름을 딴 구암공원(허준근린공원) 안 호수 안에 공암이 남아 있는 까닭은 1980년대 한강 개발 과정에서 강 속 바위가 내륙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잠실 석촌호수와 똑같은 사례다. 가장 겸허한 모국어인 땅이름이 한자화한 뒤 제 이름과 기능을 차례로 상실한 것이다. 일제가 구멍바위의 유래가 깃든 궁산에 땅굴을 판 것도 괴이쩍다.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과 강북에서 서로 마주 보고 솟은 두 산이 덕양산(124m)과 궁산(74m)이다. 궁산 소악루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덕양산이나, 덕양산 행주산성에서 바라보는 궁산은 주변 지형이 낮아 꽤 높다는 인상을 준다. 두 산 모두 서울의 관문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다. 궁산에 오르면 강 건너 덕양산~안산~남산~북한산 줄기가 겹치듯 흐르고, 미사리까지 이어지는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적 372호 양천고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재축조된 백제 옛 성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양천현아와 향교의 뒷산으로 숭상됐으나 일제강점기 김포비행장 개설공사 때 일본군이 주둔한 데 이어 한국전쟁 이후 미군과 한국군이 주둔하면서 성곽은 허물어지고 민둥산으로 변했다. 궁산 양천고성 옛터에서 행주산성을 바라보노라면 겸재 정선(1676~1759)을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진경산수화를 창시한 겸재가 남긴 ‘경교명승첩’은 서울 주변의 멋진 풍경을 그려 놓은 그림책이다. 그중 ‘행호관어’는 ‘행호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한다’라는 뜻이다. 행주나루 앞 한강을 호수로 미화해 행호라고 했고, 음력 4~5월이면 행호에서 웅어잡이가 성행했기에 생긴 사자성어다. 그림 속 14척의 고깃배가 잡아 올리는 물고기가 진상품 웅어다. 또 행호 일원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양천팔경이 있어 예로부터 시인 묵객의 발길을 묶었다. ‘소악루의 맑은 바람’, ‘양화진의 고기잡이 불’, ‘목멱(남산)의 해돋이’, ‘계양산의 낙조’, ‘행주로 돌아드는 고깃배’, ‘개화산의 저녁봉화’, ‘겨울 저녁 산사(개화산 약사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를 노래했다. 겸재는 65세(1740년)에 양천현감으로 부임, 70세까지 5년 동안 재임하면서 조선 고유의 진경산수화를 만개시켰다. 미술이란 역사의 표정이며, 역사를 담는 그릇이다. 겸재의 그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름다운 옛 서울의 모습을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진이 없던 시절의 서울 풍광을 현대에 전한 사람이다. 겸재는 이때 평생 지기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이던 사천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맞바꾸는 ‘시화환상간’을 실행했다. 사천이 시를 짓고 겸재가 그린 이 그림에는 ‘천금을 주더라도 타인에게 양도하지 마라’는 ‘천금물전’이라는 글을 새길 정도로 소중하게 간직했다. ‘양천현아’와 ‘종해청조’는 겸재가 현감 재직 당시 그린 양천 관아 그대로다. 현감이 정무를 보던 동헌인 종해헌, 자치기구인 향청, ‘파릉관’이라고 불리던 객사가 등장한다. 양천현아가 관아를 정면에서 보고 그렸다면, 종해청조는 관아를 뒤에서 그렸다. 겸재미술관장을 지낸 이석우 전 중앙박물관장은 “흥원사라는 절과 연립주택이 종해헌이 있던 자리로 보이는데, 종해헌은 한국전쟁 후 다다미공장으로 사용하다가 개인에게 매각돼 훼철됐고 파릉관에는 양천초등학교가 들어섰다가 이전 후 사라졌다”고 저서 ‘겸재 정선’에서 아쉬워했다. 양천현감 시절 겸재는 걸작을 남겼지만 근무 실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조선시대 지방관은 직속상관으로부터 반년에 한 번씩 근무평가를 받았는데 하양현감(대구지역) 시절 극심한 흉년이 들어 환곡을 거둬들이지 못해 꼴찌의 성적을 얻은 뒤 의금부에 끌려가 구금됐다. 이어 청하현감(포항 인근) 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양천현감으로 근무하던 마지막 해인 69세 때 환곡과 군량미 환수 평가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경기감영에 소환돼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을 다스리기와 그림 그리기의 병행은 고단한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겸재는 도화원 출신의 중인화가인가 아니면 양반 출신 문인화가인가. 겸재의 출신 성분과 신분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가난 때문에 과거를 통한 벼슬길을 포기한 겸재는 장동 김씨 가문의 도움으로 40세가 넘은 나이에 관상감 천문학 겸교수(종6품), 종이 만드는 조지서 별제라는 잡직에 기용됐다. 또 이를 기반으로 사헌부 감찰이라는 정식 관문에 들어섰으니 쇠락한 사대부가의 문인화가라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그의 그림에는 도화서 출신에만 나타나는 표현이 뚜렷할뿐더러 이후 도화서 출신이라며 비하하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는 반박이 잇따랐다. 84세까지 수를 누리고, 종2품 당상관에 올랐으며, 400여점의 다작을 남겼고, 공재 윤두수를 능가한다는 당대의 평을 얻었다. 또 가장 비싼 그림값을 받았다. 겸재 사후 경화 사족들은 앞다퉈 겸재의 그림을 소장했는데 그림 한 폭이 한양의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무려 10억원을 호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화원 출신이면 어떻고, 문인화가면 또 어떤가.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34회 양재천 ■집결 장소: 12월 14일(토) 오전 10시 한티역(분당선) 4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아소 日부총리 자위대 간담회서 “대동아전쟁” 건배사

    2008년 총리 재임 시에도 사용해서 비난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과거 일본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면서 사용했던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을 자위대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입에 올려 비난을 받고 있다. 아소 부총리는 지난 17일 도쿄 지요다구 총리 관저에서 열린 자위대 고급간부와의 간담회에 아베 신조 총리와 함께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건배사를 하면서 “대동아전쟁이 시작되기 전 무관으로서, 주영국 일본대사 요시다 시게루(아소 부총리의 외조부)를 섬겼던 사람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 말은 방위대학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왔다.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1937년부터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군과 벌인 침략전쟁을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표현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1년 12월 12일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 의한 아시아 식민지를 해방시켜 대동아공영권을 설립해 아시아의 자립을 지향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대동아전쟁이라는 말을 국가 차원에서 채택했다. 일본이 패전한 후 연합군총사령부(GHQ)는 공문서에서 이 표현의 사용을 금지했다. 대동아전쟁이란 표현은 이후에도 금기시되고 통상 ‘태평양전쟁’ 등으로 불려 왔다. 아소 부총리는 앞서 2008년 총리 재임 때에도 대동아전쟁을 말했다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아소 부총리는 조선인 강제징용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후쿠오카 아소탄광 가문의 후손으로, 자민당 내 대표적인 극우 인사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일본 성씨를 달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한글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가르쳐 준 것이며, 의무교육도 일본이 시켜 주었다” 등 여러 차례의 망언 전력이 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세상 담은 그들의 그림엔 역사의 풍랑이 일렁인다

