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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러지” “얼마 받기에”… 영남의 진보·호남의 보수는 늘 표적이 된다 [정중하고, 세련된 혐오사회]

“버러지” “얼마 받기에”… 영남의 진보·호남의 보수는 늘 표적이 된다 [정중하고, 세련된 혐오사회]

유대근, 최훈진, 이주원, 이근아 기자
입력 2022-08-17 17:58
업데이트 2022-08-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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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혐오의 피해자들

한국 사회에서 혐오는 더이상 특정 소수자 집단만 겪는 일이 아니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혐오 정서가 일상 전반에 퍼져 버린 탓이다. 피해 정도도 상당하다.서울신문 스콘랩은 평범한 이웃들이 일상에서 겪는 혐오 피해 이야기를 들어 봤다. 혐오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이들이 겪는 고초는 언제든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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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정당과 진영의 쏠림세가 심한 지역에서 반대 성향 활동을 하는 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예컨대 보수 성향이 짙은 대구·경북(TK)에서 진보 활동을 한다거나 진보세가 강한 호남에서 보수 정당 소속으로 뛰는 일이 그렇다. 일상적 혐오도 감내해야 한다.

대구 출신인 서창호(49)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는 30여년간 고향에서 인권·노동운동을 했다. 보수 텃밭인 대구에서 진보 시민단체는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들에게 눈엣가시다. 최근에는 그 거부감이 더 세졌다. 그는 지난달 대구시청 앞에서 시 규탄 시위를 준비하다가 제지당했다. 수많은 집회를 열어 왔던 곳인데 최근 홍준표 시장이 이를 금지했다.

서 활동가는 “다른 지자체에서는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시정에 반영되는데 대구에서는 기본권인 집회조차 막히니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1995년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당선된 민선 대구시장 5명은 모두 보수성향이다. 현재 시의원의 97%(32명 중 31명)도 국민의힘 소속이다.

서 활동가는 사석에서 지인에게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버러지’라는 폭언을 듣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구 북구 이슬람 사원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탈레반을 지지하는 서창호’라는 공개적 혐오도 당했다.

개인을 겨냥한 혐오는 인권운동가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진보 정책을 두고 무작정 비난하는 건 견디기 어렵다. 예컨대 학생인권조례는 광역 지자체 17곳 중 7곳에서 제정됐지만, 대구에서는 논의조차 어렵다. 시 의회의 반발이 심해서다.

전남 화순이 고향인 김용갑(55·건설업)씨는 평생 호남을 벗어난 적 없는 토박이다. 하지만 20년째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 국민의힘의 당원(현 중앙위원회 연합회 전남회장)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보수정당에 가입한 이유는 간단했다. ‘민주당 깃발’만 꽂으면 경쟁 없이 공직선거에서 당선되는 분위기가 지역 발전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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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에서 보수당원으로 살다 보면 수시로 혐오와 마주한다. 식사 자리에서, 사우나에서, 체육관에서 불쑥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선거철에는 더하다. “얼마나 받기에 국민의힘을 위해 저 짓(선거운동)을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보수당을 거들면서 호남에서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거냐”는 말까지 들었다. 가족들도 “정당 활동을 그만하라”고 말릴 정도였다.

혐오표현의 피해자이지만 그는 호남인들의 반(反)보수당 성향을 이해한다. 산업화 과정에서 지역이 소외됐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체화한 정서인 만큼 쉽게 설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잘못한 건 인정하고, 틀린 사실관계는 바로잡으며 주변을 이해시킨다. 김씨는 “지역 갈등뿐 아니라 세대·성별 갈등 등 국민 분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면서 “수준 높은 정치를 해야 혐오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론화해 봤자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니 그냥 참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죠.”

정보기술(IT) 업체 여직원 김모(27)씨는 남성이 대다수인 남초(男超) 직장에서 숱한 혐오·차별을 겪었다. 회사 직원 30여명 중 여성은 김씨를 포함해 단 둘이다.

특히 분위기가 풀어지는 회식 때는 혐오의 장이 열린다. 남직원들은 김씨를 향해 “어차피 애 낳으면 그만둘 건데 굳이 여자가 승진을 왜 해야 하느냐”는 말을 한다. 외모 지적은 남성 직원의 특권이다. ‘주름이 늘었다’, ‘피부가 탄력을 잃어 간다’는 등의 평가도 서슴지 않는다.

배려를 가장한 혐오는 더 대응하기 어렵다. 사무직인 김씨는 일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현장 근무를 자원했다. 하지만 김씨의 상급자는 “여자니까 위험하니 문서나 보라”며 거절했다.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비롯한 명백한 차별이었다. 김씨는 “회사에서 성평등 교육을 하지만 효과가 없다”면서 “남직원들 스스로 차별과 혐오 행위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맘충. 언젠가부터 엄마(맘·mom)를 벌레(蟲)에 비유하는 표현이 온라인에서 공공연히 쓰인다. 모성과 아이를 혐오하는 감정은 익명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수많은 엄마들이 현실에서 맞닥뜨린다.

오은선(35)씨도 다섯 살배기 아이를 키우며 혐오를 적지 않게 겪었다. 지난 13일에는 동네 수영장에서 운동한 뒤 샤워실에서 아이를 씻겨 주며 일상적 대화를 하는데 고성이 들렸다. 한 중년 여성이 “너무 시끄럽다. 애나 조용히 씻기고 나가라”고 소리친 것이다. 엄마와 아이의 목소리보다 갑절은 더 쩌렁쩌렁했다. ‘나와 아이가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 거구나.’ 오씨는 경험에 기대어 직감했다.

혐오 시선에 몇 차례 부딪히고 나면 엄마들은 잔뜩 위축된다. 외식하려고 식당을 찾을 때는 ‘노키즈존’(영유아나 어린이의 동반입장을 불허하는 식당)은 아닌지 늘 살펴야 한다. 노키즈 식당에서 반려동물을 안고 있는 손님을 보면 ‘아이가 개보다 못한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노키즈존을 아동 차별행위로 규정했다. 그러자 최근엔 ‘노 배드 패런츠 존’(No Bad Parents Zone)이라 써 붙인 상점이 늘었다. 아이가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어다니면 퇴장조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점에서 언뜻 세련돼 보이지만 통제할 수 없는 아이들의 속성을 무시한 조치이기에 혐오 요소가 숨어 있다.

오씨는 “엄마들은 공공장소에서 비난을 받아도 아이가 곁에 있으면 대응하기 어렵다”면서 “이 때문에 혐오하기 쉬운 상대로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악플(악성 댓글)은 유명인만 귀롭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겨냥하기도 한다. 음악가 이승빈(21)씨는 지난해 4월 ‘무지개 대한민국’이란 노래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그대와 내가 좋아하는 색이 달라도 서로 미워하지는 말자’는 노랫말처럼 혐오를 멈추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하지만 무지개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일부 보수 성향 네티즌들은 이씨를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남페미’(남성 페미니스트)로 몰아 공격했다. 보수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유되면서 악플이 1초에 4개씩 올라왔다. 또 진보 네티즌들은 음악의 배경 이미지에 태극기를 맨 남성이 있다며 이씨를 ‘태극기 세력’으로 규정했다.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창작자를 모욕했다. 이씨는 불면증과 우울증이 찾아와 정신건강의학과까지 다녔다.

하지만 이씨는 “혐오 가해자를 혐오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혐오자들을 인터뷰해 봤는데 그들도 나름대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충분한 공감과 치유를 받지 못해 혐오감정이 심해진 것 같았다”고 이해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혐오 피해는 자존감을 낮출 뿐만 아니라 자신을 혐오하는 자기비하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면서 “피해자가 트라우마에 빠지지 않으려면 혐오와 차별을 당한 게 본인 탓이 아님을 주변에서 말해 줘야 한다”고 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세명대 기획탐사 디플로마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스콘랩 유대근 기자
최훈진 기자
이주원 기자
이근아 기자
2022-08-18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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