    세상 담은 그들의 그림엔 역사의 풍랑이 일렁인다

    시대를 훔친 미술/이진숙 지음/민음사/556쪽/3만원 ‘근대 유화의 완성자’라는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세상을 뜨기 직전 완성한 그림 ‘돌아온 탕아’(1669년)는 나눠준 재산을 탕진하고 병들어 돌아온 탕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말없이 아들을 보듬는 아버지며 그 옆 불만 가득한 눈초리의 맏형을 보면 그저 어느 가정의 엉클어진 관계를 묘사한 작품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섬세한 손, 그 손끝에 전해지는 아들의 몸, 그리고 아버지와는 달리 동생을 원망하는 형의 표정은 가장 깊은 용서와 숭고한 화해의 순간으로 결정된다. ‘역사는 인류가 의미를 찾고, 의미를 살고, 그 의미의 핵심을 후대에 전하는 과정’으로 일컬어진다. 그 차원이라면 미술작품도 그저 장면의 단선 포착이나 유미적 묘사에 그칠 수 없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명제가 설득력을 갖는다. ‘시대를 훔친 미술’은 바로 그 점에 착안해 그림 이면의 그림을 알뜰살뜰하게 설명해 흥미롭다. 책은 유명 작가들의 회화를 시대별·언어권별로 그러모아 펼쳤지만 단순히 회화사나 작가의 연대기적 설명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상의 매듭짓기는 바로 역사성의 강조이다. 중세 암흑기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절대왕정 시대,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 식민지 경쟁, 제 1·2차 세계대전…. 격랑 속에 부대껴 살았던 화가의 눈빛과 고뇌, 어두운 그늘이 다양한 회화에 얹혀 전해진다. 그리고 그 회화에는 어김없이 숨은 역사와 복안의 메시지가 담겼다. 독일 작가 에마누엘 로이체가 그린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을 들여다보자.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미국관에 전시된 이 그림은 독립전쟁 중 영국군을 기습하기 위해 얼어붙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독립의 국제적 영향력을 보여준다는 작품속 강은 라인 강을 모델로 삼았다. 로이체가 미국 독립전쟁을 1850년대 독일과 연관 지은 것이다. 로이체는 당시 자신이 지원한 혁명이 실패로 끝났지만 독일 진보주의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예술에 담긴 ‘언외의 지혜’는 바티칸의 교황집무실 기능을 했던 서명실 벽화에서도 묻어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가 라파엘로에 의뢰해 그린 벽화는 천정의 시학·철학·법학·신학을 의인화한 그림, 마주 보이는 벽의 기독교적 테마가 담긴 ‘성체에 대한 논쟁’, 그 맞은편의 ‘아테네 학당’으로 구성돼 있다. 이교도 철학자와 신상들이 대거 등장한 셈으로 이는 교황청 스스로가 신학의 전일적 지배를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메디치가문 출신 교황과 세력 득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주체인 화가는 세상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책에는 순수를 고집한 부류와 세류에 가담하거나 지지한 인물들이 흥미롭게 비교된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유럽 확장정책에 편승한 ‘오리엔탈리즘’ 구현에 나선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터키탕’이며 장 레옹 제롬의 ‘목욕탕’이 서구인들의 정복욕을 부추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주장한 마리네티는 전쟁을 ‘인류의 유일한 위생학’이라며 전쟁 미화를 거들었고 카를로 카라는 ‘개입주의자 선언문’을 통해 전쟁 선동 구호를 내뿜는다. 그런가 하면 전 세계적으로 행해진 유대인 학살과 학대를 고발한 샤갈의 ‘하얀십자가’며 “민족에 영광을 가져다주겠다”고 외쳐대는 히틀러를 거대자본의 뒷돈을 받는 부패 정치인으로 묘사한 존 하트필드의 ‘작은 남자가 큰 선물을 요구한다’는 그 반대의 작품들로 다가온다. 저자는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해 “예술에는 현실만이 아니라 그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함께 담긴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꿈은 한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 지지하고 함께한 공동체의 꿈이기도 하며 후대가 놓치지 않고 이어나가야 하는 꿈이라고 결론 짓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문화마당] 들여다보는 재미/김재원 KBS 아나운서

    [문화마당] 들여다보는 재미/김재원 KBS 아나운서

    드라마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우리가 사는 일상은 내 주변으로 국한된다. 나는 가난했던 1960년대에 태어나서 격동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방송사에서 월급 받는 아나운서로, 6학년 때 짝이랑 결혼해 아들 하나 키우는 가장의 삶을 살아 내고 있다. 만나는 사람들 역시 그 경계를 크게 못 벗어나고, 듣는 이야기도 아무리 건너 들은들 울타리 안을 맴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드라마가 있어서 다른 삶을 들여다본다.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계층의 삶을 간접 체험한다. 드라마를 보는 일은 대한민국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얼마 전 드라마 ‘펀치’를 통해서 검찰 조직을 엿보았다. 오직 그들만의 성공을 위한 권모와 술수가 판치고, 편법과 거짓도 끼어들 여지는 충분했다. 검사의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은 그 드라마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드라마는 전부 사실일 수 없고, 전부 거짓일 수도 없지만 그 드라마를 본 다음부터는 검찰 관련 기사가 나오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 뒷이야기가 있지는 않을까. 누가 날린 펀치일까. 드라마의 부작용이다. ‘전설의 마녀’는 교도소 출신 여성들의 삶과 재벌가의 실상을 보여 줬다. 현실을 외면한 미화일 수도, 과장일 수도 있지만 열심히 살려는 재소자 출신 여성들과 후안무치 재벌 가문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횡령과 배임은 기본이고 덮어씌우기와 깔봄과 무시는 덤이다. 대기업에서 영세 제과점의 인기 제품을 복사해 더 싼 가격으로 판매하는 상황은 드라마가 끝난 이후 현실에서 재현되는 바람에 드라마가 현실을 바라보는 창임을 증명해 주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상류층 집안 곳곳을 관찰자 시선에서 구경하게 해 준다. 정말 저럴까 싶을 정도로 특이한 갑의 심리와 삶을 보여 준다. 특히 상류층 식구들이 밥 먹는 장면을 식탁이 있는 방 바깥에서 집안일을 돕는 이른바 ‘을’들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드라마를 연극화해 ‘을’들을 관객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갑’을 비웃게 만드는 역전의 묘미도 맛보게 한다. 드라마는 드라마다. 즉 허구다. 현실이라는 도화지에 허구라는 크레파스로 색칠하고 재미라는 물감을 덧입힌다. 아마 드라마에서 다루는 직업군 당사자들은 묘한 불쾌감을 드러낼 것이다. 아나운서를 부정적 이미지의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서 느껴 봤던 기분이다. 드라마 속 연기자들은 악역이라도 그 역할에 빠져들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드라마 속 역할은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존중을 받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허구임에도 말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서로 환히 들여다보는 세상이 됐다. 아직도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증거가 나와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실 정치조차 시시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업무의 우선순위도 모르고, 부도덕의 유치한 합리화와 여전히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줄 알고 있는 그들의 우매는 더이상 구경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아마 그들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반복되는 거짓말로 이미 리플리 증후군에 빠져 있는 것일까. 연기력 없는 배우의 발연기가 역겨운 것처럼 함량 미달 정치인의 인터뷰도 견디기 힘들다. 이제 기댈 곳은 녹봉마저도 백성을 위해 쓰며, 불철주야 사람 살피기에 전념하는 숨은 정치인들이 어딘가에는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적어도 드라마는, 끝내는 악인이 망한다. 정치가 드라마보다 못한 이유다.
  • 이탈리아 북부 이야기 Italy, eataly, italo① Piemonte 피에몬테주

    이탈리아 북부 이야기 Italy, eataly, italo① Piemonte 피에몬테주

    이탈리아 북부 이야기 Italy, eataly, italo 중세와 근세에 비잔틴 양식, 르네상스의 양식, 바로크의 양식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이탈리아 양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탈리안처럼 먹고, 이탈리안처럼 입고, 이탈리안처럼 노는 것. 이 유행은 좀처럼 시들해지지도 않는다. 명품 쇼핑 1번지 맥아더글렌 McArthurGlen 유럽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맥아더글렌 그룹은 1995년부터 유럽 9개국에 21개 디자이너 아웃렛을 운영 중이다. 이탈리아에는 나폴리 근교의 라 레쟈La Leggia, 밀라노 근교의 세라발레Serravalle, 로마 근교의 카스텔 로마노Castel Romano, 플로렌스 근교의 바르베리노Barberino, 베네토 근교인 베네토Veneto 소재의 노벤타 디 피아베Noventa di Piave까지 5개의 매장이 있다. 한국사무소 02-553-0822 www.mcarthurglen.com 열차 페라리 이딸로Italo 이탈리아의 제2 철도회사인 NTVNuovo Trasporto Viaggiatori사에서 운영하는 초고속열차로 지난해 4월28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최고 시속 360km으로 운행하는 이 열차는 붉은색의 매혹적인 디자인으로 ‘열차 페라리’라고도 불린다. 현재 이탈리아의 9개 도시(12개 역)에서 매일 48회 운항하고 있으며 향후 25대의 열차를 확보해 매일 50회 운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예약 및 문의 02-3789-6110 www.raileurope.co.kr 슬로푸드의 모든 것 잇딸리Eataly “Eat better, Live Better”라는 슬로건 아래 이탈리아 전역에 유통망을 확대하고 있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야채와 과일류, 육류제품, 유제품, 빵, 저장식품, 와인 등 모든 식재료는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생산자들에게 직접 공급받은 것이다. 최근 로마에는 최대 규모의 매장을 오픈했으며, 미국과 일본까지 진출한 상황. 초고속열차 이딸로의 케이터링서비스도 맡고 있다. www.eataly.it Piemonte 피에몬테주 시간의 실타래를 따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다. 택시 밖으로 긴 주랑과 노란 불빛들, 광장의 중심에 버티고 선 검은 실루엣의 동상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파리인가?’ 그것이 토리노Torino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도시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사보이공국의 수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첫 번째 수도, 이탈리아에서 인구가 4번째로 많은 도시…. 그런 단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토리노의 바로크적 풍경은 사보이 가문의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남하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세력을 키운 그들은 사보이 공국의 수도로 지정한 토리노를 ‘작은 파리’로 만들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궁(1646년)은 말할 것도 없고 사냥 별장들마저도 화려하기 그지없다고 했지만 사실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예수의 수의에 남아있는 혈흔은 소름끼칠 정도로 사람을 닮아 있었다. 성인 남자의 앞모습과 뒷모습. 그 가지런히 모은 팔과 손 모양까지 말이다. 거짓이라고 하기에도, 사실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일 정도였다. 물론 내가 본 것은 모조품이었다. 산 조바니 바티스타 성당Duomo di San Giovanni Battista에 보관되어 있는 길이 4.42m, 폭 1.13m의 예수 수의는 지난 400년 동안 불과 10여 차례밖에 공개되지 않았다. 공개가 뜸한 만큼 진위 여부는 아직도 논쟁적이다. 과학도 종교만큼이나 허점투성이라 반박에 반박이 더해진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훨씬 명료하게 다가오는 ‘기적’은 수의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는 산 로렌조 성당의 건축학적 성취였다. 사보이 가문이 총애했던 건축가이자 수학자였던 과리노 과리니Guarino Guarini, 1624∼1683년는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8개의 반원형 아치가 교차하는 돔을 완성했다. 돔뿐 아니라 성당 내부를 채운 화려한 바로크 장식은 충격요법에 가까운 경외심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수백년 뒤에도 그 효과는 여전했다. 토리노 시내를 벗어나 살루초Saluzzo에 도착했을 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마을 산책은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됐다. 언덕 위의 성들과 그 주변에 모여 있는 귀족들의 저택을 정점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산책길은 마치 시간의 실타래를 거꾸로 풀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수도원이 8개나 있었고, 그중에는 지금 호텔로 사용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그 쟁쟁한 사보이의 세력 사이에서 16세기까지 꿋꿋하게 세력을 유지했던 델 파스토 후작 가문에 대한 설명은 귓가에서 자꾸만 흩어져 버렸다. 골목 끝에 서 있는 풍경들이 하나같이 매혹적이라 달려가서 만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좁았다가 넓어지는 골목, 높았다가 낮아지는 계단, 직선이 아닌 도로들은 마치 음악 같았다. 하지만 일행을 놓치면 15세기 어디쯤에서 길을 잃겠지. 정신을 바짝 차려 현실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밤 늦게 도착한 노비 리구레Novi Ligure의 시간은 다른 도시에 비해 현재에 가까웠다. 역사가 길지 않은 이 도시가 선택한 환경미화 방법은 (제노아를 포함한 리구리아 해안 도시에서 유행했던) 가짜 벽화로 벽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1910년대에 그려졌다는 프레스코화는 노비 리구레와 제노아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농업과 어업을 기반으로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들. 그러나 그 보통 사람들 중에서 이탈리안 자전거 영웅인 파우스토 코피가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후 암울함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그가 보내준 전승은 희망의 노래와 같았다. ‘투르 드 프랑스’와 함께 세계 2대 자전거 대회인 ‘지로 디탈리아’의 라디오 생중계가 어린 시절 최고의 가슴 뛰는 순간이었던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전거 사랑이 여전하다. ▶travie info 질리지 않는 막대 빵, 그리시니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종종 만났던 그리시니Grissini의 본고장이 바로 토리노다. 반죽을 막대기처럼 얇고 길게 만들어 구워내는 이 빵은 1668년 토리노의 제빵사 안토니오 아메데오가 소화불량에 걸린 군주를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 나폴레옹도 이 빵을 좋아하여 훗날 황제의 식탁까지 올라갔다. 이탈리안 자전거 영웅, 코피 유럽에 큰 혼란을 가져왔던 전쟁이 끝난 후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지노 바르탈리Gino Bartali와 함께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던 사이클 영웅 파우스토 코피가 바로 노비 리구레 출신이었다. 그의 별명이기도 했던 캄피오니시모Campionissimo·최고의 챔피언는 박물관의 이름이 됐다. 노비 리구레의 캄피오니시니는 1960년대까지 용광로로 사용되었던 곳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했던 나무 자전거부터 페라리의 최고 기술이 적용된 자전거까지. 8,000만원이 넘는 자전거도 있다. Museo dei Campionissini | 주소 Viale dei Campionissimi, 2-15067 Novi Ligure 문의 www.museodeicampionissimi.it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이탈리아정부관광청 한국사무소 02-775-8806, 레일유럽 한국사무소 02-3789-6110, 맥아더글랜 한국사무소 02-553-0822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혁명가 인정받는 ‘김옥균’ vs 테러리스트 된 ‘홍종우’ 정부 차원에서 주요한 역사적 개념을 규정하는 북한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을 ‘근대 부르주아 혁명운동’으로 변경했다. 한국에서 김옥균(金玉均·1851~1894)과 갑신정변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들 간에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진보적 개혁운동으로 보고 봉건제 청산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전개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일본이라는 외세 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은 인정하는 편이다. 반면 이와 대비시켜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홍종우(洪鍾宇· 1850~1913)는 대다수 사람들이 갑신정변 주도 인물인 김옥균 암살범이자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다. 당연히 그 평가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보수반동 성향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갑신정변’ 3일천하… 실패한 비운의 개화파 김옥균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반역자로 처단된 고균(古筠) 김옥균. 권력과 세력을 잃고 망명지를 떠돌다가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능욕을 입은 비운의 개화파….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변의 주체들과 일정 부분 이해를 같이했던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군부대신 등 고위관료를 역임한 윤웅렬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다음의 여섯가지로 꼽았다. 1. 군주를 위협한 점 2.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3.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4.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점 5.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6.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점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서 정권의 핵심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 회고담에서 실패 원인을 ‘민중의 무지몰각’에 돌리고 있다. 그는 광범위한 민중의 원동력과 잠재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도했다. 정변은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이다. 후일 김옥균은 일본을 ‘이용’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용당한 것이고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봉건제도 청산을 위한 노력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게는 관대하거나 이를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와 친한 일본인들은 후쿠자와(福澤諭吉), 도야마(頭山滿), 고도(後藤像二郞) 등 ‘대아시아주의자’이자 한국 침략을 적극 옹호한 인물 일색이었다. 말년의 김옥균은 이른바 삼화주의(三和主義)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흥아지의견’(興亞之意見)에 기초해 이를 설명했는데, 그 골자는 ‘삼국제휴 서력방알’(三國提携 西力防?)을 통해 아시아를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제창하게 된 것도 정신적 스승인 후쿠자와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흥아지의견’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서 과연 김옥균이 후쿠자와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삼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자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4년 러일전쟁 직후 그동안 일본에 망명했던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관련자들은 모두 귀국하여 복권되고 식민지 시기 대다수는 친일의 거두로서 식민지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에게는 유신(維新)을 처음 제창한 사람이고 문명의 선각자로서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융희 4년(1910) 7월 27일에 추증되었다. 김옥균 추종 세력은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이전 활동을 과장·미화하였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이르면 일제는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와 조선 민중에 대한 무제한의 통제 명분을 김옥균이 주장한 삼화주의에서 찾았다. 김옥균의 삼화주의는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숱하게 왜곡되어 갔다. ●홍종우, 실정 맞는 근대화 추구… 佛르피가로도 ‘개화인사’ 인정 경기도 몰락한 선비의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86년 3월부터 프랑스행을 결심하여 1888년 나가사키와 규슈,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이어 1890년 12월 파리로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 유학 후 거의 2년 동안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연구보조자로 활동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홍종우는 프랑스어 번역본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공화국에 사는 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기후가 국민의 관습에 끼치는 영향은 오래전에 증명되었다. 그 누구도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일에 있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존경과 애정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홍종우의 정체관이 그간의 시대 담론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목표는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화를 조화·절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척사위정론자들과 다른 것이었으며, 민족 주체성과 민족 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화 지상주의론자와도 구분되었다. 1893년 귀국을 결심한 그는 그해 12월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종의 밀명으로 도쿄에 온 이일직과 만났고, 그로부터 김옥균 암살을 제의받게 된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세계 대세와 동양 정세를 논하는 한편 그의 상하이행을 유도했고 상하이 동화양행에서 김옥균은 결국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는 아관파천 이후부터다. 그는 국왕을 황제로, 세자를 황태자로 높이는 한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건원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수립과 황제 즉위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홍종우는 대한제국 성립 당시 비서원승으로 활약한 이래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경제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대외적으로 열강의 조선 이권 침탈에 대한 절대불가론으로, 내적으로는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내 상인의 몰락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론인 보호주의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한러은행 설치 반대, 외상의 도성 개잔(開棧)과 내지행상 반대, 절영도 석탄고 임대 및 광산이권 양도 반대, 조선 연해어업 및 홍삼 사매(私買) 반대, 방곡실시, 광무연호 주조, 상권보호 등이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군주권의 절대화, 군권(軍權)의 확립과 군사권 간섭 반대, 각부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불평등 조계 개정, 만국공법의 철저한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민선의원(民選議院) 설립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근대적 지도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정부의 자립과 과감한 개혁이 이를 보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자 그는 ‘개화당의 영수’ ‘조선독립의 혁명가’ 김옥균 암살범으로 다시 각인되었고, 근대화를 저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는 명실상부한 개화인사였다. 프랑스 저명 신문 르피가로지도 그렇게 보고 있다. 잘 알다시피 홍종우는 프랑스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자 많은 부분 우리 실정에 맞는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그가 수구파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고 그 역시 수구적인 언급을 한 바 없다. ●편견 지우고 입체적으로 보아야 김옥균과 홍종우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같다 하더라도 양자 간에는 분명한 대립각을 갖고 있었다.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외국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인식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현실을 서구에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선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현실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부재 상태에서 문화적 전통과 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 및 일본의 제도를 무차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나라의 발전에 커다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김옥균처럼 문명개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제국주의 이웃 강국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방식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자칫 국가를 상실할 위험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갑신정변 당시와 지금 한국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조재곤(동국대학교 연구교수)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오감도’ 이상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오감도’ 이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1934년 식민도시 경성의 여름은 뜨거웠다. ‘조선중앙일보’에 7월 24일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작품 ‘오감도’(烏瞰圖) 때문이다. 작가는 2000여편 중에서 30편을 골라 연재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15회를 넘기지 못했다. 띄어쓰기 무시! 문법 파괴! 기호와 숫자가 문자를 대신하는 시! 독자들은 분노했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당장 원고를 불살라라, 작가가 미쳤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을 미쳤다고 비난하는 독자들에게 반문한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뒤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그가 보기에 대중은 게으르고 편협했다. 자신은 지금 시대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뛰어넘고 있는 중인데 독자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문학관만 소비하는 중이니 말이다. ‘오감도’의 작가 이상(李箱·1910~1937). 그는 정말 시대와 불화한 천재였을까. 시대가 박제시켜 버린 천재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이나 영감에 의지해 개성을 뽐내는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모두가 문명화, 근대화라는 덧없는 망상 속에서 허둥댈 때, 그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문명의 메커니즘을 보고, 시대의 이면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비상(非常)한, 비상(飛上)을 꿈꾼 지식인이었다. ●모던 경성, 적빈(赤貧)의 시공간 1910년 9월생인 그는 일본어를 국어로 하는 세상에서 태어나 문화통치 기간인 1920년대에 학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제국 일본의 식민 경영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아울러 경성의 도시경관은 총독부 건물, 경성제국대학, 백화점을 중심으로 근대 도시의 풍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근대적 학교교육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출판산업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동시대의 근대문화를 흡수하고 소비하는 ‘대중’이 유럽풍 옷가지와 장신구로 몸을 두르고 커피 한잔을 찾아 방랑하는, 보들레르가 명명했던 ‘산보객들’이 경성 한복판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경성고등보통학교 건축과 학생이었던 이상 역시 화구통을 메고 거리를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가난이었다. 끼니를 잇기 힘든 가난한 중인 가문의 장남이었던 그는 현미빵을 팔아 학교를 다녔다. 그가 배우는 최신 기하학과 건축학이 식구들과 이웃의 허기를 달래줄 날은 참으로 요원했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의 가난이었다. 생활은 점점 더 돈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돈은 아비와 자식, 친구와 애인을 연결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다. 의리도 인정도 돈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지독한 정신의 가난은 가난한 서민들뿐 아니라 도시인 전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소비와 향락, 학교에서 강요하는 청결하고 근면한 생활. 이상이 보기에 이것은 실상 일본식 유행풍속을 좇아 양복을 입고 몇 개 안 되는 다방을 전전하면서 ‘교양입네’ 하는 꼴이었다. 제국 일본의 식민도시 경성은 제대로 문명화를 구가하지도 못하면서 박래품 소비에만 열광하는 ‘무늬만 근대도시’였다 경성의 도시인들은 모두 ‘모던’(modern)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정작 자신의 텅 빈 정신은 보지 못하는 불구자들이었다. 왼팔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기묘한 형국처럼 도시인들은 자신을 비추는 문명의 거울 앞에서 분열증에 시달렸다. 지독한 정신의 가난 속에서도 겉으로는 잘사는 척, 문명인인 척하기에 급급한 삶이라니! 이상은 이 사태가 공포스러웠다. 그 수선스러움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 가난에 맞서야 한다! ●나의 펜은 나의 칼이다 1930년 ‘조선’에 연재된 첫 장편소설 ‘십이월 십이일’을 필두로, ‘이상한 가역반응’,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기하학과 일본어가 맞물린 시들과 ‘지도의 암실’ 등의 소설, 다양한 수필이 발표된다. 문명을 지탱하는 정신의 가난과 대결하면서 그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언어의 문제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어가 국어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조선어다. 그는 식민지에서의 가난과 소외가 무엇보다도 언어와 그 언어 사용자 사이에 놓인 간극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1930년대를 지배하는 ‘모던’이라는 말 안에는 그 어떤 진지한 성찰도 부재했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양복(洋服), 양행(洋行)과 같이 서양풍을 내세운 습속에만 매달릴 뿐 왜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에서 나온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았다. ‘모던’이란 말은 식민지 조선에서 텅 빈 기호였다. 그 안에서 어떤 정신적 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이상은 그런 시대를 ‘활자허무시대’라고 명명했다. 이상은 그렇게 기호에 갇혀 자기 삶의 진실을 외면하는 문명인의 삶을 해부하기로 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런 그에게 문학은 대중이 기대하는 여가선용이나 위안의 도구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 특정한 계급의 현실을 드러내고 정치적 방향을 선동하는 이념의 도구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문명의 매커니즘을 해부하고, 소외된 삶을 극복하는 것! 이것이 문학의 일차적인 임무여야 했다. 이상에게 펜은 그런 가난한 문명과 나태한 정신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어야 했다. 그의 시 ‘오감도’는 숫자와 여러 가지 기호들을 통해 근대적 삶의 폐쇄성과 불구성을 해부하는 ‘메스’로서의 문학이었던 셈이다. ‘오감도’ 연재가 중단된 후 자신의 시도가 불러일으킨 적대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몰라보는 대중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관광객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관조하지도 않았다. 속악한 돈의 횡포나 비정한 이기주의를 직시하면서도, 그는 자신 역시 허위에 찬 근대의 산물임을 처절하게 의식했다. 박태원과 김기림 같은 지인들은 이상이 퇴폐적 카페를 열고 여급들과 연애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문학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도 문명을 비판하고 자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감추려고도, 미화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배반과 궁핍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근대문명을 고민하고, 그 안을 휘청거리며 걸었다. ●이상, 시대의 혈서를 쓰는 자 1936년 가을, 이상은 일본 도쿄로 떠났다. ‘날개’를 통해 평단으로부터 큰 주목과 호평을 받은 직후였다. ‘날개’는 돈으로 마음과 정신을 사고파는 근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여기서 이상은 주인공이 날개를 얻어 비상할 것을 꿈꾸는 장면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해부를 넘어 새로운 도덕을 발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그 도덕적 비전이 식민지 조선 바깥에, 현해탄 건너 문명의 본산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허영의 낙원이었다. 특가품, 할인품, 온갖 상품들로 넘쳐나는 긴자 거리에서 사람들은 모두 성병에 걸린 듯 화려하게 치장한 채 돌아다녔으며, 최신 서적들은 그저 교양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거기에도 자기 삶의 정열을 태우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가 더 노골적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영국 런던에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딜 가도 적막, 암흑, 권태뿐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도덕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20세기가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는 문명이란 정신의 가난만 키우는 황금만능의 허위 세계임을, 이상은 낯선 땅에서 뼛속 깊이 절감한다. 그해 겨울 도쿄 거리에서 이상은 불온한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감방에 갇히게 된다. 도일(渡日)하기 전부터 앓았던 폐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문명의 속악성은 그의 마음에서 한 가닥 희망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글을 쓰면서 돌파구를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7년 4월 17일. 채 십년이 되지 않는 창작 기간 동안 오직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글을 썼던 이상이 죽었다. 그의 죽음은 친구 김기림의 말대로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을 갖고 제 혈관을 짜서 쓴 시대의 혈서였다. 죽기 몇 달 전 탈고한 소설 ‘종생기’(終生記)에서 이상은 자신의 묘지명을 작성한다. “일세의 귀재(鬼才) 이상은 그 통생(通生)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일천구백삼십칠년 정축(丁丑) 삼월삼일 미시(未時) 여기 백일(白日)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향년 만이십오세와 십일개월.” 자신을 죽이고, 그 시체로부터 생과 예술의 본질을 투시하려 했던 자.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이상은 그렇게 끝까지 예리한 언어의 칼날을 거두지 않았다. 오선민 남산강학원 연구원
  • ‘항공모함’ 메이플라워호 우리 조상도 탔을까?

    ‘항공모함’ 메이플라워호 우리 조상도 탔을까?

    조선 최대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족보다. 발달하는 인쇄술이 가장 널리 적용된 곳이 서양에서는 ‘면죄부’였다면, 조선에서는 족보다. 면죄부가 남발됐듯 족보에도 늘 위조의 위험이 따라다녔다. 천한 신분이 아니라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족보 위조의 위험을 경고하는 논의가 종종 등장한다.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서양 족보 연구자들 사이에선 “메이플라워호는 항공모함이었다. 미국 건국사 연구는 선박 제조 기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농담이 나돈다. 초기 미국 이주자들이 대부분 유럽의 중범죄자나 부랑인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외가 있다면 청교도 신앙에 충실한 메이플라워호 탑승자였다. 조상이 부랑자나 중범죄자였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터. 그러니 너도나도 조상을 메이플라워호에 ‘태웠다’. 그 많은 사람을 다 태우려면 결론적으로 메이플라워호는 항공모함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게 서양 농담의 배경이다. 그렇다면 조선 족보도 그처럼 쉽게 위조될 수 있었을까. 최양규 한국계보학회 부설 한국계보인물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한국족보발달사’(혜안 펴냄)를 통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좀 서글프다. 족보가 등장한 것은 고려 시대.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 지방 호족을 복잡한 혼맥 관계로 중앙정부에 묶어두기 위해 성과 본관을 하사하면서 족보가 시작됐다. 대개의 족보들이 시조를 고려 시대로 상정하거나, 그 이전에 시조가 있다 해도 고려나 조선 시대의 중흥조에서 서술을 시작하는 이유다. 이때까지만 해도 적서 차별, 남녀 차별, 친외손 차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강퍅해진 것은 조선 태종 들어서다.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차지한 태종은 왕위 서열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이원계·이화 등 태조의 이복 형제들과 정종의 형제들을 제거하기 위해 엄격한 적서 차별을 만들어냈다. 서자를 차별해야 이들이 자연스럽게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실족보는 ‘선원록’(직계만 기록), ‘종친록’(태조와 태종의 적자만 기록), ‘유부록’(본처 공주와 후처 소생들 기록) 3가지로 쪼개졌다. 왕실을 모방하는 사대부 가문들도 당연히 이런 차별을 받아들였다. 이후 18~19세기 들어 족보 편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최 연구원은 말한다. 하나는 양반들의 자기 존재 근거 마련이다. 이는 군역 회피와 연결된다. 군역 면제가 가진 자의 특권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여서 번듯한 양반 가문임을 드러내는 족보가 필요해졌다. 이들은 그간 미처 정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족보를 다시 편찬한 뒤 관아에 탄원서를 내는 방식으로 군역을 면제받았다. 또 한 가지는 양민 증가다. 양반 특권 사회였던 조선은 양반에게 평등하게 군역을 부담시키기보다 군역을 부담할 수 있는 평민을 늘리는 정책을 썼다. 종에서 신분 상승이 이뤄진 양민들은 양반을 본떠 족보 만들기에 혈안이 됐다. ‘뼈대’를 더 굵게 하기 위해 족보 위조도 일부 시도됐다는 게 최 연구원의 분석이다. 그는 19세기 세도가였던 풍양조씨 족보를 그 예로 들었다. 최 연구원은 “한 권 가운데 일부에 불과했던 별보(別譜·한 집안이라는 근거가 확실치 않아 족보에 완전히 편입시키지 않은 상태의 기록)가 1826년에는 2권으로 늘어났다가 1890년에는 다시 1권으로 줄었다.”면서 “이는 세도가에 붙은 가문들이 크게 늘었다가 다시 구한말 사회 혼란기에 원보에 합쳐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조상을 미화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럼에도 족보 위조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최 연구원은 잘라 말한다. 그 이유로 ▲지역 유림사회가 워낙 강고해 족보 위조에 대한 상호 감시가 엄격했고 ▲문중에서 족보를 낼 때 계파 간 상호 견제가 치열했으며 ▲족보에 번호를 매겨 한정적으로 공급한 점을 든다. 이로 인해 유출이나 조작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 연구원은 “따라서 왕조실록 같은 거대 사료뿐 아니라 족보 같은 개인 기록 연구를 통해서도 신분제 등 조선조 사회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8) ‘마담 보바리’ 작가 플로베르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8) ‘마담 보바리’ 작가 플로베르

    185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에마 보바리라는 여인의 불륜을 다룬 소설이 발표되었다. 작품은 즉각 가족주의와 금욕적 도덕관을 내세우는 신흥 부르주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다음 해, 제2제국의 권위주의적 재판부는 풍기 문란과 종교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이 작품을 기소한다. 유부녀가 노골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불륜을 저지른 여인의 종부성사를 장님의 상스러운 노랫소리가 화답하는 등 작품 전체가 간통을 미화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마지못해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변호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마담 보바리’와 작가 플로베르는 예술 창작을 암암리에 규제해 오던 부르주아적 도덕의 허위를 폭로했다. ●아버지, 나는 부르주아가 싫어요 플로베르는 1821년 소도시 루앙의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장력 있던 조숙한 소년은 자신의 재능이 문학으로 꽃필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지방 부르주아였던 닥터 플로베르가 보기에 이 똑똑한 아들이 해야 할 일은 딴 데 있었다. 파리의 법대에 들어가 입신출세하고 부와 명예를 얻는 것! 1820년 왕정복고시대에 태어난 플로베르는 1880년 죽을 때까지 왕정, 공화정, 제정이라는 각종 정치 체제의 변혁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어떤 체제가 되었든, 사회의 주인공은 부르주아였다. 온갖 정치적 변혁의 한가운데에서 이 계급은 금융과 산업을 주도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갔다. 소년 플로베르는 루앙의 시민들이 각자의 이권과 보신을 위해 질투에 찬 중상모략을 일삼는 것을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다들 온순하고 근면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비정한 야욕이 도시에 넘쳐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부르주아거나, 부르주아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트거나. 청년 플로베르는 부르주아라는 말을 특정한 계층에만 국한해서 쓸 수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돈이 없고 지위가 낮은 하층계급 안에서도 의사나 변호사 같은 번듯한 직업을 갖고, 돈 있는 가문과 결혼하고, 사교계에 나가 출세할 수 있으리라는 부르주아의 삶이 하나의 꿈으로 확실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란 재정상태가 아니라 정신상태의 이름이어야 했다. 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는 미덕의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부르주아’라는 말에는 프록코트를 입은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작업복을 입은 부르주아들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써 보냈다. 플로베르는 1843년과 1844년 연이어 일어난 치명적인 신경발작을 겪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아예 부르주아적 삶과 인연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법대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포기하고 문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학계 안에서도 부르주아적 태도가 판 치고 있었다. 작가들은 기존의 문학잡지나 아카데미를 부와 명예를 향한 도약대로 삼아 그 안에서 자족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의 격변기마다 부화뇌동하면서 사회문제, 대중의 교화, 진보, 민주주의 같은 판에 박힌 소리만 되풀이했다. 사실주의를 내세우면서 서민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하층민들을 동정할 뿐이었다. 플로베르는 이들을 보며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자신의 길은 분명했다. 부르주아적 세계관을 버릴 것!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창조할 것! 플로베르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오직 문학에 자신의 삶을 다 바치기로 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이런 플로베르를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모시며 평생 그의 작품을 가까이 했다. ●“나는 보바리다”-자살 장면 쓰면서 구토 플로베르는 본격적인 첫 작품을 구상하면서 안토니우스라는 성인에게 끌렸다. 안토니우스는 250년 무렵 이집트 북부에서 태어난 기독교 초기의 성자다. 그는 사막에서 고행하며 각종 이교도의 신들과 자기 안의 탐욕, 질투, 회의에 맞서 신앙을 지켜냈다. 플로베르는 이 성인의 삶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끊임없이 유혹을 마주하면서 수도해야 하는 성인처럼, 그 자신도 계속해서 부르주아적 태도와 취향을 마주하며 글을 써야 했다. 문학에 인생을 건다는 것은 그런 적극적 대결이 필요한 일이었다. “진주는 조개의 병에서 생기는 것이라지만 문체는 아마 그보다 더 깊은 고통을 통해 나오는 것일 거요. 예술가의 삶, 아니 예술 작품의 완성도 그렇지 않겠소? 거대한 산을 오르는 일처럼 말이오. 얼마나 집요한 의지가 필요하겠소! 그 산 정상은 창공 속에서 순수함으로 빛나고, 그 엄청난 높이는 공포를 가져다주지. 우리는 더듬더듬 바위에 손톱들을 찢겨가면서, 외로움 속에 눈물을 흘리며 계속 걸어가지. 우리는 욕망의 백색 고통 속에서 소멸하는 거요. 정신의 격류가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얼굴을 태양으로 향한 채!”(편지, 1853년 9월 16일) 제목은 ‘성 앙투안의 유혹’. 그는 3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의 이야기는 서정, 인물의 움직임, 구성 어느 것도 새롭지 않았다. 초고를 본 친구들은 상투적인 반복과 무질서한 구도에 진저리를 쳤다. 플로베르는 성 앙투안을 쓴다면서 결국 자신의 의식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자신도 타인의 삶, 다른 존재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여느 부르주아들과 다를 바 없었다. 플로베르는 작가의 개성과 정념이 지배하는 문학은 예술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플로베르는 예술이 제2의 자연과 같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불가해한 것. 숲 속에 살아 있는 수많은 나뭇잎과 초록의 속삭임처럼 무한하면서도 준엄하게 존재하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작가란 자신의 경험과 정념을 지움으로써 이 제2의 자연을 창조하는 존재여야 했다. 플로베르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기술하는 글쓰기, 그것이 바로 작가 주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는 나밖에 모를 거요. 주제, 인물, 효과 등등 모든 것이 나의 바깥에 있거든.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오. 예술과 예술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편지, 1852년 7월 26일) 그렇게 해서 플로베르는 자신과는 출신도, 성(性)도, 교육 배경도 완전히 다른 시골 유부녀 에마 보바리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그는 에마와 그녀 이웃들의 속물주의가 주는 혐오감을 견디며, 작품 속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도록 6년 동안 쉬지 않고 세상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에마가 비소를 먹고 자살하는 장면을 쓰다가 구토를 하기도 했다. 플로베르는 종종 “나는 에마 보바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도승처럼 철저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소멸시키고 에마 보바리라는 또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시대의 허위와 대결 생애 마지막에 플로베르가 도전한 것은 두 명의 필경사 이야기다. 최신의 근대 학문을 다 섭렵해 보기로 한 부바르와 페퀴셰. 하지만 저명하다는 원예학, 지질학, 의학, 고고학, 심리학, 교육학 안에는 논리적 모순이 너무나도 많았다. 게다가 각각의 지식들은 현실에 적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정보를 추상적으로 나열하고 있었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근대 지식의 한계에 대항하면서 진리와 미,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작품의 부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전서’다. 플로베르는 이 작품을 위해 1500권이 넘는 학술서들을 철저히 검토했다. 근대적 학문에 맹종하면서 인류의 진보를 신봉하는 부르주아의 어리석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자 한 것이다. 부바르와 페퀴셰의 인생에는 그 어떤 극적 드라마도, 감동적인 사건도 없다. 오직 실험과 논증이 백과사전처럼 한없이 펼쳐진다. 오락으로 읽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논리적인 대화의 연속이었다. 한가한 부르주아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역사소설, 연애소설과 같은 소설의 전통적 구분은 이 작품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미완으로 붙이게 된 뒷부분 개요에서 서술 방법과 작품 분석을 소개하기도 했다. 소설 안에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해석하다니! 상상물인 소설과 현실의 작가가 뒤섞여 버린 것이다. 이렇게 플로베르는 19세기 문학의 온갖 관습을 무너뜨려 버렸다. 이 최후의 싸움은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면서 근대 학문의 어리석음과 부르주아 문학의 허위와 대결했다. 오선민(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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